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설레게하는 그대-5화 (5/94)

5. 그녀, 그를 만나다

2017.12.20.

이정에게 떠밀려 승현의 품으로 날아 들어간 순간 이미 이 자리는 예견되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어찌나 든든하게 그녀를 감싸고 있던지 후들거리는 다리가 곧추설 정도였다.

“하, 잡았다. 그럼 우리…… 가는 거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손을 흔드는 이정이 보였다.

철천지원수란 호칭이 위승현에게서 이정에게로 옮아가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승현을 따라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정의 말대로 애교까지 피워줄 순 없지만 밥 한 끼 정도는 먹어줄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그렇게 마주 앉은 순간이건만, 빛나는 5분도 되지 않아 이 자리를 후회했다.

“우리 알고 지낸 게 10년인데 밥 한 끼 제대로 안 먹었네, 그치?”

가까이서 마주한 승현의 모습은 빛나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완벽했기 때문이다.

날렵한 얼굴형이 그러했고, 짓궂은 눈동자가 그러했으며, 매력적인 입꼬리가 그러했다.

만일 이런 인연으로 만나지 않았다면 그들은 어땠을까, 하는 쓸데없는 상상을 불러일으킬 만큼 나이 서른에도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은 천진한 개구쟁이 같았다.

그래서 이 자리가 싫었다.

그를 미워하게 된 이유를 잊어버릴까 봐…….

“우리 진짜 오늘로 그건 끝내는 거다. 딴소리하기 없기. 내가 차라리 돈을 물어줬음 물어줬지 그거 하나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긴 싫어.”

“당근. 유빛나, 내가 끈다고 끌려올 여자도 아니고…… 나도 그렇게 뒤가 구질구질한 놈은 아니거든.”

눈앞의 사케는 아직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그 말을 하는 승현의 목구멍이 알싸하고 따끔했다.

그랬다. 이것이 현실이다.

유빛나와 그는 이러한 조건주의 만남이 아니면 절대 서로 독대할 수 없는 악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승현은 그 악연을 오늘로 끝내기 위해 왔다.

무엇이 원인인지만 알면 그 오해를 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더불어 그녀의 반응에 주책없이 나대는 그의 심장도 그 원인을 밝혀낼 수 있으리라.

그렇게 비싼 대가를 치르고 마련한 자리였지만 눈앞에 앉아 있는 빛나는 자그마한 틈도 보이지 않을 만큼 견고했다.

여전히 도도했고, 여전히 아름다웠으며, 여전히 날이 섰다.

저 날을 무디게만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좋아. 물어보고 싶은 거 있음 물어봐.”

하지만 빛나는 이 자리를 어서 끝내고 싶은 듯 젓가락을 놓자마자 본론부터 꺼냈다.

그러더니 도무지 맨 정신으로는 이 자리를 버티기 힘든 듯 사케 한 잔을 원샷했다.

“천천히 마셔. 취하겠다. 초밥이랑 같이 먹으라고.”

“걱정 마. 좀 전에 먹을 만큼 충분히 먹었어. 너나 많이 먹어. 배고프다고 징징댄 건 너잖아.”

“그러네. 근데 너 잘 먹는 거 보니까 내가 다 배부르더라고.”

젠장, 그랬다.

하루 종일 바빠 제대로 된 식사를 못한 덕에 초밥 한 접시와 사시미 한 접시를 다 비워낸 건 그녀였다.

“사실 여기 단골집이야. 한동안 안 오긴 했지만.”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이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승현이 그녀의 회사 근처로 선택한 레스토랑은 바로 전 약혼자인 원준과 자주 왔던 스시 레스토랑이었던 것이다.

그와 헤어진 후 발길을 끊어버린 곳이기도 했다.

“그래. 잘됐네. 초밥 싫어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근데 누구랑?”

“뭐?”

“단골집이라며. 누구랑 같이 왔냐고.”

승현이 무심코 한 질문에 빛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다 결국은 날을 세우며 물음을 되날렸다.

