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고백과 고해성사.
2018.02.18.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외근을 나갔다 이제 막 회사로 복귀한 빛나는 제 사무실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여직원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엔 내가 들어갈 차례잖아!”
“방금 전 내가 녹차 갔다 놨다니깐!”
“혹시 모르잖아. 인스턴트커피가 취향일지!”
“야, 무슨 소리야. 유빛나 변호사님은 내 담당이야, 이것들아. 고로, 여긴 내 구역이라고!”
그녀들은 빛나가 뒤에 서 있는 것도 모른 채 서로 영역 싸움에 한창이다.
이에 빛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세상에나, 내가 이렇게 인기가 좋았어? 몰랐네?”
“헉, 변호사님! 언제…….”
“방금. 그거 나 주려고 탄 인스턴트커피야? 취향은 아니지만 날 위한 거라니, 잘 마실게.”
빛나는 한 여직원의 손에 들린 커피 잔을 빼앗아 한 모금 들이켰다.
물론 인스턴트커피는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지만 정성이 갸륵해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참, 선정 씨. 혹시 나한테 온 메시지 있나?”
“억, 아니요!”
왜 그렇게들 놀라는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좋다 싸울 땐 언제고.
빛나는 여직원들을 뒤로 한 채 자연스럽게 사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짤막한 신음소리와 함께 문을 닫아버렸다.
잘 못 본 게 분명하다. 요즘 들어 너무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헛것이 보이는 것일지도.
“아, 참! 말씀 드린다는 게. 남자친구 분 오셨어요.”
선정은 온 몸을 베베 꼬는 것으로 승현의 존재를 알려왔다.
젠장, 잘못 본 게 아니구나.
빛나는 목구멍까지 기어 나오려는 악을 간신히 눌러 참으며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녀가 들어서자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삐딱하게 앉아 있던 승현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덩달아 보이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 하나.
승현의 코앞엔 드립 커피부터, 녹차에 홍차, 율무차에 코코아까지, 무려 다섯 잔이나 되는 컵이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회사에서 마실 수 있는 것은 전부 다 동원된 듯싶었다.
그제야 빛나는 제가 들고 있는 인스턴트커피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닌 승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이거…… 여기 직원 분들이 무척 친절하시더라고. 굳이 됐다는데도 이렇게.”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거의 손도 대지 않은 다섯 잔의 컵으로 향하자 승현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이에 빛나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 다른 주제로 입을 열었다.
“여긴 웬일이야?”
“웬일은. 데이트하러 왔지.”
“데이트?”
그녀는 그가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하며 기가 막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제정신이니?”
“아니, 왜? 생각해보니 우리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못한 것 같아서 말이지. 네가 나에 대한 감정을 확인할 시간이 너무 없었던 것 같아. 그런 의미에서 우리…….”
“야! 난 너랑 데이트 못 해! 그럴 수 없단 말이야!”
자꾸 어제 술을 마시며 ‘고백할 거야!’라는 말을 구호처럼 외치던 복실이 떠올랐다.
“왜, 안 되는데?”
그가 물어왔지만 빛나는 간신히 그 대답을 주워 삼켰다.
복실이 고백도 하기 전에 그녀 입으로 모든 걸 밝힐 수가 없어서다.
“그게, 그러니까…….”
말이라면 밀리지 않는 그녀가 다시 버벅대기 시작하자 승현이 상체를 기울여 그녀의 책상 위로 턱을 괴며 입을 열었다.
“너랑 나, 안 될 이유 하나도 없어. 내가 결혼을 한 몸도 아니고, 그렇다고 네가 임자 있는 몸도 아닌데 안 될 이유가 뭐야?”
“왜 이렇게 고집이 세니? 사람 감정이 밀어붙인다고 돼?”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기회를 갖자는 거야. 서로 좀 더 알아볼 수 있는 기회.”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 아니라는 말을 못 하겠다.
제아무리 천방지축 위승현이라도 상처 받을 줄 아는 심장을 가졌으니까.
