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전설의 머핀
2018.02.14.
“아, 놔. 진짜! 사달라는 거 다 사줬잖아! 아이스크림에 과자에 껌에! 그러니까 이제 그만 나 좀 놔줘!”
하루 반나절을 쫓아다니며 승주의 행방을 묻는 복실 때문에 승현은 노이로제가 걸릴 판이었다.
게다가 옆에 빌붙어서 이거 사내라, 저거 사내라, 웬만큼 귀찮은 게 아니다.
“오빠 어디 있는데? 너 연락 되잖아. 빨리 연락 좀 해봐.”
복실은 방금 편의점에서 그가 사준 아이스크림 하나를 덥석 까서 물며 중얼거렸다.
이쯤 되자 정말 궁금하다. 도대체 승주는 왜 저렇게 애가 타게 찾는 것일까.
“그러니까 형은 또 왜!”
“응, 고백하게.”
“헛!”
너무 기가 막혀 튀어나오려던 말이 다 목구멍 뒤로 씹혔다.
아오, 요거 진짜! 20년 우정만 아니면 저 아이스크림을 목구멍 깊이 넣었을 때 뒤통수 한 대를 시원하게 후려쳐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상.
실행으로 옮겼다간 두 배로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승현은 제멋대로 튀어 나가려는 손을 막기 위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도대체 멍석 깔아줄 땐 뭐하고 있다가 나한테 또 이래!”
그랬다. 이틀 전 죽을 각오를 하고 승주를 불러 차까지 탈 수 있게 해줬더니, 그 기회는 순식간에 날려먹고 또 이 난리다.
“야, 그때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고. 술에 취했었잖아. 기억도 잘 안 난단 말이야.”
“그건 네 사정이고!”
“그리고, 내가 그때 그 정신으로 고백했어봐! 어떻게 됐겠어?”
그 질문에 승현은 두 번 생각 하지 않고 대답했다.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차였겠지.”
“거봐! 그런 걸 멍석 깔아줬다고 하면 안 되지! 우리 딜, 잊었어? 내가 말한 ‘기회’란 절대 그런 순간이 아니었다고!”
“그런 전제 조건은 없었잖아.”
“야악! 적어도 내 멘탈이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상태는 되어야 할 거 아냐! 아, 몰라! 빨리 오빠 어디 있는지 말해. 아님 연락처를 가르쳐주던지.”
복실은 거의 반 협박 수준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제 연애도 제대로 못하는 그가, 남의 연애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것.
“진짜! 내가 지금 내 밥그릇도 못 챙겨 먹고 있는데 네 연애 도와주게 생겼어? 그것도 목숨 줄을 담보로? 미쳤냐?”
“말 안 하면 되잖아. 내가 말 안 할게. 네가 알려줬다고 저-얼-대 말 안 할게.”
복실은 ‘절대’라는 말을 강조하며 각오를 다졌다.
유독 그를 올려다보는 두 눈이 별처럼 반짝인다.
그런데 어쩌나. 아직까지 승현에겐 제 몸이 친구의 연애사보다 더 소중한 것을.
“네 눈엔, 우리 형이 바보로 보이냐?”
그랬다. 승주를 속여먹기엔 그는 너무 똑똑했다.
게다가 이틀 전 여파도 아직 남아 있었고.
한마디로 절대 잔머리를 굴려서는 아니 된다, 이 말이다.
“비켜. 나 지금 정오 만나러 가야 돼. 너 때문에 십 분이나 늦었다고!”
그가 복실을 밀쳐내며 도로변에 세워둔 자신의 차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그렇게 그녀에게 등을 보인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특히나 그녀가 열이 받았을 땐 더더욱.
그가 자신의 차로 다가와 차 문을 열기도 전에 복실의 째지는 기압소리와 함께 니킥이 날아들었다.
“야-아악!”
퍽!
“으악! 너 진짜!”
승현이 기겁을 하며 연달아 날아오는 주먹질은 피했지만, 되지도 않은 애교에서 벗어나 치명적인 난봉꾼이 되어버린 복실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야! 너, 이리 와! 이리 오라고!”
“네가 자꾸 이러니까 형이 널 피해 다니는 거야! 알기나 하간?”
“뭐라고? 당장, 이리 와-아-악!”
