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설레게하는 그대-4화 (4/94)

4. 위승현의 품으로.

2017.12.17.

“…… 인사 좀 하고 살자, 응?”

빛나는 황당하다 못해 넋이 나간 눈동자로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무슨 상황인지 안다. 따라서 그녀가 지금 어떤 심정일지도.

얼굴만 봐도 파르르 떠는데 심지어 그의 차를 들이 받았으니 저 자존심에 아마도 지금쯤 투명 인간이라도 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그런데, 그의 반응도 정상은 아니었다.

소중한 그의 애마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났음에도 그따위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에 자꾸 웃음이 나오는 건 왜일까.

유빛나 성질머리에 그가 웃기라도 하면 활화산처럼 폭발할까 싶어 승현은 애써 자신의 입꼬리를 진정시켰다.

“왜, 왜…… 말 안 했어! 이거 네 차라고!”

“말하려고 했어. 했는데, 자꾸 잘라 먹었잖아. 네가 해결한다고.”

그 말에 빛나는 큰 눈을 한번 또르르 굴렸다.

젠장,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도 같다.

아니, 그랬다.

알량한 자존심에 승현이 말을 할 때마다 뚝뚝 잘라 먹은 건 다름 아닌 그녀였으니.

승현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집어 삼키기 위해 이를 악 물어야만 했다.

자신의 잘못을 상기하며 벌게지는 그녀의 얼굴이 왜 이렇게 귀여운지 모르겠다.

“그래, 좋아. 네 차라고 치자. 근데 왜 여기에 차를 세워놨어? 여긴 주차 스팟이 아니잖아.”

“그건…….”

“내가 아니라도 누구라도 박을 수 있는 상황이라고. 차도 시꺼메서 잘 안보인단 말이야.”

“알아. 근데 어쩔 수 없었어. 내 주차 스팟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거든. 여긴 의외로 한 세대당 차가 두세 대씩 있는 곳이 많더라고.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이 나한테 할당이 된 주차 스팟을 쓰고 있대. 다음 주까지 해결해준다고 당분간 거기에 세우래.”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아파트 주차난이야 그녀도 입주자라 알고 있는 상황이니까.

“어쨌든 서로 아는 사이니까 좋게 좋게 해결하면 되겠네. 그나마 다행이다. 차주가 지랄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렇게 상콤…… 아니, 매너 좋은 승현 씨라서.”

이정의 말에 빛나는 날카롭게 그녀를 쏘아보았지만 말릴 수는 없었다.

너무 창피하고 민망해서 그대로 공중분해 되어 날아가고픈 심정이었다.

“일단 차부터 빼고 이야기하자. 여기 주차장 입구야.”

승현이 이야기하자 빛나는 어쩔 수 없이 일단 차를 빼기 위해 올라탔다.

그러자 이정도 재빠르게 올라타며 호들갑을 떨어댄다.

“어머, 어머! 우리 상콤이 반응 봤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귀티가 자르르 흐르더니, 매너도 좋은 거 봐라. 저 비싼 차를 들이박았는데 인상 한번 안 쓰네.”

“그래. 웃더라.”

승현이 이정의 눈에는 뭘 해도 예쁜 상콤이라면, 빛나의 눈에는 뭘 해도 미운털 박힌 원수였다.

그러니 보는 시각도 다를 수밖에.

‘감히, 웃었겠다?’

분명 보았다.

감추려고 했지만 그 매력적인 아몬드 형 눈매에 흐르는 호기심, 하늘로 승천하려는 입꼬리, 심지어 전화를 걸고 놀라 돌아섰을 땐 샤방한 눈웃음까지 날려주지 않았던가!

주차를 하고 난 후에도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막막했다.

승현의 얼굴을 어떤 표정으로 맞수를 놓아야 할지도 의문이었다.

백번 생각해도 그녀가 잘못한 상황이니, 사과는 해야 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탓이다.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러자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승현을 마주할 수 있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가벼운 스크래치 정도니까.”

“어머,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너무 감사해요”

빛나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이정이 선수를 쳐서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입에서 미운 말이 나오기 전에 수습하려는 수작이리라.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세 사람이 올라타고 승현이 7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어찌나 숨이 턱 막혀오는지.

“퇴근, 항상 이 시간에 해?”

“아니, 원래는 좀 늦는데 오늘은 좀 일찍 했어. 왜.”

“그냥, 궁금해서. 우리 이웃사촌이잖아.”

그렇게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위승현이 이웃사촌이라는 사실은 다시 한 번 혹독하게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렇게 우리 빛나랑 이웃사촌 된 것도 인연인데 언제 한번 초대할게요.”

