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설레게하는 그대-16화 (16/94)

16. 공개 연애의 정석

2018.01.28.

“그렇게 씩씩대지 마. 나도 많이 생각한 거니까.”

운전대를 잡은 승현의 입에서 의외로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장난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많이 생각한 게 겨우 이거야? 내가 말했지. 우리는 절대 아니라고!”

“그래서 넌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잖아. 그냥 가만히 있으라잖아. 그럼 나 혼자 다 하겠다고.”

그 말에 빛나의 혈압이 위험 수치를 맴돌았다.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연애를 혼자 한단 말인가!

지극히 이성적이고, 지극히 현실적인 빛나의 입장에선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이론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이! 연애란…… 한쪽만 하는 일방통행이 아니야! 서로 쌍방이라고! 근데 어떻게…… 어떻게 연애를 혼자 할 생각을 다 하니? 짝사랑도 아니고?”

“짝사랑은 상대방 모르게 나 혼자 앓는 게 짝사랑이고. 그것도 생각 안 해본 건 아닌데, 내 스타일이 아니라. 그냥, 나 혼자 연애하기로 했어. 됐지?”

“헐…….”

진짜 헐, 이다.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빛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 와중에도 얼굴에 묻어나는 ‘잘생김’ 때문에 빛나는 그의 얼굴을 5초 이상 바라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렸다.

“넌 어제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지?”

“알지. 나한테 키스했잖아.”

“그거 말고.”

“나 때문에 조현성이 자존심, 그 자리에서 넝마 만들었잖아.”

“아니, 아니. 조현성 따위가 문제가 아냐. 그게 말이지…… 아니다.”

말을 하다 말고 승현은 입을 닫았다.

빛나가 모르는 게 차라리 나을 듯싶어서다.

게다가 그 앞에 처한 현실은 직접 위승주란 캐릭터를 눈으로 보지 않는 한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한동안 승주의 눈을 피해 다녀야 했다.

어제 본의 아니게 차 키를 들고 튀어버린 그의 죗값이다.

그래서 오늘 우빈에게는 차 키를 던져주는 것으로 끝을 냈지만 승주의 차는 직접 픽업을 해 집 앞에 고이 모셔다 놓았다.

물론 승주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차키를 거실 테이블에 고이 올려놓는 것도 포함해서.

하루 종일 위승주 차 제 자리로 돌려놓는 일을 007 작전 못지않게 하다 보니, 정신이 피폐해져 있었다.

하지만 역시 유빛나, 그만한 가치가 있지 싶다.

이러다 승주 손에 잡혀 그의 애마를 나사 한 조각까지 분해 당한다 하더라도 억울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한 번 마음을 정하고 보니, 파르르 떠는 빛나의 모습조차도 그만큼 예뻤다.

정말 확실하다.

그동안 줄곧 팔딱대던 심장은 열 받음이 아닌 설렘의 신호였던 것이다.

그렇게 방황하던 마음을 확실히 다잡자 기분이 좋아진 승현은 앞으로의 계획을 덤덤하게 밝혔다.

“나, 공개 연애 할 거야.”

물론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뇌는 대 지진을 일으켰지만 말이다.

두개골 안에서 뇌가 흔들리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질 만큼 눈앞이 아찔해지고 있었다.

혼자 하는 연애도 모자라, 이젠 공개 연애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공개 연…… 애-에?”

너무 놀란 나머지 끝을 올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잠시 어긋났다,

갈수록 첩첩산중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승현은 여전히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뭘 그렇게 놀라? 그냥 내 거 침 바르는 건데. 그럼 연애하면서 내가 몰래 숨어 콩닥거릴 줄 알았어?”

늘 한 톤 업이 된 그를 보아 왔기 때문에 낯설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차분한 분위기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알아. 처음 시작이 좋지 않았다는 거. 하지만 너…… 나 싫어하는 거 아니잖아.”

“뭐?”