-너…… 나 싫어하는 거 아니잖아.
어쩌면 승현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싫은 게 아니라 너무 좋아질까 봐 피하는 것일지도.
“데이트해. 응? 오늘 너 해달라는 거 다 해줄게.”
턱을 괸 채 축 쳐진 눈꼬리로 입을 여는 그의 말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복실을 무시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그와 데이트를 할 만큼 비도덕적인 인간이 되지도 못했다.
결국 빛나는 그와의 데이트를 거절할 수 있는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야 했다.
“어제 이정이랑 복실이가 술을 좀 많이 마셨어. 그래서 이정인 오늘 월차까지 냈고. 같이 밥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 핑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승현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축 쳐져 있던 눈꼬리를 대번에 치켜 올리며 입을 열었다.
“좋아. 복실이한테는 내가 전화할게. 그럼 되지?”
그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자신의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
그러자 빛나는 기겁을 하며 버튼을 누르려는 그의 손을 붙들었다.
“안 돼! 전화해서 뭐라고 하려고?”
“뭐라고 하긴? 너랑 데이트할 테니 집에 계시는 분들은 기다리지 말고 챙겨드시라고 말하려던 참인데?”
이쯤 되자 빛나는 애가 탈 수 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힘들어하는 복실에게 그들의 애매한 관계를 들킬 순 없었단 말이다.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 결심하며 그녀는 승현의 핸드폰을 뺏어버렸다.
어떻게 하면 승현도, 복실도, 그리고 빛나 자신도 상처 받지 않고 이 감정을 정리할 수 있을까.
도무지 답을 알 수가 없었다.
“핸드폰 줘!”
“싫어. 절대 못 줘. 그럼 전화할 거잖아.”
“나랑 오늘 데이트할 거야?”
“아니. 안 해.”
“그럼 핸드폰 내놔.”
두 사람의 팽팽한 신경전 때문에 사무실 안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승현은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너 이러는 거 시간 낭비야. 내가 포기 안 할 거니까.”
그렇게 말하며 빛나가 잠시 긴장을 늦춘 사이 그는 긴 팔을 번개처럼 뻗어 그녀의 손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낚아채었다.
그 행동이 너무 빠르고 정확해 빛나는 미처 대비하지 못한 채 핸드폰을 빼앗기고 말았다.
“엇!”
그녀가 의자에서 반사적으로 튕겨 일어나 손을 뻗어 허우적대보았으나 어림없는 소리다.
그들 사이엔 유난히도 널찍한 그녀의 책상이 자리 잡고 있었고, 승현이 벌떡 일어나 손을 높이 치켜 들어버리자 그의 핸드폰은 그녀의 손이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사라져버렸다.
“안 돼! 절대 전화하면 안 돼!”
“도대체 왜 안 된다는 건데? 이정 씨랑 복실이가 애야?”
“그래도 안 된다고-옷!”
“내가 잘 말한다니까. 그러니까 나랑 밥만 먹고 들어가.”
장난기로 가득 찬 승현은 아직도 허우적대는 빛나를 바라보며 보란 듯 손을 높이 치켜들고 핸드폰 다이얼을 눌렀다.
핸드폰 액정에 ‘개복실’이라는 세 글자가 선명히 뜨자 어떻게든 승현을 막아야 한다는 일념 하에, 빛나는 결국 최후의 수단을 쓰고 만다.
“걔가 너 좋아해! 진짜로 많이 좋아한다고!”
두둥!
그녀는 머릿속을 울려오는 이 천둥번개가 자신에게만 울리는 것인지, 승현에게도 울렸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 결과는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확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야, 이 새끼야! 속 쓰려 죽겠는데 어디서 장난 전화질이야! 말 안 할 거면 전화하지 마라-앗!]
스피커폰도 아닌데, 핸드폰 전편에선 전화를 받은 복실이 아무 말이 없자 혈압을 올리는 목소리가 선명히 전해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현은 여전히 손을 높이 쳐든 채 두 눈만 끔뻑일 뿐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충격의 쓰나미.
