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설레게하는 그대-26화 (26/94)

26. 내 여자, 건드리기만 해!

2018.03.04.

“아, 진짜. 스커트가 너무 짧아. 나도 복실이처럼 바지 입고 올걸 그랬어.”

“아니야, 아니야! 하나도 안 짧아. 그리고 너 같은 다리는 드러내주라고 있는 다리야. 알기나 하간?”

“나는 위에도 휑하잖아!”

“가슴을 드러낸 것도 아니고 뭐가 문제야? 파티야, 파티. 잊었어? 저기 들어가면 너보다 깐 애들 부지기수야. 넌 그냥 노멀이라니깐?”

“그래도, 재킷이라도 걸치고 올걸.”

“아, 진짜! 그래서 언제 들어갈 건데! 오늘 밤새도록 차 안에서 이러고 있을까?”

파티가 진행 중인 호텔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차 안에서 핸들을 붙든 채 10여 분 동안 옷타령만 해대는 빛나에게 결국 이정의 인내심이 폭발했다.

그 와중에도 복실은 어제 게임하느라 날밤을 샜다며 뒤에서 아주 편안하게 주무시고 계신다.

한마디로, 이 진상들을 데리고 애가 타는 건 그나마 멀쩡한 이정의 몫이라는 이야기다.

“복실아! 다 왔어! 얼른 일어나!”

“음? 응? 벌써?”

놀란 복실이 일어나자 이정은 아직도 핸들을 쥐고 잔뜩 움츠려 있는 빛나를 차에서 끌어 내려야만 했다.

그녀가 제 발로 내려설 때까지 기다렸다간, 날을 새야 할지 몰랐으므로.

한편 정오는 파티 룸과 호텔 복도를 왔다갔다 하며 핸드폰을 붙들고 있다 버럭했다.

“에이, 진짜! 개복실! 전화도 안 받아!”

그도 그럴 것이, 출발했다고 메시지가 온 게 언젠데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화를 해도 감감 무소식이니 정오는 입이 다 바짝 바짝 탔다.

-잘 지켜라. 나 미치는 꼴 안 보려면 셋 다 들어간 상태 그대로 돌려보내야 할 거야.

승현의 진정성 돋는 협박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가벼워 보이는 이미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그의 진정성에 늘 의심을 품고 있었지만, 수년을 함께 해온 정오는 그 말에 한치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한다면 하는 인간 위승현! 미친다면 분명 미친다!

때문에 복실을 포함한 의문의 불청객 두 명은 정오에게 피할 수 없는 의무가 되어 버렸다.

“아니, 왜 전화도 안 받냐고-옷! 사람 불안하게!”

신호음은 떨어지지만 여전히 시간이 넘어가지 않는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며 정오가 소리를 버럭 지를 때였다.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주인공들을 본 정오는 머리끝까지 올랐던 화를 한 번에 날려버리며 넋을 놓아야 했다.

“복……실이?”

세상에나!

까만 가죽 레깅스에 홀터넥 탑을 입어 길쭉하고 늘씬한 몸매를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개복실이다.

하지만 섹시미 터지는 몸매와는 반대로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긴 생머리와 뽀얀 얼굴은 정오가 기억하고 있는 개복실보다 훨씬 더 예뻤다.

“입 좀 다물어라. 턱 빠지겠다.”

물론, 저 입만 안 열면.

그러나 정오는 복실이 비켜서며 모습을 드러낸 두 여자의 모습에 벌어진 입을 도무지 다물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서이정이에요.”

“유빛나입니다.”

이정과 먼저 악수를 하고 빛나의 손을 맞잡은 정오는 짤막한 인사가 끝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그의 손 때문에 빛나가 당혹스러워 하자 복실이 조용히 끼어들어 정오를 정리했다.

“인사만 해라. 느끼지 말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정오가 자기소개를 위해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정오라고 합니다.”

“말씀 들었어요. 정말 감사해요. 이런 기회를 주셔서.”

빛나가 눈웃음으로 화답하자 정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녀들은 기다리던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고, 당연한 말씀을! 다음부턴 승현이 통해서가 아니라 저한테 직접 부탁하셔도 됩니다! 그 자식은 워낙 까칠해서. 하하하! 그런 의미에서 연락처라도 좀…… 억!”

