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설레게하는 그대-12화 (12/94)

12. 내가 바로 로열패밀리

2018.01.14.

H호텔에 위치한 라운지 바.

그곳에선 일 년에 한번 있는 S대 동문들의 모임이 한창이었다.

현직 법관부터 검사, 변호사까지 날고 긴다는 인물들이 다 모인 자리다.

S대 동문이라고 해도 다 올 수 있는 건 아니고 선택된 자만이 초대장을 들고 올 수 있는 사교 모임이었다.

빛나도 이 자리에 나온 지 겨우 2년차밖에 되지 않을 만큼 쟁쟁한 자리였다.

또한 그만큼 살벌함과 경쟁이 난무한 자리기도 하고.

“야, 빛나 쟨 여전히 예쁘네. 방부제 먹고 사나? 어떻게 나이도 안 먹어?”

“방부제는 개뿔! 그거 먹으면 죽어! 필러나 보톡스 맞았겠지.”

여우들의 질투 어린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맴돌았다.

그럼에도 이 지긋지긋한 자리에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빽이 없으면 인맥이라도 있어야 하는 잔인한 현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자리가 영 참고 견디기 힘든 것만은 아니었다.

“조현성이 아직도 너한테 미련 못 버렸니? 왜 저렇게 눈이 쫙 찢어져서 널 쳐다본대?”

빛나의 어깨 너머로 조현성을 포착한 연정이 날을 세우며 중얼 거렸다.

빛나와는 세 살 터울로 그나마 이 지독한 장소에서 가장 사람 냄새가 나는 선배였다.

그 존재 하나만으로도 이 자리는 충분히 견딜만한 가치가 있을 만큼 빛나에겐 롤 모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꼴에 이쁜 건 알아가지고. 근데 조현성이 보니까 갑자기 걔 생각난다. 강아지처럼 졸졸 쫓아다니던…… 왜, 그 긴 생머리에 얼굴 뽀얀 사학과 퀸카 하나 있었잖아. 이름이 뭐였더라…….”

연정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묻자 빛나는 기분 좋게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복실이요?”

“아, 그래 복실이! 아휴, 너네 둘이 지나가면 남학생들이 숨도 제대로 못 쉬었어. C-sisters 지나간다고 난리 났었다고. 어쩜 그렇게 인물들이 훤칠한지, 정말. 근데…… 갑자기 궁금하네. 걘 요즘 뭐한다니?”

“유학 갔어요. 프랑스로.”

“그래?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괜히 그립네. 너한테 찝쩍댄다고 조현성이한테 니킥을 날리는데, 아오- 네가 봤어야 돼. 내 속이 어찌나 후련하던지. 그 다음부턴 졸업할 때까지 조현성이 네 눈도 못 마주치고 다녔잖아.”

“맞아요. 그랬어요. 후후.”

한때 정말 친했던 학교 후배 생각에 빛나의 입가엔 웃음이 맴돌았다.

이름 하여, 강복실.

같은 학과 출신은 아니었지만 자매처럼 붙어 다녔던 대학 후배이자 동생이었다.

“불안한데. 널 보는 저 녀석 눈빛 정말 기분 나빠.”

연정의 중얼거림에 빛나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현성과 그의 친구들이 빛나는 음흉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빛나는 그 시선을 무시한 채 고개를 돌려 연정에게 건배를 제안했다.

“무시해요, 선배. 대응할 가치가 없는 인간들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 건배.”

하지만 빛나는 몰랐다.

그녀가 무심코 돌린 시선 한번이 현성의 지랄 맞은 자존심을 묘하게 자극하고 있음을.

***

“유빛나, 여전히 도도하네.”

그들에게 시선 한번 준 후 바로 돌려버리는 그 모습을 보며 현성의 곁에 있던 선배 하나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진짜, 쟨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진게 없냐. 진짜 탐난다.”

그러나 현성은 그런 선배의 말을 들으며 와인 잔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저렇게 무시하면 무시할수록 그의 승부욕만 부추긴다는 사실을, 그녀는 정녕 모르는 것일까.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현성은 코웃음을 치며 비꼬듯 중얼거렸다.

“그래봐야, 빽도 뭣도 없는 유빛나지. 이 바닥 몰라요? 실력만 가지곤 절대 기어오를 수 없는 거.”

“하긴.”

“선배, 우리 룸에 들어가서 이야기 합시다. 여기 VIP룸도 있다며?”

“아니. 오늘은 안 된대.”

“예약 있어서?”