결국 승현은 복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멀쩡한 제 차를 놔두고 황급히 택시를 잡아타는 차선책을 택했다.
그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그녀는 씩씩대는 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아오, 저거 진짜. 어떻게 구워삶지?”
하지만 열 받아 오르락내리락 하는 가슴을 진정할 길이 없다.
그때 줄곧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 엄마가 양손에 두 아이의 손을 잡은 채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딸, 잘 봐봐. 여동생이 오빠한테 저렇게 주먹질하고 대드니까 얼마나 보기 안 좋니. 그치? 그러니까 너도 오빠 때리지 마. 알았지?”
훈계를 하는 듯한 그 목소리에 그렇지 않아도 파르르 떨리던 복실의 눈썹이 허공으로 치켜 올라갔다.
승현과 복실.
하나도 닮지 않았는데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연인도 아니고 남매란다.
그것도 억울해 죽을 판인데 그보다 더 복실의 신경을 거스르는 건.
“아줌마! 제가 누나예요-욧!”
그랬다.
다름 아닌 그녀를 승현의 여동생으로 봤다는 사실.
엄연히 승현보다 생일이 두 달 빠른 복실로서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
“복실이는 뭐 할까? 부를까?”
“웬일이야? 처음엔 감당 안 된다, 그렇게 난리더니?”
빛나는 깎아 놓은 과일과 와인 한 병을 내오며 이정을 향해 눈을 흘겼다.
“네 말이 맞았어. 우리 복실이, 아주 치명적이더라고. 보면 볼수록 이뻐. 그리고 승현 씨랑 너무 잘 어울리기도 하고.”
순간 와인을 따르던 빛나의 손길이 멈칫했다.
그렇지 않아도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남의 입을 통해 다시 한 번 듣자니 속이 뜨끔 쓰렸기 때문이다.
“아, 정말 걘 다 가졌어. 얼굴 이뻐, 몸매 좋아. 머리도 그렇게 좋다며? 거기다 집안까지 좋으니 그런 여잘 마다할 남자가 어디 있겠어? 하늘은 너무 불공평해.”
“왜, 언제는 승현이만 보면 상콤이라 난리더니. 속 안 쓰려?”
“속이야 쓰리지. 하지만 난 인정도 빨라. 그리고 내가 두 사람의 20년을 어떻게 이겨 먹겠어? 20년이면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을 거야. 그 어느 누구도 파고들 수 없다고. 특히나 복실이 같은 애를 상대로는.”
이정은 사과 한 조각을 씹어 먹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 속삭였다.
“생각해봐. 두 사람이 비주얼이 아주 그냥…….”
“술이나 한잔해. 두 사람 일엔 그만 신경 쓰고. 복실이가 알아서 하겠지.”
빛나는 이정의 말을 막기 위해 그녀의 잔에 와인을 반 이상 따라주며 입을 열었다.
언제는 위승현 좋아 죽더니, 상대가 아무리 복실이라지만 이렇듯 쿨하게 포기하다니.
서이정답지 않다. 뭔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빛나를 무척이나 찜찜하게 만들었다.
“근데, 승현이 형님은 잘 계시나?”
“응? 네가…… 승현이한테 형님이 있는 걸 어떻게 알아?”
갑작스러운 이정의 질문에 놀란 빛나가 되물었으나 그때 현관 벨이 울려 두 사람의 대화가 끊겼다.
현관문을 열자, 편의점 비닐봉지를 한가득 든 복실이 예쁘게 웃으며 서 있었다.
“쨘! 놀랬지, 언니! 갑자기 언니 생각나서 들렀지!”
“어머, 웬일이야? 그렇지 않아도 이정이랑 한잔하고 있었는데 어서 들어와.”
복실이 들어오자 이정이 눈물겹도록 반겼다.
“복실아!”
“언니!”
이제 겨우 두 번째 만남인데 이토록 애틋할 수가 있단 말인가.
누가 보면 이산가족 상봉한 줄 알겠다.
“안 그래도 네 생각 했어. 빨리 들어와. 우리 한잔하자. 오늘은 집이니까 안심하고 마셔도 돼.”
“내가 타이밍을 아주 기가 막히게 맞췄네. 나도 술 사 왔는데.”
“그래? 앉아. 앉아.”
