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개빛나
2018.01.10.
사람을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에 피부가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분명 옷을 입고 있는데도 벌거벗겨진 기분이다.
빛나는 감히 고개를 들 수가 없어 초조한 듯 팔을 쓸어내리며 자신의 발끝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 할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술을 마시기 전 어젯밤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악마……를 굳이 멀리에서 찾을 필요가 없었다.
“내가 살다 살다 진짜 별꼴을 다 본다.”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까.
“맘 같아선 확 내쫓고 싶었는데 밖에서 자면 입 돌아갈까 봐 기껏 재워줬더니…… 뭐? 신고를 하시겠다? 무슨 죄목으로?”
승현의 물음에 그녀는 자신의 입술을 씹어 먹어버리고 싶은 충동과 맞서 싸워야 했다.
어쩌자고 그런 말을 했을까.
그러게, 무슨 죄목으로 그를 신고한단 말인가.
불법 가택 침입을 한 건 다름 아닌 그녀인데 말이다.
“내가 사람 때리는 주사도 봤고 화장실에서 자는 주사 등등 수많은 진상 짓을 봤지만, 태어나 너같이 기가 막힌 주사는 정말 처음이다.”
어젯밤이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동안 그녀의 화려했던 주사가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 많은 것들 중, 어제와 같은 경우는 없었다.
맹세코, 이러한 경우는 그녀도 어제가 처음이었단 말이다!
“세상에…… 불법침입이라니, 우리 집이었길래 망정이지 남의 집이었으면 너 바로 철창감이야!”
아, 정말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라.
유빛나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그녀는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속을 달래며 입술을 깨물었다.
제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냥 어제 술 마신 이후로 지금까지 그 몇 시간이 머릿속에서 통째로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도대체 그녀는 어제,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일까.
또한, 승현의 집은 어떻게 들어온 것일까.
온통 의문투성이였다.
하지만 차마 승현에게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겁 없는 질문을 던지기엔 상의를 탈의한 그의 몸이 너무 위험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평소와 달리 살짝 흩어진 베이비 펌 아래로 드러난 성난 눈동자가 너무 섹시해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잠을 자고 나면 저 녀석은 저렇게 섹시해지나 보다.
또한, 딱 벌어진 어깨와 잘빠진 가슴 근육도 그러했다.
한마디로 빛나는 지금 미치도록 섹시한 이 악마 때문에 시선을 둘 곳이 없어 심적으로 더 불안한 상태다.
그래서 눈 둘 곳이라도 좀 찾아보고자 붙어버린 입술을 조심히 떼어보았다.
“오…… 옷 좀 입고…… 이야기하면 안 될까?”
그러나 안 하느니만 못한 요구였다.
“왜! 남의 집에 무단 침입해 훌렁훌렁 옷 벗는 여자도 있는데, 내가 왜! 여긴 우리 집이야! 내 집에서 내가 내 맘대로 옷도 못 벗어?”
승현이 핏대를 세우며 이야기했다. 억울해도 보통 억울한 게 아닌 모양이다.
그의 목소리에 빛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승현의 입을 통해 확인 사살을 하고 나니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다.
하필이면…… 정말 하필이면 왜 이 녀석이란 말인가.
아, 유빛나. 그냥 죽자. 여기서 확 혀 깨물고 죽어버리자.
“야, 나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하나만 물어보자.”
“…….”
“원래 술 마시면, 집도 못 찾고 네 발로 기고 그러냐?”
“아냐! 나 다른 건 몰라도 집은 귀신처럼 잘 찾아! 귀소 본능 하나는 아주 죽인다고! 그래서 지금 나도 몹시 당혹스러워. 내가 왜…… 이 집으로 들어왔는지 모르겠거든.”
말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갔다.
그런데 승현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그의 눈을 제대로 마주하지도 못하고 간지러운 목소리로 들릴 듯 말듯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이 왜 이렇게 귀여운 건지.
웃으면 안 되는데.
어젯밤 그가 고생한 만큼 그녀에게 갚아주리라 이를 갈았는데.
젠장, 늘 완벽하던 그녀가 그의 앞에서 살짝 흩어진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그마저도 못 하겠다.