“뭐? 너네 집에?”

“아니, 너네 집에.”

이정이 벌써 승현을 자신의 집으로 끌어 들이려고 하나, 미쳤나 하는 마음에 버럭 소리를 질렀으나 결론은 빛나 집이다.

“거긴 우리 집인데, 네가 왜?”

“이웃사촌끼리 알고 지내면 좋잖아! 안 그래도 너 혼자 저 넓은 집에 사는 거 맘에 좀 걸렸어. 밤에 아프기라도 하면 어쩌나…… 어디 연락할 곳도 없고. 나라도 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내가 지방으로 출장이라도 갔어봐. 그럼 누가 돌봐줘, 응?”

눈을 흘기며 무심코 한 말에 빛나를 향한 이정의 걱정이 숨어 있었다.

때문에 이정을 타박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빛나가 먼저 내려섰다.

하지만 돌아서기 전 해결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 있지 않던가.

어쨌든 오늘 일은 전적으로 그녀의 실수가 확실하니까.

결국 빛나는 자신의 핸드백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 들어 승현에게 내밀었다.

“이거, 내 명함이야.”

“옆집 사는데 굳이 이럴 것까지야.”

“아니, 내가 그래야 해서. 어쨌든 오늘은 내가 실수한 거니까 깔끔하게 수리하고 전화 줘. 수리하는 동안 렌트비도 내가 감당할게. 너 최대한 불편함 없이.”

이 순간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빛나는 명함을 건네준 후 승현의 얼굴을 바라보지도 않고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왔다.

물론 렌트비 이야기는 왜 꺼낸 거냐며 이정이 타박이 뒤따라왔지만 그따위 건 지금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드디어 시작되었다,

그를 만났다 하면 시작되는 불운이!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하지만 제정신이 아닌 건 승현도 마찬가지다.

10여 년 동안 계속되었던 인연이다.

하지만 그녀를 만날 때면 늘 그의 심장이 남아나질 못했다.

처음엔 그만 봤다 하면 이유 없이 파르르 떠는 그녀의 반응에 화가 나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열 받으면 혈압이 치솟아 심장이 벌렁거리는 건 그의 주특기였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분명 달랐다.

소중한 애마에 그런 흠집이 난 상황이라면 평소 그의 성격으로 보건데, 상대방의 영혼까지 탈탈 털어 먹어도 남음직 했지만 유빛나만은 저토록 무사하지 않은가.

물론 굳이 그가 탈탈 털지 않아도 빛나에겐 이 상황에 더 이상 털릴 영혼이 남아 있지 않지만 말이다.

웃음이 났다.

더불어 심장도 난리가 났다.

도대체 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화가 난 것도 아닌데 도대체 심장은 왜 이렇게 파닥이는 것일까.

그러다 얼마 전 정오에게 우스갯소리로 흘렸던 말이 생각났다.

-심장이 파닥파닥 뛰면…… 죽어.

이런 젠장, 큰일이다.

어이없는 그의 이론대로 따지자면,

“나…… 죽을 때가 됐나 봐.”

그는 지금 심각하게 아픈 거니까.

***

“형, 나 아파.”

독립혁명을 외치며 이사한 지 삼 일 만에 본가를 찾은 승현은 오랜만에 본 승주 앞에 앉아 힘없이 한마디 했다.

동생이 이렇게 기운 없어 보이면 형이란 인간은 왜 그러느냐 한번 물어볼 법도 하건만, 삼십 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물음에 지쳐 승현이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다.

그러자 늘 그랬듯 심플하면서도 높낮이 없는 억양의 한마디가 되돌아왔다.

“어디가.”

끝에 물음표는 없었지만 위승주 특유의 어법상 그것은 물음이었다.

승현은 기다렸다는 듯 승주의 손을 제 심장 위로 올리며 입을 열었다.

“여기가!”

“무슨 근거로.”

“심장이 시도 때도 없이 막…… 벌렁거려.”

유독 심각하게 말하는 승현의 목소리에 승주의 까만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는 한동안 말없이 승현의 심장에 손을 올린 채 가만히 있었다.

그러더니 평소와 다름없는 무미건조한 말 한마디를 툭 던지며 승현을 밀어내버린다.

“1분 72회. 정상. 비켜.”

그새 승현의 심장박동수를 카운트한 모양이다.

동생이 아프다는데 감정을 끌어 올리지는 못할망정 그사이 심장박동수나 체크하고 있다니. 위승주다웠다.

