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뒤끝 작렬, 위승현
2018.03.07.
계단이라곤 5층 이상 올라가본 경험이 없는 그가,
엘리베이터 없으면 5층 이상은 돌아보지도 않는 그가,
일생일대 처음으로 17층의 계단을 올라섰다.
그리고 경이로운 그 기록의 결과는,
“헉! 헉! 아, 젠장! 아이고, 힘 빠져!”
곧 주저앉을 것 같이 후들거리는 다리였다.
승현은 비상계단 입구를 벗어나 호텔 복도를 벽에 의지한 채 걸으며 이를 갈았다.
“개복실, 오정오…… 내 이 웬수들을 쌍으로 붙여놓는 게 아니었는데!”
그가 파티룸에 도착하자 그 앞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들이 일단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승현의 사나운 눈빛에 결국 길을 터주고 만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파티룸.
꽤 넓은 장소인 데다 조명도 어둡고 사람도 많았지만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개복실, 오정오.
이 두 사람의 조합만으로도 이 파티장은 꽉 찬 것이나 다름없을 만큼 요란스러웠으니.
가장 시끄럽고, 가장 난장판인 중심에 그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승현의 예상은 어김없이 적중했다.
“대박! 저걸 한꺼번에 다 마셨어! 여자 맞아?”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기가 막혀 하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바 중앙으로 다가섰다.
그곳엔 복실이 제 앞에 놓인 잔을 노려보며 비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등 뒤로 정오가 어깨를 토닥이며 열정적인 응원을 해댄다.
“개복실, 이번에도 넌 할 수 있어! 난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 거야! 아자, 아자, 파이팅!”
그 모습에 승현은 기겁을 했다.
복실의 앞에 놓인 작은 맥주잔, 그리고 그 옆엔 50도가 넘는 술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젠 묘기를 넘어 기행을 할 예정인 모양이다.
그걸 또 정오는 옆에서 부추기고 있고.
다행히도 승현은 복실이 그 잔을 입에 털어 넣기 전에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억! 이거 한 잔만 마시면 되는 거였다고!”
“미쳤냐? 이 정도면 묘기를 넘어 엽기야! 식도 다 타서 침 흘리면서 자고 싶어?”
“에이, 아깝다!”
복실은 진심으로 안타까운 듯 승현이 저 멀리 밀쳐버린 맥주잔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네가 지금 그럴 정신이야? 이것들이 전화도 안 받고! 빛나랑 이정씨는! 모른다고 하기만 해.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승현의 분노에 정오는 비겁하게 복실의 등 뒤로 숨었다.
물론, 숨는다고 숨겨질 체구가 아니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승현의 눈에서 나오는 분노의 레이저가 몸에 닿는 면적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었다.
그때, 다행히도 저쪽에서 이정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 저기 있다, 이정 씨!”
정오가 반가움에 소리치자 승현의 시선이 돌아갔다.
하지만 빛나를 볼 수 있을 거라 잔뜩 기대에 찼던 그의 눈빛은 홀로 선 이정의 모습에 금세 어둡게 가라앉았다.
“빛나는요?”
“그게…… 분명 화장실에 간다고 했는데, 다 찾아봐도 없어요. 무알코올 칵테일만 마셔서 맨 정신이라 연락 없이 사라질 애가 아닌데…… 전화도 안 받고.”
승현은, 그 사실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했다.
맨정신에 빛나가 친구들에게 연락도 없이 사라졌다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라는 거니까.
“여기 룸이 몇 개야!”
버럭하는 승현의 모습에 간담이 서늘해진 정오가 순순히 대답했다.
“여기 룸 세 개밖에 없어. 근데 말이야, 승현아. 그 룸은…… ‘그거’ 하는 애들 전용이라서 말이야.”
정오는 속삭이듯 ‘그거’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 말의 속뜻을 제대로 이해한 승현의 눈썹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말했잖아. 좀…… 험하게 논다고.”
정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으나 승현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돌아서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 기겁한 정오가 따라 나섰다.