“그것도 아니고, 그냥 거긴 누가 올지 모른다고 비워둔대.”

“이건 또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야? 야, 우리가 VIP가 아니면 누가 VIP야?”

현성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VIP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VIP룸으로 통하는 복도가 텅 비어 있다.

그곳은 마치 그들이 들어설 수 없는 성역처럼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는데, 누군가 올 것을 대비해 웨이터가 두 명이나 상주해 있었다.

현성은 그 모습에 더 울화통이 터졌다.

“어차피 빈 룸 아냐? 야, 책임자 불러와서 당장 저 룸 오픈하라고 해.”

현성은 복도를 지키고 있는 웨이터에게 이를 악 물며 이야기 했다.

그렇지 않아도 빛나에게 상한 자존심인데 여기에서까지 찬밥 대접 받을 수 없다는 오기에서다.

“여긴,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이터가 딱딱하게 잘라버리자 현성은 열이 받았다.

“야!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이 자식이 진짜…….”

“네가 누군진 모르겠고, 길이나 비켜.”

“이 자식이 진짜!”

“야, 야…… 현성아. 거기 아니고, 뒤…….”

그의 선배가 웨이터에게 눈을 부라리는 현성에게 강하게 눈짓을 했다.

그 목소리에 현성이 뒤를 돌아보자 고급스러운 슈트의 딱 벌어진 어깨가 시야를 가려왔다.

뭐 하는 자식인지, 키 한번 더럽게 크다.

그렇다고 질쏘냐! 현성은 잔뜩 성이 난 눈을 천천히 들어 상대방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시선이 그 잘생긴 얼굴에 도달했을 때 그는 입을 떡 벌렸다.

할 말을 잃은 현성 대신 곁에 있는 선배가 남자의 정체를 친히 알려주었다.

“김…… 우빈이다.”

한성그룹의 유일무이한 후계자 김우빈.

젊은 경영인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그는 외모만큼이나 화려한 이력을 가진 터라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이 H호텔의 실제 소유주이기도 하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소름 돋는데 우빈의 등 뒤에서 누군가 또 나타났다.

그야말로 투명인간이라도 되고 싶은 심정이었다.

“뭐야, 왜 안 들어가?”

“아, 형님. 누가 제 앞길을 딱 막고 있어서요. 친절하게 길 좀 비켜달라 이야기하던 참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우빈의 다갈색 눈동자가 다시 현성에게 꽂혔다.

하지만 현성의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들었던 건 차갑디차가운 다갈색 눈동자가 아니다.

오히려 한없이 부드러워 보이는 쌍꺼풀 없는 눈매가 현성의 피를 마르고 닳도록 만들었다.

일명 물안개!

한번 ‘물’면 절대 ‘안’ 놓는 미친‘개’!

같은 법조계 인물들도 이왕이면 피해간다는 위승준 검사였다!

“친절하게 이야기한 거 맞아? 비켜봐. 내가 할게.”

우빈의 까칠함을 탓하며 듯 승준이 현성의 앞에 섰다.

그리고 그런 승준이 입을 열려던 찰나, 현성은 벽 쪽으로 최대한 몸을 밀착 시켜 VIP실로 진입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고 만다.

살려고 하는 본능이었다.

물안개한테 잘못 보여 좋을 게 하나 없으니.

재주가 있다면 이왕 투명 인간이라도 되고 싶었으나, 그 길을 지나가며 현성을 위아래로 훑고 지나가는 그 부드러운 눈동자를 보니 그마저도 이룰 수 없는 소원인가 보다.

“형님, 뭐라 하셨습니까? 전 못 들은 것 같아서…….”

심장이 오그라든 현성의 귓전에 우빈의 호기심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승준이 당연하다는 듯 입을 연다.

“응. 나랑 아이 컨택 했어.”

“아…….”

100배 이해 간다는 듯한 저 깨달음의 감탄사.

그들이 VIP룸으로 사라진 후에도 현성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현성은 간신히 선배와 친구들의 부축을 받아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김우빈이랑 물안개가 VIP룸 주인공이었네. 암, 그렇지. 그렇고말고. 저 정도는 되어야 굳이 예약을 안 해도 1년 365일 비워놓지.”

십년감수했다는 듯 돌아서는 그들의 뒷모습이 유난히 초라해 보였다.

그런데 그 모습을 찌푸린 모습으로 지켜보는 이가 하나 있었으니.

“저거…… 조현성 아냐?”

뒤늦게 들어온 승현이었다.

왜 주변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걷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조현성이었다.

