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설레게하는 그대-28화 (28/94)

28. 양심도 없는 도둑놈.

2018.03.11.

생각보다 잠을 잘 잤다.

어젯밤 침대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몸이 너무 떨려 밤을 꼴딱 샐 것 같더니, 어느새 잠이 들어 버렸다.

빛나는 립스틱을 바르며 어젯밤을 떠올렸다.

생애 최악의 밤으로 기억되어도 모자란 어젯밤이었는데 승현이 그 기억을 바꿔버렸다.

그와 함께 잠이 들었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처음으로 행복한 꿈도 꾸었다.

일어나서도 긴 여운을 남길 만큼 만족스러운 꿈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빛나를 행복하게 했던 건, 어슴푸레한 어둠속에 그녀와 마주했던 그 눈동자였다.

물론 현실이 아닌 허상에 불과했지만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했더랬다.

그 생각을 하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유빛나, 정신 차려. 싫다고 할 땐 언제고, 그렇게 응큼한 상상을 하면 진짜…… 변녀 같잖아!”

그녀는 스스로를 타이르며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섰다.

그러나 다잡은 마음과는 달리 발길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고 몇 분 동안이나 엘리베이터 앞을 서성였다.

벌써 엘리베이터를 두 대째 그냥 내려 보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승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더 이상 지체 했다간 지각할지도 모른다.

“오늘은 운동 안 하나?”

항상 이 시간이면 우연치 않게 만났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망설이던 발걸음이었다.

하지만 굳게 닫힌 승현의 집 현관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빛나는 승현을 만나지 못한 채 아파트를 벗어나야 했다.

***

출근을 해서 어떻게 오전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작은 미팅도 있었고, 의뢰인도 두 명이나 만났다.

점심시간이 되었지만 빛나는 예전처럼 검찰청으로 달려갈 수 없었다.

대신 전화기 앞에 앉아 한참을 고민했다.

이상했다. 지금쯤이면 전화를 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오늘 따라 승현은 전화 한 통이 없다.

평소 그녀가 했던 행동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였지만, 왠지 모르게 서운함이 밀려왔다.

“전화를 해? 말아?”

머리라도 쥐어뜯고 싶었다.

“고마우니 밥이라도 먹자고 할까?”

하지만 지금 전화해 먼저 점심을 먹자고 하면 너무 속이 빤히 드러나는 것 같아 그마저도 못하겠다.

애가 닳았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과 같은 자신의 심정 변화를 ‘미안함’과 ‘고마움’ 때문이라고 정의했다.

승현에게 생긴 감정은 인정하면서도 선 듯 제 머리까지 이해시키지는 못한 것이다.

“그래. 인간의 탈을 썼다면, 고맙다는 말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하는 거 아냐? 근데 나는 어제 그 말을 못했단 말이지.”

전화기를 들었다.

수십 번 망설이고 수백 번 고민해서 겨우 한 번 든 전화였건만, 승현은 받지 않았다.

“변호사님, 친구분 오셨는데요.”

어쩔 수 없이 전화 수화기는 내려놓는데 이정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어제 일 때문에 걱정이 되어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온 모양이다.

그러나 의외로 다크서클 하나 없이 맑은 그녀의 얼굴에 의아함을 보였다.

“생각보다 멀쩡하네. 다 죽어갈 줄 알았더니.”

“사고를 당한 건 난데, 넌 얼굴이 왜 그래?”

빛나 역시 이정의 헬쓱한 얼굴을 보며 물음을 던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정의 얼굴은 취재를 위해 사흘의 잠복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채 빈손으로 이제 막 돌아왔을 때 볼 수 있는, 바로 그런 얼굴이었던 것이다.

“야, 말도 마라. 한 숨도 못 잤다. 내 생애 가장 열 뻗고 가장 기가 막힌 밤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정말 괜찮은 거지? 괜찮은 척하는 게 아니라?”

“그깟 일로? 그럼 유빛나가 아니지. 생각 중이야. 그 자식을 어떻게 할까. 죽일까, 살릴까. 가만 안 있을 거야. 다시는 그런 짓 못 하게 버릇을 고쳐놓고 말겠어.”

