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예상치 못한 변수
2018.01.31.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야,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냐?]
아침부터 핸드폰 저편을 통해 쟁쟁하게 울려오는 이정의 목소리 때문에 빛나의 뇌에서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가뜩이나 요 며칠 사이 불쑥 불쑥 나타나는 승현 때문에 심장이 거덜이 날 판인데, 집요한 사회부 기자 이정의 이 같은 오해는 그녀에게 전혀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풀어야 한다. 후환을 만들지 않으려면.
“아니라니까, 너 내가 남자 쉽게 사귀는 거 봤어?”
[아니.]
“나 연애하면 바로 티 나는 거 알잖아. 그런 티 나던?”
[아니.]
“거 봐. 아니잖아.”
[그럼 오늘 저녁에 나랑 술 마셔. 할 말 있어.]
“나중에.”
[오늘.]
“알았어.”
결국 이정의 고집에 졌다.
빛나는 전화를 끊으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그때 귓전을 울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고 만다.
“연애하면…… 어떻게 티 나는데, 유빛나 씨?”
“흡! 깜짝이야!”
돌아선 그녀의 눈앞에 바로 승현의 얼굴이 있었다.
숨소리가 느껴질 만큼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게다가 아침부터 아이 같은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너무 놀라 펄떡 대는 심장과는 달리, 왜 이리도 머릿속이 맑아지는지.
아무래도 저 샤방한 외모 때문이리라.
뿐만 아니라 원래도 입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가 웃는 인상이니, 그것도 한몫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눈으로 보는 비주얼을 무시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인기척 좀 내고 다녀. 놀랐잖아.”
“냈어. 네가 통화하느라 못 들었을 뿐이지. 엘리베이터 왔다. 타자.”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승현은 반사적으로 빛나의 팔을 잡았다.
하지만 그 손길 한 번에 빛나는 발작을 일으키듯 물러서며 분명한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Don't touch me! 앞으론 내 몸에 손대는 거 금지! 절대 안 돼!”
흥,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고!
빛나가 날이 선 눈동자에 엘리베이터에 반쯤 올라탄 승현의 진한 눈썹 끝이 잠시 떨렸다.
쉽사리 YES라고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그녀가 제대로 치고 들어간 모양이다.
“내가…… 싫다고 하면 여기 안 탈 거야?”
“당연하지. 너랑 밀폐된 공간에 있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니까.”
이번엔 빛나가 팔짱을 끼며 거만한 표정으로 승현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고집스러운 눈동자가 살짝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승현을 바라보는 그녀의 입가에 잘잘한 승리의 미소가 떠올랐다.
천하의 위승현에게 Don't touch me를 외쳤으니 고민이 될 법도 할 것이다.
흥, 어디 해보라지!
빛나는 전투적인 자세로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날을 세웠다.
그러자 결국 승현도 두 손을 번쩍 들며 한 발자국 물러서는 아량을 보인다.
“좋아. 알았어. 네 허락 없인…… 앞으로 절대 네 몸에 손 안 대. 그러니까 빨리 타.”
어라? 이게 아닌데?
살짝 당황한 빛나가 어색하게 팔짱을 풀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렇게 순순히 물러서다니, 위승현답지 않았다.
빛나가 그의 옆에 나란히 서자 승현이 그녀의 뒤로 손을 뻗었다.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에 그녀의 눈매가 다시 한 번 치켜 올라갔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의 손은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디에 있을까.
빛나는 슬쩍 옆 거울을 통해 그의 손 위치를 포착했다.
그녀의 등 뒤에 있는 엘리베이터 손잡이를 붙들고 있었다.
정면에서 보면 마치 그의 한쪽 품에 안긴 듯 보였지만 승현은 약속대로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상황이 그녀를 더욱 숨 막히게 만들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그녀의 모든 감각이 그녀의 등 뒤로 아슬아슬하게 위치한 그의 손을 향해 곤두섰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방향을 조금 틀어 그녀를 품을 수 있는 위치였다.
7층에서 1층까지가 이렇게 멀었던가.
도대체 이 녀석의 팔은 왜 이리도 길고, 이 녀석의 가슴은 왜 이리도 널찍하단 말인가!
