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설레게하는 그대-6화 (6/94)

6. 가장 최악일 때 나타나는 남자

2017.12.24.

“포기해. 그거.”

빛나는 팔짱을 끼고 선 채 전학생에게 기가 밀리지 않기 위해 일부러 말을 짧게 했다.

하지만 다른 이에겐 100프로 먹혀들었던 그녀의 살벌한 오만함이 이 녀석에겐 전혀 먹히지 않는 모양이다.

“내가 왜.”

그녀보다 말이 더 짧은 것을 보면 말이다.

빛나는 생각보다 큰 이 녀석의 키를 쭈욱 올려다보았다.

생긴 거는 앳된 남동생인데 신체 사이즈는 헉 소리가 날만큼 상남자다.

고등학생에게서 이런 아우라가 품어져 나온다는 게 믿을 수 없을 만큼.

하지만 여기서 밀릴 순 없었다. 빛나는 그 상금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너 전학생이잖아.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는 거 봤어? 내가 먼저 준비했던 거야. 그 과학전람회, 내 거라고.”

“나도 몇 달 전부터 준비했던 거야.”

빠직!

빛나의 이마에 실핏줄이 돋는 것 같았다.

생긴 것도, 신체 사이즈도, 게다가 말투도 맘에 들지 않는 녀석이었다.

“지도 교사 없이 고등학생이 전람회 참가할 순 없어. 안 그럼 일반부로 가야 한단 말이야. 그럼 수상 가능성이 희박해지고.”

“듣자하니, 고3이라며? 전람회 준비할 시간이 있어?”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 신경 끄고!”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 넌 수상 경력 따위 없어도 네가 원하는 대학 충분히 갈 수 있다고. 공부를 그렇게 잘한다며?”

그 말에 빛나의 어깨가 우쭐해졌다.

있는 사실을 이야기 하는 건데도 녀석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를 듣자니 가슴 한 켠이 뿌듯하다.

그런데.

“나는 수상 경력이 필요해. 그걸로 대학 갈 건 아니지만 지금 이쯤에서 그런 전람회에서 주목 한번 받아줘야 내가 살 수 있거든. 그러니까 그게 불필요한 너보단 나한테 기회가 주어지는 게 맞지. 안 그래? 넓은 아량으로 양보 좀 하라고.”

녀석으로 인해 뿌듯해졌던 가슴의 바람이 순식간에 빠졌다.

정말 사람 들었다 놨다 하는 재주가 탁월한 놈이었다.

“수상 경력이 필요한 게 아니지만 나도 그거 꼭 해야 돼. 그러니까 네가 빠져.”

“그 ‘꼭’ 이라는 이유가 뭔데? 나를 납득시키면 해줄게.”

“넌 대학 갈 것도 아니면서 수상 경력이 왜 필요한데?”

“사고 쳤거든.”

순간 그녀의 눈이 커졌다. 너무도 쉽게 이야기하는 녀석 때문에 당황했기 때문이다.

“사고 치고 전학 왔어. 순간 눈이 돌아서. 아빠한테 아직은 내가 멀쩡한 놈이라는 걸 보여드리고 싶어. 그냥…… 나 아직은 멀쩡한 놈이니 걱정 말라고, 안심하시라고……. 말보다는 보여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생긴 거는 엄마 말 더럽게 안 듣는 청개구리처럼 생겨서 말하는 거 보니 또 효자다.

이 부분에서 빛나는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잘 보여야 할 부모님은 없지만, 아들 걱정하는 부모에게 제 스스로가 멀쩡한 놈이란 걸 증명해 보이려는 녀석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그러나 녀석의 다음 말에 약해지던 마음이 순식간에 돌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선생님이 그러시던데. 내 주제가 네가 선택한 주제보다 낫다고.”

“너 이 자식…….”

“일주일 줄게. 일주일 안에 나보다 더 나은 아이템을 선택해서 가져와 선생님 설득시키면 내가 물러나 줄게. 자, 그럼 공평한 거지?”

지금 장난하나!

낼 모레가 시험이다.

그런데 한 달 동안 고민했던 주제를 포기하고 일주일 만에 새 아이템을 찾아오라고?