“아는 사람이야?”

그때 억양 없는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울려왔다.

화들짝 놀라 돌아본 곳에는 벌써 주차를 귀신같이 하고 나타난 승주가 있었다.

“아오, 놀래라. 형은 인기척 좀 내고 다녀!”

“죄 지은 거 있냐. 왜 놀라고 그래.”

“아, 형 보고 안 놀래는 사람이 더 이상한 거지! 알면서.”

“그래서, 아는 사람이냐고.”

승주가 턱으로 현성의 뒷모습을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하지만 차마 현성을 알고 있단 말은 못 하겠다.

되도록 승주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자는 생각에 승현은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아니, 당근 모르지. 내가 저 시골 쥐처럼 생긴 녀석을 어떻게 아누? 그냥 엉거주춤 부축 받으면서 걷는 폼이 치질인 것 같아서. 안타까워서. 내가 또 불우한 이웃을 보면 그냥 못 지나치잖아.”

“수상한데.”

“아, 수상할 게 뭐 있어? 근데 오늘 날 잘못 잡았나? 밖에서 파티 하는데, 시끄럽겠다.”

승현은 억지로 승주를 룸으로 이끌며 화제를 돌렸다.

녀석이 10년 전 자신을 상대로 ‘사생아’라는 농담을 한 놈이라는 걸 안다면, 오랜만에 모인 이 가족모임은 별안간 누군가의 장례식장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

오랜만에 모인 삼형제를 비롯한 우빈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입을 열었다.

게다가 승현이 독립한 후로 처음 모인 자리라 단연 화제는 그에게로 돌아갔다.

“독립하니까 좋은가 봐?”

“좋긴, 후회하는 중이야. 좀 멀더라도 그냥 본가에서 다닐걸.”

“왜?”

승준의 물음에 승현은 기다렸다는 듯 투정을 부렸다.

“아, 뭘 물어. 그냥 혼자 밥 먹어야 하고, 혼자 청소해야 하고, 혼자 뭐든지 다 해야 하니까. 심지어는 강제 묵언수행 중이라고, 내가. 돌기 일보 직전이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승현의 입꼬리엔 웃음이 걸려있다.

-이건 너랑 내 사이 비밀이야.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 알았어?

빛나가 생각나서다. 며칠 전 보았던 그녀의 모습이 자꾸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승현의 웃음기를 알아차린 승준도 덩달아 웃음을 보였다. 눈꼬리가 살짝 쳐지는 그 웃음에 승현을 향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이제 곧 바빠질 거 아냐. 그러니까 그 혼자 있는 시간 마음껏 즐겨. 곧 있으면 혼자 있고 싶어도 그렇게 안 될 테니.”

“그래. 정 외로우면 우리 예준이 데리고 살래?”

우빈의 말에 승현이 버럭하며 대꾸했다.

“아, 진짜. 예준이가 내 자식이야? 걔가 지가 하고 싶어서 고추 달고 태어났어?”

“웬 착각? 우리 귀한 아들을 누가 영원히 데리고 살래? 난 그냥, 예준이가 있으니까 내 계획에 차질이 생겨서 그러는 거지. 애가 밤에 너무 울어.”

우빈이 한층 기가 죽은 표정으로 이야기하다가 뭔가 억울했던지 승주를 바라보았다.

무표정으로 술 한 잔을 기울이는 그 모습을 보자 울화가 치민다.

“야! 너는 왜 자꾸 승희한테 쓸데없는 격투기를 가르쳐서는!”

“정신 수양에 좋은 거야. 승희가 주의력이 산만해서 뭔가 하나에 집중을 못한다고.”

“그래도 그런 거 말고, 왜 곱고 예쁜 운동 많잖아. 요가라든지, 필라테스라든지…….”

그러자 승주의 진한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가며 반문했다.

“너 지금 나보고 그 ‘곱고 예쁜 운동’을 승희랑 같이하라는 이야기냐?”

“푸하하하-하 말도 안 돼!”

결국 승현의 웃음보가 터졌다.

물 한 잔을 마시다 승준도 픽, 새는 웃음소리를 낸다.

이 얼마나 웃긴 상상인가. 위승주가 필라테스를 하다니!

“아니, 내 말은 꼭 같이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하라고 등만 떠밀어줄 수도…….”

“말했잖아. 승희, 주의력 결핍 장애. 너무 산만해서 누가 하나 밀착 마크해서 옆에서 가르쳐주지 않으면 절대 못 해. 그리고 그 앨 통제할 만한 사람도 드물고.”

