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멈출 수 없는 시간
2018.01.17.
“너…….”
9년만이지만 현성이 원수 같은 승현의 얼굴을 몰라 볼 리 만무하다.
고등학교 때 농담 한마디 한 거 가지고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시원하게 얻어터진 것도 모자라, 대학시절 그토록 탐이 났던 빛나를 눈앞에서 채어간 게 바로 승현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빛나와의 어긋한 악연은 지금까지도 현성의 자존심에 먹칠을 하고 있었으니까.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인 승현을 몰라볼 수가 없었다.
“내가 미리 예상했어야 하는데. 네 형이…… 나타난 순간부터.”
현성이 이를 갈며 입을 열었다. 분노한 그의 모습에 모두들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승현의 입꼬리는 여유 있게 말려 올라갔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사악해 보이던지, 저런 외모를 가지고도 악마가 될 수 있구나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갑작스럽게 나타난 우월한 유전자의 승현에게.
얼음 왕국처럼 ‘동작 그만’ 상태가 약 30초간 지속되었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만이 그 공간 속에 존재하는 유일한 소음이다.
승현은 그 얼음왕국의 황태자처럼 오만한 표정으로 이 순간을 군림하고 있었다.
모든 시선을 한눈에 받고 있음에도 전혀 긴장하지 않는 여유로움이 승현을 더 두려운 존재로 만들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성질 급한 건 여전하네.”
“개 버릇 남 주나. 그러는 너도 헛소리 지껄이는 거 여전한데, 뭐.”
허공에서 만난 두 사람의 시선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승현에게로 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현성으로 말할 것 같으면 더러운 인간성이야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고, 아버지가 대검찰청 차장임은 물론 그 할아버지 또한 과거 검찰 총장을 지냈던 분으로 법조계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는 알짜배기 로열패밀리였던 것이다.
때문에 현성이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오만에 교만을 떨어도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그런데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승현이 나타나 그런 조현성의 자존심을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넝마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현성이 칵테일을 뒤집어쓰고도 반격하지 못하는 꼴이라니, 그야말로 법조계에선 해외 토픽 감이었다.
“너 이러는 거…… 실수야.”
현성이 이를 악 물며 이야기했다.
성질 같아선 승현의 멱살이라도 틀어쥐고 싶었지만 법조인이 모인 자리가 아닌가.
그 어느 때보다 무서운 증인들 앞에서 그런 만행을 저지를 순 없었다.
그러나 그 실수란 한마디에 승현의 아몬드형 눈매가 재미있다는 듯 반짝 빛이 났다.
“실수? 내가 한 실수라면 딱 하나, 10년 전 널 고대로 살려서 우리 형 앞에 갖다 바쳤어야 했다는 거.”
“뭐…… 라고?”
“그랬다면, 너 이렇게 살아서 주접 떠는 꼴 더 이상 안 봐도 됐을 텐데.”
여유 넘치는 승현의 표정에 비웃음까지 묻어났다.
그리고 그는 현성이 당황하는 틈을 타 빛나를 제 앞에서 뒤로 밀어 냈다.
현성의 시야에 빛나를 두고 싶지 않아서다.
놀란 빛나는 승현이 저를 당겨 뒤로 밀어낼 때까지, 넋이 나간 채였다.
뒤늦게 연정이 그녀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그들로부터 거리가 좀 멀어지고 나서야 제 정신이 돌아왔을 정도다.
그 후로도 연정이 눈으로 승현의 존재를 물었지만 빛나는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려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빛나가 제정신을 차려갈 때 즈음, 현성의 얼굴은 처참하게 구겨지고 있었다.
주변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의 자존심은 시궁창으로 곤두박질 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승현에게 반박할 수 없는 현성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위승현이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니까.
절대 함부로 할 수 없는, 진짜…… 로열패밀리.
현성의 날선 눈동자가 원망스러운 듯 승현의 뒤에 있는 빛나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렇게 빛나에게 향한 시선 하나만으로도 줄 곧 움직임이 없던 승현이 현성에게 한 발자국 다가섰다.
