36. 올 테면 오라고 해!
2018.04.08.
어슴푸레한 불빛이 눈꺼풀을 자극했다.
주변이 너무 고요한 나머지 가습기 돌아가는 소리가 너무도 선명히 들려왔다.
도대체 여기가 어딜까.
눈을 뜨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순간을 너무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던 탓이다.
코와 입을 틀어막은 커다란 손에 서서히 정신을 잃었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지금도 생생하다.
“음…….”
목이 따끔 따끔하고 아파 절로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이쯤 되니 죽은 듯 가만히 있고 싶어도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려야 했다.
그렇게 힘겹게 눈을 뜨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적당한 조명이었다.
도대체 어딜까. 그녀의 집 거실 조명은 이처럼 은은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때 조금 멀리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데 몸에 이상이 없는 거 맞습니까?”
낮은 음색이었지만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
“네. 육체적으로는 전혀 이상이 없습니다. 아마 조금 있으면 깨어나실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그러는 게 좋을 겁니다.”
겁도 없이 의사를 협박하는 목소리.
세상 무서울 게 없는 승현이었다.
그토록 원망스럽고 얄미운 목소리건만 다름 아닌 그 목소리에 빛나는 떨리던 심장 끝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진짜…… 너무 한심해…….”
살았다는 안도감보다 그의 낮은 울림 한 번으로도 이토록 안전하다 느끼는 자신의 처지가 무척이나 처량 맞았다.
그렇게 뒤통수를 맞고도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꼴이라니, 기가 막혀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빛나는 자꾸만 눈이 감겼다.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지만 그가 있다는 안도감에 극심한 공포로 인해 긴장되어 있던 몸이 노곤하게 풀려버린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잠에 빠져 들어버렸다.
* * *
의사에게 빛나의 몸에 이상이 없다는 사실을 몇 번이고 확인하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승현은 다시 다른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위씨 집안 주치의로 있는 하늘 병원 박 원장이었다.
그리고 결국 내일 빛나를 트랜스퍼 하겠다는 확답을 받고서야 전화를 끊었다.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엘리스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튀어 나왔다.
“오늘은 여기서 밤을 새실 작정입니까? 내일 출근도 해야 하는데, 원하신다면 경호원을 붙이겠습니다.”
몇 시간째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여기저기 전화를 해대는 승현을 보며, 이 기세라면 날밤을 꼴딱 새겠구나 하는 마음에 엘리스가 먼저 선수를 쳤다.
하지만 어림없는 일이다.
“하루 날 샌다고 안 죽어.”
승현은 단호히 거절해버렸다.
이에 엘리스는 소리 없는 비명을 주워 삼켜야 했다.
왜냐고?
밤을 새운 승현의 저조한 컨디션을 견뎌야 할 내일이 두려워서다.
평소 잠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충분한 잠을 자지 못한 승현은, 잠을 자지 못한 한두 살배기 어린아이보다 더 피곤해지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컨디션이 좋은 날도 이리로 튈지 저리로 튈지 몰라 엘리스는 늘 항시 대기 상태였다.
그런데 심지어 잠이 부족한 승현을 감당하기란…….
“하…….”
절로 한숨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상황이니 상황이니만큼 제발 잠 좀 자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하지만 경호원은 필요할 것 같아. 내가 24시간 빛나 곁에 붙어 있을 순 없으니까.”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신 것 같아요. 사실, 조금 전 그 형사도 침입 흔적이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아직 유 변호사님 말은 들어보지 못했지만, 너무 스트레스를 받은 나머지…… 그러니까 오늘 그 일 때문에 잠시 정신을 잃은 것일 수도…….”
순간 엘리스는 흠칫 놀라 말을 끊었다.
평소 선인지 악인지 전혀 구분할 수 없는 승현의 아몬드형 눈매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존재를 확실히 했기 때문이다.
장난기를 거둬들인 그의 진지한 눈동자는 ‘악’이었다.
