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설레게하는 그대-33화 (33/94)

33. 그렇게, 전쟁은 시작되었다.

2018.03.28.

까만 서울의 밤하늘이 유독 아름다운 날이다.

승현이 주는 커피를 건네받아 차에서 내려선 빛나는 차가운 밤공기가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자 살풋 인상을 구겼다.

“으, 날씨 많이 춥네. 괜찮겠어? 그냥 따뜻한 커피숍에 앉아서 마시지는…….”

“답답해서. 생각할 게 많아서 사람 많은데 있으면 머리가 아파, 요새는.”

“그러게, 유빛나. 요새 좀 복잡해 보이더라. 일이 그렇게나 많아? 죄다 이혼 소송 건인가 보지? 웬만하면 참고 살라고 달래서 돌려보내.”

승현이 벤치에 걸터앉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서울 시내를 등지고 있는 그의 모습에 음영이 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우월한 기럭지에 자꾸 시선이 갔다.

“그거 때문에 머리 아픈 거 아냐. 무료 소송 건을 하나 물었거든. 근데 사회적인 이슈가 될 수 있는 워낙 큰 건이라 조심스러워서 그래.”

“사회적인 이슈가 될 수 있는 무료 소송 건이라…….”

그는 빛나가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리플레이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다 손쉽게 결론을 내렸다.

“많이…… 억울한가 보네.”

하나를 말하면, 열을 아는 우리 기특한 승현이.

빛나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 부드러운 베이비 펌에 손가락을 집어놓고 흩어 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가뜩이나 오만하고 장난기 가득한 그의 얼굴이 흩어진 머리카락으로 인해 더욱 자유로워 보인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빛나는 그의 앞에 쭈그려 앉아 턱을 괴고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승현 또한 빛나의 그런 행동이 너무 예쁘다는 듯 허리를 숙여 그녀의 콧잔등에 쪽, 소리가 나는 뽀뽀를 했다.

“누가 우리 빛나를 이렇게 힘들게 만드나. 만나면 혼내줘야겠네. 응?”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사람.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혼내줄 수 있어?”

“당연하지. 나 위승현이야. 하기 싫어서 안 하면 몰라도, 못해서 안 하는 건 없어.”

“도대체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래?”

출처 없는 자신감이라도 좋다.

그를 보고 있자니 지친 하루가 절로 힐링이 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유빛나, 꿈이 뭐야?”

“갑자기 꿈은 왜?”

“그냥…… 궁금해서.”

“음.”

꿈, 요즘 들어 되짚어 본적이 없는 듯하다.

지금까지는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해왔던 일이 더 많았으니까.

때문에 승현이 불쑥 던진 질문은 그녀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꿈은 뭐였을까.

과연, 그녀에게 진짜 꿈이란 게 존재했던가.

“네 꿈은 뭔데?”

“일단 네 꿈부터 들어보고.”

그가 이렇게 진지한 눈동자를 할 때면 빛나는 그 대답을 피해갈 수가 없었다.

오만하고 장난기 많은 그였지만 그만큼 자신을 숨기지 못하는 그 아몬드형 눈매는 이런 순간 그가 가진 진지함을 여과 없이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음…… 난 변호사니까, 억울함 없는 세상을 만드는 거? 헐, 너무 큰가? 아, 맞다! 법에도 심장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 내가 바로 그 심장이 되는 거.”

너무 심오했나, 후회하는데 승현이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제 심장을 움켜쥐며 말했다.

“으윽, 내 거 하나 움켜쥔 걸로 부족하단 말이야? 너무 욕심 많은데?”

그러더니 쭈그려 앉은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제 무릎에 앉히고 품에 안으며 가볍게 입맞춤을 시도했다.

짤막하게 왔다 간 입술이지만 그녀의 몸을 후끈 달궈놓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너무 어려워. 좀 쉽게 풀어주면 안 돼?”

“쉽게라…… 음, 뭐라고 말해야 하지? 아, 예를 들면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는 진짜 인권 변호사가 되는 거.”

“인권 변호사라…… 왜, 지금은 안 되고?”

그 말에 이번엔 빛나가 승현의 입술에 키스를 되돌리며 말했다.

“돈은 누가 벌고? 인권 변호사는 늘 배고파. 내 배고픈 건 상관없는데…… 죄 없는 애들까지 같이 배고파야 하니까. 정말 까마득히 먼 일이지. 실현가능성 없는 꿈이랄까. 그러니까 말 그대로 꿈인 거야. 음…….”

말을 하기 위해 벌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로 승현이 뜨거운 숨결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추운 날씨로 인해 차갑게 굳어 있던 그녀의 입술이 소리 없이 녹아들었다.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피부를 할퀴고 지나갔지만 오로지 서로를 향해 오감이 열린 그들은 그것조차도 느낄 수 없었다.

