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3. (42/43)

외전 3.

대지를 절반으로 나누면…

레오나 크로퍼드가 감금에서 풀려났을 땐 날짜를 제대로 셀 수조차 없을 때였다.

유일하게 바깥 상황을 들여다 볼 수 있던 창문은 폭설이 내렸을 때 그대로 얼어붙었다.

죄인을 위해 얼음을 깨주러 올 사람도 없었으니.

어슴푸레하게 흰 빛이 어른거릴 때마다 레오나는 바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 하곤 했다.

새어 들어오는 추위와 미미한 빛은 자주 새벽과 헷갈렸고, 날짜를 한 번 놓치자 하루를 세는 게 아예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언젠가는 내보내 주겠지.

한가로운 마음까지 들었던 레오나는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레오나 크로퍼드.”

누워있던 그녀가 등을 돌렸다.

콧수염을 길게 길러 표정을 알아볼 수 없는 작자가 무덤덤하게 열쇠를 쩔렁이고 있었다.

“근신 해제다. 나가 봐.”

“뭐?”

그는 대답도 않고 나갔다. 문을 열어두고서.

갑작스런 자유가 당황스러워 레오나는 잠깐 멍해있었다.

그러나 곧 튼튼하게 길러두었던 정신이 몸을 깨웠다.

레오나는 서둘러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신발을 신고 뛰쳐나왔다.

갇혀있었으니 딱히 챙길 물건도 없었다.

아무도 그녀를 가로막지 않았다.

마주치는 사람들은 묘한 표정으로 레오나를 지켜보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걱정밖에 없었다.

서리가 낀 공기를 헤치고 바깥으로 나아가니 그동안 듣지 못했던 온갖 소리가 한꺼번에 그녀에게 밀어닥쳤다.

“…끝났다!”

“내기가 끝났어!”

레오나가 눈썹을 찡그렸다.

지나가는 자들은 모두 대단히 흥분해 있거나 격분해 있었다.

“도대체 라카인이 누구야?”

“라카인?”

어딘가 귀에 익은 이름이다.

평소 때라면 레오나를 알아본 자들이 먼저 다가와 시시콜콜한 것까지 떠들어댔을 테지만.

오래 갇혀있던 레오나는 더럽고 볼품이 없었다. 하여 사람들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레오나는 그냥 사람들을 밀치며 나아갔다.

그 동안 몇 가지 문장도 주워들을 수 있었다.

“정말 라카인이라는 자가 루가 님과 결혼한다는 거야? 하지만 생판 처음 듣는 이름이잖아!”

“구혼자가 아닌 자가 이겼다니. 그게 말이 돼?”

“속임수야!”

“하지만 신전이 보증했어!”

“라카인에 건 사람 있어? 차라리 루가의 신발짝에다가 내기를 걸지. 그런 사람한테 돈을 건 사람이 있느냔 말이야?”

“있다던데?”

“그보다 더 중요한 소식이….”

레오나는 비틀거리며 나아갔다.

상단이 있는 자신의 집까지 먼 거리도 아니었는데 자꾸만 다리가 꼬였다.

‘집이 무사할까?’

이미 의회가 한 차례 털어간 상단이 멀쩡한 꼴로 남아있을 리는 없었다.

그나마 내기라는 명목으로 유지하던 것도 방금 모가지가 날아갔다.

평소 때라면 하핫, 하고 한 번 크게 웃었겠으나 레오나는 걱정이 앞섰다.

‘네가 돌아왔는데 집이 난장판이면 어쩌지?’

레오나는 그 걱정만 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다른 걱정은 너무 무거워서 지금 떠올렸다간 주저앉아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베인이 기어코 내기에서 패배했다는 것.

그래서 완전히 죽어버렸을 지도 모른다는 것.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

등등은 그 끄트머리를 쥐어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를 소스라치게 만들었다.

레오나가 자신의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 앞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비고 있었다.

“상단주 어디 있어!”

“내기 결과가 사실인지 빨리 확인해 줘!”

“내 돈!”

숨을 몰아쉬던 레오나는 팔꿈치를 들어올렸다.

흥분한 군중들을 뚫고 지나가려면 몸싸움이 아니라 칼싸움을 해야 할 지경이지만.

어쨌든 집주인은 자신이다.

그 때 각오를 다지는 그녀의 팔을 터번을 쓴 사람이 낚아채갔다. 레오나는 엉겁결에 휩쓸려갔다.

‘누구지?’

그는 아주 간단하게 사람들을 헤치고 레오나를 집 안까지 데려갔다.

레오나는 멍하니 그 등을 바라보았다.

‘베인?’

희미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안전한 집안으로 들어서자 레오나는 터번을 쓴 사람이 베인보다 훨씬 키가 작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당신은….”

언젠가 본 적 있던 투이나의 호위였다.

“반갑습니다, 레오나 크로퍼드.”

호루니가 차분히 인사했다. 레오나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바보같이. 한 순간이나마 그녀를 베인으로 착각하다니.

레오나의 목소리가 저절로 사나워졌다.

“왜 당신이 여기 있는 거죠?”

“루가 님을 대신하여 전해드릴 물건이 있어 왔습니다.”

호루니는 전과 달리 차림새가 아주 말끔해져 있었다.

호위가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둥근 터번에는 작은 보석이 하나 달려 이마에 드리워져 있었고, 허리띠부터 꽉 맞게 착용한 장갑까지 꽤나 고급품이었다.

레오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당신하고는 얘기 못 해요. 루가 님을 불러줘요.”

“그분은 떠나셨어요.”

