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마담M,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2018.04.01.
테이블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두 잔이 놓여졌다.
잠시 후, 자리에 앉은 빛나는 노트북을 열며 이정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렇다 할 정보가 하나도 없단 말이야?”
“야, 이 인간…… 무슨 간첩도 아니고, 진짜 정보가 하나도 없다. 내가 모든 정보망을 총동원해도 겨우 알아낸 건, 한국인 혼혈아일지도 모른다는 것 정도. 그나마 이것도 100프로 확실한 게 아냐.”
“근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 말에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네. 한국 혼혈이라면 굳이 미국이나 프랑스가 아닌 한국을 택한 이유가 설명이 되니까. 제 뿌리를 찾아 온 거지.”
“아니면, 어렸을 때 입양 간…… 그런 케이스일까?”
이정이 펜을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에 가득 찬 물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이유인 즉, 그들이 일주일을 꼬박 마담M에게 매달렸지만 그럴듯한 정보를 하나도 얻어 들을 수 없었던 탓이다.
KM 본사 측에서 어찌나 싸고도는지 도무지 새는 정보를 찾을 수가 없었다.
물론 다른 언론사도 마찬가지였다.
이렇듯 마담M의 존재는 철저히 베일에 가려진 채 결전의 날은 내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내일인데…… 진짜 내일인데. 아, 머리야…….”
빛나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번은 소송이 관건이 아니라 협상이 주를 이루는 건이었다.
미국 대형 컴퍼니를 상대로 남아 있는 직원들의 무고를 밝히고 적절한 보상을 받는 것.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밀린 임금과 더불어 유지하기로 결정이 난 한국 지사에 재고용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만일, 협상이 불발되었을 시에는 대형 소송이 예상된다.
그때부터는 진짜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빛나 입장에서는 소송이 아닌 협상에서 끝을 내야 옳았다.
그리고 그 협상에서는 협상 카드를 쥔 마담M과의 고난이도 심리전이 관건이었으나, 상대를 알아야 전략이라도 짤 것이 아닌가.
이렇듯 마담M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전무하니 심리전은커녕, 잘못하면 오히려 휘말릴 수도 있다는 게 문제였다.
“다른 언론사는 어때?”
“이것만 죽기 살기로 파고 있는 나도 이 정도인데 다른 데라고 별수 있겠어? 너는?”
“나도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진행하는 사건이니만큼 대놓고 움직이는데도 정보가 없어. 무슨 유령도 아니고,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가 있냐.”
“내 말이 그 말이다. 살다 살다 탈탈 털어 이렇게 철저한 인간은 처음이다. 혼혈이다, 입양아다 하는 내용들도 펙트가 아니니 기사 한 줄 날릴 수 없고.”
휴, 정말 한숨만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이정은 유난히도 쓸쓸한 집 안을 한번 훑어보며 물었다.
“뭐야, 뭐가 이렇게 허전해. 혹시, 인테리어 바꿨어?”
“내가 그럴 정신이 어딨어? 복실이가 없으니 그렇겠지.”
“아…….”
백 마디 말보다 확실한 한마디였다.
워낙 시끄럽고 정신없던 복실이니만큼 난자리가 확실히 컸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벨소리가 울리며 누군가의 방문을 알려왔다.
빛나가 현관문을 열자, 달콤한 케이크 상자를 들고 있는 승현이 있었다.
“웬일이야? 오늘 늦는다더니.”
“응. 그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빨리 끝났어. 안에 누구 있어?”
“아, 이정이 와 있어. 들어와.”
“난 또…… 복실이 맘 바꿔서 다시 들어온 줄 알았네.”
“복실이 그거, 잡히면 가만 안 둬. 어떻게 편지 한 장 딸랑 남기고 집을 나갈 수가 있어? 그리고 연락도 안 되고. 정말 본가 안 들어간 거 맞아?”
“어, 근데 걱정 안 해도 돼. 복실이 걘, 무인도에 떨어트려 놔도 무병장수할 인간이야.”
일주일 전 집 나간 복실만 생각하면 걱정도 되고 화도 났지만 승현의 말을 들으면 그 말도 일리 있는 말인지라 고개가 끄덕여졌다.
무인도에 떨어트려 놔도 무병장수할 인간, 그야말로 야인 복실이 상상되는 순간이었다.