그녀는 책상 위에 올려진 손을 하얀 뼈마디가 보일 만큼 힘 있게 그러쥐며 이를 갈았다.

그 모습에 이정은 편안한 소파에 몸을 묻으며 손을 내젓는다.

“아이고, 유 여사. 그 쓰레기 같은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네. 내 얼굴이 왜 이렇게 처참한 몰골이게? 이게 다 그 녀석 시궁창에 처박힐 때까지 인내하며 열 뻗은 내 뒤통수 달래느라 그런 거 아니겠어?”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더 이상 강석훈은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이야기지. 김병훈 검사에 그 자식 아버지 등에 업은 것 치고는 죗값 제대로 받고 있으니까.”

“아니, 어떻게?”

“일단, 1차로 승현씨한테 늘씬하게 두들겨 맞았고. 2차로 승현 씨가 때린 데 복실이가 또 때렸으며, 3차로 오정오란 인간한테 비웃음을 당했거든. 모르긴 몰라도, 이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 걸레가 되어 있을 거야.”

어제는 너무 정신없어 그냥 빠져 나오긴 했지만 이정의 말을 듣고 보니 기고만장했던 강석훈의 수난시대였던 모양이다.

굳이 그녀가 손을 쓰지 않아도.

하지만 빛나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어제 본 강석훈은 그 어떠한 법도 컨트롤 할 수 없는 ‘무법자’였다.

정의로운 법의 정립과 집행을 위해 모든 책임을 다 해야 하는 빛나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그런 무법자.

그래서 그녀는 두들겨 패고 비웃음을 던지는 그런 원초적인 방법이 아닌 제대로 된 ‘법’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니, 나는 그런 거 말고. 법의 심판을 받게 하고 싶다고.”

빛나가 단호하게 말하자 이정은 몰려오는 피곤에 이젠 아예 소파에 드러누워 입을 열었다.

“누가 변호사 아니랄까 봐, 깐깐하기는. 뭐 어쨌든, 그것도 걱정 안 해도 돼. 걔 아직도 조사 받느라 경찰서에서 못 나오고 있거든.”

“그래봐야 김병훈 검사가 뒤 봐주고 있는 거 아냐? 금방 풀려나겠지.”

“아니, 이번엔 쉽지 않을걸? 사람 잘못 건드렸거든.”

“뭐? 나 말고…… 또 건드린 사람이 있어?”

빛나가 놀라 묻자 이정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있지. 위승현.”

“뭐?”

“이야- 승현 씨 뒤끝 진짜 길더라! 근데 난 뒤끝 긴 남자가 그렇게 멋있는 건 또 첨 봤어요.”

“…….”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말이야, 강석훈이가 도핑 테스트도 제끼고 유유히 걸어 나가는데 갑자기 승현 씨가 나타나서 그 녀석 뒷덜미를 덥석 움켜쥐더니 질질질 끌고 와서는 걔네 친구들이 앉아 있는 그 자리에 쓰레기봉투처럼 집어 던진 거야! 너도 봤어야 하는데! 아호! 내가 말이지, 그 순간만 생각하면 내 평생 소화제는 안 먹어도 될 것 같아!”

“승현이가 다시 경찰서로 갔어?”

“으엥? 몰랐어?”

이정이 소파에서 몸을 반쯤 일으키며 물었지만 빛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어제 통화를 마지막으로 그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승현이 경찰서로 돌아갔다면 그녀와 통화를 끝낸 직후였으리라.

“야, 완전 사이다! 진짜 유쾌, 통쾌, 상쾌, 삼종 세트였다고! 강석훈이 김 검사랑 제 아버지 등에 업고 목에 잔뜩 힘주고 있다가 완전 당한 거 아냐! 도핑테스트도 해서 이젠 빠져나가지도 못해.”

“김병훈 검사가…… 그걸 보고만 있어?”

빛나가 의아함에 되묻자 이정은 더욱 흥분해 입을 열었다.

“내 말이! 나도 그게 궁금했다고! 맨처음엔 경찰들도 김 검사 전화를 받았는지 강석훈한테 수갑 하나도 못 채우고 그냥 내보내주더니, 다른 전화 한 통에 완전히 태도 바꿔 강석훈이를 패대기치던데?”