까만 밤하늘 아래, 오롯이 서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키스하는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떠한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던 소송 건도, 정체를 알 수 없어 그저 막연한 두려움으로 남았던 마담M도, 깡그리 사라져 버렸다.

마치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고민거리처럼.

키스가 깊어졌다.

승현은 그녀가 벗어날 수 없도록 한손으로는 허리를 나머지 한손으로는 그녀의 뺨을 붙들고 더욱더 자신 쪽으로 깊이 끌어당겼다.

정말 미치겠다. 한번 그녀를 탐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그리고 멈출 수도 없었다.

오로지 그녀가 밀어내줘야만 그나마 없던 인내심까지 끌어 모아 통제할 수 있었지만 지금 이순간은 빛나도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숨이 가빠지자 승현의 입술이 잠시 떨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의 뜨거운 체온은 여전히 그녀의 피부에서 떠나갈 줄 몰랐다.

부드러운 입술이 그녀의 목폴라를 제치고 펄떡이는 맥을 찾아들었다.

빛나는 고개를 들어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요하기만 한 하늘에 수도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렇게 꿈같은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더 꿈결 같은 그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려온다.

“빛나야, 꿈은…… 이루라고 있는 거야.”

진짜 꿈같은 소리.

그래서 빛나는 질문을 되돌렸다.

“그렇다면…… 네 꿈은 뭔데?”

“내 꿈? 내 꿈은…….”

승현의 뜨거운 입술이 따뜻한 숨결과 함께 코트를 제치고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우리 빛나 꿈이 내 꿈이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입술이었다.

그래서 그의 입술과 그녀의 피부 사이에 두꺼운 목폴라가 가로 막고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울 만큼.

그마저도 없다면 그의 입술이 그녀의 피부를 태워 그 존재조차도 없애버렸을 테니까.

빛나는 시선을 돌려 커다란 전면 광고판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담M의 작품이 걸려 있던 그곳에 화려한 명품 화장품 광고가 올라와 있었다.

광고 모델은 바로 ‘J’.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린 상큼한 숏컷이 드러난 어깨와 우아한 목선을 더욱 강조하고 있었다.

저 자그마한 얼굴에 어찌 눈코입이 다 붙어 있나 신기할 정도다.

게다가 화장품 광고답게 윤기 나는 깨끗한 피부는 여자인 빛나가 봐도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예뻤다.

“예쁘다.”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승현이 입술을 그녀의 귓가로 되돌리며 은근히 물어왔다.

“뭐가?”

“저 광고, 제이. 이번에 둘째 임신했다는데 유부녀가 저렇게 예뻐도 되는 거니?”

그 말에 승현의 입술에서 웃음이 슬며시 비어져 나왔다.

그녀가 정확히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승희다.

성을 넘나드는 그녀의 독보적인 매력은 각종 패션계와 광고계의 러브콜을 받으며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것이 빛나의 눈에도 예외일 순 없으리라.

“뭘, 그런 걸 부러워하고 그래?”

승현이 입술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지만 여전히 빛나의 시선은 광고판의 승희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예쁘지, 능력 있지, 거기다 억 소리가 날만큼 든든한 백그라운드까지. 그냥 예쁜 게 부러운 게 아니라…… 당당해질 수 있는 저 세계가 부러운 거야.”

그랬다.

그 어떤 외압에도 당당해질 수 있는 그녀가 부러웠다.

말 한마디로 진실을 전달할 수 있는 그녀의 힘이 부러웠다.

그녀가 가진 모든 게…… 부러웠다.

그런데 승현이 광고 속 승희에게로 향해 있는 빛나의 시선을 붙들어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러더니, 아주 조용히, 힘 있게 이야기한다.

“네가 원한다면…….”

“…….”

“내가 저 세상, 너한테 줄 수 있어.”

그 진지한 눈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세상에 네 꿈이 내 꿈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남자가 몇이나 될까.

그리고 이젠 그녀가 부러워하는 저 세상을 기꺼이 주겠단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코끝이 시큰거리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진짠데?”

“알아…….”

농담이라도 좋다.

세상이 다 등을 돌려도, 오로지 그만은 그녀의 편이 되겠다는 이야기니까.

그래서 빛나는 승현에게 진한 키스를 되돌리며 고백했다.

“사랑해…….”

요즘 들어 매일 해도 질리지 않는 고백이었다.

***

생각보다 언론이 조심스러웠다.

곪을 대로 곪은 사건이라 건드려만 줘도 곧 터질 것 같던 그 상처엔 의외로 견고한 딱지가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외압이 작용했거나.

하지만 빛나는 지금 이 상황만으로도 충분했다.

