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위승현의 여자
2018.02.21.
“아, 진짜! 내놓으라고!”
“그러니까 가르쳐달라고 할 때 곱게 가르쳐주면 얼마나 좋아!”
“이번엔 정말 모른다니까? 알잖아. 연락 안 되는 거!”
“그걸 믿으라고? 말이 돼? 가족들도 연락이 안 된다는 게?”
난리 났다.
고백하랬더니, 고해성사하고.
조금 직설적이긴 했지만 좋아하냐는 물음을 시비로 돌리더니, 이젠 대놓고 복실은 승현의 핸드폰을 빼앗아 약을 올리고 있었다.
신체조건으로 따지면야 승현이 훨씬 우세해 핸드폰 빼앗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닐 것 같았지만, 상대는 개복실.
승현이 아무리 긴 팔을 가졌다고 해도 복실이 한쪽 다리를 그의 복부에 고정한 채 최대한 멀리 밀어내고 있으니 핸드폰을 돌려받을 길이 없었다.
안간힘을 써봐도 그의 팔이 복실의 다리보다 길 수는 없었으므로.
빛나와 이정은 그런 그들의 모습에 넋을 놓았다.
하해와 같은 넓은 아량으로 이해를 해보려 해도 두 사람의 모습에선 연인들 사이에서 보이는 그러한 애정은 단 1%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원수라면 또 모를까.
뭐, 인심 써 그 관계를 정리해준다고 해도 기껏해야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는 남매 정도.
그렇다면, 도대체 그날 빛나가 봤던 장면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아, 진짜 웬수! 웬수도 이런 웬수가 없어!”
“너 지금 나한테 웬수라고 했냐?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네! 흥! 어디 보자, 오빠 번호가…… 찾았다!”
“아악! 전화만 해! 진짜 가만 안 둬!”
샴쌍둥이처럼 지긋지긋하게 붙어 싸우기만 하던 남매가 백만 년 만에 사이가 좋았던 그 찰나의 순간, 그 순간을 빛나가 목격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깨달음이 비단 빛나의 몫만은 아니었다.
곁에 있던 이정이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로 깊은 자기반성을 했기 때문이다.
“저것들을 잠시나마 큐피트 화살로 묶었다니, 내가…… 미친년이다, 내가…….”
이정은 기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빛나는 그동안 가슴앓이 했던 게 분했던지 냉수 한 잔을 시원스럽게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지자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조마조마했던 속 쓰림이 사라지자 그 자리엔 안도감과 함께 억울함이 들어찼다.
도대체 위승현이 뭐라고 그토록 가슴앓이를 했단 말인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타났다 하면 그나마 얼마 안 되는 그녀의 행운까지 모두 빨아들이는 불운의 상징 위승현이었는데.
정말, 어쩌자고…….
아직까지도 아옹다옹 싸우는 두 사람을 향해 있던 빛나의 눈동자가 순간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들고 있던 유리컵을 식탁 위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설마…….”
나, 쟤…… 좋아하는 거야?
말도 안 된다.
하지만 그것밖엔 이 묘한 감정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정말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이었다.
***
복실의 짝사랑 상대가 승현이 아닌 그의 형이라는 사실을 털어놓자 이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꾸 되물었다.
“형님? 저번에 오셨던 그 형님?”
“네.”
“그 모자 쓰고 턱선 날렵했던…… 걸어만 다녀도 뒤에 후광이 번쩍번쩍했던 그분?”
“아마도…….”
무서운 이정의 기세에 승현이 머뭇거리자 복실이 고개를 앞으로 쭈욱 내밀며 확인 사살을 시켜주었다.
“언니도 그날 우리 오빠 봤죠? 맞아요, 맞아. 그 사람. 인정머리 없이 잘생긴 인간. 그 남자가 내 남자 맞습니다!”
승주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 복실이 손을 번쩍 들며 이야기하자 이정은 식탁 의자를 끼익- 소리가 나게 밀어내며 힘없이 일어났다.
그러곤 영혼 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그럼 그렇지. 내 복에 무슨 남자…… 아, 역마살이 꼈다더니. 진짠가? 부적이라도 하나 써야 하나?”
이정은, 이번에도 역시 시작도 해보지 못한 사랑을 곱게 접으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복실이 벌떡 일어나 뒤쫓았다.
“언니, 왜 그래! 어디 가?”
그렇게 두 사람이 사라지자 승현을 바라보는 빛나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든 이 애매한 감정에 몹시 혼란스러웠다.
복실이 짝사랑하는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다.
바로 눈앞에 있는 이 녀석만 아니라면.
빛나의 눈빛을 읽었던 것일까. 승현은 나른한 표정으로 턱을 괴며 입을 열었다.
“자, 복실이 짝사랑 상대가 내가 아니라는 건 확실해졌고. 이제 우리 데이트해야지?”
