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영원을 절반으로 나누면…
매일 매일이 꿈을 꾸는 것 같다.
라카인은 일찍 깨는 편이다.
오랫동안 훈련받아온 탓에 습관이 든 탓도 있었고, 샨의 하인이 된 후에도 여전히 남보다 먼저 일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적게 자도록 교육받은 터라 별로 잠에 미련을 가지지도 않았다.
정말 어쩔 수 없이 몸이 필요로 할 때만 빠르게 잠들었다가 일어나는 생활이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먼저 깨어나도 좀처럼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
라카인은 새벽별처럼 뜬 눈으로 투이나가 자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투이나는 비스듬히 기댄 그의 팔을 베개 삼아 잠들어 있었다.
자신과 달리 내버려두면 몇 시간이라도 잘 수 있을 터였다.
‘그것도 좋다.’
라카인은 괜히 가슴 밑이 간지러워졌다.
아직도 자신은 이런 사소한 일들을 조심스레 기억 속으로 접어 넣었다.
그렇게 가져간 기억이 어느새 벽 한 쪽을 채울 정도였다.
평생 책을 읽어본 적이 없었지만, 할 수 있다면 그는 지금을 어딘가 기록하고 싶었다.
그걸 일기라고 부르는 줄도 모르면서도 그랬다.
첫 장을 펼치면 늘 똑같은 문장으로 시작하겠지.
오늘도 투이나 옆에서 깨어났다.
라카인은 살짝 그들 위를 스쳐지나가는 찬바람을 느끼고는 턱을 당겨 투이나에게 바짝 붙었다.
투이나는 자면서 앓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추위를 느끼면 가끔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더없이 사랑스러운 풍경이긴 했으나 그는 아주 잠깐이라도 투이나를 추위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미 목까지 덮인 이불을 괜스레 한 번 더 끌어올려주고는 라카인이 툭 이마를 기댔다.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다.
왜 사랑하는 사람을 이토록 가까이에 두고서도 눈물이 나오려는 걸까.
정작 훈련받은 라카인의 눈은 깨끗하게 말라있었지만 그는 몇 번쯤 아릿한 통증에 시달렸다.
당신을 내 곁에 두어도 되는 겁니까?
투이나는 언제나 그 대답에 긍정으로 답할 것이다.
그러나 라카인은 그녀가 너무도 귀중한 탓에 때때로 부채감을 느꼈다.
가끔 세상에서 당신을 훔쳐낸 기분이 든다고.
더 많은 사람이 당신을 필요로 할 텐데.
나 혼자 독점하고 있어도 되는 걸까.
라카인은 자신보다 남을 우선하도록 길러졌다.
그러면서도 투이나를 볼 때마다 욕심이 먼저 차오르다니.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그는 홀로 삭혔다.
그럼에도 당신을 원하니까.
“으음…….”
투이나가 깨어나려는지 눈을 찌푸렸다. 라카인은 서둘러 눈을 감았다.
그가 오래 잠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 투이나가 걱정했기에 라카인은 언제나 투이나가 깰 때 같이 깨어나는 척하고 있었다.
곧 예민한 귀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잡혔다.
“잘 잤어요?”
투이나가 뒤척이며 한숨처럼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아아. 무엇을 속이랴.
순전히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만이 아니라, 그녀가 자신을 깨워주는 게 좋았다.
투이나는 반쯤 잠에 취한 채 쪽쪽거리며 라카인의 뺨과 목덜미에 입술을 눌렀다.
단번에 열이 오른 라카인은 도저히 자는 척을 할 수가 없어서 눈을 번쩍 떴다.
그러면 투이나가 이번에도 잠 깨우는 효과가 좋다는 얼굴로 빙긋 웃고 있어서.
라카인은 스멀거리는 죄의식보다 매번 욕망의 손을 들어주고 말았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라카인은 애써 담담한 목소리를 내보냈다.
덕분에 목이 잠겨서 정말로 방금 깨어난 사람처럼 들렸다.
부스스 일어나던 투이나가 방금 전까지 머리 밑에 있던 걸 확인하고는 눈이 둥그래졌다.
“아, 또 이대로 잤어요? 세상에, 금방 뺀다고 약속해놓고.”
“이게 더 편합니다.”
“거짓말. 팔이 저릴 텐데 어떻게 더 편해요?”
라카인은 정말로 그게 더 편했다.
오히려 딱딱한 팔을 베고 자는 투이나가 더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아니었더라면 대놓고 매일매일 그랬을 것이다.
투이나는 순진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라카인을 보자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다음엔 진짜 제가 해줄 거예요.”
“그러다 팔 부러지십니다.”
“안 부러져요!”
라카인은 진심으로 걱정한 건데 투이나는 농담인 줄로만 알았다.
라카인은 몰래 자기 뒤통수가 얼마나 단단한지 만져보았다.
투이나의 팔과 머리 무게를 고려하면 정말로 금이라도 가지 않을까.
라카인이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는 사이 투이나는 여관 밖에 있던 대야를 질질 방으로 끌고 들어왔다.
라카인이 서둘러 일어났지만 동작이 빨랐던 투이나가 키득이며 오히려 물을 튕겼다.
가볍게 씻을 걸 흠뻑 적신 뒤에야 두 사람이 머리를 털며 바깥으로 나왔다.
투이나와 라카인을 발견한 여관 주인이 금세 아는 체를 했다.
“어어, 내려왔어? 오늘 아침은 뭘로 할래?”
“안녕하세요? 제일 맛있는 걸로 주세요.”
투이나가 헤헤 웃으며 답했다. 주인과 친근하게 대화하는 걸 본 손님 중 하나가 까딱이며 물었다.
“누구야? 사촌?”
“그냥 손님이야.”
“안녕하세요?”
투이나가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그녀는 언제나 금방 사람들과 친해졌다.
라카인은 앉자마자 부어주는 맥주를 조금 홀짝이며 미리 맛을 보았다.
이제 투이나의 잔에 독을 탈 사람은 사라졌지만 습관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투이나와 라카인은 조용히 수도를 떠났다.
새로운 신인 아르루가가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퍼지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이리저리 얽힌 게 많아 라카인은 그들이 곧장 아르힘을 떠날 줄 알았다.
하지만 투이나는 조금만, 이라며 아르힘을 돌아다니길 원했다.
루가로서 돌아다녔던 마을은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곳을 피해서 아르루가가 무엇인지 전해주고 싶다고.
만약 고향에 먼저 가고 싶은 거라면 미뤄도 된다고 했지만 라카인은 투이나의 뜻에 따랐다.
어차피 모하세스로 돌아가 봤자 수호신을 잃은 샨이 있을 뿐이다.
‘모하세스도 아직 수호신의 힘이 유지되고 있나?’
샨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아직 모하세스가 망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르파가 검이 되었을 뿐이니, 힘이 유지되고 있을 지도 모르겠군.’
라카인의 눈이 조금 어두워졌다.
아르파의 검은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면 너무 위험해지기에 숨겨두었다.
호루니가 아무도 그걸 가져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맹세했지만. 남아있는 신의 힘은 그를 불안하게 했다.
정확히는, 아르힘에도 아직 수호신의 힘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말이죠!”
어느새 화기애애하게 떠들고 있던 투이나가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저희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게 다 아르루가의 뜻 아니겠어요?”
“와하하!”
웃음이 왁자지껄하게 터져 나와서 라카인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대체 언제 이렇게 사람이 모였는지 도저히 모를 노릇이다.
간단하게 아침 식사나 하려던 사람들이 간식 대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듣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투이나를 중심으로 둥글게 둘러앉은 사람들이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뭐, 그게 진짜든 가짜든 새로 바뀌었다는 신 얘기보다 아가씨 얘기가 더 재밌는 걸?”
“둘이 부부야?”