“조현성…… 걘, 두말할 필요도 없이 네가 싫어하는 사람이 맞는데, 난 아니라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유빛나 성질머리에 싫은 사람한테는 열도 안 낸다는 거 잘 알아. 네 기준에선 그렇게 화를 내서 감정 소모를 한다는 것 자체가 용납이 안 된다는 것도.”

“뭐라고?”

“나만 보면 파르르 떠는데 반해, 현성이 앞에선 잘 참던데? 아니, 참는 게 아니라 상대를 안 하는 거지. 그렇지?”

“그거야, 걘 그럴 가치가…….”

아차, 말렸다!

빛나는 합, 하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결국 그녀 입으로 승현은 그만한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는 꼴이 되고 말았으니까.

아, 머리 우라질 나게 좋은 녀석.

차라리 말을 말자.

혼자 연애를 하든, 짝사랑을 하든, 그의 말대로 그녀는 그냥 그 자리에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서 있으면 그만이니까.

천하의 위승현 성질머리에 오래 갈 리 없다.

기껏해야 일주일이면 떨어져 나가리라.

“다 왔어.”

승현이 내리자 빛나도 내려서려 했으나 차 문이 잠겨버렸다.

뭐지? 하는 사이 그가 돌아와 우산을 쓰고 차 문을 열어준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우산 아래 선 승현의 모습은 오늘따라 더욱 훤칠했다.

이렇게 원수처럼 만나지 않았다면, 한 번쯤 탐이 날 만큼.

“앞으로 차 문은 내가 열어 준댔잖아.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너 혼자 하는 연애라며! 그러니까 네가 짜놓은 틀에 날 끼워 넣으려 하지 마! 하려면 정말 철저히 혼자 하라고!”

“걱정 마. 안 그래도 난 뭐든지 혼자서 잘해. 뭐, 그중에서 연애를 혼자 하는 건 처음이긴 한데…… 어떻게든 되겠지.”

화가 나야 했다. 그녀의 감정이야 어찌 되었건, 자신의 뜻을 밀고 나가는 그의 이기심에 분노해야 옳았다.

그런데,

“사실 나…… 연애도 기똥차게 잘하거든.”

뻔뻔하게 씨익 웃는 그의 모습에 그녀의 심장 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이 모든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빛나는 애써 승현으로부터 고개를 돌려야 했다.

그리곤 제 차로 들어와 출발도 하지 않은 채 문부터 잠갔다.

다시는 그에게 휘말리지 않으려는 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쿵쾅거리는 이 시끄러운 소리는 도대체 그 출처가 어디란 말인가.

빛나는 설마, 하는 생각에 제 심장이 조심히 손을 가져가 보았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 쿵쾅거리는 소리가 너무 커 심장이 뇌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만큼.

“아, 정말 유빛나…… 미쳤어, 미쳤어. 이건 설레는 게 아니야. 절대 설레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극구 부정하며 아직도 우산을 든 채 서 있는 승현을 등 뒤로 한 채 주차장을 빠져 나와 버렸다.

물론 그 후로도 집에 오는 동안, 때론 그녀의 바로 뒤에, 때론 바로 그녀의 옆 차선에 함께 나란히 하는 그의 차를 보며 얼마나 많은 생각이 그녀를 괴롭히던지.

“저러다 말겠지. 암, 저 성질머리에 정말 저러다 말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달랬다.

저 지랄 맞은 성질머리에 그녀가 꾸준히 무시하면 절대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그러나 그것은 승현이 미치는 영향력을 철저히 무시한 오만이었다.

뒷날 아침, 회사에 출근을 했는데 그녀를 힐끔거리는 시선을 느꼈더랬다.

“변호사님. 오늘은 일찍 출근하셨네요.”

인사를 건네는 직원들에게 눈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빛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결국 그녀가 돌아서자 눈으로 대화를 주고받던 직원들이 화들짝 놀라 시선을 피했다.

빛나는 굳이 그런 그들 틈으로 걸어 들어가 자신의 눈을 과하게 피하는 한 남자 직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봐. 뭐야?”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남자 직원은 헛기침과 함께 조심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흠, 헛! 저기…… 변호사님, 혹시 연애…… 하세요?”

