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왜 남의 심장에 키스하고 난리야?
2017.12.10.
독한 위스키를 몇 잔이나 들이켰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평소엔 그렇게 쉽게 올라오는 취기도, 취하려고 마음을 먹은 이 순간만큼은 왜 이리도 멀쩡한 것인지.
빛나는 씁쓸한 마음에 자신의 위스키 잔을 채웠다.
그리고 손을 뻗으려는 순간, 누군가 그 잔을 획 낚아채었다.
“에라, 지랄도 진짜 팔색조로 떨어라. 너 어제 쫄딱 젖어서 왔다며? 진짜 미친 거 아니냐?”
이정이었다.
사회부 기자라는 직업의 특성상 어제는 취재차 부산에 내려가 빛나의 행보를 막지 못했으나, 오늘은 여지없이 날아와 우울한 그녀의 옆자리를 꿰어 찼다.
뺏어낸 술잔을 한입에 털어 넣은 이정은 빈 잔을 채워 그녀에게 내밀며 눈을 흘겼다.
“결혼식 도둑맞은 것도 불쌍한데 술도 혼자 쳐 마시냐? 무슨 청승이야?”
역시 친구는 친구다.
말은 걸쭉하고 험했으나 가장 힘들 때 곁에 있어주는 절친이었다.
“그래서, 어제는 비련의 여주인공 했어?”
“개뿔, 내 주제에 무슨 비련의 여주인공? 미친년 비 맞고 돌아다닌다고 신고나 안 들어갔으면 다행이다.”
“거봐, 네 팔자에 비련의 여주인공 따윈 없다니까? 원래 비련의 여주인공은 그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
“무슨 분위기? 이만하면 나도 분위기파인데.”
“넌 좀 분야가 다르지. 비련의 여주인공이 울면 로맨스지만, 네가 울면 호러. 비련의 여주인공이 분노하면 일심동체가 되어 동조해줄 수 있지만, 네가 분노하면 미저리야. 그냥 무서워.”
“이, 씨…….”
입에서 욕설이 맴돌았으나 감히 내뱉을 순 없었다.
그 말에 틀린 부분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억울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불행을 다 떠안고 살아도 그녀는 비련의 여주인공 따윈 절대 될 수 없다는 걸.
인생 자체가 호러니까.
“그나저나, 너 이번 해에 완전 삼재인가 봐.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없어.”
“뭐야. 위로하러 온 거야, 염장 지르러 온 거야?”
“사실을 이야기하는 거야. 대한민국에서 파혼 당한 여자가 어디 너 하나뿐이겠냐? 그래, 그건 그럴 수 있다 치자. 솔직히 그런 시어머니 밑에서 평생을 함께하느니 오히려 잘된 건지도 몰라. 하지만, 결혼 계획을 송두리째 도둑맞은 기구한 팔자는 이 대한민국에 몇이나 될 것 같냐? 아마, 너 하나일걸?”
예리한 기집애.
사회부 기자답게 이정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변호사인 그녀가 반박을 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날카로운 뼈가.
“그래서 말인데…….”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런 반전을 선사하실까.
급 다정모드로 변해 그녀의 어깨에 팔을 걸쳐오는 이정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우리 점이나 볼래? 내가 아주 용한 점쟁이를 하나 아는데, 신 내림 받은 지 얼마 안 되서 신빨이 장난 아니래.”
“나 그런 거 안 믿는 거 잘 알면서!”
“야, 내일 여섯 시. 어때? 내가 이미 예약해놨어.”
“아, 진짜!”
말은 버럭 했으나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이 그녀를 장악했다.
결국 빛나는 눈을 반짝이며 되물어야 했다.
“거기가, 어딘데?”
***
클럽 마운틴.
강남에서 제일 잘나가는 클럽답게 눈을 즐겁게 하는 선남선녀들 천지다.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화려한 조명과 귀를 신나게 하는 비트가 어우러져 원수와도 어깨동무를 하고 즐길 수 있는 그런 분위기였다.
“여기가 바로 천국이로세! 대박, 쟤 완전 이쁨!”
정오는 벌써 탐색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러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승현의 세상 지루한 표정은 업그레이드가 되지를 않았다.
