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인사 좀 하고 살자.
2017.12.13.
이른 아침.
빛나는 집을 나서기 전 문에 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 아파트 복도를 확인했다.
복도라고 해봐야 한 층에 두세 대가 전부니 극히 짧았지만 그녀는 제 목숨이 달린 일처럼 신중하게 살폈다.
“으이구, 지랄도 풍년이다. 그런 정신 상태로 사법고시는 어떻게 패스했다니?”
뒤를 돌아보니 한심하다는 듯 이정이 혀를 끌끌 차며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러다 출근은 하겠니? 비켜봐, 내가 볼 테니까.”
이러다 날 새겠다 싶어 이정은 빛나를 밀치고 문을 확 열어버렸다.
놀란 그녀가 뒤로 물러서자 이정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아, 빨리 나와! 회사 안 나갈 거야?”
빛나는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곤 나와서도 엘리베이터 버튼을 유난히 꾸욱 눌렀다.
그 모습에 이정은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린다.
“파혼이 사람 하나 병신 만들었구만. 아니, 헤어진 전 애인도 아니라면서 도대체 그 상콤이한텐 왜 그런 건데?”
이정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 본 승현의 모습은 누가 봐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훈훈한 상콤이였다.
소리를 지를 만큼 치를 떠는 빛나의 반응이 전혀 설득력이 없을 만큼.
“상콤이는 무슨…….”
빛나는 이정이 승현을 부르는 애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 이정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말꼬리를 흐리는 걸 잊지 않았다.
왜냐고?
4년 만에 본 승현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지랄 맞게 잘생겼다.
비에 젖은 모습은 철천지원수인 빛나가 봐도 안아주고 싶을 만큼 그의 신체 사이즈와는 별개로 여심을 제대로 자극한단 말이다!
그러니 그녀를 이해 못 하는 이정의 심정을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마자 빛나는 재빨리 몸을 실었다.
여기까지는 꽤나 성공적이라 생각했다.
옆집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띠리릭. 찰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빛나는 본능적으로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꾸욱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반쯤 닫히는 것을 보고서야 빛나는 버튼에서 손을 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실수였다.
적은 늘 가까운 곳에 있다더니, 빛나가 손가락을 떼기 무섭게 이정이 열림 버튼을 무작위로 다다다- 눌러댔기 때문이다.
“왜, 같이 타면 에너지 절약하고 좋잖아.”
빛나는 신경질적인 눈동자로 이정을 흘겨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열린 문틈으로 승현의 훤칠한 비주얼이 안구정화를 시켜주고 있었다.
“굿모닝.”
이젠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아, 위승현과 이웃사촌이라니!
하늘이시여,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승현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러자 이정과 둘이 있을 때까지만 해도 한없이 넓어 보였던 그 안이 그의 존재로 인해 꽉 들어 차 버린 것 같았다.
“하…… 진짜네. 어젠 너무 순식간에 내빼서 헛것을 본 줄 알았는데.”
“…….”
“유빛나, 잘 있었어?”
게다가 그녀의 이름을 어찌 저렇게 다정하게 부르는지, 누가 보면 애틋한 연인인 줄 알겠다.
“나야 뭐, 늘 잘 있지.”
그렇게 승현이 건넨 인사는 늘 그랬듯 되돌아오질 않았다.
싸늘한 빛나의 대답이 민망했던지 이정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휴, 기집애도 참. 오늘따라 드럽게 피곤한가 보네. 안녕하세요, 저는 빛나 친구 서이정이라고 해요. 어제는 경황이 없어서 인사를 제대로 못 드렸어요.”
빛나가 눈을 흘겼지만 이정은 안중에도 없는 듯 승현에게만 시선 고정이었다.
“안녕하세요, 위승현입니다.”
“어머, 이름도…… 상큼하여라.”
순간 빛나는 이정을 바라보며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는 기분을 느꼈다.
설마, 아니겠지?
“근데 실례지만 우리 빛나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신가요? 빛나 아는 동생인가?”
그리고 그 설마가 사람 잡았다.
둘러 물어보긴 했지만 빛나는 본능적으로 이정이 승현의 나이를 가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하킬러, 서이정!
그녀의 레이더망에 위승현이 걸려든 것이다!
그 끔찍한 현실에 빛나는 그저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승현과 엮이는 일 따윈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얘 동생 아냐! 오빠야!”