“보지 마라. 닳는다.”
“뭐?”
“보지 말라고 했다.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네 눈으로는, 감히 쳐다도 볼 수 없는 여자라고.”
웃음기가 사라진 승현의 검은 눈동자가 사납게 일렁이고 있었다.
저 눈, 언젠가 본 적 있다.
그의 형을 사생아라 불렀을 때 보았던 그 불꽃이었다.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네가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다. 너한테 맞는 여자를 찾아. 그럼 이해해줄 테니.”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꼭 틀어쥐고 현성이 가까스로 말했다.
하지만 그 한마디가 그렇지 않아도 곤두선 승현의 신경을 제대로 자극했나 보다.
그가 긴 팔을 뻗어 현성의 슈트 깃을 매만졌다.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길인데도 현성은 소름이 돋았다.
“고작 여자 하나라…… 그래서 네 눈이 세모라는 거다. 병신아.”
“뭐, 병신? 그러는 너도 어차피 여자 하나에 미쳐 이러는 거 아냐? 너랑 나랑 다를 바가 도대체 뭔데?”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선 넝마가 되어버린 자존심이지만 적어도 승현 앞에서만큼은 그 한 가닥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오히려 역효과가 나고 만다.
“다를 바가 뭐냐고? 몰라 물어?”
말을 끝내기 무섭게 승현은 현성의 슈트 자락을 당겨 자신의 앞으로 그를 밀착시켰다.
그러자 그렇지 않아도 상당한 키 차이가 한 눈에 보인다.
“넌 아무리 노력해도 날 밑에서 위로 올려봐야 한다는 거, 하지만 나는 아무리 개망나니라도 항상 이 자리에서 널 내려다볼 수 있다는 거. 그게 너랑 내 차이 점이지.”
“무슨…….”
“너랑 내 키 차이, 딱 이만큼.”
“…….”
“넌 내가 사는 세상에 입성할 수 없어. 내가…… 죽기 살기로 막을 테니까.”
일종의 선언이었다. 평생 2류로 살다 죽으라는.
그러더니 승현은 마지막 어퍼컷을 날리려는 듯 고개를 숙여 현성의 귓가에 속삭인다.
그 목소리가 너무 부드럽고 달콤해 마치 자신을 유혹하는 악마 같았다.
“네 아버지가 정권 바뀌면 검찰 총장이 되실지도 모른다고 했냐? 그런데…… 이거 미안해서 어쩌냐, 그 정권 우리 아버지가 잡으실 것 같은데.”
하지만 그 속삭임이 끝났을 때 현성은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마치 악마에게 영혼이 탈탈 털린 느낌이었다.
승현이 서서히 돌아서고 있는데도 현성은 넋이 나간 듯 그에게 반박할 의지조차도 잃어버렸다.
그렇게 돌아선 승현은 넋을 놓은 빛나를 마주볼 수 있었다.
승현이 다가와 그녀 앞에 서자 여기저기서 작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나랑 같이…… 여기서 나가자, 빛나야.”
강제로 그녀의 손을 틀어잡지 않았다.
힘으로 끌어낸다면 끌려야 나오겠지만 유빛나 앞에선 그가 가진 힘도, 권력도 모두 쓸데없는 무용지물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빛나야…… 방금 이 남자, 네 이름 불렀다.”
곁에 있던 연정이 승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빛나를 팔꿈치로 자극했다.
하지만 빛나는 선뜻 승현이 내민 손을 잡지 못한다.
웬일인지 그 손을 잡았다간 다시는 놓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서다.
그런데 평소와 다른 승현의 눈빛이 빛나의 가슴을 쿵 내려앉게 만들었다.
이 모든 사람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으면서도, 그는 허허 벌판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이었다.
장난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 아몬드형 눈매가 유독 외로워 보였다.
속지 말자. 속지 말자.
빛나는 주먹을 꼭 틀어쥔 채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그러나.
승현이 다음 말을 내뱉은 순간 빛나는 결국 그 손을 붙들고 말았다.