그새를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내밀어 빛나에게 작업을 거는 정오의 뒷덜미를 복실이 사정없이 낚아챘다.

그러곤 억지로 돌려세우며 잇새로 조용히 이야기 한다.

“좋은 말로 할 때, 안내나 해라. 프리패스!”

늘씬한 몸매와는 달리 뒷덜미를 집어내는 손길이 어찌나 매서운지 정오는 아침에 먹어 소화가 다 된 사골국이 역류하려 했다.

게다가 그를 ‘프리패스’라 부르며 선을 긋는 복실의 행동에 그제야 제 본분으로 돌아왔다.

“알았다. 알았어. 넌 어떻게 하나도 안 변하냐? 이건, 어떻게 생긴 것만 여자야.”

“어쭈구리, 또 눈 돌아간다! 앞만 보고 걸어! 사시처럼 눈 놀리지 말고!”

자꾸 빛나를 돌아보려는 정오를 부추기며 그들은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 호텔 룸으로 향했다.

잠시 후, 경호원들이 서 있는 호텔 룸에 도착했다.

벌어지고 있는 파티 때문에 세워둔 경호원들인 모양이다.

그들은 정오의 얼굴을 보더니, 흔쾌히 그녀들을 통과시켜 주었다.

그렇게 입성하게 된 호텔의 파티 현장.

“우와!”

“대박!”

옷차림 때문에 망설였던 시간이 무색하리만큼, 빛나는 그곳에서 신세계를 온몸으로 경험하고 만다.

***

정오의 시선이 시종일관 한곳에 머물러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를 본 순간부터 한순간도 떨어져 본적이 없는 시선이었다.

모델과 연예인 지망생이 난무한 이 파티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 복실도 복실이었지만, 자신을 유빛나라 소개한 여자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여자로선 가장 이상적인 키에 볼륨 있는 몸매, 특히나 허리선에서 힙 선으로 떨어지는 그 라인이 정말 기가 막히다.

게다가 미니 드레스 아래로 드러난 다리는 또 어떻고.

하지만 그보다도 정오의 시선을 빼앗았던 건, 이곳에선 찾아 볼 수 없는 고급스러운 이미지 때문이었다.

느슨하게 올려 묶은 머리 때문에 잔머리가 흩어진 우아한 목선과 앙증맞은 이목구비가 잘 어우러져, 찬바람이 쌩 도는 도도함이 한껏 묻어났다.

보면 볼수록 탐이 나는 여자.

너무 넋을 놓고 본 나머지 정오의 손에 들린 살얼음 칵테일은 거의 물이 되어 있었다.

“아휴, 우리 오정오 씨. 이러다 진짜 턱 빠지는 거 아닌가 몰라?”

곁에 있던 복실이 그런 정오를 보며 한마디 했지만, 여전히 가출해버린 멘탈을 복귀시키진 못했다.

“너무 그러지 마라. 나…… 드디어 내 인생의 여자를 만난 것 같으니까.”

빛나가 움직이자 그 동선을 자연스레 쫓으며 정오가 중얼거렸다.

이쯤에서 복실은 그에게 레드선을 외쳐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오는 시련의 아픔까지 감당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임자 있는 여자다.”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나.”

“그 골키퍼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지.”

“자신 있어.”

그렇게 말하며 정오는 얼음이 다 녹아 이제 물이 되어버린 맛없는 칵테일을 영혼 없이 들이켰다.

그런데 그 순간, 복실이 그의 등을 토닥이며 너무도 믿을 수 없는 한마디를 토해낸다.

“그럼 승현이랑 삼각관계 잘해봐. 거기서 살아남으면 내가 인정해줄게.”

“푸헉!”

정오의 입에서 아무 맛도 느낄 수 없는 칵테일이 분수처럼 폭주했다.

“거 봐라. 너무 입을 벌리고 있으니까 이제 네 턱이 제 구실을 못 하는 거 아냐. 쯧쯔. 어린 나이에 벌써 턱이나 줄줄 새고, 일을 어쩌면 좋누?”

