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인연이 될 수 있는 악연
2018.01.03.
“진행하고 있는 일은 잘돼가?”
“응.”
“그럼 곧 끝나겠네?”
“응.”
“대답에 영혼이 없다?”
“응.”
이쯤 되자 아들 예준을 안고 있던 우빈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턱을 괴고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승현의 모습이 의아해서다.
승현이 형님이라곤 하지만 우빈보다는 한 살 아래였기에 형제가 없는 그에겐 늘 남동생 같은 존재였다.
그러니 아침부터 화가 난 듯 집에 쳐들어와 저러고 삼십 분째 앉아 있는 승현이 자꾸 신경 쓰였다.
이해할 수 없다. 분명 뭔가 심기 불편한 일이 있는 듯한데 그걸 꼭꼭 눌러 참고 있는 모습, 고집스럽다 못해 답답해 보이기까지 했다.
결국 이제 이가 나기 시작해서 침을 흘리는 예준의 턱을 한번 닦아주며 우빈은 승현의 눈앞에 앉았다.
자신의 시야가 우빈의 모습으로 가려지자 그렇지 않아도 꿈틀대던 그의 진한 눈썹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나 심기 불편. 그러니까 오늘은 혈압 올리지 마.”
“왜 기분이 그렇게 안 좋은데요?”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서.”
우빈이 평소답지 않게 존대를 하자 더욱 예민해진 승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모습이 어찌나 심통 맞으면서도 귀여운지 하마터면 우빈은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채 그의 보드라운 베이비 펌을 쓰다듬어줄 뻔했다.
“여자 문제?”
우빈의 반문에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화가 난다는 듯 그의 이마에 실핏줄이 돋았다.
“화가 나. 그 녀석한테는 그 순간까지 그렇게 신경 쓰면서, 나한텐 말도 걸지 말래. 걔는 그렇게 애절하게 쳐다보면서 나는 잡아 죽일 듯이 쳐다봐. 이게…… 말이 되냐?”
“헐, 위승현만 보면 화를 내는 여자라…… 이거 듣지도 보지도 못한 스타일인데? 근데 네가 참았어?”
“내 말이. 나도 화를 내야 하는데 나만 보면 발작을 일으키니까 나는 화를 내야 할 타이밍을 놓쳐버려. 심지어 미친놈처럼 자꾸 웃음도 나온다고!”
“하긴, 이해는 해. 나도 그랬으니까. 6년 만에 승희 다시 만났는데, 어디서 본 지도 모르겠는 여자가 나만 보면 암고양이처럼 날을 세우는데 도무지 참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열 받더라고. 그래서 물어봤지, 왜 그렇게 내가 싫으냐고.”
“그랬더니?”
“싫어하는 거 아니라더라? 근데 우리 승희…… 알다시피 연기파는 아니잖아. 그 몹쓸 발 연기……. 아니라는데 눈으로는 내 얼굴에 불을 싸지를 것 같더라고.”
그 말에 승현은 여동생 승희를 떠올리며 싱긋 웃었다.
위승희답다. 위씨 집안 성질머리 어디 가겠는가.
“싫다니까 더 사랑하고 싶더라. 도망가니까 더 붙잡고 싶더라.”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그런 감정이 아니야. 몇 년 동안 못 보고 살아도 전혀 아무런 느낌이 없다고. 눈에 안 보이면 편해. 하지만 눈에 보이면 나를 싫어하는 게 보이니까 짜증난다고. 오히려 보고 있으면 열 받아. 심장이 벌렁거려 죽겠다고, 정말.”
그 감정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는 듯 승현이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 우빈을 밀치고 울고 있는 예준을 넘겨받으며 투덜댔다.
“애 아빠 맞냐? 애가 왜 우는지도 모르고. 기저귀 젖었잖아! 아, 그리고 남자애한테 머리띠는 왜 해준 거야! 그것도 꽃으로!”
우빈과의 대화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고 보니, 좀 전에 넋 놓고 있느라 보지 못했던 예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계집아이처럼 곱게 머리띠를 하고 있는 그 모습이 말이다.
“우리 예준이 머리띠 잘 어울리지 않냐?”
“이런다고 승희가 딸 낳아줄 것 같아?”
“안…… 낳아줄까?”
“퍽이나.”
승현이 대답하며 능수능란하게 예준의 기저귀를 갈아준 후 예준의 머리띠를 빼버렸다.
“그냥, 확 사고 쳐버려? 일단 임신을 하면 우리 승희도 어쩔 수 없잖아?”