이틀 만에 모인 세 사람의 술자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빛나는 복실의 잔에 와인을 채워주며 입을 열었다.
“근데…… 고백은 했어?”
복실이 현관문 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궁금하던 질문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승현과 함께 있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쯤이면 고백하고도 남을 시간이 아닌가.
어떻게 되었을까.
감히 짐작하기도 힘든 결과였다.
“응? 무슨 고백?”
이정이 전혀 모르는 이야기라는 듯 묻자 복실은 와인 한 잔을 들이켜며 대답했다.
“아, 저 고백하기로 마음먹었거든요. 집에서 자꾸 선보라 난리고, 더 이상 미룰 수도 없는 일이기도 해서.”
“어머, 그래서? 그래서 했어?”
“아뇨. 아직.”
복실이 씁쓸하게 웃으며 이야기 했다.
그런데 그 모습에 쿵쾅대던 빛나의 심장이 차분하게 안정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왜?”
“그럴 기회가 없었어요. 아니, 기회는 있었는데 분위기가 그게 아니었어요. 왜, 딱 고백하면 내게 승산 있겠구나, 하는 타이밍 있잖아요. 근데 그땐…… 지금 고백하면 제대로 차이겠구나, 하는 타이밍이었거든요.”
“그렇지. 인생은 타이밍이지. 그래도 잘될 거야. 우리 복실이 이렇게 예쁘고 바른데 상대가 그걸 몰라줄 리 없잖아? 이런 네가 싫다면, 그 사람은 눈뜬 봉사인 거고.”
이정이 씩씩하게 말하며 복실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러면서 건배를 위해 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우리 복실이의 사랑을 위해!”
“위해!”
이에 빛나도 어쩔 수 없이 잔을 치켜들어야 했다.
아무래도 오늘 술자리는 그녀에게 무척이나 긴 시간이 될 것 같았다.
***
강남 호텔 펜트하우스.
그곳에선 누군가의 탄생일을 가장한 초호화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생일의 주인공이 모델이다 보니 초대받은 이들의 비주얼도 역대급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시선은 오로지 한곳에 몰려 있었다.
정오는 그 시선의 주인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뿌듯한 듯 승현의 곁에 앉아 중얼거렸다.
“야, 인상 좀 펴라. 이거 완전 건전한 파티야. 문제 생길 요지는 전혀 없다고. 그리고 여기 있는 애들, 너 전혀 몰라. 알잖아. 얘네들 대부분이 모델이야. 얘들이 알고 있는 너는 ‘위승현’이 아닌 ‘전설의 머핀’이라고.”
“그 별명 꺼내지 말랬지. 이 바닥 뜬 지가 언젠데.”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그 별명을 꺼내들자 심기가 불편한 듯 승현이 잘라냈다.
그러자 정오는 다른 곳으로 화제를 놀린다.
“저기 봐라. 쟤, 보여? 쟤가 바로 지수현이야. 요즘 들어 가장 핫한 모델.”
“그래서.”
“뭘 그래서야. 쟤가 지금 너만 쳐다보잖아. 너한테 딱 꽂힌 거지. 몸매 죽이지 않냐?”
승현이 전혀 재미없다는 듯 시큰둥하게 반응하자 정오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러더니 잠시 후 정오는 눈을 반짝이며 위스키 잔을 높이 치켜들고 소리쳤다.
“주목! 주목! 드디어 오늘 우리가 축하해야 할 일이 하나 생겼어! 우리 승현이가 드디어 독립을 했다!”
아, 피곤해.
정오의 발언에 승현은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자, 오늘은 내 생일이자 나랑 가장 친한 친구인 우리 승현이의 독립 기념일이야! 성공적인 독립을 위해! 우리 모두 건배!”
“건배!”
“축하해요, 오빠!”
“축하한다!”
대한민국 광복절도 아니고, 나이 서른 먹은 남자의 독립을 이리도 축하해줄 줄이야.
눈물이 앞을 가려야 했지만 모든 관심이 불편하기만 한 승현은 자신의 위스키 잔을 들었다 그냥 내려놓았다.
그러곤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부드러운 손이 가볍게 그의 가슴에 와 닿았다.
“머핀?”
승현은 귓전을 맴도는 그 섹시한 음성을 들으며 시선을 아래로 내려 제 가슴에 올려진 여자의 손을 바라보았다.