“뭐야, 내일이 이사라 피곤해서 그런가? 준비는 잘했어?”
“내가 준비할 게 뭐 있나. 다 알아서 해주는데.”
“하긴. 아…… 쟤, 다시 봐도 이쁜데? 연예인인가?”
“네가 못 알아보는 연예인도 있냐?”
“흡! 제가 방금 너 쳐다봤다! 헐…… 역시 위승현, 어딜 가도 먹혀!”
역시나 오늘도 예외 없이 여자들이 시선을 끄는 승현을 바라보며 정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정오도 모델이라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외모였지만 승현의 독보적인 분위기에 비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의 그러한 뜨거운 시선을 받고도 승현은 시큰둥했다.
이쯤 되자 정오는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야, 넌 저런 애 보면 심장이 막 뛰고 그러지 않냐?”
“심장이 왜 뛰어?”
“설레서! 좋아서! 흥분돼서!”
“싱겁기는.”
“미친 자식, 네가 그러니까 여자랑 오래 못 가는 거야. 네 그 화려한 연애 경력에도 불구하고 3개월 이상 간 여자가 있었어? 그러니까 너보고 바람돌이라고 하지!”
“내 말이. 나 참 억울해. 솔직히 여자랑 오래 못 가서 그렇지 내가 바람을 피운 적은 한 번도 없거든? 바람은 내가 아니라 네 특기지. 안 그래?”
“그건…….”
정오가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람은 정오의 특기지, 승현의 특기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현은 여자들에게 ‘바람’이라는 이미지로 굳건했다.
“야, 너 말이야, 그동안 그 많은 애들 만나면서 이 심장이 파닥파닥 뛰어본 적은 있냐?”
“심장이 파닥파닥 뛰면…… 죽어.”
“젠장. 농담이 아니고 진심으로 묻는 거야! 심각하게! 원래는 저런 애들 보면 설레서 심장이 난리 나야 정상이거든! 근데 너는 한 번도 그런 꼬라지를 못 본 것 같아서!”
“에이, 당연하지. 나도 사람인데. 심장이 펄떡펄떡 한 적이 있지, 왜 없어?”
승현이 안심하라는 듯 정오의 어깨를 툭 치며 웃자 그제야 그의 입가에 웃음을 띠며 되물었다.
“그렇지? 그래야 사람이지. 근데 언제?”
“응. 열 받을 때.”
물론 그 물음을 금세 후회했지만 말이다.
“아오- 옷, 젠장!”
친구라 이걸 때려죽일 수도 없고, 정오는 화를 집어 삼키며 길게 포효했다.
그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승현은 매력적인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생각에 잠겼다.
설레서 심장이 뛴다라…….
그런 느낌을 받은 게 언제였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주 먼 옛날 심장이 멈춰버린 것처럼.
***
퇴근 후 빛나는 이정을 따라 그 용하다는 선녀보살을 만났다.
하지만 그 용하다는 선녀보살이 빛나의 얼굴을 뚫어질 듯 바라보자,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조바심이 나는데 곁에 있는 이정이 더욱 흥분하며 빛나의 얼굴 가까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고 물었다.
“왜요, 보살님! 심각해요? 심각해요? 그렇게 안 좋아요?”
“역마살이 꼈어!”
대뜸 소리부터 지르는 선녀보살의 말에 이정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어머! 어머! 어쩜 좋아! 어쩐지! 어쩐지!”
그리고 당사자인 빛나도 죽을 맛이다.
“아 진짜, 이럴 줄 알았어! 젠장!”
처음, 재미로 한번 보자는 다짐은 깡그리 사라지고 평소와 다름없이 이모션을 풍부하게 끌어 올린 빛나는 선녀보살이 내뱉은 한마디에 빠져들고 말았다.
“김삿갓 저리 가라야! 한곳에 안주를 못 하고 이리저리 떠돌아. 평생! 어찌 그런 팔자를 타고 났누. 얼굴은 멀쩡하게 생겨서는, 쯧쯔.”
혀를 그렇게까지 안타깝게 차지 않아도 빛나는 지금 딱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봑! 보살님, 짱!”