하긴, 그럴 것이다.
그녀도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는데 승현이라고 다를까.
그렇게 두 사람은 동작 그만 상태에서 한참을 있었다.
잠시 후, 먼저 정신을 차린 승현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가출한 멘탈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듯 여전히 넋을 놓은 채였다.
“나도…… 안 지는 얼마 안 됐어. 그러니까 우리…….”
“그만하자는 말 하지 마. 하기만 해. 나 가만 안 있을 거야.”
승현은 그렇게 입을 떼며 지금껏 손도 대지 않았던 눈앞의 음료에 손을 뻗었지만 그것을 들이켤 수는 없었다.
그러기도 전에 빛나가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너 좋아한 지 오래됐대. 그래서 어제 고백한다고. 그것 때문에 우리 술 마신 거야.”
“아니. 어떻게 그래? 말 안 했어? 내가 너 좋아 쫓아다닌다고?”
“어떻게 거기다 대고 그런 말을 해? 걔 너 좋아 맘 고생하는 거 뻔히 보이는데?”
“왜 말 못 해? 그리고 이건 말이 안 돼. 아니, 우리 얼굴 본 게 몇 번이나 된다고 내가 그렇게 좋대?”
“왜 얼굴 본 게 몇 번 안 돼?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그러는 너는 무슨 소리 하는 건데?”
이상했다. 분명 같은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핀이 어긋난 이 느낌.
이쯤에서 승현은 확실히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들고 있던 녹차를 드디어 입가로 가져가며 그 이름을 읊었다.
“이정 씨 이야기하는 거 아냐?”
그 순간, 빛나의 눈이 커졌다.
그러더니 당연히 아니라는 듯 더 기가 막힌 이름을 읊어낸다.
“아니, 난 복실이 이야기 하는 건데?”
그다음은 안 봐도 비디오.
“푸헉!”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승현의 입에 있던 녹차가 폭주했다.
***
운전대를 쥔 승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개복실!
도와준다더니, 그것을 빌미로 승주에 대한 정보를 달라더니, 도와주기는커녕 지금까지 오해의 산물이 되었다.
까맣게 가라앉은 그의 분위기 때문에 줄곧 곁에서 눈치만 살피던 빛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내가 말했다고…… 복실이한테 이야기 안 할 거지?”
“뭘?”
“걔가 너한테 고백한다고 했단 말이야. 내가 먼저 말 한 거 알면…….”
“아, 그 고백은…….”
하,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 고백은 우리 형한테 하는 거야, 라고 말해주면 간단한 일이었지만 승현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가 백번 말하는 것보다, 복실의 입을 통해 직접 듣는 것이 빛나에겐 더 나을 것이므로.
“일단, 내가 복실이를 통해 확인시켜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
“안 돼! 안 돼! 그냥 복실이가 말할 때까지 기다려. 응? 제발.”
“내가 못 참아. 너랑 나, 그동안 10년 돌아온 것도 안타까워 죽겠는데! 그래서 1분 1초가 아쉬운 판에 복실이 때문에 더 기다리라고? 아니, 안 될 말이지.”
“그럼 어쩌게? 복실이한테 잔인하게 굴면 내가 가만 안 있을 거야.”
빛나가 이를 악 물며 말했다.
그러자 승현은 기가 막히다는 듯 콧방귀를 날렸다.
“참, 유빛나. 네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다니. 그러는 넌 나한테 왜 이렇게 잔인한 건데?”
“그건…….”
“됐고. 나 복실이랑 알고 지낸 게 20년이 넘어. 네가 복실이 생각하는 만큼 나도 복실이 생각해. 잔인하고 굴고 싶어도 그럴 수 없거니와, 개복실한텐 통하지도 않아.”
“그럼 어떻게 할 건데?”