안타깝다는 듯 장난스럽게 이야기하는 복실의 화법에 화가 날 만도 하건만, 정오는 입가에 흘러내리는 칵테일을 쓰윽 닦아 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승현이의…… 여자라고?”

“그럼, 승현이가 왜 너한테 이런 걸 개인적으로 부탁했다고 생각해?”

“헐…….”

이제야 이야기의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

부탁을 하면서도 몹시 짜증이 난 말투, 곤두선 협박, 이 모든 게 전부 그녀 때문이었다!

정오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빛나에게로 향했다.

언젠가 승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좋으니까 심장이 뛰더라.

화가 나 흥분할 때만 뛴다던 그 강심장을 설렘으로 뛰게 만든 여자!

수많은 물음표로 미치기 일보직전, 정오는 자신의 궁금증을 단 한 단어로 응축해 질문을 던졌었다.

-그 여자, 예쁘냐?

물론 그 질문에 승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정오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확실히 얻을 수 있었다.

그녀는…… 예뻤다!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그래도 자신 있냐?”

“무슨 소리! 나 아직 한창이다. 일주일 후에도 큰 파티가 하나 있어. 인생 종칠 일 있냐?”

조금 전과는 달리 정오가 정색을 하며 말하자 복실이 싱긋 웃었다.

“왜, 좀 전엔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냐더니?”

“골키퍼도 골키퍼 나름이라며. 승현이 그 자식은 내 친구지만 미친놈이 맞다. 저 여자 건드리면, 아마 목숨 걸고 달려들 걸?”

거기까지 말을 마친 정오는 잠시 잊었던 승현의 협박이 떠올랐다.

그러자, 이렇게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었다. 수많은 남자들이 빛나에게로 엉켜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우리 승현이한테 빛나 씨 잘 보호하고 있다고 인증샷 하나 보내야지.”

정오는 사람들을 비집고 빛나에게 다가가 그녀를 조심스레 끌어당겼다.

그리곤 복실과 이정도 함께 오라 손짓해 포토존을 만든다.

“자자, 우리 사진 한 장 찍읍시다! 예쁜 숙녀분들끼리 나란히 한번 서봐요!”

세 사람이 나란히 서자 그림이 따로 없다. 하지만 빛나는 아직까지도 제 옷차림이 어색한 듯 제대로 포즈를 취하지 못했다.

그 모습에 정오는 싱긋 웃으며 넉살 좋게 떠든다.

“너무 그렇게 딱딱하게 서 있지 말고, 비스듬하게 서서 손키스 한 번 날려 봅시다! 자, 하나 둘 셋!”

찰칵!

손키스는 어색하게 날렸는데 사진 하나는 기가 막히게 나왔다.

게다가 그녀들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남자들을 뒤 배경으로 깔았으니, 말이 잘 있다는 인증샷이지 그야말로 승현의 분노를 부추기는 도화선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복실을 통해 그 사진을 전달 받았을 때, 폭발한 승현의 혈압은 곧 현실이 되었다.

***

“아니, 도대체 강석훈은 언제 나타나는 거야?”

“조금만 기다려봐. 원래 주인공은 늘 늦게 나타나는 법이니까.”

이정이 진정을 시켰지만 빛나는 여전히 분주하게 시선을 돌려 주변을 탐색했다.

이곳으로 들어선 지 벌써 두 시간이 지났지만 강석훈은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 한 시간은 난생처음 경험해보는 신세계에 미쳐 신이 났더랬다.

무알콜 칵테일도 꽤 마셨다. 주변에서 보내는 끈적한 시선도 은근히 즐겼다.

하지만 두 시간이 지난 지금, 이젠 슬슬 이곳의 시끄러운 분위기가 지겨워지고 있었다.

“아, 진짜. 화장실 또 가고 싶네.”

“그러게, 적당히 마시라니까.”

이정은 빛나의 손에서 색이 예쁜 칵테일 잔을 빼앗아 들며 화장실 쪽을 눈짓했다.

그렇게 몸을 돌려 화장실로 향하는 순간, 웅성이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빛나는 잠시 멈칫하며 상대방을 올려다보았고, 남자 또한 시선을 내려 그녀를 홀깃 바라보았다.