타고난 승현의 신체 조건이 자꾸 그녀의 시선을 앗아갔다.
한마디로, 돌. 겠. 다!
땡!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승현이 내려섰다.
“오늘도 좋은 하루.”
개뿔! 좋은 하루 좋아하시네!
널 본 순간부터 나의 좋은 하루는 깡그리 날아갔어!
외쳐주고 싶었지만 대신 침이 꼴깍 넘어갔다.
입구로부터 세어 들어오는 햇살을 등지고 하얀 트레이닝복을 입은 그의 모습이 너무 눈이 부셨기 때문이다.
빛나가 눈을 가늘게 뜨는 모습을 보며 승현은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어차피 대답을 바라고 건넨 인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괜찮다 위로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섭섭한 건 어쩔 수 없다.
게다가 ‘Don't touch me’라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미치겠는데.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승현은 고개를 돌리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 연애하면 티 나는 유빛나. 보고 싶다…….”
한편,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빛나는 무너지는 다리를 지탱하기 위해 엘리베이터 손잡이를 붙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동안 긴장감으로 인해 내쉬지 못했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었다.
“아이고, 하느님, 아버지! 제게 악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정말 하느님 아버지가 있다면,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위승현은 정말 싫은데, 도대체 그만 보면 왜 이렇게 심장 폭격을 당한 사람마냥 온몸의 바이탈이 무너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정에게 그렇게 자신 있게 말했으나, 벌써 연애를 하면 드러나는 1단계 증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머리로는 아니라고 말하는데, 그녀의 몸은 이미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최악의 상황이었다.
***
법원 일을 먼저 보고 오느라 빛나가 사무실로 들어선 시간은 오후 6시가 넘어서였다.
하지만 사무실 자체가 가시방석이다.
어제 잠깐 등장한 승현은 오늘까지도 여운을 남기며 가장 핫한 화제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사무실로 들어서는 그녀의 등 뒤로 동료 변호사의 말이 들려왔다.
“하. 사실 유변 우리 사촌 오빠 소개시켜주려고 벌써 운까지 띄워 놨는데.”
“유변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소개팅을 해?”
빛나는 두 눈을 꼭 감고 주먹을 파르르 떨었다.
9년 전 대학교에서 벌어졌던 일이 또 일어나고 있었다.
위승현 존재 한 방으로 그녀도 모르고 있던 소개팅이 날아가고, 군침을 흘리던 늑대들도 순식간에 순한 양이 되어버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사무실로 들어온 빛나는 기운이 빠진 듯 회전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진짜. 도대체 이 인간을 어떻게 떨어트려놓지?”
말은 홀로 하는 일방통행이라지만 효과는 잘나가는 연예인 스캔들 못지않게 파격적이다.
게다가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날의 키스가 떠올라 온몸의 솜털까지 곤두서는 상황이니, 위승현이 먼저 떨어져 나가길 기다리다 그녀가 먼저 심장마비로 졸도할 판이었다.
뭔가, 기발한 방법이 필요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려왔다.
얼떨결에 전화를 받은 그녀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언니?]
“누구?”
[나야, 나 복실이!]
상대방이 자신의 신분을 밝힌 순간, 빛나는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튕겨 일어났다.
“복실아! 어머, 웬일이니! 너 어디야! 한국이야?”
[응. 언니. 나 한국 왔지!]
“아, 내가 어제 무슨 좋은 꿈을 꿨다니! 네가 한국을 다 오고. 아예 들어온 거야?”
[아직 한국에 아예 들어올지는 결정이 안 됐어. 그래도 우리 언니는 제일 먼저 봐야지, 라고 생각했지. 오늘 시간 돼? 내친김에 오늘 봅시다. 어차피 나야 노는 몸이고, 언니는 바쁜 변호사니 내가 갈게. 어디야! 당장 말해!]
“당연히 오늘 시간 되지! 아참, 저녁에 약속 있는데 같이 보자. 소개시켜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
[어머! 형부야?]
“아니, 여자야.”
[으-엉? 언니, 취향이…… 그쪽이야?]
아하- 어쩌면 좋나, 우리 강복실. 예나 지금이나 귀여운 건 어쩔 수가 없다. 정말.
빛나의 입가에 모처럼 제대로 된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니야. 친구야.”
