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그녀는 예뻤다.
2017.12.31.
승현이 손목시계에서 시선을 들어보니 빛나는 계산대에 가 있었다.
그녀는 어서 이 시간을 끝내고 싶은 모양이다.
서둘러 벗어나려는 그 모습에 왠지 모를 서운함이 들었다.
그때 레스토랑으로 이제 막 들어선 한 커플을 보았다.
평소 같으면 그저 스쳐 지나갔을 커플이었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함에 승현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디서 봤더라…… 분명히 본 얼굴인데…….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결혼식 하나.
물론 그와 인연이 있어 간 결혼식은 아니지만 며칠 전 불쾌하리만치 인상 깊었던 결혼식 하나가 생각났다.
‘맞네. 그 커플이네.’
남자는 슈트 대신 편안한 캐주얼을, 여자는 웨딩드레스 대신 스커트와 티셔츠를 입었지만 분명 그날의 신랑 신부였다.
신랑 신부의 얼굴이 기억나자 곧 흥미를 잃어버린 승현은 빛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그와 관련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고, 지나가다 마주쳐도 모른 척 스칠 수 있는 인연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계산을 마친 빛나가 돌아서 남자를 알아보기 전까진.
“빛나야…….”
“원준 오빠?”
겉으로 보기엔 그저 아는 사람을 우연히 만난 정도.
하지만 승현은 보았다.
1초도 안 되는 그 찰나의 순간, 두 사람 사이에서 흐르는 그 묘한 시선을.
-신랑이 원래 결혼할 여자가 있었다더라. 소문에 의하면 죽고 못 살았더라고.
-여잔 변호사였대. 잘나가는 변호사.
-여자가…… 고아였대.
정오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모습이 그의 시야를 가득 매운 채 시간이 멈춰버렸다.
설마…….
“아닐 거야…….”
부정하고 싶었다.
예식장까지 다 잡아두고 파혼당한 그 여변호사가 유빛나는 아닐 거라고.
그러나 핸드백을 쥔 손에 힘을 너무 준 나머지 하얀 뼈마디가 비춰지는 그녀의 손을 보았다.
눈빛에 스친 절망감도 읽어냈다.
빌어먹을, 머리가 너무 좋아도 탈이다.
얼마 안 되는 퍼즐 조각만으로도 완벽한 그림을 완성할 수 있으니 말이다.
“젠장할.”
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 나왔다.
먹은 것도 별로 없는데 속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빌어먹을 오지랖에 발동이 걸린 모양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에게 문제가 되는 건 저 남자를 바라보는 빛나의 고통스러운 눈빛뿐이었다.
승현은 사악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녀의 인생에 끼어들지 말라는 말에 잔을 부딪쳐 동조한 게 겨우 30분 전 일이었지만, 그는 까마귀 고기를 먹은 사람마냥 모른 척 다가가 빛나의 여린 어깨에 다정하게 팔을 둘렀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놀란 남자를 상대로 그 특유의 조롱 섞인 말을 던지고 있었다.
“누구시더라……우리 빛나랑 아시는 분이던가?”
빛나의 몸이 순식간에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대학시절 단 5분 등장으로 그녀의 3년을 말아 먹었던 그 순간과 오버랩 되는 상황일 것이다.
이해한다.
하지만 오해를 풀고 사이좋은 인연이 되긴 이미 글렀다는 것을 조금 전 경험을 통해 깨닫지 않았던가.
그럴 바엔 차라리 이번 일로 미움을 받는다 해도, 그래서 남은 평생 그녀와 옥신각신 싸움만 해야 한다 해도, 승현은 절대 그녀의 어깨에 둘러진 제 팔을 거둬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것이 그녀와 있는 듯 없는 듯 무의미한 이웃사촌으로 남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았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새빨간 입술을 꼭 깨물며 격한 감정을 실어 눈으로 이야기했다.
‘지금 뭐하는 짓이야!’라고.
물론 이에 승현은 뻔뻔한 웃음과 더불어 ‘나는 모르쇠’로 일관했지만 말이다.
“아는 분인가 하고.”
빛나의 무시무시한 눈알 권법에도 굴하지 않고 그가 재차 묻자 원준이 머뭇머뭇 그녀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게…….”
그래. 사람이라면 제 소개가 무척이나 곤란하겠지.
