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설레게하는 그대-32화 (32/94)

32. 네가 누구든 상관없이.

2018.03.25.

“내가 들은 정보에 의하면, 마담M이 벌써 한국에 들어와 있다는 소문이 있어.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지.”

이정이 노트북을 두드리며 홀린 듯 이야기 했다.

시작은 빛나였지만 이정은 며칠 째 마담M 이야기에서 벗어날 줄 몰랐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그녀의 집으로 늘 들고 다니는 노트북과 함께 쳐들어온 것이다.

기자의 예민한 촉으로 이것은 분명 특종이라나, 뭐라나.

하지만 빛나는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의외로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네.”

“준비는 되어 있고?”

“응. 대표님하고 이야기할 거야.”

“나는 언제 움직이면 돼?”

“내일이라도 당장.”

“굿.”

이정이 안경을 치켜 올리며 싱긋 웃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흥분인지 모르겠다.

요즘 들어 워낙 정, 재계가 어지럽다 보니, 사회부에서 이렇다 할 기사를 내놓아도 묻혀버리기 일수였다.

그러나, KMK컴퍼니 건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오랜만에 스포트라이트를 한번 받아보겠군. 약속했다. 단독 인터뷰!”

“알았어. 걱정 마. 근데 말이야, 나 예전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빛나는 볼펜을 입에 물고 허공을 응시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동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궁금증 하나가 그녀의 머릿속을 하얗게 불태웠기 때문이다.

“마담M은 왜 굳이 한국으로 오겠다는 거지? 그것도 철수하겠다는 회사의 그 어마무시한 부담감을 안고 말이야.”

“그 사람 속을 우리가 어찌 알겠누.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절대 이해 불가한 천재야. 또 하나의 마케팅 전략일 수 있지.”

“천재는 무슨…… 그냥 독특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겠지.”

“아니지. 독특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야 주변에 널리고 깔렸잖아. 이런 사람은…… 그냥 천재라고 하는 거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상대해야 할 사람이 그 정도 거물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상상 외로 힘든 싸움이 될 테니까.

하지만 반박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때마침 복실이 헤드폰을 끼고 온몸으로 게임을 하다 테이블 위에 있던 팝콘을 한 번에 날려 먹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봐, 쟤부터가 정상이 아니잖아. 저런 애랑 천재는 구분을 해줘야 예의지.”

복실을 바라보는 빛나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튀어 나왔다.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마담M은 천재다.

따라서 그녀도 천재처럼 굴어야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다.

“문제는 천재를 어떻게 이기느냐, 인데.”

실제로 부딪쳐보지 않고는 절대로 그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였다.

***

다음 날.

빛나는 회사로 오자마자 인터넷 기사를 읽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이정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기사는 사실을 근거로 아픈 곳을 제대로 후벼팔 줄 아는 정의의 칼날이었다.

자극적이지 않는 문장으로 정곡을 찌르는 문체는 더 이상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KMK컴퍼니, 아직 끝나지 않았다!

KMK컴퍼니가 철수를 하지 않고 아시아 지사를 유지하기로 했다는 내용.

그러면서 아시아 지부 책임자로 마케팅 업계의 루키 ‘마담M’을 지목했다는 것.

마지막으로 과연 KMK컴퍼니는 그동안 있었던 무고한 직원들을 데리고 갈 것인가, 책임을 지워 해고를 할 것인가, 등등 문제의 쟁점을 여과 없이 끌어냈다.

역시, 이정이다.

간결한 문장에 빛나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담았다.

시작이 좋았다.

벌써 리플로 반응이 오고 있으니 말이다.

열띤 토론이 시작될 조짐이다.

시국이 어려웠지만 미국 내에서 워낙 유명한 사건으로 대대적인 보도가 된 만큼, 국제 망신을 톡톡히 당한 사건이었기에 작은 자극 하나만으로도 커다란 싱크 홀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더 이상 미루지 않고 오늘 로펌의 이사인 김정석 변호사를 마주했다.

물론 파일을 넘겨보는 김정석 변호사의 표정이 그리 탐탁지 않았지만 말이다.

“휴,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했나?”