“……!”
라카인의 목덜미가 금세 시뻘개졌다.
그가 허둥지둥 입을 떼려는 사이 투이나가 능청맞게 라카인의 옆구리를 감쌌다.
“그럼요!”
“아이구, 역시. 잘 어울리네.”
“신랑이 너무 부끄러움을 타네.”
“어머, 저도 지금 엄청 용기 내는 중인데 모르셨어요?”
“말은!”
까르륵 웃는 소리에 라카인이 어쩔 줄 모르고 손만 쥐었다 폈다.
그렇다. 사실 그는 아직 투이나에게 청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수도를 떠나기 전에 구혼자 내기를 끝내야 했으니 신전은 라카인과 투이나가 결혼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라카인은 투이나가 자신을 사랑해준다는 걸 알면서도 확실하게 결혼이라 명명한 걸 보고 가슴이 너무 뛰고 말았다.
정말로 투이나와 결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어찌나 벅차던지.
그저 너무 좋아서 현실을 실감하기에도 바빴다.
그리고 라카인이 투이나에게 정식으로 청혼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쯤에는 이미 수도를 나와 여행하는 중이었다.
어물어물 때를 놓쳐버린 것도 모자라 투이나는 이미 두 사람이 결혼한 것처럼 굴었다.
가끔 듣는 저런 짓궂은 농담에도 매번 부부 사이라 인정하며 넘어갔던 것이다.
그 때마다 라카인은 사람이 엄청나게 좋으면서도 동시에 엄청나게 초조해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투이나가 자신을 남편이라고 부른다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다.
하지만 루가 님에겐 제대로 된 청혼과 결혼식이 필요할 텐데.
이제 더 이상 투이나를 루가라고 부를 필요가 없는데도 라카인은 이성적인 사고가 마비될 때마다 그 이름이 튀어나왔다.
루가 님의 결혼을 이렇게 치를 수는 없다.
라카인은 그 생각에 하루하루 모래성을 쌓다가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제대로 하려면 일단 청혼부터 시작이다.
그러나 투이나에게 걸맞는 청혼 법을 떠올리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고백은 대체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얼마나 절실했는지 그저 진심을 모조리 쏟아 부었다는 사실 밖에는.
그 때를 후회하진 않지만 적어도 이번에는 잘 하고 싶었다.
어떤 것이 잘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녀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
라카인은 옆구리에 살짝 손만 얹어둔 투이나를 바라보다가 가만히 그녀를 한 쪽 팔로 감싸 안았다.
“!”
금세 투이나가 움찔 하더니 발그레하게 뺨을 물들였다.
그리고는 살금살금 그의 손등으로 내려와 깍지를 꼈다.
라카인의 표정이 천천히 부드러워졌다.
‘좋아하시는 거겠지.’
나를.
차마 염치가 없어 생각으로도 뒤에 붙이지 못한 단어에 라카인의 심장이 뛰었다.
이러고 있으면 금세 청혼이나 결혼식 같은 일들을 잊어버려서 큰일인데.
그래도 라카인은 투이나를 끌어안은 손을 놓지 않았다.
놓을 바엔 차라리 잊어버리는 편이 훨씬 나았으니까.
* * *
아무렴 그래도 청혼은 해야지!
라카인은 투이나가 잠깐 떨어진 틈에 다시 이성을 되찾았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마을은 한창 시장이 열려 북적거렸다.
이번에는 꽤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렀던 터라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훤했다.
라카인은 마음을 다잡고 화려하게 늘어선 좌판을 둘러보았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투이나에게 어울리는 보석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심산이었다.
물론 저기 앞서가는 투이나를 시선에서 놓치지도 않았다.
겨우 몇 발짝 차이였지만 물건을 구경하다가도 라카인이 자꾸만 투이나를 찾아 고개를 휙휙 드는 걸 보고 상인들이 짓궂게 웃으며 속닥거릴 정도였다.
게다가 이제는 저 고지식한 청년이 투이나가 한 번 눈여겨봤다거나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하면 쉽게 넘어온다는 사실을 간파한 상인들이 라카인을 훨씬 오래 잡아두었다.
“저렇게 예쁜 처자한테는 사파이어가 어울린다니까.”
“아유, 길고 고운 머리가 아깝지도 않아? 빗으로 꽂아 올리면 본인도 편하고 얼마나 근사한데?”
“…….”
라카인은 진지한 눈으로 그들의 조언을 고려했다.
‘샨의 하인 노릇을 할 때 보석에 관심을 좀 가져둘 걸 그랬나.’
그의 눈에는 다 거기서 거기였다.
그렇다고 무작정 큰 게 좋은 거라고 큰 걸 갖다 바칠 수도 없으니.
고민하던 그의 팔꿈치를 누군가 툭툭 쳤다.
“아니, 부인 아끼는 것도 좋은데 자식은 잘 챙기고 다녀야지. 아까 혼자 돌아다니는 거 못 봤어?”
“……예?”
라카인이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식이라뇨.”
“아들 하나 있지 않았어?”
오히려 물어본 상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둘이 부부라면서.”
“……저흰 자식이 없습니다.”
“그래? 허, 이상하다.”
상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근방에 당신들 부부처럼 이쁘장한 가족이 없을 건데? 그 처음 보는 꼬마도 딱 두 사람이랑 비슷하게 잘생겼었거든.”
쿵. 라카인의 심장이 불길하게 뛰었다.
투이나는 언제나 사람이 많은 곳이 좋았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라카인이 관심을 보일 만한 걸 찾는 것도 재밌었다.
‘라카인의 발이 얼마나 컸었지?’
유심히 신발을 보고 있던 투이나가 라카인에게 직접 물어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아까 라카인이 있던 자리가 비어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투이나가 그를 찾아보려는 찰나, 사람들 틈에서 튀어나온 라카인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투이나를 붙들었다.
“루가 님!”
“라카인!”
깜짝 놀란 투이나가 급하게 입을 가렸다.
다행히 주변이 시끄러워서 다른 사람은 루가라는 소리를 못 들은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왜 그래요?”
“혹시 누군가 보셨습니까?”
“누구를요?”
어안이 벙벙해진 투이나가 되물었다. 라카인이 이렇게까지 놀란 건 정말 오랜만에 보았다.
라카인은 다급하게 뛰어온 것치고는 몹시 더디게 말을 이었다.
“어린… 아이 하나가…….”
“아이요?”
투이나는 그가 진정할 수 있도록 팔을 잡아주었다.
그녀의 온기에 라카인은 잠깐 입술을 벌렸다가 복잡한 표정으로 다시 다물었다.
“누가 아이를 잃어버렸대요?”
“그건… 아닙니다. …잊어주십시오.”
라카인은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그는 식은땀을 흘린 흔적이 역력했다.
그가 말하기 꺼려 보여 투이나는 더 묻지 않았지만 의구심을 품었다.
‘왜 아이 하나에 저렇게 놀란 걸까?’
무슨 사고를 보았다기엔 곧장 자신에게 달려온 게 이상했다.
라카인은 투이나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
“신발을 사려고 하셨습니까?”
“네에. 라카인 걸로.”
“제 건 아직 괜찮습니다. 루… 당신 걸 사도록 하죠.”
라카인은 매대에서 다른 신발을 집어 들었다.
그냥 아무거나 집어든 수준이었다.
‘라카인은 자기가 뭘 집은 건지 알까?’
그의 손에 신발이 들어가니 가죽신이 아이 장난감처럼 보였다.
“이걸로 주십시오.”
“그건 애들 신발인데.”
당혹한 라카인이 서둘러 신발을 내려놓았다.
그 꼴이 우스운지 상인이 실실거렸다.
“아이고 애인 주기엔 너무 작아서 어쩌나. 아니면 앞으로 태어날 아기 신발이라도 미리 사두려고?”
