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늑대의 반격
2018.02.25.
“아오, 나 진짜 열 받아서! 조현성, 미친 거 아니니?”
빛나는 집으로 들어와 이정과 통화를 하면서도 화를 삭이지 못했다.
다시 생각해도 기도 안 차는 그 요구에 뒷목이 뻐근할 지경이다.
[애초에 네가 걜 만난다고 한 것부터가 잘못이지. 상대를 하지 말아야 할 인간을 상종했으니.]
“그래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승현이한테 사과를 하래, 사과를. 아니, 위승현이 뭘 잘못해서 사과를 해야 하는데? 아오, 성질 같아선 다 꼰질러서 승현이보고 정신 번쩍 나게 두들겨 패달라 하고 싶네.”
[헐, 승현 씨가 주먹질도 해?]
“너,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나? 걔가 생긴 것만 그렇게 생겼지, 꼬라지 얼마나 더러운데. 내가 말 안 했나? 고등학교 땐 걔네 집이 조폭이라는 소문도 있었다고. 현성이 정도야 껌이지!”
[후훗.]
“아니, 왜 웃어! 이게 웃을 일이야?”
[그게 아니라, 너 승현씨 편드는 거 첨 봐서 그런다.]
헛!
빛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어버렸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정이 기가 막히게 포인트를 집어낸 것이다.
그랬다. 조현성은 승현에게 사과를 요구했을 뿐인데 그녀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마치 그녀에게 사과를 요구한 것처럼 자존심이 상했단 말이다.
“그건…….”
[이유 같은 거 찾지 않아도 돼. 승현 씨가 너 좋아한다며. 보니까 너도 맘 있네.]
어제부터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감정을 이정이 간단명료하게 정의를 내려 주었다.
[이제 좀 이해가 되네. 유빛나도 사람이었어. 세상 어떤 여자가 그런 남자를 마다하겠니?]
“넌 위승현 잘 모르잖아.”
[잘은 모르지만 그 사람이 널 좋아하는 건 알겠어. 그리고 네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도 알겠고. 그럼 된 거 아냐?]
“그렇게 쉬운 문제 아냐. 난 불과 몇 달 전에 파혼도 당했고…….”
[야. 파혼, 까짓게 별거니? 결혼을 하다 이혼한 커플도 부지기수인데. 너 죄인 아냐. 두 사람 서로 좋아하는 감정 있고, 연애하는데 그거면 됐지. 무슨 조건을 따져?]
안다. 이정의 말이 백번 옳았다. 사랑에 ‘때’가 있는 건 아니니까.
사람 감정을 제 맘대로 움직일 수 있다면 사랑에도 ‘적당한 때’가 있다고 우길 수 있었다.
제 맘대로 안 되는 게 감정이기에 그 ‘사랑’이란 게 가장 쉬운 것 같으면서도 가장 힘든 것이다.
하지만 진지하지 못한 승현의 이미지가 빛나의 감정에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었다.
이정이 그런 빛나의 망설임을 미리 알아차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물론, 승현 씨가 좀 날바람둥이처럼 생기긴 했지. 하지만 사람은 겪어보지 않으면 정말 모른다? 봐라, 너 아니면 죽을 것 같던 그 인간도 파혼한 지 3개월 만에 기다렸다는 듯 다른 여자랑 결혼했잖아. 혹시 아니? 알고 보니 위승현이 진짜 순정남일지.]
“…….”
[오늘 첫 데이트라며. 잘해보란 말이야. 그냥 마음 편하게 먹고 그 사람을 봐. 네 조건, 그 사람 조건, 그런 거 따위 전혀 따지지 말고. 그 사람이랑 같이 있을 때, 네 마음을 보란 말이야.]
“…….”
[넌 충분히 그럴 자격 있는 사람이니까.]
이정의 마지막 말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그 말의 여운은 참으로 오래갔다.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
빛나는 이정이 했던 마지막 말을 되새김질하며 물 한 잔을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
이제 두 시간 후면 그녀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제 감정과 정면 대결을 해야만 했다.