“그래? 누가?”

“그건 나도 모르지. 근데 강석훈이가 김 검사한테 말해서 옷 벗게 만들겠다고 협박하니까, 경찰들이 그러더라. 차라리 옷 벗는 게 ‘그 인간’에게 걸리는 것보다 낫다고.”

“그…… 인간?”

도대체 ‘그 인간’이 누구일까.

누구길래, 전화 한 통으로 김병훈 검사의 말을 뒤집어 버린단 말인가.

“아, 몰라! 머리 아파. 어쨌든 중요한 건, 강석훈이가 네 소원대로 제대로 된 법의 심판을 받고 있다는 거지. 그러니까 넌 신경 안 써도 돼.”

“어떻게 신경 안 써. 당한 건 난데.”

“네 이름은 절대 거론 안 될 거야. 솔직히 거기 CCTV도 없어서 ‘그 혐의’를 증명하는 건 불가능하대. 그럴 바엔, 아예 마약 혐의로 밀고 나가자고 하던데. 그것만 해도 꽤 중죄라고.”

이정은 석훈이 빛나에게 한 짓을 ‘그 혐의’라고 언어순화를 하며 옳은 말만 해댔다.

성범죄는 솔직히 증명하기가 굉장히 힘든 범죄 중 하나였다.

게다가 미수로 그친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소득 없는 감정싸움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럴 바엔, 이정의 말대로 마약혐의로 밀어붙이는 편이 승산이 크다.

왜냐면, 아직 우리나라에선 마약에 대해 꽤나 엄한 제제를 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도대체 누구 생각일까.

법조인이 아니면 세울 수 없는 전략, 게다가 피해자인 빛나의 입장까지 고려한, 아주 신중하고 만족스러운 전략이었다.

그래서 빛나는 조심히 예상을 해보았다.

경찰들이 말하는 ‘그 인간’이 어쩌면 그녀와 같은 법조계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

“아, 내가 진짜 그 자식 시궁창에 제대로 처박히는 꼴을 이 두 눈으로 꼭 확인해야 하는데!”

[걱정 마. 내가 중간중간 신경 써 체크할 테니까.]

핸드폰 너머로 부드럽게 흘러 들어오는 승준의 목소리에 승현의 구겨진 눈썹이 어느 정도 펴졌다.

마음 같아선 마약 혐의에 그보다 더한 것을 뒤집어 씌워서라도 강석훈 그 자식을 평생 고통 받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서 있는 그의 자리가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럴 땐 간혹 그가 ‘그’가 아니었더라면 하는 위험한 상상을 하게 된다.

정말 그랬다면 제대로 사고 한번 쳐서 강석훈 따위 세상 구경 못 하게 조용히 묻어버리는 건데.

[일단, 김 검사가 뒤에 버티고 있어서 징역형은 힘들 거야. 같은 법조인으로 그쪽도 존중은 해줘야 하니까.]

“그럼, 그 자식…… 버젓이 걸어 다니는 꼴을 내가 봐야 한단 말이야?”

조금 진정이 되었던 승현이 대번에 눈썹을 치켜 올리며 반문했다.

[마약 혐의는 벌금형 자체도 굉장히 무거워. 그리고 교육이수부터 보호관찰, 사회봉사 등의 처분도 함께 내려지기 때문에 그 인간 성격에 충분한 죗값이 될 거야.]

“그 자식한테 그 벌금이 돈이겠어?”

[실형만이 최고의 형벌은 아니야. 사람에 따라 때론 보호관찰이나 사회봉사가 더 괴로운 형벌일 때도 있어.]

“…….”

[그러니 넌, 여기서부터 손 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누구보다 승현의 성격을 잘 아는 승준이 조용히 충고했다.

그렇지 않으면 직접 나서 강석훈을 응징할 가능성이 농후했기에.

[미국이나 잘 갔다 와. 여기 일은 신겨 쓰지 말고.]

그 말에 승현은 너무 놀라 소파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아, 맞다! 나 오늘 비행기 타야지!”

