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설레게하는 그대-18화 (18/94)

18. 나도 안아줘.

2018.02.04.

세상에나!

다시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아싸! 술! 술! 술이 들어간다!”

복실이 드디어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감동에 실성해 어깨춤을 추며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려 하자 승현이 재빠르게 가로채었다.

“안 돼. 너 한국 땅 밟은 지 48시간도 안 됐다. 개 되는 꼴 못 봐.”

“야, 그러면 널 부른 의미가 없잖아! 넌, 내 보험인데!”

“보험 맞는데. 술 취한 너 수습해주는 보험이 아니라 예방하는 보험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승현은 복실의 잔을 제 입으로 털어 넣어버렸다.

그 잔을 다시 가져온 복실은 그가 다 마셔버린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 탈탈 털며 눈을 흘긴다.

“인정머리 없는 자식, 한 방울도 안 남겼어!”

“저 올 때까지 얘, 술 주지 마세요. 큰일 나요.”

“어디 가는데!”

“화장실! 화장실! 화장실도 따라 올 거야?”

“아니, 자기. 잘 갔다 와.”

복실이 바이 바이를 하며 승현을 보냈다.

그러자 호기심 폭발한 이정이 복실의 앞으로 부담스럽게 얼굴을 내밀며 물었다.

“저 사람, 어떻게 아니? 친한 사이니-이?”

“아, 쟤요? 쟨, 제 소꿉친구예요.”

“소꿉친구?”

두둥!

두 사람의 머리에서 서로 다른 의미의 천둥번개가 뇌를 진동했다.

강복실이 누구였던가!

9년 전, 아무도 못 말리는 독불장군 조현성을 니킥 한 방으로 끝내버린 강복실이 아니던가!

그 위력이라면, 위승현도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빛나의 감정 수위에 빨간 불이 켜지기 전에 돌이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단 말이다!

헌데, 친구라니! 그것도, 소. 꿉. 친. 구!

“아니, 어떻게 저런 훌륭한 친구를 뒀대? 아주 그냥 생김이…… 올바름의 정석이야!”

“저 집안이, 원래 허우대는 좀 멀쩡해요.”

“저게 훌륭한 정도야? 아주 초초초초- 스페셜이지?”

저 멀리 우주로 날아간 빛나의 멘탈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데, 이정은 어느새 복실의 손을 다정하게 잡고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승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적응 안 된다는 복실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모든 걸 용서하게 만든 것이다.

진심으로 이정은 너그러운 자였다.

“언니, 나 화장실. 저 자식 때문에 술 대신 물만 마셨더니 또 신호 와.”

“아휴, 그럼. 얼른 갔다 와. 오는 길에 승현 씨도 좀 데리고 오고. 응? 둘이 친하다면서.”

이정은 자리를 뜨는 복실에게 손 키스를 날리며 적극적인 애정공세를 퍼부었다.

하지만 빛나는 그런 이정의 들뜬 기분에 장단을 맞춰줄 수가 없었다.

속상한 마음에 화장실이 있는 곳으로 사라지는 복실을 보며 술 한 잔을 비워내는데 이정이 뜻밖의 말을 뱉어낸다.

“야, 둘이 진짜 친한가 보다. 저렇게 문자 한 통에 여기까지 날아올 정도면. 안 그러냐?”

“…….”

“근데 나는 참 이상한 생각이 든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아니, 헛소리가 아니라 그냥 갑자기 든 생각이야. 혹시…… 복실이 짝사랑 상대가 승현 씨 아냐?”

순간 야구방망이로 명치를 강타 당한 느낌이었다.

조금 전까진 두 사람이 아는 사이라는데 충격이 커서 미처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 못했지만 기자의 촉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니, 복실이는 20년 동안 짝사랑했다는데 둘이 소꿉친구면 얼추 20년 안 되겠어?”

“설마…… 아니, 우리 복실이가 뭐가 부족해서 위승현이랑!”

“아무리 악감정이라지만 말은 똑바로 하자. 승현 씨가 어떤 족보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비주얼만 보자면 더럽게 잘 어울리는 건 사실이잖아.”