검은 그 눈동자가 그녀를 날카롭게 쏘아보자 엘리스는 잠시 얼어붙었다.
“당신은…… 내가 바보로 보이나 보지?”
사악한 눈동자만큼이나 날이 선 목소리다.
이제야 조금 전 형사와 의사가 어떤 심정으로 그의 앞에 서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빛나는 절대 그렇게 문단속을 하지 않아. 사람이 거실에 쓰러져 있는데 불이 꺼져 있다, 이게 말이 돼? 빛나가 집에 들어왔다면 분명 거실 불부터 켰을 거라고. 그 말은 곧, 거실 불도 켤 여유가 없었단 말이 되는 거야.”
“하지만 침입 흔적이 전혀 없다고…….”
“그러니까 더 이상한 거지. 내가 봐도 집 안은 평소 빛나 성격대로 깔끔하게 정리정돈 되어 있었거든. 물건을 뒤진 흔적이 전혀 없단 말은 절도가 목적이 아니라는 거지.”
“절도가 목적이 아니라면…….”
“사람이 목적인 거야. 그런데 빛나 몸에 이상이 없다며. 외상도 내상도 없다며. 세 번 네 번을 확인해도 앵무새처럼 이상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잖아. 이러니 내가 안심이 돼?”
엘리스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일리 있는 말이다.
아니, 확실히 타당성이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소름이 돋았던 건, 이런 상황에서 이성을 잃고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던 사람이 그 와중에도 상황 판단을 정확히 했다는 것이었다.
의사에게 몇 번을 확인하고, 형사를 괜히 쥐 잡듯이 잡았던 게 아니었다.
승현은 이미 모든 상황에 대한 판단을 정확히 내렸고, 그들보다 더 큰 그림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또 올 거야. 사람이 목적이면, 분명 또 올 거라고…….”
그의 중얼거림에 엘리스는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 * *
“우아-앙! 우리 빛나! 우리 빛나!”
들어오기 전부터 쩌렁쩌렁 울리는 ‘우리 빛나’에 진짜 빛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노곤하던 몸이 순식간에 찌릿 곤두섰다.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이정이 뛰어 들어왔다.
“어디 보자. 어디 다쳤니? 엉? 어디야! 그리고 어떤 새끼야! 엉?”
빛나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이정은 이불을 확 들추고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훑어보며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그러자 안 아프던 몸이 다 뻐근하고 찌릿 편두통이 찾아왔다.
“아, 이정아. 나 멀쩡해. 제발 소리 좀 낮춰줘. 골이 지끈지끈해.”
“야, 내가 얼마나 걱정이 됐으면 그랬겠니! 갑자기 전화했다가 너 이렇게 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야기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엉?”
이정이 빨개진 눈시울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거창하게 말하지 않아도 이정이 얼마나 정신없이 달려왔는지는 그녀의 행색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거실에서 신는 털이 보송보송한 호피 무늬 슬리퍼를 신고 있었으니 말이다.
빛나의 시선이 자신의 슬리퍼로 향하자 이정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야, 그래도 맨발로 안 뛰어온 게 어디냐. 이것도 신발은 신발이더라. 밖에 칼바람이 부는데…… 하나도 안 추워요. 발이 아주 따닷해. 히히…….”
그 말에 빛나가 풋, 웃고 말았다. 이에 이정은 그녀를 품에 안고 다독인다.
“얼마나 놀랬니, 우리 빛나. 나도 이렇게 놀랐는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몸서리를 치며 이정은 눈시울을 붉혔다.
머리도 산발이고, 옷차림도 거의 잠옷에 가까운 행색이었지만 오늘만큼 이정이 예뻐 보였던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만큼 이정의 진심 어린 걱정이 그녀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숨이 턱 막히는 줄 알았다. 오면서 오만 생각 다 했다고.”
이정이 흩어진 그녀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다정하게 말하는데 문이 열리며 승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낮에 보았던 슈트 차림인 것으로 보아 그는 아직 집에 들어가지 못한 모양이다.