뒤끝 작렬 위승현, 그 길고 긴 뒤끝으로 강석훈에게 너무 집중한 나머지 오늘 있을 중요한 비행 일정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 젠장! 큰일이다. 짐도 안 쌌는데!”

행여나 강석훈이 빠져나갈까 봐 아침까지 경찰서를 지켰더랬다.

그렇게 잠도 못 자고 와서 어제저녁 미처 끝내지 못했던 화상미팅도 마무리했다.

그리고 이제 숨 좀 쉴 만하니, 진짜 중요한 일정이 남아버린 것이다.

“어쩌지? 빛나한테 전화 한 통도 못 했는데!”

승현은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샤워도 해야 하고, 빛나한테 전화도 해야 하고, 짐도 싸야 한다.

그야말로 할 일이 태산이란 말이다.

그렇게 승현은 중요한 순간 결정력 장애의 끝을 보이며 갈팡질팡하다 결국 욕실로 먼저 뛰어 들어갔다.

그때, 테이블에 있는 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빛나였다.

하지만 그는 그 전화를 받지 못했다.

***

점심시간 이후로도 몇 번이나 통화 시도를 했지만 그때마다 승현은 번번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예정보다 일찍 퇴근해 오는 길에도 그녀는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무슨 일 있나?”

어제는 정신이 없어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행여나 강석훈에게 어디 한 군데 잘못 맞은 것이 뒤늦게 터진 건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괜한 걱정에 불과했다.

하루 종일 그녀의 속을 새까맣게 태워버린 승현을 저 멀리 아파트 입구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블랙 코트를 입은 그의 압도적인 비주얼은 어슴푸레한 밤이 내려앉기 시작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생생했다.

한참 멀리 있는 그 모습만 봐도 운전대를 잡은 빛나의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시작할 만큼.

심장이 쿵쿵 뛰고 감전된 사람마냥 손끝이 찌릿했다.

드디어, 드디어 그를 만났다!

이젠 자연스럽게 고마움을 표현하면 되는 것이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빛나는 옥외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러곤 내리기 전 룸미러를 통해 슬쩍 제 모습을 확인했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모르겠다.

어제와 오늘, 승현은 달라진게 하나 없는데 그녀만 달라졌다.

아니, 세상은 그대로인데 오직 그녀만 바뀌어버린 느낌이다.

그래도 굳이 표현하자면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설레고 행복했다. 누군가를 만나기 직전 바로 비금 이순간이 이렇게 짜릿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쿵쾅, 쿵쾅.

가슴에서 거대한 지진이 일고 있었다.

승현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심장은 미친 듯이 춤을 춘다.

이 일을 어쩌면 좋나.

얼굴도 화끈거리는 것이 뺨에 복숭아 하나를 매달고 있는 느낌이다.

‘유빛나, 정신 차려. 넌 지금 어제 일로 고마움을 표현하는 거야. 그러니까 평소처럼 차분하게…….’

그러나.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을 만큼 그와의 거리를 좁힌 순간,

거칠게 춤을 추던 그녀의 심장이 뚝 멈추어버렸다.

“이거 하나만 옮기면 됩니까?”

“네. 그거 하나예요.”

“알겠습니다.”

그제야 모든 상황이 보이기 시작했다.

택시 기사가 캐리어 하나를 트렁크에 실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통화를 하기 위해 돌아서다 그녀를 마주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놀란 순간이었다.

“응, 지금 출발해. 형…… 도착해서 전화할게.”

승현은 핸드폰을 끊고 빛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넋 나간 눈동자는 핸드폰과 함께 쥐어진 그의 여권에 고정된 채 떠날 줄 몰랐다.

“빛나야…….”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걸음 다가서자, 그녀는 한 걸음 물러났다.

“어디…… 가니?”

“응. 잠깐, 미국에.”

“왜?”

“일도 있고, 때마침 동생도 거기 있고…….”

빛나의 커다란 눈동자가 그를 마주했다.

오늘따라 훤칠한 그의 모습이 그녀의 눈을 아프게 찔러왔다.