김정석 변호사의 정직한 눈매가 빛나를 마주했다.

“자넨 지금 우리 로펌에서 수익률이 가장 좋은 변호사야. 이런 건은 박변만으로도 충분하단 말일세. 자네가 이런 건으로 한눈파는 거, 대표님이 좋아하지 않으실 거야.”

“압니다. 하지만 제가 낸 수익보다 더 큰 이익이 따른다면요?”

“더 큰 이익?”

그녀의 말에 김정석 변호사의 눈이 더욱 깊어졌다.

그 덕에 세월의 잔주름이 도드라져 보이기도 했지만 빛나는 정직하게 나이를 먹는 그 주름이 보기 좋았다.

만일 그녀에게 아버지가 있다면, 그래서 그 아버지가 지금 살아 있다면, 저런 모습이었으면 하는 바람에.

“명예요. 명예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거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 많은 사람들이 끝내지 못한 사건을 우리가 어떻게 마무리하느냐는 것이지. 자네는…… 그 사람들이 결백하다 믿나?”

“네, 믿습니다.”

“근거는?”

“말씀하셨잖아요. 사람 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그 사람들 눈을 보았습니다. 열정을 읽었습니다. 결백을 증명하는 일이 쉽지 않은 여정이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한 번도 질 거란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제가 무너지면 그들도 같이 무너지는 거니까요.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싸울 힘을 실어주고 싶습니다. 그게…… 제가 이 일을 하게 된 이유니까.”

지금까지 잊고 살았던…….

빛나는 마지막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듣지 않아도 김정석 변호사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파일을 덮고 진지하게 마주했다.

“내가 자네를 봤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

“그땐, 배고픔에 눈이 멀었었죠.”

“그래, 굶주려 있었지. 그런 자네한테 수많은 제의가 있었던 것으로 아네. 그 수많은 제의 중…… 내 손을 잡은 이유가 뭔가?”

진지한 그 질문에 빛나가 흠칫 놀랐다.

김정석 변호사가 처음 그녀에게 스카우트 제의하던 날이 떠오른다.

그때도 이처럼 춥고 헐벗은 날이었다.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맥이라는 난관에 부딪친 그녀에게 수많은 제의가 있었다.

하지만 그 제의는 부수적인 조건이 요구되었고, 빛나는 그 부수적인 요건을 승낙할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 김정석 변호사는 하늘이 준 기회였다.

이미 그녀의 뒷배경을 조사하고 들어온 김정석 변호사였지만 그 사실이 기분 나쁘지 않을 만큼 처음 본 그의 눈동자는 정직함 그 자체였다.

때문에 그가 내민 손을 단 한 번의 재고도 없이 덥석 잡지 않았겠나.

그날을 떠올리는 빛나의 진지한 눈동자가 흔들림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진짜 저를 보신 유일한 분이니까요. 제 굶주림 때문이 아니라 아이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라 말씀하셨으니까요. 겉만 화려한 제게서…… 아이들의 그림자를 본…… 유일한 눈이니까요.”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지. 그 많은 손 중에 내 손을 잡았으니까. 진실을 보는 눈. 그건 좋은 머리로 익힌다고 될 게 아니지, 타고나야 하는 거야. 그런 눈으로 그들을 읽었다면, 그게 맞는 거겠지.”

“그러면서 은근히 이사님 자랑하시는 거예요?”

빛나가 싱긋 웃자 김정석 변호사가 껄껄 웃었다.

너무 호탕해 듣는 이마저 기분 좋게 만드는 그런 웃음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둬들인 그가 파일을 그녀에게 내밀며 진지한 질문을 되돌렸다.

“그럼, 처음 만난 날 내가 했던 말도 기억하나?”

그 질문에 빛나는 낮게 읊조렸다.

“법에도 심장이 있다…… 라고 하셨어요.”

이젠 그녀의 인생 모토가 되어버린 그 명언을.

그러자 김정석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듬직하게 입을 열었다.

“때가 온 것 같군. 자네가 바로 그 심장이 되어야 할 때가.”

그렇게 주사위는 던져졌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싸움이 되었다.