“진짜야. 나도 태어나 단 한 번도 남의 집에 불법 침입하는 주사는 부린 적이 없어. 이번이 처음이라고.”
“좋아. 우리 집에 들어온 건 처음이라고 치자. 그럼, 멀쩡한 두 다리 놔두고 왜 네 발로 기는 건데? 우린, 인류 역사상 가장 진화한 동물이야. 직립 보행이 원칙이라고! 네가 두 발로만 들어왔어도 내가 어젯밤 그렇게 놀라지는 않잖아! 머리까지 산발해서는, 얼마나 식겁했는지 알아?”
“그래도 이번엔…… 벽은 안 탔네.”
중얼거리듯 내뱉은 그녀의 말에 승현이 기겁하며 반문했다.
“너…… 벽도 타니?”
“아…… 니-이?”
아니라고 잡아떼어 보았지만 그 미묘한 망설임의 기운을 알아차린 승현에겐 씨알도 안 먹히는 거짓말이었다.
“네가 무슨 스파이더맨이냐? 벽을 타게?”
테이블을 탕, 내리치며 언성을 높이는 승현 때문에 빛나는 머리가 울려왔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제야 숙취가 물밀듯 밀려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게, 내 친구가 알려준 방법인데. 술에 취해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을 때 넘어질 수 있잖아. 그럴 때 벽에 의지에서 걸으면 안 넘어지고 직빵이야!”
그 말을 듣고서야 승현은 벽을 탄다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가 아는 ‘누군가’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그가 아는 그 ‘누군가’도 그런 식으로 벽을 탔더랬지.
공유할 게 없어서 술 마시고 부리는 주사까지 다정하게 나눠 가지다니, 아이고 머리야.
“어쨌든, 미안해. 진짜 미안해.”
정말 두 손이 절로 공손하게 모아지는 상황이었다.
“너, 진짜…… 창피한 줄 알아. 어디서 여자가 옷을 그렇게 훌렁훌렁…….”
다시 한 번 생각해도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그가 조금만 마음을 달리 먹었더라면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는 밤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새로운 역사가 아닌 긴 밤을 택했다.
차가운 샤워로 열을 식히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버티지 못했을 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무 일 없었잖아. 그치?”
정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토록 뻔뻔했다.
“어쨌든 미안하고, 고마워. 내가 태어나서 이런 말을 너한테 하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그러니까.”
게다가 사과도 고마움의 표현도 어찌나 이리 당당하신지,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모르겠다.
“내가 출근을 해야 해서. 나, 그만 가봐도 돼?”
승현이 지금 어떤 상황이건, 빛나는 어서 이곳을 탈출하고 싶었다.
지독한 숙취 때문에 지금 당장 약을 먹지 않으면 속이 폭발할 것 같아서다.
“진짜, 너…….”
“그래서 진심으로 미안하다잖아. 정말, 진심이라고.”
이게 그깟 사과로 될 일인가? 이미 그의 몸을 이토록 안달나게 만들어 놓고?
숙취에 시달리는 건 그녀인데 승현도 머리가 아파왔다.
그녀의 벗은 몸이 자꾸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놓아 뇌가 울릴 지경이다.
그래서 결국 승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당장 나가라는 듯 손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빛나가 그의 집을 살금살금 빠져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 문득 승현은 정말 궁금했던 사실 하나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야! 하나만 더 묻자.”
“뭐?”
“너, 우리 집 문…… 어떻게 열었어?”
“문? 글쎄…….”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뭔가 번뜩 생각이 난 듯 되물었다.
“설마! 너네 집 비밀 번호도 0000이니?”
아이고, 머리야! 결국 승현은 그녀를 향해 소리를 빽 질러야 했다.
“당장 나가-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후에도 승현은 한참 동안이나 이를 갈아야 했다.
무슨 여자가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나 싶다.
“그래. 그렇지. 나 혼자 몸 달았지. 나 혼자 아주…….”
지독했다. 감기 몸살을 앓는 사람처럼 몸에 열이 들끓었다.
“내가…… 제 몸을 봤는데도 전혀 신경을 안 써? 난 남자도 아니라는 거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뜬눈으로 지새운 지난밤이 후회가 될 만큼.