찰나의 순간 스치는 눈빛이었지만 그녀는 그 남자의 눈빛에서 묘한 불쾌감을 느꼈다.

“뭐야, 사람을 왜 저렇게 쳐다봐?”

궁시렁대며 남자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다 복실을 찾았다.

이정이야 이미 신이 나서 파티를 제대로 즐기고 있는 분위기였지만,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끌려 나온 복실은 어쩌고 있나 걱정이 돼서다.

그런데 그런 걱정은 괜한 것이었다.

잠시 후, 파티장의 핵심인 바에서 유난히도 시끄러운 함성의 중심에 주인공처럼 서 있는 복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네 개의 샷 잔을 양 손가락에 끼우고 한꺼번에 마시는, 기도 안 차는 묘기를 선보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술잔을 비웠을 때 곁에 있던 정오가 가장 큰 호응으로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쳐주었다.

“역시 우리 복실이! 아직 살아 있구만!”

그래, 개복실이 어디 가겠나.

복실은 호화 파티의 중심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가 제 자리였던 것마냥.

빛나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화장실로 향했다.

잠시 후, 손을 씻고 거울을 바라보는데 절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몸매가 다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서 있는 자신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밖에서 흘러들어온 대화가 그녀의 귓속에 쏙 들어와 박혔다.

“석훈이 왔어?”

“응. 방금. 들어가 봐.”

설마, 그 강석훈?

빛나는 정신이 번쩍 든 나머지, 손에 물기를 제거할 새도 없이 화장실을 나와 방금 전 그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저기요, 저기요!”

돌아선 남자를 붙들어 세웠다.

남자는 잔뜩 짜증이 얼굴로 돌아섰으나 그녀를 보곤 순식간에 표정이 변했다.

“누구?”

“혹시, 강석훈 씨 알아요?”

“석훈이? 석훈이 알다마다. 근데 그건 왜?”

“제가 강석훈 씨한테 꼭 할 말이 있는데,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빛나의 물음에 남자의 눈은 금세 탐욕으로 물들었다.

그녀를 훑어보는 끈적끈적한 시선 때문에 온몸이 가려울 지경이다.

참자. 강석훈을 만날 수만 있다면.

“당연하지. 원한다면 데려다 줄 수도 있는데?”

남자가 그녀의 잘록한 허리선에 손을 올리며 은근한 접촉을 시도했다.

하지만 빛나는 질척대는 남자의 손을 단숨에 쳐내며 똑 부러지게 입을 열었다.

“그럼 데려다 줘요.”

까만 그녀의 눈동자가 겁 없이 올려다보는 모습을 보며 남자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이 여자, 보통이 아니다.

더군다나 석훈에게 볼 일이 있는 여자라면,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석훈은, 제 여자를 맛보기 전에 누군가 먼저 손을 대는 걸 질색하는 인간이니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았다.

남자는 그녀에게로 향하는 손을 가까스로 붙들며 고개를 까닥했다.

“따라와.”

빛나는 남자를 따라 파티가 열리고 있는 커다란 홀을 지나 복도로 들어섰다.

홀을 지날 때 여전히 묘기중인 복실과 정오를 보았다. 그리고 그 틈에 어느새 섞여 들어가 있는 이정도.

‘재미있게 놀고 있구나.’

굳이 그들을 방해할 생각이 없었다.

석훈에게 볼일이 있는 건 그들이 아닌 빛나였으니까.

그렇게 겁 없이 남자를 따라 들어간 룸에서 빛나는 조금 전 불쾌하리만치 끈적한 시선을 쏟아내며 그녀의 곁을 스쳤던 남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강…… 석훈?”

그러자 매캐하고 역겨운 연기 아래, 줄 곧 무료한 눈동자로 술만 들이 붓던 석훈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석훈아, 너 만나고 싶다고 해서. 너무 애타게 찾길래.”

곁에 여자를 끼고 있던 석훈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진하게 훑어 내리는 그 시선에 빛나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던가?”

석훈이 느릿하게 입을 열며 물어왔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기억 속에 빛나는 존재의 여부조차도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으로 인해 흐려진 의식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약기운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런 여자를 보고도 제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생각했다.

