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Only my way
2018.01.24.
아침에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어떻게 하루가 갔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결국 승현에게 열을 올리는데 시간을 소모하느라 차는 픽업하지도 못한 채 곧 바로 회사로 왔다.
승현의 차를 타고 오는 내내 목이 따끔거릴 만큼 지긋 지긋한 설교를 했더랬다.
그러나 말 안 듣는 청개구리 위승현, 듣는 둥 마는 둥.
다시 생각해도 열 받는 그 순간을 떠올리며 빛나는 팔짱을 끼고 사무실에 나 있는 창문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바깥 상황을 보면 마음이 편해질까 싶어.
그런데 언젠가 보았던 파란 천막이 보였다. 그리고 여전히 서명 운동을 하는 KMK컴퍼니 사람들도.
그 순간, 위승현으로 인해 슬슬 올라왔던 열이 절정으로 치닫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저 사람들은 법적 효력도 없는 저 서명 운동을 언제까지 할 참인가.
박변은 왜 저들을 말리지 않은 것일까.
“빨리 퇴근해야지, 안 되겠다.”
빛나는 마인드 컨트롤을 하기 위해 책상을 정리하며 퇴근 준비를 했다.
그때 밖에서 어렴풋이 직원들이 은지에게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를 들었다.
은지가 외근 나갔다가 이제야 돌아온 모양이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가까스로 마인드 컨트롤 했던 화가 다시 올라왔다.
결국 참지 못하고 빛나는 제 사무실을 벗어나 은지의 사무실로 노크도 없이 쳐들어갔다.
놀란 은지는 옷을 벗다 말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야, 노크도 없이.”
“나한테 설명 좀 해줄래? 왜 KMK컴퍼니 사람들이 저 법적 효력도 없는 서명운동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멈추지 않는지?”
빛나가 지나친 간섭을 한다 생각했는지 은지의 눈동자에 날이 섰다.
“내가, 왜 설명을 해줘야 하는데?”
“네가 이 사건 변호사잖아. 이왕지사 하기로 했으면, 똑바로 해. 변호사답게! 아무리 무료 변호라도 이건 좀 아니지 않니? 비도 올 것 같은데 저 사람들 무슨 고생이야, 저 밖에서!”
“흥, 재밌네. 유빛나. 지금 밖에서 저 사람들이 하고 있는 서명운동을 내가 시켰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아냐? 아니면, 저 사람들이 왜 저렇게 열심히 하는 건데? 법적 효력도 없는 저걸, 왜 저렇게 목숨 걸고 하냐고!”
따지고 드는 빛나의 목소리가 단호하고 또렷했다.
이에 은지는 팔짱을 끼며 그녀를 천천히 올려다본다.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나…… 아직 그만큼 바닥은 아냐. 물론 이길 수 있는 무료 변호만 맡아 하는 건 사실이야. 어차피 하는 무료 변호, 이겨야 여기도 남는 장사니까. 근데…… KMK컴퍼니는 아니잖아. 그래서 마음은 좀 불편하지만 그 변호 거절했어.”
“그럼…….”
“저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해서 움직이는 거야.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저 사람들이 하고 있는 저 일이 헛수고라는 걸 알려주지 않은 것뿐. 하지만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순간 빛나는 눈앞이 번쩍했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읽은 은지가 의기양양한 웃음을 보였지만 이도 얼마 가지 못했다.
고집스럽게 입술을 깨문 그녀가 곧 바로 사무실을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유변! 어디 가!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등 뒤에서 빛나를 부르는 은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곧장 회사를 나와 엘리베이터에 오른 그녀는 1층 로비를 눌렀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얄미운 은지의 목소리가 각성제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랬다. 은지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다.
모든 걸 다 가졌음에도 항상 자신보다 뒤쳐진 은지를 무시했다.
그럼에도 결국은 그녀와 라이벌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결국은 그녀도 은지와 다를 바 없는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것.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빛나는 곧장 건물 밖으로 나가 서명 운동을 하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사람들은 바쁜 걸음으로 제 갈 길을 갈뿐, 점차 수그러드는 사회적인 이슈 따위엔 관심조차도 없었다.
