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우연을 가장한 악연
2018.04.04.
“말도…… 안 돼…….”
다시 생각해도 정말 말도 되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빛나뿐 아니라 곁에 있던 은지도 동작 그만 상태다.
마치 그럴듯한 영화의 한 장면에서 정지 버튼을 눌러놓은 것 같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먼저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넋이 나간 빛나의 까만 동공이 승현이 자기소개를 하며 이 자리의 가장 핵심인 테이블 중앙 자리에 앉는 모습을 조용히 좇았다.
그 찰나의 순간이 영원 같았다.
눈을 감았다 뜨면 신기루처럼 사라질 환상 같았단 말이다.
하지만 그가 의자에 완벽하게 착석한 순간, 빛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정말, 꿈이 아닌 현실로.
“위승현…… 이었어.”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곁에 있던 은지도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빛나는 의자에 앉는 것도 잊어버린 채 승현을 바라보았다.
평소 즐겨 입던 편안한 캐주얼을 벗고 완벽하게 핏 되는 스트라이프 슈트로 갈아탄 그의 모습은 이렇게 숨 막히는 상황에서도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딱 벌어진 어깨와 긴 팔다리는 이곳이 회의실이 아닌 런웨이가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어디 그뿐인가.
평소 비글미를 연상케 하며 이마를 덮고 있던 그의 베이비펌이 살짝 뒤로 넘어갔다.
덕분에 그의 매력적인 아몬드형 눈매가 더욱 빛을 발했다.
성공한 사업가처럼 격식에 맞는 완벽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자유분방한 분위기는 마케팅 업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루키 ‘마담M’과 완벽하게 부합되는 모습이었다.
이런 순간에도 위승현 특유의 반항기가 톡톡히 제 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유변…….”
놀란 은지가 더 놀란 빛나의 손을 끌어 자리에 앉혔다.
그렇지 않으면 마냥 서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리에 앉혀진 빛나는 여전히 시선을 승현에게서 떼지 못하고 있었다.
“많이 놀라셨을 줄 압니다. 하지만…….”
드디어 그가 입술을 떼었다.
그러나 빛나에겐 그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한 공간에 있지만 마치 전혀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겨버린 느낌이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
-우리 빛나 꿈이 내 꿈이지.
그녀의 꿈이 자신의 꿈이라고 말했던 남자.
-내가 저 세상, 너한테 줄 수 있어.
부러움으로 가득 찬 그 세상을 기꺼이 그녀에게 주겠다던 남자.
그렇게 세상이 뒤집혀도 늘 제 편이 되어줄 것 같았던 그녀만의 연인이, 이젠 저 먼 자리에 앉아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이 어이없는 게임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철저히 농락당한 느낌이었다.
현기증에 눈앞이 빙글빙글 돌고, 호흡곤란이 찾아왔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먹을 꼭 틀어쥐고 있는 그 모습에 승현의 얼굴이 대번에 어둡게 가라앉았다.
예상은 했지만 빛나의 상태가 더 좋지 않았던 것이다.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걱정스러움에 지금 당장이라도 일어나 덜덜 떨고 있는 그녀의 자그마한 주먹을 꼭 감싸주고 싶었다.
하지만 승현이 앉은 자리는 막중한 책임감과 의무란 접착제로 범벅이 된 듯, 도무지 일어설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점심 먹은 게…… 잘못된 모양입니다. 계속 진행…… 하십시오. 저는 상관 마시고.”
빛나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것이 빛나가 이 협상 자리에서 한 마지막 발언이었다.
그 후로는 은지가 모든 걸 주도했다.
하지만 빛나가 없는 상황에서 그 자리는 진행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었다.
피를 말리는 눈치작전에 숨 막히는 언쟁이 오갈 것으로 예상했던 그 미팅은 궁극적인 주제는 꺼내보지도 못한 채 마무리가 되었다.
결국 승현은 ‘다음 기회에’라는 말로 끝을 내야 했다.
더 이상 진행했다간 빛나가 곧 질식사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평소 유빛나라면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을 행동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말아야 할 그녀가 중심을 잃고 제대로 쓰러졌다.
프로답지 않은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미팅의 끝을 알려오는 승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죽어도 끝까지 그 자리를 지켰어야 옳았지만 밀려드는 호흡곤란이 그녀를 무아지경으로까지 몰아갔다.
사고할 수 있는 뇌의 90프로가 죽어버린 느낌이다.
이 순간처럼 스스로가 무능력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듯하다.