“아, 진짜! 나 아프다니까!”

“너처럼 팔팔한 놈이 아프면 세상에 앓아누울 사람 천지야. 엄살 피우지 말고 너네 집에 가.”

“여기도 우리 집이야!”

열 받아서 버럭 하며 승현은 소파에 앉았다.

오랜만에 왔는데 하필이면 집에 남아 있는 사람이 둘째 승주라니.

가뜩이나 말 없는 승주와 이 상황을 논의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승현은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닥친 이 이상 증상에 대한 결론을 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형. 형은 언제 심장이 벌렁거려? 좋아하는 여자 만날 때?”

“아니.”

그렇지. 괜한 걸 물었다.

평소 말도 억양 없이 하는 편인데, 여자 때문에 설레는 위승주는 상상도 할 수가 없다.

아무래도 무리수를 둔 질문이었다.

좋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보자.

“그럼, 형…… 열 받을 땐 심장 벌렁거리지? 왜, 사람들 열 받으면 흥분하잖아.”

분노조절장애, 위승주.

열 받을 때 벌렁이는 심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법한 이야기였지만 의외의 대답이 들려온다.

“아니.”

게다가 이렇다 할 부연 설명도 없이 그게 끝이다.

이쯤 되자 승현은 다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열 받을 때도 심장이 온전하다고? 말도 안 돼…… 형, 사람이야?”

하지만 그 물음엔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듯 자리를 떠 2층으로 올라가버리는 승주를 보며 승현이 다시 한 번 버럭 했다.

“우씨! 나 진짜로 아프다니까!”

역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에이, 독립 괜히 했어! 그냥 여기 짱 박혀 있을걸!”

정말 그럴걸 그랬다.

그랬다면 빛나와 이웃사촌으로 재회할 일도 없었을 테고, 더불어 이렇게 건강한 제 심장에 의심을 품을 일도 없었을 텐데.

“아, 진짜. 어떡하지? 이걸 어떻게 해결해?”

해답을 찾아야 했다.

도대체 그녀는 왜 그만 보면 저렇게 발작을 일으키는 것일까.

아니 발작까진 아니어도 그를 바라보는 차가운 눈동자, 냉랭한 말투,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힘들 게 하는 건, 그런 그녀를 보면서 벌렁이는 제 심장이다.

더 이상 간과할 순 없었다.

예전에는 그냥 어쩌다 한번 스치는 인연이었지만 이젠 하루걸러 봐야 하는 이웃사촌이 아닌가.

“좋다, 유빛나. 내가 왜 그렇게 싫은지 이야기나 한번 들어보자.”

결국 승현은 빛나와의 속 시원한 대화를 선택했다.

문제는 그만 보면 도망가 버리는 그녀를 어떻게 그의 앞에 앉혀놓느냐 하는 것이다.

더불어 무슨 수로 그녀의 꼭 닫혀버린 그 앙증맞은 입에서 진실을 들을 수 있냐는 것이다.

팔짱을 낀 채 부처처럼 앉아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입꼬리를 사악하게 말아 올렸다.

“우리 유빛나, 감히…… 내 차를 박았겠다?”

***

회의 시간 5분 전에 도착한 빛나는 자신의 지정석에 앉으며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차분하게 내쉬기 시작했다.

“어디 갔다 왔나 봐?”

반대편에 앉은 박은지 변호사가 자신의 노트북을 이제 막 열며 물음을 던졌다.

하지만 그녀는 그 질문에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출발선부터 달랐던 두 사람이다.

남보다 두 배는 노력해 여기까지 올라온 빛나와는 달리, 잘나가는 판사 아버지를 둔 덕에 큰 문제없이 빛나와 동선에 설 수 있었던 여자, 박은지.

때문에 두 사람은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평생 라이벌이었다.

“하긴, 요즘 대한민국에서 결혼한 커플 4쌍 중 1쌍이 이혼한대. 수요가 많으니 수익이 따르는 건 당연한 거고. 저번 달도 역시 수익률로는 NO.1이던걸? 축하해.”

어쩜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도 저렇게 얄밉게 할 수 있는지, 그야말로 타고난 재주였다.

그러나 빛나는 그런 은지의 모습에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그녀가 이토록 빛나에게 까칠한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걸 다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늘 은지는 빛나보다 한 발 뒤였다.

더 이상 좁힐 수 없는 그 미묘한 차이가 은지의 잘난 자존심에 처참한 흔적을 남겼으리라.

빛나는 여유로운 눈빛으로 노트북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하면 기분 좋아? 내 수익률이 부러우면 너도 이혼 전문 변호사 하던가.”