말을 하는 우빈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치켜 올라갔지만 그런 우빈의 장대한 계획에 승현이 찬물을 끼얹었다.
“승희 요즘 킥복싱 배우더라. 작은형 말을 듣자하니, 재주가 타고났다더라고.”
“…….”
“나보다 잘한대.”
“…….”
“그 계획 실행해도 좋아. 단, 네 목숨을 담보로.”
그 말에 웃고 있던 우빈의 잘생긴 입꼬리가 순식간에 얼음이 되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우빈은 중얼거리듯 그에게 한마디 하는 걸 잊지 않았다.
“어쨌든 그 여자와는 잘 정리해봐. 그러다 상사병 걸리지 말고, 나처럼.”
“몇 번을 말해. 나는 그런 게 아니라고. 날 보면 자꾸 파르르 하니까 나도 열 받아서 벌렁이는 거라고.”
눈썹을 치켜 올리며 우빈에게 반박했지만 승현은 알고 있다.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며 사랑을 이룬 로맨티스트 김우빈에겐 온 세상이 핑크빛이지만 누군가의 미움을 잔뜩 받는 승현에게 세상은 잿빛이라는 걸.
하얀 캠퍼스에 제멋대로 세상을 만들어갔던 그에게 누군가로 인해 잿빛으로 물든 세상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래서 더 불쾌하고 기분 나쁘다.
요즘은 아침 출근 시간도 바꿨는지 엘리베이터 안에서조차 빛나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때문에 승현은 강제 묵언 수행의 길로 접어드는 중이었다.
“아, 이걸 어떻게 하지?”
혼자 중얼거리는데 곁에서 우빈이 예준의 옷을 갈아입히며 툭 던진 말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잘 생각해봐. 그게 열 받아서 벌렁거리는 건지, 아니면, 설레서 두근거리는 건지…….”
***
빛나는 고민이 있다는 이정과 오랜만에 술 한 잔을 하기 위해 예정보다 30분 일찍 퇴근길에 올랐다.
주차장 입구를 이제 막 벗어나 코너를 도는데 아직도 진행 중인 서명 운동이 보였다.
“저래봐야 소용없을 텐데.”
제 일도 아닌데 왜 볼 때마다 안타까운지.
아마도 은지와 이야기했던 중년 남자의 선한 모습 때문이리라.
신호가 바뀌자 빛나는 애써 그들을 외면하며 집 앞 와인 바로 향했다.
그녀의 집과 가까운 곳이라 차를 아파트 주차장에 세우고 걸어 나왔다.
밤이라 그런지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뺨을 무섭게 할퀴고 지나갔다.
그렇게 아파트를 벗어나며 그녀는 저도 모르게 제 집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옆집을.
요즘 들어 출근 시간을 조금 일찍 당겼더니 엘리베이터에서 승현을 보는 불상사는 확실히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피할 수는 없지 않은가.
데면데면한 이웃보다 원수가 되길 선언한 후, 왜 이렇게 그가 신경 쓰이는지 모르겠다.
아니, 그전부터 위승현은 무척이나 귀찮은 인간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면 제 멋대로 행동함은 물론이요, 반기지도 않은 그녀에게 살인 미소를 발사하는가 하면, 쉴 틈도 주지 않고 질문을 쏟아낸다.
한마디로 통제 불가능한 일곱 살 사내아이, 딱 그러했다.
“아, 진짜 신경 쓰여. 짜증나.”
빛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생각을 접고 이정에게 갔다.
바로 들어서자 룸도 아닌 바에 앉아 있는 이정의 뒷모습이 보였다.
바의 주인인 화정과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신나게 떠들고 있는 중이다.
“뭐야, 고민 있다더니 왜 이렇게 즐거워?”
그녀가 옆자리를 차지하자 이정이 웃음기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야, 얼마 전에 조윤성이 자기 스타일리스트랑 스캔들 난 거 알지? 그거 이번에 제 입으로 인정했대!”
“난 또 무슨 일이라고. 연예계야 항상 그렇지, 뭐. 그리고 그전에도 조윤성은 몇 번 스캔들 났던 걸로 알고 있는데?”
“그랬지. 하지만 제 입으로 인정한 건은 한 건도 없었거든.”
“반짝반짝 빛나는 연예인 이야기 말고 우리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자, 응?”
“야, 그래도 이 우울한 세상에 연예인 이야기 아니면 웃을 일이 뭐가 있겠냐.”