“야, 승현아! 조심해야 돼! 걔네들 제정신이 아니라고!”
조바심에 경고를 했지만 승현의 귀에 들릴 리 없다.
그렇게 돌아선 그들 뒤로 복실이 낮은 욕설을 내뱉으며 따라 나섰다.
“젠장…… 내가 좀 더 신경 썼어야 하는 건데.”
아주, 험한 광란의 파티가 예고되는 순간이었다.
***
“이, 이봐요! 형법 제276조, 감금죄!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 원 이하의 벌금이라는 거, 몰라요? 이거, 범죄라구요!”
빛나가 분명한 목소리로 석훈을 올려다보며 말했으나 돌아온 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비웃음뿐이었다.
게다가 석훈은 누가 봐도 매력적인 그녀를 내보내줄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왜냐고?
오늘은 그의 생일이었고, 이 밤의 온전한 주인이었기에 이 정도 유희는 당연하다 생각했다.
“나도 한마디 해두지. 여긴, 치외법권이라서 말이야. 그깟 세상 법 따윈 안 통해.”
말을 마친 석훈이 그녀의 헐벗은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 끈적한 손길에 빛나는 경기를 일으키듯 깜짝 놀라며 물러섰지만 석훈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너무 날 세우지 말라고. 그럼 너만 아플 테니까.”
그가 소름 돋는 웃음을 보이며 그녀의 허벅지를 쓸어내리자 놀란 빛나가 뺨을 사정없이 올려붙였다.
쫘악!
코를 자극하는 매캐한 연기를 뚫고 날카로운 마찰음이 방 안을 갈라놓았다.
무서울 정도의 침묵이 그들을 찾아왔다.
그 와중에도 빛나는 씩씩거리는 숨을 고르며 흩어진 머리카락을 바로 했다.
“말했지, 이 자식아. 여기서 그만두라고.”
차분하게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와는 달리, 눈이 시큰하게 달아올랐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볼 수 없을 만큼 반듯하게 서 있는 척추와는 달리, 손발은 파르르 떨려왔단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발단이었다.
눈물이 가득 차오른 눈으로 석훈과 시선을 마주한 순간, 그녀는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어버렸다.
잔뜩 성이 난 눈동자, 그 검은 눈에서 분노가 아닌 광기를 읽었기 때문이다.
“감히, 너따위가…… 날 쳐?”
석훈에게 더 이상 빛나의 신분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온전히 주인이 되어야 하는 오늘 같은 날, 누군가에게 그 주도권을 빼앗겼단 사실 하나만으로도 석훈의 입장에서 그녀는 절대 용서 할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아악! 제발요!”
불이 번쩍 하는 순간, 빛나는 엄청난 힘에 떠밀려 룸 안에 있는 화장실로 몰렸다.
제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두 배나 되는 석훈을 쳐내기란 쉽지 않았다.
“우리, 이성적으로 이야기해요. 더 가면, 정말 당신 범죄자 되는 거라구요! 제발…… 아악!”
사정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이성의 잔재조차도 깡그리 날려버린 그 자리엔 광기만 잔뜩 들어차 있었으니까.
석훈의 무자비한 손길이 그녀의 스커트 자락을 파고 들었다.
그저 훑어 내리는 손놀림이었는데도 맨살에 닿는 그 감촉이 소름 돋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공포였고,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참담함이었다.
그제야 며칠 전 승현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다.
-왜, 이마에 변호사라고 쓰고 다니게?
그땐 흘려 들었던 그 한마디가 여실하게 와 닿는 순간이었다.
승현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태초의 어둠을 정복하고 화려하게 다시 태어난 이곳에선 그녀가 목숨처럼 떠받드는 그 ‘법’도 부질없는 무용지물임을.
석훈은 그 어둠속에서 통제 불가능한 ‘무질서’였다.
법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그녀에게 그런 석훈의 세계는 두려움 그 자체였고.
빛나는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흡…… 제발.”
1분 1초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몸을 더듬던 그 굵직한 손이 말없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선에 머물던 그 끈적한 입술도 마법처럼 사라졌다.