별것 아닌 그 물음에 왜 이토록 심장 끝이 떨리는지.
이해할 수도, 그리고 인정할 수도 없는 제 감정에 빛나는 입술을 앙물었다.
“내일 하루, 온전히 나한테 내주기로 했잖아.”
그 말에 그녀는 잠시 망설여야 했다.
집에 오기 전엔 복실의 짝사랑 상대가 그일 거란 100% 확신이 있었기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내일은 점심 약속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내일 약속이 있어.”
“뭐? 좀 전에는 그런 이야기 없었잖아.”
“그거야, 이렇게 될 줄 몰랐으니까.”
“그런 게 어딨어?”
무척이나 느긋해 보였던 그가 억울함에 턱을 괴고 있던 팔을 풀며 물었다.
그 모습이 마치 때를 쓰는 어린아이 같아 빛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저녁은 시간 괜찮아. 저녁이라도 좋다면…….”
“콜!”
미안함에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빛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승현은 웃으며 콜을 외쳤다.
여기서 오만이라도 떨었다간 그마저도 날려버릴 것 같았기에.
그런데, 좋아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승현의 웃음에 그녀의 심장이 춤을 추었다.
마음이 착잡했다.
아직 원준으로 인해 아물지도 않은 상처를, 다름 아닌 위승현 때문에 덧나게 둘 순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빛나는 분명한 선을 그었다.
“하지만 이건 확실히 해두자고. 이거…… 데이트 아냐. 우리 알고 지낸 게 벌써 십 년이잖아. 십년지기끼리 간단하게 식사하는 정도로 해두자고.”
그 말에 기분이 나쁠 법도 하건만, 승현은 여전히 입가에 기분 좋은 웃음을 보이며 대답했다.
“편하게 생각해. 중요한 건, 내일 저녁을 우리 둘이 함께한다는 거니까.”
***
황금 같은 휴일, 점심시간.
몇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김병훈 검사를 만나는 데 실패하자 빛나는 썩은 동아줄이라도 어쩔 수 없이 그 연줄을 잡게 되었다.
결국 이 좋은 날, 현성과 점심 약속을 했던 것이다.
그것도 너무 바빠 주말 근무를 한다는 현성 때문에 빛나는 몸소 검찰청 근처까지 발걸음을 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판단은 금세 후회로 물들기 시작했다.
현성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그녀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 뭐라고 했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빛나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현성은 가뜩이나 소화불량 걸릴 것 같은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띄우며 조금 전 그 말을 다시 되풀이했다.
“내가 김병훈 검사랑 자리 마련해주겠다고. 대신 네 남자친구…… 위승현, 내 앞에 와서 사과하라고 해.”
“허…….”
세상에, 잘못 들은 게 아니다.
빛나는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려 두 주먹을 꼭 틀어쥐었다.
그렇게 자신을 다스리지 않으면 웃고 있는 현성의 얼굴에 주먹을 날릴 것 같아서다.
“사실, 내가 그날 이후로 제대로 잠을 못자. 이거 보이냐, 다크서클? 이거…… 위승현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려서 생긴 거야.”
현성은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그러곤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속삭였다.
“게다가 그에 대한 부수적인 피해도 만만치 않았거든. 그러니까 당연히 난 그 녀석에게 사과 받을 자격이 있어. 아니, 받아야겠어. 이번 기회에.”
빛나의 인상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그러나 눈치 없는 현성은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피더니 상체를 일으키며 더더욱 조용히 속삭였다.
“대신…… 그 녀석 형한테는 말하지 말고. 알았지?”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그 녀석 형’이라 함은 얼마 전 승현에게 들은 바대로 위로 둘 있다는 그 형들 말인가?
어쨌든, 빛나에게 중요한 포인트는 그게 아니었다.
문제는 눈앞에 있는 이 시골 쥐처럼 생긴 조현성이 승현에게 ‘그날’ 일에 대해 사과를 받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녀를 빌미 삼아.
“그 녀석 형이 아는 순간, 우리 딜도 없는 거야. 알아들어? 정말 그 녀석 형 모르게 해……야 한다고.”
지금도 누가 들을세라 어찌나 숨을 죽이고 속삭이는지 그녀의 귓가에 역겨운 입김이 불쾌하게 와 닿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빛나의 갈고리 같은 손이 그의 넥타이를 움켜쥔 후였다.
“어, 어…… 뭐야, 유빛나. 이거 놓고…….”
당황한 현성은 진수성찬이 차려진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둔 채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자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빛나는 서늘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되물었다.
“다시 말해봐, 뭐라고? 뭘 원한다고?”
“그러니까 내 말은…… 위승현이 나한테 와서 사과를 하면…….”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빛나는 움켜쥔 넥타이를 더 아래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현성의 놀란 얼굴이 점점 테이블과 가까워졌다.
