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낯선 여자에게서 익숙한 광기(狂氣)가 느껴진다!
2017.12.06.
쏴아아.
예고되지 않은 비가 아침부터 쏟아지더니 이젠 아예 퍼붓는 수준이 되었다.
도로변에 고인 물을 헤치고 택시 한 대가 멈춰 서자 차 문이 열리며 늘씬한 다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철퍼덕!
하지만 명품 구두가 빗물에 잠긴 순간,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욕설이 먼저 튀어 나왔다.
“젠장!”
하얀 피부와 잘 어우러진 부드러운 갈색머리, 다리만큼이나 우아하고 여리여리한 몸매.
하지만 날렵한 콧날과 앙다문 입술은 한눈에 봐도 그녀가 보통 성질머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유빛나.
꽃다운 방년 21세가 아닌, 꽃봉오리가 수십 번도 더 폈다 졌을법한 31세!
그러나 20대 못지않은 몸매와 외모를 가진 그녀는 아직 미혼이다.
미혼…….
빛나는 그 사실을 읊조리며 화려한 호텔을 불타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눈빛으로만 보자면 호텔에 불을 싸지르고도 남을 듯싶었다.
“어떻게 나한테…….”
계획대로라면 오늘 이 순간, 그녀는 미혼 타이틀을 벗고 저 호텔에서 행복한 결혼식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3개월 전 갑작스럽게 파혼 당한 것도 서러운데 신부 이름만 바뀐 채 그녀의 결혼 계획을 송두리째 도둑맞았다.
감히 그녀가 계획한 호텔에서 다른 여자와 결혼하다니.
물론 이 모든 것은 ‘그’가 아닌 ‘그의 어머니’ 뜻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고 분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내리는 비로 인해 차가운 체온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자신을 어르고 달래며 깊은 심호흡과 함께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니야, 유빛나. 오늘은 미치고 그러는 날이 아니야.”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튀어 나오려는 악을 꾹 눌러담고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을 바라보는 빛나의 미간이 굳었다.
그녀의 친구인 이정이었다.
이정의 성격으로 보건데, 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오늘 하루 종일 울려댈 것이다.
불굴의 의지로 포기를 절대 포기를 모르는 절친이니까.
“여보세요.”
[야-아! 이- 미친녀-연아-!]
아니나 다를까, 빛나의 행보를 예측한 이정의 혈압이 핸드폰 저편에서 제대로 폭발했다.
[너 거기 어딘 줄 안다, 내가! 꼼짝 말고 있어라. 나 지금 서울 올라간다! 호텔 입구만 들어서봐! 진짜 가만 안 둬!]
“조용히 예식만 보고 올 거야. 금방 나올 거라고.”
[꼴에 네가 얌전히 나오겠다!]
“아, 진짜라니까. 나 오늘은 광년(狂姩)이 컨셉 아냐. 오늘은 진짜 비련의 여주인공이라고!”
[헛, 비련의 여주인공은 개뿔! 그건 아무나 하냐? 다른 사람은 다 돼도 넌 안 돼. 넌 거기 간 순간 벌써 광년이 컨셉이야. 제정신으로 어떻게 거길 가냐! 응?]
3년 동안 사랑했던 내 님 가는 마지막 길 곱게 지켜보겠다는데, 왜 이리 안 따라주는지 모르겠다.
사랑했다 생각했던 남자에게 파혼을 당했다.
그녀에게 헌신적이었던 남자였다.
대한민국 1등 신랑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착실하고 튼튼한 남자였단 말이다.
빛나 또한 그에게 잘 어울리는 여자라 자부하고 있었다.
맨손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그녀였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 최고의 이혼 전문 변호사가 되었으니까.
여느 집안 좋은 여자들보다도, 여느 예쁜 여자들보다도 더 당당했던 그녀였기에 빛나가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없는 게 있을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머리로 안 되면 노력으로 얻었고, 그것도 안 되면 미인계라도 써서 기어이 제 원하는 것을 얻었던 게 바로 그녀였으니까.
모든 게 성공적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그날이 오기 전까진.
***
“어머니가, 죽어도…… 나는 안 되겠대?”
진한 쌍꺼풀 때문에 더욱 서글서글해 보이는 원준을 바라보며 빛나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의 선한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많이 생각했다. 어머니랑 너,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난 어떻게 해야 하나……. 근데 말이다, 빛나야…….”
