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하찮은 조연이 아닌 위험한 주연.
2018.02.11.
빛나는 조용한 음악 소리를 들으며 간만에 스트레칭을 했다.
그러자 이제 좀 살 만하다.
속을 쓰리게 하던 숙취도 사라지고 위승현으로 가득했던 뇌세포도 점차 제자리를 찾아갔다.
머릿속이 고요해졌다.
두근대던 심장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스트레칭으로 어느 정도 몸 풀기가 끝나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두 손을 모으고 호흡법에 집중했다.
눈을 감자 마음이 평온해지는 걸 느꼈다.
역시 그녀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심신이 피로할 땐 이렇게 요가와 명상을 겸해주는 방법이 최고였다.
“후…….”
들이 마신 숨을 깊게 내쉬며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다.
그렇게 눈앞에 있는 전신거울의 자신과 마주한 순간, 빛나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이건, 꿈이야!’
다시 눈을 감았다.
아직 명상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헛것이 다 보이니 말이다.
릴렉스! 긴장을 풀자!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조금 전과 달리 평정을 잃은 그녀의 호흡이 굉장히 거칠어졌다.
봐도 못 본 척! 있어도 없는 척!
태연함을 가장하려 했으나, 섬뜩하리만치 달콤하게 와 닿는 속삭임에 결국 그녀는 자신이 본 것을 인정해야 했다.
“유빛나, 너 나 본 거 알아. 모른 척하지 말고 당장 일어나라.”
“으아아악!”
결국 그녀는 자신이 본 존재의 인정을 작은 비명 소리로 대신했다.
그리고 간신히 찾았던 평온도 산산조각이 났다.
너무 놀란 그녀가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나 승현을 마주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이런 일이? 참, 기가 막혀서. 나는 세상에 이런 일이, 하고 놀라던 참이다!”
심기가 몹시 불편한 듯, 그가 유독 붉은 입술을 뒤틀며 이야기했다.
그 모습을 보며 빛나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검은 트레이닝팬츠에 검은 헬스 티셔츠를 입고 있는 그는 오늘따라 유독 그 존재감이 확실했다.
핏이 딱 떨어지는 티셔츠가 굳이 벗지 않아도 잘 빠진 그의 상체 실루엣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벗지 않은 남자가 이렇게 섹시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숙취 때문에 바닥을 뽁뽁 기어 다닐 줄 알았더니, 여기서 벌거벗고 이러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나.”
그리고 벗지 않아도 섹시한 남자가 벗었을 땐, 더 섹시하다는 걸 몸소 체험했다.
승현이 그녀 앞에서 자신의 셔츠를 벗기 시작했다.
눈앞이 아찔해 그녀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감았다 뜨면, 신기루처럼 없어지길 바라며.
하지만 더욱더 또렷해지는 그의 모습은 가뜩이나 위승현으로 가득 찬 그녀의 뇌세포를 최대치로 활성화시켰다.
뇌세포가 극대화되자 가까스로 진정시켰던 그녀의 심장이 또 다시 날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흔들리는 동공을 마주한 승현은 소리 없이 웃으며 입술을 틀어 올렸다.
놀랐겠지. 놀랐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놀라야 옳았다.
그래서 승현은 그녀가 충분히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다가가 벗은 자신의 셔츠를 그녀에게 입혀 주었다.
아침부터 그가 건넨 인사엔 그토록 차가운 반응으로 보이더니, 여기 와서 애먼 놈들 심장에 불이나 싸지르고!
감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승현은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낮고 위험스러운 목소리로 협상을 시도했다.
“여기 두 가지 옵션이 있어. 자, 네가 선택해.”
“…… .”
“이걸 입고 하든가…… 나 미치는 꼴 보든가.”
낮게 가라앉은 섹시한 목소리에 심장 끝이 쫄깃해졌다.
그리고 그의 벗은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건, 생각 이상으로 그녀에게 위험했다.
아, 제발.
이 순간이 꿈이었으면 좋겠다.
게다가 다른 사람의 옷도 아니고 승현의 옷을 입고 있는 이 상황은 사춘기 때도 겪어보지 못했던 묘한 반항심을 불러일으켰다.