하긴, 약속대로 그녀의 집으로 왔을 테고 기겁해서 병원까지 숨도 안 돌리고 달렸을 테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이렇듯 보지 않아도 승현의 일거수일투족이 다 예상되었다.
그만큼 서로에게 익숙해져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상에, 승현 씨…….”
하지만 오늘 승현의 슈트 차림을 처음 본 이정은 순식간에 입이 떡 벌어졌다.
그런 이정의 반응을 읽은 그가 먼저 선수를 쳐 입을 열었다.
“아, 오늘 일이 있어서…… 그런데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아니, 빛나가 이렇게 병원에 있다는데 어떻게 안 와봐요? 가슴이 철렁해서 신발도 제대로 못 신고 왔다고요. 오다 신호위반도 사분히 두서너 번 해주시고. 덕분에 며칠 후면 범칙금이 좀 날아오겠지만…… 쩝.”
이정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지만 여전히 번쩍이는 눈은 승현의 멀끔한 모습에서 떼지 못한 채였다.
그러나 승현은 그런 이정에게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은 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게 우선이었으므로.
“빛나야, 몸은…… 몸은 괜찮아? 어디 아픈 데 없어?”
그녀를 병원에 데리고 온 이후 처음 일어난 상태라 승현은 그것부터 확인하며 다가섰다.
그러면서 앞선 걱정에 저도 모르게 습관처럼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그러쥐었다.
“괜찮아.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아.”
자신의 손에 닿은 그의 체온이 너무 애틋하고 따뜻했지만 빛나는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며 손을 뺐다.
이에 승현은 그제야 그들의 처지를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풀어야 할 오해.
그렇게 또 쌓여버린 오해가 운명의 장난처럼 그들을 또 한 번 등 돌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그런 오해보다 지금 당장은 빛나의 안전이 먼저였다.
그녀를 영원이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과오보다 그의 머릿속에 더 생생히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너 방금 정신 차려서 힘든 거 아는데. 혹시, 기절하기 전 상황…… 기억 나?”
승현이 조심스레 다시 한 번 물어왔다.
기억이란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지고 변해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위장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전에 그녀의 기억을 잡아야 했다.
“모르겠어. 잘 기억이…… 근데, 사람이 있었어. 남자가…….”
“남자? 어떤 남자? 얼굴 봤어?”
“아니.”
“키는? 체격은?”
무의식중에 그때의 공포가 되살아나자 빛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승현은 그런 그녀의 반응 하나 하나를 전부 읽어내고 있었다.
힘들어 하는 그녀를 위해 이쯤에서 멈추어야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잘 생각해봐. 그 남자를 잡을 수 있는 단서가 있는지.”
가슴 한 켠에 남은 정체 모를 불안감이 그를 미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하는 생각.
정확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그 ‘설마…….’라는 단어 하나가 그를 조바심 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의외로 대답은 빛나가 아닌 다른 곳에서 흘러나온다.
“근데 말이야…… 나, 이거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 것 같아.”
이정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입은 검은 롱 카디건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소름 돋는다는 듯 몸을 떨었다.
그러곤 승현과 빛나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그보다 더 심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협박당하고 있는 것 같아, 마담M한테.”
그 정확성 떨어지는 ‘설마’가 사람 잡는 순간이었다.
이정이 너무도 진지하고 심각하여 빛나는 순간적으로 승현의 표정을 살폈다.
자, 그렇다면 진짜 마담M의 반응은 어떨까.
의외로 그는 팔짱을 낀 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빛나는 이정의 말에 단 1%의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안다.
물론 승현이 마담M란 신분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친 건 사실이지만 그것과 이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쯤에서 빛나가 이정의 생각을 고쳐줘야 옳았다.
더 이상 겁을 먹고 있는 이정을 지켜 볼 수만은 없었으므로.
“이정아, 사실은 말이지…….”
“왜,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협박…… 당하고 있다고?”