그가 애처롭게 빛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이 너무 서글퍼 그가 오늘 일을 결정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다 버리고 우리끼리만 결혼하자면…… 넌 어떻게 할래?”
떨리는 목소리.
하지만 이 역시 질문이 아니다.
3년을 만난 사이가 아닌가.
빛나는 그의 몸에 곳곳에 깃든 선함을 곧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 또한 빛나가 어떤 여자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알잖아. 안 그럴 거라는 거. 못 한다는 거. 죽었다 깨어나도 내 자존심에 그럴 수 없다는 거.”
그랬다.
그녀를 인정하지 않는 집안과 결혼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이 선한 남자가 제 어머니를 등지고 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기심에 허세로 똘똘 뭉친 어머니라도 그를 낳아준 어머니니까.
“어떡하니, 우리 빛나…… 불쌍해서 어떡해…….”
결국 원준은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그는 그녀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선한 남자였다.
열정적이진 않았지만 따스하게 사랑했고, 비록 그 사랑이 과거가 될지라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그래, 우리 파혼해.”
“빛나야…….”
“근데 이 파혼, 내가 하는 거야. 오빠가 하는 게 아니라.”
마지막 자존심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그녀가 사랑했던, 그래서 이젠 과거가 되어버릴 이 남자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서다.
결혼을 세 달 남겨둔 상황, 결국 원준의 어머니가 이겼고 그렇게 짧았던 그들의 약혼은 끝을 맺었다.
***
3개월 전 일을 떠올리는 빛나의 입술에 피가 맺힐 것 같았다.
그랬다.
빛나는 남들과 다른 한 가지를 커버하기 위해 다른 사람보다 열 배는 노력했다.
고아 출신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 온전히 그녀 한 사람으로 비쳐지길 바랐기 때문이다.
성공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순간, 결국 그 한 가지가 그녀의 사랑까지 앗아가고 말았다.
대한민국이란 사회는, 이제 서로 사랑해서 하는 당연한 결혼마저도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있어야 하는 조건주의 사회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빛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 조건주의 사회에서 가장 열악한 노예 계급에 속했다.
부모란 존재는 그녀가 남보다 좋은 머리로 백배 노력을 한다고 해도 절대 얻을 수 없는 천륜이었기에.
[정신 차리고 당장 거기서 나와. 내가 가서 머리채 끌고 나오기 전에!]
이정의 쟁쟁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하지만 빛나는 조용히 전화를 끊어버렸다.
오늘 꼭 봐야겠다.
사랑이 결핍된 채 조건에만 맞춰진 이 결혼이 얼마나 행복한지, 꼭 눈으로 확인해야겠단 말이다.
물론 아직까지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남자의 결혼식을 본다는 건, 그녀에게도 리스크가 컸다.
그만큼 마음이 찢어질 테니까.
그래도 좋다.
오늘 하루쯤 비련의 여주인공 한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건 아니니까.
게다가.
우르르 쾅쾅!
폭풍우를 동반한 천둥번개가 그녀의 우울한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녀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어도 절로 비련의 여주인공이 될 수 있는 날씨였다.
빛나는 마음을 다잡고 걸음을 옮겼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리한 몸매와 단정한 걸음걸이가 잘 어우러져 어두컴컴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자태는 한껏 우아했다.
웨딩홀로 장식된 연회장은 곳곳에서 온 화환으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허세를 좋아하는 그의 어머니 취향에 딱 맞는 화환들이었다.
물론, 저 화환들 중 얼마가 진짜고 얼마가 가짜인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예식은 벌써 시작되어 절정에 이른 상태였다.
빛나는 누가 알아볼세라 선글라스를 꺼내들며 조용히 사람들 틈으로 섞여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이 실수였다.
식장에서 신랑 신부를 보는 순간,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몰아치는 비바람만큼, 내리치는 천둥번개만큼 우울한 결혼식을 예상했었다.
사랑이 빠진 결혼식, 굳은 날씨만큼 이 화려한 결혼식도 그러길 바랐단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담긴 예식장의 모습은 행복 그 자체였다.
말이 되지 않는다.
사랑이 빠진 결혼식이 이리도 행복해 보일 수 있단 말인가.