틀린 말 하나 없다.

승현과 복실이 친구 사이인 것도 모자라 귀가 마르고 닳도록 들었던 20년 짝사랑 상대가 바로 그라고?

그야말로 최악이 아닐 수 없었다.

궁지에 몰린 빛나는 입으론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

승현은 화장실에서 핸드폰 메시지를 확인 후 손을 씻었다.

그리고 고개를 드는 순간, 그는 뒤에서 노려보고 있는 그림자에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 했다.

“아! 깜짝이야! 진짜!”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여기 남자 화장실이야!”

“알아.”

복실이 그의 등 뒤에서 팔짱을 껸 채 싸늘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던 탓이다.

저승사자보다 더 무서운 모습이었다.

“너지?”

승현은 다짜고짜 턱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복실의 태도에 눈썹을 치켜세우며 반문했다.

“…… 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되묻는 그에게 복실이 몇 발자국 더 다가왔다.

세면대 때문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던 승현의 허리가 뒤로 휘었지만 복실은 멈추지 않았다.

“냄새가…… 나.”

“에헤- 왜 이래! 너 이럴 때면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알아?”

그가 기겁하며 옆으로 물러나려 했지만 복실이 덥석 그의 손을 붙들어 달아날 수가 없었다.

인상을 찌푸리는 그를 보며 복실은 살짝 뒤틀어진 붉은 입술을 승현의 귓가로 가져왔다.

가뜩이나 얼굴이 하얗고, 가뜩이나 머리가 칠흑처럼 검어 귀신보다 무서운 모습이었다.

“언니 쫓아다닌다는 스토커, 너…… 맞지?”

젠장, 또 무슨 이야기라고.

김이 빠진 승현은 복실을 밀쳐내며 입을 열었다.

“뭐야, 유빛나. 나보고 스토커래?”

“언니 입장에선 스토커고, 넌 연애하는 거고.”

“응?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모를 수가 있나. 눈에서 그렇게 꿀이 뚝뚝 떨어지는데.”

“그…… 정도야, 내가?”

“말이라고? 게다가, 4년 만에 귀국한 내가 그렇게 시간 좀 내라고 해도 바쁘다며 튕기던 네가…… 언니랑 같이 있다는 말에 단 10분 만에 튀어 나왔다. 이걸…… 내가 어떻게 해석해야 하냐?”

“하, 그래. 나 혼자…… 좋아 죽지.”

그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세면대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복실도 팔짱을 풀고 나란히 그와 같은 포즈로 세면대에 몸을 기댔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기회는 9년 전에도 있었는데.”

“그러다 말 줄 알았어. 안 보고 살면, 그냥 스쳐갈 줄 알았다고. 두 눈으로 다시 보기 전까진. 근데 넌 어떻게 알았어?”

“아, 왜 몰라. 네 눈빛만 봐도 뭘 생각하는지 다 아는데. 그때 알았어. 조현성이 빛나 언니 상대로 농담할 때, 네 눈…… 진짜 무서웠거든. 그러더니 어느새 그 옆으로 가서는 조현성한테 그랬잖아. 너 유빛나한테 차였다고. 네가 못 가진 여자는 아무도 못 가진다고. 그러니 건드리지 말라고. 말은 차였다지만 공식적으로는 ‘내 여자니 건드리지 마’였거든.”

“하, 그랬지.”

그때가 생각나는 듯 승현의 입꼬리에 웃음이 묻어났다.

그가 갖지 못한 여자니, 아무도 못 가진다는 그 기가 막힌 이론은 도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온 것일까.

그 말 한마디가 유빛나 대학 생활을 진정한 왕따로 만들 줄 누가 알았겠나.

다시 생각해도 정말 웃긴 순간이었다.

빛나 입장에선 본의 아니게 승현이 죽일 놈이 된 날이었지만 현성으로부터 빛나를 지키기 위해선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이미 승현은 현성의 끈질기고 간사한 본성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멈췄으면 됐는데, 너 기억나지? 날…… 언니 옆에 붙여둔 거.”

“엄연히 우린 딜을 한 거다? 난 목숨을 건 딜이었다고.”