“다시 말해. 뭘…… 하라고?”
“어, 너 이해력 딸리냐? 그런 이해력으로 어떻게 법대를 졸업했대? 그러니까 위승현이…… 으-아악!”
눈치 더럽게 없는 조현성, 아직도 사태 파악 못 한 그의 입에서 승현의 이름이 튀어나온 순간 빛나는 움켜쥐고 있던 넥타이를 사정없이 끌어당겼다.
그러자 현성의 입에서 말을 하다 말고 비명이 튀어 나왔다.
이유인즉, 바로 눈앞에 팔팔 끓는 돌솥찌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조금만 더 당겼더라면 그 돌솥에 얼굴이 데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너무 놀란 현성의 눈이 양옆으로 길게 찢어지면서 웬만해선 보이지 않는 눈동자의 흰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해력이 딸리는 건 내가 아니라 너네.”
“무슨…….”
“사과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거야.”
“이거 놓고…….”
“그런데, 걔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감히…… 어따 대고 사과를 하래.”
너무 화가 나 넥타이를 틀어쥔 그녀의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금 당장 쥐고 있던 넥타이를 당겨 바글바글 끓고 있는 돌솥찌개에 시골 쥐처럼 생긴 그의 면상을 처박아주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위험을 감지한 현성이 테이블 끝을 잡고 버티다 무리수를 두고 만다.
“나는 네가 김병훈 검사를 만나고 싶다고 하니까. 안 만나고 싶어?”
그것이 화근이었다. 간신히 참고 있던 빛나의 분노에 기름을 들이부은 격이었으니.
“뭐라고? 이 미친놈! 나를 빌미로 감히 승현이한테 그런 말도 안 되는 사과를 요구해?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냐? 넌 네가 이유도 없이 휘두르는 주먹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상처 받고 쓰러지는지 모르지? 그저, 네가 가진 그 권력을 남한테 보여주고 싶은 거잖아! 하지만 위승현은 달라!”
“…….”
“적어도 걔가 휘두르는 주먹엔 ‘이유’가 있다고!”
빛나는 움켜쥐고 있던 현성의 넥타이를 놓고 대신 멱살을 움켜쥐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진지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승현의 짓궂은 미소에 그를 밀어냈지만, 그렇다고 조현성 따위가 그를 입에 올리는 건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빛나는 이번 기회에 확실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김병훈 검사 안 만나고 싶냐고? 만나고 싶어! 하지만 널 통해선 아니야! 네가 주선한 만남이라면 내가 거절하겠어!”
“무슨…….”
“너 같은 인맥, 필요 없다고.”
“…….”
“더러운 인맥, 내 손으로 끊어 내겠다고.”
“…….”
“그러니까, 참고 있을 때…… 내 눈앞에서 조용히 사라져!”
그렇게 말하며 빛나가 현성의 멱살을 놔주자 그는 다 풀려 버린 넥타이를 바로 하며 서너 발자국 물러났다.
현성이 그리 큰 키는 아니지만 저깟 여리여리한 여자 하나쯤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를 노려보는 빛나의 성난 눈동자가 감히 그럴 수 없게 만든다.
그만큼 그녀는 당당했다. 이런 순간에도 머리카락 한 올 흩어지지 않고 반듯하게 서 있을 만큼.
게다가 유빛나 성질 더러운 건, S대 동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으니 여기서 그가 잘 못 행동했다간 천하의 유빛나가 어떻게 나올지는 그저 미지수였다.
피해가는 게 옳다, 생각했다.
그래서 현성은 부랴부랴 자신의 재킷을 챙겨 들고 그곳을 나와 버렸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화를 삭이고 있던 빛나는 현성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며 두 손을 꼭 틀어쥐고 있었다.
아직도 분노가 가시질 않는다.
“아오, 이 새끼! 그래도 분이 안 풀리네!”
결국 빛나는 그 자리에 급하게 돈을 놓고 그곳을 떠났다.
뛰다시피 레스토랑을 나온 그녀는 이제 막 닫히려는 엘리베이터를 보았다.
그곳엔 현성과 함께 꽤 많은 사람들이 탑승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닫히려는 그 문을 급하게 양손으로 붙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들어선 그녀에게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고, 현성은 거의 공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엘리베이터에 탄 그녀는 사람들을 뚫고 제일 뒤에 자리한 현성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한바탕 전쟁을 치룰 거라는 현성의 예상과는 달리 빛나는 얌전히 그의 곁에 서 있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어머! 어머! 어딜 만져!”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그의 곁에서 찢어질 듯한 빛나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목소리가 이렇게 높았었나 싶을 만큼 째지는 비명소리였다.
놀란 현성이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런 미친놈을 봤나!”
그 욕설의 끝은 가차 없는 싸대기였다.