“……아닙니다.”
라카인은 아까부터 훨씬 더 낭패한 표정으로 쩔쩔맸다.
“농담은 그만하시구 이 사람 신을 만한 신발 좀 보여주세요.”
“예에, 알겠습니다.”
투이나가 라카인의 신을 골라주며 내내 그의 기색을 확인했다.
평소 같았으면 사양하느라 바빴을 라카인은 딴 생각에 정신이 팔려 투이나가 집어주는 대로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곰곰이 라카인의 반응을 짚어보던 투이나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혹시?’
무언가 감이 잡혔다.
* * *
시장에서 돌아오면서 라카인은 내내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내 착각일 것이다.’
투이나와 함께 산책이라는 명분으로 그 일대를 모두 찾아보았다.
그러나 상인이 보았다던 소년은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
이 근방에선 보지 못했다던 검은 머리에 얼굴이 아름다운 소년.
고작 그 정도 묘사에도 라카인은 한 사람을 떠올리고 말았다.
‘아르힘.’
심장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라카인은 몇 번이고 투이나와 아르힘과 있었던 일을 복기했다.
그 때 분명 아르힘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았나.
라카인은 샨을 따라다니며 수호신이 죽는 광경을 많이 보았다.
수호신은 자신이 나타날 상징을 잃거나 신도들 앞에서 확실하게 다른 수호신에게 굴복 선언을 하면 사라졌다.
흰 사슴을 모두 잡았을 때도 그러했고, 성물은 남았지만 아르뭄이 패배하여 항복 선언을 했을 때도 선언이 끝나자마자 그들의 신도들이 힘을 잃었었다.
아르힘도 신전에 있던 성소가 완전히 사라졌기에 전자에 해당한다고 여겼다.
투이나도 그때 일을 아르힘이 사라지고 그의 힘이 나뉘었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제가 수호신이 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사람들의 영혼 덕분이었으니까요. 그때, 제 힘과 섞인 게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일부러 아르루가라는 새로운 수호신의 이름까지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저 자신이 믿는 신이 이름만 바뀌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처럼 정말로 아르힘이 살아있다면?
라카인은 생각만으로도 속이 역류하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만큼은 아르힘의 존재를 절대로 알리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그녀가 알면 충격을 받거나 괴로워할 거라는 이유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훨씬 개인적이고 진득한 것에 덜미를 잡힌 듯해…….
‘과민 반응이다.’
라카인은 뻗어나가려는 생각을 차단했다.
겨우 상인이 지나가듯이 한 말이다.
정말로 길 잃은 소년이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일.
라카인은 그보다 투이나를 걱정시켰을까 봐 더 신경 쓰였다.
다행히 투이나는 별 의심을 갖지 않은 듯했다.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누웠을 때도 평소와 같았다.
그러나 라카인은 잠들지 못했다.
저 바깥에 있을지 모르는 아르힘의 존재가 몇 시간의 자유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르힘은 꿈으로 찾아오기에.
라카인은 잠을 자는 대신 잠든 투이나를 지켜보았다. 그게 오히려 자는 것보다 더 나은 휴식이었다.
평생을 이대로 있어야 한대도 기꺼이 수락할 텐데.
라카인은 꼼짝도 않고 밤을 새웠다. 이것으로 찾아온 불안을 해결할 수 있길 바라면서.
그러나 그가 지불해야 할 불안은 하루치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음 날 여관으로 내려가자마자 여관 주인이 손짓했다.
“어, 마침 잘 왔네. 이리 와보게. 웬 꼬마 하나가 자네들을 찾네?”
“……누구 말씀이십니까?”
“응?”
여관 주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라카인은 진흙을 삼키는 것처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하네? 방금 전까지 있었는데.”
여관 주인이 머리를 긁적였다.
라카인은 하루를 건너뛰었던 밤의 피로가 한꺼번에 닥쳐오는 걸 느꼈다.
“혹시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십니까.”
“무진장 이쁘장하게 생긴 꼬마였는데, 까만 머리에다가. 남자애였어. 혹시 자네들 사촌 아니야?”
“…아닙니다.”
라카인은 마른세수를 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내고 물었다.
“혹시 이름을 들으셨습니까?”
“뭐랬더라. 되게 짧았는데… 힘이라던가?”
라카인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계단을 도로 올라갔다.
* * *
“떠나야 합니다.”
“네?”
투이나는 어제랑 비슷한 몰골로 나타난 라카인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이곳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습니다.”
라카인은 반복적으로 말했다.
문가에 서 있는 그가 어찌나 꼿꼿하게 굳어있던지 칼로 밀어도 쓰러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영문을 모르고 바라보던 투이나는 일단 창백한 그의 안색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요, 우선 떠나요.”
“감사합니다.”
라카인이 서둘러 짐을 싸기 시작했다. 투이나는 걱정스레 그를 좇았다.
전쟁터에서 익힌 솜씨로 순식간에 모든 물건을 집어넣은 라카인은 가장 마지막으로 투이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라카인이 저한테 실례까지야… 와앗!”
투이나가 반쯤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라카인이 그녀를 한 팔로 안아 올렸다.
‘진짜로 실례였잖아!’
당황한 투이나가 얼른 그의 목에 매달렸다.
라카인은 그녀가 안전하게 매달렸는지만 확인하고는 짐까지 끌고 내려갔다.
“라카인! 왜 그래요? 정말 이러고 가려고요?”
“죄송합니다.”
라카인은 빨리 여기서 나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갑자기 사라진 라카인에 의아해하던 여관 주인도 갑자기 도망치듯 내려온 두 사람을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 자네들?”
“이만 떠나겠습니다.”
라카인이 곡예를 부리는 솜씨로 투이나와 짐을 든 채 지갑을 꺼냈다. 평소와 달리 그가 계산도 않고 돈을 급하게 쏟아놓았다.
“지금 당장 마구를 부탁드립니다.”
“아니, 이렇게 갑자기 떠난다니….”
여관 주인이 설명을 좀 해보라는 듯 투이나를 힐긋거렸지만 그녀도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라카인은 한층 더 초조해지는지 옷깃을 당겨 시선으로부터 투이나를 숨겼다.
투이나가 의아하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라카인은 말 위에 두 사람이 올라타기 전까지는 조금도 안심하지 못했다.
오히려 말에 올라탄 뒤에 더 조급하게 재촉해댔다.
간신히 안장 앞에 걸터앉은 투이나가 고삐를 잡으려고 했지만 라카인은 잠시라도 그녀를 떨어트릴 수 없다는 듯이 더더욱 끌어안기만 했다.
“어디로 갈 생각이에요!”
“아르힘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라카인이 턱을 질끈 물며 말했다. 이미 말에는 박차가 가해졌다.
원래 달리는 안장 위에선 말하는 게 아니지만, 라카인은 도망치는 한편으로도 투이나에게 계속 설명하려고 애썼다.
“아르힘 바깥으로 나가도 확실하게 안전해질지는 모르겠지만, 피하셔야 합니다.”
“누굴 피하려는 건데요?”
순간 라카인이 낯선 공포와 슬픔이 뒤섞인 표정을 지어서 투이나는 사뭇 놀라고 말았다.
아르파의 밑에서 두려워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당신을 뒤쫓는 과거가 있습니다.”
“…….”
투이나는 한꺼번에 모든 일이 뒤섞여 떠올랐고, 그 중 어느 것을 라카인이 이토록 피하려는지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대강 이해하고는 그의 상체에 몸을 딱 붙였다.
“침착하게 가요.”
줄곧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라카인의 복근이 그제야 조금 이완되었다.
달려 나가는 말을 따라 겨울바람이 어찌나 매섭게 몰아치던지 투이나는 그의 체취가 풍기는 품으로 계속 파고들었다.