치열함이 예상되는 시간이었다.
***
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옷도 수벌을 갈아입었다. 머리도 내렸다 올렸다를 반복하다 결국 당고 머리를 했다.
이미지에 안 맞게 너무 오버했나 싶어 엘리베이터 안 거울을 보며 후회했지만 주차장으로 들어서자 그 후회는 곧 탁월한 선택이 되었다.
시원하게 안구정화를 시켜주는 승현의 비주얼이 눈을 가득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 보이게 당고 머리를 잘 선택했다 생각하며 빛나는 헛기침과 함께 그에게 다가섰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요조숙녀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오늘만큼은 절로 두 손이 모아지는 게 신사임당 저리 가라다.
그런 빛나를 보며 승현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와 눈높이를 마주했다.
진한 숨을 내쉬면 그 숨결까지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왜, 왜?”
부담스러운 그녀가 허리를 뒤로 빼며 묻자 승현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짓궂은 웃음으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살 빠졌어?”
“아니, 왜?”
“그냥, 얼굴이 더 작아 보여서.”
“머리를 묶어서 그렇겠지.”
“아, 그래? 난 또…… 나 때문에 설레서 밤잠 설쳤나 했네.”
“야!”
그제야 장난임을 눈치챈 빛나가 그의 어깨를 밀치며 곱게 눈을 흘기자 승현의 입에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하하. 농담이야, 농담!”
“도대체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건데?”
“타고난 거지. 그게 내 매력 포인트인데, 못 느꼈어?”
“웃기고 있네! 그게 어떻게 매력 포인트야?”
빛나가 발끈했지만 그는 전혀 기죽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내가 이 정도나 되니까 지금까지 얼어죽지 않고 얼음공주 같은 네 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야. 안 그랬음 나가 떨어져도 벌써 나가 떨어졌겠지.”
그렇게 말하며 승현은 차 문을 열어주었다.
정말 할 말 없게 만드는 데는 선수가 따로 없다.
빛나는 그동안 그에게 얼마나 매몰차게 했는지를 떠올리며 조용히 차에 올랐다. 잠시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안 춥지? 너 내려오기 전에 미리 차 데워놨는데.”
“응. 괜찮아.”
차가 부드럽게 출발을 했다. 그리고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니 어쩌면 그녀의 숨만 턱턱 막힌 것인지도 모르겠다.
긴장했다고 하기엔 승현의 옆모습은 너무 편안해 보였기 때문이다.
“특별히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니. 다 잘 먹는 편이야.”
“저번에 보니까 일식 잘 먹던데. 이번엔 내가 가는 곳으로 가보자.”
“응.”
그가 어제 밤새 메뉴를 고민한 보람도 없이 빛나는 너무도 순순히 긍정의 대답을 토해냈다.
데이트 처음 해본 사람도 아닌데 어찌나 고민이 되던지,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빛나를 옆에서 보고 나니, 어제 밤의 고민이 헛수고는 아니었단 생각이 든다.
그만큼 빛나는 보는 것만으로도 그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평소 고급스럽고 차분해 보이는 웨이브 스타일 대신 선택한 당고 머리는 10년 전 고등학생이었던 빛나를 떠올리게 만들 만큼 사랑스러웠다.
때문에 승현은 귀밑으로 살짝 삐져나온 애교머리를 쓸어 넘겨주고 싶은 충동과 싸우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오늘 누구랑 점심 약속 있었어?”
“응, 조현성이.”
“조현성이? 현성이랑 왜?”
“같은 필드에 있잖아. 가끔 얼굴 볼 일도 있고 그래.”
그 말에 승현은 눈썹 끝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이 너한테 또 쓸데없는 말 안 해? 했으면…… 아오, 이 자식을 진짜!”
“걱정 마. 오늘은 내 손에 반 죽어 나갔으니까.”
“네 손에? 왜?”
승현이 물었지만 빛나는 입안에서 맴도는 그 대답을 뱉어낼 수가 없었다.