[하, 다행이다. 완전 식겁했네. 순식간에 언니랑 내 3년이 후딱 지나갔잖아. 설마 하는 생각에.]
“이 언니, 아직 건강하다. 남자…… 완전 좋아해.”
그래. 너무 좋아해 탈이다. 이성은 그대로 곤두서 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만큼.
그런데 그때 빛나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발했다.
그녀만의 수호천사 강복실이 왔다?
이 말은 곧 그녀에게 또 다른 길이 열렸다는 걸 의미한다.
어쩌면 이 미친 짓을 의외로 빨리 끝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단 우리 얼굴부터 보자. 나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
그렇게 말하는 빛나는 무슨 꿍꿍이가 있는 듯 씨익 웃었다.
***
“그래서…… 누가 온다고?”
“아는 동생. 그, 동생.”
“아.”
드디어 이정은 말로만 듣던 ‘그 동생’을 보는 것이다.
사실 이정과 빛나는 대학 봉사활동 때 만나 친구가 되어 그녀의 대학 친구들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동생’에 대해선 귀가 닳도록 들어 잘 알고 있다.
유빛나 대학 생활은 ‘그 동생’을 빼놓고는 논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어, 저기 왔다!”
빛나의 말을 듣고 이정이 시선을 드는 순간, 쾅 소리와 함께 모든 이의 시선이 입구 쪽으로 쏠렸다.
“저거, 저거, 내가 또 저럴 줄 알았어! 아니 쟨,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전혀 없네!”
빛나가 놀라 번개처럼 입구 쪽으로 뛰어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이정도 의자에서 엉덩이를 반쯤 뗀 채였다.
검은 머리가 앞으로 쏠려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누군가 빛나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야, 똑바로 보고 안 다녀?”
“아오, 짜증나. 왜 문이 시꺼먼 색이야? 날도 어두운데 하나도 안 보이게스리!”
여자치곤 꽤나 낮은 음색이었다.
게다가, 거친 말투까지.
그런데.
그녀가 긴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고개를 든 순간, 이정의 눈이 커졌다.
“아니, 남보다 눈도 두 배는 큰 애가 도대체 왜 그렇게 못 보고 다니는 건데?”
“내 말이, 남보다 두 배는 큰 눈으로 위, 아래, 좌, 우. 심지어는 뒤까지 보이는데 희한하게…… 앞만 안 보여.”
예뻤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바 안의 모든 시선을 싹쓸이 할 만큼 예뻤단 말이다.
게다가 빛나까지 덩달아 함께 서 있으니 이게 그림이 아니고 뭐냔 말이다.
빛나가 세련되고 도도한 분위기라면, 그녀는 청순하면서 고급스러운 분위기.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디지 모르게 냉기가 흐르는 모습은 아마도 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칠흑처럼 긴 생머리 때문이리라.
닮은 곳이 하나도 없음에도 오묘하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한번 시선을 두면 절대 뗄 수 없다는 그 전설의 ‘C-Sisters’의 위력을 그대로 맛본 순간이었다.
문제는,
“인사해. 여긴 대학교 때 함께 다니던 동생. 여기는, 말했지? 봉사활동 때 만나던 친구가 있다고? 서이정이라고 해.”
빛나가 유일하게 깨는 순간은 술을 마실 때뿐인데 반해,
“안녕하세요? 저는 강복실이라고 합니다.”
“…….”
“하하하. 별명 아니고…… 본명입니다. 강.복.실.”
그녀는 입만 열면 깬다는 것 정도. 그것도 맨 정신으로.
이정 인생의 최대 강적을 만난 기분이었다.
악수를 하고 앉긴 했으나 아직까지 이정은 얼떨떨한 기분이다.
“언니, 나 손 좀 씻고 올게.”
“그래. 화장실은 저쪽. 천천히 다녀라. 이리 쿵, 저리 쿵 하지 말고.”
“아휴, 괜찮아. 어제 경찰하고 미팅한 걸로 액땜 했어.”
“경찰은 왜?”
“집 담 넘다가.”
“집 담은 왜 넘었는데!”
