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너였어.
2017.12.27.
“넌 왜 맨날…… 내가 가장 최악일 때 내 앞에 나타나는 거니?”
순간 승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닌데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늘 그녀의 최악의 순간에 그가 있었다는 사실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사람이란 자고로 이기적이라 자신의 치부를 알고 있는 사람에겐 날이 서기 마련이다.
빛나가 그러했다.
의도치 않게 최악의 순간 마주하게 된 승현은 어느새 그녀에게 징크스로 남아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행운과는 거리가 먼 그녀의 인생에 그나마 없는 운까지 모조리 앗아가는 불운의 상징, 위승현으로.
그래서 불안했다. 그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는 사실이.
도대체 왜, 하필이면 이 순간.
이젠 끝내야 했다. 본의 아니게 이어지는 악연의 고리는 여기서 그만.
“그래서 말인데, 승현아. 우리 여기서 끝내자. 이웃사촌이긴 하지만 너랑 나 딱 거기까지.”
그 말을 들은 승현의 눈썹 끝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참 편리한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그녀로 인해 팔딱거리는 심장이 원인 규명하라 농성을 벌이고 있으니.
“그게…… 가능해? 하루 이틀 안 사이도 아닌데?”
“왜 안 돼? 그저 눈인사 정도만 하고 살자는 건데. 네가 내 인생에 더 이상 껴들지 않는다면, 나도 널 보면서 이렇게 날 세울 이유가 없잖아.”
“…….”
“약속해. 그 어떤 상황이 있더라도 그냥 못 본 척 지나가겠다고. 절대 내 인생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그녀는 단호했다.
“자, 건배!”
저 잔을 마주친 순간 승현은 그녀와의 이 지긋지긋한 관계를 끝내야 한다.
그러나 사심 없이 웃고 있는 그녀의 눈을 보고 있자니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어 제 술잔을 마주 들고 말았다.
과연, 그가 그녀의 인생을 못 본 듯 스치고 지나갈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물론 그 술을 비워내지 못한 채 다시 테이블 위에 놓았지만 말이다.
눈웃음에 반달로 휜 그녀의 눈을 바라보는 승현의 머릿속에 그녀와 처음 만났던 순간이 달게 스쳐 지나갔다.
***
“야, 위승현 둘째 형이 이번에 3학년으로 전학 온다며? 학교가 떠들썩하던데.”
“승현이한테 둘째 형도 있었어? 걔, 형 한 명이잖아.”
“아냐. 미국에서 공부한다던 형 하나 더 있어. 근데 그거 아냐? 걔네 둘째형, 사생아라는 소문이 있어.”
한창 이야기 중인데 곁에 있는 남학생이 말을 끊고 툭툭 찔러댔다.
그제야 말을 하던 남학생은 제 앞으로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를 보게 된다.
더불어 곧 터질 듯한 아슬아슬 한 목소리까지.
“정신 나간 말을 지껄이는 놈들한텐, 매가 약이더라고!”
퍽!
“아아-악! 이게 미쳤나!”
위협을 하듯 현성이 외쳤지만 오히려 승현의 화만 더 북돋우는 꼴이 되었다.
서울에서 TOP5 안에 드는 명문고라 날고 긴다는 귀한 집 자제들이 모여 있었다.
때문에 밖에서 집안끼리는 서로를 견제하고 있으나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경우가 즐비했다.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어린 고등학생들끼리도 보이지 않는 자존심 싸움이 있었다.
이런 곳에서 승현은 단연 상위 1%였고, 그런 그를 시기 질투하는 학생들도 독보적으로 많았다.
승현은 지금까지 아슬아슬한 상황을 잘 넘겨왔었다.
특히나 멱살을 틀어쥐고 있는 조현성 이놈을 잘 무시하며 지내왔단 말이다.
헌데 오늘만큼은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다름 아닌 제 형을 가지고 입을 잘못 놀린 놈이 아닌가!
“미친 새끼들이, 뚫린 입이라고 내뱉으면 다 말인 줄 아나!”
“으아악!”
말릴 새도 없었다.
작정하고 그동안 참았던 주먹을 날리는 듯 거침없이 날아든 주먹은 상대를 넉다운시키고 말았다.
이성을 차리고 보니 이미 상대방은 피투성이다.