이게 정신 멀쩡히 박힌 놈이 할 수 있는 이야긴가?

빛나는 두 주먹을 꼭 틀어쥐었다.

그럼에도 반박할 여지가 없음에 자존심이 시궁창으로 처박히는 기분이었다.

“너 그게 말이야, 밥이야? 가능하다고 생각해?”

“네 아이템이 내 것보다 우승 가능성이 있다면, 당연히 물러나주겠다고 말하는 거야.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잖아. 내 것보다 뒤쳐진 그 아이템에 내 자리를 내줄 만큼 나 바보 아니야. 그리고 그만큼 우승도 절실하고. 말했잖아. 이 대회, 꼭 나가야만 하는 이유.”

“…….”

“그런데 넌 아직도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았어. 그 이유로라도 나를 설득시키면 지금 당장이라도 빠져줄게. 나보다 이 대회가 더 절실한 이유…….”

장난기가 사라진 아몬드형 눈매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눈앞에 이 녀석이 불과 좀 전까지만 해도 교실에서 시끄럽게 말뚝 박기를 하며 천진하게 놀던 그 녀석이 맞나 싶을 만큼, 앳된 얼굴에 드러난 그 진지함은 빛나로 하여금 말문이 막히게 만들었다.

그녀는 대회 우승이 아니라, 대회 상금이 필요했다.

하지만 거만하고 거칠 것 없는 이 버르장머리 없는 전학생에게 그녀의 치부를 공개하고 싶진 않았다.

결국 빛나는 ‘그 이유’로 그를 설득하지 못했고, 대회를 포기해야만 했다.

누군가에 의해 처음으로 제 자리를 빼앗긴 순간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생각보다 처참했다.

***

“이번에 위승현, 전국 과학전람회에서 대통령상 받았대!”

“대…… 봑.”

“어린노무 쉐끼가, 생긴 것도 훈훈해, 뇌까지 섹시하단 말이지.”

곁에서 그 대화를 듣던 빛나는 샤프를 쥔 손에 너무 힘을 준 나머지 그 심이 부러진 것도 모자라 노트에 구멍까지 뚫고 말았다.

결국, 녀석이 해냈다.

얄밉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실이었다.

녀석이 그녀보다 앞섰고, 과학 선생님이 옳았던 것이다.

“근데…… 그 자식 성격이 보통이 아냐. 봤냐? 저번에 3학년 한성훈이를 꼼짝 못 하게 하는 거!”

“한성훈이를? 말도 안 돼!”

“근데 말이 되는 이야기일지도 몰라. 소문에는 위승현 집안이 조폭이라는 이야기도 있어. 한 주먹 한다는 이야기지. 그래서 전 학교에서 주먹으로 사고 치고 이쪽으로 왔다는 전설 아닌 전설?”

“그러네. 말이 되네. 솔직히 신체 조건으로 따지면 한성훈이 위승현한테 밀리잖아?”

“그렇지. 바디조차도…… 참으로 훈훈하지.”

학교가 떠들썩했다.

전학 온 지 몇 달 만에 위승현이란 인간은 이 학교를 접수하고 만다.

학생들 사이에 유명 인사가 되었음은 물론이요, 이번 과학전람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것으로 선생님들한테까지 제대로 눈도장 찍었으니 말 다 했다.

빛나는 화가 부글부글 끓었다.

그녀가 2년 반 이상을 함께 한 학교가 아닌가.

그동안 그녀는 누구보다 노력했고, 겨우 여기까지 올라왔다.

헌데, 위승현은 그녀가 한 2년 반의 노력이 무색하리만큼 순식간에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어딜 가나 그 녀석의 이야기였다.

훈훈한 외모는 물론, 사교성도 좋았고, 항간에는 주먹도 잘 쓴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게다가 친구들의 말처럼 뇌까지 섹시하니 순식간에 성문고의 스타가 되는 건, 어쩌면 녀석이 처음 전학 오던 날부터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를 악 물었다.

어쨌든 그녀는 곧 졸업을 할 고3이었으니 제 자리를 녀석에게 내주어도 서운할 게 없었다.

하지만 하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위승현이냔 말이다!