***

한편, 그 시각.

그 기사를 읽는 누군가의 눈썹 끝이 살풋 구겨졌다.

KMK 건이라면, 단 한 줄의 기사도 용납할 수 없는 ‘그 누군가’였다.

남자는 기사에 딸린 리플들을 읽으며 테이블에 올려진 주먹을 더욱 꼭 그러쥐었다.

S일보 서이정.

도대체 누구길래 한동안 조용했던 그 건을 다시 수면 위로 올려놓는단 말인가.

남자는 언론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이 별것 아닌 한 줄의 기사가 재수 없으면 거대한 해일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조심스레 예측해볼 수 있었다.

물론, 마담M의 존재로 인해 잠시 이슈화되었다가 묻힐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이라는 그 어떤 경우의 수도 용납할 수 없는 남자는 결국 누군가를 호출해 은밀히 지시했다.

“이 기자, 이거. 뭐하는 새끼인지 알아봐. 그리고 마담M에 대해서도.”

***

김 변호사와 면담을 마친 빛나는 기분 좋게 퇴근 준비를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그런데 그때 회사 유리문이 열리며 언젠가 본 적 있던 헬멧 맨이 여지없이 꽃다발 하나를 들고 들어섰다.

헬맷맨은 예전에 한번 본 빛나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하는 듯 이번엔 헤매지 않고 곧장 그녀에게 다가와 꽃다발을 내밀었다.

“유빛나 변호사님, 꽃 배달 왔습니다!”

빛나가 그것을 얼떨결에 받아 들자 헬멧 맨은 곧 바로 퇴장했다.

하지만 꽃다발이 남긴 여운은 생각보다 강했다.

“어머, 남자친구분이 또 꽃다발 보냈나 보다! 대박 부러움!”

“부럽긴 뭐가 부러워! 저게 얼마나 한다고! 연애 초기 땐 뭔들 못 해? 유변, 사귄 지 얼마 안 됐잖아! 한참 싱그러울 때지.”

이렇게 부러움과 질투가 한꺼번에 폭발했으니 말이다.

요즘 들어 박변은 굉장히 예민해 그녀가 하는 일마다 시비를 걸었다.

빛나에겐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일어나 누구보다도 행복한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보냈지만 프러포즈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박변은 기적은커녕 아주 지독한 크리스마스의 악몽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이별.

본인의 말로는, 자신이 차버렸다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좋아 죽던 박변이 아닌가.

그러므로 전혀 설득력 없는 말이었다.

게다가 빛나의 웃는 얼굴을 보며 퉁퉁 불어 터진 심통 어린 얼굴이 더욱 그 의심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었다.

“박 변호사님, 요새 꽃다발 되게 비싸요. 저 정도 퀼리티면 10만 원은 거뜬히 넘을걸요?”

박변의 얼굴이 대번에 흙빛으로 변했다.

하지만 빛나는 박변이 그러거나 말거나, 꽃다발 향기를 맡으며 슬며시 웃어 보였다.

아니, 어쩌면 대놓고 웃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승현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웃음이 나니 말이다.

퍽퍽한 그녀의 하루 일과에서 유일하게 웃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유일하게 웃을 수 있는 순간을 박변이 질투 어린 한마디로 순식간에 앗아갔다.

“보니까 차도 되게 비싼 차 타던데, 유변 남자친구는 뭐하는 사람이야?”

별거 아닐 수 있는 질문.

누구나 궁금할 수 있는 질문.

그리고 그녀의 남자친구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대답.

“그건…….”

그러나 빛나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오늘 아침에도 복실과 함께 운동하러 나간 것으로 보아 분명 백수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 들었던 소문으로는 집이 조폭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아직 정확히 확인된 바는 없다.

그녀에게 집안 문제가 콤플렉스이듯 남에게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아직까지 그녀를 소극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확한 건, 집안이 어떻든 확실히 돈은 있다는 사실.

물론 그 돈이 승현을 어디까지 뒷받침해주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지금은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어머, 설마 남자친구가 뭐하는지 모르는 건 아니지?”

“남자친구가 뭐하는지가 그렇게 중요해?”