“어머, 승현 씨 왔어요? 오랜만이네?”
승현이 웃으며 들어오자 눈이 부시다는 듯 이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언제 봐도 훈훈한 외모다. 우울하다가도 보고 있으면 힐링이 되는.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혼자인 자신의 신세가 더욱 가련해지는 이정이었다.
이쯤 되면, 한번 의심해볼 만하다.
그들이 사이비라고 생각했던 그 점쟁이가 사실은 진짜 용한 점쟁이가 아닐까하는.
“아, 다시 찾아가서 부적이라도 하나 써?”
결국 그날 이정은 빛나의 집에서 밤샘 작업을 하기로 했던 계획을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 눈꼴 시럽게 예뻐서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던 탓이다.
* * *
결전의 그날.
빛나는 로펌에 입사하고 처음 사건을 맡아 법정에 선 그날을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그 첫날도 오늘처럼 떨리진 않았던 것 같다.
아침부터 부산하게 움직였다. 옷도 서너 번이 넘게 갈아입었던 것 같다.
머리도 묶었다 풀었다를 반복하다 결국 웨이브진 머리를 자연스럽게 풀었다.
그렇게 준비하고 나선 빛나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승현을 마주했다.
“뭐야, 더 자지 않고? 몰래 나왔는데 깼어?”
“나 원래 할 일 없어도 좀 일찍 일어나는 편이잖아. 게다가 오늘은 너한테 중요한 날이기도 하고. 유빛나한테 중요한 날은, 나한테도 중요한 날이야.”
“결론은?”
“데려다 줄게.”
승현의 아몬드형 눈매가 부드럽게 휘며 눈웃음을 보였다.
그런 눈을 보고 있자면, 도통 거절이란 걸 할 수가 없다.
결국 두 사람은 다정하게 팔짱을 낀 채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잠시 후 지하주차장에 도착한 빛나는 동그래진 눈으로 승현의 차를 바라보았다.
“차, 바꿨어?”
“응.”
“언제?”
“어제.”
“헐.”
빛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요즘 들어 승현의 씀씀이가 너무 신경 쓰여 돈 좀 아끼라고 몇 마디 했더니 그에게 돌아온 대답은 ‘걱정 마. 이 정도론 나 안 죽어.’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 말을 여실히 증명이라도 해 보이려는 듯 차도 너무 손쉽게 바꿔놓고 눈 하나 깜빡 안 한다.
그것도 잘나가는 스포츠카에서 억, 소리가 날 만큼 고급스러운 SUV로.
“도대체…… 왜?”
궁금했다. 멀쩡한 차를 왜 갈아치웠는지.
그런데 그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더욱 기가 막힌 것이었다.
“새해도 밝았고, 이제 나도 서른이잖아. 격에 맞는 차를 타야지.”
진짜, 헐! 이다.
“안 타?”
탄다! 탈 거다!
급하니까 타기야 타지만 잔소리 피해갈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빛나는 단단히 각오한 눈으로 차에 올라탔다.
그러자 승현이 손을 뻗어 안전벨트를 손수 채워주며 입이 삐죽 나와 있는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웃지 마.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갈 줄 알고?”
“좋은 말 안 나올 거 알아. 그래도 딱 오늘까지만 좀 참아줄래? 잔소리, 내일 들을게.”
“뭐야?”
잔소리 듣는 게 싫어 내일 듣겠다는 그에게 빛나는 곱게 눈을 흘겼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잖아. 에너지 아꼈다가 그 중요한 일에 쓰라고. 잔소리는 기꺼이 내일 들을 테니. 응?”
승현이 그녀의 귓전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 달콤한 숨결에 화르르 불타올랐던 그녀의 화가 점점 사그라 들고 있었다.
“내일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각오할게.”
그가 그렇게 말하며 차를 부드럽게 출발시켰다.
이런 젠장, 차가 좋긴 좋은 모양이다.
SUV인데도 승차감이 웬만한 세단보다 나았다.
도대체 이런 차는 얼마나 하는 것일까.
더불어 승현의 집은 도대체 돈이 얼마나 있는 집안일까.
많은 의문들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참았다.
빛나에게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금기 사항이듯, 승현도 집안 이야기 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아주 오래전부터 느꼈기 때문이다.
복실에게도 몇 번 물어본 적 있지만 승현의 입을 통해 직접 듣는 게 좋겠다며 한사코 대답을 피했었다.