그럼에도 승현은 분이 풀리지 않는 듯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소 장난기로 가득 찼던 그 눈동자에 거침없는 폭풍이 일고 있었다.
“잘 들어.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 형에 대해 입 잘못 놀리는 새끼는…… 죽어도 곱게 못 죽어. 알았어?”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라 학생들은 그의 주변에서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소식을 듣고 선생님이 달려왔다.
하지만 기겁하는 선생님을 뒤로 한 채 승현은 교실을 나오고 말았다.
“빌어먹을 학교! 저게 학교야? 맨날 서로 헐뜯고 못 죽여 안달인 국회의사당이지! 아오, 숨 막혀. 진짜!”
결국 승현은 넥타이를 집어 던지고 교문을 나서버렸다.
그날 저녁.
그는 아버지인 위태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아버지가 꿇린 무릎이 아니다. 제가 지은 죄에 스스로 꿇은 무릎이었다.
“왜…… 그랬는지, 물어봐도 되겠냐?”
차라리 화라도 내면 좋으련만, 위태준은 화조차도 내지 않았다.
“그쪽 학생, 전치 6주 나왔단다.”
“그거밖에 안 나왔어요?”
승현이 눈썹을 꿈틀대며 묻자, 위태준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요즘 아부지가 바빠서 너한테 신경을 못 썼다. 사춘기가 온 거냐?”
“아뇨. 저 사춘기, 초등학교 때 뗐어요.”
차마 그 더러운 자식이 제 형에 대해 놀렸던 그 말을 위태준의 앞에서 할 수가 없었다.
대신 승현은 그동안 꼭꼭 참고 있던 말을 쏟아낸다.
“학교에 가면…… 숨 막혀요, 아부지. 쟤는 뉘 집자식이네, 저놈은 뭐 하는 집안이라네. 이따위 것들도 사람 서열이 정해지는 학교예요. 친구들끼리 사이가 좋다가도, 정치적인 문제로 집안끼리 대립하면 그 뒷날부터 절친들끼리 갈라서는 학교라고요. 사방이 적이에요. 아무도 믿을 수가 없어요. 진짜…… 숨을 못 쉬겠어요, 저.”
그가 하소연을 하듯 말했다.
물론 승현은 거기서 단연 먹이 사슬의 가장 위에 위치한 강자였지만 그 피라미드 구조에 가장 큰 피해자이기도 했다.
늘, 외로운 왕이 되어야 했으니까.
“저, 그 학교 다니기 싫어요. 이번 기회에 전학 시켜주세요.”
“정말, 그걸 바라는 거냐?”
“네.”
“알았다.”
위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조차도 내지 않는 아버지의 행동에 승현은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하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
“그리고 또 하나, 작은형…… 거기로 전학시키지 마세요.”
“…….”
“제가 못 견딘 학교예요. 작은형 성격에 일주일도 못 버틸걸요?”
조현성 이놈, 그나마 그에게 맞아 전치 6주지 당사자인 승주에게 걸렸다면 최소 사망이다.
누구보다 승주의 성격을 알기에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가 없었다.
“알았다.”
“또 있어요.”
“또?”
“승희도 보내지 마세요. 어차피 공부 쪽으로는 좀 글렀고, 그럴 바에야 제 맘대로 뛰어 놀게 애초부터 일반 고등학교로 보내주세요.”
“네가 생각할 때 승희가 공부 쪽으로는 아예 희망이 없냐?”
위태준이 짐짓 걱정스러운 듯 물었지만 승현은 듣기 좋은 말이라도 입 발린 말은 할 수 없다는 듯 가장 직설적인 말로 현실을 일깨워준다.
“아부지. 큰형은 이중인격, 작은형은 분노조절장애, 저는 인내력결핍장애, 승희는 주의력결핍장애…… 아시죠, 4종 세트?”
그제야 위태준은 작은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알았다. 나가봐라.”
그가 저린 다리를 달래느라 코에 침을 바르며 일어나 그 방을 벗어나려 할 때였다.
위태준의 어두운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그의 귓가를 조용히 울려왔다.
“승현아. 아부지, 진짜 걱정 안 해도 되는 거냐?”
“그럼요. 저 멀쩡해요. 생각하시는 것보다…… 잘 크고 있다구요.”