자신의 체온이 조금 더 높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아무리 다가가고 다가가도 라카인의 피부는 자꾸만 차가워졌다.
금방이라도 비명을 지르려는 사람처럼.
말을 달리며 라카인은 투이나의 얼굴을 자꾸만 가렸다.
침대에 누워있을 때 감기를 피하게 해주려고 하던 일과는 달랐다.
그는 달리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고, 잠깐이라도 투이나의 얼굴을 누군가 볼까 두려웠다.
정확히는 그 소년에게 들킬까 두려웠다.
‘아르힘이 아니어야 한다.’
그러나 라카인은 앙상하게 가지가 마른 나무들의 그림자마다 언뜻언뜻 소년의 그림자를 보았다.
두려움이 극심하면 자신까지 속일 수 있는 것일까.
그 작고 까만 소년이 소리 없이 두 사람을 쫓아오는 듯했다.
사람이라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는 과거에 신이었다.
지금도 신일줄 누가 알겠는가.
라카인은 해가 저물어도 말을 멈추지 못했고, 나무뿌리가 얽힌 길에 접어들고 나서야 낙상의 위험 때문에 간신히 말을 멈췄다.
라카인은 가쁘게 북받쳤던 호흡을 한꺼번에 내쉬었다.
그제야 한 몸처럼 붙어있던 투이나가 스르륵 몸을 빼냈다.
“여기서 내려요.”
투이나가 먼저 등자를 밟고 내려갔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에 실어놓은 짐을 내려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라카인은 그것이 무엇보다도 큰 질책처럼 느껴져서 가슴이 죄어들었다.
잠깐 볼일을 보고 식사를 하는 것 말고는 온종일 쉬지 않고 달렸다.
얼마나 큰 무리가 갔을지.
죄책감이 둔탁하게 튀어 올랐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럼요. 이리 와요.”
투이나가 손짓했다.
이미 불이 붙은 모닥불이 탁탁거리며 따듯한 빛을 흘려보냈다.
단지 그녀가 옆에 앉은 것뿐인데 순식간에 안전하다는 느낌이 배어나오는 게 신기했다.
라카인은 불빛에 홀린 듯이 다가갔다.
투이나는 그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팔을 붙들었다.
그리고는 세게 꾹 눌렀다.
“윽….”
예상치 못했던 기습에 라카인이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이거 봐요.”
투이나가 미간을 좁혔다.
“근육이 다 섰잖아요. 라카인이야말로 괜찮은 거예요?”
원체 고통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 이럴 정도면 심하게 무리한 게 틀림없었다.
라카인은 투이나가 팔을 주무르는 걸 놔두더니 그대로 몸을 숙였다.
움찔.
팔을 움켜쥔 손가락이 갑작스레 멈추더니 가늘게 떨렸다.
드물게 라카인이 먼저 입을 맞춰올 때마다 투이나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리곤 했다.
너무도 절실해서 다른 건 생각하지도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이번에는 유독 길었다.
‘뭐가 그렇게 불안해요?’
투이나는 움찔움찔 떨리는 손끝으로 라카인의 팔뚝을 붙들었다.
그녀가 점점 뒤로 넘어가는 걸 깨달은 라카인이 등을 받쳤다.
그러고도 부족해서 새어 나오는 숨까지 보낼 수 없다는 듯이 끈질기게 따라갔다.
‘뭐가 당신을 그렇게 두렵게 해요?’
“…….”
라카인이 마침내 떨어졌다. 그래도 여전히 숨결이 닿는 거리였다.
투이나는 그의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를 가볍게 쓸고 지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간지러운 감촉과는 달리 라카인의 표정은 무거웠다.
애틋하게 허리와 옆구리까지 감겨오던 그의 손은 완전히 끌어안기 직전에 갑자기 떨어졌다.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라카인이 고개를 숙였다. 허망한 아쉬움이 퍼져나갔다.
조금만 더.
보채면.
투이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뺨에 열이 올랐다.
‘여기서 멈추는 게 맞아.’
아직 야영할 준비도 다 끝내지 못했다.
이대로 욕심껏 시간을 보냈다가 얼어 죽으면 얼마나 바보 같겠는가.
하지만 기억은 메아리 같아서.
한 번 기억을 던지면 몇 번이고 수십 번이고 되돌아와 다시 보여주곤 했다.
투이나는 손등으로 얼굴을 꾹꾹 눌렀다.
그러지 않으면 라카인이 이끌어낸 애정에 한참 잠겨 도로 나올 때까지 허우적거렸을 테니까.
갈수록 감정을 조절하는 게 더 어려워졌다.
‘하아. 왜 볼 때마다 더 떨리는 거야.’
라카인이 끓여준 죽을 떠먹으며 투이나는 계속 마음을 가라앉혔다.
루가로 있을 때는 그나마 책임감이 차분함을 유지시켜 주었다.
겹겹이 둘러싼 사람들을 볼 때마다 침착하지 않으면 그들까지 다친다는 사실을 떠올렸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오로지 라카인 뿐이다.
누가 그녀를 말릴 수 있겠는가.
‘게다가 오히려… 내 쪽에서 말려야 되는 건데.’
투이나의 얼굴이 다시 뜨거워졌다.
라카인이 최대한 섬세하려고 애썼지만 워낙 체격 차이가 나다 보니 종종 불의의 사고를 겪었던 것이다.
그때마다 라카인은 죽을죄라도 지은 것처럼 허둥거리며 물러났지만, 오히려 투이나는 그 정도는 괜찮다고 여겼다. 참아볼 만 했는데.
‘…미쳤나 봐.’
투이나가 그릇의 바닥을 올려 얼굴을 가렸다.
라카인이 옆에 있으면 자꾸 애정이 폭주해버렸다.
‘그치만.’
하다못해 팔베개마저 위험하다고 못 하게 하니까 오히려 더 해주고 싶단 말이야.
투이나가 라카인을 흘긋거렸다.
라카인은 아직 정신이 다 돌아오지 않았는지 멍해 보였다.
마을을 빠져나오면 무슨 일인지 정확하게 얘기해줄 줄 알았지만.
라카인의 시선은 끊임없이 주위를 배회했다.
‘아무래도 오늘 듣는 건 힘들어 보이지.’
달그락. 그래도 라카인은 투이나가 그릇을 정리하자 또 금세 고개를 돌리긴 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아녜요, 이것까진.”
“멀리 가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라카인이 갑자기 일어서며 조급하게 말했다. 뜻밖의 격렬한 반응이라 투이나도 조금 놀랐다.
“여기 계셔주십시오.”
“알… 겠어요.”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잠자리를 준비한 라카인은 드물게도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던 것이다.
당연히 투이나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요란하게 뛰었다.
그동안 그의 팔을 베고 자는 것도 충분히 가깝다고 여겼는데, 안기는 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잠깐 닿았다가 떨어지는 포옹과 달리 이 자세 그대로 유지된다는 생각에 신경이 곤두섰다.
그녀의 속도 모르고 라카인이 낮게 중얼거렸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라, 카인도요.”
‘못 자겠어!’
투이나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라카인은 한쪽 팔은 몸 아래로, 한쪽 팔은 몸 위로 느슨하게 걸쳤는데, 긴장한 투이나가 어깨를 움츠리자 천천히 쓸어주기까지 했다.
누가 봐도 껴안고 재워주는 모양새라.
투이나는 몸 전체가 그에게 올라가있다는 사실을 최대한 빨리 잊으려고 애썼다.
안 그러면 밤을 새우게 생겼으니까.
불을 보고 있으면 졸리다는 속설이 떠올라 투이나는 차올랐다 이지러지는 불꽃을 응시했다.
다행히 불이 타오르는 모양대로 열기가 닿았다가 차가워지는 과정이 쉽게 그녀를 졸음으로 몰아갔다.