“뭐?”

“어제 퇴근길에 요 앞에 남자 친구가 데리러 온 것 같던데.”

그가 선방을 날리자 그제야 주변의 여직원들이 줄줄이 모여 들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맞아요! 어제 저도 봤어요! 남자친구 분 인물이 아주 그냥…….”

“어머! 어머! 아니야! 남자친구 아니라고!”

빛나가 소리쳤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어제 잠깐 등장했던 승현은 어느새 그녀의 남자친구로 둔갑해 있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거의 토네이도급이다.

-넌 그대로 있어, 연애는 나 혼자 할 테니.

그가 어이없는 일방통행 연애를 선언한 지, 불과 채 하루도 안 지나 일어난 일이었다.

***

[야, 내가 알아봤는데 네 말이 맞더라. KMK컴퍼니, 계속 유지할 건가 봐.]

“맞지? 그렇지?”

빛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전화통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담 M은?”

[아, 그것도 알아봤는데 그 사람…… 완전 신비주의더만?]

“그래서 정보가 하나도 없어?”

[아니, 이 언니가 누구냐. 어느 정도는 파봤지. 알고 봤더니 대단한 사람이더라고.]

“얼마나?”

빛나는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이유인 즉, 마담 M의 존재가 크면 클수록 그녀에겐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국제 마케팅 공모전이란 공모전은 다 쓸고 다녔더라고. 근데 문제는, 어마 어마한 상금과는 별도로 주최 측의 입사 제안을 모조리 고사했다는 거? 들리는 말로는 프랑스 사람이라던데.]

“프랑스?”

[응, 프랑스 여자래. 여기저기서 마담 M을 잡으려고 애썼는데 이번에 KMK컴퍼니 본사인 KM 측하고 계약을 했다는 소문이 퍼졌어.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KM 측에서 아시아 지점인 KMK컴퍼니를 살리기로 결정했다는 거 아니겠니?]

“다른 건?”

[뭐, 나이가 많다는 이야기도 있고…… 의외로 젊은 여자일 거라는 이야기도 있고. 공모전 주최 측에서 절대 신상 공개를 안 하니까 그냥 소문만 돌고 있는 걸 수도 있고.]

빛나는 가방을 챙겨들며 이정의 말에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웅성이는 소리 같기도 하고, 누군가 소리치며 싸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어쨌든, 전반적인 마케팅뿐 아니라 광고계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다던데. 그동안 조용했던 이유는 아직까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일 뿐…… 알만 한 사람은 다 안대.]

그 말을 들으며 그녀가 사무실에서 이제 막 나왔을 때였다.

모든 이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몰렸다.

그러자 빛나는 선정에게 입모양으로 왜? 라고 물었다.

[이거, 대박이지 않니? 이쪽 시장에 한 번 더 기회가 생긴 거잖아. 물론 그 프랑스 여자 손에 모든 게 달려 있긴 하지만.]

이정의 말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선정이 빛나를 손가락질하자 누군가 다가와 그녀 앞에 서는 것을 느꼈다.

흠칫 놀라 올려다보자 가죽 점퍼차림으로 헬멧까지 벗지 않고 다가온 퀵서비스 남자였다.

“유빛나 변호사님, 맞으십니까?”

남자가 씩씩하게 묻자 빛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감히 예상도 하지 못한 채였다.

그러나, 그 퀵서비스 남자가 그녀에게 꽃다발을 건네는 순간 끙, 하는 신음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유빛나 변호사님께 직접 전해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조금 전 싸우는 소리로 착각했던 그 목소리는 이 남자가 꽃을 직접 그녀에게 전해주기 위해 애타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였던 것이다.

“어머, 부러워라. 유 변호사님 남자친구가 보냈나 보다!”

“꺄아-악! 로맨티스트! 나는 언제 저런 꽃 한번 받아보나…….”