“당장 비밀번호 바꿀 거야!”
다시는 이런 몸살 앓지 않도록 아예 비밀번호를 바꿔버려야겠다.
승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에 놓아둔 도어록 설명서를 찾았다.
그러나 그는 마음과는 달리 쉽게 그 비밀번호를 바꾸지 못했다.
이 여자, 제 주사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을 보니 술 마시는 일이 하루 이틀도 아닌 것 같고 만약 또 이런 경우가 발생하면 어디서 자나.
그가 비밀번호를 바꿔버리면, 정말 밖에서 자다 입이 돌아가는 건 아닌가 싶다.
“아, 진짜. 진짜 웬수가 따로 없네.”
결국 승현은 도어록 비밀 번호를 바꾸지 못했다.
그러곤 그녀가 전염시킨 열병으로 인해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돌아섰다.
긴 밤에 이어 긴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이다.
***
승현의 집에서 도망치듯 나온 빛나는 울컥하는 속을 틀어쥐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다시 한 번 넋을 놓았다.
“나…… 완전 미쳤나 봐.”
어쩌자고 제 집이 아닌 옆집으로 들어갔단 말인가.
그리고 그의 집 비밀번호는 왜 하필 0000이란 말인가!
정말 빌어먹을 우연이 아닌가 싶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에 빛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흐느적거리는 걸음걸이로 샤워를 하기 위해 침실로 들어왔다.
그렇게 화장대에 백을 놓고 돌아서는 순간,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야 했다.
아무도 없어야 할 그녀의 침대 위에서 꾸물거리는 저 생명체!
청명한 아침부터 귀신일 리는 없고,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음…… 허. 속 쓰려라.”
하얀 이불 속에서 불쑥 튀어 나온 건 다름 아닌 이정이었다.
이정은 아직 덜 떠진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식겁한 표정의 빛나를 보며 한마디 했다.
“응? 벌써 출근 준비한 거야? 지금 몇 신데?”
그제야 빛나는 자신이 어제 출근한 그 옷차림 그대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블라우스 한쪽 자락이 삐쭉 튀어 나와 있고 머리도 헝클어져 있었지만 반쯤 감긴 이정의 눈으로 봤을 땐 출근 준비를 이제 막 끝낸 사람으로 보이리라.
하지만 빛나는 굳이 이정의 오해를 고쳐주지 않았다.
“아, 응…… 오늘은 좀 일찍 가려고.”
“응? 그럼 나도 빨리 준비할게. 좀만 기다려.”
이정은 하품을 하며 침대에서 기어 나와 욕실로 가기 위해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문득 발길을 멈추더니 여전히 덜 떠진 눈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본다.
뭐지? 눈치챘나?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머릿속이 수많은 생각들로 뒤범벅이 되었지만 쓰린 속 때문에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너…….”
어쩌나. 이정이 사회부 기자 그 특유의 끈질긴 근성을 발휘하면 정말 큰일인데.
“에헷! 너 화장 번졌다?”
다행히도 이정 또한 그녀만큼이나 과음을 한 나머지 제대로 사고를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십년감수했단 생각에 빛나는 재빨리 얼굴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랬어? 진짜 술이 덜 깼는지 손이 아직도 떨리네.”
곧 끊어질 것 같은 동아줄에 매달린 것 마냥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절대, 절대, 그녀의 외박 사실을 이정이 알아서는 안 된다.
더욱이 승현의 집에서 자고 왔단 사실을 알면 그야말로 시한폭탄이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자. 지금 이정의 상태로 보건데,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아, 진짜…… 술 끊어야겠어. 에라, 내가 술을 또 마시면 그때부턴 유빛나가 아니라 개빛나다, 개빛나!”
“쳇, 개가 똥을 끊는다 해라.”
이정이 코웃음을 치며 욕실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빛나는 빛의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실에 있는 욕실에서 번개처럼 씻고 나와 다시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렇게 술에 찌든 상태로 출근을 할 수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시간이 없는 관계로 머리 말리는 건 패스!