하지만 빛나는 그에게 묻지 않았다.
대신 그가 직접 말해줄 ‘그 언젠가’를 기다렸다.
그리고 오늘도 그런 하루 중 하나였다.
“저녁에 퇴근 몇 시에 해?”
“글쎄. 언제 끝날지 잘 모르겠어. 감도 안 와.”
“나는 일이 있어서 오늘 좀 늦을 것 같은데. 시간대 맞으면 데리러 갈게.”
“그럴 필요 없어. 택시 타도 돼.”
“택시 위험해서 안 돼. 너무 흉흉한 세상이라.”
“그럼 박변한테 좀 데려다 달라고 하지 뭐.”
“어쨌든 전화해.”
“응.”
“꼭…… 해야 돼.”
그제야 빛나는 승현을 바라보았다.
왜 그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달리 들리지는 모르겠다.
어제 잠을 못 자서 목이 잠겼나?
아니다. 그러기에 승현은 지나치게 체력이 좋았다.
그렇다면 뭐가 달라졌지?
빛나의 까만 눈동자가 운전대를 잡고 있는 승현의 옆모습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평소에도 저렇게 진지한 모습으로 운전을 했던가?
기분 탓인지 오늘따라 그의 눈매가 더욱 깊어 보였다.
왜…… 일까.
그녀가 승현의 달라진 모습에 고민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회사 앞에 도착했다.
“잘 챙겨서 내려. 저번처럼 핸드폰 놓고 내려서 사람 애간장 녹게 만들지 말고.”
“알았어. 걱정 마.”
빛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서 내려서는데 승현이 다시 붙들었다.
자신의 손을 잡아끄는 그의 행동에 그녀가 의아한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왜?…… 헉, 흡!”
예상치 못한 그의 입술이 살갑게 맞닿았다.
밤새 물고 깨물었던 입술인데도 마치 오늘 처음 맛본 것처럼 새삼스럽게 달콤했다.
다른 게 있다면,
어젯밤은 격렬하게 달콤했으나,
오늘은 유난히도 부드럽게 달콤하다는 거.
때문에 빛나는 아침부터 온몸이 노곤해지는 것을 느꼈다.
더불어 긴장감도 조금 풀리는 듯하다.
그렇게 승현의 입술은 그녀에게 절대 헤어나올 수 없는 마법 같았다.
“음…….”
뜨거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가볍게 빨아들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키스의 여운이 느껴지는 그의 몽롱한 눈동자가 빛나를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아침부터…… 너무 야하잖아.”
“원래 난, 시도 때도 없이 야해. 이제 알았나?”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에 빛나의 입꼬리도 사랑스럽게 말려 올라갔다.
“기운 내라는 응원 키스.”
“그럼 이건 고맙다는 감사 키스.”
쪽!
빛나는 아직도 키스로 인해 살짝 들떠 있는 그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는 키스를 날리며 차에서 내려섰다.
그러곤 건물로 들어서는 순간까지 손을 흔든다.
승현은 그 모습이 너무 예뻐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진짜 예뻐 죽겠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입꼬리에 매달렸던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 돌겠다. 하필이면…….”
검게 가라앉은 승현의 눈동자가 창가로 돌아갔다.
만감이 교차한 듯 그의 얼굴에 그늘이 가득했다.
도대체 어쩌자고 하늘은 그에게 이렇게 혹독한지 모르겠다.
빛나와 승현, 악연은 진짜 악연이다.
돌고 돌아 십년을 으르렁거리다 이제야 겨우 얼굴 보며 웃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렇듯 또 한 번 위기가 닥쳐오다니.
10년 전, 그 큰 눈에 가득 들어찼던 눈물이 생각났다.
-마지막 남은 내 자존심이었어.
그동안 조바심에 뒤로 미뤄두었던 그 걱정이 당일이 되자 물 밀 듯 밀려들어 그를 거의 폭발 직전까지 몰고 갔다.
절대 고의가 아니다.
우연을 가장한 악연이라고 해야 옳다.
승현은 어쩌면 오늘 10년 전 그 눈동자를 다시 볼 수도 있겠단 생각에 가슴 끝이 무너졌다.
하지만 피해갈 수 없는 일.
그래서 부딪쳐 보기로 했다.