“나…… 숨 막혀.”
마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
승현이 왔다 간 자리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사람들의 관심은 오로지 위승현이었다.
눈이 즐거운 그 외모도 한 몫을 했지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풍기는 그 아우라가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게 만든다.
꼭 틀어쥔 현성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젠장…….”
입안에서 욕설이 맴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성이 제 명예 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주변에서 속닥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뭐야? 도대체 누구야?”
빛나와 함께 있던 연정에게로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혹시나 그녀는 승현의 신분에 대해 알까 해서다.
“두 사람이 뭐라고 하는지 정확히 들었어? 도대체 뭐라고 한 거야? 로열패밀리 어쩌고저쩌고 하던데. 음악 소리가 시끄러워 들려야 말이지.”
“보나 마나지. 조검이 어깨 힘주고 로열패밀리라며 거만 떨었겠지. 안 그래도 어린놈이 너무 안하무인이라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틀렸는데, 아주 그냥 내 속이 다 시원하네!”
“봤어? 칵테일 뒤집어쓰고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던 거!”
“그러게, 조검이 그럴 인간이 아닌데 말이지.”
평소 현성을 곱게 보지 못했던 인물들이 급물살을 타듯 욕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현성이 단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에게 당한 건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았다.
그때, 입구 쪽에 누군가 나와 그들의 시선을 끌었다.
웨이터와 이야기하고 있는 뒷모습이 그 간지만 봐도 소름이 돋게 만드는 누군가였다.
“설마…….”
사람들의 입에서 설마가 연발되어 나왔다. 그리고 그 설마가 사람 잡았다.
“물…… 안개?”
우빈과 승주의 차 키를 가지고 사라진 승현이 돌아오지 않자 찾으러 나온 승준이었다.
그는 웨이터와 몇 마디 나누더니 시선을 돌려 홀 쪽을 바라보았다.
쌍꺼풀 없는 눈동자가 순식간에 모든 사람을 훑어보았다.
현성이 법조계의 로열패밀리라면, 승준은 법조계의 전설이었다.
법조계 인맥은 없지만 누구보다 든든한 백그라운드로 법 외엔 세상 무서울 게 없는 남자.
때문에 범죄자는 물론 내로라하는 정. 재계 인물들도 피해간다는 법조계의 이단아였다.
그런 그가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갑자기 그들이 있는 홀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순간 놀란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그로부터 뒷걸음질을 쳤다.
승준이 홀 중앙에 섰을 땐, 그를 중심으로 모든 사람이 물러선 채였다.
마치 그들 앞에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는 것처럼.
“이상하네…….”
그의 입에서 알 수 없는 한마디가 흘러 나왔다.
그러자 기존에 그의 얼굴을 알던 이들도, 모르던 이들도 일제히 팔에 돋은 소름을 쓸어내려야만 했다.
그렇게 승준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버겁고 어려운데 여기에 또 다른 인물이 가세했다.
승준은 법조인이 아니면 잘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이지만 새로 등장한 이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를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아니, 형님…… 왜 거기 계십니까?”
우빈이 승준의 곁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을 풀 샷으로 보고 있자니, 살이 다 떨려 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여긴 S대 출신들만 초대받아 올 수 있는 사교 모임이 아닌가.
헌데 도대체 S대 출신도 아닌 이들이, 심지어 우빈은 법조인이 아닐 텐데도 이 자리에 있는 이유가 뭘까.
잠시 후 그들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리 승현이가…… 여길 한번 쓸고 지나갔다네.”
그리고 그 이유를 안 순간, 그 홀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집어 삼켜야만 했다.
이제야, 안하무인에 세상에서 제가 제일 잘난 줄 알았던 조현성이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굴욕을 당한 이유를 제대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요? 막내 형님이, 왜?”
우빈이 물었다.
그러자 하나하나 훑어보던 승준의 시선이 현성에게 딱 멈추며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그러게…… 왜일까…….”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뜻만은 서슬이 퍼런 칼날보다도 단호하고 무서웠다.