‘라카인이 뒤에 있으면 추울 텐데.’
투이나는 라카인이 더 가까이 오도록 손을 뻗었다.
역시 깨어있었는지 라카인은 그녀의 손을 단단히 잡아 다시 품으로 끌어넣었다.
꼭 굴속에 들어간 듯 편안해져서 투이나가 결국 잠들었다.
라카인은 투이나의 숨소리가 색색거리며 작아지기를 기다렸다.
밤이 되어 예민해진 감각은 주변의 풍광을 그대로 흡수했다.
몸을 덮은 가죽과 담요가 뒤엉켜서 풍기는 냄새와, 고요할 때만 들려오는 활갯짓이 간간히 버석거리는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달빛조차도 나무껍질에 드리우자 유난히 희게 도드라져 보였다.
불온함을 품은 백색 광선이 주변을 지나치게 밝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경계는 더욱 어두워 보였다.
라카인은 가장 어두운 한 점을 응시했다.
그곳엔 온통 공허와 정적뿐이었다. 그러나 라카인은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윽고 바스락거리며 낙엽이 밟히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라카인은 천천히 몸을 긴장시켰다.
마침내 어둠 속에서 한 소년이 걸어 나왔다.
라카인은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인간이 된 아르힘을 노려보았다.
죽은 영혼들로 육체를 빚어냈을 때보다 소년은 훨씬 생명력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지닌 과거가 더해지자 가히 마력에 가까울 정도로 요사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라카인은 아르힘의 시선이 투이나에게 닿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그에게서 투이나를 숨기듯 손을 덮었다.
“왜 나타난 거냐.”
“…….”
아르힘은 라카인의 말에도 잠들어있는 투이나의 머리꼭지를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다.
혹시 투이나의 꿈에 들어가려는 게 아닌가 싶어 라카인이 반쯤 상체를 일으켰을 때쯤 아르힘이 말했다.
“내가 어떻게 살아있는지는 묻고 싶지 않나?”
“…루가 님을 이용했겠지.”
“하핫.”
아르힘이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도 그녀를 루가라 부르나?”
갑자기 라카인은 뺨을 후려 맞은 것처럼 크나큰 모욕감을 느꼈다.
고작 한 문장으로 그는 투이나의 연인에서 다시 호위로 굴러떨어진 기분이었다.
예전에는 호위라도 감사하기 그지없었으나, 이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투이나와 연인이 되는 기쁨을 알아버렸는데 어떻게….
“돌아가라. 그녀는 너를 잊었다.”
“글쎄.”
아르힘은 훨씬 느긋해진 태도로 바스락 한 발 더 다가왔다.
그 즉시 라카인의 등골이 쭈뼛 서며 눈빛이 달라졌다.
사나운 들짐승 같은 꼬락서니를 본 아르힘이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내 아이가 나를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내게 속해있지.”
라카인은 즉각 치밀어 오르는 폭력적인 충동에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심지어 저렇게 어린애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도.
라카인은 이를 악물었다.
“…당신 따위는 그녀가 되돌린 수많은 영혼 중 하나일 뿐이다.”
비로소 유유자적하던 아르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지금은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겠지.”
소년의 손이 빠득거리며 나무껍질을 부러트렸다.
라카인이었다면 손톱 하나만으로도 가능했을 일이다.
그제야 아르힘의 몸이 얼마나 작고 약한지 보였다.
그가 가진 위압감에 눌려 보이지 않았을 뿐, 인간은 원래 그랬다.
아르힘은 힘을 잃었다.
정확히는 인간이 된 몸에 아주 조금만 남아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수호신의 힘은 뿔뿔이 흩어진 영혼에 조금씩 담겨있었다.
그 힘을 이어받은 사람들과 영혼이 아르힘에 머물고 있었기에 수호신의 힘이 유지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아르루가였다. …그래서.’
라카인은 다시금 투이나에게 감탄해 저도 모르게 경계를 조금 늦췄고, 아르힘은 그걸 곧장 알아차렸다.
“내가 너희를 영영 쫓지 못할 거라 생각하나?”
“…당신의 추격은 마법사 시드룬 덕분에 가능했겠지.”
갑자기 모든 상황이 이해되었다.
“그가 빨리 회복하지 못했던 것도 단순히 강한 마법을 썼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심장의 일부를 떼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정곡을 찔린 아르힘이 새파란 안광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실체를 파악하자 조금씩 그가 발휘하는 힘이 보였다.
아르힘에게 남은 힘은 이토록 극심한 추위 속에서 소년 하나가 떨지 않도록 만드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도 아르힘은 투이나를 쫓아왔다.
라카인은 거기서 막막함을 느꼈다. 하지만 아르힘은 그가 절망하기를 바랐다.
“네가 언제까지 그녀를 독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아르힘이 쉭 하고 낮은 소리로 내뱉었다.
“시간은 흐른다. 인간의 몸이 되었으니 나는 자랄 것이고 너는 늙고 병들어가겠지. 그때가 되어도 나를 막을 수 있을 거 같으냐?”
“나는 언제나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래도 결국 그녀의 영혼은 내 차지가 될 거다.”
아르힘이 사납게 내뱉었다.
“그 독실한 아이가 나의 죽음을 허락할 리 없는 것만 봐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건 분명해.”
라카인은 그런 확신에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아르힘이 이렇게까지 투이나를 믿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할 뿐이었다.
“왜 하필 그녀여야만 했나.”
“네게도 같은 질문을 돌려주지.”
아름다운 소년은 오만하게 그를 굽어보았다.
“왜 넌 투이나여야만 했던 거냐.”
* * *
라카인은 오랫동안 그 질문의 답을 떠올리지 못했다.
밤중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아르힘은 나타난 것처럼 다시 사라졌다.
그러나 라카인도 아르힘도 소년이 다시 오리라는 걸 알았다.
천천히 내리는 눈송이가 모닥불에 닿을 때마다 타는 소리가 나더니 곧 눈발이 거세졌다.
라카인은 털가죽 위로 수북하게 눈이 쌓이는 걸 보며 아침을 맞았다.
투명하게 반사되는 빛이 마치 어제 아르힘이 나타났던 달과 비슷했다.
그것이 불쾌해 라카인은 계속 눈을 털어냈다.
그러다 잠든 투이나에게 눈이 튈까 봐 결국 그는 깊이 잠들어있는 투이나를 안쪽에 눕혀두고 빠져나왔다.
라카인은 천천히 거의 다 꺼진 모닥불의 불씨를 되살리고 물을 뜨러 갔다.
어제 아르힘을 보았기에 이제 그가 투이나를 혼자서 데려가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만약 아르힘이 시드룬의 심장으로 마법진을 열어도 소년의 몸으로는 투이나를 마법진 너머로 옮길 수조차 없으니까.
퍽.
칼집 끝으로 얼음을 깬 라카인이 잠시 개울 끝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이 왜 슬픈 일인가.’
밤이 만들어낸 마력의 시간이 지나고 하늘이 밝아지자 라카인은 보다 차분하게 상황을 돌아볼 수 있었다.
아르힘이 왜 그토록 바라는 투이나가 아니라 라카인에게 먼저 접촉했는지 말이다.
자신이 포기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라카인은 얼음을 깨느라 일었던 흙탕물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통에 물을 담았다.
‘동정심으로 내어줄 생각은 없다.’
아르힘도 고작 연민 따위로 라카인이 포기할 거란 생각은 안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정신을 조종해온 아르힘은 라카인의 약점을 금세 파고들었다.
죄책감.
왜 투이나를 사랑했어야 했냐는 질문은 그래서 의미가 없었다.
아무리 오래 생각해보아도 이유를 떠올릴 수가 없었으니까.
당연히, 그녀였다.
그냥 그러지 않을 거란 가정 자체가 상상이 불가능했다.