밖에는 지금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는데 예식장은 화사하기 그지없었다.
못나길 바랐던 신부도 예상외로 예뻤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충격이었던 건,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녀와 사랑을 속삭이던 그가 온전히 제 신부만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말도…….”
안…… 돼.
그녀는 차마 마지막 말을 외치지 못하고 자신이 들고 있는 핸드백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믿을 수 없었다.
사람을 쉽게 만나고 쉽게 사귈 그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거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사랑을 속삭이던 그가 아닌가.
누가 봐도 집안끼리 조건 맞춘 이 결혼에서 신랑에게 사랑받지 못한 불행한 신부의 모습을 예상했다.
어쩌면 그 희망 하나에 여기까지 발걸음을 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자신은 쿨한 여자라 위로하면서.
헌데, 서글서글한 그의 눈 속에 온전히 담긴 신부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모든 계산이 철저히 어긋났음을 깨달았다.
믿음이 무너졌다.
‘난 쿨……한 여자야. 절대, 울지 않는다.’
이를 악 물었다.
시큼한 눈을 껌뻑이지 않기 위해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날 것 같자, 그녀는 서둘러 발걸음을 돌렸다.
어서 빠져 나가자.
누군가의 눈에 띄어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그녀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이제 막 돌아선 순간, 누군가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바람에 선글라스를 쓴 코가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앗!”
통증에 인상을 쓰면서 빛나는 무의식적으로 부딪친 그것에 시선을 주었다.
남자 가슴이었다. 그것도 운동깨나 한 듯한.
몸을 지탱하기 위해 남자의 가슴에 댄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괜찮아요?”
남자가 물었지만 빛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행여나 누군가 그녀를 알아볼까 두려워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고픈 마음뿐이다.
그래서 빛나는 눈앞에 있는 남자의 가슴을 저만치 밀치고 말없이 돌아서 버렸다.
어떻게 그곳을 벗어났는지 모르겠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그녀의 얼굴 위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느끼고 나서야 빛나는 자신이 호텔을 벗어났단 사실을 깨달았다.
차가운 빛줄기가 얼굴 위로 정신없이 쏟아지자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다.
피부엔 소름이 돋고 있는데도 뜨거운 불덩이를 삼킨 것마냥 피부 혈관이 터질 것 같았다.
곧 빛나는 그 불덩이의 정체가 바로 분노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아악! 짜증나!”
화가 치솟은 나머지 빛나는 고인 물웅덩이를 발로 찼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자 혼자 분에 못 이겨 씩씩 댄다.
비련의 여주인공? 흥! 그딴 거 개나 주라지!
오늘을 마지막으로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로 했던 애초의 각오 따윈 잊어버린 지 오래다.
그 행복한 부부를 상대로 저주나 퍼붓지 않으면 다행인 것을, 그마저도 못하겠다.
그나마 여기서 위로가 되는 건,
“굳이 내가 손을 쓰지 않아도…….”
쏴아아-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으하하하!”
이 좋은 날 비가 온다는 사실이다.
우르르 쾅쾅!
더불어 천둥번개도 함께.
하얀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머리 위로 번쩍이는 천둥번개가 그 음산함을 더했다.
빛나는 그런 하늘에 감사라도 하듯 팔을 벌려 비를 맞았다.
갑자기 조금 전 핸드폰을 통해 쟁쟁히 들려왔던 이정의 목소리가 뇌리에 파고들었다.
-넌 거기 간 순간 벌써 광년이 컨셉이야.
이정의 말이 씨가 되는 순간이었다.
***
“이런 덴 너 혼자 오지 왜 나까지 데리고 오는 거야?”
“원래 결혼식은 혼자 오면 왕따야.”
정오에게 끌려는 왔지만 비까지 오는 이 궂은 날씨에 전혀 상관없는 결혼식에서 자신의 귀한 시간을 낭비한다는 생각에 승현은 한껏 짜증이 오른 상태였다.
그런 승현의 기분을 맞춰주려는 듯 정오가 속삭였다.
“야, 너 그거 아냐? 사실은 신랑이 원래 결혼할 여자가 있었다더라. 소문에 의하면 죽고 못 살았더라고. 근데 워낙 반대가 심해서 결국 포기했대. 예식장까지 다 잡아놓고.”