“미안하지만 네 참견 따윈 필요 없거든? 그리고 여긴 다 그렇게들 입고 한다고. 이딴 거, 필요 없단 말이야.”
빛나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 거리며 그가 입혀준 티셔츠를 벗기 위해 그 끝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승현은 무척이나 다크한 아우라를 온몸으로 내뿜으며 팔짱을 낀 채 한마디 했다.
“벗기만 해. 나 돌면 무슨 짓 할지 모른다.”
“그거 협박이니?”
“맘대로 생각해.”
“도대체 왜 이러는데?”
“몰라 물어? 난 죽었다 깨어나도 내 여자가 다른 사람들 눈요깃거리가 되는 건 못 봐. 몰랐다고 해. 저기 유리창에 다닥다닥 붙어 힐끔거리는 늑대들 죄다 장님으로 만들어버릴 테니까.”
그 순간 셔츠 끝을 움켜쥐었던 그녀의 손이 움찔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승현이 입만 산 양아치가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 입고 하면 덥다고! 움직이는 데도 불편하고!”
하지만 승현은 대답 대신 짙은 눈썹을 꿈틀 거렸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기세다.
결국 빛나는 궁지로 몰렸다.
왜 이 순간, 승현에게 지고 있단 느낌이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이 그러했다.
정말 승현이 준 옵션대로 그가 준 옷을 입고 하든가, 그가 미치는 꼴을 보든가, 둘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쯤이면 인정해야 했다.
승현은 그녀를 훔쳐보았던 저 한 무리의 늑대들과는 확실히 격이 달랐다.
소심하게 주변을 맴도는 그들과는 달리, 이 우월한 늑대는 정확한 공격점을 알고 들어오는 타고난 사냥꾼이었다.
그런데 그때 주변에서 속닥이는 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어머나, 남자친구인가 보다.”
“어쩜 인물이 저리 훤칠하노. 세상에, 저 몸 좀 봐라.”
“꺄악- 쟤 완전 내 스탈!”
빛나가 시선을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을 땐, 갑자기 쳐들어온 승현의 비주얼에 넋을 놓은 여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빛나는 저 바깥의 남자들이 어떤 모습을 그녀를 지켜봤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도 이 여자들과 다를 바 없었으리라.
그녀는 이를 악 물며 주먹을 꼭 틀어쥐었다. 그러곤 승현을 올려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 이거 주면, 넌 뭘 입고 할 건데?”
그녀의 물음에 승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나? 벗고 하지, 뭐.”
그러자 주변에서 열에 들뜬 작은 한숨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아찔하게 만드는 신체 조건과는 별개로 웃고 있는 그의 눈동자와 흩어진 베이비펌은 단연 빛나의 보호본능만 자극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하긴, 그를 밀어내려는 그녀의 심장도 이렇게 미친 듯이 춤을 추며 반응하는데 하물며 그들은 오죽할까.
그런 그녀의 속도 모르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검게 일렁이던 그의 아몬드형 눈매에 웃음기가 떠날 줄 몰랐다.
그 매력 터지는 얼굴과 섹시한 몸이 어우러져 여기 있는 여자들의 심장에 불을 지피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결국 빛나는 그의 경고를 무시한 채 그 티셔츠를 벗어 승현에게 던져버렸다.
“나 이거 안 해! 그러니까 당장 입어!”
그러곤 화가 난 걸음걸이로 요가룸을 나서며 잇새로 중얼거렸다.
“그 꼴은…… 내가 못 보겠으니까.”
***
“왜 자꾸 그렇게 웃는 건데!”
운동도 못 하고 헬스장을 나온 빛나는 조금 전부터 그녀의 곁을 걸으며 자꾸 기분 나쁘게 웃어대는 승현 때문에 결국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자 그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을 토해냈다.
“예뻐서.”
하지만 빛나는 알고 있다. 전혀 그런 의도의 웃음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 보이는 저 미소엔 묘한 자신감이 엿보였다.
결코 그녀가 예뻐서 보이는 웃음이 아니라 승리감에 도취된 웃음이었단 말이다!