“아니, 내가 프랑스에서 4년 만에 왔는데 아무도 문을 안 열어주잖아! 열 받아서 담 넘었는데 그렇게 크게 울릴 줄 누가 알았나. 분명, 4년 전에는 그런 걸 설치 안 했었는데 말이지.”
“아버진 뭐라시는데?”
“뭘 뭐라셔. 당장 해지하셨지. 유학 간 개 돌아왔으니 그딴 세큐리티 필요 없다고.”
“해피도 유학 갔었니? 너랑 같이?”
“아니. 해피는 관상용이고. 나 말야, 나. 유학 간 개.”
복실은 너무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개’라 지칭하며 유유히 사라져버렸다.
그녀가 화장실 쪽으로 모습을 감추고 나서야 이정이 속삭이듯 물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쟤, 정체가 뭐니! 사람이니? 아, 몰라! 나 간다! 술은 다음 기회에!”
그러자 빛나가 절박하게 붙들었다.
“이거 안 놔? 나 지금 완전 멘탈 붕괴라고!”
“그러지 말고 자리 지켜줘, 응?”
“제정신이냐? 나 지금 쟤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어. 너 하나로도 충분히 버겁다고! 저거, 완전…… 술 취한 유빛나 아냐?”
“야, 그래도 쟤…… 알고 보면 진짜 괜찮은 애야. 적응하면 저만한 애가 없다고.”
“근데 난 도저히 적응이 안 될 것 같아서 말이야. 생각해봐, 술 취한 유빛나를 24시간 봐야 하는 거잖아? 너 술 취하면…… 네가 얼마나 감당하기 힘든지 아니? 응?”
붙들고 늘어지는 빛나를 뿌리치려는데 그녀가 돌아서는 이정의 뒤통수에 라이트 훅을 날렸다.
“쟤, 강복실이…… 강선호 외동딸이다!”
순간, 가방을 들고 나가려던 이정이 움찔하며 돌아섰다.
그러더니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묻는다.
“내가 알고 있는…… 그 강선호?”
“응.”
“그…… 점잖고 사람 좋다 소문난 강선호?”
“그렇다니까.”
“문화부 장관 강선호?”
빛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정이 의자 위로 소리 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더니 복실이 활기차게 제 자리로 복귀하는 모습을 영혼 없이 바라보았다.
강복실은 생긴 것만 엘리트가 아니었던 것이다.
진짜 제대로 뼛속까지 엘리트 집안이다. 감히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자세히 보니 귀티가 절로 나는 것 같기도 하다.
“아싸. 이게 얼마 만에 마셔보는 술이냐. 근데 여긴, 소주 안 파나?”
물론 입만 안 열면.
“근데 언니 기자라면서요? 우와, 대단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한 잔?”
복실이 애교스럽게 웃자 움푹 보조개가 패였다.
정말 입만 안 열면, 천생 여자로 착각하기 쉬운 사기 캐릭터였다.
그러나 이정은 알고 있다.
맨 정신에 이정도면, 저 술 한 잔이 독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래서 이정은 그 술잔을 빼앗기로 마음을 먹고 손을 뻗었지만 그녀보다 빠른 이가 있었으니, 바로 빛나였다.
“안 돼. 오늘은 절대!”
“에이, 언니. 딱 한 잔만 하자.”
“내가 널 몰라? 너…… 내 과야. 한 번 입에 대면 절대 자제 못 하는.”
빛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은 듯 복실의 술잔을 들고 놔주질 않았다.
하지만 복실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알겠다는 듯 포기하나 싶더니, 천하의 유빛나를 상대로 협상을 시도해온다.
“그럼, 언니. 이렇게 하자. 내가 보험을 들게.”
“보험? 무슨 보험? 요샌, 술 먹고 미친 짓 하면 그거 수습해주는 보험도 있니? 그거 얼마니? 나도 좀 들자.”
“일단 오늘 보고, 언니도 마음에 들면 나중에 들어.”
“그럼 그 보험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술 금지.”
빛나가 술잔을 빼앗아 이정 쪽으로 돌리자 복실은 어딘가로 문자를 보냈다.
“아마, 언니도 마음에 들걸? 10분 내로 확인할 수 있을 거야.”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빛나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위승현의 마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가 그녀에겐 더 큰 이슈였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충격 때문에 급 조용해진 이정을 뒤로하고 빛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애들아…… 나, 문제가 좀 생겼어.”