그렇게 그 방을 나와 제 방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 나와서도 위태준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오늘 그가 벌인 일은 위태준의 마음에 가시처럼 콕 들어박혀 버렸을 것이다.
이를 어쩌나. 어떻게 해야 무거운 아버지 마음을 덜어드릴 수 있을까.
가뜩이나 까칠한 승주의 귀국으로 인해 걱정이 태산일 텐데 그마저 그 걱정에 일조할 순 없었다.
그때 고개를 돌리다 책상에 놓아둔 과학전람회 신청서를 보았다.
몇 달 전부터 준비하던 것이었지만 전학을 가게 되면 포기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승현은 그 신청서를 들여다보며 곰곰이 생각하다 눈을 반짝였다.
“아니지. 내가 왜 포기해? 새 학교에서 새 지도 교사 찾으면 되지?”
여기서 상이라도 타게 된다면, 위태준이 가지고 있는 우려를 말끔히 지울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아버지의 걱정을 잠재우고자 한 그 일로 인해, 누군가에게 평생 미움을 사게 될 거라곤.
그렇게 승현은 정확히 열흘 후, 그의 가슴을 푹푹 찌르며 거만하게 입을 여는 빛나와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누나라고 불러, 이 자식아.”
그런데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잔뜩 날이 선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것이 빛나가 승현의 가슴에 콕 들어와 박혀버린, 운명의 첫 순간이었다.
***
빛나가 아래층 과학실에서 보잔 말을 남기고 나가 버린 후에 승현의 친구들은 난리가 났다.
“야, 승현아! 그냥 무조건 알았다고 해. 알았어?”
친구들의 호들갑에 승현은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돌려 되물었다.
“뭘 알았다고 해?”
“아, 그냥! 무조건 알았다고 하라고!”
“뭔지 알아야 알았다고 하지.”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무조건 알았다고 하는 게 네 나머지 인생이 편해지는 지름길이야.”
“왜?”
“왜긴! 송곳 마녀 손에 걸려 멀쩡히 학교생활 하는 놈을 못 봤어!”
“송곳 마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고 많은 예쁜 별명 놔두고 왜 하필 송곳 마녀란 말인가.
“절대 마녀의 저주에 걸려들면 안 된다. 저 사악한 마녀한테 한번 걸리면, 약도 없는 병에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은 실연의 아픔으로 정신 줄을 놓게 돼.”
“그래! 넌 우리들의 희망이야! 남자의 자존심을 보여줘! 송곳마녀에게 흔들리지 않는 남자도 있다는 걸 이번 기회에 보여주는 거야!”
생각보다 그녀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모양이다.
약도 없는 병에 시름시름 앓다가 실연의 아픔으로 정신줄을 놓는걸 보면.
“일단 무조건 알았다고 하고 빠져 나와라. 10분 이상 독대하면 사악한 저주에 걸려드니까.”
“아, 비켜. 이야기 들어보고.”
그가 일어나자 형주를 비롯한 친구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주먹을 꼭 틀어쥔 채 조용히 외쳤다.
“퐈이팅!”
그렇게 승현은 과학실에서 빛나와 마주했다.
친구들이 했던 말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빛나의 요구에 절대적인 NO를 외쳤더랬다.
그 과정에서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녀와 10분 이상 독대를 해야만 했다.
벌렁이는 심장을 가라앉히고 날이 선 그녀를 설득시키기 위해서다.
그 결과, 그는 친구들이 경고했던 그 저주에 걸려들고 만다.
그땐 몰랐다.
그것이 죽을 때까지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아주 무시무시한 저주였다는 걸.
***
오늘도 승현은 여지없이 운동장 벤치에 앉아 있는 빛나를 시선에 가두었다.
그런데 그때 형주가 불쑥 나타나 입을 열었다.
“캬, 예쁘지 않냐? 딱 봐도 사랑 많이 받고 자란 부잣집 딸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귀티가 좔좔 하잖냐. 너처럼.”
“너, 혹시 유빛나 좋아하냐?”
“성문고 남학생치고 빛나 누나 맘에 안 두고 있는 놈 있음 나와 보라고 해.”
그제야 승현은 턱을 괴고 있던 팔을 풀고 형주에게 물었다.
“그래서, 고백할 거냐?”
하지만 그 물음에 형주는 기겁을 했다.