그 사실이 그녀를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그가 벗고 운동을 하든, 요가를 하든, 결코 그녀가 신경 쓸 일이 아님에도 그 순간 그를 바라보는 여자들의 음흉한 시선이 싫어 오지랖을 부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러한 그녀의 행동이 승현에게 잘잘한 승리감을 선사한 것이 분명하다.
‘벌거벗고 스트립쇼를 한다 해도 내버려뒀어야 하는 건데!’
뒤늦은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지만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었다.
“웃지 마. 네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내 생각해서 그런 거야. 너랑 나, 아는 사이인 건 이미 들통 났고. 거긴 상의 탈의 금지거든! 어디서 감히 벗고 운동한다는 이야기가 나와? 미쳤어? 내 체면도 있는데? 동네에 어떻게 얼굴 들고 다니라고!”
“누가 뭐래?”
“아, 그냥 알아두라고! 너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내 체면을 위해서 그랬다는 거!”
“알았어.”
구구절절한 변명에도 승현의 무심한 단답형이 그녀의 혈압을 올려놓았다.
여전히 저 미심쩍고 신경에 거슬리는 묘한 웃음과 함께.
머리채를 잡고 싸운 것도 아닌데, 죽기 살기로 입 아프게 말다툼을 한 것도 아닌데, 그렇지 않아도 치켜 올라간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기분 좋게 웃는 그의 미소는 그녀에게 ‘졌다’는 패배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가 죽었다 깨어나도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는 거.
“야-아! 너 진짜 이기적이야! 넌 너밖에 모른다고! 그냥 못 본 척하고 지나갈 수도 있는 걸 꼭 굳이 거기서 그래야 했어?”
“응, 나는 꼭 그래야 했어. 이젠 내 여자라는 거 알았으니 영원한 비너스네 어쩌네 하며 대놓고 너 곁눈질 하는 새끼들 없을 거야. 맘 놓고 운동해. 대신 상의는 뭐라도 좀 걸치고.”
“야-악!”
반감에 소리는 내질렀지만, 정말 맙소사란 감탄사가 절로 나온 순간이었다.
그랬다. 직장에 이어 이젠 동네에서까지 그들은 공개 연애를 하게 된 셈이다.
정말 제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처럼, 승현은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그녀의 인생에 파고들었다.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지랄 맞은 성격에 얼마 가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일방적인 연애도 꽤 오래 버티고 있고.
어떻게 끝을 내야 할까.
그 답을 알 수가 없었다.
“너, 네 형제들하고 뭔가를 공유해본 적이 없지? 어렸을 때도 욕심 많게 네 장난감 절대 안 빼앗겼지? 이기적이야.”
빛나는 심통 맞은 얼굴로 중얼거리듯 이야기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진지하지 못하게 대응했던 승현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발하는가 싶더니 신중하게 입을 연다.
“음…… 글쎄. 그러고 보니 형들하고 장난감 가지고 싸워본 적이 없는 것 같아. 큰형은 늘 내게 양보했고, 둘째 형은 내가 가지고 노는 거엔 관심이 없었어. 서로 관심사가 달랐거든. 그리고 여동생은…… 주로 나를 가지고 놀았지.”
“뭐야, 형제들이 그렇게 많아?”
놀란 빛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사실, 외동아들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독보적인 성격에 지랄 맞은 소유욕까지 자랑하는 그가 아닌가.
그런 승현에게 하나도 아니고, 위로 형이 둘에 아래로 여동생이 하나라니!
“북적북적 컸겠네?”
“요란했지. 한번은 여동생한테 계단 빨리 내려오는 법을 알려주다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꺼진 적도 있었어. 아부지가 경찰에 신고한다고 협박까지 했었지.”
그 말에 왜 자꾸 위승현의 어렸을 적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지 모르겠다.
지금이랑 많이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장난스러운 아몬드형 눈매에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그리고 살짝 끝이 올라간 붉은 입술까지.
누가 봐도 사고 좀 치고 다니는 작은 악동이었으리라.
그 모습을 상상하는 그녀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떠올랐다.
잔잔한 그 미소에 승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도…… 그렇게 컸어. 너도 알다시피, 난 밑으로 동생들이 좀 많았잖아.”