가뜩이나 제 신부가 옆에 있는 상황이라면 말이다.
빛나가 어깨에 둘러진 승현의 팔을 풀기 위해 그의 손을 꽉 맞잡았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앙칼져도 남자인 그의 힘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만큼 빛나의 어깨에 둘러진 그의 팔은 견고했다. 마치, 원준에게 보란 듯.
“말 못 할 사이라면 굳이 소개 안 해도 되고.”
남자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고 있자니 분노로 팔딱이던 심장이 평온해졌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제 품에 있는 빛나를 내려다보았을 때 안심이 되었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
그 눈빛대로라면 그를 산채로 잡아먹고도 남을 분노였지만 적어도 조금 전 남자를 마주쳤을 때 보았던 그 고통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래, 차라리 나를 미워해라.
그게 네가 아파하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으니.
“너, 정말…… 왜 그러니. 응? 뭐, 잘못 드셨어요?”
그녀가 잇새로 말을 흘렸다.
그러자 승현은 그 물음에 씨익 입꼬리를 틀어 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순간 그녀의 동공이 격하게 흔들렸다.
웃지 마! 웃지 마! 제발…… 그렇게 웃지 말라고옷!
승현이 저러게 얄밉게 웃은 뒤에는 늘 시한폭탄이 터진다는 걸 그간의 경험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이번에도 역시 그녀를 배반하지 않았다.
“그럼…… 우리 갈까, 자기?”
어머-엇! 얘, 도대체 뭐래니!
째지는 비명 소리가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곧 터질 것 같은 빛나를 끼고 승현은 발길을 돌렸다.
물론 그와 함께 돌아서지 않으려 그녀가 버티고 있었지만 승현이 낯은 목소리로 다음과 같은 말을 흘리자 자동으로 발길이 떨어졌다.
“걷기 싫으면 내가 안고 가고.”
유빛나 열 받게 하는데도 탁월한 재주가 있었지만, 그녀를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데도 거의 신의 경지에 있는 승현이었다.
물론 그 원동력이 ‘분노’라는 데 사소한 문제가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레스토랑 문을 나서며 승현을 향해 쏘아대는 빛나의 살벌한 말투가 본의 아니게 원준의 귀에도 들어왔다.
“너 진짜, 미친 거 아냐?”
물론 두 사람이 투닥거림은 레스토랑을 나선 후에도 계속되었다.
발작을 일으키며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여자와, 죽어도 놔주지 않는 남자.
열 받아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여자와,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짓궂게 웃고 있는 남자.
“오빠, 아는 사람이에요?”
곁에서 원준의 와이프가 물어왔다.
내리는 비에도 끄떡없이 아옹다옹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의아했던 모양이다.
원준은 그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가늘게 뜨고 대답했다.
“알지.”
그의 선한 눈동자가 묘한 감정으로 물들고 있었다.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여자 분이…… 저러다 화병으로 졸도하겠어요.”
원준이 아는 사람이라 하니 그의 와이프도 두 사람의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원준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안 말려도 돼. 쟨…… 싫은 사람하곤, 저렇게 싸우지도 않거든.”
그랬다.
3년을 알아왔던 유빛나가 아닌가.
원준이 아는 유빛나는 싫은 사람과는 일분일초도 함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남자와 함께하고 있다는 건, 싫은 감정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원준은 보았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 벗어나려는 빛나에게 우산을 다 내어준 나머지 축축하게 젖어가는 승현의 어깨를.
원준이라면 어땠을까.
그는 내리는 빗속에서 그녀를 지켜내지 못했다.
덕분에 보석 같은 그녀를 그의 인생에서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았나.
하지만 어쩌면 저 남잔 다를지 모르겠다.
불같은 빛나의 분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은 모습은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어쩌면, 정말 어쩌면…… 저 남잔 끝까지 빛나를 지켜낼지도.
그 생각을 하자 원준은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
한편, 그 시각 비가 내리는 레스토랑 입구에선 여전히 빛나의 혈압이 위험 수치를 웃돌고 있었다.
“비켜! 집에 갈 거야!”
“내 차 타고 가.”
“미쳤어? 혈압으로 내 뒤통수 뚫리는 꼴 보고 싶냐!”
“술 마셨잖아. 변호사가 음주운전으로 걸리면 어떤 처벌 받는지 몰라?”
“뭐야?”