“그런 거 물어보려고 이 자리를 만든 건 아닐 텐데?”

빛나 말이 맞았다. 그걸 물으려고 이 자리에 앉은 건 아니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녀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도 궁금했고, 일을 하지 않는 날엔 뭘 하는지도 궁금했으며, 만나는 사람이 있는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그녀가 대답해주지 않을 거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대신, 그녀가 원하는 대로 본론으로 들어갈 준비를 했다.

비워진 그녀의 잔을 다시 채워주고 난 후, 승현은 조심스레 턱을 괴었다.

그러곤 한층 평온해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

그제야 빛나는 그의 분위기가 좀 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좀 전엔 그녀와 마주하기 위해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와 같았다면, 지금은 그녀가 조금만 틈을 보여도 덮칠 수 있는 섹시한 늑대 같았다.

위험하다!

빛나의 머릿속에 빨간 불이 켜졌다.

그래서 그녀는 테이블에서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척추를 의자 등받이에 바짝 붙여 앉으며 입을 열었다.

“뭔…… 데?”

그러자 승현의 입술이 느릿하게 열린다.

“넌 도대체 내가 왜 그렇게…… 싫은 건데?”

순간 빛나는 잠시 당황했다.

물론 노골적으로 그를 내치고 밀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대놓고 질문을 던질 거라곤 상상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척이나 불편한 질문을 저렇게 섹시하게 할 수 있다니, 화가 난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 아니지?”

“모르니까 묻는 거야.”

“참, 기가 막혀서…….”

어떻게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로 인해 고등학교 시절 1년, 대학 3년이 그녀에겐 지옥이었는데 말이다.

순간, 지난 과거를 떠올리는 그녀의 눈동자에 작은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

“몇 학년이라고? 2학년?”

“응. 이틀 전에 전학 왔는데 모르는 사람이 없대.”

“그렇게 잘생겼어?”

“매력 터짐. 간지 대박. 그냥 자체가 화보.”

아침부터 술렁이는 반 분위기 때문에 도무지 공부가 되지 않았다.

빛나는 수학 문제를 풀다말고 고개를 들어 그녀의 절친인 영지와 민영을 번갈아 보았다.

“아니, 전학생 하나 가지고 웬 호들갑이야? 그것도 2학년이라며. 잊었니? 우린 3학년이야.”

하지만 두 친구는 빛나의 말에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 벌써부터 흥분하고 짝짝꿍을 하는 등 난리가 났다.

그 모습에 빛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고작 전학생 하나에 이토록 술렁이다니, 낼 모레가 시험인데 분위기에 휩쓸릴 순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 1등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흥분해서 떠드는 절친들이 불쌍해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그녀는 수학 문제를 풀던 볼펜을 내려놓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보나마나 양아치에 생 날라리일 거야. 거기에 조금 생겼으니 바람둥이겠지.”

“어머, 야…… 넌 아직 보지도 않았으면서 그렇게 사람을 매도해?”

“안 봐도 뻔하지. 자, 생각해봐. 고등학교 때, 그것도 남녀 공학으로 전학을 온다는 게 가능한 일이니? 웬만하면 고등학교 땐 전학 안 다녀. 적응도 어렵고 민감한 시기니까. 그런데 전학을 왔다? 분명 둘 중 하나야.”

“둘 중 하나?”

“부모님이 직장을 옮겨 부득이하게 삶의 터전을 옮겨야 하는 케이스.”

“그럼 나머지 하난?”

“사고 치고 전학 온 거지. 근데 허우대 멀쩡하다며. 후자일 가능성이 많아.”

“하긴…… 걔, 애들이 관심 많아서 전에 다니던 학교 어디냐고 물어봤는데도 말 안 해준대. 선생님도 말 안 해주고.”

“거봐. 내가 뭐랬어? 그러니까 우리 그런 녀석 때문에 귀한 시간낭비 하지 말고 공부하자고. 고3이잖아, 우리.”

그녀는 말을 하며 다시 볼펜을 다잡았다.