이정이 대충 씻고 나와 준비를 마쳤을 땐 조금 전과는 달리 말끔하고 뽀얀 빛나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어라? 다시 씻었어?”
“응. 화장이 번졌다고 해서 씻는 김에 말끔히 다시.”
“에라, 깔끔도 그 정도면 정신병이다. 진짜.”
“나, 오늘 운전을 할 수 없는 상태라 네 차 타야겠어.”
“그럼 그러던가.”
이정과 함께 현관을 나섰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트레이닝복 차림의 승현과 딱 마주쳤다.
“어머, 승현 씨! 아침 운동 가시나 보다.”
“아. 네.”
승현은 이정 모르게 빛나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쏘며 대답했다.
그 눈빛이 평소와 달리 어찌나 칼 같은지 막혔던 모공이 뻥 뚫리는 듯한 기분이다.
엘리베이터가 오자 세 사람이 올라탔다.
“지하 1층?”
“아뇨. 저희 1층으로 가요. 빛나가 제 차를 탈 예정이라.”
“아, 네. 근데 두 분이 같이 술을 드셨나 봐요?”
“어? 저희 술 마신 거 어떻게 하셨어요?”
“그야…….”
“어머-엇! 이정아, 우리 늦었다!”
승현의 입에서 어젯밤 그녀의 만행이 흘러나올까 싶어 빛나가 기겁을 하며 대화를 중단시켰지만 이정이 그 맥을 이었다.
“안 늦었어, 시간 충분해. 근데…… 술은 우리가 마셨는데 승현 씨가 숙취에 시달리는 것 같네요. 얼굴이 까칠하네. 무슨 일 있었어요?”
“예, 있었죠. 너무도 많은 일이.”
승현이 빛나를 흘깃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이제야 그녀의 의중을 파악한 것이다.
곧 죽어도 친구에게 어제 일을 들키긴 싫다, 이거지?
어디 한번 놀려줄까?
드디어 어젯밤의 복수를 할 수 있겠다 싶은 승현은 그 시한폭탄 같은 입술을 느릿하게 열었다.
“어젯밤, 도둑고양이가 침입을 했지 뭐예요? 밤에 잠을 자다 어찌나 깜짝 놀랐는지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심장이 팔딱거려요.”
“어머, 세상에. 요즘 도둑고양이는 7층까지 마실 나가나 봐요? 재주도 좋아라.”
“그러게요. 거기다 쫓아도 안 나가더니 제 침대를 떡 차지하는 바람에 저는 밤새 한숨도 못 잤어요.”
“그냥 쫓아내버리지 그러셨어요!”
“그러고 싶었는데, 제가 동물 애호라가.”
헐! 헐!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감히 그녀를 도둑고양이에 비유하는 그의 말투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자신을 동물 애호가라 칭송하는 그의 오만도 불쾌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기가 막혔던 건, 그 와중에도 승현을 찬양하는 반짝반짝 빛나는 이정의 눈빛이다.
빛나의 성난 눈동자가 승현에게로 향했다.
이제, 약점 하나 잡았다 이거지?
그녀의 눈빛을 읽어낸 승현이 이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듯 더 환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본론을 꺼내들었다.
“근데요, 심지어 그 고양이가 옷을 벗고 자더라구요. 분명 암컷인데 내 앞에서 훌렁훌렁…….”
“으잉? 사람도 아닌 고양이가 옷을 벗…….”
“아이고, 속이야! 속 쓰려 죽겠네!”
결국 빛나는 멀쩡한 배를 움켜쥐며 어설픈 연기로 그들의 대화를 중단시켜야 했다.
왜냐고?
이정이 저렇듯 나사 하나 빠진 인간처럼 보여도 엄연히 언론고시에 합격한 당당한 언론인이다.
머리라면 빛나 못지않게 좋은 그녀가 승현의 비유법을 눈치채기까지 도대체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
빛나는 그러한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뭐야, 갑자기 멀쩡하던 속이 갑자기 왜…….”
“빨리 내려. 편의점 가서 약이라도 사 먹게.”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빛나는 이정을 끌고 내렸다.
차마 승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녀를 잡아 끌어낸 후 빛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너 먼저 차에 시동 걸어놓고 있어. 나 금방 갈게.”