“으어-억!”
쿵!
머리를 진동하는 소음과 함께 그녀의 몸에 단 1미리의 오차도 없이 들러붙어 있던 석훈의 몸이 말끔히 떨어져 나가버린 것이다.
놀란 빛나가 눈을 떴을 때, 믿을 수 없는 ‘그’가 눈앞에 있었다.
진짜, 거짓말처럼.
“으, 머리야. 어떤 새끼가 감히…… 너 내가 누군지 알아?”
“그건 관심 없고, 내가 누군진 알지.”
“뭐야? 너, 뭐하는 새끼야!”
“저 여자 애인.”
퍽!
***
무자비한 발길질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훈은 자신을 향해 이토록 살벌한 분노를 내뿜는 상대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통증 때문에 시야가 흐려졌기 때문이다.
“감히, 나도 함부로 손 못 대는 내 여자를…… 너따위가 건드려?”
석훈은 앞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낮은 보이스에서 느껴지는 살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반격을 하고 싶었지만 약기운과 더불어 전신에서 느껴지는 고통 때문에 제대로 몸을 놀릴 수가 없었다.
결국 빛나를 상대로 타고난 힘자랑은 할 수 있었겠으나, 승현을 상대로 싸움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떤 놈인지 얼굴이라도 봐야겠다.
석훈이 흐려진 눈에 초점을 모으고 상대방을 노려보자 훤칠한 그림자가 시야를 가득 메우더니 상대방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석훈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가 약기운에 착각을 한 게 아니라면, 이 얼굴…… 어디선가 본 적 있다.
아니, 절대 잊을 수 없는 비주얼이기에 흐릿한 정신 속에서도 석훈은 확신했다.
“머핀…….”
분명 그였다.
처음 만날 때부터 묘하게 석훈의 자존심을 건드린, 바로 그놈.
“잘 들어. 나, 아직 안 끝났다. 2차전 준비해야 할 거야. 오늘 일…… 두고두고 후회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섬뜩한 경고를 뒤로한 채 승현은 석훈에게서 등을 돌려 빛나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잔뜩 웅크린 채 석훈의 친구들이 화장실 문을 열려고 쿵쾅거릴 때마다 움찔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가여워 그의 가슴이 소리 없이 무너졌다.
승현이 서서히 그녀 앞에 주저앉아 눈높이를 마주했다.
“빛나야…….”
목이 꽉 막혀왔다.
그리고 그렇게 잠긴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이를 악물어가며 참고 있던 그녀의 눈물이 거짓말처럼 터져 나왔다.
“으아앙- 왜 이제 왔어!”
한번 터져 버린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그 소리가 어찌나 서럽게 들리는지, 미안함으로 꽉 막힌 가슴이 곧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미안. 이제…… 나가자.”
승현은 자신의 재킷을 벗어 그녀의 헐벗은 어깨에 덮어주었다.
그러자 빛나는 너무도 자연스레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안겨왔다.
그제야 세상을 품은 것처럼 안심이 되었다.
이 룸에 들어선 순간 살인이라도 저지를 수 있을 만큼 차올랐던 분노도 사그라들었다.
그는 그렇게 서럽게 우는 빛나를 보듬어 안고 화장실을 나왔다.
그러자 줄 곧 밖에서 문을 열기 위해 난리를 치던 석훈의 친구들이 눈썹을 곤두세우며 물어왔다.
“너 뭐하는 새끼야, 인마!”
하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그에게 덤벼들진 않았다.
그러기엔 승현의 신체 조건이 그들에겐 너무 큰 위화감을 조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룸을 가로질러 나가며 으르렁거리듯 입을 열었다.
“걱정 마. 모르고 싶어도 곧 알게 될 테니까.”
“뭐라고?”
“그때 가서 기억이 없네, 어쩌네 하면서 기억상실증 연기하면…… 죽는다.”
“…… 뭐?”
“나는 연기 못하는 새끼들은 딱…… 질색이라서 말이지.”
그렇게 넋이 나간 남자들을 뒤로한 채 룸을 벗어나자 저 멀리 달려오는 복실이 보였다.