그제야 영혼을 잃었던 이정의 눈에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천하의 유빛나가 이렇듯 머뭇거리며 고민을 털어놓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나…… 연애해.”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정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울분을 터트렸다.
“거봐라! 내 말이 맞잖아! 나쁜 년, 아침까지만 해도 아니라고 그렇게 우기더니!”
“이정아, 일단 앉아봐. 그런 거 아니니까 내 말 좀 들어보라고!”
“뭐가 아냐! 뭐가! 나 몰래 연애 하는 거 아냐! 응?”
“아니라니까. 사실은 그 연애가…… 내가 하는 연애가 아니라,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하는 연애야.”
“…… 응?”
“…… 뭐라고?”
못 알아듣겠다는 듯 비슷한 반응을 보이던 두 사람은 잠시 후 전혀 다른 결론으로 빛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뭐야, 누가 너 짝사랑하는 거네.”
“아니에요, 언니. 이건, 누가 빛나 언니를 스토킹 하는 거예요. 어떤 새끼야, 이름 대.”
결론은 달랐지만 비장하게 마무리하는 건 같았다.
두 사람, 절친이 될 조짐이 보인다.
“짝사랑하는 거면 저 혼자 하다 지치게 내버려두지, 뭘 그걸 가지고 고민까지 해. 유빛나 좋아 헐떡이는 애들…… 어디 한둘이야?”
“짝사랑 아냐. 연애하는 거라고,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그러니까 스토커 맞네. 이름만 대라니까. 내가 깔끔하게 마무리해줄게. 알지? 그거 내 전문인 거.”
“스토커 아니야. 하지만 이게 네 전문인 건 잘 알아, 강복실.”
그랬다. 복실은 이미 9년 전 조현성이를 떼어낸 적이 있는 그녀만의 수호천사가 아닌가.
분명, 이번에도 복실은 희망이 될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잠깐 귀 좀.”
빛나는 두 사람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을 한 후 조용히 속삭였다.
“복실아, 네가 걔…… 유혹 좀 해줘.”
그녀의 폭탄선언에 잠시 말 없던 복실이 뒤늦은 이해와 함께 박장대소를 한다.
“푸하하하하-.”
아니, 이리 심각한데 왜 웃고 난리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곧 복실은 정색을 하며 속삭였다.
“농담이지, 언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나의 눈이 진지함을 잃지 않자 복실은 드디어 경악에 가까운 외침을 흘려 냈다.
“아이고, 언니! 나 몰라? 나? 강복실이야. 짝사랑만 20년째! 아직도 그 짝사랑 ING 중이라고! 유혹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해! 체질이 아냐! 알러지 난다고!”
또한 이정도 벌떡 일어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니, 왜 나한테 부탁 안 하고?”
이정이 자존심 상한 듯 물어왔지만 빛나가 콧방귀를 뀌며 대답을 했다.
“넌 그 녀석한테 안 넘어가면 다행이지. 넌 절대 안 돼. 꼭, 복실이여야 해. 걜 상대하려면 일단 이 멘탈이 초해비급은 되어야 하거든. 바로 너처럼.”
그랬다. 이번 건은 천하의 강복실 아니면 안 된다.
이 정도 급은 되어야 위승현을 상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걱정 마. 그럴 줄 알고 이 언니가 다 계획을 세웠어. 넌 그대로 따라 오기만 하면 돼. 그러니까 내 계획이 뭐냐면…….”
원대한 계획이 있었다.
누구보다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단 말이다.
그런데,
그 계획에 변수가 생겼다.
“어라? 왜, 여기에 모여 있어?”
순식간에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소름에 빛나는 고개를 서서히 들었다.
“어, 왔다! 내 보험! 아하하하!”
이제 술을 마실 수 있게 된 복실이 좋다 박수를 친다.
하지만 빛나는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작은 감탄사를 내뱉어야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녀의 눈에 승현이 비어 있던 복실의 옆자리로 앉는 모습이 슬로모션처럼 비쳐졌다.
결국 예상치 못한 그 변수는 빛나의 원대한 계획에 엄청난 차질을 낳고 만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아주 엄청난 차질을 말이다.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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