“언니, 나도 칵테일 한 잔. 항상 마시던 걸로.”
“그래. 근데 오늘은 왜 이렇게 예민해? 양육권 재판 있었어?”
그녀의 전문 분야가 그러하다 보니 주로 한 가정이 파괴되는 모습을 지켜봐왔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양육권 재판은 승소를 떠나 빛나의 감정 소모가 가장 많은 일이었기에 종종 굉장히 예민해질 때가 있었다.
때문에 화정이 빛나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물어온 것이다.
“아니. 요즘은 그거 말고 신경 쓸 일이 하나 더 생겨서.”
“아, 그 상콤이?”
화정의 물음에 빛나는 이정을 노려보았다.
그새를 못 참고 화정에게 이야기한 모양이다. 그녀마저도 승현을 ‘상콤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그렇게 쌈박하다며? 키도 크고, 귀티도 자르르 흐르는 데다, 몸은 완전 상남자인데 얼굴은 완전 애기 같다던데?”
“헐…… 디테일하게도 떠드셨네.”
“한번 데리고 와! 나도 한번 보게!”
“그 정도로 친한 사이 아니거든?”
“이웃사촌이라며! 앞으로 친하게 지내면 되지.”
“아, 고민 있다는 기집애가 걔 이야기는 왜 이렇게 떠든 건데?”
화정이 멈출 기미가 안 보이자 이정에게 화살이 날아갔다.
하지만 이정은 자신의 칵테일 잔을 매만지며 새초롬하게 이야기한다.
“고민은 무슨 고민. 그냥 술 한잔하려고 핑계거리 찾은 거지.”
“위승현 이야기는 사절. 그 이야기 하려고 나 부른 거면 오늘 술자리는 이걸로 끝.”
“알았다-아! 이 기집애야! 저 가질 것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남 가지는 꼴도 못 보는 거야?”
“네가 남이 아니라 그런다, 서이정!”
그랬다. 이정은 남이 아닌 가족 같은 친구였기에 위승현과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는 꼴은 죽어도 못 보겠다.
“야, 사실은 너 우울할까 봐 한잔 하자고 한 거야. 얼마 전에 그 자식 만났잖아. 근데, 걔는 신혼여행에 있어야 할 애가 그 시간, 거기에 왜 있었대?”
“내 말이. 뭐, 사정 때문에 신혼여행 미뤘을 수도.”
“기분은 괜찮아? 사실 그날 당장 너랑 술 한잔하려고 했는데 내가 취재가 잡혀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
“안 괜찮을 건 뭐 있어?”
“아니야. 그렇게 안 숨겨도 돼. 나한테는.”
이정이 안쓰럽다는 듯 그녀의 등을 토닥였지만 빛나는 정말로 괜찮았다.
그러고 보니 그날의 기억 대부분은 승현에게 열 받은 것으로 감정 소모를 하다 보니 원준에 대한 기억이 많이 없었다.
문제는 그날 승현의 행동에 대한 분노는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는 것.
“아, 진짜! 그날 일을 왜 또 꺼내는 건데!”
잠시 잊고 있었는데 또 생각나버렸다. 젠장.
“미안. 미안.”
이정은 빛나가 버럭 한 것이 원준에 대한 미련 때문이라 생각했다.
고통스럽게 잊었던 그날의 기억을 이정이 다시 끄집어낸 것일 거라고.
그러나, 그것은 원준에 대한 미련이 아니라 승현에 대한 분노였다.
그 까마귀 고기를 먹은 자식이 그녀의 인생에 참견하지 않기로 다짐한 지 불과 30분 만에 일으킨 불상사였으니까.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나 그녀는 그렇게 날뛰는 승현을 통제하지 못했고.
그녀를 잘 아는 원준이 보기에 얼마나 웃겼을까.
딱 봐도 억지 연인이라는 게 보였을 텐데.
이정은 붉으락푸르락하는 빛나의 얼굴이 철저히 원준 때문이라 오해를 한 채 제 잔을 높이 치켜들고 입을 열었다.
“야, 오늘을 끝으로 그 자식은 완전히 잊어버리는 거야. 유빛나 인생에서 아웃시키는 거라고. 그러니까 건배!”
“맞아. 내가 녀석한테 얽매여 연연할 필요는 없는 거야. 내 인생이잖아?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야. 건배!”
물론 서로 저주하는 상대가 다르긴 했지만 어쨌든 잔은 부딪쳤다.
“먹고 죽는 거야, 오늘은!”
그렇게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세 잔이 되었더랬다.