그렇게 연 입이건만, 빛나가 사실을 이야기하기도 전에 승현의 진지한 목소리가 그 흐름을 가로막았다.
잠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협박이 확실해요?”
승현이 재차 물었다.
그는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누군가에게 협박당하고 있다는 말이 사실인지를.
그러자 이정이 의자를 끌어 앉으며 유독 불안한 표정으로 입을 떼기 시작했다.
“처음엔 확실치 않았어요. 아니 확실치 않다기보다는…… 아시다시피, 저 사회부 기자잖아요. 그러다보니 공갈 협박 정도는 오다가다 듣는 거라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어요.”
“어떤 식으로?”
“커피 한 잔과 함께, 메모를 받았거든요. 지나친 호기심은 화를 부른다는…….”
그 말에 승현의 눈썹이 곤두섰다.
그리고 빛나는 소름 돋는 팔을 쓸어내렸다.
도대체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런 식의 협박이 있을 수 있나 싶어서다.
“그 메모…… 가지고 있습니까?”
“네. 혹시 몰라서 회사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어요.”
“제가 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근데요, 그게 다가 아니에요.”
“뭐야, 또 있단 말이야?”
빛나가 놀라 거의 비명을 지르듯 물어왔다.
동시에 머리가 지끈 아파온다.
다시금 그 두려운 순간이 떠올라 심장이 두근거리고 혈압도 급상승하는 듯했다.
“나, 거칠기로 유명한 사회부 기자야. 그것도 S일보. 그 정도는 협박은 애교라고. 그리고 꼭 KMK컴퍼니 건이란 보장도 없었고. 내가 쑤시고 다닌 게 어디 한두 개여야지. 그런데…….”
이정이 잠시 말꼬리를 흐린다. 그러더니 다시 한 번 카디건을 여미며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며칠 전에…… 교통사고가 날 뻔했어요. 차가 일방적으로 제게 돌진했다구요.”
검게 가라앉은 이정의 눈동자는 그 사건을 상기시키는 듯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리고 평소 씩씩한 그녀답지 않게 목소리도 떨렸다.
“세상에……그걸 왜 이제 이야기해! 그래서, 다친 데는 없고?”
“응. 운이 좋아 잘 피했어. 무릎 긁힌 정도 빼곤 멀쩡해.”
“이게 멀쩡한 거야? 그게 운이야? 도대체 얼마나 다쳐야 정신 차리고 몸조심할래?”
빛나가 속이 상한 듯 그녀를 타박하며 팔을 벌리자 이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안겨들었다.
“그래서 빛나에게 이런 사고가 있다고 하자마자 달려온 거예요. 나도 그렇고 빛나도 그렇다면…… 이거, 우연 아니잖아요. 우리 두 사람 사이에 공통분모가 뭐가 있어요? KMK컴퍼니밖에 더 있어요?”
그러곤 조금 전 그 말을 다시 한 번 읊어냈다.
“확실해요. 우리 협박당하고 있는 거라구요, 마담M한테.”
하지만 승현은 자신이 오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보다, 그들이 협박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집중했다.
이제야 이야기가 된다.
역시, 그의 예상대로 침입자의 목적은 절도가 아닌 빛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기는 의문 하나.
최종 목적인 그녀를 눈앞에 두고 왜 그냥 나갔을까.
그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이로써 확실해졌다.
“다시…… 올 거야.”
그랬다.
목적을 이루지 못했으니 범인은 빛나에게 다시 찾아오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승현은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놈이 다시 왔을 때를 생각해 확실히 대비해두어야 하니까.
그녀를 잃을 수도 있다는 그 공포를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으니까.
“빛나야, 나 잠깐 나갔다 올게.”
“걱정 마세요. 내가 있으니까.”
이정의 말에 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갔다. 그리고 그가 나가자 빛나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아니, 범인은 나왔는데 끔찍한 기억 더듬어 뭐해? 마담M을 털면 되는데. 너 오늘 그 여자 만났잖아. 어떻게 생긴 년이야? 내가 아주 탈탈 털어서 세상에 다 까발릴 거야, 그년!”