“그냥, 궁금하니까 그러는 거지. 유변이 그러게 말 안 하고 있으면 더 궁금하잖아?”

박변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자 그 난처함은 괜한 짜증으로 나타났다.

“남의 남자친구가 뭘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 남친이야, 신경 꺼줘. 제발!”

빛나는 문을 쾅 닫고 들어와 꽃을 화병에 꽂고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이 강추위에 밑에서 기다리고 있을 승현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남의 남자친구가 뭘 하는지 왜 그렇게 궁금한데? 데리고 살아도 내가 데리고 살 건데!”

성질나 죽겠다. 무시할 수 없는 그들의 궁금증이 더욱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런데도 당당하게 물어볼 자신이 없다.

뭐하냐는 질문에, 진짜로 ‘논다’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 같아서.

사무실을 나오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직원들이 보인다. 하지만 거기에 박변은 없었다.

“박변은?”

“박 변호사님이요? 갑자기 무슨 볼일이 있는지 서둘러 퇴근하시던데요?”

“그래?”

빛나는 백을 열어 핸드폰을 챙겼는지 확인하며 돌아섰다.

그러다 갑자기 쌩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박변, 설마.”

아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박변은 오늘도 여지없이 승현이 밑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암울하게도 박변은 의외의 집요함과 주제넘도록 넘치는 호기심의 소유자였다.

결국 그 설마가 사람 잡았다.

건물을 나서는 순간, 박변과 승현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그것도 박변은 평소엔 잘 보이지 않는 눈웃음까지 치면서 말이다.

“위승현!”

빛나는 부리나케 달려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 막고 박변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어머, 퇴근하는데 우연히 승현 씨를 봐서 말이야.”

“우연…… 히?”

빛나의 눈썹이 허공으로 치켜 올라갔다.

우연이라니, 우연을 가장한 조작이겠지!

흥, 어림없다! 만인들이 보는 앞에서 위승현 기죽이는 일 따위, 절대 없을 테니까!

“미안하지만 내가 질투심이 좀 많아서 말이야. 내 남자친구가 여자랑 눈만 마주쳐도 아주 질색이거든!”

“어머, 유변이? 몰랐네? 언제부터?”

“지금부터! 애랑 만난 다음부터! 딱 봐도 여자 불안하게 만드는 얼굴이잖아? 비주얼이 좀 훌륭해야 말이지!”

헛.

듣고 있던 승현의 입가에 헛웃음이 돌았다.

하지만 돌아선 빛나의 매서운 눈을 보곤 금세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기분은 좋다. 천하의 유빛나가 질투를 다 하다니.

물론 질투라고 하기엔 조금 미심쩍은 상황이 많이 있었지만 말이다.

“음, 좋아. 유변이 정 그렇다면야. 담에 또 봐요, 승현 씨.”

박변이 인사를 하며 돌아섰다.

승현이 씨익 웃으며 그 인사를 받아주려 했지만 빛나가 확 돌아서며 그를 노려보았다.

“박변이 뭐래? 뭐 물어봤어?”

“그냥. 안부 정도?”

“그리고?”

“음, 무슨 일 하냐고…….”

그럼 그렇지! 내 이럴 줄 알았다!

빛나는 억울해죽겠다는 듯 발을 동동 굴리며 소리쳤다.

“그래서! 그래서 뭐라고 했어!”

갑자기 소리를 빽 지르는 통에 놀란 승현이 한 발자국 물러서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아무 말도…… 대답하려고 하는데 네가 왔어.”

그 말에 빛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승현의 손을 잡고 그를 운전석 쪽으로 데리고 가 차 문을 열어주었다.

“빨리 타.”

“이건 내가 너한테 해주는 건데.”

“누가 해주면 어때? 오늘은 그냥 타.”

빛나가 너무 예민하다.

그래서 승현은 얌전히 올라타고 빛나 또한 조수석에 올라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일이 잘 안 풀려? 저 여자가 네 라이벌이야?”

“무슨 일 없었고. 일도 잘 풀려. 그리고 쟨 저 혼자 나를 라이벌로 생각하는 애야.”