일단, 로펌에서 정식으로 공식 발표하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여기저기서 보는 눈치작전도 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만큼은 꼭.

“이해할 수가 없군. 그렇다면 지금 이 건을 가지고 처음 기사를 쓴 그 기자도 실상은 유 변호사 친구란 말인가?”

“네. 하지만 제가 하란다고 움직이는 친구는 절대 아닙니다. 소신 있는 친구니까요.”

“알지, S일보 기자가 아닌가. 어지간하겠어?”

로펌의 대표인 황 대표는 이정이 얼마 전 처음으로 쓴 기사를 다시 한 번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S일보는 메인 언론사는 아니었지만 국내 날고 긴다는 거물 언론인이 둘씩이나 버티고 있는 곳이었다.

때문에 그 두 기둥을 주축으로 그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으며 진실 보도를 하는 데 큰 기여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정이 그 어렵다는 언론고시를 합격하고 메인 언론사에서 S일보로 옮기기까지 정확히 딱 이 년이 걸렸다.

물론, 덕분에 처음에는 좀 힘들었지만 이젠 몸으로 뛰는 진짜 사회부 기자가 되어버린 지금은 그 어떤 언론인보다 행복하단다.

그래서인지 S일보가 내놓은 기사는 웬만한 메이저급 언론사보다 훨씬 더 신뢰도가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너무 위험한 일이야.”

“압니다. 하지만 위험한 일이니만큼 확실한 보상이 따라오지 않겠습니까? 이번 건으로 저희 로펌의 신뢰도를 더욱 높일 수 있습니다.”

“김 이사 생각은 어떤가?”

역시나 황 대표는 줄곧 말이 없던 김정석 변호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김 변호사는 기다렸다는 듯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입을 열었다.

“저는 유 변호사 말에 동의합니다. 한 번쯤은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리스크가 너무 커.”

“실패했을 경우죠.”

김 변호사의 말에 황 대표의 시선이 빛나의 얼굴로 옮아갔다.

갈색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린 그녀의 외모는 누가 봐도 시선이 한 번 더 갈 만큼 예뻤다.

하지만 꽉 다물어진 단호한 입술과 깊고 검은 눈동자가 그녀가 얼마나 현명하고 우직한 성격인지를 잘 드러내 주었다.

때문에 그녀가 힘을 주어 말을 마무리할 때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게 된다.

“우리한텐 이기냐, 지느냐의 문제겠지만 그 사람들에겐 생존권이 달린 일입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실패한다는 생각……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단 말입니다.”

빛나의 말이 끝나자 황 대표는 더 이상 볼 필요도 없다는 듯 파일 철을 덮어버렸다.

그러곤 상체를 회전의자 깊숙이 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디 한번 가봅시다. 우리 로펌에도 변화가 필요하니까.”

“정말이십니까?”

그녀의 입가에 순식간에 미소가 맴돌았다.

그러나 황 대표 또한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때문에 지방대 출신의 변호사임에도 불구하고 혼자 힘으로 일으킨 로펌을 이 수준까지 끌어 올린 게 아닌가.

그는 변호사라기 보단, 사업가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때문에 그의 사업적인 판단은 정확하고 명료했다.

“대신, 유 변호사 말처럼 실패란 없는 겁니다. 회사의 모든 인력을 동원해도 좋으니 이번 건, 확실히 우리 것으로 만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당장 변호인단 꾸리세요.”

“제가 필요한 변호인은 딱 한 명뿐입니다.”

“누구?”

“박은지 변호사요.”

빛나가 의미심장하게 웃자 황 대표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시간 끌 거 뭐 있습니까. 내일 당장 기자 회견 열어 공식 발표하세요.”

사업가로서 황 대표의 뛰어난 추진력이 여과 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 * *

“아니, 유변! 미쳤어? 내가 유변 남자친구한테 그랬다고 지금 나한테 복수하는 거야? 치사하게!”

“…….”

“자폭하려면 혼자하지, 왜 나까지 끌어 들이냐고! 가만있는 나는 뭔 죄야!”

공식 발표 5분 전.

억지로 차출 되어 온 박은지 변호사의 끊임없는 불만이 계속되었다.

목에 핏대까지 곤두 선 것을 보아 어지간히도 열 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빛나는 밖에 대기 중인 수많은 기자들을 슬쩍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가 왜 죄가 없어? 잊었어? 너도 나처럼 저 사람들 말리지 않았잖아. 헛된 꿈에 우리가 목숨처럼 떠받드는 정의가 시름시름 앓다 죽어가고 있는데도 모른 척했잖아. 그거…… 방관죄야.”

“우리나라에서 방관죄는 성립 안 된다는 거 몰라?”

