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앙큼한 불법 침입자
2018.01.07.
“이게 막…… 불타게 애틋하고 그런 건 아니잖아?”
승현은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 들은 우빈의 말이 자꾸 신경 쓰여서다.
“…… 열 받는다면 또 모를까.”
그랬다. 앙큼한 그녀는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으르렁대며 그의 혈압을 위험 수치까지 올려놓았다.
다만, 그 모습이 지나치게 귀엽고 예뻐 예상보다 그가 잘 참는다는 게 함정이다.
덕분에 지금 이렇게 헷갈리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그건, 아니야.”
결국 사랑이 아니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그렇게 정의를 내려놓고 나니 자꾸 그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마음 편하자고 내린 정의였는데 오히려 유빛나 생각을 하루 종일 한 셈이다.
“에이, 진짜! 딴 걸 해야지.”
승현은 이사 온 이후 머리가 복잡해 까맣게 잊고 있었던 도어록 비밀번호를 세팅하기 위해 설명서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글자 하나하나가 자꾸 날개를 단 듯 날아다니기 시작한다.
“아…… 큰일이다. 왔다, 왔어. 그분이 오셨어.”
강제 묵언 수행의 부작용이 드디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젠장, 말을 할 상대가 필요하다.
친구들을 만나 술 한잔할까도 생각해봤지만 집에서 나가기 싫었다.
그렇다고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들이자니 시끄러운 그 녀석들의 뒤치다꺼리는 더 걱정이었다.
좋다. 그렇다면 차라리 가족을 부르자.
그중에서도 병적으로 깨끗하고 정리 정돈을 잘 하는 인정머리 없는 인간.
승현은 도어록 설명서를 옆으로 던져버리고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억양 없는 목소리가 굉장히 무심하게 들려왔다.
[왜.]
“형, 놀러 올래? 우리 집들이하자.”
[집들이? 둘이?]
“응. 우리 집 한 번도 안아봤잖아?”
[둘이 무슨 재미로. 나중에 다 같이해.]
“그럼 저녁이라도 먹으러 와. 나 혼자 먹기 싫어서 그래.”
[뭐 해줄 건데.]
“음…… 계란 프라이?”
[꺼져.]
전화는 끊겨 있었다. 위승주답다.
“에이, 젠장…… 내가 뭘 바래, 뭘!”
승현은 누군가를 초대해야겠단 생각은 접어버리고 와인 한 잔을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홧김에 원샷을 해버리곤 침대로 들어갔다.
잠자리에 들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쓸데없는 생각에 애꿎은 에너지를 낭비해서 그런지 유독 피곤함이 몰려왔다.
그렇게 그는 잠이 들었다.
4시간 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말이다.
***
잠결에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띠.띠.띠.띡!
꿈인 줄 알았으나 너무나 생생한 소리가 아직 잠에 취한 그의 귓가를 소름 돋게 맴돌았다.
띠.띠.띠.띠.띠.띡!
어라? 이것 봐라? 분명 이 소리는?
“도어록?”
승현은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재빨리 트레이닝복 하의를 챙겨 입고 거실로 나왔다.
잘못 들은 소리이길 바라며.
그런데, 분명 그의 현관에서 또 한 번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 뭐야? 도둑이야? 감히…… 어떤 새끼가…….”
그는 저도 모르게 진열장에 고이 놓인 야구 방망이를 집어 들었다.
미국 유명 야구 선수가 직접 썼던 것으로 꽤 고가에 그가 낙찰 받은 귀한 방망이였다.
승현은 야구 방망이를 든 채 조용히 어둠속에 숨어 기다렸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총기를 허용한 국가가 아니니 제아무리 날 강도라도 권총을 그에게 겨누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껏해야 작은 나이프 정도.
승산 있다. 길이감이 긴 야구 방망이니, 상대방의 나이프가 그를 위협하기 전에 제압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신체 조건으로 따지자면 웬만한 운동선수에도 밀리지 않는 그가 아닌가.