정오의 목소리에 승현은 인상은 찌푸렸다.
신랑의 연애 전력 따윈 알고 싶지도 않다.
어서 이 자리를 빠져 나가고 싶을 뿐이다.
여자들의 흘깃거리는 시선이 그에게로 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반대했는 줄 아냐?”
“여자가 안 예뻤나 보지?”
“야, 무슨 소리! 신랑 직업이 뭔지 아냐? 성형외과 의사란다. 성형외과 의사가 설마 외모도 안 따라주는 여자를 죽고 못 살 만큼 사랑했을까. 반대는 신랑 부모……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신랑 어머니가 단식 투쟁까지 하며 했대. 집안끼리 너무 안 맞다고.”
“속물이네. 신랑 쪽도 신랑 의사라는 거 빼면 그렇게 볼 게 없구만.”
승현의 시선이 서글서글해 보이는 신랑 얼굴에 가 머물렀다.
“근데 너무 기울었나 봐.”
“뭐가. 여자가?”
“아니, 여잔 변호사였대. 잘나가는 변호사.”
변호사라고? 그런데 뭐가 기울어 파혼까지 당했단 말인가?
“여자가…… 고아였대.”
아무렇지 않은 듯 중얼거리던 정오의 입에서 고아라는 말이 나오자 승현의 매력적인 아몬드형 눈매가 제 친구에게로 향했다.
“너야, 다 가진 놈이라 저 세계 사람들 이해 못 하겠지만 나는 이해해. 아들 하나 잘 키워 강남에서 제일 잘나가는 성형외과 의사 만들었지만 기껏해야 졸부 아니냐. 근데 강희진이랑 결혼하면서 진짜 로열패밀리로 입성한 거지. 쟤가 또 집안은 빵빵하잖아. 안 그래?”
“로열패밀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 눈엔 다 똑같아 보이는구만!”
“야, 모르는 소리 말아라. 넌 태생이 그래서 아직 그런 거 못 느껴봤겠지만 나처럼 이렇게 중간 세계에 딱 걸친 놈들은 그런 거 엄청 민감하다고. 그러니까, 아부지 대신 이런 자리까지 온 거 아니겠냐.”
정오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장 친한 친구지만 간혹 이렇게 감당하기 힘들 때 승현은 시선을 돌리고 딴생각을 하곤 했다.
지금도 그러한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렇게 정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데 그의 시야에 낯선 한 여자가 들어왔다.
신부만큼이나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자였다.
단아하게 틀어 올린 갈색 머리에 여리 여리한 몸매가 인상적이었다.
승현의 고개가 살짝 오른쪽으로 기울며 그의 아몬드형 눈매가 반짝 빛을 발했다.
예쁜 여자를 봐서 눈이 번쩍 뜨인 것이 아니다.
“정오야, 지금 밖에…… 비 오지?”
“비만 오냐? 좀 전에 번개 치는 거 봤잖아.”
“그렇단…… 말이지.”
그의 입술이 묘하게 말려 올라갔다.
어라, 요것 봐라?
밖에 비에 천둥번개까지 치는데 결혼식장에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와?
적당한 키에 늘씬한 몸매만으로도 충분히 시선을 끌 만큼 화려한 느낌을 주는 여자였지만,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는 선글라스 때문에 어떻게 생겼는지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몸매와 얼굴이 비례한다면 분명 상당한 미인이리라.
그러나, 미인이면 뭐하나. 이런 날씨에 선글라스를 쓰고 올 만큼 제정신이 아닌데.
흥미를 잃은 승현이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누군가 그의 가슴을 쿵 들이 받았다.
“아앗!”
여자의 짧은 비명소리가 그의 귓전을 울려왔다.
내려다보니 조금 전 시선을 주었던 그 여자가 그의 가슴으로 돌진한 것이었다.
“괜찮아요?”
반사적으로 물었지만 여자에게서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대신 그의 가슴에 얹어진 그녀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보통 날이 선 여자가 아니다.
잠시 후, 그의 심장을 쥐어뜯을 것 같던 손이 가차 없이 승현을 밀어내며 돌아섰다.
빠르면서도 우아한 걸음걸이로 사라지는 그녀를 보며 승현의 눈썹이 곤두섰다.
뭐지, 저 반응은?