결국 빛나는 아쉬움에 손을 떨구는 남자 앞을 가로 막았다.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죠? J&J로펌 유빛나 변호사입니다.”
“아…….”
빛나를 알아본 남자의 입에서 짧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보며 그녀는 주먹을 꼭 틀어쥐었다.
말해야 한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 작은 희망이 그저 헛수고에 불과하단 사실을.
빛나는 안타까워 차마 할 수 없었던 그 말을 겨우 입에 담았다.
“서명 운동은 말입니다, 개인이나 단체가 어떤 사회 문제와 정책에 찬성 및 반대하거나 법령의 개정이나 제정을 요구하는 경우 법에서 정한 일정 숫자 이상이 동참하면 법적 효력을 낳게 됩니다. 하지만 보통의 서명운동…… 그러니까 지금 하고 계시는 이것은 그 어떤 법적 효력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기대할 수 있는 건, 상대방에게 여론의 압박을 가하는 게 전부예요.”
“…….”
“억울하신 거 압니다. 저도 안타깝구요. 하지만…….”
결론을 내려주어야 했다.
그들에게 현실을 인지시켜주어야 한다.
지금은 잔인한 말로 들리겠지만, 이것이 그들을 위한 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빛나는 복받치는 감정을 꾹 누르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미 철수하기로 한 회사라, 그것도 미국 계열 아닙니까. 이 정도의 국내 여론으로는 절대 움직일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러나 남자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변호사님, 저희 회사…… 안 없어지는데요? 결정 났습니다. 계속 유지하는 걸로.”
“뭐라구요?”
“본사에서 그렇게 결정 났습니다. 새로운 관리자가 오는 걸로. 다만 문제는 그 불미스러운 사건에서 완전히 오명을 씻지 못한 우리 직원들의 재채용 여부입니다.”
“무슨…… 잠시만.”
당황한 빛나가 잠시 멈칫한 사이, 남자는 차분하게 그들의 처지를 설명했다.
“아직 남아 있는 사람 모두, 천직이 광고쟁이입니다. 하지만 그런 오명을 안고 있는 저희들이 어디를 갈 수 있겠습니까. 저흰…… 여기 아니면 갈 곳이 없습니다. 무지한 거 압니다. 그런데 이거라도 해야…….”
남자가 뒷말을 흐리며 선한 눈동자를 내리 깔았다. 절박한 그들의 심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도대체 이 세상엔 정의 따위가 존재는 하는 것일까.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 길로 접어들었건만, 아직까지도 빛나는 답을 찾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녀가 생각하는 정의와 점점 멀어져 가는 이 기분은 뭘까.
사법고시를 패스했던 그 시절, 이 세상 정의는 모두 그녀가 지킬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이 남자의 손 한 번도 제대로 잡아주지 못하는 그녀가 정의를 논할 자격이나 있는 것일까.
모순이었다. 그 씁쓸한 현실에 뜨거운 감정이 울컥 올라올 만큼.
그때 빗방울이 또 떨어지기 시작했다.
빛나는 목구멍 안쪽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울분을 집어 삼키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지금은 비가 오니 오늘은 이만 접는 게 좋겠어요.”
“하지만…….”
“혹시 시간 되시면 저 잠깐 보실 수 있으세요? 그 이야기, 자세히 듣고 싶어요.”
순간 남자의 눈동자가 조심스레 흔들렸다.
로펌을 찾아갔다 은지에게 거절당한 후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은 거의 포기 상태였다.
물론 그동안 수많은 변호사들을 만났었다.
하지만 무료 변호를 할 상대만 물색하다 보니 현실적으로 이렇게 골치 아픈 건을 맡으려는 변호사가 선뜻 나타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때문에 남자에게 빛나의 제안은 그야말로 메마른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격이었다.
“아, 그럼요! 그럼요! 시간 됩니다! 되다마다요!”
“그럼 사무실에서 기다릴게요.”