도대체 어떤 놈이 전학을 왔기에 그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고3 수험생들에게까지 영향을 준단 말인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케이스라 짜증이 났다.

그런데 그때 다른 친구가 들어와 빛나를 불렀다.

“야, 반장. 과학 선생님이 부르시던데? 지금 당장 교무실로 오래.”

갑작스러운 부름에 빛나는 들었던 볼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교무실에서 과학 선생님을 만나 독대를 한지 10여 분도 지나지 않아 빛나는 제 본분을 망각한 채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선생님,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예요! 지도 교사 없이 제가 어떻게 대회를 나가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어차피 넌 공부를 잘해서 수상 경력 따위 없어도 충분히 네 능력으로 대학 갈 수 있잖니. 네 담임 선생님한테 물어보니 어떤 대학이든 네 초이스라던데. 그리고 너 고3이잖니. 이왕이면 대회 준비할 시간에 공부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니,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요?”

애가 탔다. 과학 선생님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어 반박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요, 선생님. 공부하면서 대회 준비할 수 있어요. 진짜 잘할 수 있다구요!”

“알아. 알아. 너 욕심 많은 아이인거. 그래서 내가 예뻐하는 거고. 하지만 빛나야. 선생님도 많이 생각했어. 뭐가 이익일까. 특별히 그쪽 선생님이 부탁해서 내가 이러는 게 아니야. 두 사람의 주제를 놓고 비교해봤을 때, 저쪽이 네가 하려는 주제보다 조금 더 흥미로워 사람들이 관심을 끌 수 있었어.”

“그쪽 선생님 부탁이요? 무슨 선생님이요?”

“아, 전학생이거든. 그쪽 학교에서 전화가 왔더라고. 지금까지 준비한 그 과정이 아까워서 모든 자료를 넘길 테니 잘 좀 지도해달라고.”

“말도 안 돼. 그럼 제가 전학생한테 밀린 거예요?”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빛나는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아니, 네 주제가 그쪽 주제에 밀린 거지. 말했잖아. 그쪽 선생이 특별히 부탁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고. 그리고 네 담임 선생님도 걱정이 좀 많으셨고. 고3인데 대회 준비하느라 그쪽에 시간을 너무 많이 할애하는 건 아닌가 하고.”

기가 막혔지만 빛나는 이 상황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담임 선생님이 평소 대회 준비를 걱정한 것도 사실이었고, 더군다나 그녀의 주제가 밀렸다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없지 않은가!

그래도 억울했다. 분하고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단 말이다.

그래서 빛나는 주먹을 꼭 틀어쥔 채 물었다.

“걘…… 고3이 아닌가 봐요?”

“응. 2학년이야. 아직은 여유가 있는 시기지.”

그딴 거엔 관심 없다.

그저 선생님 입을 통해 그 잘난 전학생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확실해졌다.

불과 몇십 분 전까지만 해도 절친들의 입을 통해 전해들은 그 전학생임을.

빛나는 조용히 교무실을 나왔다.

과학 선생님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평소 단정하고 공정한 분으로 소문이 난 만큼 누군가의 부탁으로 그녀의 자리를 덥석 굴러온 전학생에게 내어주진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의 말처럼 그녀석의 주제가 그녀의 주제보다 훨씬 흥미로워 대회에서 주목을 받을 만했기 때문에 고민 끝에 결정한 것이리라.

그래도 억울한 건 억울한 거다.

전국 과학전람회.

-어차피 넌 공부를 잘해서 수상 경력 따위 없어도 충분히 네 능력으로 대학 갈 수 있잖니.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수상 경력이 아닌 상금이 필요했다.

그 상금이 있어야만, 원장 수녀님의 무릎 수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국 과학전람회는, 끙끙 앓다 이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해 지팡이를 짚는 원장 수녀님의 모습이 안쓰러워 고등학생인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담임 선생님의 걱정처럼 굳이 필요하지 않은 수상 경력이지만 공부하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 대회 준비를 해왔던 것이다.

친구들은 이런 그녀에게 독하다 했다.