[세상에! 너 남자친구 생겼냐? 야! 너 나도 모르는 사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여섯 달째 싱글로 있는 나는 불쌍하지도 않냐? 야! 야! 거기 있으면 대답 좀…….]

눈을 꼭 감은 그녀가 전화를 끊어버렸다. 머릿속이 분노로 지글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는 여전히 그녀에게 꽃다발을 내밀고 있었다. 그것을 그녀가 받지 않으면 물러나지 않을 기세다.

이 남자가 무슨 죄인가 싶어 일단 꽃은 받았다.

빨간 튤립이었다.

그녀의 기분은 안중에도 없는 듯 튤립은 그 자태가 너무 선명하고 예뻤다.

“받으셨으니, 그럼 저는 이만!”

씩씩하게 꽃을 내밀던 남자는 사라질 때마저도 씩씩했다.

하지만 남자가 휩쓸고 간 여파는 대단했다.

“야, 유변. 진짜 연애를 하긴 하나 보구만. 그 남자 맞지? 얼마 전 회사 앞에 왔던.”

빛나의 파혼 소식 이후 입맛을 다셨던 남자 변호사들이 이틀 전 일을 떠올리며 다시 승현의 존재를 상기시켰다.

어제 그렇게 호기심 어린 시선에 시달리고 오늘 겨우 잠잠해졌나 싶었는데, 결국 이런 식으로 다시 한 번 상기시키다니.

아오, 정말 잊을 만하면 제 존재를 확실히 어필하는 그 재주는 정말 타고난 인간이다.

“아니요! 저 연애 안 해요! 그 남자, 남자친구 아니에요!”

“하지만 꽃은…….”

“몰라요! 누가 보낸 건지!”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모두들 안 믿는 눈치다.

빛나는 어여쁘게 피어 있는 붉은 튤립을 보며 이를 갈았다.

-나, 공개 연애 할 거야.

웃어넘겼던 그 말의 후폭풍의 잔재가 이렇게 오래 갈 줄이야.

앞으론 그가 하는 말은 하나도 흘려듣지 말아야겠다.

그냥 막 던지는 말 같아도, 지조 있게 자신이 한 말은 꼭 지키는 남자라는 걸 이번 기회에 뼈저리게 깨달았으니까.

그때 핸드폰이 울려왔다. 이정이었다.

하지만 빛나는 전화를 받는 대신 꽃다발을 아무렇게나 책상 위에 던져놓고 어서 사무실을 벗어나는 것을 택했다.

그녀가 발길을 옮기자 선정을 비롯해 퇴근 준비를 했던 동료 변호사들이 우르르 따라 나와 호기심 어린 눈길을 던졌다.

커다란 엘리베이터 안, 승현이 없는데도 그가 곁에 있는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혀왔다.

“아, 그럼 누가 우리 유변 짝사랑하나 보다.”

“짝사랑이라도 부럽네. 이렇게 꽃도 받고.”

빛나는 누군가의 관심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이 불편했다. 몇 달 전 파혼했던 몸이라 더욱 그러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화가 난 사람처럼 걷는 그녀 곁으로 동료들을 비롯한 선정이 여전히 질문을 던지며 자리했다.

어떻게든 그녀에게 쏠린 관심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그녀에게 기가 막힌 기회가 생겼다.

투명한 유리문 사이로 이제 막 누군가의 차에서 내리는 박은지 변호사가 보였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선을 봤다더니, 바로 그 남자인가 보다.

호기심으로 가득 찬 이들에게 그 호기심을 풀어줄 만한 요량이 없다면, 또 다른 호기심거리를 던져주면 그만이었다.

그러기에 박은지 변호사와 남자가 함께 있는 순간의 포착은 그녀에게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빛나는 유리창에 바짝 붙어 소리쳤다.

“어머! 어머! 저게 누구야? 저거 봐요! 저거!”

놀란 그녀의 음성에 현혹된 사람들이 죄다 눈 주위로 쌍안경을 만들며 모여들었다.