잠시 그 타이밍을 잘못 예상했을 뿐, 역시나 빛나는 그를 곱게 보내줄 계획이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마치, 몇 날 며칠 싸대기 때리는 연습을 한 사람마냥 그녀의 손이 현성의 뺨에 찰떡처럼 감기는 소리가 경쾌하게 엘리베이터 안을 울렸다.
쫘-악!
“어딜 만져! 어딜! 아직도 우리가 사귀는 사인 줄 알아? 바람 나 헤어졌으면 엄연히 남남이야! 남남끼리 엉덩이 만지면 그게 바로 성추행이라고, 이 미친놈아-악!”
헐…….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엘리베이터 안의 시선이 순식간에 그들에게 쏠렸다.
하지만 현성은 뺨의 아픔보다도 빛나가 주는 정신적인 쇼크에 비명횡사 할 판이었다.
“아니, 애랑 나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
그가 변명을 하려 했지만 그때 작은 소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그러자 빛나가 그의 변명을 가차 없이 틀어막아 버리며 살벌하게 경고했다.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당해 보네. 너, 내가 지금 당장에라도 고소하고 싶지만 여기 CCTV도 없고 증거도 없어서 참는다. 알았냐?”
사람들이 저마다 그를 보고 혀를 끌끌 차며 경멸 어린 시선을 보냈다.
현성은 태어나 이렇게 억울하고 기가 막힌 경우는 처음이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선다.
그러자 그는 경기를 일으키듯 빛나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야! 증거가 없어 억울한 건 나라고, 네가 아니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빛나가 다시 뒤를 돌아 그에게 다가왔다.
호기 있게 소리는 쳤지만 열 받은 그녀의 기세에 눌린 현성은 한 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뭐, 또…….”
다시 마주한 그녀의 눈동자 속에 빨간 불길이 일고 있었다.
위승현에게 사과 한마디 바란 게 세상에서 가장 큰 잘못이었던 것처럼.
“야, 내가 이번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어라.”
그녀가 속삭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낮게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그렇게 긴장해 있는 현성의 귓가에 쓰리도록 달콤살벌한 음성이 살포시 와 닿았다.
“나…… O형이다. 천, 한, 피가 아니라.”
“…….”
“한 번만 더 천한 피 어쩌고 지껄이면 그땐…… 너 죽고 나 산다! 위승현이 손 거칠 필요도 없어! 넌, 내 거야!”
빛나는 그의 눈앞에 주먹을 힘 있게 쥐어 보이며 의미 있는 협박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리곤 억울한 표정으로 주저앉기 일보직전인 현성을 엘리베이터에 홀로 남겨둔 채 거만하게 발길을 돌렸다.
긴 머리를 한번 휘날려주며 그녀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어디 거지 깽깽이같이 생긴 게, 감히 위승현한테 사과를 하래? 아오, 짜증나. 괜히 날 세웠네. 이러다 이마에 주름 생기는 거 아냐?”
빛나가 제 이마를 매만지며 건물을 나섰다.
헌데 그런 그녀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승현과 통화를 하고 있던 승준이었다.
그의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차마 내려서지 못하는 현성의 넋 나간 얼굴과 걸음걸이만으로도 한껏 열 받아 보이는 빛나의 뒷모습을 번갈아보았다.
그러더니 씨익- 웃으며 핸드폰 저편의 승현에게 묻는다.
“너, 연애하냐?”
순간, 열심히 떠들던 승현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그리고 잠시 후 놀란 승현이 더듬더듬 되물었다.
[어…… 떻게 알았어?]
“키 165 정도. 웨이브진 갈색 머리. 뽀얀 얼굴. 보기 드문 미인형.”
[헉, 설마…… 나한테 사람 붙인 거야?]
“내가 뭐하러 귀한 자원을 그런데 낭비하겠어?”
[아니, 그럼 어떻게 알았어?]
“다 아는 수가 있지.”
[작은형이 말했어?]
“승주는 알고 있었어?”
되려 묻는 말에 승현은 더 기겁을 했다.
[그럼 어떻게 알았대? 헐…… 형! 진짜 어떻게 알았냐고!]
승현의 그 외침을 마지막으로 승준은 짓궂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지금쯤이면 승현의 얼굴이 벌게져서 혈압으로 뒤통수가 뚫렸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승준은 차에 오르지 못하고 씩씩대는 빛나에게서 여전히 시선을 떼지 못한 채였다.
그녀는 현성의 넋을 그렇게 양심 없이 꿀꺽 한 것도 모자라 아직까지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를 내질렀다.
“아오-옷! 짜증 나-악!”
그 신경질적인 모습에 길 가던 행인들이 기겁을 하며 피해갔다.
하지만 승준은 오히려 기분 좋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성깔 있네. 위승현 여자다워.”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