공부도 공부지만, 대회부터 반장까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그 일들을 완벽하게 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도 뒤쳐질 수가 없었다.

모든 걸 완벽히 해내야만 천애 고아라는 그녀의 뒤 배경에 대해 먼저 의구심을 품는 사람이 없을 테니.

그 덕에 그녀는 단 한 번도 제 밥그릇을 남에게 빼앗겨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감히, 어떤 자식이…….”

얼마나 잘난 자식인지 얼굴을 봐야겠다.

도대체 얼마나 잘났기에 전학 온지 이틀 만에 그녀의 자리를 꿰어 찬단 말인가!

게다가 전혀 상관없는 2학년이 이제 공부에 집중해야 하는 3학년들을 쥐고 흔드는 꼴이라니!

점심시간, 그녀가 2학년 반들이 주르륵 즐비해 있는 복도를 걷자 남학생들의 시선이 일순 몰렸다.

“빛나 누나다! 빛나 누나!”

“헉, 어디 어디?”

하지만 빛나는 그런 남학생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2학년 3반 앞에 도착하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가관이다.

대놓고 보는 여학생들도 있고 모른 척 보는 여학생들도 있었으나 평소보다 유리창에 다닥다닥 붙어 누군가를 훔쳐보는 학생들이 많다는 건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심지어는 6교시 끝나고 보러 가자던 그녀의 절친들까지.

“잘하는 짓이다. 낼모레가 수능인데!”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영지와 민영이 화들짝 놀라며 유리창에서 떨어졌다.

친구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빛나는 교실 뒷문에 모여 있는 여학생들에게 차갑게 이야기 했다.

“안 들어갈 거면, 비켜.”

그러자 여학생들이 일제히 길을 터준다.

그렇게 빛나는 3반 교실로 무사히 입성할 수 있었다.

2학년 교실이라 그런지 정숙한 3학년 교실과는 또 다른 분위기다.

뒤쪽에서 책상을 한쪽을 밀어 놓고 학생들 한 무리가 말뚝 박기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야, 빨리 와! 힘들어!”

맨 마지막에 엎드리고 있는 남학생이 숨넘어가듯 이야기했다.

그 상황에서 빛나는 반 분위기를 한번 쓰윽 훑어보며 누가 전학생인지 신상 파악에 들어갔다. 영지와 민영의 말을 토대로.

그리고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맨 마지막에 엎드려 있는 남학생 머리 쪽으로 덩치가 큰 남학생이 올라타 있었다.

딱 봐도 거구에 웬만한 체력으로는 버티기 힘든 체구였다.

“아, 빨리 오라고! 힘들어! 다리 풀리잖아!”

엎드려 있는 학생이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뒤에 옹기종기 서 있는 여학생들은 서로 차례를 미루며 그의 등에 올라타지 않으려 했다.

“야, 이번엔 네가 해.”

“싫어. 그러다 쟤 넘어지면 어떡해!”

“그럼 네가 해! 네가 제일 가볍잖아!”

“미쳤냐? 그러다 무너지면 뭔 망신이야?”

원래 말뚝 박기란 무거운 사람이 힘차게 올라타 가위바위보를 하기도 전에 무너져야 제 맛이 아니던가.

그 룰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들이 서로 순서를 미루고 있다?

그것도 볼이 빨개져서?

빛나는 사악하게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옳거니, 찾았다!

덩치가 큰 남학생의 허벅지에 가려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맨 마지막에 끙끙 앓고 있는 저놈이 전학생이렸다?

너 오늘 제대로 걸렸다, 그 유명한 성문고 유빛나의 꼬리뼈 맛 좀 봐라.

빛나는 서로 미루고 있는 여학생들에게 다가가 손짓으로 물러나라 했다.

그러자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놀란 것도 있지만 그 포스에 눌려 여학생들은 조심스레 자리를 내어준다.

일단 빛나는 스커트를 높이 까서 허벅지 중간까지 오게 만들었다.

그래야만 저 녀석 등에 올라탈 때 딱 붙은 스커트로 인해 방해를 받지 않을 게 아닌가.