기겁을 하며 외쳤지만 그와 동시에 승현의 입에서 불쑥 대답이 튀어 나왔다.
“네, 고등학교 후배입니다.”
아, 한동안 서이정에게 시달리게 생겼군.
“어머-엇! 어쩐지! 얼굴이 딱 봐도 우리보다 위는 아닌 것 같더라구요. 근데 이른 아침부터 운동 가시는 거예요?”
순식간에 톤이 높아진 이정의 목소리를 들으며 빛나는 참담함에 눈을 감았다.
“네.”
“아휴. 어제 이사도 하셨는데 부지런도 하셔라.”
누가 봐도 호감 가는 훤칠한 비주얼에 연하라는 사실까지 알았으니 뭔들 안 예뻐 보이겠나.
그때, 다행히도 엘리베이터 알림음이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음을 알려주었다.
“야, 내려. 회사 늦겠다.”
“어머, 잠깐만. 나 아직 말 안 끝났어!”
굳이 말이 안 끝났다 허우적대는 이정의 팔을 잡고 억지로 끌어내린 빛나는 재빨리 자신의 차 조수석으로 밀어 넣고 문을 잠갔다.
탈출해 승현에게 달려가려는 이정을 막기 위해서다.
그러곤 그녀도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어머, 얘 왜 이래? 문 좀 열어주겠니? 내가 아직 말이 안 끝나서 말이야.”
“너 오늘 내가 회사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가만있어. 벨트 매고.”
“내 차 위에 있는데?”
“알아. 아는데 오늘은 내가 모셔다 드리겠다구요!”
내가 네 속셈을 모를까.
본인이 차를 탄다는 걸 핑계로 내려 승현의 연락처를 딸 셈이겠지.
하지만 유빛나가 있는 한 어림없는 소리다.
그렇게 빛나는 여전히 탈출을 감행하려는 이정을 실은 채 급하게 지하 주차장을 빠져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혼자 남겨진 승현이 허탈하게 입을 열었다.
“진짜 유빛나…… 더럽게 어렵네.”
세상에서 그에게 가장 어려운 여자.
더불어 유일하게 위승현 알레르기가 있는 여자.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승현에게 이 세상 여자는 유빛나와 유빛나가 아닌 여자, 이렇게 두 종류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문제는 어디서부터 꼬인 건지 몰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
아무래도 이 집 생활이 그리 평탄지만은 못할 것 같다는 예상이 조심스럽게 드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인사는 좀 해주지.”
***
넋 나간 빛나의 눈동자가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오디오가 삭제된 남자의 비디오는 사고할 수 있는 그녀의 뇌에 그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했다.
이미 그녀의 뇌는 어제 본 승현과 오늘 아침에 본 승현의 모습이 교차되며 포화 상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아직도 말이 되지 않은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모르겠다.
위승현이 그녀의 새로운 이웃사촌이라니,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나 싶다.
“아, 진짜…….”
절로 한숨이 나왔다.
모든 것을 제 손에 놓고 좌지우지하는 빛나가 유일하게 컨트롤할 수 없는 인간이 바로 위승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놈을 일 년에 몇 번 보는 것도 아니고, 이젠 아예 옆집 남자로 들어 앉아 매일 얼굴을 마주하게 생겼으니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집을…… 팔아?”
쥐도 새도 모르게 집을 팔고 이사를 가?
하지만 그 집이 어떤 집인데 팔고 이사를 한단 말인가.
그러기엔 그녀가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너무 컸다.
심각한 그녀의 얼굴에 앞에 있던 남자가 급 창백해진 얼굴로 반응한다.
“제 집을…… 팔아야 합니까, 변호사님? 아니, 왜요? 그거랑 제 이혼이 무슨…….”
물론 그 말이 빛나의 귀에 들릴 리 없지만 말이다.
여전히 그녀는 미간을 찡그린 채 심각한 얼굴로 고민 중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할 때마다 떠들고 있는 남자의 심장도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 방안이 없다.
“아, 진짜!”
답답함에 갑작스럽게 나온 말인데 앞에 있던 남자가 잔뜩 웅크리며 물었다.
“그렇게…… 상황이 나쁩니까? 그럼 위자료를 얼마나 줘야…… 최대한 줄일 수 있는 방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빛나의 예리한 시선이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의뢰인이었다.