엘리베이터에 오르려는데 누군가 그녀의 팔을 붙들고 돌려 세웠다.
“빛나야, 얘기 좀…….”
승현이었다. 뒤쫓아 나온 그가 애써 그녀와 눈을 마주치려 했지만 실패했다.
10년 전 그 표정을 또 한 번 볼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고.
하지만 그러한 노력이 무색하리만큼 빛나는 더한 외면으로 그의 가슴을 후벼 팠다.
차라리 10년 전 그날이 더 나을 뻔했다.
적어도 그때는 그를 마주 보고 대화라도 하지 않았던가.
“왜…… 말 안 했어? 그게…… 너라고?”
여전히 그녀는 승현의 시선을 피한 채 입만 움직여 물어왔다.
그 모습이 마치 그를 향한 완벽한 거부 반응 같아 가슴 한쪽이 쿵 내려앉았다.
“말…… 안 한 게 아니야. 할 수가…… 없었던 거지.”
그랬다. 빛나가 이 사건을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그녀가 마담M이란 캐릭터에 집착하면 집착 할수록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승현의 가슴도 바짝바짝 메말라갔다.
하지만 진실을 말할 순 없었다.
그것은 그가 마담M으로 이 자리에 서기까지, 회사와 오갔던 유일한 금기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전부 설명할게. 그러니까 시간 좀…….”
그녀가 눈이라도 마주쳐 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빛나는 여전히 시선을 돌려버린 채 단호한 목소리로 그의 손을 내쳤다.
“나중에…… 지금은 그럴 기분 아냐.”
결국 그녀는 나중을 기약했다.
하지만 말만 그렇게 했을 뿐 그마저도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빛나는 승현의 품을 벗어나 도망치듯 날아가 버렸다.
마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 * *
오늘 협상은 결렬되었다.
아니, 이렇다 할 협상안이 오가지도 않았기 때문에 결렬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빛나가 하얗게 질려 얼음이 되어버린 순간, 모든 것이 멈추었다.
혼자 남은 승현은 막막한 이 상황에 피곤한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 끝을 본 느낌이다.
승현은 이 빌딩 앞에서 그녀를 본 날을 떠올려 보았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직원들이 서명운동을 벌인다기에 지나가가 들른 그곳에 우연인 듯 필연처럼 그녀가 있었다.
축축하게 젖어버린 남자의 어깨에 우산을 드리우며 따듯한 커피 한 잔을 건네던 그녀가 말이다.
순간, 예감 아닌 예감을 했었다.
그녀가 보인 그 단순한 호의가 어쩌면 그의 숨통을 터줄 절호의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하지만 그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며 승현은 조금씩 커져가는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국 오늘이 오고 만 것이다.
“하…… 진짜, 생각보다 힘드네.”
가슴이 무너졌다.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 그녀를 달래고 이유를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런 어설픈 방법은 통하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다름 아닌 유빛나니까.
“괜찮으십니까?”
힘들게 얼굴을 한 번 더 쓸어내리는데 언제 들어왔는지 엘리스 정이 그의 책상 앞에 서 있었다.
가뜩이나 심란해 죽겠는데 그녀의 등장은 더욱 반갑지 않았다.
“노크 좀 하지?”
“노트 세 번이나 했는데 못 들으셨습니다.”
정말 한 치도 안 밀리는 여자다.
때문에 승현의 눈썹이 더욱 곤두섰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엘리스는 다시 한 번 물어왔다.
“괜찮을까요?”
그 물음에 승현은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당신 같으면 괜찮겠어? 아침까지만 해도 달달하던 남자친구가 순식간에 적이 돼서 나타났는데?”
“아, 유빛나 변호사님 말고 본부장님이요.”
“뭐야?”
도대체 이 여자 뭐라는 거야?
아무리 한국말이 유창하다지만 미국에서 평생 자라온 그녀인지라 간혹 한국말이 꼬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참을성 없는 승현은 늘 눈썹을 곤두세우곤 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라 생각했고.
그런데 아니었다.
“유 변호사님 걱정은 안 됩니다. 생각보다 강한 여자더라구요.”
“이런 상황을 보고도 지금 그런 말이 나와?”
“당연하죠. 저 같으면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잠자리를 했던 섹시한 남자친구가 오늘 이렇게 나타났다면…… 싸대기를 기차게 날려줬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 본부장님 얼굴은 멀쩡하지 않습니까? 보통 인내심이 아닙니다.”