“야, 그럼 난 딸…… 언제 낳니?”

“그거야 네 능력이지. 왜 나한테 물어.”

냉정하다 못해 쌀쌀 맞은 승주의 한마디에 우빈은 술 한 잔을 원샷했다.

“아, 몰라! 맨 정신에 안 되면…… 술 먹고 사고라도 칠란다!”

그때 누군가의 핸드폰이 울렸다.

승준의 핸드폰이었다.

그가 조용히 전화를 받자 그제야 생각난 듯 승현도 제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한다.

“뭐, 찾아?”

“내 핸드폰.”

“없어? 차에다 둔 거 아냐?”

우빈의 물음에 승현이 일어났다.

“그런가 보네. 잠깐 차에 좀 갔다 올게.”

“승현아, 가서 내 것도 좀 가져와.”

돌아서는 그에게 승주가 자신의 차 키를 내주며 말했다. 그 모습에 우빈이 기분 좋게 웃으며 말한다.

“하는 짓이나, 얼굴이나, 따지고 보면 둘이 진짜 반대인데…… 이럴 때 보면 형제가 맞단 말이지. 후후.”

“웃지 말고, 네 것도 한번 확인해보시지. 저번에 너도 차에 핸드폰 두고 내려서 전화 안 받는다고 승희 난리 났잖아.”

“헐, 날 뭘로 보고. 난 요렇게 가지고 왔지…… 롱…… 음?”

의기양양하게 슈트 주머니를 뒤지던 우빈의 얼굴색이 변했다.

“얼레?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좀 전에 통화하고…… 차에 그대로 두고 내렸구나…….”

그제야 깨달은 듯 우빈이 말꼬리를 흐리자 승현이 딱하다는 듯 혀를 차며 손을 내민다.

“내놔라, 차 키.”

어쩔 수 없이 승현에게 차 키를 내어주며 우빈이 투덜댔다.

“내가 진짜 예전엔 안 그랬는데 말이지. 이 집에 장가온 다음부터 이상해졌어.”

“잘 생각해봐. 진짜 예전엔 안 그랬는지.”

승주의 목소리를 들으며 승현은 룸을 나왔다.

방음이 되어 우빈의 다음 목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분명 절대 아니라고 우기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나, 이제 김우빈도 위씨 집안의 패밀리인 것을.

같이 살면 닮아간다는데, 하물며 패밀리가 되었으니 서로 안 닮을 수가 있나.

승현의 입가에 기분 좋은 웃음이 감돌았다.

그동안 빛나로 인해 울적했던 마음이 한 번에 가실 만큼.

그렇게 복도를 지나 입구로 다가가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발길을 붙들었다.

“야, 야. 우리 아버지가 지금 대검찰청 차장 검사로 계시지 않냐? 정권 바뀌면 검찰 청장이 되실지도 몰라.”

“역시…… 달라도 뭐가 다르구나.”

“당연하지, 우린 로열패밀리니까.”

아, 그냥 지나가면 되는데 예나 지금이나 저 목소리는 여전히 거슬렸다.

“근데 쟨 진짜 보면 볼수록 예쁘단 말이지. 튕기니까 매력도 있고.”

“야, 이 자식아. 넌 결혼했잖아.”

“뭐 어때? 세컨드로 끼고 있으면 되지. 지가 언제 나 같은 로열패밀리를 만나?”

“하긴, 이번에 유빛나 파혼 당했다더라. 신랑 직업이 뭐랬더라? 의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암튼, 파혼하고 몇 달 만에 집안 좋은 다른 여자 만나서 결혼했대.”

뭐? 유빛나라고?

익숙한 그 이름에 승현의 시선이 절로 돌아갔다.

그러자 현성의 가느다란 눈이 시종일관 꽂혀 있는 누군가를 찾아볼 수 있었다.

유빛나.

갑자기 잠잠하던 그의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나대기 시작했다.

쿵쿵쿵.

마치 심장이 뇌에 있는 것처럼 쿵쾅거리는 그 소리에 두통이 밀려올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현성의 목소리는 왜 이렇게 그의 신경을 긁으며 귓속에 찰지게 들어와 박히는지.

“그래? 이거 점점 재미있어지는데?”

“재밌긴. 유변이 저렇게 웃고 있어도 웃는 게 아닐 거야. 저 자존심에 얼마나 상처가 컸겠냐?”

“그러니까 더 재미있어지는 거지. 사랑에 받은 상처는 사랑으로 치유해야 하는 법이야.”