제 속마음을 들키는 것 같아 아직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조현성이 언제 예쁘게 입 놀리는 거 봤어? 그래서 이번엔 확실히 가르쳐주고 왔어. 나, 사실은 천한 피가 아니라 O형이라고.”
그 말에 승현의 입에서 픽, 세는 웃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새침하게 이야기 하는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쁘고 야무져 보이는지, 자꾸 옆으로 돌아가는 시선 때문에 신호가 바뀐 것도 놓쳐 버릴 정도다.
“나, 이 차에서 안 뛰어 내릴 테니까 그만 쳐다보고 앞 보면서 운전해.”
하지만 그 후로도 빛나는 신호대기 상태일 때마다 출발 신호를 대신 봐주어야 했다.
그녀가 좋아 죽는 승현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솔직해질 수가 없었다.
파혼까지는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하지만 예식장에서 본 행복한 원준의 모습은 빛나에게 씻을 수 없는 충격으로 영원히 남아 버렸다.
때문에 갑작스럽게 달아 올라버린 승현의 맹목적인 감정이 그저 두렵기만 하다.
쉽게 달아오른 감정은, 식는 것도 시간문제였으므로.
“다 왔어.”
승현이 데리고 온 일식 레스토랑은 꽤나 규모가 크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곳이었다.
기모노를 입은 여자의 안내를 받아 그들은 조용하고 아늑한 룸으로 들어섰다.
그곳엔 이미 두 사람분의 접시가 세팅이 되어 있었고, 그들이 앉자마자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사케 한잔할래?”
“아니. 아니. 나 술 끊었어.”
“헐. 술을 끊었다고?”
“음, 정확히 말하면…… 네 앞에선 끊었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어. 내가 어디 가서 그렇게 정신 줄 놓고 술주정을 하진 않거든? 근데 네 앞에선 술만 마시면 그렇게 된단 말이야. 신기하지?”
그녀의 귀여운 변명에 승현이 웃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기로 유명했던 유빛나, 어디 가겠나.
술을 마셔도 대쪽 같을 것 같던 그녀가 무너지니 승현도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도 잠시 뿐, 제 앞에서만 무너지는 그녀가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며칠 전 ‘안아줘’ 사건을 다시 생각 하는 것만으로도 승현은 제 심장이 멋대로 널뛰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참는 게 더 무서운 거야. 마시고 싶으면 이야기해. 딴 놈 앞에서 마시는 것보단 내 앞에서 마시는 게 나으니까.”
“어머! 나, 절대 그렇게 술주정 안 한다니깐! 정말이야! 회사 사람들한테 물어봐!”
“그러니까…… 앞으론 내 앞에서만 마시라고.”
빛나는 입술을 삐쭉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제 앞에서만 술을 마시라는 승현의 말에 심장 끝은 왜 이렇게 쫄깃해지는지.
잠시 후, 미닫이문이 열리며 음식들이 들어왔다.
사시미부터 초밥에 롤까지, 이 집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종류는 모두 나온 것 같았다.
“세상에나, 왜 이렇게 많이 시켰어?”
“많이 먹으라고.”
“이거 다 먹으면 운동 얼마나 해야 하는지 알아?”
빛나가 기겁했지만 승현은 시종일관 웃음으로 반격한다.
“같이하면 되지. 그리고 넌 좀 쪄도 돼.”
“흥. 운동 같이하면, 또 사람 얼마나 들볶으려고?”
“옷만 제대로 입고 하면 그럴 일도 없지. 너 그렇게 입고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면 남자들은 무슨 생각하는 줄 알아?”
“남자들이 다 너 같은 줄 아나 보지?”
“흥. 나만 같으라고 해. 그럼 그럴 일도 없지.”
그의 말에 이번에는 빛나가 콧방귀를 뀌었다.
저만 같으라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늑대가 바로 그인 것을.
물론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늑대일 때도 있지만 말이다.
“정말 술 안 땡겨? 후회하지 마.”
“왜 자꾸 술을 권하는데?”
그거야, 술 마시고 안아달라 술주정하는 네 모습이 너무 예쁘니까.