이정은 잠시 정신 줄을 까무룩 놓았다.
그러다 일어나 보니 곁에 있던 빛나가 사라졌다.
“……음, 어디 갔쥐-이?”
본인은 말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턱에 구멍이 뚫린 듯 발음이 줄줄 샜다.
그 모습을 보고 와인 잔을 닦던 화정이 입을 열었다.
“빛나, 갔는데? 좀 전에 비틀비틀 나가더라.”
“배-쉰-자.”
그렇게 말하더니 이정도 비틀비틀 바를 나섰다.
그러곤 마지막 한 가닥 남은 정신력까지 끌어 모아 우여곡절 끝에 빛나의 집에 도착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가 옷을 벗고 잠들기까지, 이정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빛나의 집, 빛나의 침대인데, 비틀비틀 먼저 바를 나섰다는 그녀는 집 안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음을.
“음냐, 음냐…… 유빛나-아, 퐈이티-잉.”
빛나인 줄 알고 입맛을 다시며 끌어안은 그것이 사실은 그저 베개에 불과했음을, 이정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단 말이다!
***
쾅!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서로를 부둥켜안은 남녀 한 쌍이 정신없이 밀려들어왔다.
남자가 여자를 벽으로 거칠게 몰아붙이자 그녀의 긴 다리가 유연하게 남자를 훑어 내렸다.
그들의 움직임에 현관불이 자동으로 들어왔지만 서로를 정신없이 탐하느라 어느 누구도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밝혀진 불빛에 훤칠한 그들의 비주얼이 나타났다.
누가 봐도 선남선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유빛나! 정신 차려!’
빛나는 지난 며칠간의 지옥을 떠올리며 자신을 다독였다.
하지만 남자가 주는 전율에 그러한 마음가짐도 오래가질 못했다.
지금 이 순간, 이 느낌에 충실하고 싶었다.
그저 몸이 닿았을 뿐인데도 간만에 느끼는 남자의 체향이 그녀를 혼미하게 만들었다.
크고 단단한 남자의 손이 그녀의 블라우스를 파고들어 맨살에 닿자 피부 및 세포들이 대반란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목을 타고 흐르던 남자의 입술이 다시금 그녀의 입술이 찾아 들었다.
숨이 막힐 듯한 키스가 계속 되는 바람에 남자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얼굴 좀 못 보면 어떤가.
그녀의 몸을 에워싸는 딱 벌어진 어깨와 그녀의 손바닥 밑에서 살아 숨 쉬는 역동적인 근육들이 남자의 비주얼을 대신하고 있는데.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몸을 타고 흐를 때마다 피부는 불에 댄 듯 후끈거렸다.
그리고 드디어 남자의 존재를 온전히 느낀 순간, 그녀는 작은 비명과 함께 한숨을 내뱉어야만 했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럼에도 빛나는 자신의 몸을 압박하고 있는 남자의 묵직한 무게감이 좋았다.
길고 튼튼한 팔이 그녀를 부드럽게 안아주자 오랜만에 느낄 수 있는 든든함에 온몸이 노곤하게 풀렸다.
그동안의 피로감이 한순간에 가신 듯하다.
며칠 내내 받았던 스트레스로 인해 뻣뻣하게 긴장되어 있던 근육들이 평온함을 되찾았다.
이쯤 되자 빛나는 남자의 정체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축복받은 바디만큼 그의 외모 또한 훈훈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드디어 남자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관자돌이 부근에 머물렀던 그의 입술이 귓불로 내려와 작은 한숨을 내뱉자 빛나는 잔뜩 긴장했다.
남자가 말을 하려나 보다.
잘생긴 남자의 외모만큼이나 멋진 보이스이리라.
그러나 남자의 보이스가 그녀의 귓가를 간질이는 순간, 그녀는 얼어붙고 말았다.
“유빛나, 그만 꿈 깨시지.”
발끝에서 시작된 소름이 전신을 훑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빛나는 방금 전 들은 그 보이스를 거부하며 자신의 목에 얼굴을 묻은 남자를 밀쳐냈다.
그리고 남자의 잘생긴 얼굴을 마주하는 그 순간, 지난 며칠간의 지옥보다 더한 지옥과 대면하고 말았다.
믿을 수 없다! 어떻게 네가…… 네가!
너무 놀란 빛나는 남자를 거칠게 걷어차며 고막이 터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악!”
***
“으아아-악!”