침착하자. 침착하자.
승주에게 두들겨 맞으면서 운동한 보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게다가 천하의 위승주가 인정한 맷집이 아니던가!
그러나 두려운 건 어쩔 수 없다.
제아무리 배짱 두둑한 그라도 이런 상황에서 침착할 순 없는 것이다.
그래서 급 후회가 밀려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계란 프라이가 아니라 궁중 요리를 해서라도 승주를 모셔다 둘 것을.
그랬다면 강도가 아니라 군대가 쳐들어와도 한 큐에 밀어버릴 수 있을 텐데.
“아. 젠장, 형…… 보고 싶다.”
오늘만큼 승주가 보고 싶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띠리릭!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 드디어 도어록이 열리고 말았다!
승현은 야구 방망이를 든 손에 잔뜩 힘을 준 채 문을 열고 슬그머니 들어오는 누군가를 숨죽여 기다렸다.
그런데.
스으윽.
조용히 열린 문틈으로 뭔가가 네 발로 기어 들어왔다.
그는 태어나 이렇게 두려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긴장감으로 인해 온몸을 격하게 회전하던 피도 순간 바짝 타들어갔다.
“흐…… 어억!”
너무 놀라 들고 있던 방망이를 놓쳐버린 채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사람이…… 아니다!
마치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우물에서 머리가 산발한 귀신이 하얀 소복을 입고 튀어나오는 것과 거의 흡사했다.
다만 이 귀신은 우물이 아닌 현관문을 통해 들어왔다는 점.
그리고 하얀 소복이 아닌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다는 점.
다소 차이가 있긴 했으나, 사람이 아닌 것만은 확실한 공통점이었다.
사람이란 자고로 직립보행이 원칙 아니던가!
허나, 분명 네 발이다.
사람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결국 승현은 싸워야겠다는 전투 의지를 상실한 채 발 밑에 떨어진 야구 방망이조차도 집어 들지 못하고 있었다.
감히 신음 소리조차도 흘릴 수 없는 상황이다.
그가 무슨 소리라도 냈다간 당장 저 긴 산발머리를 헤집고 살기 가득한 핏빛 눈동자가 그를 잡아먹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흡…….”
승현은 새어 나오는 신음소리를 두 손으로 틀어막으며 최대한 ‘그것’으로부터 멀어졌다.
이렇게라도 귀신이라고 생각한 그것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탓이다.
그러곤 재빨리 어딘가 숨을 곳을 찾았다.
문제는 집 안 어디도 유난히 길쭉한 그의 기럭지를 감당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오늘만큼 훤칠한 제 기럭지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아으, 죽겠네…….”
그런데,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중얼거림에 가까웠지만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듯 한 익숙함이었다.
낯선 움직임으로 인해 현관에 불이 켜지자 네 발로 기던 그것은 신발장 앞에 풀썩 드러누워 버렸다. 그러곤 한동안 움직임이 없었다.
승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잘못 본 거겠지.
하지만 한동안 움직임이 없어 불이 꺼진 현관엔 분명 사람의 모습을 한 형체가 길게 누워 있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잠깐 사이였지만 그 짧은 침묵은 평생 느꼈던 그 어떤 두려움의 순간보다도 길게 느껴졌다.
심장이 늑골을 부술 듯 튀어 올랐다. 이러다 심장마비로 비명횡사 할 판이다.
뭔가 수를 내야 했다.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는 기분이었으나 해가 뜰 때까지 마냥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는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떨어진 방망이부터 집어 들었다.
그러곤 숨을 죽인 채 죽은 듯 누워 있는 그것에게로 은밀히 다가갔다.
물론 바짝 다가가 그것의 정체를 확인할 용기 따윈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적당한 거리에 멈춰 서서 자신의 긴팔과 야구 방망이를 최대한 활용하여 드러누운 그것을 콕, 건드려보았다.