“내가 신고할 거거든. 앞에 가는 서울 마 2526번 차가 음주운전 중이라고.”
“이…… 이…….”
머리도 우라질나게 좋은 자식! 그새, 빛나의 차량 번호까지 외웠다.
“택시 타고 갈 거야!”
“요즘 택시 사고 많이 나더라. 게다가 술 취한 여자가 타면 훨씬 더 쉬운 범죄의 타깃이지. 너 지금 누가 봐도 취한 얼굴이거든. 좀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나 때문에 열 받아서 얼굴이 딱 그래.”
“너도 술 마셨잖아!”
“나 술 한 잔도 안 마셨어. 그리고 여긴 회사 근처니까 내일은 택시 타고 출근해도 되고. 아니면 내가 데려다줄 수도…….”
“됐어! 아침부터 네 얼굴 보고 출근하라는 이야기니?”
“그럼 택시 타고 오면 되겠네. 그치?”
그 말을 하는 이 순간에도 승현은 끈질기게 그녀의 팔을 붙들고 놓질 않았다.
그가 손을 놓는 순간, 내리는 비에 속절없이 노출이 될 그녀가 걱정되어서다.
“저 사람들, 아직도 우리 쳐다본다. 대리 불러도 되지만 올 때까지 저 사람들 시선 그대로 받고 있을 거야?”
그 말에 빛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를 향한 분노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던 존재 하나, 김원준.
이제야 비로소 떠올랐기 때문이다.
“비 온다. 빨리 타자. 열 받은 건 차 안에서 풀어도 되잖아.”
끌려가지 않기 위해 잔뜩 힘을 주고 있던 그녀의 몸이 서서히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승현의 차를 타고 가는 것이 여러모로 그녀에게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켜보는 눈도 있었고.
결국 빛나는 승현의 차에 올라타야만 했다.
그럼에도 마음이 진정이 되질 않자 제 2차전을 시도했다.
“도대체 왜 그런 거야? 내 인생에 다시는 끼어들지 않겠다, 건배까지 했잖아! 그게 불과 30분전이야. 너 혹시 단기 기억상실증 있니?”
빛나의 질문에 승현은 조금 전 그 커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너무 기억력이 좋아 탈이지. 건배? 그건 분위기상 안 하면 안 될 것 같아 했지만, 너도 알다시피 술은 안 마셨어. 그러니 전적으로 동의한 건 아냐.”
“어쩐지 너답지 않게 진지하더라니! 그게 30분을 못 가는구만?”
“나도 진지할 때 있어. 조금 전, 완전 진지했다고.”
그랬다. 그 커플과 빛나의 악연을 떠올렸을 때 진짜 열 받게 진지했더랬다.
덕분에 이런 화를 당할 걸 미리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가파식 오지랖을 부린 게 아닌가.
“내가 사람을 좀 읽을 줄 알거든. 근데 그 남잔, 네가 반기는 사람이 아니었어. 왜, 드라마 보면 나오잖아. 그런 순간 더 잘난 놈이 나타나 떡 옆에 있어주면 저런 녀석은 배 아파 잠을 못 자더라고.”
그 말은 곧 본인이 잘났단 이야기다.
그새를 못 참고 자랑질을 하는 것을 보니, 조금 전 그 일에 대해 전혀 반성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야! 이건 드라마가 아니라 바로 내 인생이라고! 그러니까 앞으로 내 일에는 신경 끄란 말이야!”
“왜…… 그놈이 아직도 신경 쓰여?”
오늘따라 승현은 왜 이리도 허를 찌르는 질문을 던지는지, 그리고 그때마다 그녀는 변호사라는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채 왜 매번 말문이 막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할 말은 잃은 빛나의 모습에 속이 쓰리긴 승현도 마찬가지다.
그에겐 서로 눈인사만 주고받는 이웃이 되자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해놓고, 왜 그딴 놈에게는 이런 순간조차 마음을 쓰는 것인지.
괜한 심술이 돋았다.
차라리 저런 눈빛보다는 그를 향해 날을 세우는 눈빛이 오히려 걱정 없어 보이고 좋았다.
그래서 승현은 제가 한 말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알면서도 겁 없이 내뱉었다.
“저런 쓸데없는 놈한테 신경 쓸 시간이 있으면, 그 남아도는 시간에 불쌍한 이 이웃사촌에게도 신경 좀 써주지?”