그녀는 더듬더듬 자신의 앞으로 상체를 빼는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바짝 날이 선 세련된 머리, 잘생긴 턱선, 그리고 고급스러운 슈트를 입고 있다.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쓰고 그녀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만 뺀다면, 그런대로 봐줄 만한 비주얼이다.
그리고 그녀의 전문 지식과 그의 말로 종합해보건데 뻔한 내용이었다.
이혼을 하기 위해 왔으나 남자는 부인에게 위자료를 많이 주려 하지 않는다.
최대한 위자료를 줄이기 위해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
이쯤 되자 그렇지 않아도 날카로운 그녀의 신경이 더욱 송곳 같아 졌다.
“이혼 사유가 뭐라구요?”
그녀의 질문에 남자가 더듬더듬 대답한다.
“가…… 가정 폭력……이요.”
그리고 그 대답은 결국 날이 선 그녀의 신경을 폭발시키고 말았다.
쾅!
빛나가 책상을 치며 일어났다.
그 기세에 놀란 남자가 본능적으로 의자를 뒤로 뺐지만 날이 선 그녀의 손톱을 피해갈 수가 없었다.
멀리 도망가기도 전에 재빠른 손동작으로 남자의 넥타이를 가로챘기 때문이다.
“당신, 제정신이야?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와이프를 두들겨 패? 그러고도 위자료 몇 푼 주기 싫어 여기까지 찾아 온 거야?”
“그…… 그게 아니라…….”
“이봐요, 제가 아무리 이혼 변호사로 먹고살고는 있지만 당신처럼 파렴치한 편에 서서 그거 합의해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어!”
“아니…… 변호사님! 도대체…….”
“당신 재산 거덜내서 당신 와이프한테 홀랑 가져다 바치기 전에 당장 내 앞에서 꺼져!”
그녀는 로펌에서 가장 수익률이 좋은 변호사였기에 이 정도 정의는 실현할 수 있다 생각했다.
게다가 욱하면, 툭하고 나오는 그녀의 성질머리도 이미 로펌에서는 유명했기에 충분히 커버가 될 거라 생각했단 말이다.
그러나.
남자가 홧김에 선글라스를 벗고 그녀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봤을 때,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아니, 변호사님! 도대체 지금까지 제 말을 뭘로 들으신 겁니까? 가정 폭력에 시달린 사람은 와이프가 아니라 바로 저라구요! 저!”
허억!
퍼렇게 멍이 눈 눈가를 보며 빛나는 꼭 틀어쥐고 있던 남자의 넥타이를 슬그머니 놓았다.
“매 맞는 남편…… 이러는데. 이게 제 일이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뻔뻔하게 이혼하면서 제 재산의 반을 가져가려 합니다. 맞은 것도 억울해 죽을 판인데, 그 재산 좀 지키겠다고 여기까지 온 게 그렇게 죽을죕니까-아!”
남자는 억울함에 설움까지 겹쳐 피를 토하며 외쳤다.
“저기 그게 고객님…….”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고객 정보를 놓친 게 실수였다.
그리고 그 실수가 커다란 소송 거리가 될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보십시오. 얼굴만 때린 게 아닙니다! 여기도. 여기도…… 심지어, 여기도!”
억울함에 흥분한 남자는 제 와이셔츠를 풀어 보이며 손톱자국이 있는 가슴과 배를 내보였다.
그것도 모자라 이젠 벨트까지 풀 기세다.
“어머! 고객님! 여기서 그렇게 훌러덩 벗으시면…….”
“어디서 말도 못 했습니다. 제 외모를 보십시오. 이 외모로 와이프한테 맞고 산다고 하면 지나가는 똥개가 웃습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고쳐서 끝까지 살아보려고 했는데, 흐흑…… 최근엔 이렇게 얼굴에까지…….”
결국 빛나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더듬거리는 손으로 선글라스를 들어 절망에 빠진 남자의 코끝에 걸쳐주었다.
그리고 속으론 위승현을 원망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걱정 마십시오. 원하시는 만큼, 얼마든지, 최선을 다해…… 변호하겠습니다, 고객님.”
***
퇴근 시간.
하루가 번개처럼 지나갔음에도 빛나의 시간은 어제 위승현을 이웃으로 마주한 그 순간에서 멈춰버린 것 같았다.
하루 종일 그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젠 옆집 남자가 되어버린 그를 피할 수가 있을까.