“네, 제가……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그렇게 남자는 빛나가 건물로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
한 시간이 넘는 대화 끝에 자신을 장 부장이라 소개한 남자는 너무 많이 봐서 닳고 닳아버린 두툼한 봉투 하나를 건넨 뒤 사라졌다.
빛나는 책상 위에 놓은 그 노란 서류 봉투의 서류들을 다시 한 번 꺼내보았다.
끝이 닳아버린 서류들은 그동안 장 부장이 얼마나 많은 변호사들을 찾아다니며 사정을 했는지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류가 결국 그녀의 손에 들려 있다는 건, 그 많은 변호사들이 모두 이 사건을 거절했음이리라.
마음이 짠해졌다.
닳아버린 서류철이 마치 애가 탄 장 부장의 마음 같아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었단 말이다.
결국 빛나는 이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웬일이야?]
“나 뭐 물어볼 게 있어서. 너 KMK컴퍼니 사건 알지?”
[알다마다. 그때 한번 크게 이슈가 돼서 국제 망신살 크게 뻗쳤던 사건이잖아. 아시아를 석권하겠단 포부로 홍콩에 세우려던 지부를 야심차게 대한민국 서울에 심어놨는데 윗대가리들이 죄다 해먹어서 폭삭 망한 글로벌 회사. 게다가 죗값 치른 인간들이 죄다 한국인들이다 보니 이 얼마나 쪽팔릴 일이냐. 그래서 본사에서 철수하겠다 선언했고. 근데 그건 왜?]
아니나 다를까, 이정은 KMK컴퍼니란 이름만 들어도 발작적으로 반응했다.
이유인 즉, 이정의 말대로 엄청난 이슈가 되었던 사건인지라 사회부 기자인 그녀가 몇 달에 걸쳐 취재를 했던 건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정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그녀라면 뭔가 더 알고 있지 않을까, 또는 그녀의 취재 실력이라면 이번 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응. 근데 그 KMK컴퍼니 말이야. 미국 본사에서 여기 지부를 계속 유지하기로 결정했대.”
[그래? 들은 바가 없는데? 그때 당시 워낙 윗대가리들이 해먹은 돈 스케일이 커서 다시는 철수하겠다는 의사를 번복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더니?]
“그러니까 내 말이.”
[뜬소문 아냐?]
“아냐. 내가 방금 거기 회사 직원 면담했어. 확실한 정보야.”
[음,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또 피바람이 한번 불겠구만. 근데 어떻게 회사를 활성화시킨다는 거지? 책임질 만한 사람들은 전부 콩밥 먹고 있는데.]
“본사에서 직접 관리한대. 사람 보내서.”
[그래? 미국 본사에서?]
“응. 그렇게 되면 그쪽 라인으로 관리자들이 물갈이가 되면서 아랫사람들한테까지 타격이 가겠지?”
[그러니까 그 피 바람 한번 불겠다고. 밑에 있는 사람들만 불쌍한 거지.]
“이정아.”
[으-응?]
빛나가 오랜만에 다정하게 부르자 이정도 애교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다음 말에 이정은 사레가 들리고 만다.
“내가, 그 피바람 한번 막아보려고…….”
[컥!]
“야, 너 나랑 이야기할 땐 뭐 먹지 말라고 몇 번 말해! 통화하는 사람에게 그거 예의 아냐! 아무리 내가 눈으로 안 보고 입으로만 이야기하고 있다지만!”
[이런 미친…… 먹긴 뭘 먹어! 아니 먹긴 먹었다! 너 때문에 기가 막혀서 삼키던 침이 다 걸려! 미쳤냐? 그거 잘못 건드리면 완전 벌집 쑤시는 거야!]
“알아. 아는데…… 저 사람들 딱해서 그냥은 못 보고 있겠다.”
[그놈의 오지랖은 정말! 야, 그냥 눈 딱 감고 너 하던 일이나 해. 괜히 끼어들었다가 너 사회적으로 생매장 당할 수도 있어.]
“이정아, 나 지금까지 우리 애들하고 원장수녀님 때문에 돈 벌려고 이 일 했다. 쉽지 않더라. 하지만 한 번쯤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
[…….]