움직임이 없다.
1차 시도 실패.
이에 승현은 다시 한 발자국 다가가 그것을 툭 건드렸다.
그런데도 죽은 듯 움직임이 없다.
2차 시도 역시 실패.
아, 이대로 날이 샐 것 같았다.
조금 대범해진 그가 자세를 낮추고 이번엔 방망이가 아닌 자신의 손을 천천히 뻗어보았다.
그 순간, 움직임을 포착한 현관의 센서가 붉은 조명을 밝히고 만다.
그와 동시에 줄곧 움직임이 없던 그것이 벌떡 일어나 그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으아-악!”
너무 놀라 비명이 절로 흘러 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왼쪽 가슴을 정확히 겨냥한 그것은 날이 선 손톱으로 그의 심장을 후벼팔 듯 힘을 주고 있었다.
도망가고 싶어도 다리가 후들거려 일어날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의 허리 위로 묵직한 무언가가 올라타고 있지 않은가.
이거 꼼짝 없이 죽었구나 싶었다.
그 짧은 순간, 많은 것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대부분은 가족들이다.
죽은 엄마, 등 돌린 외할머니, 아버지, 형들.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 승희와 우빈이, 그리고 이제 막 예쁘게 웃기 시작한 조카 예준이까지.
그런데 그 와중에 의외의 얼굴이 하나 끼어든다.
바로 빛나였다.
도대체 이 순간 왜 그녀가…….
“이런…… 그지 같은…… 새끼!”
귓전을 파고드는 걸쭉한 욕지거리.
그러더니 무언가가 그의 가슴위로 풀썩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심장을 움켜쥐고 있던 손도 툭 떨어져 나간다.
죽음을 맞이했다고 생각한 순간 그녀를 떠올렸다 생각했다.
정말 사랑한 사람들 틈에 그녀가 불쑥 끼어든 게 이상하다 생각했단 말이다!
그런데.
“유…… 빛나?”
떠올린 게 아니다.
그녀를 직접 본 것이다.
그것도 평소답지 않게 머리를 산발한 채 흡사 귀신과 같은 그녀의 모습을.
“말도 안…… 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시 리플레이를 해보아도 여전히 유빛나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그의 멘탈은 유체 이탈을 시도했다.
천하의 유빛나가…… 네 발로 기다니.
아직도 충격의 쓰나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그의 품에 풀썩 쓰러졌던 그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조심스레 일어나 좀비와 같은 움직임으로 어디론가 향했다.
“야…… 어디 가.”
말할 기운도 없었다. 너무 놀라고 당혹스러워 지금도 심장이 벌렁였다.
“어디 가냐고!”
대답을 바라고 한 물음이 아니다.
하지만 승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바로 그의 침실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일으켜 세웠다.
이거,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니다.
술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으로 보아 오늘 거하게 한잔하신 모양이다.
게다가 승현은 태어나 이런 술주정은 처음이었다.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오자 슬그머니 화가 났다.
그리고 그 화는 빠른 속도로 치솟아 폭발 직전에까지 이른다.
아직도 그녀가 움켜쥐었던 심장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질 정도다.
“술을 마시려면 곱게 쳐 마셔야지! 야! 거긴 내 침실이야! 당장 나와!”
열이 받은 그가 또렷한 목소리로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래도 답이 없자 승현은 성큼성큼 발걸음을 떼어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내가 참…… 별꼴을 다 보네, 진짜!”
끌어내고 말리라.
다시는 제 영역에 함부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이 여자가 진짜 미쳐도 단단히 미…….”
그러나 문을 벌컥 열어젖힌 순간, 승현은 넋을 놓았다.
“…… 쳤…… 네…….”
어떻게 말을 마쳤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스름한 달빛을 등진 그녀의 모습이 승현의 넋 나간 눈동자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것도 하얀 슬립만 입은 채.