용한 선녀보살의 말에 이정은 감탄을 금치 못하며 그녀의 심플한 성격답게 엄지손을 척 치켜 올려 제 의사를 확실히 어필했다.
이쯤 되니 당사자인 빛나도 그냥 있을 수 없다.
용하다면, 그녀가 제 운명을 피해갈 방법도 알고 있지 않겠는가?
빛나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제 운명을 달리해볼 생각이었다.
“저기, 보살님.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제가 얼마 전에 3년 사귄 남자친구한테 결혼 날짜까지 받아놓고 파혼 당했거든요.”
빛나는 지난 몇 개월 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그 몹쓸 이야기를 꺼내들며 저도 모르게 손을 떨었다.
그렇게 큰 맘 먹고 힘겹게 꺼낸 이야기건만, 헌데 이게 웬일?
선녀보살의 광기 어린 눈동자가 이정에게로 향하는 게 아닌가!
“너 말고, 얘 말여! 얘!”
순간 두 사람은 너무 놀라 영화의 정치 화면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빛나는 지금까지 선녀보살이 했던 말을 종합해보기 시작했다.
어제 마신 술이 덜 깬 건 아닐까, 또는 잦은 음주가무로 인해 언어를 이해하는 뇌의 한부분이 그 능력을 상실해버린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다.
허나, 잘못 들은 게 아니다.
빛나가 잘못 들었다고 하기엔 이정의 반응이 너무 히스테릭했기 때문이다.
“어머! 어머! 무슨 소릴 그렇게 하세욧! 점을 보러 온 건 제가 아니라 얘라구욧!”
그러자 선녀보살은 기겁하는 이정의 얼굴에서 빛나의 반듯한 얼굴로 흘깃 시선 한번을 주더니 콧방귀를 뀐다.
“흥, 얘가 뭐가 부족해서 이런 데를 다녀? 딱 봐도 복이 절로 굴러 들어올 상인데.”
헐, 태어나 처음 듣는 이야기!
더군다나 빛나가 그녀의 생을 처음 기억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죽도록 노력한 것 빼곤, 그녀 스스로 복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했기에 더욱 동조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아니, 뭔가 잘못 알고 계시나 본데, 얘가 지금 너-어-무 안 풀려서 점을 좀 보러 온 거거든요.”
빛나는 파르르 손을 떠는 이정을 붙들며 그녀가 흥분하기 전에 가라 앉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가다간 이정이 선녀보살의 머리채를 잡을 수도 있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제가 아니라 얘 팔자를 봐달라구요! 남자가 있는지 없는지!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는지 없는지!”
결국 이정이 폭발했다.
용하다고 해서 기분 전환 겸 찾아온 점집이었다.
헌데 점 보러온 빛나에겐 관심도 없고 장난삼아 따라온 이정의 박복한 팔자가 터져버리니, 도저히 평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녀보살은 시종일관 평온한 얼굴로 이정의 분노에 코웃음을 날렸다.
“말했잖아. 얜, 걱정 없다고. 부모 복에 연인 복에,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게 없어.”
“헐!”
이쯤 되니 사기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지금 천애 고아 유빛나에게 부모 복이라 했으렸다?
젠장, 너 오늘 잘 걸렸다.
가뜩이나 기분도 안 좋은데 여기다 화풀이라도 하고 가자!
“저기요! 이보세요, 보살님! 전 부모님이 안 계시거든요? 부모 복은 무슨!”
“쯧쯔. 애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네. 꼭 낳아야지 부모인가? 낳아놓고 나 몰라라 버린 부모는 부모가 아니라 짐승인 거야. 부모란 말이야, 네가 어머니 아버지 하고 부를 수 있음 그게 바로 부모인 거라고.”
“그럼…… 우리 부모님을 말하는 건가? 너 우리 엄마 아빠한테 어머니 아버지 하고 부르잖아.”
이정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러나 보살은 그런 이정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빛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파혼도 마찬가지야. 지금까진 인연이 아니었으니 파혼을 당한 거야. 몸에 불의 기운이 가득해. 화(火)를 담고 있다고. 헌데 목(木)의 기운을 가진 남자를 만나니 이년 기운에 못 이겨 활활 타오르기밖에 더해? 좀 더 기다려봐. 네 운에 수(水)의 기운을 가진 남자가 있어. 그 남자를 잡아야 돼.”