예민한 검사의 촉이 대번에 현성이 원인이라는 걸 알아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안 순간, 승준은 망설임 없이 행동으로 옮겼다.
“그래서, 나도…… 알아보려고…….”
비명조차도 지를 수 없는 순간이었다.
***
-나…… 숨 막혀.
맙소사! 그 한마디에 눈앞에 있는 승현의 손을 덥석 붙들어버리다니!
빛나는 지금 승현의 손을 잡았던 제 손목을 잘라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눈빛에 홀려, 그 목소리에 홀려,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지만 숨 막히는 어색함이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귀신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평소 장난스럽고 거만하기만 하던 승현에게서 홀로 선 그림자를 봤을 때, 어쩌면 위승현은 그녀가 알고 있는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가 멈추었다.
승현이 내려서자 빛나도 따라 내려섰다.
그들이 멈춘 곳은 서울 시내가 한 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가로등 불빛 몇 개를 제외하곤, 지나가는 사람도 볼 수 없을 만큼 외진 곳이었지만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서울 시내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네…….”
저도 모르게 감탄의 한마디가 흘러나올 만큼.
그러자 승현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보지 않아도 그가 어떤 눈빛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따끔거리는 옆얼굴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앞으론 그러지 마. 그럴 가치도 없는 인간에게 일일이 반응하면, 이 뻑뻑한 세상…… 어떻게 사니, 위승현?”
부드럽게 그의 이름을 읊어내는 빛나의 목소리에 승현의 눈빛이 검게 가라앉았다.
빛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며 눈을 마주했다.
분명, 뭔가 달라졌다.
그런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일일이 반응한 거 아냐.”
“뭐라고?”
어둡게 가라앉은 그 목소리가 너무 섹시했다.
화가 섞여 망설이듯 내뱉는 그 음성에 그녀의 심장 끝이 쫄깃해졌다.
도대체 어린놈이 이렇게 색기가 넘쳐도 되나 싶을 만큼, 어둡게 가라앉은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단 말이다.
“바로 너니까, 열 받은 거라고…….”
승현의 말끝에 망설임이 묻어났다.
제 맘도 몰라주는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승현은 이쯤에서 결론을 지어야겠다 생각했다.
더 이상은 숨이 막혀 못 살겠으니까.
“너만 보면 심장이 뛰어.”
“…….”
“근데 그게…… 화가 나서 뛰는 건지, 설레서 뛰는 건지 모르겠어.”
빛나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위험할 정도로 넘치는 색기가 더 이상 그녀가 물러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부터 알아보려고.”
순식간이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입술을 훔쳐낸 건.
노란 달빛 아래, 넘치는 색기 만큼이나 달콤한 입술이었다.
곤두선 그녀의 허리를 제 쪽으로 당겨 밀착 시킨 후 승현은 강하게 그녀를 빨아 들였다.
부딪친 입술이 열 감기에 걸린 듯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두 사람의 입술이 단 1미리의 오차도 없이 맞물렸다.
평소 오만하기만 하던 그의 입술이 지금 이순간은 그 어느 때보다 저돌적으로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하지만 여전히 앙 다문 그녀의 입술은 굳건히 그 문을 사수하고 있었다.
빛나의 머릿속이 암전되었다. 끈적끈적한 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야하게 울려왔다.
그제야, 현실감각이 되돌아온다.
그녀는 지금 다름 아닌 위승현과 키스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다리가 후들 후들 떨려왔다.
하지만 주저앉기 직전인 다리와는 반대로 온 몸의 세포들은 일제히 그를 향해 곤두섰다.
맞닿은 입술이 불에 덴 것처럼 후끈거렸다.
그 열기에 결국 빛나의 입술이 열리자 승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뜨거운 숨결을 토해냈다.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열정이 그녀의 치열을 더듬다 입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온몸의 신경세포가 그를 향해 곤두선 듯 찌릿한 감각들이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그렇게 빛나의 몸이 강렬하게 반응한 순간, 승현은 그 어떠한 변수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목덜미를 감싸 자신 쪽으로 더 바짝 끌어당겼다.