“미쳤냐! 난 저런 여자 감당 못 한다. 그냥, 연예인 보는 느낌으로 보는 거지.”
그 말을 듣고서야 승현은 안심이 된 듯, 다시 턱을 괴고 빛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은근 슬쩍 한마디 흘린다.
“잘 생각했어. 넌 고백하지 마.”
“응. 당연한 소릴.”
“내가 할 테니까.”
“응. 내가 할 테…… 응? 뭐라고?”
형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다 멱살을 잡았다.
“야, 이놈의 자식아! 그러게 내가 뭐랬어! 10분 이상 독대하지 말랬지! 너 거기 정확히 16분 48초 동안 있었다! 그러니 안 말리고 버티나!”
“아, 아…… 형주야. 너무 세게 잡았다.”
“이노무 쉑키! 너라도 남자의 자존심을 지키길 바랐건만!”
형주가 기겁을 하며 그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지만 승현은 지금 이 상황이 기분 나쁘지 않은 듯 웃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로 인해 화가 아닌 설렘으로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그래서 두 번 망설이지 않고 고백을 했더랬다.
“나랑, 사귈래?”
물론 그녀에게서 쉽사리 YES란 대답을 들을 거라 기대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눈물을 마주하게 되리라는 기대는 더더욱 하지 않았었다.
그녀가 울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거덜 나버린 그녀는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었던 것이다.
그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아무것도 부족한 게 없어 보였던 그녀가 왜 그토록 과학전람회 하나에 목숨을 걸었는지.
-딱 봐도 사랑 많이 받고 자란 부잣집 딸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귀티가 좔좔 하잖냐. 너처럼.
순간 우스갯소리로 형주와 주고받았던 말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승현은 커다란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돌아서는 빛나를 보며 뒷걸음질을 쳤다.
제가 벌여놓은 이 일을 두 눈으로 마주할 수 없었던 탓이다.
그렇게 그 자리를 벗어나 나오려는데 할머니가 편찮으셔서 빨리 갔다던 형주와 마주쳤다.
“승현아…… 설마, 저거 유빛나야?”
하지만 도저히 형주의 호기심에 장단 맞춰줄 정신이 없었다.
승현은 넋이 나간 눈동자로 병원에서 발길을 돌렸다.
택시를 잡아탔다. 아직도 철렁 내려 앉아 버린 심장은 제대로 뛰질 않는다.
게다가 빛나는 한참 전에 그의 앞에서 등을 돌려 버렸는데도, 주먹을 꼭 틀어쥔 채 울고 있는 그 모습이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평생 그의 가슴에 콕 들어와 박혀버렸다.
마치, 다시는 뺄 수 없는 가시처럼.
***
뒷날, 점심시간에 승현은 우연치 않게 빛나를 보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웃고 있는 그녀에게 사과를 해야겠다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렇게 발길을 떼려던 순간 귓전을 파고드는 속닥거림에 그는 경련을 일으키듯 멈춰서야 했다.
“야, 너 그거 아냐? 유빛나…… 고아래, 고아. 천애 고아.”
“뭐? 말도 안 돼! 쟤가?”
“왜 말이 안 돼? 난 이제야 이해가 가는데. 그래서 저렇게 악착같이 뭐든지 잘하려고 했던 거야.”
순간 머릿속이 암전되었다.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빛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얀 햇살을 받아 그 웃음은 눈이 부실 만큼 예뻤단 말이다.
그러나, 무릎에 놓인 그녀의 가냘픈 손이 스커트 자락을 힘 있게 쥐는 모습을 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그 순간, 스치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어젯밤 그 병원에 있었던 또 다른 한 사람이 말이다.
그렇게 반으로 들어온 그는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형주를 찾았다.
승현은 다짜고짜 형주의 멱살을 잡고 그곳에서 끌어내었다.
“이 미친 새끼! 남자 새끼가 그새를 못 참고 입을 놀려 소문을 만들어? 미친 거 아냐?”
“승현아, 그게 말이야…….”
퍽!
결국 승현의 주먹이 형주의 턱뼈를 스쳤다.
그제야 그의 분노를 제대로 읽어낸 형주의 눈빛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승현아! 내 말 좀 들어봐! 내가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유식이랑만 이야기한 건데 윤정이가 그걸 듣고는…… 그래서 그만 소문이 삽시간에…….”