“별명이 머핀이라고 해서 빵처럼 물렁하게 생겼을 줄 알았는데, 아니네? 근데 왜 하고 많은 별명 중 하필이면 머핀이에요? 안 어울리게?”
농염한 그 목소리에 정신이 혼미할 법도 하건만, 오히려 승현은 눈썹을 곤두세웠다.
“무슨 소리야, 안 어울리다니. 내가 존경하는 분이 날 불러주던 별명이야. 네가…… 함부로 부를 수 있는 그런 별명이 아니라고.”
까칠한 그의 반응에 곁에 있던 정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눈을 마주하고 있는 이는 이 자리에서 가장 핫하다는 그 지수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승현의 유명세만큼이나 그러한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여전히 손은 그의 가슴을 뜨겁게 쓸어내리며.
“독립했다구요? 어디로요?”
“네가 알아서 뭐하게?”
“오빠 같은 사람은 어디서 사나 궁금해서. 나…… 초대해줄 거죠?”
그렇게 말하며 지수현은 앉아 있는 승현의 무릎 위로 엉겨들었다.
그녀의 긴 다리가 그의 허벅지 양쪽으로 뜨겁게 내려앉았다.
누가 봐도 노골적인 유혹에 주변이 숨죽은 듯 조용해졌다.
또한 그 농염함에 그렇지 않아도 치켜 올라간 그의 입술 끝이 더욱 말려 올라갔다.
그 모습이 어찌나 못되게 매력적인지, 앉아 있는 그를 내려다보는 지수현의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드디어 이 남자가 넘어왔구나 싶었다.
그러나 뭔가 하나 빠진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뭐지? 도대체 뭐가…….
뒤늦게야 지수현은 그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보통 그녀가 이쯤 나오면, 남자들의 심장 박동은 미친 듯이 춤을 추기 마련이다.
그것으로 그녀는 남자들이 보내는 신호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남잔 달랐다.
그녀의 손아래 있는 그의 심장은 더 없이 고요했다.
그리고 보았다.
웃고 있는 매력적인 입매와는 달리 그 아몬드형 눈매는 세상 지루함을 모두 담고 있음을.
뒤이어 굉장히 무료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서늘하게 파고들었다.
“무겁다. 내려와라.”
***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정오는 여전히 평화롭게 앉아 있는 승현을 바라보며 기가 막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현이 여전히 말이 없자 정오의 혈압이 솟구쳤다.
“쟤, 지수현이야. 지수현! 여기 있는 사내자식들 절반은 다 쟤 때문에 온 거라고!”
“그래서?”
“그래서라니! 아직도 모르겠냐? 너 지금 여기 있는 사내자식들 중 절반을 적으로 돌린 거라고!”
평소엔 사람 좋게 실실대기만 하던 정오가 오늘은 유독 열이 받은 모양이다.
그리고 승현은 정오가 진짜로 열 받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너, 내가 여기 있는 남자들 절반한테 공공의 적으로 찍힌 것에 대해 열 받은 거야? 아님, 다음번엔 지수현이 네가 주최한 파티엔 안 올까 봐 열 받은 거야?”
순간, 본심을 들킨 정오가 흠칫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더니 잠시 후 몹시도 심통 맞은 얼굴로 투덜대듯 입을 연다.
“넌 정말 이상한 자식이야. 여자 보는 눈도 너무 이상하고. 지수현이 노골적으로 유혹을 하는데 그렇게 내치다니.”
“지수현한테 안 넘어가면 여자 보는 눈이 이상한 거냐?”
“그냥, 일반적으로 하는 말이다. 눈이 있으면 한번 봐라. 넌 저런 애 보면 심장이 안 뛰냐? 아, 맞다. 네 기준에선 심장이 뛰면 죽는다 했지? 미안하다. 정상이 아닌 너한테 정상을 강요해서.”
정오는 그의 등을 토닥이며 비꼬듯 이야기했다.
이쯤이면 더욱더 말도 안 되는 피드백이 돌아올 것을 예상하며.
그런데,
승현의 입꼬리에 묘한 웃음이 걸렸다.
뭐지? 저 낯설지 않은 오싹한 웃음은?
그 순간 정오의 눈이 쏟아질 듯 커졌다.
“뭐냐, 그 웃음은? 무섭게!”