“뭐라고? 내가 왜?”
“야, 내가 말이지. 맨날 가족이랑 시끄럽게 살다가 난생처음으로 독립이란 걸 했어요. 근데 이게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도 있더라고. 특히 나 같은 놈한테는. 말할 상대가 없어. 곧 있으면 내가 벽하고도 만담을 하게 생겼어. 그 정도 상태면 정신병원 가야 하는 거 알지?”
“…….”
“그런데 꼴랑 하나 있는 이웃사촌이라는 여자가, 서로 눈인사만 주고받자며 나를 묵언수행의 길로 이끌고 있으니…… 내가 맨 정신에 어떻게 버티겠냐? 난 그렇게 못 해. 그렇게 할 바엔 차라리…….”
“차라리?”
또 무슨 폭탄 발언을 하려고 저런 반전을 주시나.
빛나는 어느새 원준의 존재를 잊고 날이 선 눈동자로 승현을 올려다봤다.
잠시 한눈을 팔면 사고를 치는 일곱 살 어린아이처럼 그와 함께 있으면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승현은 빛나를 바라보며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사악해 보이던지.
“차라리, 나 그냥…… 웬수할래. 내가 중도 아니고 묵언수행이 웬 말? 그럴 바엔 맨날 치고받고 싸우더라도 웬수가 낫겠어. 혹시 아나, 그러다 정 들지도…… 그치?”
그리고 오늘도 예외 없이 빛나의 혈압은,
“야-아악!”
어여쁘게 폭발해주셨다.
***
“아악! 진짜! 그 자식이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어! 맨 정신에 어떻게 그런 말을 하니?”
어제 일을 떠올리는 빛나의 얼굴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어디 그뿐이냐? 내 참, 기가 막혀서. 자기는 말을 해야 살 수 있대요. 말을 안 하면 신경 쇠약에 걸린다나 어쩐다나. 그래서 자기가 정신병에 걸리면 옆집에 미친놈 산다고 우리 집값도 같이 떨어진다는…… 그런 어이없는 협박을 하고 있더라. 무슨, 초딩이냐? 그딴 협박을 하게?”
[크흐흐. 어쩜…… 생긴 것도 귀여운데 협박도 그렇게 귀엽게 하냐, 우리 상콤이는.]
세상에나, 전적으로 그녀의 감정에 일심동체가 될 필요는 없겠으나 그래도 어느 정도는 정상적인 사고를 해주길 바란 빛나가 너무 많이 바란 것일까.
이정은 듣는 것만으로도 몸이 달아 죽겠다는 듯 웃음을 참으며 이야기했다.
“얘야, 제발…… 너라도 정신을 좀 차려주겠니? 이 언니가 지금 얼마나 위급한 상황인지 정녕 모르겠니?”
[뭘, 그래도 성공은 했네. 김원준 그 자식 보고 네가 제 발로 걸어 나왔을 것 같아? 상콤이가 끌고 나왔으니까 거기서 돌아설 수 있었던 거야.]
거기까진 생각해보지 않았다.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빛나에겐 당장 옆집 남자로 들어 앉아 사악하게 웃고 있는 승현이 더욱 시급한 상황이었다.
원준을 만난 건 그저 우연이었지만 앞으로 승현과 마주칠 일은 그저 우연이 아닌 ‘필연’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발상 한번 기가 막히네. 대면 대면한 이웃이 되느니 차라리 아웅다웅 싸우는 웬수가 되겠다. 야, 이 얼마나 순수하고 기가 막힌 발상이냐. 안 그래?]
“아, 말을 말자.”
더 이상은 포기다.
이정에게 어제 일을 자신의 시각에서 설득시키기는 무리인 것 같았다.
이제 그만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남은 아메리카노를 원샷하며 시선을 돌리는데 회사 빌딩 앞에서 푸른 천막을 쳐놓고 서명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좀 전 빌딩을 나올 땐 보지 못했던 현수막이 그녀의 눈을 어지럽혔다.
‘KMK컴퍼니?’
KMK컴퍼니라면 6개월 전 크게 이슈가 되었던 글로벌 회사로 그녀가 일하는 빌딩의 맨 꼭대기 층에 위치했던 회사였다.
하지만 지금은 없어져버린 회사가 아니던가.