“그래. 우리 딜 했지. 문제는 그 딜에서 내가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는 것 정도?”

“미리 경고했어. 내가 우리 형 감정까지 움직일 순 없는 거니까. 형이 한국으로 들어올 때마다 너한테 연락해서 미리 알려주는 거, 우리 형이 알면 나 진짜 죽어. 그 인간은 나도 소리 소문 없이 뒷산에다 산 채로 묻어버릴 인간이라고. 알지?”

“알았어. 너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면 내가 뒷산에서 찾아줄게.”

“그런 뜻이 아니잖아!”

“뭐, 어쨌든. 내 말의 요지도 그게 아니야. 처음에는 너랑 한 딜 때문에 조현성으로부터 빛나 언니 지키려고 사학과 건물에서 그 먼 법대 건물까지 줄기차게 쫓아다녔는데 나중엔 아니었어.”

“무슨 소리야?”

“유빛나, 내가 사랑했다고.”

“…….”

“진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자더라고.”

“…….”

“나중엔 내가 유빛나 없인 못 살겠더라고…….”

말을 하는 복실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치, 첫사랑을 고백하듯 그렇게.

“뭐야, 내 라이벌이 남자도 아니고 여자야? 이게 말이 돼?”

그 고백에 승현이 복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너무 오래 알고 지내 이젠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감정을 알 수 있는 사이.

남녀를 떠나, 사람 대 사람으로 승현과 복실은 진정한 친구였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도 같을 수밖에.

“그거 아니? 천하의 위승현이…… 제 눈에 찬 여자는 앞뒤 없이 달려들고 보는 네가, 유빛나는 쳐다만 봤어.”

“…….”

“처음 봤다. 인내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네가, 그 눈 가득히 ‘갖고 싶다’는 욕심을 담고 그렇게 쳐다만 보는 건…….”

“내가 지은 죄가 있어서, 나만 보면 발작을 하니까, 마음대로 접근할 수가 없었어.”

“핑계.”

“나 싫다는 여자, 안 보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것도 핑계.”

“…….”

“아직도 모르겠어? 갖고 싶다는 욕심보다 지켜주고 싶다는 사랑이 더 컸던 거야.”

“…….”

“바보야, 그거…… 사랑이라고.”

가슴 한쪽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무릇, 사랑이라 함은 좋아하는 걸 떠나 뭔가 더 애틋하고 뭔가 더 들끓는 감정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니던가.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승희와 우빈의 사랑처럼, 죽기 살기로 떨어트려놓아도 죽기 살기로 더 달라붙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동안 그녀만 보면 뛰는 심장이 화가 나서 뛰는 건지 설레서 뛰는 건지 구분도 안 되었던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니.

4년을 못 보고 살아도 아무렇지 않았던 이 감정이 바로 사랑이라니.

그가 알고 있는 사랑과는 조금 모순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한 번 더 딜 안 할래?”

“딜?”

속삭이듯 은밀하게 입을 여는 복실의 목소리에 승현은 귀가 솔깃해졌다.

하지만 복실의 그 은밀한 제안이 끝났을 때 그는 웃을 수 있었다.

결코 그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복실은 화장실을 나오며 승현의 옆구리를 푹 찌르고 재차 확인했다.

“그럼 우리, 앞으로 한 배 탄 거다?”

“으이구, 이 웬수. 진짜 미워할 수가 없다.”

“당연하지. 이 세상 그 누가 강복실을 미워해?”

복실의 눈웃음에 승현은 오랜만에 마주한 그의 구세주가 기특해 죽겠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 자리엔 서로를 향한 웃음이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 어찌나 따뜻한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어찌나 다정한지, 누군가는 충분히 오해하고도 남는 장면이었다.

***

화장실로 향하던 빛나의 발걸음이 낯익은 목소리로 인해 점차 느려졌다.

그리고 코너를 돌기 전, 그녀는 두 개의 훤칠한 그림자를 보자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녀가 잘 못 본 게 아니라면 승현이 다정하게 복실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마치 예뻐 죽겠다는 듯.