“세상에…… 저게, 누구야?”

“어? 저 사람…….”

숨을 훅훅 들이마시는 소리, 쫄깃한 긴장감에 그녀의 심장이 다 콩닥거렸다.

세상은 오래 살고 볼일이다. 박은지의 덕을 다 보다니.

“하…… 짝사랑이 아닌가 보네.”

엘리베이터 안에서 짝사랑임을 자신 있게 말했던 정 변호사의 한숨소리가 들려온다.

이에 빛나는 열을 올리며 이야기했다.

“아니! 어딜 봐서 짝사랑이에요? 딱 봐도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인 거 안 보여요? 그것도 아주 찐-하게!”

그래. 이번 기회에 몰아가자!

공개 연애라고? 흥, 위승현! 네 맘대로 될쏘냐!

“결혼할 것 같아요, 이번엔. 확.실.히!”

빛나가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런데 그때, 슬그머니 누군가 다가와 일침을 가한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우리 유 변호사님, 그때 정말 찐-하더라고.”

건물 경비 아저씨였다.

놀란 빛나가 입을 떼려던 순간, 경비 아저씨가 눈을 가늘게 뜨며 먼저 입을 열었다.

“이틀 전에도 데리러 오더니만 오늘도 데리러 왔네. 허…… 거, 뉘집 자식인지 다시 봐도 그냥 인물이 후덜덜 하네.”

어라? 이게 아닌데?

“아니, 아저씨. 거기서 왜 제 이야기가 나와요? 전 지금 저기 박 변…… 으아-악!”

빛나가 박변을 가리키며 이제 막 유리창에 손을 대려던 찰나였다.

그제야 거기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가 보았던 곳과는 조금 다른 각도에 머물러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렇게 고개를 돌린 순간, 그녀는 보고 말았던 것이다.

“쟤, 쟤가 왜 저길…….”

승현이었다.

박은지와 선을 본 사람으로 추정되는 남자보다 조금 비켜선 그 자리에 잘 빠진 스포츠카만큼이나 훤칠한 그가 팔짱을 껸 채 비스듬히 서 있었던 것이다.

마치, 광고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결혼…… 해야겠네. 암, 그럼. 해야 하고말고.”

지금까지 그들은 서로 다른 상대를 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빛나는 어떻게든 수습해보고자 고개를 내저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라구요!”

그러자 경비 아저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한다.

“아니, 뭐가 아니어요? 내가 이틀 전 저녁에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디? 둘이, 요렇코롬…… 사랑스럽게 껴안고 부비부비 하는 거.”

“어머, 아저씨! 오해라고요-옷!”

속이 새까맣게 타 들어갔다.

이러다간 정말 위승현에게 제대로 코 꿸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그녀는 마지막 발악을 해보았다.

“저요, 저런 사람 몰라요! 딴 사람이랑 착각을 하셨나 보네. 아저씨 눈이 많이 나쁘신가 보다. 하하하…….”

하지만 되지도 않은 시도였다.

그 순간, 승현이 서서히 팔짱을 푸는 모습이 그녀의 눈에 더딘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그러더니 핸드폰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엄습했다.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은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손에 들린 그녀의 핸드폰이 울려댔기 때문이다.

모든 이의 시선이 전화를 거는 승현에게서 울리는 그녀의 핸드폰으로 옮겨갔다.

“거봐. 내가 뭐랬어? 내가 이래 봬도 시력이 2.0이구만! 어허허허!”

빛나의 시선이 절로 승현에게 돌아갔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그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다. 마치, 무척이나 반갑다는 듯.

그 모습이 어찌나 훤칠하던지, 너무 눈이 부셔 빛나는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머릿속에 흘려들었던 그의 말 한마디가 뼈저리게 파고들었다.

-뭘 그렇게 놀라? 그냥 내 거 침 바르는 건데.

위승현, 유빛나에게 침…… 제대로 발랐다.

감히, 아무도 넘어볼 수 없게끔, 완벽하게.

#dark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