뭐? 화의 기운? 불의 기운?
좋다. 까짓 거 사이비 점쟁이 한번 믿어준다 치자.
그렇다면 이딴 애매한 사주풀이 말고 정확한 사실을 내놓으란 말이다!
“아니, 화의 기운, 수의 기운…… 그따위 건 잘 모르겠고. 그게 언제냐구요. 도대체 그런 남잔 어떻게 만나는 거냐구요!”
“벌써 만났어. 모르고 있을 뿐이지.”
“으-응?”
“엥?”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벌써 만났다고? 누굴?
빛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주변에 그녀와 인연이 될 만한 사람이 있는지를 말이다.
하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선녀보살이 말하는 그 남자의 정체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빛나의 애매한 표정을 읽은 선녀 보살은 다시 중얼거리듯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 정도 악연이면 이젠 인연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거여.”
헐!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보살님,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요? 어떻게 악연이 인연이 될 수 있어요? 그리고 제가 그 인연이 될 수 있는 사람을 어떻게 알아봐요?”
“그것도 걱정 마. 수(水)의 기운을 가진 남자. 보는 순간 이 남자다, 하고 알아볼 테니.”
결국 빛나는 찜찜한 기분으로 선녀보살의 집을 나왔다.
더 이상 머물렀다간 빛나의 찜찜한 기분은 물론, 역마살이 꼈다는 이정의 분노가 점집을 태워버릴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아악, 젠장! 저게 선녀보살이야? 선녀가 저렇게 생겼으면, 나는 옥황상제다!”
“잊어버려. 사이비야. 딱 보면 모르겠어? 나보고 부모 복이 있다잖아. 연인 복이야 아직 제대로 된 인연을 안 만났으니 그렇다 치자. 부모 복이…… 이게, 말이 되냐?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볼일 보고 손 안 씻은 것처럼 되게 찜찜해. 오늘은 혼자 못 자겠어. 나 너네 집에서 자고 갈래.”
“그럼 그렇게 하든가.”
이정은 빛나를 집에 데려다 주기 위해 왔다가 덩달아 내려섰다.
핸드백을 챙겨 아파트 입구로 돌아서는데 곁에 있던 이정이 중얼거렸다.
“음, 누가 이사 왔나 본데?”
빛나는 이정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크레인이 커다란 짐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가만 있자. 1, 2, 3, 4, 5, 6, 7…….”
이정은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층수를 세더니 결론을 지었다.
“저기 너네 옆집인데? 드디어 이사 왔나 보다. 로열층이라 비싸서 한참 안 나간다더니.”
“그러네.”
빛나도 보고 있다.
이정의 말대로 크레인이 올라가고 있는 곳은 그녀가 살고 있는 층수였다.
한 층 당 두 세대만 살고 있는 아파트 구조상 그녀의 옆집이 분명하다.
“새 이웃사촌이구만.”
그녀는 턱 선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이곤 자연스럽게 시선을 더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후드득.
빗방울이 순식간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앗, 차가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빛나가 첫 피해자였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손 우산을 만들어 얼굴을 가리며 이정을 붙들었다.
“웬 소나기? 뛰자!”
가뜩이나 우울한 마음에 비까지 내리니 짜증이 하늘로 솟았다.
그렇게 이정의 팔을 붙들고 뛰다시피 발걸음을 옮기는데 얼마 못 가 아파트 입구에서 무언가에 부딪치고 말았다.
“흡!”
빛나는 순식간에 호흡을 들이키며 휘청였고, 누군가가 단단히 붙들어 주고서야 자신이 부딪친 것이 남자의 가슴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비를 피할 생각이 너무 간절한 나머지 앞을 보지 않고 뛴 게 실수였다.
미안했다. 어쨌든 부딪친 건 그녀의 실수였으니까.
사과를 하기 위해 이마에 머물러 있던 손 우산을 거둬내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비에 홀딱 맞은 남자의 모습을 마주한 순간 빛나는 입안에 맴돌던 사과는 단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넋을 놓았다.