그리고 석훈의 예상은 딱 들어맞았다.

“아뇨. 초면입니다.”

작지만 단단한 목소리.

희뿌연 연기 속에서 또렷해 보이는 눈동자.

줄 곧 봐왔던 여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에 석훈의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가 느릿하게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손을 뻗어 느슨하게 끌어 올린 그녀의 머리를 풀어 내렸다.

탐스러운 갈색 머리가 굵은 웨이브를 만들며 흘러내리자 석훈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예쁘네. 이름이?”

석훈은 물음을 던지며 담배 한 모금을 뻐근하게 빨아 들였다.

그러자 빛나는 처음 맡아보는 고약한 연기에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난 강석훈씨한테 볼일이 있어서 왔어요. 놀러온 게 아니라구요. 그러니까 우리, 여기 말고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해요.”

“여기 말고, 조용한 곳?”

석훈이 느릿하게 되뇌자 빛나는 아차 싶었다.

지금 이 상태로 석훈과 조용한 곳에 둘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위험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니, 그냥 여기서 이야기할게요. 김병훈 검사, 알고 있죠? 제가…… 김 검사님을 한번 만나봐야 해서요. 혹시 가능하면…….”

“우리 삼촌? 훗. 이봐, 취향 한번 너무 올드한 거 아냐? 우리 삼촌 나이가 어떻게 되는 줄 알아?”

“그게 아니라, 나는 일 때문에 김 검사님을 만나야 하는 거라구요.”

“일? 뭐야, 같은 검사라도 되나?”

“검사는 아니고, 변호사.”

이제야 말이 좀 통하나 싶어 빛나가 제 신분을 밝혔으나, 잠시 후 여기저기서 새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한 여자가 손을 번쩍 들며 소리친다.

“어머, 저 언니가 변호사 하면 난 검사 할래!”

“그럼 난 판사!”

세상에나.

그제야 빛나는 이 방 안의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 역겨운 냄새의 정체도.

석훈이 끈적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내뿜는 연기는 그냥 담배 연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들에게서 이성이란 그림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순간, 빛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빨리 여기를 빠져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빠르게 잠식했다.

“미안해요. 오늘은 이야기할 분위기가 아닌 것 같네요. 다음 기회에, 정신 멀쩡할 때 이야기하죠, 우리.”

그녀가 돌아섰다.

그런데,

그녀가 문을 열고 나가기 위해 손을 뻗는 순간 그보다 더 길고 굵직한 팔이 다가와 그 문을 가로막아버렸다.

더불어 희뿌연 연기와 함께 그녀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음침하게 드리워졌다.

“들어올 땐 마음대로 들어왔어도…… 나갈 땐 그렇게 못 하지.”

“…….”

“그게…… 이 방의 룰이거든.”

***

한편, 그 시각.

혈압으로 뻐근한 뒷목을 잡고 지하주차장에 도착한 승현은 점검 중인 엘리베이터를 보며 버럭 했다.

“아니, 미쳤나! 왜 이 시간에 엘리베이터 점검을 해!”

두 대는 점검 중이었고, 나머지 두 대는 이제 막 올라가는 중이었다.

간발의 차로 엘리베이터를 놓쳐버린 승현의 가슴은 새까만 잿더미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카톡!

또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

그리고 그 한 장의 사진은 마지막 남은 그의 인내심을 깡그리 날려 먹었다.

“유빛나 지키라고 보내놨더니, 정신 줄 놓고 놀고 있어! 에이, 진짜!”

그랬다. 정오로부터 도착한 사진은 복실의 기도 안차는 술 묘기 사진이었다. 거의 엽기에 가까운.

하지만 그 사진 속에 빛나는 없다.

그 사실이 승현을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결국 그는 17층까지 올라가는 비상계단의 문을 넘어서는 무모한 선택을 하고 만다.

5층쯤 올라가자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는 속도를 늦출 수 없어 적게는 두 계단, 많게는 세 계단씩 뛰어 넘었다.

머릿속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어떤 놈이든…… 유빛나 건드리기만 해!”

다 죽여버릴 테니까.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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