“왜? 속 아프다며.”
“응. 아픈데 내가 쟤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
이정은 별꼴을 다 보겠다는 듯 순순히 차로 갔다.
이정이 돌아서서 차에 타는 모습을 보고서야 빛나는 삐딱하게 서서 트레이닝 주머니에 손을 꽂고 오만하게 웃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너 정말 이러기야?”
“내가 왜?”
“이건 너랑 내 사이 비밀이야.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 알았어?”
어지간히도 열 받은 모양이다. 쾅쾅 내딛는 걸음걸이만으로도 그녀의 분노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승현은 그렇게 돌아선 빛나의 모습에 왜 이렇게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주책없이 뛰는 이 심장은 또 뭐란 말인가.
정말 미치겠다. 너무 예뻐서.
***
차에 오른 빛나는 이정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헛기침을 했다.
“출발.”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평소에 상콤이라면 먹던 밥도 패대기치는 애가?”
“그럴 일이 있어. 알잖아. 쟤랑 나랑은 너를 알기 전부터 꼬인 사이라는 거.”
“근데?”
“이젠 풀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서.”
“헐……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
“이미 서쪽에서 떴어! 그러게…… 그러게…… 왜 어제 술 먹고 나 버리고 갔어! 왜에!”
승현과의 상황이 역전된 듯 보이자 갑자기 울분이 터진 빛나가 이정을 보며 소리쳤다.
이유인 즉, 이정은 멀쩡하게 그녀의 집 그녀의 침대에서 자고 있었던 탓이다.
도대체 함께 술을 마시고 들어왔는데 왜 이정은 그녀의 집으로, 그녀는 승현의 집으로 기어 들어갔던 것일까.
답은 하나다.
이정이 그녀를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이런 미친…… 이거, 완전 필름 끊겼구만. 야, 내가 널 버린 게 아니라 네가 날 버린 거야! 술기운에 잠깐 엎드렸다 일어났더니 너 나가고 없더라! 어제 내가 얼마나 혼신의 노력으로 너희 집까지 기어 왔는지 너는 모르지? 배-쉰-자!”
“내…… 내가?”
“그래! 네가! 어떻게 술에 취한 나를 그렇게 버리고 가니? 내가 너네 집 비밀번호 몰랐으면 어쩔 뻔했어, 응? 아무리 날씨가 따뜻하다지만 밖에서 자면 입 돌아간다고!”
“이정아, 그게…….”
이런 말을 들으려고 시도한 대화는 아닌데, 벌집을 쑤셔놓은 격이었다.
이정이 속사포처럼 쏘아대자 진정시킨 속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보나마나 너도 취해서 먼저 잤을 테니 내가 벨을 눌러도 들었을 리는 만무하고. 그나마 내 지랄 맞은 정신력이나 되니까 너네 집까지 무사히 기어 들어갈 수 있었던 거야. 알기나 하간?”
“그게…….”
“근데, 가만있자. 생각해보니…… 너도 어제 침대에 있었니? 기억이…….”
이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애써 기억을 더듬으려 했다.
오 마이 갓! 절대 안 된다!
“그, 그럼! 내가 먼저 집에 들어와 있었지.”
“그치? 내가 너 껴안고 잔 거잖아. 그거, 베개 아니었지?”
“그럼, 내가 어제 너 때문에 숨이 막혀 새벽에 몇 번을 일어났는데!”
강한 정신력으로 울렁이는 속을 누르며 이정에게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지만 이것도 얼마나 갈지 모르겠다.
다행히도 이정은 포기를 한 듯 차에 시동을 걸며 중얼거렸다.
“아니, 아침에 갑자기 네 모습이 생각나서. 어제 입은 그대로였잖아.”
“…….”
“누가 보면 남자랑 외박하고 들어온 줄…….”
하지만 우연치 않게 이정의 추리가 맞아 떨어지자 빛나는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그러자 그동안 울렁거렸던 속이 폭발하고 만다.
“우웩!”
“으악! 이런…… 개빛나!”
정말 지옥 같은 아침, 개빛나가 되지 않겠다 결심한지 불과 1시간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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