* * *
KMK컴퍼니 회의실.
깔끔한 그 공간에 자리한 네 사람 중 유일하게 떨고 있지 않는 이는 빛나 한 사람뿐인 듯했다.
동시 통역사라고 데려온 이는 언론이 주목한 큰 사건이라 조금 부담을 느끼는 듯 했고, 은지는 평소와 달리 잔뜩 긴장한 듯 서너 번도 더 훑어보았던 자료를 이유 없이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물론 10여 분째 같은 페이지다.
그리고 직원 대표로 자리에 앉은 장 부장은 입이 바짝바짝 마른 듯 자꾸 얼굴을 쓸어내리며 낡은 옷깃을 정리정돈한다.
은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바짝 마른 그의 입술이 안쓰러워 빛나는 생수를 건넸다.
“물 좀 드시고 진정하세요. 다 잘될 거예요.”
빛나의 따뜻한 위로에 장 부장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회의실 문이 열리며 검은 정장을 입은 한 남자가 들어왔다.
흔치 않는 8대 2 가르마에 색감 없는 무테안경이 정말로 인정머리라곤 눈곱만큼도 없이 생긴 인물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인물로 보아 이번에 본사에서 파견 나온 직원 중 한 명인 듯싶었다.
그리고 뒤이어 두 명의 사람이 더 들어왔고, 그들은 분명한 외국인이었다.
빛나는 빠르게 눈을 움직여 누가 마담 M인지 파악에 들어갔다.
하지만 들어선 이들은 모두 남자로 한 눈에 봐도 마담 M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배려가 몸에 밴 사람들이었다.
성별을 떠나, 마담 M은 이번 협상에서 모든 결정권을 쥔 인물.
배려보다는 권위가 몸에 밴 사람이어야 옳다.
오랜 세월 빛나가 변호사로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오며 느낀 것은 모든 협상에 우위를 점하고 있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 자신이 위치를 가장 잘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지금까지 들어온 세 명의 남자는 마담 M으로서 탈락이다.
헌데 그때 남자들이 양쪽 옆으로 길을 터주며 그 중앙으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과감한 블랙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육감적인 여자였다.
큰 키에 서구적인 이목구비, 딱 봐도 동양의 신비로움과 서양의 외적인 아름다움을 동시에 가진 인물로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부터가 남다른 여자였다.
그녀를 만난 순간, 빛나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뿐만 아니라 곁에 있던 은지도 테이블 아래 있는 그녀를 툭 칠 만큼 방금 들어온 여자는 누가 봐도 마담 M이다.
이정이 맞았다.
마담 M은 혼혈이었다. 그 헛소문이 분명한 팩트였던 것이다.
이제야 리스크를 감당해가며 한국 지사를 유지한 이유가 설명되었다.
“안녕하세요, 엘리스 정입니다.”
게다가 유창한 한국어까지.
그야말로 동시 통역사까지 기함하게 만드는 임팩트 있는 등장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쪽 변호를 맞은 유빛나 변호사입니다.”
“박은지입니다.”
잔뜩 긴장한 두 사람이 그녀와 악수를 했다.
하지만 손에 땀이 날만큼 긴장한 그들과는 달리 그녀는 시원한 웃음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화면보다 훨씬 더 예쁘신 분들이네요.”
그녀의 말에 은지가 살짝 몸을 떠는 것을 느꼈다.
여유 있는 그녀의 농담은 칭찬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춤추는 은지까지 두려움으로 몰고 갔다.
그만큼 남다른 여자였다.
상식을 뒤엎는 광고로 허를 찌르는 그녀의 기가 막힌 발상을 증명이라도 해주듯 이 추운 겨울에 몸매가 드러나는 과감한 민소매 의상을 선택한 것부터가 그러했다.
오늘 아침, 몇 번이나 옷을 갈아입으며 답답한 블라우스에 하이웨스트 스커트를 입은 빛나가 고리타분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사람은 첫 이미지가 평생의 이미지의 반을 좌우한다는데, 아침에 그 부산을 떨고도 이렇게 밀리다니.
하지만 지나친 여유는 오히려 화를 부르는 법.
“실력이 좋은 분들이라고 들었습니다. 부디, 오늘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어가셨으면 합니다.”
의자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며 한 그 말에 빛나의 눈썹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서로 윈윈하는 결과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만족한만 한 결과를 얻어가라니.