투이나를 사랑하지 않는 삶을 상상하려면 그녀를 평생 만나지 않는 삶에서만 가능했다.
라카인은 수통의 뚜껑을 닫았다.
그러니 아르힘이 남긴 질문은 깨끗하게 퍼 올린 답과 달리 가는 모래처럼 혼탁한 의문을 남겼다.
그러면 왜 투이나는 너를 선택했지?
“…….”
라카인은 이미 가득 찬 수통을 내려놓고 짧게 세수를 했다.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물이 두개골을 꽉 조였다.
사랑을 의심하지 말지어니.
그러나 투이나를 믿기에 절대로 던질 수 없는 갈고리는 자신의 내부에 툭툭 걸렸다.
‘나는 당신에게 대체 무엇을 줄 수 있지.’
투박하고 텅 빈 커다란 손바닥이 물끄러미 라카인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몸에서도 이미 씻은 듯이 얼룩이 사라졌지만 그는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있던 자국을 기억할 수 있었다.
‘나를 어떻게 믿었습니까?’
모습을 감춘 죽은 영혼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는 들을 수 없었으니까.
그때 청아한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투이나는 누구나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갑작스레 들려온 말에 라카인이 젖은 얼굴로 일어났다.
그러나 아르힘은 어느 곳에 숨어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메아리처럼 목소리가 웅웅거렸다.
“그 아이는 네가 아니어도 돼.”
라카인은 더 이상 아르힘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무엇을 노리는지 알았으니 구태여 반응해 줄 필요는 없었다.
수통을 집어든 라카인은 다시 투이나에게로 돌아갔다.
그때까지 아르힘은 끈질기게 악담을 속삭이다가 투이나가 보일 쯤에야 사라졌다.
돌아가자 불 냄새를 맡고 온 사슴 하나가 투이나의 머리맡에서 맴돌고 있었다.
투이나는 여전히 자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하필이면.’
라카인은 거북하게 차오르는 불편함에 짐승을 바로 쫓지 못했다.
샨의 군대와 함께 잡아 죽인 흰 사슴이 산을 이룰 정도로 많았다.
그때 자신은 하나의 수호신을 없애기 위해서 고민도 없이 명령을 수행했었다.
그러니 지금 느껴지는 죄의식은 더 이상 남에게 의탁하지 않는 대가일 것이다.
사랑할 거라면 언제나 죄도 함께 감당해야 한다.
라카인은 천천히 짐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사슴은 귀를 쫑긋 세우긴 했으나 별로 경계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곳은 인적이 드문 탓에 사냥꾼이나 사람을 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라카인은 천천히 꾸러미에서 소금 한 뭉치를 꺼냈다.
겨울이라 찬 습기 때문에 서로 단단하게 달라붙어 있었지만, 그는 그걸 작게 쪼갰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손바닥에 올려놓고 기다렸다.
겨울이 되면 짐승들은 항상 소금기를 얻기 어려워졌다.
이번에는 사냥을 위한 미끼가 아니다.
소금을 내민 채 라카인은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는 걸 잘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자 비로소 호기심을 느꼈는지 사슴이 이쪽으로 천천히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의 손바닥에서 소금을 핥아먹었다.
생명이 영혼을 찾아가듯이.
미약한 온기가 차올랐다.
저도 모르게 라카인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도 조금은 투이나를 닮아가나 보다.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라카인이 투이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계속 지켜보고 있던 투이나의 말똥말똥한 두 눈과 마주쳤다.
“……!”
화들짝 놀란 라카인이 몸을 들썩이자 덩달아 사슴까지 놀라 겅중거리며 도망갔다.
파사삭.
수풀 너머로 도망간 사슴은 금세 사라졌지만, 라카인은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가 어색하게 손에 남아있던 소금을 떨어트렸다.
“깨어나셨습니까.”
“좋은 아침이에요.”
투이나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기에 라카인은 더더욱 부끄러워지는 것 같았다.
잘못한 일을 들킨 것도 아닌데.
라카인은 불그스름하게 물든 광대뼈 부근을 매만지다가 기왕 이렇게 된 거 조금만 더 뻔뻔해지기로 했다.
이렇게 밝고 깨끗한 아침인데도 라카인은 스스럼없이 투이나의 입으로 자신을 가져갔다.
“으음….”
투이나는 기꺼이 화답했다. 라카인은 더없이 행복했다.
결국 그날 아침은 점심이 다 되어서야 먹을 수 있었다.
“…근처에 있는 개울을 보니 조금 더 올라가면 작은 호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밤은 거기서 몸을 씻고 떠나면 될 것 같습니다.”
“좋아요.”
투이나가 선뜻 대답했다. 그리고는 아까 사슴에게 소금을 주는 라카인을 보았을 때처럼 장난스럽게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무언가 더 말할 게 있지 않냐는 뜻 같아서 라카인이 식사를 하다 말고 허둥거렸다.
“더 궁금한 게 있으십니까?”
“누가 쫓아오는지 아직도 말하기 어려워요?”
“…….”
라카인이 곤란한 기색으로 입을 감쌌다.
아무리 투이나를 사랑하고 믿지만 아르힘의 존재는 별개였다.
게다가 아르힘은 자신만큼이나 투이나가 절실해보였다.
아르힘만큼은 투이나가 다시 돌아보지도 않았으면 싶었다.
이대로 그의 존재도 모른 채 지나가고 싶었다.
한 번 맛본 이 평화를 누구에게도 내주고 싶지 않다.
갑자기 라카인이 멍해졌다.
‘이건 질투였나.’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무언갈 소유해본 적이 없어서 독점욕이라는 것도 몰랐다.
이미 투이나의 애정을 독차지해놓고도 욕심이 나다니.
라카인이 창피함에 말을 잇지 못하자 투이나가 살짝 그릇을 내려놓았다.
“말 안 하려다가 저도 하나 말할 게 있어서요.”
“말씀해 주십시오.”
투이나가 무슨 말을 할 줄도 모르고 라카인이 얼른 집중했다.
투이나는 가만히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사실 라카인이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줄 알았어요.”
덜걱.
라카인이 통째로 손에 있던 걸 죄다 떨어트렸다. 누가 마비 독이라도 먹인 것 같았다.
‘아이? 누구와…? ……나와 당신?’
더듬더듬 떠오른 생각에 그때까지 하던 잡념이 몽땅 날아갔다.
넋을 잃은 라카인이 바닥을 구르는 걸 주울 생각도 못한 채 완전히 굳어버렸다.
투이나는 사정없이 놀라버리는 라카인이 왠지 웃기다고 생각했다.
“그냥 짐작이었어요. 저번 마을에서 오래 머물다가 갑자기 아이 얘기를 하길래요. 그치만 바로 떠나자고 해서 아닌 걸 알았죠.”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오해라 라카인은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충격으로 멈췄던 심장이 뒤늦게 밀린 일을 하느라 급하게 쿵쾅거렸다.
다급하게 머리로 쏘아올린 피가 사정없이 심장을 혹사시켰다.
“혹시…….”
“그렇게 놀라지 않아도 돼요. 아직 임신은 안 했으니까.”
투이나의 대답에 라카인은 더 미칠 것 같았다.
‘아직.’
라카인은 연달아 터져 나오는 감정에 손이 떨렸다.
발끝부터 머리까지 자신을 지배하는 이것을 도대체 무어라 불러야 하나.
투이나에게 자신은 이미.
사무친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 라카인이 입술 끝을 꾹 눌렀다.
방금 투이나가 자신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알까.
상관없다.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었군요.”
기가 막히게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저는 더 욕심내도 되는 거였습니다.”
“당연하죠. 저도 얼마나….”
장난스럽게 말하던 투이나의 눈이 금세 동그래졌다.