승현은 술에 적당히 취했을 때 날이 서지 않은 그녀의 커다란 눈이 너무 예쁘다 생각했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그에게 계산적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볼 수 있어 너무 사랑스러웠단 말이다.
문제는, 맨정신에는 그러한 그녀의 눈을 절대 볼 수 없다는 것.
“여기서 마시고 딴 놈 앞에서는 마시지 말란 말이지.”
“사실, 좀 땡기긴 하네. 사시미가 입에서 녹아.”
“여기가 싱싱하긴 해. 어때, 한잔할 거야?”
“응. 딱 한 병만. 근데 넌?”
“못 마시지. 운전해야 하니까. 하지만 건배는 해줄 수 있어.”
승현이 사케 한 병을 시켰고 서로 한 잔씩 나눠 따랐다. 하지만 그는 정말 말 그대로 건배만 해주었을 뿐 술을 마시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술 많이 마시는 걸 못 본 것 같아. 안 좋아해?”
“분위기를 즐기는 거지, 좋아하진 않아.”
“저번에 복실이 대신 마시는 거 보니까 시원스럽게 잘 마시는 것 같던데?”
“취할 때까지 마셔본 적이 없어.”
“음. 센데?”
역시 술이 들어가자 빛나는 조금 더 편안해진 분위기에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잘했다.
말 못하면 신경 쇠약에 걸린다는 승현은 예상외로 들어주는 쪽이었고.
그리고 의외로 두 사람의 대화 코드가 잘 맞아 떨어진 탓도 있다.
운동을 좋아하는 취미도 같았고, 로맨스보다 액션을 즐겨보는 취향도 비슷했으며, 무엇보다 부쩍 부쩍 자란 두 사람의 유년 시절에 강한 동질감을 느꼈다.
끊임없는 대화에 빛나는 어느덧 사케 한 병을 모두 비워냈지만 적당한 알코올은 그녀의 기분을 한껏 들뜨게 만들었다.
즐거웠다.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이렇게 즐거워도 되나 싶을 만큼.
게다가 승현이 시종일관 꿀이 떨어지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주니 정말로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느낌이다.
그렇게 빛나는 마지막으로 나온 차 한 잔을 마시며 이정의 말을 떠올렸다.
-넌 충분히 그럴 자격 있는 사람이니까.
과연, 그녀가 이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저녁은 대충 끝이 난 것 같으니, 우리 나가서 커피 한잔할까?”
승현이 시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제야 꿈같은 순간에서 현실로 돌아온 빛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일어났다.
“아니, 이제 그만 집에 가야겠어.”
“집? 벌써? 지금 여덟시밖에 안 됐는데?”
그가 반문하며 일어났으나 빛나는 벌써 등을 돌린 뒤였다.
간단하게 커피 한 잔이야 큰 일이 아니었지만 빛나는 그 시간을 허락할 수가 없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정작 그녀가 해야 할 말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시간이 더 있다면, 그녀는 차마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 않는 그 말을 꼭 해야만 할 것 같았기에 매몰차게 그 시간을 피했다.
“내일 아침 회의 있어. 평소보다 일찍 나가야 돼.”
그렇게 빛나는 있지도 않은 회의를 핑계로 그곳을 벗어났다.
그보다 일찍 주차장으로 나와 까맣게 어두워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찬바람이 알코올로 인해 달아 오른 뺨을 스치고 지나가니 이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승현이 레스토랑을 벗어나 그녀에게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훤칠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미처 하지 못한 말에 대한 죄책감이 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왜, 차 문 열어 놨으니 안에 들어가 있으라니까. 감기 걸려.”
그가 차 문을 열어주었지만 빛나는 타지 못했다.
그녀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승현을 향해 돌아섰다.
그러자 까만 밤하늘을 등지고 서 있는 그가 그녀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승현아.”
“응”
“나, 할 말이…….”
겨우 입을 열었건만, 빛나는 마지막 말을 마무리할 수가 없었다.
승현의 기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뺨 근처를 간질이며 와 닿았기 때문이다.
피부를 타고 흐르는 짜릿한 느낌에 빛나는 잠시 어깨를 움츠렸지만, 곧 편안하게 그를 마주할 수 있었다.