여유가 자만이 되었고, 그 자만이 빛나를 자극하고 말았다.
“모든 결정권을 거머쥐신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 당혹스럽네요. 그 말은…… 저희 편이 되어 주시겠단 말씀입니까?”
자존심이 상한 그녀가 다소 공격적인 말투로 또렷하게 이야기하자 곁에서 은지가 그녀의 무릎을 지긋이 눌러주었다.
그런데,
엘리스 정은 그런 빛나의 말투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무슨 말씀인지…….”
정말, 몰라 묻는 것일까?
열 받은 빛나의 눈썹이 또 한 번 꿈틀거렸다.
헌데 그때 엘리스 정은 깨달음의 탄성을 내지르며 이제야 알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무슨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저는…….”
그녀가 말을 하려 했지만 은지가 과감하게 끊고 들어왔다.
엘리스 정의 지나친 자신감은 살짝 겁을 먹었던 은지도 자극했나 보다.
하긴, 자만과 오만이라면 절대지지 않는 1인중 한 명이 바로 빅은지였으니 이쯤이면 오래 참은 것이었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생각보다 한국말을 잘하시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통역하실 분이 이 자리를 지킬 필요가 있을까요?”
불필요한 인원을 줄이잔 말이다.
하지만 시간당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임금을 아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중요한 건에 밖으로 새어나가는 입을 아끼잔 뜻이었다.
참여하는 인원이 줄수록 단속해야 할 입도 줄어드니까.
그러면, 언론을 컨트롤하기 훨씬 쉬워지니까.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도 좋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굳이 통역은 필요가 없을 듯싶으니까요.”
가뜩이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아 멋쩍어하던 통역사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 자리를 퇴장했다.
잠시 후, 엘리스 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그들에게 다가왔다.
검게 드리어진 그녀의 그림자에 빛나도 덩달아 일어나 엘리스 정을 마주 보았다.
헌데, 그녀가 다시 한 번 악수를 건네며 하얗고 고른 치아를 드러냈다.
그 웃음에 불안한건, 빛나만의 괜한 노파심일까.
“정확한 제 소개가 늦어 오해가 있었던 듯합니다. 다시 소개하죠. 저는 KM 그룹 본사 법무팀에서 나온 엘리스 정이라고 합니다.”
괜한 노파심이 아니었다. 이런 젠장!
빛나의 표정에 낭패감이 엿보였고 은지는 넋이 나갔다.
섹시하고 예쁜 변호사는 그들 둘로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미인 경연대회도 아니고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게다가 그녀가 마담 M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
순간 빛나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엘리스 정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을 훑어보았다.
그들의 의중을 눈치 챈 엘리스 정이 맞잡은 빛나의 손을 힘차게 흔들며 경쾌하게 입을 열었다.
“이 정도로 놀랜다면, 실망입니다. 각오…… 하셔야 할 겁니다.”
“무슨…….”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은 버려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시작은 경쾌했지만 끝은 무거웠다.
“정확히 이야기해주시겠어요?”
“우선, 마담M이 여자일 거라는 사고방식부터.”
“뭐…… 라구요?”
빛나의 물음에 엘리스 정의 깊은 눈매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러곤 묘한 웃음을 보이며 섬뜩한 마무리를 했다.
“마담M은 대중이 만들어낸 캐릭터일 뿐, 그분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테니…….”
말이 끝나기 무섭게 회의실 문이 열렸다.
그러자 줄곧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세 남자가 일동 기립을 하는 바람에 앉아 있던 은지와 장 부장도 덩달아 벌떡 일어났다.
그렇게 놀란 사람들 사이로 완벽한 스트라이프 슈트 핏을 자랑하며 유유히 걸어 들어오는 한 사람.
-마담M이 여자일 거라는 사고방식부터.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
딱 벌어진 어깨와 훤칠한 기럭지가 일단 보통을 넘어서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놀라운 사실은.
-마담M은 대중이 만들어낸 캐릭터일 뿐.
“세상……에…….”
그가 다름 아닌,
“안녕하세요, KMK 아시아 지사 본부장…… 위승현입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사랑스러운 키스를 날려주었던 그녀의 연인이라는 사실.
그야말로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는 엘리스 정의 말이,
“말도……안 돼…….”
여실이 와 닿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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