“나만 믿어.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빛나의 눈썹을 곤두세우며 운전 중인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몹시 화가 난 듯 다크한 아우라를 내뿜던 그의 입꼬리가 은근 슬쩍 치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웃음은 그녀를 몹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만일, 복실이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면? 그래서 그 관계가 확실해지면, 넌 아무 말 없이 내일 하루를 나한테 투자하는 걸로.”
빛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불안한 마음을 안고 복실의 20년 짝사랑이 승현일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
집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설 때까지도 두 사람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지만 집에 들어가기 전 빛나는 승현에게 당부하는 걸 잊지 않았다.
승현의 성격상 복실에게 상처 줄까, 그것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강하게 밀고 나가지 말고, 천천히. 자연스럽게 복실이한테 말할 기회를 주는 거야. 알았지?”
승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빛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자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목소리가 주방에서 들려왔다.
가서 보니 중국 음식부터 베트남 음식에 분식까지, 아주 글로벌하게 주문해 테이블 한가득 포식을 하고 있었다.
“응? 어떻게 두 사람이 같이 와?”
이정이 떡볶이 하나를 입에 넣다 말고 빛나 뒤에 있는 승현을 보며 물었다.
그나마 이정은 아는 척이라도 해줬지, 복실은 먹는 데 정신이 없다.
짜장면 면발을 입안에 가득 넣은 것도 모자라 더 이상 들어갈 것도 없는 그 입에 군만두까지 쑤셔 넣느라 초집중 상태다.
저대로 씹을 수나 있을지 걱정이었지만 복실은 그 걱정이 무색하리만치 한참을 오물거리더니 입 안에 있는 것을 전부 삼키고 다시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야, 사람이 왔으면 인사라도 좀 하지?”
“응. 왔냐? 어떻게 언니랑 같이 왔대?”
인사는 하는 둥 마는 둥,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정신없이 다시 면발을 휘어 감는 복실을 보며 승현이 물었다.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그 말에 이정의 눈이 커졌다.
이미 이정은 승현이 여기 등장한 순간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젓가락을 놓은 상태였다.
그러곤 빛나에게 ‘무슨 일이야?’라며 눈으로 묻고 있었다.
하지만 빛나는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가 없다.
심장이 너무 파닥거린 나머지 목구멍을 뚫고 나올 것 같았다.
말이 꽉 막힌 빛나는 두 손을 꼭 그러쥐며 복실의 상태를 살폈지만 그런 긴장감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그녀는 여전히 짜장면 면발 감기에 열중이었다.
“나 밥 먹고 이야기하면 안 돼? 이게 첫 끼다.”
“안 돼. 지금 해. 너 나한테 할 말 있잖아.”
“없는데?”
“있을 텐데?”
“없다고.”
“있잖아. 고백할 거.”
그 말에 이정은 침을 삼키가 사래에 걸린 듯 컥컥 기침을 해댔다.
빛나는 승현이 약속과 달리 너무 몰아붙인다 생각했던지 그의 팔을 붙들며 앞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도 곧 그가 제지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그저 지켜보라는 이야기다.
“너 나한테 고백할 거 있잖아. 다 알고 왔으니 빨리해.”
승현이 다시 한 번 말하자 복실은 젓가락질을 멈추고 그 큰 눈을 또르르 굴리더니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알았대? 모를 줄 알았는데.”
“뭔데?”
그의 물음에 빛나와 이정의 숨이 다 넘어갔다.
기회다! 복실아, 고백할 기회!
자, 어제 술 마시며 울부짖었던 그 말을 속 시원하게 해버려!
더 이상 빛나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승현의 막가파식 일방통행에 숨이 막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오늘 이 순간으로 끝이 났으면 싶었다.
그렇게 모든 이의 관심을 받으며 복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사실은, 그거…… 나야.”
“뭐가.”
“그거 있잖아. 그거.”
그래, 그거! 말을 하란 말이야! 복실아!
사랑한다고 왜 말을 못 해! 20년 동안 짝사랑해왔다고 왜 말을 못 해!