“뭐야, 찾았어? 그 룸에 있었나 보네? 근데…… 세상에, 무슨 일이야!”
복실이 그 예쁜 눈썹을 처참하게 구기며 떨리는 눈동자로 승현의 품에 안겨 있는 빛나를 넘어 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시선을 옮겨 그가 방금 나온 룸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 좋은 머리로 대충 그림을 그려본 것이다.
화르르 타오르는 복실을 바라보며 승현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강복실…….”
“왜.”
“가서…… 물어.”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복실은 성큼성큼 승현이 나온 그 룸으로 다시 걸어 들어갔다.
잠시 후, 그가 발을 떼는 순간 복실의 분노에 찬 음성이 복도를 쩌렁 쩌렁 울려왔다.
“니들 오늘 딱 걸렸어! 내가 나가라고 할 때까지…… 아무도 못 나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번 들어가면 함부로 나올 수 없는 그 문이 철컥 잠겼다.
***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빛나는 덜덜 떨리는 손과 발을 멈출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만일, 그 자리에 승현이 없었다면…….
그래서 그 자리를 빠져 나올 수 없었다면…….
“아…….”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아무래도 오늘 밤 제대로 자긴 틀린 모양이다.
어쩌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침대에 누웠지만 자꾸 석훈의 소름 돋는 손길이 피부를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아 절로 몸이 웅크려졌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둠 속의 1분이 영원 같았다.
잊어버리려 해도 그 손길이, 그 숨결이 생각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직 안 잤네.]
승현이었다.
핸드폰 저편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오늘만큼 눈물 나게 반가웠던 적이 있었던가.
“잘 수가 없어. 자꾸…… 생각이 나서.”
[놀라서 그래. 딴생각해. 일부러라도.]
“무슨 생각?”
[그냥, 좋았던 순간. 살면서 네가 가장 좋았다고 생각한 순간.]
가장 좋았던 순간이라…….
빛나는 잠시 눈을 감아보았다.
많은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대학에 합격했던 순간, 사법고시를 패스했던 순간, 그리고 평생 함께할 줄 알았던 그 사랑을 만났던 순간.
그런데, 그 많은 순간들을 제치고 그녀의 머릿속에 불쑥 찾아온 순간은 놀랍게도,
-어라? 우리 반에 이런 애도 있었나? 예쁘네, 이름이 뭐야?
바로 승현을 처음 만난 그 순간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우월한 유전자를 자랑하며 흩어진 머리와 반짝이는 아몬드형 눈매로 그녀를 올려다보던 그 모습이 눈물 나게 좋았었단 말이다.
[무슨 생각하고 있어?]
승현이 물었다. 유독 낮은 그 목소리가 핸드폰 저편에서 그녀의 귓전을 맴돌았다.
부드러운 그 목소리에 빛나는 떨리던 몸이 차분하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냥…… 좋은 생각.”
언제부터 그와의 첫 만남이 악연이 아닌 인연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래. 좋은 생각만 해. 좋은 생각만 해도 짧은 인생이잖아.]
목소리가 너무 가까워 그가 옆에 있는 것 같았다.
바로 곁에 누워 떨고 있는 그녀를 다독여주는 것 같았다.
“네 형제들 이야기 좀 해봐. 듣고 싶어.”
[내 형제? 왜, 갑자기?]
“그냥, 잠이 안 와서……. 옛날이야기 듣기엔 내가 너무 올드 하잖아.”
[후훗, 그래. 한번 해보자. 내가 원래 우리 집안 이야기 잘 안 하는데…… 너니까 특별히 해줄게. 우리 큰형은 말이지…….]
승현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 목소리가 너무 달콤하고 다정해 어느덧 떨리던 몸이 멈추었다.
어슴푸레한 어둠속에서 그의 눈매가 보이는 것 같았다.
장난기 많고 감정의 기복이 심한 그 아몬드형 눈매가 말이다.
착각이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굳이 그 환상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 꿈속에 승현과 그의 형제들이 찾아왔다.