“법에도…… 심장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미친, 로맨스 쓰냐?]
그녀가 걱정되어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이정은 작은 한숨과 함께 되물었다.
[그래서…… 뭐가 알고 싶은 건데?]
“KMK컴퍼니 직원들 말에 의하면 미국에서 본부장이 파견 나온단다. 모든 결정권이 그 사람 손아귀에 있대.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다. 일단, 구워삶으려면 그 사람이 누군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니겠니?”
[그-으래? 그게 누군데?]
핸드폰 목소리만으로도 사회부 기자의 호기심을 자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이정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내가 알고 싶은 게 그거야. 그게 누구냐는 거.”
[그럼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야?]
“아니, 이거 하나는 알아. 마담 M이라고 부른댄다.”
[마담 N?]
“아, N 말고 마담 M!”
[알았다. 승질은…….]
“그 여자에 대해서 한번 알아봐줘.”
[최선을 다해볼게. 하지만 장담은 할 수가 없어.]
“땡큐.”
[한 가지만 약속해. 너무 깊이 관여하지 않겠다고. 아니다 싶으면 냉정하게 발 빼기로.]
“알았어. 걱정 마.”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이정에게 한 대답과는 달리 빛나의 검은 눈동자가 진지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제 손에 들린 낡은 서류들을 바라보며 작은 한숨을 내지었다.
포기, 그딴 거 모른다.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게 그녀의 성격이니까.
한 번이라도 돈이 아닌 심장으로 법 앞에 서고 싶었다.
지금이 바로 그럴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분명 은지가 이 사건을 맡지 않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무료 변호는 부동의 진리였고, 아무런 이익도 남지 않는 이 사건에 대해 은지도 설득시키지 못한 회사를 어떻게 다독이냐는 문제도 남았다.
그런데 이러한 걱정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좋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변호사님…….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나가기 전 몇 번이고 중얼거리던 그 음성이 자꾸 마음속에 남았다.
빛나는 퇴근을 위해 가방을 챙겨 들며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잘한 거야, 유빛나. 적어도 저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싸울 기회는 주는 거니까.”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빛나의 쓸데없는 오지랖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 생각했다.
그렇게 회사를 나와 택시를 잡아타기 위해 잠시 걸었다. 아침에 픽업하지 못한 차를 가지러가야 했기 때문이다.
빛나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감돌았다.
갑작스러운 비로 인해 살짝 떨어진 기온이었지만 팔에 오돌오돌 돋는 소름에도 불구하고 기분은 한껏 날아갈 것 같은 그런 순간이었단 말이다.
적어도 눈앞에 있는 그를 보기 전까진.
“어, 어떻게 쟤가…….”
승현이었다.
도로변에 차를 세운 그는 검은 우산을 펼쳐 든 채 서 있었다.
저 망할 자식은 저렇게 서서 화보를 찍는 모양이다.
하지만 빛나에겐 정말 반갑지 않은 순간이었다.
어떻게든 피해보고자 못 본 척 돌아섰지만, 너무 급하게 돌아서는 바람에 그녀의 뒤를 바짝 따라오던 남자의 품에 의도치 않게 안기게 되었다.
“이, 이봐요…….”
낯선 남자가 당황해 그녀를 불렀지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승현의 시야에서 벗어나고픈 생각뿐이다.
그러기엔 낯선 남자의 가슴은 턱 없이 빈약했지만 말이다.
결국 승현에게 고스란히 노출이 된 빛나는 반항할 새도 없이 그의 손에 붙들리고 말았다.
“거, 참…… 왜 애먼 남자 품에 안기고 난리야?”
“이거 놔! 놓으라고!”
“아가씨, 이것 좀 놓고…….”
무의식중에 그의 손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낯선 남자의 옷깃을 너무 세게 잡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승현은 더 이상 그 꼴을 보지 못하겠다는 듯 남자로부터 그녀를 확 끌어당겨 안았다.
“아-악…… 흡!”
버티던 빛나가 제 품으로 들어오자 승현은 남자에게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어제 좀 싸웠거든요.”