‘같이 잠자리를 했던 섹시한 남자친구’라는 발언을 너무 서슴없이 내던지는 그녀를 승현이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제가 걱정하는 건 바로 본부장님이에요.”
“내가 왜?”
“흔들리고 있으니까요.”
“나도 사람이야. 매사 능청스럽게 받아칠 순 없어. 특히나 오늘 같은 상황은 더더욱.”
“후회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본인의 신분을 보호해야 한다는 건 다름 아닌 본부장님 선택이었고, 그걸 계약사항으로 묶어버린 것도 본부장님이었으니까요.”
엘리스는 지금 이 상황에서 정확한 요점을 짚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엘리스가 그렇게 나오지 않아도 승현은 알고 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진짜 적이 그의 신분을 알고 이 전쟁에 대비하는 걸 미연에 방지하게 위해서였다.
그가 가진 조건은 약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론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독이 될 경우, 이 전쟁은 정치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빛나 생각만 하면 절로 호흡이 빨라졌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을 엘리스는 불안한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이다. 승현이 이렇게 갈팡질팡,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마담M이란 캐릭터로 그를 처음 대면했던 그날의 충격이 아직까지 가시지 않는 그녀에겐 정말로 낯선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천하의 위승현이 이처럼 조바심을 내고 있는 모습이라니.
헌데 오늘 빛나의 모습을 대면한 엘리스는 승현이 저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스스로 자존감이 높고 굉장히 당당한 여자였다.
외모는 물론, 위기의 순간 적절히 강약을 조절하는 모습까지.
처음엔 빛나가 이번 일을 해결하는 데 최대 변수가 될 수 있다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본 그녀의 모습에 엘리스는 확신했다.
지금 최대 변수는 빛나가 아닌 승현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고 계셔야 합니다. 처음 한국 지사를 유지하기로 했던 그 순간 그 취지를.”
“굳이 그렇게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어.”
“잊지 마세요. 큰 그림을 보시란 말입니다. 한번 새어나가기 시작하면 막을 수가 없습니다. 기밀 유지, 그것만이 이 싸움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에요. 유 변호사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내가 그 정도로 공과 사도 구분 못 할 사람으로 보이나?”
엘리스의 말이 불편한 듯 승현이 인상을 찌푸렸으나 그녀의 조바심을 이해 못 하는 바도 아니었다.
그랬다.
빛나는 남겨진 직원들의 복귀와 부수적인 보상을 요구할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사항은 승현도 바라는 바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승현이 마담M이란 신분으로 이 자리에 선 궁극적인 이유부터 해결해야 했다.
그래야만 KM아시아 지사가 유지될 수 있을 테니까.
문제는, 이 모든 사항이 회사기밀로 묶여 빛나에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그는 아무런 설명 없이, 빛나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받아야만 했다.
그야말로 정말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고민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엘리스는 무슨 말을 더 하려다 그가 전화를 받는 모습에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핸드폰을 받아드는 폼이 여느 때와 달랐기 때문이다.
“응, 빛나야…….”
아니나 다를까, 바로 빛나다.
엘리스는 얼굴 표정부터가 달라지는 승현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나 지금 가. 갈게, 금방 갈 테니 기다려.”
그녀가 대화를 요청한 모양이다.
이에 승현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러더니 엘리스에게 이렇다 할 말도 하지 않은 채 사무실을 나서버린다.
주인 없는 사무실에 덩그러니 남겨진 엘리스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외롭게 중얼거렸다.
“이러니, 내가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자칫 잘못하다간, 당신 커리어도 끝인데…….”
* * *
택시에서 내려선 빛나는 오늘따라 어두워 보이는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7층에 나란히 자리한 그들의 집은 양쪽 모두 다 불이 꺼져 있는 것으로 보아 승현도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다.
가슴 한쪽이 답답했다.
아직도 가시지 않은 충격에 하루 종일 굶다시피 했는데도 불구하고 배가 고프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공복의 속 쓰림을 느끼지 못할 만큼 심신이 피폐해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많이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승현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가 우연이고 어디서부터가 계획인지, 도무지 감히 잡히지 않는단 말이다.
그와 대화를 해야 했다. 진실을 마주 해야 했으니.
그녀가 집에서 보자고 한 시간이 8시다.
지금은 7시 45분 정도 되었으니 물 한잔 마시면서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 조금 남았다.
발길을 재촉했다.
그렇게 멍한 시선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선 빛나는 도어록을 여는 순간까지도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였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움직임을 감지한 센서가 잠시 들어왔다 꺼졌다.