“망할 자식…….”

저도 모르게 욕설이 입가를 맴돌았다.

열이 받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하루를 보냈다.

학교가 끝난 늦은 시각, 빛나는 가방을 메고 나오다 승현과 부딪쳤다.

“얘기 들었지? 나 상 탔어.”

곁으로 스윽 다가와 하는 말에 빛나가 승현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래서, 자랑하려고 왔냐?”

“아니. 고맙다는 말 하려고.”

그 말이 더 그녀를 더 열 받게 한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 걸까.

“나한테 고맙다고 할 게 뭐가 있는데?”

“네가 양보해준 거니까.”

“듣기 싫어. 그 소리가 더 열 받아.”

빛나는 차갑게 대꾸하고 돌아섰다.

하지만 승현이 끈질기게 그녀 곁으로 따라 붙는다.

“내가 밥 살게. 상 탄 기념으로.”

“이게 진짜! 내가 왜 너랑 밥을 먹어야 하는데!”

“고마우니까 사겠다고.”

“그렇게 고마우면, 제발 내 앞에서 꺼져줘!”

“넌 날 보면 꼭 그렇게 날을 세우더라? 자꾸 그러니까 더 매력 있잖아, 유빛나.”

씨익 웃으며 하는 그 말에 빛나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야-아! 이 자식아! 넌 2학년! 난 3학년! 누나라고 불러! 어디서 따박따박 이름질이야-악!”

“난 내 핏줄 아니면 누나라고 안 불러. 그리고 불행하게도 위로 형만 둘에 아래론 여동생 하나야. 누나 없어, 나한텐.”

이 미친 자식의 머리채를 잡아채고 싶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이룰 수 없는 꿈이다.

그러기엔 승현과 빛나의 키 차이가 너무 커 그의 머리채를 잡으려면 공중 점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빛나가 씩씩거리고 있는데 승현은 그런 그녀를 앞서가며 얼굴을 마주한 채 장난스럽게 웃는다.

이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녀석의 배포에 기립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천하의 유빛나 성질머리를 이렇게 긁어놓고 무사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기에.

헌데, 그때 녀석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한마디가 튀어 나왔다.

“나랑, 사귈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아니면 그녀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환청이 들리거나.

“나랑…… 사귀자.”

세상에나,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으아아-악! 이 미친놈을 진짜! 죽여버릴 거야-아!”

놀리는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빛나는 다짜고짜 손을 뻗어 녀석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야, 잠깐! 진정해! 진정!”

“넌 내가 우스워 보이냐? 나 누르고 대회 나가 대통령상 하나 타니까 눈에 뵈는 게 없지?”

“그게 아니라…….”

“오늘 너 죽고, 나 살자!”

승현의 넥타이를 틀어잡고 놓질 않았다.

여자치곤 손아귀 힘이 어찌나 센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빠져 나올 수 없었다.

헌데 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들려왔다.

승현은 그것이 빛나의 교복 안주머니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전화! 전화! 급한 전화일 수도 있잖아!”

“어디서 수작을! 그럼 내가 놔줄 줄 알고?”

“아니, 진짜 전화라고! 잠깐 이성을 찾고 귀를 기울여봐. 너…… 핸드폰 울리잖아.”

승현의 말을 듣고 보니 교복 안주머니에서 미세한 벨소리가 들려온다.

이 시간에 전화할 사람이 없다는 걸 알기에 더욱 믿을 수 없는 벨소리였다.

“너 잠깐 기다려. 아직 안 끝났어.”

빛나는 교복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는 그 순간까지 승현의 넥타이를 단단히 틀어쥔 채였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목숨 줄처럼 틀어쥐고 있던 승현의 넥타이를 스르르 놔줘버렸다.

빛나의 손아귀에 들려 있던 핸드폰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그녀는 제 핸드폰도 챙겨들지 못한 채 도로변으로 뛰어 들어 택시를 잡기 시작했다.

놀란 승현이 그녀의 핸드폰을 주어 들고 다가와 택시에 함께 탔다.

정신이 없던 빛나는 차마 그를 말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였다.

“한일 병원이요, 아저씨…… 빨리요. 최대한 빨리…….”