“뭐라고?”

“내가 오늘 유빛나, 한번 쓰러트린다. 잘 봐라, 알았냐?”

현성이 일어나 빛나에게로 향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입구 손잡이를 잡고 있던 승현의 손아귀에서도 스르르 힘이 빠져 나갔다.

***

“어머, 쟤 지금 여기로 온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연정이 기겁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빛나가 고개를 돌렸을 땐 현성이 그의 친구들과 함께 그녀의 눈앞에 서 있었다.

도대체 이번엔 무슨 말을 하려고.

심기 불편하다는 듯 그녀의 눈썹이 대번에 치켜 올라갔다.

“오랜만이에요, 유 선배. 저 검사 된 거 아시나요?”

“아니, 몰랐어. 내가 가치 없는 일엔 관심이 없어서 말이야.”

그 대답에 현성의 가느다란 눈이 더욱 얇아졌다. 심기가 불편하단 증거다.

하지만 현성은 여기서 물러 설 수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 많은 눈이 지켜보고 있었던 탓이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현성은 지지 않으려는 듯 이를 악 물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굴복시키고 싶었기에.

“헐, 유빛나. 여전히 당당하고 도도하네. 그런데…… 듣자하니 파혼 당했다면서?”

비아냥거리는 듯한 물음에 연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빛나는 재빨리 연정을 가로막으며 말렸다.

“아뇨, 선배. 전 괜찮아요.”

빛나는 여전히 바에 앉아 있었다. 흥분한 연정과는 달리 무척이나 차분한 눈빛으로.

늘 빛나는 저런 식이었다.

현성이 어떤 도발을 하건, 저렇듯 차분하게 대응한다.

마치 상대할 가치조차도 없는 놈이라는 듯.

하지만 그 동요 없는 눈빛이 그의 자존심을 더 상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그녀는 왜 모를까.

마치 올라갈 수 없는 산처럼, 그녀는 예나 지금이나 너무 도도하고 예뻤다.

그리고 그런 그녀 앞에선 현성이 가진 최고의 조건도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그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뭐, 별거 없는 놈이라던데. 천하의 유빛나가 그런 놈한테 파혼이나 당하다니. 이게 말이 돼? 안 그래?”

현성은 다른 사람들 들으란 듯 언성을 높였다. 그러더니 얄팍한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웃었다.

“그러게 나한테 오지 그랬어. 나라면, 어떻게든 널 옆에 두는 방법을 생각했을 텐데. 뭐, 지금도 늦진 않았어. 내 두 번째 자리는 언제든지 비어 있거든.”

그가 쫙 찢어진 눈으로 탐욕스럽게 빛나의 몸을 훑어 내렸다.

그리고 그의 발언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현성은 이미 결혼을 한 유부남이었기 때문이다.

빛나의 자존감을 깎아 내리기 위한 현성의 눈물겨운 시도였다.

그러나 유빛나가 누군가.

이런 버러지 같은 놈이랑은 출신을 떠나 애초부터 섞일 수가 없는 체질이었다.

현성이 도발할수록 그녀는 더욱 차분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그 농담에 웃다 잦아들 때 즈음, 그녀는 서서히 바에서 몸을 일으켜 현성을 마주했다.

그러더니 그의 어깨를 가엽다는 듯 토닥이며 한마디 했다.

“애 쓴다, 정말. 근데 아쉬워 어쩌니? 네 말이 진담이든 농담이든 나도 동조를 해주고 싶지만, 아직은 내가 네 두 번째 자리에 들어앉을 만큼 급하지가 않아서 말이야.”

순간 웃고 있던 현성의 눈매가 싸늘하게 굳었다.

누가 봐도 빛나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은 상황이었다.

그렇게 현성의 얼굴이 분노로 물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빛나는 바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조현성이 아니다.

질 수 없었던 그는 무모한 마지막 발악을 시도했다.

“야! 그래봐야 천한 피 주제에!”

이쯤 되자 빛나도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현성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순식간에 날이 섰다.

그러나 미처 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만다.

“넌…… 그러니까 너는, 으악! 이게 뭐야!”

말을 하던 현성의 머리 위로 붉은 칵테일이 시원하게 쏟아져 내린 것이다.

이 경악할만한 상황에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런데, 숨 막히는 듯 한 정적을 가르며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가 소름끼치도록 살벌한 경고를 날렸다.

“나한테 당한걸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 네 이론대로 따지자면…….”

“…….”

“내가 바로 진짜…… 로열패밀리니까.”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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