단순히 부끄럽기만 해서 라카인의 얼굴이 빨개진 게 아니었다.
“라, 라카인? 지금 울어요?”
“제가 말씀이십니까?”
라카인은 자기가 뭘 하고 있는 줄도 모르는지 축축한 눈가를 만져보았다.
그 바람에 가뜩이나 발갛게 부어올랐던 눈가가 한층 더 짙어졌다.
“…그렇군요.”
우와아.
투이나는 어쩐지 울고 있는 라카인의 모습을 보니 새삼스럽게 두근거렸다.
원래부터 청순했던 눈이 살짝 수척해진 뺨으로 한 줄기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 왜 자신까지 부끄러워지는지.
저도 모르게 솜털이 올올히 일어난 투이나가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살짝 라카인의 얼굴을 가려주었다.
“그… 기쁠 때 우는 건 괜찮아요. 라카인. 기뻐서 우는 거 맞죠?”
“예.”
“다행이다.”
투이나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직 아기가 생겼다는 것도 아니고 가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에 이 정도로 반응할 줄은 몰랐다.
진짜 아이를 가지면 대체 얼마나 울려나.
상상하니 머리가 조금 이상해질 것 같아서 투이나가 꾹꾹 미래의 일을 치워버렸다.
“자아, 진정해요.”
투이나가 라카인의 머리를 끌어안고 도닥여주었다.
“라카인이 그렇게 아이를 좋아할 줄은 몰랐어요.”
“아이 때문이 아닙니다.”
라카인은 투이나의 포옹이 기분 좋은지 그대로 이마를 눌렀다.
“당신이 나를 상대로 그런 상상을 했다는 게 미치도록 행복합니다.”
그가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렸다.
투이나는 괜스레 또 찌르르 올라오는 감정에 당황했다.
‘어떡해. 너무 사랑스러워.’
심장이 이렇게 뛰다간 도대체 남아나질 않을 것이다. 아예 두 개로 쪼개 져버리는 게 아닐까.
게다가 라카인은 자신이 지금 얼마나 유혹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가만히 턱을 댄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또 무슨 상상을 하셨습니까?”
이번에야말로 투이나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 * *
당신이 아니어도 사랑할 사람은 있겠지만.
당신이기에.
투이나와 라카인은 야영했던 자리를 정리하고 호수로 이동했다.
소금호수처럼 거대한 크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웅덩이라는 이름을 벗어날 만큼은 되었다.
“와, 깨끗하네요?”
“마셔도 될 것 같습니다.”
라카인이 호수 주변에 시든 풀을 걷어냈다.
잔잔하고 투명한 물은 그 밑에 무엇이 있는지 거리낌 없이 드러내었다.
자갈과 조개가 꼭 닮은 한 쌍처럼 뒤엉킨 걸 보고 소매를 걷은 투이나가 직접 만져서 굴려보았다.
차가웠지만 햇볕이 잘 드는 곳이라 기분 좋게 시원했다.
라카인은 또각또각 따라온 말에게 물을 먹이고 먹이를 다시 챙겨주었다.
이제 전처럼 급하게 달릴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끄떡없다는 것처럼 말의 귀가 기운차게 쫑긋거렸다.
문득 이대로 정착해서 살아도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배를 타고 바다로 향하고, 다른 나라까지 함께 떠나보았지만 언제나 어디라도 좋았다.
투이나가 있는 곳이라면 지금처럼 살 수 있었다.
아니, 이미 함께 살고 있지 않나.
라카인은 주변을 떠도는 아르힘이 감히 이곳을 범접하지 못하고 맴도는 걸 알아차렸다.
아직 그들이 가지 않은 곳에 남아있는 작은 발자국이나, 눈이 떨어진 잎사귀가 종종 눈에 띄었다.
라카인은 잠깐 고민하다가 말을 다시 나무에 묶었다.
“투이나.”
“네?”
“하룻밤만 더 이곳에 머물다 가도 되겠습니까.
“그래요~.”
투이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녀는 아직 해가 떠 있어서 공기가 따듯할 때 씻어야 한다고 라카인의 등을 떠밀기 바빴다.
미리 옷을 말릴 불을 피워두고는 두 사람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호수로 들어갔다.
“후아! 차가워라!”
“조심하십시오.”
금세 물을 타고 쑤욱 올라오는 천 자락에 투이나가 까르륵 웃었다.
라카인은 생각보다 금세 깊어지는 물에 걷는 걸 조심했다.
그래도 바닥은 온통 둥근 자갈과 조개뿐이라 크게 발에 찔리는 게 없었다.
조금만 따뜻했더라면 좋았겠지만 투이나와 라카인 둘 다 추위라면 이골이 난 상태였다.
진짜로 얼어붙은 호수에 갇혀본 적 있던 투이나와 눈 속에서 동사할 뻔했던 라카인은 끄떡없이 겨울 호수를 헤엄쳤다.
살아있는 동안은 가끔 이런 짓도 해볼 수가 있었다.
“아하하.”
투이나가 물이 찬 라카인의 옷을 꾹 눌렀다.
빵빵했던 상의가 금세 쪼그라들며 라카인의 몸에 달라붙었다.
“꼭 살 같네요.”
“…살을 더 찌울까요?”
“라카인이 그러고 싶으면요.”
투이나가 별생각 없이 웃었다.
“이러면 라카인이 훨씬 많아진 것 같아서 좋은걸요.”
라카인은 함뿍 벌린 팔로 안아주는 투이나를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있어도 모자람을 느끼는 건 이런 거구나.
가져도 가져도 조급하거나 속을 태워 기어코 자리를 만들어내는 갈구가 아니었다.
이미 가득 담겨있어서 충만하고, 그런데도 넉넉히 더 들어갈 자리가 생겨나는 모순이 바로 사랑이었다.
세계가 계속 넓어지듯이.
“투이나.”
라카인은 흐트러진 투이나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넘겨주었다.
젖은 머리 타래가 살짝 입술을 벌린 그녀의 턱을 타고 달라붙어 있었다.
라카인은 더 없는 확신을 담아 자신의 경계를 넓혔다.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그 순간 환하게 밝아지며 반짝이는 투이나의 눈이야말로 그가 내내 찾던 보석이나 다름없었다.
“네.”
투이나가 벅찬 숨을 삼켰다. 환희가 번져나갔다.
기쁨을 참지 못한 투이나가 와락 그를 끌어안았다.
첨벙. 뛰어드는 사랑이었다.
“좋아요!”
라카인은 가볍게 그녀를 안아 올렸다.
머리를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열렬하게 입 맞추는 그들을 축복하듯이 떨어졌다.
호수가 너무 차갑지만 않았더라면 한참을 그러고 있었을 것이다.
“하아….”
투이나가 참았던 숨을 터트리며 라카인의 어깨를 잡았다.
두 사람 다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아직도 한껏 상기된 얼굴로 투이나가 라카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라카인. 우리 이미 결혼한 거 아니었어요?”
“…예?”
라카인의 눈이 커졌다.
‘여관에서 한 소리가 농담이 아니라 정말 진심이셨나?’
그걸 깨닫자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바보같이.
투이나는 청혼받아서 기쁘지만 당연히 결혼도 자기 거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게 너무 좋았다.
“하, 하하!”
“왜 웃는 거예요?”
투이나가 일부러 골이 난 척 툴툴거리다 결국 자기도 빙그레 웃고 말았다.
아아. 이 사람을 어쩌면 좋나.
라카인은 담뿍 웃음기가 담긴 눈으로 투이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감기 걸리시겠습니다.”
“라카인도요.”
일단 한 번 추위를 느끼자 두 사람은 얼른 호수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재빨리 젖은 옷을 던져두고 불가에 놔둔 털신부터 신은 두 사람이 큼지막한 담요를 함께 둘러썼다.