빛나와 이정은 대신 외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네가 어제 그렇게 도망가 버리니까 너무 열 받아서……. 알잖아, 나 열 받으면 껌 한통 다 씹는 거. 씹다가…… 붙였어. 네 차에. 사이드 미러 뒤쪽에…….”
복실은 고백 대신 고해 성사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고해 성사는 승현의 혈압을 순식간에 올려놓았다.
“뭐라고? 내 차 사이드 미러에 씹던 껌을 붙였단 말이야? 제정신이야?”
“아, 네가 그렇게 그냥 가버리니까! 너무 열 받아서 그랬다고! 근데 어떻게 알았대, 내가 그런 거?”
아이고, 머리야.
몰랐다. 네가 그런 거.
그리고 거기에 씹던 껌이 붙어 있단 사실도, 전혀 몰랐단 말이다!
“아, 완전 범죄인 줄 알았는데.”
복실은 안타까워하며 제 머리를 탁 쳤다.
그 모습에 승현도 함께 뒤통수를 후려 갈겨주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파르르 떨리는 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어야 했다.
복실에게 말려들지 말자.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가까스로 진정을 시킨 승현이 바글 바글 끓어오르는 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다시 물었다.
“그거 말고, 다른 거 있잖아. 고백할 거!”
“다른…… 거?”
그러자 복실은 다시 한 번 눈알을 굴리며 급 당황을 했다.
그래, 복실아! 이번엔 가자! 한 방에 가자! 응?
복실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알았지?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빛나는 속이 바짝 바짝 탄 나머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대신 고백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어서 이 숨 막히는 상황을 끝내고 싶었단 말이다.
그렇게 여러 사람 애 타게 만들며 드디어 복실이 입을 열었다.
“에이,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아, 그래! 내가 그랬어. 내가 그랬다고.”
“그래. 그러니까 뭘!”
“몇 년 전에…….”
나왔다! 몇 년 전!
“너 오빠 차 사이드 미러 박살내고 도망갔을 때, 결국 잡혀서 너 오빠한테 개털린 날 있잖아…… 그래, 내가 너 어디 있는지 꼰질렀어.”
그러나 복실은 이번에도 가슴 설레는 고백대신 승현의 혈압을 폭발시켰다.
“야아-악! 이 웬수! 할 게 없어서 프랑스에서까지 형한테 전화해 고자질하냐!”
아, 오해고 뭐고 다 필요 없다!
몇 년 전 일이지만, 그날 잡혀 털린 것만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리는데 복실이 일조했다 생각하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단 말이다.
어쩌자고 아름답게 설레야 할 고백타임이 피의 고해성사가 되어버렸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일단 빛나는 승현을 진정시켰다.
“승현아. 복실이가 부끄러워서 그래. 부끄러워서! 일단 참고, 제발 참고…… 차분하게 이야기하자. 응?”
그러곤 복실을 돌아보며 눈짓한다.
빨리 말해! 고백하라고!
그러나 그러한 눈짓에 복실은 또 한 번 눈을 또르르 굴리며 입을 열었다.
“뭐지? 이게 아닌가? 내가…… 잘못한 게 또 있나?”
승현은 이 고해 성사 타임이 더 진행될수록 그에게 손해라는 것을 깨달았다.
들어봐야 혈압 오르기밖에 더 하겠는가.
그래서 결국 승현은 이 진실 게임을 제 손으로 끝내기로 했다.
그것도 아주 자극적이고, 직접적인 발언으로.
“야! 너 나 좋아하냐? 말해봐! 나 좋아하냐고!”
순간 빛나와 이정은 얼음이 되었다.
저 좋아한다는 여자에게 어쩜 저렇게 배려심 없이 물어볼 수 있을까.
아무리 복실이 말귀를 잘 못 알아듣기로서니!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그녀들의 쓸데없는 걱정에 불과했다.
너무 놀라 당황할거라 생각했던 그녀들의 생각과는 달리,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복실이 승현을 정면으로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그러곤 진정으로 열 받은 표정으로 썩소를 날리며 입을 열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살벌하게.
“너 지금 나한테…… 시비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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