덜덜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간절하게 들렸다.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그렇게 병원까지 온 빛나는 미친 듯이 응급실로 뛰어 들어갔다.

한곳에서 낯익은 아이 둘이 울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품으로 달려와 안겼다.

“소현아, 원장 수녀님는?”

“흐아앙, 언니…… 원장 엄마가 넘어졌어. 계단을 내려오다…… 흐흐흑…….”

“이해인 씨 보호자 되십니까?”

“네, 제가 보호잔데요.”

“가벼운 뇌진탕입니다. 지금 당장은 걱정하실 건 없지만 문제는, 관절염입니다. 걷지도 못할 정도로 통증이 심하시니 최대한 빨리 수술을 하셔야 할 거에요.”

“알겠습니다. 저희 원장 수녀님, 얼굴 봐도 되죠?”

“네. 하지만 지금 아마 주무시고 계실 겁니다.”

의사가 사라지고 나자 빛나는 일단 아이들부터 달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직접 사고 현장을 목격했으니 얼마나 놀랐나 싶어서다.

“소현아, 원장 수녀님은 괜찮으시다니까 영호 데리고 저쪽에 가서 앉아 있어.”

“응. 근데 언니, 원장 엄마 수술 언제 시켜줄 거야? 언니가 원장 엄마 수술 시켜준다며. 대회에서 상금 타면…….”

그 말에 빛나는 이를 악 물었다.

결국은 그녀의 알량한 자존심이 벌인 대형 참사인 것이다.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한마디면 되었을 것을.

눈물이 차올랐다.

참고 있던 설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폭발했다.

“근데…… 누나, 저 형은 누구야?”

가까스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고 있는데 곁에 있던 영호가 손가락질로 누군가를 가리킨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돌아선 그곳엔, 넋을 잃은 승현이 서 있었다.

빛나가 이를 악물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그날 하지 못했던 그 한마디를 조심스레 흘려본다.

“나는, 대회 우승이 아니라…… 상금이 필요했던 거다…….”

“왜…….”

“그리고 너한테 그날 이 말을 하지 않은 건…….”

“…….”

“가장 미련한 실수였고…… 마지막 남은…… 내 자존심이었어.”

말을 마친 그녀가 승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참고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초등학생 이후로 단 한 번도 흘려 본적 없는 눈물이다.

울지 않겠다 맹세했던 그날 이후로 누군가에게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눈물이었단 말이다!

하지만 그 마지막 자존심이 무너져 버린 지금, 그녀는 더 이상 창피할 게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벌거벗겨진 채 승현의 앞에 섰다.

그 모습이, 그 후 그의 인생에 얼마나 큰 미련으로 남을지 전혀 모른 채.

***

“기억나지? 그날 널 병원에서 본 이후로 그동안 지켜왔던 내 자존심은 걸레가 됐어. 내가 보육원 출신이라는 사실이…… 뒷날 학교를 발칵 뒤집었으니까. 넌 몰라. 내가 어떤 심정으로 나머지 고3 생활을 했는지.”

지옥 같던 나머지 고3 생활이 머릿속을 맴돌며 그때 감정이 되살아나자 빛나의 눈동자가 검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만감이 교차하긴 승현도 마찬가지였다.

이제야 어디서 오해가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왜…… 날 찾아오지 않았어? 네 성격이었다면, 뒷날 날 찾아와 멱살 틀어쥐며 왜 그랬냐고 캐물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내 탓도 있으니까. 진실을 말 안 하면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근데…… 진실은 말 안 한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더라고. 아주 값진 경험이었어. 그래서 다시는 그런 실수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야. 물론, 더러 시행착오는 있지만.”

그 시행착오, 크게 있었다.

그 진실을 말해버리는 바람에 그녀는 약혼자에게 파혼을 당했으니까.

그러나 그때의 뼈저린 경험이 그것이 옳다, 이야기 하고 있었다.

“대학 때도 생각나니? 넌 우리 학교에 다니는 게 아닌데도 단 5분 등장으로 내 3년을 말아 먹었어. 네 여자라고 선언했던 그 장난스러운 한마디 때문에 남은 3년 동안 남자친구 한번 제대로 못 사귀고 왕따를 당했다고.”