그녀의 입술은 생각했던 것보다 달콤했다. 아니, 무엇을 상상했던 그 이상이었다.
얕은 숨결 하나도 놓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뒤로 물러서는 그녀의 혀를 끌어당겨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었다.
서로의 숨결이 엉켜들자 열기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이 상황에서도 빛나는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다.
다름 아닌 위승현이었기에 여기서 멈춰야 했다. 더 멀리 갔다간 영영 되돌아 올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빛나는 승현을 밀어 내기 위해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느끼고 말았다.
그의 피부에 균열이 일 것처럼 거칠게 뛰는 심장을 말이다.
-너만 보면 심장이 뛰어. 근데 그게…… 화가 나서 뛰는 건지, 설레서 뛰는 건지 모르겠어.
그 말이,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심장소리는 그 움직임조차도 색기가 넘쳐흘렀다.
그 역동적인 움직임에 현혹되어 밀어낼 수가 없었다.
대신 빛나는 그의 왼쪽 가슴에 손바닥을 펴고 그 파동을 느꼈다.
마치, 악마에게 홀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악마는 그녀가 호흡을 할 수 없을 만큼 더 깊이 파고들었다. 이젠 그녀의 의지론 떼어낼 수 없을 만큼.
저돌적이고 일방적인 키스였지만 거칠지는 않았다.
그녀의 숨결을 빨아들이는 그의 움직임은 섹시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짜릿함이 빛나를 감전 시킬 것 같았다.
산소 부족으로 머리가 어질어질 할 때 즈음 되어서야 미친 듯이 그녀를 찾아들던 그의 숨결이 한보 후퇴했다.
그리고 잠시 후 승현의 불같은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찬 공기가 진한 키스로 인해 살짝 부풀어 오른 그녀의 입술을 무섭게 할퀴고 지나갔다.
“후…….”
그녀의 입술에서 작은 숨결이 터져 나왔다.
그 혼자 한 일방적인 키스였는데도 빛나의 가슴이 작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짙게 가라앉은 그녀의 눈동자가 승현에게로 향했다.
“위승현…… 너…….”
작은 원망이라도 쏟아내고 싶었다. 그리고 여기서 멈춰야 한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다.
그런데, 여전히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그의 심장 박동이 그녀의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게다가 평소의 장난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아몬드형 눈매가 그녀의 숨을 멎게 만들었다.
‘왜, 그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거니, 도대체 왜…….’
달랐다. 그녀가 알던 위승현이 아니다.
뭔가 달라졌지만 도무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달라진 그 무언가가 승현을 두려운 존재로 만들었다.
말문이 막혀버린 그녀의 눈동자는 혼란 그 자체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승현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키스를 하면 답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쩌면 좋나.
그렇게 시작한 키스를 멈출 수가 없었다.
“미안…….”
갑작스러운 사과에 빛나의 눈썹 끝이 떨렸다.
키스를 해놓고 사과라니…….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착각에 불과했다.
승현이 한 사과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으니.
“진짜, 미안…….”
“…….”
“멈출 방법을…… 모르겠어…….”
그녀가 그 사과를 이해하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다시 찾아 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오랜 기다림은 없었다.
곧장 그녀의 열린 입술 사이로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파고 들 수 있었으니까.
조금 전 보다 더 뜨겁고, 더 저돌적인 키스였다. 그리고 여전히 혼자 하는 일방적인 키스.
그러나 그런 승현을 말리지 않고 말없이 받아들인 그녀도, 따지고 보면 피할 수 없는 유죄.
세상 그 어떤 여자도 그의 키스를 피해갈 수 없다, 라는 걸 감안한다 하더라도 여기서는 기껏해야 정상참작 정도.
결국 오늘 그들의 키스는 두 사람 모두 피의자인 동시에 피해자였다.
그렇게 노란 달빛 아래, 그와의 키스는 그 어떤 순간보다도 짜릿하고 섹시했다.
그녀가 매달리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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