이마를 덮고 있는 부드러운 베이비 펌에 작고 갸름한 얼굴, 짓궂어 보이는 아몬드형 눈매와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간 입술은 말 더럽게 안 듣는 미운 일곱 살 사내아이를 연상케 했다.
때문에 187이나 되는 훤칠한 키와 딱 벌어진 어깨는 그가 가진 최고의 반전 중 하나였다.
하지만 빛나는 제가 부딪친 남자가 이토록 잘생겨서 놀란 게 아니다.
절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남자.
“위……승현?”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이 천하의 원수를 여기서 만나다니!
게다가 더 섬뜩한 사실은,
비에 홀딱 젖어 버림받은 강아지마냥 보호 본능을 일으키고 있는 그의 모습이 너무도 편안해 보인다는 것.
-수(水)의 기운을 가진 남자. 보는 순간 이 남자다, 하고 알아볼 테니.
“헐, 말도 안 돼…….”
그야말로 악몽의 연속.
그 끔직한 현실에 빛나는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아-아악!”
***
[도어록 비밀 번호는 0000으로 세팅되어 있으니 설명서 보시고 바꿔주시면 됩니다. 이사는 잘 끝났나요?]
“이제 거의 끝나갑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인중개사와 통화를 끝낸 승현은 차에서 내려 마지막 크레인이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전문가들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냐마는 그래도 한 번은 확인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다.
“저게 마지막 맞죠?”
“예, 맞습니다.”
“오늘 정말 수고하셨어요.”
“아이고, 무슨 말씀을요.”
그가 이제 막 인사를 끝내고 돌아서려는 순간,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이사 막바지라 크게 지장은 없었지만 이런 날 비가 오는 건 그로서도 달갑지 않았다.
승현은 서둘러 비를 피하기 위해 아파트 입구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 무언가가 쿵, 하고 그의 가슴을 들이받은 게 아니가!
어제 오늘 왜 이리도 그의 가슴을 들이받아 대는지, 가슴 수난 시대가 따로 없다.
다행히 여자라 충격은 크지 않았지만 들이받은 상대방은 그게 아닌 모양이다.
뒤로 물러서는가 싶더니 눈에 띄게 휘청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비틀거리는 여자의 팔을 붙들어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단단히 버텨주었다.
얼굴 위로 손 우산을 만든 것으로 보아 비를 피하다 미처 그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앙증맞은 손 우산이 걷히는 순간, 승현은 두 눈을 크게 떠야 했다.
“위……승현?”
세상에나, 유빛나?
그는 너무 당혹스러워 차마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빛나라는 걸 아는 순간, 저도 모르게 붙들고 있던 그녀의 팔을 놓아주었다.
그만 보면 격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그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까만 그녀의 동공이 격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째지는 비명을 토해냈다.
“헐, 말도 안 돼…… 아-아악!”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사이 빛나는 도망치듯 아파트 입구로 뛰어 들어갔다.
“빛나야, 같이 가!”
친구로 보이는 여자가 당황한 듯 쫓아 들어갔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사이로 그녀 표정을 보았다.
기가 막히고 하늘이 무너지는 표정.
은근 자존심이 상했다.
그녀는 이 기가 막힌 우연에 소리라도 질렀지만, 놀란 건 그도 마찬가지인데 바보처럼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왜…….
“젠장. 4년만인데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네, 유빛나.”
그녀가 시야에 사라지고 나서야 입이 트였다.
비가 오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쏟아진 비는 그의 몸을 적시며 체온을 앗아갔다.
그런데 가슴이 불에 덴 듯 뜨거운 이유는 무엇일까.
승현은 저도 모르게 제 가슴으로 시선을 주었다가 깜짝 놀랐다.
왼쪽 가슴에 정확히 꽂혀 있는 키스 마크.
도대체 언제?
“설마…….”
조금 전 빛나가 찍어 놓은 낙인이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열 받을 때만 뛴다던 그 심장이 늑골을 부술 듯 튀어 올랐다.
“헐, 이 여자…….”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제 가슴에 찍한 그 낙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왜 남의 심장에 키스하고 난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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