승현을 몰아세우기 위해 꺼낸 말인데, 오히려 형제들이 많았단 말에 동질감을 느꼈는지 빛나는 처음으로 그와 함께 있는 이 시간이 편안해졌다.
아니, 누군가에게 아무런 불편함 없이 그녀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어쩌면, 10년 전 그 난리통을 겪은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때는 쓰리고 아팠지만 그 덕에 지금 두 사람이 잠시나마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일지도.
왜냐고?
그는 그녀가 최악일 때 나타나는 불운의 상징인 만큼, 더 이상 숨길 게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녀가 고아라는 사실까지도.
“너 우리 형들이랑 여동생 보면 되게 좋아할 거야. 물론 처음엔 좀 적응하기 힘든 인간들이지만, 그래도 내 사람이다 싶으면 앞뒤 안 가리고 간 쓸개 다 빼주는 스타일이거든.”
그 말에 빛나가 웃었다.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는 듯.
그래, 위승현 형제들인데 오죽할까.
위씨 성을 가졌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평범함은 거부, 어디를 가나 독보적일 것이다.
승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너 우리 여동생이랑 완전 잘 맞을 것 같아.”
“그래? 여동생은 어떤데?”
“어떻긴. 그냥 어디로 튈지 몰라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시한폭탄이지. 그래도 예뻐. 외모보다는 마음이. 너처럼…….”
순간 빛나는 느릿하게 내딛던 발걸음을 뚝 멈추어버렸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더 이상 다른 한쪽 발을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서 떼어낼 수가 없었다.
위승현, 도대체 너……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니.
“아참, 나 편의점에서 뭐 살 거 있어. 2분만 기다려. 금방 나올게.”
때마침 승현은 그녀가 멈춰버린 장소 바로 옆에 있는 편의점에 볼 일이 있는지 그녀를 세워두고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그가 사라졌음에도 땅에 뿌리 박혀 버린 빛나의 두 다리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서 있었을까.
핸드폰 벨이 울렸다.
덕분에 빛나는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여보세요.”
[언니! 어디야?]
복실이었다. 목소리가 톡톡 튀는 것을 보니 적어도 복실은 숙취 따윈 앓고 있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숙취 따위가 복실을 굴복시키지 못한 것일지도.
“집 앞이야. 지금 들어가는 길.”
[응. 그렇구나. 속은 괜찮고?]
“나야, 뭐. 너는?”
[나는 괜찮아. 그러니까 선도 봤지.]
“뭐야, 선봤어?”
[응. 우리 아빠 성화에 못 이겨서 어쩔 수 없이. 짜증나 죽는 줄 알았어. 술도 못 깨고 아침에 끌려갔잖아.]
“아버지 마음도 충분히 이해돼. 우리, 결혼할 나이잖아. 지금.”
[알아, 아는데. 내 맘이 딴 데 가 있는 게 문제지.]
그렇게 말하는 복실의 목소리를 들으며 빛나는 절로 편의점 안에 있는 승현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이제 막 계산대에 있는 승현에게서 시선을 떼려는 순간, 복실의 다음 목소리가 또 한 번 그녀의 시간을 멈춰버렸다.
[그래서 말인데, 언니. 이젠, 나…… 고백하려고…….]
***
계산을 마친 승현이 편의점을 나왔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자리에 서 있던 빛나는 어느새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어라? 도대체 어딜 간 거야?”
2분만 기다려 달랬더니 그것도 못 참고 갔나.
유빛나답다.
이쯤 되니, 그도 멀쩡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혼자 하는 연애라지만 그렇다고 상처를 안 받는 거 아니니까.
“에이, 진짜. 속 아플까 봐 약 싸왔더니.”
그의 손엔 숙취를 달랠 수 있는 약이 들려 있었다.
***
뒷날 빛나는 퇴근길에 차가 고장 나 수리에 맡겼다는 이정을 픽업해 집으로 향했다.
“아, 놔. 진짜 똥차가 따로 없어. 뽑은 지 얼마 안됐는데 왜 벌써 고장이야?”
“네가 워낙 취재다 뭐다, 장거리를 많이 뛰어서 그렇지. 그나저나, 너 혹시 김병훈 검사에 대해 아는 거 있니?”