순간, 승현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군살 하나 없이 매끈한 몸매가 상상 이상이었다.
늘 단정한 옷만 입고 다니던 터라 그 안에 감춰진 그녀의 몸매가 이렇게 예쁠 거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적당히 볼륨 있는 가슴과 긴 다리가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심장을 들었다 놓기엔 충분한데, 얼굴 주변으로 부드럽게 흩어진 머리카락과 술에 취해 넋 나간 눈빛은 그렇지 않아도 어슴푸레한 달빛과 어우러져 묘한 아우라를 뿜어냈다.
너무 자극적이었다. 이게 현실인가 싶을 만큼.
그런데 그녀가 천천히 그가 있는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네 발로 기던 그녀가 아니던가.
헌데 지금은 그 긴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가벼워 보였다.
이거, 그녀가 미친 게 아니라 그가 미친 게 틀림없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겨우…… 와인 한잔했을 뿐인데.
“야, 너…… 움직이지 마. 어디서 여자가 홀랑홀랑 벗고…… 여자…… 가…….”
버퍼링이 걸린 것처럼 승현은 좀처럼 다음 단어로 넘어가질 못했다.
그리고 승현은 더 이상 말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바로 눈앞까지 다가온 그녀가 까치발을 든 채 그의 목을 휘어 감았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의 몸이 조심스럽게 맞닿자 볼륨 있는 그녀의 몸매 곡선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맞닿은 피부가 순식간에 달아오르며 불에 덴 듯 후끈거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심장이 폭발할 듯 두근거렸다.
하지만 감히 그녀의 몸에 손을 댈 순 없었다.
자의에 의해 그녀의 몸에 손을 대었다간 다시는 뗄 수 없을 것 같아서다.
승현은 짙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늘 성난 암고양이처럼 날을 세운 모습만 봐오던 터라 지금 이 순간이 꿈인 것 같았다.
그녀가 이런 눈으로 그를 바라볼 수도 있다니.
날이 서지 않은 그녀의 눈매는 의외로 예쁘게 쳐져 있었다.
성난 불덩이가 사라진 그 눈동자는 의외로 순수했다.
“너…… 진짜…….”
왜 이렇게 예쁜 거니.
이거, 홀려도 단단히 홀렸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어떤 액션도 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지금 한숨 자고 일어나면 까맣게 잊어버릴 술기운과 함께였으므로.
언젠가 한번 생각은 해보았다. 남들에게 보여주는 그 웃음을 그에게 보여준다면 어떤 기분일까 하고.
그러나 경험이 없었던 관계로 감히 그 기분을 상상도 못 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네가 아주 날…… 가지고 노는구나…….”
그랬다. 유빛나는 천하의 위승현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눈앞에 안겨오는 여자에게 아무런 액션도 취하지 못한 채 가만히 서 있는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를 덮친 파렴치한이 되는 것보단 바보가 되는 게 나은 선택이다.
이렇게 오래도록 바라만 보고 싶었다.
내일 술에서 깨면 다시 날을 세울 그녀를 생각하니 지금 이 순간이 더 깨알 같았다.
빛나가 그의 목을 끌어당기며 더더욱 제 몸을 밀착해온다.
위험신호다. 그의 머릿속에 경보등이 켜졌다.
몸이 괴로워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유빛나, 너 진짜 이러면…… 위험해.”
나도, 남자라고…….
결국 승현은 그녀를 밀어 내기 위해 늘씬한 허리 위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피부가 닿는 순간 그 보드라운 감촉에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마음은 밀어내라 소리치고 있는데 반대로 그의 손은 그녀의 허리 굴곡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미쳤다. 미쳤어! 이러다 그녀가 제정신이라도 차리면 진짜 개죽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내심은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그녀의 가녀린 목선에 얼굴을 묻어버린 것이다.
그나마도 그녀의 입술로 직행하려는 제 입술을 틀어 그 자리에 머문 것이다.