빛나는 경기를 일으키듯 팔을 허우적대며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침대의 보들보들한 시트 느낌을 고스란히 느끼고서야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꿈속에서만큼이나 식은땀이 흐르는 순간이었다.
“아, 꿈이네.”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보다.
안 꾸던 꿈을 다 꾸고. 그것도 악몽 중 최고의 악몽을 말이다.
“재수 없어…….”
밝은 불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빛나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과음을 한 탓인지 목구멍이 칼칼하고 아팠다. 게다가 깨질 듯한 두통이 그녀의 뇌리를 강타했다.
이게 다 그 악몽 때문이다.
좋은 꿈을 꿔도 모자랄 판에 그런 재수 없는 꿈을 꿨으니 잠자리가 편안할 수 있었겠나.
덕분에 온몸이 쑤시고 아파왔다.
“아…… 물…….”
더듬더듬 손을 뻗자 물 잔이 손에 쥐어졌다.
그녀는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간신히 일어나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머릿속이 조금 맑아지는 듯하다.
“이게 무슨 개꿈이야. 젠장…….”
사고할 수 있는 뇌가 활동하기 시작하자 다시금 그 악몽에 화가 났다.
도대체 얼마나 남자가 고팠으면 그런 꿈을 꾼단 말인가.
그것도 그 재수 없는 녀석을 상대로 말이다.
며칠간 현실에서 그녀를 그토록 괴롭히더니, 이젠 그것도 모자라 꿈속에까지 찾아온 그 녀석이 미치도록 얄미웠다.
빛에 어느 정도 눈이 익숙해지자 빛나는 제 눈을 비비며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실눈을 뜬 그녀 앞에 정체 모를 물체가 포착이 된다.
“뭐…… 지?”
점점 시야가 또렷해졌다.
하지만 또렷해진 시야와는 반대로 멘탈은 유체 이탈을 시도 중이다.
이마 위로 부드럽게 흩어진 베이비 펌.
장난스러운 아몬드형 눈매.
그리고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저 못된 입술!
진짜…… 뭐지? 아직 꿈인가?
빛나는 저도 모르게 유리컵을 쥐지 않은 맨손을 들어 제 볼을 꼬집었다.
통증이 물밀 듯 밀려오자 빛나는 소름이 돋았다.
“그럴 리…… 없어. 꿈이야…….”
아직…… 꿈인가 보다. 그 악몽이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하이, 허니?”
그 못된 입술이 말을 토해냈다! 너무도 현실감 있게!
그것도 놀라 뒤로 나자빠질 일인데, 그렇지 않아도 살짝 치켜 올라간 입꼬리를 더욱 틀어 올리며 그 특유의 비웃음을 흘려 냈다.
그와 동시에 빛나의 머릿속이 암전되었다.
“으아…….”
너무 놀란 그녀는 차마 비명을 뱉어내지도 못했다.
그 모습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그의 입술이 다시 한 번 더딘 슬로모션처럼 열렸다.
“잘 잤어?”
그리고 그 한마디에 빛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으아아-악!”
이건 꿈이다! 절대 현실일 리 없다!
쫘악!
너무 놀란 그녀는 들고 있던 물을 그에게 끼얹고는 본능적으로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사라지지 않는다! 젠장할, 꿈이 아니다!
이젠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놀란 사슴마냥 입만 뻥긋거리며 갑자기 뒤집어쓴 물로 인해 눈을 감고 있는 그를 소리 없이 바라보았다.
진한 그의 눈매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그녀의 동공에서 지진이 일었다.
“으…… 아…….”
이제 어쩌면 좋단 말인가.
정녕 꿈이라면 깨고 싶었다.
하지만 장난기가 사라진 아몬드형 눈매를 마주한 순간, 그녀는 제 머리칼을 움켜쥐어야만 했다.
“꿈이…… 아니야.”
그러자 줄 곧 턱을 괴고 앉아 있던 그가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끝도 없는 기럭지에, 꿈속에서 보다 더 잘빠진 몸매, 성난 아몬드형 눈매가 그녀를 궁지로 몰아갔다.
게다가 그는 방금 전 잠에서 일어난 듯 살짝 헝클어진 머리 스타일에 상의를 탈의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이제 막 몸을 일으킨 승현의 모습은 또 다른 악몽을 예고하고 있는 듯했다.
그동안 사이비라 생각하며 잊고 있었던 선녀보살의 말이 불현듯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정도 악연이면 이젠 인연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거여.
그 끔찍한 악몽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으아악! 어떻게 이런 일이! 말도…… 안 돼-에!”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