피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면 최대한 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그를 대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의 얼굴만 봤다 하면 그를 마주했던 지난 과거가 떠올라 절로 화가 났다.
게다가 승현이 나타난 순간까지 이리 오묘할 수가 없다.
하필이면 그녀가 파혼을 당한 이 시기에 다시 마주하다니.
“이번엔 절대 안 되지. 암, 안 되고말고!”
빛나는 운전대를 내리 치며 각오를 다졌다.
철천지원수 위승현.
그리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일단, 그는 그녀의 인생 최악의 시기에 나타나 더한 불운을 몰고 오는 남자다.
나타났다 하면 그나마 얼마 없는 그녀의 행운까지 모조리 앗아가버리는 녀석이니까.
“뭐야, 출발 안 해?”
“흐억.”
언제 탔는지 이정이 옆 좌석에 올라타 그녀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데 내가 올라탄 줄도 몰라?”
“아냐, 아무것도.”
아침에 이정의 차를 그녀의 아파트 옥외 주차장에 세워놓고 오는 바람에 여지없이 오늘도 같이 퇴근길에 오르는 두 사람이었다.
이쯤에서 빛나는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차만 가지고 가는 거다. 오늘은 혼자 생각할 게 많아서 혼자 자야겠어.”
이정이 차를 핑계로 승현을 보기 위해 오늘도 눌러 자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먼저 선수를 쳤다.
그러자 이정은 입을 삐죽이며 대답한다.
“너 내가 그 상콤이 만나는 거 싫어서 그러는 거지?”
“아, 진짜! 상콤이, 상콤이 하지 마! 걔 상콤이 아니야!”
“어머, 그게 상콤이 아니면 뭔데?”
“뭐?”
갑작스러운 이정의 반격에 빛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 적당한 단어가 떠올라 입술을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걘…… 악마야.”
“헐,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야, 솔직한 말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버릴 게 하나 없더구만, 악마라니?”
“꼭 머리에 뿔나고 삼지창 들고 다녀야 악마니? 걘 그냥 잘생김을 가장한 악마라고!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홀리지 말고.”
“어머, 야. 나도 산전수전 다 겪은 사회부 기자야. 홀리긴 누구한테 홀려?”
이정이 눈을 흘기며 맞수를 놓았다. 물론 그마저도 얼마 가지 못했지만 말이다.
“근데, 걔…… 키가 몇이라니?”
“야-아-악!”
“알았다. 알았다! 운전 똑바로 해라! 혈압 안 올릴게.”
빛나가 열 받아 운전대를 내리치자 이정이 기겁을 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위험천만한 운전 끝에 집에 도착했다.
아파트의 규정상 거주자는 지하 주차장 지정 스팟에, 방문자는 옥외 주차장을 이용하기 때문에 이정을 차는 밖에 있었지만 빛나는 지하 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그래도 집에까지 왔는데 밥이나 같이 먹고 돌려보낼까 해서다.
그렇게 이제 막 지하 주차장을 내려가 그녀의 주차 스팟을 향해 커브를 도는데 이정이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어라? 상콤이다!”
뭐야? 어디?
그 순간이었다.
쾅!
귓전을 울려오는 불길한 굉음에 빛나는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으악!”
“윽!”
빛나가 동그래진 눈으로 운전대에서 얼굴을 들었다.
제가 들이받은 것이 무엇인지 보기 위해.
그런데,
“헐…….”
“너, 남의 차 들이 받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두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은 상황에 빛나는 비명이라도 내지르고 싶었다.
이정이 재빨리 내려서서 그녀가 들이 받은 차의 정체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으아악!”
이정의 비명소리가 귓전을 울려오자 빛나는 눈을 감았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저곳에 차가 왜 서 있단 말인가!
심지어 저긴 주차 스팟도 아닌데 말이다!
“일단, 진정하자. 진정…….”
그녀는 깊은 심호흡과 함께 차에서 내려섰다.
하지만 눈앞에 들이 받은 차보다 저 멀리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승현의 모습이 먼저 보였다.
적어도 이정이 헛것을 본 건 아닌 모양이다.
이런 젠장할!
그가 지켜보고 있었다. 때문에 여기서 무너질 순 없었다.
어차피 일어난 사고, 인명 피해가 없는 가벼운 흠집 정도니 해결하면 되는 거 아닌가.