어떡하나. 이렇다 정말 그가 정신 줄이라도 놓으면.
그러나 다행히도 빛나의 낮은 목소리가 그의 넋 나간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이런…… 그지 같은 새끼…….”
순간 승현은 풋, 웃음이 세어 나왔다.
이렇게 매력적인 모습으로 걸쭉한 욕지거리라니, 그녀답다 생각했다.
“유빛나…… 널 어쩌면 좋니, 정말.”
그 놈의 거지같은 새끼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오늘 아무래도 유빛나 손에 단단히 잘못 걸린 모양이다.
승현은 가까스로 제 본능을 억누른 채 그녀를 살포시 보듬어 안고 침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술에 취한 그녀는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겨왔다.
“자자, 빛나야. 일단…… 한숨 자자.”
승현은 몰래 무단 침입한 이 암고양이를 감히 내쫓을 수가 없었다.
대신, 그의 침대를 내어주고 벌거벗은 몸을 따뜻한 이불로 덮어주었다.
그렇게 빛나는 밤새도록 잠꼬대처럼 정체 모를 ‘거지같은 놈’을 찾으며 중얼댔고, 승현은 찬물에 샤워를 두 번이나 하며 긴긴밤을 버텨냈다.
정말 태어나, 그토록 긴 밤은 처음이었다.
***
“으아악! 어떻게 이런 일이! 말도…… 안 돼-에!”
지난밤을 고통스럽게 보낸 보람도 없이 승현은 아침부터 물 한 컵을 시원하게 뒤집어썼다.
빛나가 제 머리카락을 움켜쥐다 재빨리 널브러진 그녀의 블라우스를 집어 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더니 어떻게든 제 몸을 가려보려 애를 쓴다.
물론 볼륨 있는 몸매와 늘씬한 다리를 가리기엔 턱 없이 모자란 블라우스였지만 말이다.
결국 승현은 얇은 모포를 그녀에게 던져주었다.
몸을 가리고자 하는 그녀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녀를 보며 꿈틀대는 자신의 본능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진짜…… 어떻게 이런 일이…… 내가…… 그랬을 리 없어. 절대! 절대!”
그녀가 손발을 덜덜 떨며 현실 부정에 들어갔다.
그렇겠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유빛나, 도덕적으로 남자 앞에서 아무렇게나 홀랑홀랑 옷을 벗어던질 여자도 아니었지만 더군다나 그의 앞이라니 더 믿고 싶지 않겠지.
이해한다.
수증기가 되어 증발해버리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그러나 어쩌나.
이번 사태에 대해 고통스럽게 보낸 지난 긴긴 밤만큼 그는 절대로 이 일을 쉽게 넘기지 않을 생각인데.
“너…….”
그가 말을 하기 위해 한 발자국 다가섰다.
그러자 빛나는 파르르 떨며 두 발자국 물러서며 소리쳤다.
“다가오지 마! 한 발자국이라도 더 다가오면…… 확 신고해버릴 거야!”
그녀의 목소리에 승현은 제 트레이닝복 팬츠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으며 삐딱하게 멈춰 섰다.
거만하고 위험스러운 포즈였다.
아무래도 이 여자가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신고를 한다고? 감히 누굴!
이제 그만 레드 선을 외쳐줄 때가 온 것 같다.
결국 승현은 매력적인 입 꼬리를 사악하게 치켜 올리며 엄청난 사실을 토해냈다.
“무슨 소리, 신고는…… 내가 먼저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야.”
“뭐라고?”
“불. 법. 침. 입!”
그제야 빛나는 줄곧 당혹스러움으로 인해 보이지 않았던 시야가 탁 트이는 것을 느꼈다.
분명 호텔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녀의 집도 아니다.
그렇다면 여긴 어디?
“여긴…… 우리 집이거든.”
그 한마디에 빛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주어 삼켜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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