“이정아…….”
“가만 안 둘 거라고! 나 S일보 서이정이야! 사람 잘 못 건드렸어! 협박하고 자동차로 밀면 내가 밀릴 줄 알았나 보지? 나 잡초 같은 인생이야! 어림없어! 내가 아주 그냥…… 아, 목말라.”
조금 전 옷깃을 여미며 떨던 그 공포심은 어디로 가고, 너무 열을 올리며 말을 많이 한 나머지 목이 마른 이정은 작은 테이블에 있는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말을 이었다.
“말 좀 해봐! 어떻게 생긴 년이던? 이뻐? 흥, 지가 이뻐봤자지. 내가 사진 개판으로 찍어서 오징어마냥 기사 내줄 거야!”
얼마나 열이 받았는지 이정의 최대 무기 나왔다.
제아무리 명품 미모를 가진 배우들도 피해가지 못한다는 사진 개판으로 찍어 오징어마냥 기사 내주기!
“이정아, 그게 말이야…….”
벌컥. 벌컥.
흥분한 이정은 빛나가 말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아! 어디서 사람 목숨으로 협박질이야!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내가 아주 그년을…….”
“년이 아니고…… 놈이야, 이정아.”
“뭐시라?”
빛나의 말에 이정은 턱으로 흘러내리는 물을 닦으며 되물었다.
그러더니 다시 느린 동작으로 생수를 입으로 가져가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라는 얼굴로 바라본다.
“여자가 아니고 남자였다고.”
생수를 들이켜는 이정의 눈이 커졌다.
그러곤 뜻밖의 소식에 들이켠 물 한 모금을 미처 삼키지 못한 채 입에 머금고 되물었다.
“음?”
이젠 정말로 이정의 오해를 풀어줘야 했다.
그들이 협박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한 듯했으나 그 누군가가 적어도 마담M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래서 빛나는 오늘 그녀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그 사실을 제 입으로 털어놓기에 이르렀다.
“마담M이 바로…….”
“…….”
“……승현이였어.”
주르륵.
이정은 너무 놀란 나머지 머금고 있던 물을 그대로 뱉어냈다.
그러고도 그녀는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는 듯 턱에서 흐르는 물을 닦아낼 생각도 하지 못했다.
***
한편, 그 시각.
밖으로 나온 승현은 엘리스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게 정말 협박이라면, 그래서 그동안 본부장님이 예상하신 그게 맞다면…… 진짜 위험한 건, 유 변호사나 서 기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녀는 침착성을 잃고 의외로 격한 반응을 보였다.
정말 승현이 말한 대로 누군가 KMK컴퍼니 건으로 빛나와 이정에게 위협을 가하는 거라면 그들로 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오히려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겠지. 진짜 적은 빛나나 서 기자가 아니라 바로 내가 될 테니까.”
“맞아요. 지금까지는 철저히 비밀로 해 몰랐다지만, 이젠 공식 석상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고 일단 회사 직원들도 본부장님 얼굴을 아는 이상 터져 나오는 기사를 막는다고 본부장님 신분이 감춰지는 건 아니니까. 이젠 진짜로…… 마음만 먹으면 마담M이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을 테니까.”
“알아. 지금까진 몰라서 내가 그 협박 대상에서 열외된 것일 뿐, 이제부턴 그 위협이 나를 향할 거라는 거…….”
머리 좋은 승현이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태연한 그를 엘리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승현이 돌아서며 중얼거리듯 흘린 말에 엘리스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참고 산 게 30년이야. 올 테면 오라고 해.”
세상에, 지금 이게 참고 산 거란다.
이것도 기암할 일인데, 승현은 그렇지 않아도 어둡게 가라앉은 눈매를 더욱 사악하게 빛내며 다음 한마디를 씹어내듯 뱉어냈다.
“제대로…… 폭발해줄 테니.”
대 지각변동이 예고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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