물론 꿈속에 등장한 그의 형제들은 사이코패스 이중인격자에, 다혈질 분노조절장애, 비글미 넘치는 주의력 결핍장애를 앓고 있는, 말도 안 되는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행복했다.
마치, 그 가족 안에 그녀가 있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안락함을 느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꿈이었다.
***
“음…… 유빛나?”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핸드폰 저편이 조용해지자 승현은 그녀의 존재를 확인했다.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그 침묵은 다행스럽게도 그녀가 깊은 잠에 빠져 들었음을 암시해주었다.
“못 잘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새근거리는 숨소리조차도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승현은 바로 눈앞에 잠이든 그녀가 있는 것처럼 가슴이 뭉클해졌다.
악몽이나 꾸지 않았으면 좋겠다.
“잘 자, 유빛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내 꿈…… 꿔.”
제발 그랬으면.
그럼 꿈속에서라도 찾아가 떨고 있는 그녀를 밤새도록 안아줄 수 있을 텐데.
전화를 끊자 지옥 같은 하루가 현실감 있게 밀려 들었다.
그리고 줄 곧 삭여왔던 분노가 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조금 전 빛나에게 제 형제들 이야기를 할 때와는 전혀 다른 살벌한 눈빛으로 창밖에 경찰서를 올려다보았다.
강석훈이 도핑 테스트에 제외되었다는 메시지를 받는 순간 예상되는 전개에 진즉 발걸음을 했지만 빛나와 전화 통화를 하느라 들어서지 못했던 경찰서다.
감히, 내 여잘 건드리고 그냥 빠져 나간다고?
“그렇게는 안 되지. 절대.”
승현은 차에서 내려섰다.
분노로 인해 손발이 뻑적지근하게 아파왔다.
경찰서로 들어서자 복실과 정오를 상대로 허세를 부리고 있는 석훈의 모습이 보였다.
“가서, 그 자식한테 전해. 아무리 용을 써도 날 잡을 순 없을 거라고.”
말을 마친 석훈이 만족스러운 듯 희미한 웃음을 보이며 돌아섰다.
보란 듯 경찰서를 걸어 나갈 생각인 것이다.
그러나,
“억!”
돌아서는 순간 승현에게 뒷덜미를 잡힌 석훈은 조금 전 지나왔던 길로 다시 질질 끌려 들어왔다.
그러더니, 죄를 인정한 그의 친구들이 줄줄이 앉아 있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내던져졌다.
“앉아. 거기가 네 자리니까.”
퍽!
“으아악!”
어찌나 세게 쑤셔 박았는지 의자에 부딪친 엉덩이가 터질 것 같았다.
석훈이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들자 여유 넘치는 승현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냥 보내줄까도 생각해봤는데, 그러기엔 내 뒤끝이 너무 길어서 말이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줄 곧 석훈에게 호의적으로 굴었던 경찰들이 다가와 그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시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명품 팔찌도 아닌 그것을 태어나 처음 착용해본 석훈의 눈이 분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당장 안 풀어? 이 새끼들, 전부 옷 벗고 싶어? 내 당장 검사실에 연락해서…….”
“그럴 필요 없습니다. 검사실에서 내려온 지시니까.”
“뭐라고?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다고!”
“그럴 리 없긴, 뭐가! 내가 이 귀로 똑똑히 들었는데. 절차 밟아 얄짤 없이 진행하라고. 김 형사, 이 인간 좀 전에 도핑 테스트 빼먹었지? 다시 진행해!”
석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도핑 테스트를 했다간 이번 건에 대해 더 이상 피해갈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너 이 새끼…….”
분노가 승현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여유 넘치는 얼굴에 웃음까지 장착한 승현은 그렇지 않아도 치켜 올라간 입꼬리를 더욱 말아 올리며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 2차전…… 준비해야 할 거라고.”
뒤끝 작렬 위승현!
그렇게 꽈배기보다 더 뒤틀린 그의 뒤끝은,
“각오해. 네 볼일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오늘밤의 대미를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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