누가 들으면 연인들끼리 싸운 줄 알겠다.
남자가 사라지는 모습을 허망한 눈동자로 바라보며 빛나는 이를 악 물었다.
정말 미치겠다.
좀 전에는 승현으로부터 숨고자 그렇게 파고들어도 부질없던 몸짓이었는데 그의 품에 들어오니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느낌이다.
“지금 저 남자가 널 안아줄 간지나 돼? 널 품기엔 턱 없이 빈약해 보이더만.”
그랬다. 승현의 말이 옳다.
적어도 이 정도 태평양 가슴은 되어야 그로부터 숨을 수 있었던 것이다.
턱 없이 모자란 남자의 가슴으로 뛰어든 그녀의 죄가 컸다.
아무리 파고들어도 그 가슴은 그녀를 숨겨줄 수 있을 만큼 넓은 가슴이 아니었으니.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니까 이것 좀 놓고 이야기해.”
빛나가 그의 품에서 벗어나고자 꿈틀댔다.
하지만 승현은 그녀가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도망가기 없기.”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유빛나답지 않게 낯선 남자의 품에 안겼던 조금 전을 떠올리며 승현이 확답을 받고자 했다.
“알았어.”
“그리고 다시는 내 눈앞에서 딴 놈 품에 뛰어들기 없기.”
“야!”
도가 지나친 승현의 요구에 빛나는 그의 가슴을 내리치며 벗어났다.
그러자 그의 모습이 그녀의 시야를 가득 메운다.
조금 전 뭣도 모르고 안겼던 남자와 비교도 안될 만큼 훤칠하고 커다란 그의 모습이 말이다.
“너, 내가 선 넘지 말랬지! 선 넘지 말라고 분명히 오늘 아침에 말했잖아! 도대체 내 말을 뭘로 듣는 거니? 말 좀 들어, 말 좀!”
“그러는 너야말로 내 말 좀 듣지? 나도 아침에 분명히 말한 것 같은데, 그 선 넘은 지 오래라고.”
말 더럽게 안 듣게 생긴 놈 보고 말 좀 들으라고 말하는 게 어쩌면 너무 큰 바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 장난치지 말고!”
“장난 아냐. 나 정말 그 선 넘었어.”
“어머! 도대체 언제!”
“너랑 키스할 때.”
흡!
앙칼지게 대들던 빛나가 할 말을 잃는 순간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승현은 다시 그녀를 제 품으로 끌어당기며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마치, 키스를 하던 어제의 그 순간처럼.
하지만 어제처럼 황홀한 키스는 없었다.
대신 들릴 듯 말 듯한 섹시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조용히 내려앉았다.
“난 이미 넘었으니…….”
“…….”
“이제 너만 넘어오면 돼.”
악마에게 홀린 듯한 기분이다.
선을 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만큼 승현의 유혹은 그 찰나의 순간,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그녀를 바짝 끌어당기기 위해 허리에 머문 손이 그러했고, 비가 오는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차단된 그의 넓은 가슴이 그러했다.
그가 들고 있는 우산을 기준으로 바깥세상의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그동안 줄 곧 그녀의 귓전을 꿰뚫던 빗소리도 이젠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주변을 오가는 사람의 움직임도 느껴지질 않았다.
마치 위승현의 세상에 들어와 있는 이 느낌,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위승현, 도대체 너…… 무슨 짓을 한 거니.
유빛나, 정신 차리자!
그녀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개를 내저었다.
그제야 뇌가 제대로 활동을 하는지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빛나는 앙큼한 눈매를 치켜 올리며 승현의 가슴을 밀쳐내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자신을 붙들고 있는 손만은 떨쳐내질 못했다.
그가 다시 느릿한 어조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내가 말이지, 뭘 한번 해야겠다 마음먹으면…….”
승현이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 빛나는 예감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가 놔주지 않는 한 절대로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음을.
“…… 무조건 직진이거든.”
예감은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그는 일방통행을 선언했다.
“넌 그대로 있어.”
하지만 그 일방통행은 모든 이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일방통행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연애는 나 혼자 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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