“이 새끼가, 그래도 변명이야! 네 그 말 한마디에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 알아?”
“좋아! 실수 인정! 난 맞아도 싼 놈이야. 안 그래도 엄청 후회하고 있다고…….”
자포자기 한듯 그의 주먹 앞에서 고개를 숙여버린 형주의 모습에 치솟던 화가 목적을 잃고 방황했다.
그제야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내리긴 했지만 여전히 형주의 멱살은 움켜쥔 채였다.
“넌 그냥 실수지만, 걘…….”
자꾸 웃는 얼굴과는 달리 하얀 뼈마디가 붉어져 나왔던 그 작은 주먹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지금 그녀의 심정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자존심 하나로 지금까지 먹고살았던 그녀가 아닌가.
“승현아, 빛나 누나한텐 말하지 않을 거지? 내가 그랬다고…….”
그러나 기가 죽어 사정을 하듯 입을 연 형주의 모습에 결국 그는 의욕을 잃었다.
어쩌면 형주의 탓이 아닌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그가 모든 걸 양보해버렸다면,
그깟 자존심 그냥 버렸다면,
애초에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결국 모든 게 그의 탓이다.
하지만 그에겐 이 모든 것을 바로잡을 기회조차도 없었다.
그 후로 빛나는 승현의 눈을 마주 보지도 않았고, 그렇게 몇 달을 보내다 곧 졸업해버렸으니까.
-나랑, 사귈래?
처음으로 누군가한테 했던 그 고백은 영원히 그 대답을 듣지 못했다.
-너한테 그날 이 말을 하지 않은 건, 가장 미련한 실수였고 마지막 남은…… 내 자존심이었어.
그리고 불같이 찾아왔던 그의 첫 설렘은 가슴 떨리는 처참함으로 영원히 남아버렸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느꼈던 두근거림이었다.
***
흩어진 과거를 떠올리는 승현의 눈빛이 아련했다.
술에 취하진 않았지만 그녀에게 취하고 추억에 취해버린 듯 정신이 몽롱하다.
그리고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철없던 어린 시절, 설렘으로 인해 마지막으로 심장이 뛰었던 그 순간을.
“너…… 였어.”
그랬다.
그의 심장을 화가 아닌 설렘으로 뛰게 만든 것도 그녀였고, 또한 멈춰버린 것도 그녀였다.
“뭐라고?”
그녀가 되물었지만 승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뭐야, 딴생각 중이었어?”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일어났다.
“그만 가자. 너무 늦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나.
승현이 시계를 보는 사이 빛나가 일어나 계산을 했다.
가볍게 계산을 끝내고 돌아서려던 찰나 빛나는 너무 놀라 멈춰서고 말았다.
“빛나야…….”
지금 이 순간,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인간.
“원준 오빠?”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지금쯤 꿈같은 신혼여행에 있어야 할 원준이 도대체 여긴 웬일이란 말인가!
게다가 한참이나 젊고 예쁜 신부까지 옆에 끼고서 말이다!
하지만 유빛나 수난시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늘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면 여지없이 찾아오는 그가 오늘도 예외 없이 이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빛나의 흔들리는 동공이 절로 원준에게서 저만치 떨어져 있는 승현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넋을 놓았던 그 눈매가 진해지며 사악하게 빛나는 모습을.
더불어 그렇지 않아도 오만한 입술 끝이 더욱 치켜 올라가는 모습을.
언젠가 본 적 있는 얼굴이다.
저런 모습을 마지막으로 봤던 게 언제였더라?
아, 이제야 기억났다.
대학교 2학년 때, 같은 과 후배가 그녀를 농담 삼아 입에 올렸던 그날 그 녀석 어깨 너머로 딱 저렇게 웃고 있는 승현을 봤더랬다.
그 결과 그녀는 3년간 왕따 아닌 왕따를 당하지 않았던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때 모습 그대로 승현은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가오자마자 다정하게 빛나의 어깨에 팔을 둘러왔다.
그러곤 원준을 향해 사악하게 입꼬리를 말라 올리며 입을 열었다.
“누구시더라…… 우리 빛나랑 아시는 분이던가?”
그녀의 일에 참견하지 않기로 약속한 지 불과 30분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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