“빨리 오라고! 나 목 디스크 걸릴 것 같아!”

그래. 간다. 5초만 기다려라.

5. 4. 3. 2…… 1!

빛나는 전속력으로 달려 그녀석의 허리를 짚고 공중으로 발돋움을 했다.

분노로 인해 아드레날린이 폭발한 나머지 상상도 할 수 없는 도움닫기 실력이 나왔다.

그리고 그녀가 그 허리에 안착했을 때 예상했던 비명 소리가 기분 좋게 그녀의 귓전을 울려왔다.

“으아아-악!”

100킬로 거구가 올라타도 버티고 있던 말이 빛나의 한 방으로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손을 탈탈 털고 자리에서 벗어나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서서 엉켜 있는 남학생들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아, 누구 꼬리뼈야! 유진이야? 아니면 서영이야?”

아쭈구리, 전학 온 지 이틀 만에 여학생 이름을 다 외웠다.

전형적인 바람돌이 스타일임이 분명하다.

그렇게 빛나는 눈썹을 곤두세운 채 100킬로 거구의 남학생이 비켜서길 기다렸다.

남학생 밑에 깔린 신체 사이즈를 보아하니 상당히 길쭉한 놈인 듯싶었다.

벌써 밑으로 삐죽 나온 다리 길이가 범상치 않았다.

빛나는 단단히 각오를 했다.

절대 잘생긴 얼굴에 현혹되지 않으리라 결심하며!

드디어 남학생이 물러나자 전학생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빛나는 눈이 동그래졌다.

흩어진 앞머리, 진한 아몬드형 눈매, 게다가 웃고 있는 듯 살짝 치켜 올라간 입술.

남학생이 물러나자 드러난 전학생의 얼굴은, 간지 죽인다는 길쭉한 신체 사이즈완 별개로 여자의 보호 본능을 자극할 만큼 앳된 얼굴이었다.

엄마 말 더럽게 안 듣게 생긴 얼굴.

이거 하라면 저거 하고, 저거 하라면 이거 할 것 같은 타고난 청개구리.

한마디로, 비글미 터지는 남동생 같은 느낌이었단 말이다!

각이 진, 전형적으로 잘생긴 얼굴을 예상했던 빛나에게는 정말 의외였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만은 그녀의 예상이 맞아 떨어진 듯하다.

“어라? 우리 반에 이런 애도 있었나? 예쁘네, 이름이 뭐야?”

날바람둥이라는 사실.

게다가 그가 웃자 진한 아몬드형 눈매가 보기 좋게 휘며 눈웃음을 만들어 낸다.

저 웃음에 여학생 여럿 죽었겠구나, 충분히 예상될 만큼 매력적인 눈웃음이었다.

하지만 상대 잘못 골랐다.

그녀는 다름 아닌 유빛나였으니까.

여기저기서 작은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점점 어두워지는 그녀의 아우라에 여학생들은 두서너 발자국 물러서기까지 했다.

빛나가 여전히 바닥에 손을 짚고 앉아 있는 그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서로의 호흡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까지.

그러자 녀석의 맑은 눈이 그대로 보인다.

쳐지지도, 그렇다고 치켜 올라가지도 않은 아몬드형 눈매엔 진지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없었지만 대신 장난기가 가득했다.

“유빛나.”

“빛나? 이름 예쁘네. 우리 반인가?”

그 물음에 빛나는 대답 대신 그의 가슴과 자신의 가슴에 있는 학생 마크를 번갈아 누르며 그의 신분을 확실히 인지 시켜주었다.

“넌 2학년…… 난 3학년.”

그러자 웃고 있던 그의 눈동자가 점점 제 자리를 찾아가더니, 그녀의 마지막 한마디에 살짝 치켜 올라가 있던 입매마저도 얼음땡이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누나라고 불러, 이 자식아.”

순간 허공에서 만난 두 시선에 불꽃이 튀었다.

악연이란 이름의, 또 다른 인연.

그렇게 빛나는, 승현을 처음 만났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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