“하지만 우리 양심은 아니지. 박변, 이제 우리 양심도 숨 좀 쉬게 해줘야 하지 않겠니?”

아, 젠장!

은지는 이를 악 물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틀린 말이 없어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화가 부글부글 끊는 은지에게 빛나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박은지, 정신 차려. 언제까지 승소할 수 있는 변호만 맡아가며 안일하게 아버지 그늘 밑에 숨어 있을 거야? 그러기엔 난 네가 얼마나 욕심 많은 앤지 알아. 절대 ‘박충호 딸’로만은 살 수 없다는 것도. 이젠…… 네 이름 찾아야지. 박충호 딸이 아니라 박은지라는 이름.”

빛나의 진지한 눈동자에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은지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 어떠한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럴듯한 변명들이 머릿속을 빼곡히 메우고 있었지만 단 한마디도 말이 되어 나오진 못했다.

드디어 1분 전.

마련된 자그마한 단상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더욱 짙게 가라앉았다.

“이건 너한테도 기회라고 생각해.”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아직도 모르겠어? 저 자리가, 우리한텐 기회라고. 넌 네 이름을 찾을 기회…… 나는…….”

저 자리가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은지만큼이나 빛나도 떨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설 수 있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

천지개벽으로 세상 모든 이가 그녀에게 등을 돌린다 해도 오직 ‘그’만은 그녀의 편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빛나야, 꿈은…… 이루라고 있는 거야.

“…… 내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

빛나는 승현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은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때론 얄밉고, 때론 질투하고, 때론 서로 헐뜯는 라이벌이었지만 그들은 서로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음과 양처럼, 서로 닮은 듯 닮지 않는 두 사람이지만 그들이 힘을 합치면 어떤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지를.

그래서였을까.

“그러니까…… 같이하자.”

은지는 빛나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민 그 손을 망설임 없이 잡고 말았다.

KMK컴퍼니 직원들 변호인단으로 두 사람이 나타나자 수많은 플래시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눈이 부실 만큼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그 플래시에 이제야 두 사람은 그들이 서 있는 자리를 절감할 수 있었다.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만 것이다.

은지는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빛나는 차분하고 진지한 눈동자로 이 순간을 맞이했다.

단상에 선 그녀는 마이크를 제 키 높이에 맞추고 조심히 입을 떼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번 KMK컴퍼니 직원들의 변호를 맡은 J&J 로펌의 유빛나 변호사입니다. 오늘부로 저희는 아래와 같은 공식 입장을 발표하는 바입니다. 아시아 지부 유지를 결정한 KMK컴퍼니는…….”

시종일관 떨림 없는 정직한 말투였다.

게다가 적절한 어휘 선택과 탁월한 시선 처리는 그녀의 화려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들에게 확실한 신뢰를 어필했다.

수많은 질문들이 쏟아졌다.

관심 또한 폭발적이었다.

줄곧 KMK컴퍼니 건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고수했던 모든 언론매체가 드디어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정은 그런 빛나의 모습을 만족스러운 듯 바라보며 카메라맨에게 중얼거렸다.

“저 모습,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도 놓치지 말고 잡아. 저게 바로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이 될 테니.”

오늘 있었던 공식 발표는 뉴스로, 동영상으로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KMK컴퍼니 직원들의 변호사가 등장함으로써 모든 판도가 바뀌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예상치 못했던 빛나의 행보는 수많은 결과를 초래했다.

-언니도 이제부터 바빠질 텐데 내가 있으면 불편할 테고, 어차피 해야 할 일, 시기적으로 조금 앞당긴 거뿐이니까.

복실은 정성스러운 메모지 한 장을 남겨놓은 채 빛나의 집을 나섰으며,

“훗, 우리 빛나…… 화면 빨도 기가 막힌데? 역시 예뻐. 유빛나, 파이팅!”

팔불출 승현은 죽으나 사나 그녀 편에 서서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일은, 그녀의 예상치 못한 행보 하나가 줄곧 숨어 있던 한 남자를 소리 없이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는 것.

“기어이…….”

위스키 잔을 틀어쥔 남자의 굵직한 손에 필요 이상의 힘이 들어갔다.

멈춰진 화면엔 마이크를 틀어쥐고 진지하게 입을 여는 빛나의 모습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다.

그 화면을 바라보는 남자의 축 쳐진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꼭 다문 입매 또한 분노로 꿈틀거린다.

그러다 결국, 남자는 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위스키 잔을 던져버렸다.

쨍그랑!

산산조각이 난 위스키 잔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남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대신 꼭 틀어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조용히 읊조렸다.

“유빛나라…… 어디 한번 해보자, 이 말이지?”

그렇게 소리 없는 전쟁은 시작되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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