순간 은지의 눈썹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알량한 자존심에 그런 일은 못 하겠나 보지? 하긴, 넌 돈보다는 명예니까. 그러니까 무료 변호나 열심히 해.”

빛나의 커다란 눈동자와 은지의 성난 눈동자가 부딪쳐 스파크가 튀는 것 같았다.

지지 않겠다는 듯 은지가 뭔가 말하려던 찰나, 누군가 들어와 조용한 목소리로 회의가 취소되었음을 알려왔다.

“오늘 대표님이 몸이 안 좋으셔서 회의는 취소되었습니다. 저도 갑작스럽게 전화를 받아서 미리 알려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여기저기서 한숨소리와 함께 자리를 뜨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서로를 맹렬히 바라보고 있는 빛나와 은지는 그대로였다.

모든 사람들이 자리를 뜨고 난 후에야 은지는 자신의 노트북을 챙겨들며 입을 열었다.

“이젠 내려오는 법도 익혀두는 게 좋을 거야. 언제까지 NO.1일 순 없을 테니까.”

그러곤 쌩한 바람을 일으키며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텅 빈 회의실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빛나는 노트북 화면을 허망한 눈길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나도 너처럼 든든한 백그라운드 좀 타고나봤으면 좋겠다. 매 순간, 걱정 없이 좀 살아보게.”

돈도 백도 없는 천애 고아가 홀로 남겨진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건 ‘노력’밖에 없었다.

사법고시를 패스했을 때 가졌던 로망은 현실과 부딪치며 사라져버린 지 오래고, 명예보다 돈을 택한 그녀는 최고의 이혼 변호사가 되었다.

그래야만 그녀에게 남겨진 스물다섯 명의 아이를 보듬어 살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차, 내 정신 좀 봐. 이체를 안 했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너무 정신이 없던 탓인지 보육원에 매달 보내는 돈을 깜빡 잊고 이체하지 않았다.

빛나는 핸드폰으로 이체를 마친 후 원장 수녀님께 문자 한 통을 보내며 애교스러운 이모티콘을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원장님, 이번에는 조금 더 보냈으니 병원 가는 거 잊지 마세요. 아셨죠? ^^ 이번에도 안 가면 다음엔 제가 모시고 갈 거예요!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을 포켓에 집어넣으며 빛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왔다.

퇴근을 하기 위해 자신의 사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저쪽에서 누군가 은지와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았다.

싸구려 슈트를 입은 중년 남자의 모습은 한눈에 봐도 피곤에 찌든 모습이다. 무료 변호 건으로 고객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사무실로 들어와 가방과 간단한 서류를 챙겨 드는데 회사 앞이라며 이정에게 전화가 왔다.

[혹시 그 상콤이한테 전화 왔냐?]

그럼 그렇지. 오늘은 그냥 넘어가나 했다.

아, 정말 의지의 한국인이다.

“아니, 왜.”

[차…… 암말 안 해?]

“아직은.”

[야, 그럼 네가 먼저 전화해서 걱정돼서 전화했다고 애교 좀 떨어봐라.]

“내가? 미쳤어?”

[내가 시키는 대로 하란 말이야, 제발 좀! 너 그 차가 얼마짜린 줄 아냐? 내가 오늘 검색 좀 해봤는데, 그거 범퍼만 천만 원대가 넘는단다.]

“뭐라고! 무슨 차 범퍼가 차 한 대 값이야!”

[그러니까 외제차지, 이년아! 그러게 어제 왜 그렇게 고개를 뻣뻣이 들고 도도를 떨어, 떨긴! 거기다 렌트비까지 물어준다고? 그게 같은 급으로 렌트를 하면 하루에 얼만 줄 아냐?]

이정의 말을 듣고 보니 어제 뭣 모르고 내뱉었던 그녀의 말을 다시 주워 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진짜!”

화가 났다. 도대체 어쩌자고 어제는 그런 말까지 했을까.

그 돈이면 그녀의 보육원 아이들이 몇 달을 따뜻하게 먹고 잘 수 있는 돈인데!

“암튼 나는 그 자식만 만나면 되는 일이 없어!”

[그러니까 전화해서 네가 먼저 상냥하게 말이라도 걸어보란 말이다.]

“그 녀석이랑은 평생을 그랬는데 갑자기 상냥해질 수 있어? 속 보이게! 근데 찌그러진 것도 아니고 긁힌 건데 범퍼를 전부 교체하겠다고 나올까?”