“너 진짜…… 아니다, 아니야. 그래, 가도 좋아. 근데…… 나한테 미리 말해줄 수는 없었니?”

“미안, 공항에서 전화하려고 했어. 어제 일 때문에 나도 정신없었지만 너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서.”

그의 탓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동안 그에게 한 행동으로 보면, 빛나는 이렇게 당해도 싸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승현의 탓으로 돌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지난날을 후회하며, 돌아서는 그의 소매 자락을 붙들고 늘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좋아한다더니. 좋아 죽겠다더니, 결국…….”

“좋아해. 예전에도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다만…….”

“다만?”

“다만…… 나 혼자 하는 연애니까, 나 혼자 좋아하는 상황이니까…… 굳이 미리 말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하루 이틀 전에 이야기한다는 게 그만 타이밍을 놓쳐버린 거고.”

빛나는 할 말이 없었다. 승현을 저렇게 망설이도록 만든 게 다름 아닌 바로 그녀였으니까.

“그런데, 이제 보니…… 내가 틀렸나 보네.”

“뭐?”

“우리 유빛나 표정을 보니, 미리 말을 했어야 했나 봐.”

승현의 고개가 살짝 오른쪽으로 기울며 장난기 가득한 눈매에 빛이 반짝했다.

그와 동시에 묘한 웃음기가 그의 입가를 맴돌자, 그렇지 않아도 살짝 치켜 올라간 입꼬리가 더욱 예쁘게 말려 올라갔다.

“왜 웃어!”

그 웃음에 열 받은 빛나가 눈썹을 곤두세우며 화를 냈다.

꼭꼭 숨겨두었던 마음이 들킨 것 같아 가슴이 철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나, 승현은 이미 그녀의 마음 깊은 곳까지 모두 훑어버렸는데.

첫 데이트를 하던 그날, 빛나의 마음을 보았다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긴가민가하여 여전히 조심스러웠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승현은 잘잘한 의심까지 전부 날려버리며 확신했다.

빛나가…… 그에게 조심스레 첫 발을 내디뎠다는 것을.

“좋아서. 너 이런 반응 보니, 기분이 좋아서.”

“웃지 말랬다! 네가 뭘 상상하든…… 절대 아냐!”

우겨보았다. 하지만 절대 믿을 리 없는 승현이다.

한번 들켜버린 그녀의 마음은 다시 주워 담을 길이 없었다.

그 마음이 차고 넘쳐, 바보라도 알 수 있을 만큼 분명했기에.

괜스레 열 받은 그녀에게로 승현이 한 발자국 다가섰다.

“거기 서! 오지 마!”

창피해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가 조금이라도 제 마음을 숨겨보고자 파르르 떨며 승현의 접근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녀가 잊은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모르나 본데, 어젠 네가 먼저 나한테 안겨왔다?”

“그건…….”

“들켰다, 너. 그러니까 더 이상 도망갈 생각 하지 마, 유빛나.”

그렇게 빛나는 승현의 품에 안겨들었다.

어젯밤 그녀의 기억보다 더 넓고 더 따뜻한 품이었다.

“미안. 이런 상황에 가게 돼서. 근데 금방 올 거야. 약속해.”

“…….”

“나 없는 동안 밥도 잘 먹고, 잘 자고, 좋은 꿈 꿔야 돼. 알았지?”

결국 빛나는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승현은 그런 그녀가 너무 사랑스럽고 안타까워 한참을 품에 안고 놓질 못했다.

잠시 후, 승현이 떠났다.

그제야 빛나는 자존심 때문에 꼭꼭 눌러 참고 있던 말을 쏟아냈다,

“나쁜 자식…… 도대체 언제 올 건데!”

나쁘다.

진짜 나쁘다.

잠깐 안겼을 뿐인데 그가 남겨둔 체온은 상상 이상으로 따스했다.

때문에 그 따스함이 머물다 간 자리가 유독 차갑고 쓸쓸하다.

정말 잠시 머물렀을 뿐인데, 그 짧은 시간에 승현은 빛나의 모든 것을 훔쳐가 버렸다.

“도둑놈…….”

그야말로 증거도, 증인도 없는 완벽한 솜씨였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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