하지만 빛나는 거실 불을 켜지 않은 채 들어왔다.
밝은 불빛이 눈을 아프게 찔러 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지치니 이젠 밝은 불빛조차도 싫어졌다.
대신 거실 한쪽에 있는 스탠드를 켜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와 달리 질질 끌리는 슬리퍼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려오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스탠드로 접근해 스위치를 누르려는데,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빛나는 멈칫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잘못 들은 것일까.
아니다. 분명 누군가 있다!
예민해진 탓에 과민반응일 거라 생각했지만 다시 한 번 등줄기를 엄습하는 인기척에 빛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복실이니?”
그랬으면 좋겠다.
집 나간 복실이 다시 돌아왔으면.
그랬으면 지금 이 상황에 대해서 하소연이라도 해볼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렇게 돌아선 빛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거실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노란 달빛, 그리고 그 빛을 등진 채 음산하게 서 있는 커다란 그림자.
적어도 복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승현…… 아?”
그가 조금 일찍 왔나 싶었다. 아니, 그랬으면 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연인 사이라도 승현은 단 한 번도 주인 없는 그녀의 집에 함부로 들어온 적이 없었다.
그리고 빛나는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그림자가 승현이라고 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누구…… 야!”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외침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그녀가 발걸음을 옮기기 무섭게 검은 그림자가 그녀를 향해 덮쳐 온다.
동시에 그녀는 그 검은 그림자에 의해 작은 비명도 내지를 수 없게끔 입이 단단히 틀어 막혀지는 것을 느꼈다.
온몸의 피가 증발해 바짝 말라버리는 것 같았다.
세상 그 어느 때보다, 가장 두려운 순간이었다.
* * *
생각보다 차가 막혀 뒤늦게 도착한 승현은 재빨리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8시가 조금 넘어선 시각, 들어올 때 보니 빛나의 집엔 불이 꺼져 있다.
아마도 그녀 또한 차가 막혀 조금 늦는 모양이다.
초조하게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서자 한 남자가 내려섰다.
검은 점퍼에 검은 모자, 검은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승현은 그런 남자에게 신경 쓸 만큼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다.
머릿속엔 오로지 빛나 생각뿐이었으니.
그런데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그 검은 남자가 다시 한 번 그를 돌아보는 것을 보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그 1, 2초 사이.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소리 없이 감겼다.
하지만 그뿐,
우연인지 악연인지 모를 두 사람은 그렇게 스쳐 지나가고 말았다.
***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선 승현은 습관적으로 벨을 누르려다 미처 닫히지 못한 현관문을 보고 흠칫 놀랐다.
“뭐…… 지?”
평소 철저한 빛나가 일부러 열어놨을 리는 만무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승현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인 채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의 움직임에 센서등이 잠시 불을 밝혔다 꺼졌으나 거실은 여전히 암흑이었다.
사람의 인기척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데 문이 열려 있다?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탁 트인 거실로 들어오고 어슴푸레한 달빛에 눈이 익숙해지자 사물을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평소 빛나의 성격대로 깔끔한 거실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정말로 빛나가 너무 정신이 없었던 나머지 문을 잘못 잠근 것일까?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하곤 거실에 불을 켜기 위해 승현이 이제 막 돌아서던 찰나였다.
소파 너머 폭신한 러그위로 부드럽게 흩어진 머리카락이 보였다.
섬뜩하다면 섬뜩할 수도 있는 그 장면에 승현은 심장 끝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어둠속에서도 달빛에 반사된 그 머리카락은 누가 봐도 빛나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빛나야!”
놀란 그가 소파 쪽으로 달려갔다.
불을 켤 정신도 없었다. 그저 온몸의 피가 바짝 타 들어가는 것 같았다.
“유빛나, 빛나야!”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정신을 잃을 그녀를 껴안고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는 것 말고는.
“안 돼…… 안 돼…….”
무서울 게 없는 인생이었다.
많은 것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다행히도 지금까지는 잃은 게 없는 인생이었단 말이다.
때문에 뭔가를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이렇게까지 살 떨리는 감정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제발, 제발…….”
그는 핸드폰을 그러쥐고 망설임 없이 119를 눌렀다.
하지만 손가락이 그의 심장을 대변해주듯 거침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신호음이 떨어지고 상대방과 연결이 되자 꽉 막힌 목소리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여기…… 사람이 다쳤어요…….”
하지만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앞으로 살면서도 이처럼 두려운 일은 없을 듯싶다.
그만큼 지금 이 순간이 승현에겐 지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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