빛나는 이정의 투덜거림을 기분 좋게 디스하며 화제를 돌렸다.
“김병훈 검사?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이정이 입술을 고집스럽게 깨물며 기억을 더듬자 빛나가 조금 더 쉽게 만들어주었다.
“KMK컴퍼니 담당 검사였잖아.”
“아, 맞다. 그랬지. 근데 그 검사는 왜? 어머, 너 설마! 진짜 그거 손대려고?”
“얼마나 바쁜지 찾아가도 안 만나주고 전화해도 초지일관 무시네. 너 검찰에 연줄 없냐?”
“야, 검찰에서 사회부 기자는 공공의 적이야. 게다가 나, 검찰청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는 거 몰라? 출입도 안 된다고. 그러는 너야말로 거기 연줄 없어?”
“음, 한 사람 있긴 한데. 진짜 부탁하기 싫은 사람이라.”
“누군데?”
“조현성.”
“허걱! 앓느니 죽지.”
“내 말이. 아, 진짜 꼭 만나봐야 하는데. 나 검찰 자료가 필요하거든. 그쪽에서 나한테 건넨 자료만으론 정보가 턱없이 부족해.”
“퍽이나 그렇게 해주겠다. 자기 손에서 끝난 일을 네가 들쑤시고 다니면 좋아하겠어? 죽었다 깨어나도 안 만나줄걸? 게다가 김병훈이 칼 같은 사람이야, 적어도 일에 있어선. 그러니까 그때 이름 언급된 놈들은 죄다 잡아들인 거 아냐? 뭐, 해쳐먹은 돈에 비해 형량이 너무 가벼운 게 조금 의심쩍긴 하지만.”
“아, 이럴 땐 내 짧은 인맥이 정말 한스럽다.”
빛나가 작은 한숨을 내쉴 때였다.
어제 승현이 들렀던 집 근처 편의점에서 그가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꿈인 줄 알았지만 분명 그였다. 그것도 복실과 함께.
순간 빛나는 어젯밤 들었던 복실의 작은 목소리를 떠올렸다.
-나…… 고백하려고.
갑자기 목이 콱 막히는 걸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재빨리 시선을 돌려 앞을 응시했지만 운전대를 잡은 손아귀엔 뼈마디가 하얗게 보일 만큼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이정아,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뭐?”
“있지. 네가 평소엔 별로 관심도 없는 백이었는데 어느 날 누군가 그걸 들고 나타났어. 그런데 갑자기 그 백이 탐이 나고 그랬던 적 없니?”
그녀가 여전히 앞을 응시한 채 문자 이정은 가볍게 대답한다.
“야. 원래, 남의 것이 더 탐이 나는 법이야. 갖기 싫다가도 남이 가졌다 싶으면 그게 나한테 더 잘 어울릴 것 같거든. 근데 그건 일시적인 감정이야. 자신의 감정을 속이는 거지.”
“자신의 감정을 속인다고?”
“응. 남으로 인해 경쟁 심리가 발동할 순 있지만, 그렇게 발동한 ‘갖고 싶다’는 욕망은 진짜가 아니거든.”
이정은 아주 간단한 논리를 펼쳐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의 감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
다시금 복실의 떨리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 고백하려고.
이 모든 감정이 그저 혼란스러웠다.
빛나는 사이드 미러에 보이는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마지막으로 신호가 바뀌자 엑셀을 있는 힘껏 밟았다.
덕분에 복실이 승현을 향해 니킥을 날리는 장면은 보지 못했다.
“아악! 운전 똑바로 못 해? 왜 또 그렇게 열 받아 있는데? 박은지인가 뭔가, 걔가 핸드백 샀어? 그것도 평소 네가 긴가 민가 했던 걸로? 잊어버려. 그건 정말 네가 갖고 싶은 백이 아니니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이정의 말처럼 일시적인 감정에 불과했으면.
-넌 그대로 있어. 연애는 나 혼자 할 테니.
하지만 이젠 그 혼자 하는 연애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위승현은 그녀의 인생에 하찮은 조연이 아닌,
위험한 주연이 되어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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