“그건…….”

승현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변명은 구차한 거라 배웠다.

그래서 잘못한 자신의 행동에 대해선 달게 벌을 받을망정, 절대 변명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품고 있는 진실은 그녀에게 쓰디쓴 독약이 될 수도 있으니 모르는 게 나을 듯싶었다.

“4년 전도 기억나지? 사법고시 막 패스했을 땐 세상 정의는 다 내가 지킬 줄 알았어. 그렇게 의욕 충만한 내게 처음으로 닥친 시련. 이 바닥도 돈 없이, 백그라운드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거. 1년 동안 면접만 전전긍긍했어. 그동안은 내가 실력이 없어 떨어진 줄 알았지. 근데 말이야…… 4년 전, 널 다시 만날 그날, 그 친구.”

승현은 4년 전 그때를 떠올렸다.

한참 젊은 패기에 놀고 다니던 시절, 우연히 면접을 본다는 친구를 기다리다 빛나를 재회했던 바로 그 순간을 말이다.

비가 오는 날이었고, 의외로 면접이 빨리 끝난 친구 덕에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오래 걸릴 줄 알았더니, 빨리 끝났네?

-오래 걸릴 게 뭐 있어? 그냥 형식상 보는 면접인데. 어차피 이 자리 내 거야. 낙하산이라 소문날까 봐 만든 자리야. 한마디로 나머지는 다 내 들러리란 이야기지.

-뭐야? 이 자식 보게. 미친 거 아냐?

-야, 사는 게 다 이런 거야. 어쩔 수 없다고. 근데 말이야, 내가 오늘 아주 기가 막힌 애를 봤다? 이-야, 이 비주얼이 이쪽 계통은 아니더라고. 몸매도 아주 그냥…… 도도, 섹시, 갖출 건 다 갖춘 애더라고. 연락처라도 받아둘걸 그랬나 보다. 혹시 아냐? 나한테 잘 보이면 내 옆자리로 한자리 내줄지. 안 그래?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그 도도, 섹시, 갖출 건 다 갖춘 여자가 유빛나일 거라곤.

잠시 후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친구는 찬물 한 컵을 시원스럽게 뒤집어썼다.

앉아 있는 친구 위로 남은 물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내는 빛나를 보았다.

-아악, 젠장! 너 뭐야!

-나? 도도, 섹시, 갖출 건 다 갖췄는데도 백 없어 너한테 밀린 네 들러리.

-뭐야? 이게 미쳤나!

-잘 들어. 너한텐 우습게 여겨지는 면접이었겠지만 너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한텐 그 자리가 인생이었어. 남의 인생, 그렇게 우습게 보는 거 아니야. 네 인생 귀하면 남의 인생도 귀한 줄 알아야지. 능력 없으니 낙하산이란 소문도 두려운 거겠지. 네 옆자리? 미안하지만 내가 사절. 왜냐고? 나는 부모 백 믿고 대가리 없이 설치는 놈들은 아주 딱 질색이거든.

그렇게 빛나는 길길이 날뛰는 그의 친구를 뒤로하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더랬다.

그 모습이 얼마나 당당하고 예쁘던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하지만 그에겐 예뻐 보였던 그 순간이, 그녀에겐 더 없이 최악의 날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 능력에 한계를 느낀 날이었어. 죽기 살기로 바둥거려도 너희들이 앉은 자리와 내가 앉은 자리는 정당한 방법으로는 동선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았거든. 네 잘못 아니라는 거 알아. 그냥 그 순간, 그 타이밍에 네가 있었다는 것뿐. 근데 말이지, 승현아…….”

난생처음으로 그의 성을 빼고 이름만 부르는 그녀의 음성이 유독 다정하게 들렸다.

날이 서지 않는 그녀의 눈매는 유독 사랑스러웠다.

그래서인지, 느리게 흘려내는 빛나의 다음 말은 그렇지 않아도 애가 타는 그의 가슴에 콕 들어와 박혀버렸다.

“넌 왜 맨날…… 내가 가장 최악일 때 내 앞에 나타나는 거니?”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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