“무섭긴, 뭐가? 그냥…… 네 말이 맞았다고 인정해주는 건데?”
“내 말? 무슨 말?”
정오가 기겁을 하며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정오에겐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난무한 룸 중앙을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맞았어. 심장이…… 뛰더라고.”
게다가 입가엔 여전히 기분 좋은 웃음을 매달고서.
“좋으니까 심장이 뛰더라. 화가 나서 뛰는 게 아니고…… 너무 좋아서…….”
생각만으로도 기분 좋은 사람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빛나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나대기 시작했다.
섹시한 지수현의 유혹에도 끄떡없던 그 심장이 말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오는 술잔을 들고 있던 손까지 파르르 떨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이 일을 어쩌면 좋나.
정오는 들고 있던 술잔을 비워내고 바텐더에게 한 잔 더 요구했다.
그러곤 벌렁대는 심장을 겨우 달래고 그 술을 입안으로 털어 넣는데 이마저도 승현은 가만히 놔두질 않았다.
“나, 연애해…… 그리고 이번엔, 결혼도 하려고.”
“푸헉!”
결국 정오의 입에 있던 술이 폭발했다.
잠시 후 겨우 사래 들린 호흡을 진정시키고 일어났을 때 정오는 승현의 진지한 눈빛과 마주할 수 있었다.
정오는 그가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 살아왔는지 직접 지켜봐온 이였다.
누가 봐도 최고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던 그가 모델 일도 포기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직업이니만큼 이슈가 되었을 때 독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랑에 있어서도 늘 한 발 물러섰다.
그런 그가, 공개적으로 ‘결혼’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정오는 입가에 흐르는 술을 닦아내며 승현을 향해 넋이 나간 듯 질문을 던졌다.
“드디어 온 거냐? 네 인생에 딱 한 번 있을 거라던…… 그 목숨 건 연애?”
언젠가 승현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동안 제대로 해보지 못했던 연애, 언젠가 한번 몰아서 목숨 걸고 해볼 거라고.
그것도 세상이 떠들썩하게.
드디어 그 ‘때’가 온 것이다.
인생에, 딱 한 번 있을 거라던 그 사랑.
정오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줄곧 사랑과 연애에 있어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쳐왔던 승현을 이토록 바꿔 버린 당사자는 도대체 어떤 여자일까.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머릿속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물음표로 인해 포화 상태가 되었다.
이 많은 질문들을 하기엔 무리수라는 것을 안다.
일일이 대답해줄 승현도 아니었고, 세심하게 질문을 던질 만큼 정오가 인내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오는 자신의 모든 궁금증을 단 한 단어에 응축해 질문을 던졌더랬다.
“그 여자, 예쁘냐?”
***
한편, 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지수현을 내쳤음에도 여유롭게 웃고 즐기는 승현의 모습을 다른 이들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바로 지수현을 마음에 두고 있던 강석훈이었다.
“저 새끼, 뭐하는 새끼야?”
“글쎄. 정오 친구라는데? 별명이 머핀이래. 뭐, 예전에 모델을 했었는데 그만뒀대. 이 바닥에선 엄청 유명한 애라던데?”
웃긴 별명과는 달리, 바에 팔을 걸치고 비스듬히 앉아 있는 기럭지가 보통 아우라가 아니다.
도대체 뭐하는 놈이길래 그가 한 달 동안 작업해도 콧방귀도 뀌지 않던 지수현을 저리도 쉽게 내칠 수 있단 말인가.
석훈은 웃고 있는 승현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누가 봐도 매력적인 그 웃음이 묘하게 석훈의 심보를 뒤틀었다.
처음엔 지수현 때문인 줄 알았다. 하지만 승현에게 거절당한 지수현은 더 이상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뭐든지 최고여야만 하는 그에게 ‘누군가에게 거절당한 지수현’은 더 이상 최고가 될 수 없었으므로.
석훈이 잠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었다.
모든 이의 시선이 갑자기 나타난 승현에게 향해 있다는 사실을.
늘 주목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석훈에게 승현에게 몰린 시선은, 명백한 ‘자존심’ 문제였다.
“머핀이라…….”
석훈은 자신의 턱 선을 매만지며 다시 한 번 그 별명을 곱씹었다.
그것도 아주 불쾌하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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