대단하다. 이 상황에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대답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오늘따라 예민한 행동을 보이는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승현에게 빛나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위승현.”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독 진지해 보였다.

그래서 승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네가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왜냐면, 내가 먹여 살릴 테니까.”

너무 진지해서 도중에 말을 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남 앞에서 절대 기죽지 마.”

세상에, 그제야 그녀가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네가 누구든 상관없이…… 난 널 사랑할 테니까.”

말해줘야 옳았다.

그런 걱정 따윈 절대 하지 말라고.

네가 위승현의 여자라는 사실, 절대 부끄럽지 않게 해주겠다고.

그런데 진지한 그녀의 눈동자가, 심통으로 퉁퉁 부은 그녀의 입술이 너무 예뻐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대신 그는 그녀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는 사랑스러운 키스를 했다.

“유빛나. 나, 많이 사랑하나 보네.”

예쁘다, 예쁘다 이렇게 예쁠 수가 있나 싶다.

“당연하지. 나는 네가 어떤 집안이라도 상관없어.”

“어떤 집안?”

과연 그녀는 그가 어떤 집안인지 알고 하는 말일까.

“조폭이든, 깡패든 상관없다고.”

모르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전혀 틀린 말도 아니었다.

깡패는 깡패지. 정치 깡패.

승현의 입가가 보기 좋게 치켜 올라갔다.

이렇게 예쁜 여자가 모든 걸 걸고 사랑하겠다는데 마다할 남자가 있을까.

“우리 빛나, 제대로 삐졌네. 진정 좀 할까? 내가 커피 사올게.”

그가 차에서 내리기 위해 몸을 뒤로 물리자 빛나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니! 내가 사올 거야! 이젠 그런데 돈 쓰지 마.”

“아니 그 정도는 내가…….”

“안 돼! 안 돼! 내가 사올 거라고!”

아이고야, 한 번만 더 사오겠다 엉덩이 들었다간 유빛나 곧 울겠다.

결국 승현은 빛나가 이 추위에 다시 차에서 내려서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아야만 했다.

“뭐, 아메리카노?”

승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빛나는 차 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러더니 다시 차 문을 열고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뭐, 잊어버린 거 있어?”

“아니. 앞으론…… 꽃도 보내지 말라고. 예쁘긴 한데, 그럴 필요 없다고.”

그래. 요즘 같은 계절에 그 꽃이 얼만데 그렇게 보낸단 말인가.

빛나는 승현에게 딱 못을 박고 야무진 걸음걸이로 돌아섰다.

그 뒷모습이 얼마나 당차고 예쁜지 승현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과연, 제 남자 먹여 살리겠다는 여자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웃음이 났다. 너무 행복해서.

-네가 누구든 상관없이…… 난 널 사랑할 테니까.

게다가 과감한 사랑고백까지.

승현은 미끄러운 길로 인해 핸드백을 크로스로 매고 종종 걸음으로 걸어가는 빛나의 뒷모습을 행복한 듯 지켜보았다.

그러다 빛나가 커피숍으로 사라지자, 금세 아몬드형 눈매를 치켜세우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어떤 새끼가 남의 여자한테 꽃다발을 보낸 거야, 대체!”

***

그날 오후.

밤비행기로 한 여자가 도착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에 키가 훤칠하게 큰 여자다.

또한 깊은 눈매와 또렷한 이목구비가 인상적이었다. 누가 봐도 매력적인 혼혈이다.

여자가 게이트를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한 남자가 그녀의 곁으로 붙었다.

“긴 비행인데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는 무슨.”

“오늘은 호텔로 바로 가셔서 휴식을 취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에요. 내일을 위해서라도.”

유창한 한국어 실력이었다.

여자는 공항 밖에 대기 된 고급 세단에 오르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조수석에 올라탄 남자를 바라보며 묻는다.

“그분은?”

“그게……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연락하지 말고 그냥 쉬시라고.”

여자의 질문에 남자는 조금 곤란한 듯 대답했다.

그러자 여자는 결국 핸드폰을 집어넣으며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 정말…… 컨트롤 안 되는 피곤한 사람이야.”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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