금세 몸이 따듯하게 데워졌다.
투이나는 라카인의 팔뚝에 머리를 댄 채 꾸벅꾸벅 졸았다.
라카인도 느른하게 차오르는 열기에 마음이 풀어졌다.
천천히 투이나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던 라카인은 문득 손끝에 무언가 걸려서 잠깐 손을 빼냈다.
처음 보는 상아색 돌이 있었다.
평범한 돌이라기엔 유난히 매끄러운 감촉에 라카인은 살짝 그녀를 불렀다.
“투이나.”
“으음…… 네?”
반쯤 잠이 들어 있던 투이나가 곧장 깨어났다.
라카인은 그녀의 가물거리는 눈높이까지 손을 내려주었다.
“이것 좀 보십시오.”
“와아! 진주네요?”
투이나가 금세 신기한 표정이 되었다.
“예뻐라. 어디서 찾았어요?”
“머리카락에 걸려 있었습니다.”
라카인도 신기해졌는지 되물었다.
“이렇게 쪼글쪼글한 것도 진주입니까?”
진줏빛이긴 하였지만 원형보다는 타원에 가까운 모양에 울퉁불퉁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처음엔 영락없이 돌인 줄로만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라카인이 보아온 진주들은 모두 샨에게 진상된 최상품 보석뿐이었다.
이게 알이 크고 둥글고 광택이 매끄러우며 흠집이 없는 진주랑 똑같은 것이라니.
투이나는 우윳빛 광택이 도는 쪼글쪼글한 진주를 살짝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네, 그럼요. 담수 진주인 모양이에요. 여기 호숫가에 있던 조개 중에서 하나 빠져나왔나 봐요.”
제법 마음에 드는 지 투이나가 요리조리 진주를 굴려보았다.
라카인이 손바닥을 기울여 그녀에게 내밀었다.
“당신에게 가고 싶었나 봅니다.”
라카인이 선선히 미소 지었다. 투이나는 속으로 탄성을 삼켰다.
정말이지 라카인은 자신이 무슨 위력을 발휘하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물론 투이나가 유난히 그에게 약한 것도 있겠지만.
“간직해둬요.”
투이나가 슬쩍 그의 손을 잡았다.
“앞으로 또 기억하고 싶은 일이 생길 때마다 하나씩 진주를 찾으면 좋을 거 같아요. 많이 모이면 그때 전부 꿰어서 나눠 가져요.”
“팔찌처럼 말씀이십니까?”
“네. 라카인의 손목을 다 두르려면 한참은 걸리겠죠?”
그때까지 우린 계속 기쁜 일을 함께 겪어야 한다고 당당히 요구하는 투이나가 눈이 부셨다.
라카인은 기꺼이 응했다.
“좋습니다.”
* * *
낮에 물장난을 친 덕분에 투이나는 금세 잘 준비를 했다.
라카인도 드물게 졸음이 몰려왔지만, 아직 한 가지 남은 일이 있었다.
투이나의 잠자리를 봐준 라카인이 고민하다 검을 집어 들었다.
가지고 가지 않는 편이 낫겠지만, 만약을 위해서였다.
라카인이 하는 일이라면 별 의심을 하지 않던 투이나가 무기를 보고서야 비로소 걱정을 내비쳤다.
“라카인?”
“주변을 한 번만 돌아보고 오겠습니다.”
“조심해요.”
“예.”
라카인은 우거진 나무를 헤쳤다.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투이나가 그들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거리가 되자마자 아르힘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르힘은 몰래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는지 시퍼렇게 타오르는 증오를 품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라카인은 천천히 들고 있던 칼집을 내렸다.
아르힘이 잇새로 내뱉었다.
“답을 가져왔느냐?”
“…아니오.”
라카인은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당신의 시험을 치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왜 나왔지?”
“당신에게 할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라카인의 말투는 다시 평소대로 돌아와 있었다.
자신을 낮춰보거나 자격을 의심당할까 봐 상대를 끌어내릴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소년이 무엇인지 받아들였을 때가 훨씬 상대하기가 쉬웠다.
“당신도 오랫동안 투이나를 사랑해왔으니, 그녀를 향한 짐작을 틀렸다 하지 않겠습니다.”
아르힘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럼 포기하겠다는 거냐?”
“그녀가 누구나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 건 옳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대상이 내가 아니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라카인이 말했다.
“나는 투이나를 사랑합니다. 당신도 그녀를 사랑한다면, 사랑하십시오.”
왜 그녀여야만 하는지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마도 평생 모를 것이다.
상관없으니까.
“그러기 위해선 당신은 먼저 살아야 합니다.”
“네 눈에는 내가 죽은 것으로 보이나?”
라카인은 천천히 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아르힘은 가리켜지고도 무슨 뜻인지 몰라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은 아직 신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이미 인간인데도, 스스로를 추위를 느끼지 못한다며 속일 만큼.”
아르힘은 떨지는 않았지만 보랏빛으로 질린 자신의 피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가벼운 옷차림으론 벌써 살이 새까맣게 얼어야 정상이었지만 약간 남아있는 아르힘의 힘이 몇 번이고 몸을 되살렸다.
그러나 보기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극심한 동상도 금세 낫게 하는 힘이었지만 결코 열기만큼은 가져다줄 수 없었으니까.
라카인은 그를 연민했다.
“사람에게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라카인은 진심으로 권고했다.
아르힘은 잔뜩 골이 난 소년이 성을 내는 것처럼 얼굴을 구겼다.
마치 그에게서만은 이런 말을 들을 줄 몰랐다는 듯이.
“사람의 육체에 들어가면 내가 신이라는 사실을 쉽게 잊는다.”
아르힘이 새하얀 입김을 흩뿌렸다.
“그래서 나는 죽은 자들로 형상을 빚어내 현신하곤 했다. 인간에게 너무 깊이 빠지지 않도록.”
소년의 표정이 묽어졌다.
“하지만 투이나에게서 빼낸 영혼들은 죽어있는데도 그녀의 영혼을 조금씩 가지고 있었다.”
투이나라면 그들마저 사랑했을 테니까. 그들을 가여이 여겼을 테니까.
그래서 투이나의 영혼은 아주 작다.
“나를 그녀로 채우는 줄도 모르고 영혼을 가져가다가 결국 더 원하게 되었지.”
아르힘은 자신이 만들어낸 육체를 쓸 때마다 조금씩 투이나를 향한 집착이 생겨난다는 걸 알았을까.
이미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지만.
소년은 처음 세웠던 계획을 떠롤렸다.
투이나가 수호신이 되면 끊임없이 다른 자의 영혼을 받아 자신의 영혼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에게 줄 그녀의 영혼을 만들어낼 수 있었는데.
아르힘이 차갑게 내뱉었다.
“너는 모든 영혼과 마법을 투이나로 바꿀 기회를 놓친 거다.”
라카인은 투이나를 수호신으로 만들어 삼키려던 아르힘의 계획을 놀라지 않고 들었다.
선택은 이미 끝났으니까.
“당신도 결국에는 살아있는 투이나를 택했습니다.”
소년이 입을 다물었다.
되살아난 투이나를 보며 아르힘은 그녀를 수호신으로 만들려는 계획이 실패했다는 실망보다 안도를 느끼고 말았다.
그때부터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
“왜 그녀가 당신에게 다시 삶을 주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라카인은 속죄나 처벌을 말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삶에 얼마든지 있다.
필요한 것은, 살아보는 일뿐이다.
모든 것을 깨달은 아르힘은 도망치듯 사라졌다.
라카인은 그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영영 다시 보게 될 일은 없을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괜찮았다.
다시 투이나의 곁으로 돌아온 라카인은 따듯하게 데워진 이불 안으로 들어가 꼭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다시는 새벽에 깨는 일 없이 푹 잠들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