때문에 봐서는 안 될 불륜 장면을 본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복실이 짝사랑 상대가 승현 씨 아냐?

‘말도 안 돼. 진짜…… 위승현이라고?’

이정의 말에 점점 설득력이 실리고 있었다.

천하의 강복실은 누군가 제 머리를 저렇게 쓰다듬게 둘 만큼 너그러운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승현이 저토록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다는 건, 어쩌면 복실에게 ‘친구’ 그 이상의 의미가 있어 가능한 것일지도.

충분히 설득력 있는 그 이론에 빛나는 심장 끝이 쿵 내려앉았다.

앞이 까맣게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자 빛나는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자리로 돌아오자 빛나는 이정의 손에 들린 술을 빼앗아 입안에 털어 넣으며 벌렁이는 심장을 다독였다.

“으악, 그거 내 건데! 야, 아직 시작도 못 해본 사랑에 실연 당한 이 언니가 불쌍하지도 않냐? 뺏어 먹을 게 없어서 내 술을 뺏어 먹어?”

어쩌면 복실의 짝사랑의 상대가 승현일지 모른다는 가설은 빛나뿐 아니라 이정에게도 혼란을 가져온 모양이다.

시작도 못 한 사랑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을 보니.

하지만 빛나는 지금은 거기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이거, 꼬여도 너무 꼬였다.

어디서 풀어야 할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그때 두 사람이 다정하게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며 이정이 속이 쓰린 듯 속삭였다.

“야, 봐라. 얼마나 잘 어울리냐? 지금까지는 복실이 쟤가 행동개시를 안 한 거다. 분명 저 둘, 썸 탄다. 두고 봐라.”

이정의 말을 들으며 빛나는 자리에 앉았다.

그 장면을 본 건 0.1초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그녀의 뇌리에 선명이 각인되었다.

도무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어머, 난 둘이 데이트 하고 온 줄 알았네.”

“이야기 좀 했어요.”

“무슨 이야기?”

“그냥 이런저런. 사실 이 녀석도 4년 만에 본 거라.”

복실이 웃자 눈이 예쁘게 반달로 휘었다.

그러면서 그녀가 은근 슬쩍 술잔에 손을 대자 승현이 귀신처럼 알아차리고 그것을 제지했다.

“오늘은 멀쩡하게 두 발로 나가자, 응?”

“나, 진짜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야. 제발.”

복실이 애틋한 눈빛으로 그에게 사정을 하자 결국 승현은 그 손을 놓아주고 말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다정한지 빛나에겐 절로 술이 당기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술을 한입에 털어 넣으며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너무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후로도 몇 잔의 술이 오갔다.

하지만 빛나에겐 오늘따라 술이 쓰고 독했다,

“어머, 근데 승현 씨랑 복실이는 부모님들끼리 같이 아시는 사이인가 봐요? 어렸을 때부터 친구인 걸 보니.”

“네, 처음부터 알았던 사이는 아니고 저희 때문에 서로 알게 되신 거죠.”

“어머나, 그렇구나…….”

이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테이블 아래 있는 손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툭툭 쳤다.

두 사람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빛나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 대신 술 한 잔을 원샷했다.

“그렇게 오래 만났는데 두 사람은 그냥 친구예요?”

“그럼요, 언니! 친구죠!”

“에이, 그냥 친구가 어딨어? 게다가 복실이가 이렇게 예쁜데…….”

“언니, 저보단 얘 인기가 장난 아니었죠. 이 녀석 때문에 제가 얼마나 피곤했는데요.”

“그러니까, 인기 완전 많았겠어. 여자도 많이 만나 봤나?”

“아휴, 언니 말도 마세요. 얜…….”

말하자면 정말 긴 이야기라는 듯 술잔을 들며 복실이 말하자, 승현이 급하게 가로막았다.

“좀! 적당히 좀 마셔! 아니면 천천히 마시던가!”

“아, 왜! 이 기분 좋은 날 취하라고 마시는 술 아냐? 그래서 너 부른 거고. 왜 그래, 새삼스럽게?”