“이정아, 나 회사 들어가봐야 돼. 끊자.”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시선을 돌렸을 때 그녀는 낯익은 이를 시선에 담을 수 있었다.
바로 어제 허름한 슈트를 입고 은지와 이야기를 하고 있던 그 중년의 남자였다.
비가 와서 꽤나 쌀쌀한 날씨였기에 오가는 사람들이 자신을 붙들고 서명 운동을 하는 남자에게 짜증을 냈다.
그런데도 남자는 포기를 모른다.
한쪽이 찌그러진 우산을 쓴 덕에 그러지 않아도 허름한 양복이 다 젖어가는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마음이 애잔했다.
저 사람도 누군가에게는 자상한 아빠고, 듬직한 남편일 텐데.
그리고 그녀에게 아버지란 존재가 있다면, 어쩌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쉬이 지나칠 수가 없었다.
결국 빛나는 다시 카페 카운터로 돌아가 커피 다섯 잔을 샀다.
한손엔 우산이, 한손엔 커피가 든 트레이가 있다 보니 걸음이 한 층 조심스러워졌다.
그렇게 남자에게 다가갔을 때 짜증이 난 누군가가 기어이 일을 내고 말았다.
“아, 진짜! 아저씨, 저희 그럴 시간이 없다니깐요!”
확 밀쳐버리는 바람에 남자의 손에 있던 서류철이 떨어지며 비가 온 바닥에 와르르 쏟아졌다.
놀란 남자는 화들짝 놀라 그것을 줍느라 우산을 포기했다.
“저, 저…… 어린놈의 새끼가!”
절로 욕설이 나왔다. 들고 있던 커피를 그 낯선 이에게 확 뿌려주고 싶을 만큼.
하지만 빛나는 낯선 이에게 분풀이를 하는 대신, 불쌍한 남자의 젖은 어깨에 우산을 씌워주는걸 택했다.
그러곤 잠시 트레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남자가 줍고자 했던 서류들을 함께 주워주었다.
순간, 어제 보았던 남자의 선량한 눈이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구?”
“모르시겠지만 저희 이웃사촌이었어요. J&J 로펌 유빛나입니다.”
“아…….”
그녀가 유독 환하게 웃었다.
그 눈부신 웃음에 남자가 잠시 눈을 껌벅였다.
하지만 그 순간, 두 눈을 의심한 건 비단 남자뿐만이 아니었다.
일 때문에 그곳을 지나가다 정오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기 위해 잠시 차를 세운 승현도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남자가 여자를 많이 사랑했나 보더라. 버틸 만큼 버티다 그 집 엄마 단식 투쟁하다 졸도해서 넘어가는 바람에 결혼 3개월 앞두고 파혼한 거래.]
핸드폰 저편에선 정오의 목소리가 멈추지 않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젯밤 승현은 밤새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야밤에 전화를 걸어 죄 없는 정오만 들들 볶았더랬다.
그 결과 정오는 더 자세히 알아본 후 지금 전화를 한 것이다.
[근데 갑자기 그 결혼식은 왜? 넌 모르는 사람이잖아.]
정오가 궁금함에 물었지만 승현은 말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모르는 사람이라니, 이렇게 눈앞에 있는 사람인데.
이제야 모든 퍼즐이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굳이 내가 손을 쓰지 않아도……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으하하하!
그 광기.
“어쩐지…… 익숙하더라니.”
빛나는 커피에 이어 자신의 우산까지 남자에게 건네준 후 바로 뒤에 위치한 빌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렇게 그녀는 사라졌지만 그녀가 머물다 간 그 자리엔 많은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일단 쏟아지는 비 때문에 차가워졌던 체온이, 따뜻한 커피로 후끈 데워졌다.
그리고 찌그러진 우산으로 인해 젖었던 남자의 한쪽 어깨는, 더 이상 젖지 않아도 되었다.
마지막으로, 조금 전 힘들었던 사람들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머물렀다.
정말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속이 쓰려 승현은 웃을 수가 없었다.
-넌 왜 맨날…… 내가 가장 최악일 때 내 앞에 나타나는 거니?
어젯밤 그에게 속삭였던 그녀의 목소리가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승현은 그 목소리를 지우기 위해 제 진심을 내뱉었다.
“그러는 너는…… 왜 자꾸 그런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나는 건데? 속상하게…….”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