“미안. 놀랐어? 잔머리 때문에, 가려울까 봐.”
그랬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곱슬거리는 잔머리가 유독 신경 쓰였더랬다.
남들은 애교머리라고 내놓은 그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한풀 죽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밥을 먹으며 그녀가 재잘대는 내내 그의 머릿속을 초토화시켜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저도 모르게 뻗은 손가락이건만, 승현은 그 귀여운 잔머리를 뒤로 넘겨주고도 차마 손을 떼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뺨을 타고 턱 선까지 내려왔다.
그러자 빛나의 붉은 입술이 당혹스러움에 살짝 벌어졌다.
“할 말이…… 있다고 했나? 해봐. 들어줄게.”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줄 자신이 없었다.
까만 밤하늘 아래, 취기로 달아오른 붉은 뺨과 살짝 벌어진 입술이 너무 예쁘게 어우러져 간신히 붙들어 놓은 그의 이성이 점점 위태로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빛나는 제 턱 선에 머물러 있는 그의 손을 붙들며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를 내려다보는 나른한 그의 눈매와 시선을 마주했을 때 목구멍에 탁 걸려 나오지 않았던 그 말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나…… 얼마 전에 파혼 당했어.”
순간 빛나는 마주한 그의 시선에 집중했다.
그녀의 폭탄선언에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서다.
승현의 독보적인 소유욕으로 보건데, 분명 쉬이 지나칠 수 있는 사실은 아니었다.
때문에 당혹스러움 내지는 분노를 마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승현의 눈동자는 보기 좋은 반달 웃음을 보였다.
그 웃음이 너무 예뻐 그가 제대로 이해를 했나, 의심스러울 만큼.
“들었니? 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약혼했던 몸이라고.”
빛나가 그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말을 반복하자 드디어 그의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고마워. 말해줘서…….”
그의 반응에 놀란 듯 그녀의 눈동자가 더욱 커졌지만 그 말은 진심이었다.
빛나가 용기를 내어 자신의 가장 아픈 과거를 고백했다는 건 드디어 그가 그녀 인생의 작은 한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니까, 아직은 희망이 있는 거다.
그래서 그는 희망을 놓지 않기로 결심했다.
“고맙다고? 이게…… 어떻게 고마울 일이야?”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잖아. 우리 나이에 그런 연애 한번 안 해봤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거지. 나, 여자 과거 문제 삼아 물고 늘어지는 구질구질한 놈 아니야.”
“하지만…….”
“너한테 미쳐서 아무것도 안 보여. 파혼이 아니라 이혼을 하고 왔다고 해도…… 나한텐 문제가 안 된다고.”
예상치 못한 그의 반응에 놀란 빛나는 붙들었던 승현의 손을 스르르 놔버렸다.
그러자 자유를 찾은 그의 손가락은 그녀의 매끈한 턱 선을 지나 탐스러운 입술에 머물렀다.
밤하늘을 등지고 있는 그의 눈동자는 시종일관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그 맹목적인 사랑에 몸이 떨릴 만큼 두려우면서도 묘한 감정에 몸서리를 쳤다.
그런 빛나의 눈빛을 읽었던 것일까.
장난기를 거둬낸 승현은 거부할 수 없는 음성으로 그녀에게 주문을 걸기 시작했다.
“잘 들어, 유빛나. 내가 연애를 혼자 시작하긴 했지만…… 끝까지 혼자 할 생각은 없어.”
말을 마친 그는 까만 밤하늘만큼이나 차분하게 가라 앉아 있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끊임없이 그의 머릿속을 괴롭혀 오던 그녀의 입술이 바로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천천히 기다려주려 했는데, 사실 내가 타고난 인내력 결핍 장애라…… 이제부턴 조금 서둘러 보려고.”
그렇게 줄 곧 당하기만 하던 외로운 늑대는,
“싫으면…… 밀어내.”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이성을 깡그리 날려버리며,
“이제부터 나…… 너한테 키스할 테니까.”
최후의 반격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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