승현과 복실 사이엔 서로 죽일 듯 살벌한 시선이 오갔으나 지켜보는 두 사람의 눈엔 그저 알콩달콩 사랑싸움 같아 보였다.

그렇게 복실 입으로 들어가는 술잔은 승현이 스톱 시켰으나 빛나 입으로 들어가는 술은 막지 못했다.

기도를 타고 알싸하게 넘어가는 알코올에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다 빛나는 번뜩 스치는 생각에 입으로 들어가던 술잔을 멈칫했다.

‘나…… 지금 뭐 하는 거니?’

잘 어울리는 두 사람, 바라던 바가 아닌가.

위승현이 빛나에게나 원수지 사실상 어디 내놔도 모자라지 않는다는 건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으니까.

게다가 복실에게 승현이 넘어가 준다면 굳이 그녀가 손을 쓰지 않아도 그를 떨쳐 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녀를 향한 승현의 감정을 정리한다는 가정 하에, 복실의 개인적인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서는 아주 완벽한 계획이었단 말이다.

그러나 복실의 짝사랑 상대가 위승현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정말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된다면 그런 그들의 다정한 모습을 평생 지켜봐야 한다는 이야기니까.

생각만 해도 속이 쓰렸다.

복실과의 인연을 끊지 않는 한 원수 같은 위승현을 평생 봐야 한다는 분노에서 비롯된 감정이라 위로하고 싶었지만, 아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속이 뒤틀리고 있었다.

그 타는 속을 달래기 위해 자꾸 술을 들이부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생각보다 참혹했다.

“아아악- 나 아직 덜 마셨는데 왜 끌어내!”

“너 진짜! 그러게 천천히 마시랬잖아! 천천히!”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복실을 승현은 번쩍 안아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바 안으로 돌아가려는 본능을 멈추지 못할 것 같아서다.

“위승현! 나 아직 주량 덜 찼다고! 그러니까 나 말리지 마.”

“웃기지 마. 내가 바보로 보여?”

“이-씨! 이 자식이! 그래도 말대꾸를 꼬박꼬박!”

“아악! 물지 마! 네가 개야? 뱀파이어야? 어딜 물어!”

“개라며! 개! 멍멍! 멍멍! 그래 나 개다! 왜!”

승현은 제 목덜미를 무는 복실을 정말 저 멀리 던져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잘 아는 승현은 절대 복실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다가와 그의 어깨를 툭 찔렀다.

지친 눈동자로 돌아선 그곳엔, 정말 다소곳하게 손을 모은 채 굉장히 미안하고 난감한 얼굴을 한 이정이 서 있었다.

“왜요! 제가 지금은 개복실 때문에 바빠서…….”

승현이 버럭 했다.

복실 때문에 다른 건 제대로 돌아볼 형편이 못 되었던 탓이다.

그러나 이정은 그 말에 조금 전 보다 더 미안한 감정을 담아 조심히 말을 꺼냈다.

“혹시…… 개 한 마리 더 키우실 의향은 없으세요?”

“뭐요?”

처음엔 무슨 소린지 몰랐다.

하지만 이정이 말 대신 조용히 손가락으로 가리킨 그곳으로 시선을 돌린 승현은 정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빛나가…… 네 발로 기고 있었다!

“하…….”

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개복실에 이어 이젠 개빛나까지, 무려 두 마리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해 보였는데 빛나는 도대체 언제 정신 줄을 놓아버린 것일까.

앞이 암담해진 그의 앞으로 빛나가 다가왔다.

물론 비틀거리는 두 다리를 지탱하지 못해 이정의 부축을 받은 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녀가 꼿꼿이 일어서더니 이정을 저 멀리 밀어버리며 제 힘으로 버티기 시작했다.

“유빛나, 너까지…….”

까만 밤하늘 아래 이리저리 흩어진 그녀의 머리칼이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술에 취한 몽환적인 그 눈동자까지 가려주진 못했다.

그녀가 그의 앞에서 서서히 팔을 벌렸다.

그러곤 평소보다 두 배는 느린 목소리로 그를 유혹한다.

“나도…… 안아줘…….”

취기로 인해 발그레한 뺨이 너무 사랑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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