빛나는 최대한 침착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이정에게 말했다.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떨고 그래. 해결하면 되지.”
그렇게 핸드폰을 드는데 이정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하이톤 음성을 되날렸다.
“너 지금 외제 스포츠카 박았다, 이년아! 이게 호들갑 떨 일이 아니면, 도대체 뭔 일로 호들갑을 떨어야 하니!”
그제야 조금 전 차에서 내려섰을 때 들렸던 이정의 외마디 비명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차 맞은편엔 광이 반짝 반짝 나는 올블랙 스포츠카가 버젓이 서 있었던 것이다.
흐악!
튀어나려는 비명은 가까스로 집어 삼켰지만 잘잘한 신음소리가 붉은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것까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흐……아. 음, 그러니까…….”
“안 되겠다! 우리 저 상콤이한테 도움을 요청하자!”
“뭐라고? 안…….”
안 된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이정은 손을 번쩍 치켜들며 승현을 향해 온몸으로 러브콜을 보내고 있었다.
그가 서서히 두 사람에게 다가오는 모습이 슬로모션처럼 비춰졌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주머니에 손을 꼽은 채 느긋하게 걸어오는 모습은 미치도록 얄밉게 멋있었다.
“어머, 상콤…… 아니, 승현 씨! 우리 빛나 어떡하죠? 원래 운전 되게 얌전히 하는 앤데, 요즘 들어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멘탈이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이 차를 못 봤나 봐요. 견적이 많이 나올까요?”
그 말에 승현은 머리를 긁적이는가 싶더니 검은 스포츠카와 그녀의 차를 유심히 번갈아 보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이런 사고 현장에서 여자가 약하다는 생각은 그저 고정관념일 뿐이다.
이정이야 이때다 싶어 승현의 곁에 착 달라붙어 있었지만 남도 아닌 위승현의 도움 따윈 필요 없단 말이다.
“견적 많이 나오면 안 되는데…….”
“글쎄요, 제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됐어. 내가 해결할게.”
아는 척하지 마라! 나 이래봬도 변호사다!
빛나는 사이 좋아 보이는 승현과 이정 사이를 비집고 도도하게 외제차로 다가갔다.
주차 스팟도 아닌데 이 시꺼먼 차를 이 어두컴컴한 구석지에 도대체 누가 세워놨단 말인가!
차가 시커먼 것을 보니 주인도 음흉하고 시커먼 놈일 것이다.
날렵한 모양으로 보아 양아치가 분명하리라!
빛나는 차 앞 유리창에 드러난 번호로 전화를 시도했다.
그때 승현이 다가와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그거…….”
그러나 빛나는 단칼에 승현의 말을 잘라 먹었다.
“됐다고. 내가 해결한다고. 사고를 낸 건 난데 왜 네가 신경 써?”
“…….”
“뭐야, 신호음이 왜 이렇게 안 떨어져?”
그녀의 신경질에 승현이 자신의 핸드폰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대꾸했다.
“지하 주차장이라 그런가 봐.”
“어떡하니. 차주가 좋은 사람이어야 할 텐데…….”
이정의 걱정도 태산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눈에 봐도 고급 외제 스포츠카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걱정 말라니깐.”
어쩌면 이정이 아닌 빛나가 스스로에게 던진 위로인지도 모르겠다.
곁에서 승현의 시선이 느껴지자 빛나는 그로부터 한발자국 떨어지며 다시 한 번 차주와 통화를 시도했다.
당황하지 말자. 끝까지 차분하게!
“어, 신호 간다!”
드디어 신호가 떨어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뒤쪽에서 벨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빛나는 척추를 타고 흐르는 소름에 몸을 떨어야 했다.
설마, 아닐 거야…….
그러나,
“여보세요.”
뒤쪽에서 나직하게 울려오는 그의 목소리.
그렇게 몸을 사렸건만, 이번에도 이변 따윈 없었다.
가장 최악의 순간 나타나 그녀의 얼마 안 되는 행운까지 모조리 앗아가는 남자, 위승현!
빛나가 넋 나간 시선으로 핸드폰을 든 채 돌아섰을 땐,
“이정도 악연이면, 이젠 우리도 인연이다. 그러니까…….”
그렇지 않아도 매력 쩌는 입꼬리를 살짝 치켜 올리며 애교 철철 넘치는 눈웃음으로 여심을 제대로 홀리는, 그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인사 좀 하고 살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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