묘하게 기분 나쁜 여자다.
이 비 오는 날 선글라스를 쓰고 오질 않나, 부딪쳐 기껏 잡아줬더니 그의 심장을 쥐어뜯을 듯 손톱을 세우질 않나.
누가 와서 부딪쳤는데 어디다 대고 성질이야!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참았다. 남의 예식장에서 제 성질대로 막 할 순 없었기에.
대신, 더 이상 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할 인내심이 사라져버렸다.
“가자, 정오야.”
“응, 벌써?”
“네 아버지 이름 석 자 넣어 축의금에 화환 전달했으니 그걸로 네 의무는 끝난 거야. 더 이상 이 자릴 지켜야 할 이유가 없다고.”
“하긴.”
가뜩이나 지루한 터라 정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곤 승현을 따라 나섰다.
예식장에 늦게 도착한 덕에 지하주차장에 자리가 없어 야외 주차장에 차를 세워야 했던 그들은 몰아치는 비를 보며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호텔에 들어섰을 때보다 비가 더 많이 몰아치고 있었다.
“아, 진짜 이놈의 비…….”
정오가 불만을 터트리는데 몰아치는 빗속에 어렴풋한 형체가 보인다.
“저게…… 뭐지?”
두 사람은 마치 춤을 추듯 이리저리 비틀거리던 하얀 형체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정오가 기가 막히다는 듯 운을 뗐고,
“헐, 그 여자네.”
승현이 당연하다는 듯 마무리 지었다.
이 비 오는 날 선글라스 쓰고 나타날 때부터 알아봤다.
분명 제정신이 아니다.
제정신이라면 손에 우산을 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리는 비를 미친년처럼 저렇게 맞고 돌아다니겠는가!
“와…… 세상 말세다, 말세야. 뒤태만 보면 연예인감인데, 멘탈은 완전히 정신병원감이야.”
기가 막히다는 듯 정오가 혀를 차며 말했다.
이에 동조한다는 듯 승현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게, 저렇게 멀쩡한 허우대로…….”
안타깝도다!
하느님은 어쩌자고 저런 여자에게 저런 허우대를 주셨을고!
그들이 혀를 끌끌 차며 돌아서려던 찰나였다.
“아아악! 짜증나!”
빗속을 뚫고 들려오는 앙칼진 목소리.
더불어 고인 빗물을 걷어차고 씩씩대는 모습에 정오는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
그리고 잠시 후,
“굳이 내가 손을 쓰지 않아도……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으하하하!”
우르르 쾅!
우울한 그녀의 머리 위로 천둥번개가 가세해 그 느낌을 더욱 으슬으슬하게 만들었다.
“뭐냐…… 저거, 호러냐?”
정오가 더듬더듬 물으며 뒤로 물러서는데 줄곧 신경질적으로 치켜 올라가 있던 승현의 아몬드형 눈매가 다시 한 번 반짝 빛을 발했다.
요것 봐라? 저건……호러가 아니다.
낯설지 않은 광기(狂氣)다.
“아오, 꿈에 나타날까 무섭다. 진짜…….”
정오가 몸서리를 치며 승현을 잡아끌었다. 빨리 자리를 뜨자는 이야기다.
헌데 승현은 두 다리로 버티고 선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전히 음침한 여자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조금 전 여자가 손톱을 박아 넣었던 심장이 널뛰기 시작한다.
이 두근거림이 묘한 흥분 때문인지 조금 전 화 때문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만큼 난해했다.
그럼에도 승현이 지금 이 순간 여유롭게 웃을 수 있는 건, 확실히 여자가 제정신이 아닌 만큼 그 또한 평범한 스케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묘한 두근거림이 좋다.
화로 인한 두근거림이든, 설렘으로 인한 두근거림이든, 알게 뭔가.
뛰고 있는 심장이,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생생히 대변해주고 있는데.
“정오야.”
“아, 왜! 빨리 가자니까!”
결국 승현은 뛰고 있는 심장을 직접 느껴보려는 듯 제 가슴에 손을 얹고 넋 나간 듯 입을 열었다.
“낯선 여자에게서…… 익숙한 광기(狂氣)가 느껴졌다면, 너 나보고 미쳤다고 할래?”
그러자 가차 없는 대답이 날아들었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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