[야,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돌조각이 튀어 문에 작은 흠집만 나도 문짝 하나를 전부 갈아엎겠다고 나오는 세상이야.]

속이 뒤집혔다.

하지만 그녀가 친 사고, 그를 탓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에 오르는데 핸드폰을 들고 있는 이정과 딱 마주쳤다.

그녀와 통화를 하면서 성질 급한 이정은 이미 올라오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미 그곳엔 두 사람을 제외하고도 서너 명의 사람이 더 있었기에 호들갑을 떨 순 없었지만 기분은 땅으로 꺼져 들어가고픈 심정이었다.

“잘 생각해. 둘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지금은 현재고, 천만 원은 미래가 될 예정이거든.”

이정이 속삭였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간혹 보육원 일로 이런 전화를 받는 경우가 있었기에 빛나는 전화를 무시하지 못하고 받아 들었다.

“여보세요.”

[나야.]

사람이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그토록 좋은 사람도 아니고, 그토록 싫은 인간인데도, 목소리만큼은 귀신처럼 알아듣겠다.

“무슨…… 일이야?”

그녀의 물음에 곁에 있던 이정의 눈에 물음표가 그려졌다.

그래서 빛나는 입모양으로 ‘위승현’이라고 대답해주었다.

물론 그 대답에 ‘아, 상콤이?’라는 제멋대로 해석이 돌아왔지만 말이다.

“차, 벌써 고쳤어? 얼마야? 계좌로 입금해줄게.”

퍽!

그 말에 이정이 그녀의 등짝에 스매싱을 날렸다.

그 소리가 너무 커 주변 사람들이 쳐다봤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반성의 기미가 없는 이정은 눈으로는 ‘미친년!’이라 울부짖으며 입모양으로 ‘천만 원!’이라 말하고 있었다.

나도 안다, 이년아.

하지만 곧 죽어도 네 말처럼 없는 애교까진 못 떨겠으니 이 일을 어쩌란 말이냐.

[안 그래도 내가 생각해봤는데,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수리비는 됐고. 밥이나 한 끼 살래?]

그 말을 듣자마자 빛나는 발작을 일으키듯 소리를 질렀다.

“아니, 내가 왜 너랑 밥을 먹어야 하는데!”

[우리 이웃사촌 된 기념으로. 어때, 이 정도면 밑지는 장사는 아닐 텐데?]

물론 밑지는 장사가 아니다마다.

허나 문제는 상대가 위승현이라는 것.

그와 1대 1로 앉아 밥을 먹는다는 것,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때문에 허락할 수도 없는 순간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차 고치면 계좌번호나 날려!”

그러곤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직도 씩씩대는 숨소리가 그녀의 흥분 수치를 고스란히 나타내주고 있었다.

“뭐야, 상콤이가 뭐래? 너랑 밥 먹재?”

“내 참, 웃겨서. 수리비는 됐으니 나보고 밥이나 한 끼 사란다. 미쳤어? 밥 먹다 위경련 일어날 일 있냐고.”

“어머-엇! 너 미친년 맞다! 야, 그 비싼 수리비랑 얼마 안 되는 밥값이랑 퉁 치자는데 거기다 대놓고 그렇게 버럭 해? 제정신이야?”

“야, 밥은 자고로 편하게 먹어야 하는 거야.”

“아니, 술도 아니고 밥 한 끼 먹는데 무슨 조건이 그렇게 많아? 그리고 그 정도 비주얼 눈앞에 두고 먹으면 나는 소금만 찍어 먹어도 진수성찬이겠다!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그게 말이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쉬운 게 아니야. 걘 말이야…….”

빛나는 변명을 하고 이정은 한 번 더 열을 내려던 찰나,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열렸다.

그리고 무심코 시선을 돌린 순간 그들은 멈춰버리고 말았다.

열린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보이는 훤칠한 비주얼.

“빛나?”

승현이었다.

믿을 수 없지만 눈앞에 있는 이는 바로 다름 아닌 위승현이다!

세상에나, 회사 로비에서 전화를 한 거였어?

놀란 빛나가 본능적으로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이정이 빨랐다.

퍽!

조금 전 시원하게 등짝에 스매싱을 날리던 파워로 그녀를 엘리베이터 밖으로 밀어내 버렸으니.

“엄마야!”

몸이 쏠리는 바람에 그녀에겐 존재한 적도 없는 호칭이 튀어나왔고, 그렇게 제멋대로 쏠린 몸은 주인의 의지와는 정반대로 날아버렸다.

바로, 위승현의 품으로.

젠장할!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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