호루니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리면 어울릴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새로운 루가입니다.”

“…뭐라고요?”

레오나가 겨울바람에 차갑게 식은 손을 이마에 올렸다. 열이 오른 머리가 금세 식었다.

레오나는 쓸 데 없이 의심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호루니도 그래서 일부러 화려한 차림을 하고 그녀를 찾아왔을 것이다.

심호흡을 깊게 한 레오나가 물었다.

“베인은 죽은 건가요?”

“…….”

호루니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대답했다.

“네. 죽었습니다.”

기어이 숨이 이동하기를 거부했다.

호흡조차 멎어버린 레오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옷을 움켜쥐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에 호루니가 급히 덧붙였다.

“하지만 루가 님이 남겨놓은 선물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용이에요.”

레오나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이 소식을 들으면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충격을 흡수하느라 울 겨를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레오나는 넋이 나간 채 중얼거렸다.

“아르힘에 오는 게 아니었어.”

차라리 불치병에 걸렸을 때가 나았다.

적어도 그 때는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라도 있었다.

고작해야 몇 년, 고작 그 시간을 더 살려놓고 이렇게 앗아가 버리다니.

“그 아이를 여기로 데려오는 게 아니었어.”

레오나가 머리를 눌렀다.

괴로움을 주체하지 못해 스스로를 학대하는 그녀를 본 호루니가 입술을 깨물었다.

“…따라오세요.”

“……놔요.”

“따라오시라니까요!”

호루니는 막무가내였다.

레오나는 끔찍한 소식을 전해놓고 막무가내로 구는 그녀에게 치를 떨었다.

하지만 내내 갇혀있던 사람이 갑자기 단련한 사람을 뿌리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레오나는 질질 끌려갔다.

결국 화를 내려던 레오나에게 호루니는 심란한 표정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대체 무슨 망할 선물인지 이렇게 채근이냐 싶었던 레오나의 표정이 한 순간 뒤바뀌었다.

방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레오나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방금 그의 사망 소식을 들었는데 이렇게 농락당하는 건 너무했다.

이게 무슨 환각이나 그런 거라면 세상이 너무 빌어먹게 잔인하지 않은가.

하지만 충격에 대비하려고 애쓰는 레오나의 몸부림을 그가 가볍게 뛰어넘어왔다.

“……누이.”

“베인!”

레오나가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갔다.

베인은 덥석 그를 부여잡는 레오나를 가볍게 받아주었다.

레오나가 정신없이 그의 뺨을 붙들고 온기를 확인하고 눈에 빛이 돌아왔는지 끊임없이 돌려보았다.

“정말 너 맞아?”

“응.”

“네가 죽었다고 그랬어! 네가 죽은 줄 알았다고!”

남매의 재회를 본 호루니가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베인이 살짝 웃었다.

“저 사람을 원망하진 마. 나 정말로 죽었었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지금 여기 있잖아!”

베인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아르힘에게 붙잡혀있는 동안 그는 계속 꿈을 꾸었다.

잔혹한 신은 그에게 깨어나고 깨어나도 그치질 않는 꿈으로 감금시켰다.

어느 날은 투이나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잠든 평화로운 시간을 보여주었다가, 다음 장면은 자신이 투이나를 찌르고 피에 젖은 손을 들여다보는 식이었다.

시체 앞에서 웃다가, 그게 자신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비명을 지르다가, 아르힘이 되었다가, 울다가, 굶주렸다가, 망가진 영혼으로 영원히 검은 공간을 달리게 시키기도 했다.

그는 더 이상 사랑도 증오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고통뿐이었다.

‘나를 죽여줘.’

베인은 텅 비어버린 머리로 그 생각만을 집어 삼켰다.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신에게서 풀려났을 때도 꿈이 아니라는 걸 믿지 못한 채 죽음을 받아들였다.

원래라면 거기서 영원히 끝났어야 했다.

“루가 님의 마지막 기적이에요.”

호루니가 약간 죄책감 어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사실을 그대로 전한 것뿐이지만 레오나에게 충격을 준 게 미안했던 모양이다.

“베인이 살아난 건, 오래 전에 루가 님을 만났을 때 전해졌던 영혼을 다시 시체에 불어넣었기 때문입니다.”

호루니는 투이나가 이리나를 만난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떠올렸다.

신전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한참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투이나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영혼은 육체를 움직일 수 있어요. 그렇죠? 우린 그 산양을 봤잖아요.」

「네에. 그렇죠.」

「하지만 영혼도 육체잖아요.」

투이나의 눈빛이 달라졌다.

「영혼들이 시체에 들어간다면, 거꾸로 시체가 영혼을 끌어당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 하지만 그렇게 될까요?」

「믿어봐야죠.」

투이나가 손을 맞잡았다.

「이리나의 영혼도 내겐 아주 작은 부분이었지만 결국 살아남았어요. 그러니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베인의 영혼이 내게 남아있다면, 돌려줄 수 있을 거예요.」

호루니가 전해준 얘기에도 레오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난… 난 이해가 안 간다.”

“내가 루가 님을 사랑했기에 다시 살아난 거야.”

베인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 분의 몸에 내 영혼이 남아있었어.”

베인은 환하게 웃었다.

고통이 너무 심해서 다시 살아나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온 삶은 너무도 선명하고 강해서 기억 따위를 단숨에 압도해버렸다.

봐라. 여기가 현실이다.

너는 더 살아가도 좋다.

베인은 더 없는 애정을 담아 누이를 끌어안았다.

투이나에게 주었던 영혼은 조각난 채로 자신과 함께 그 모든 괴로운 일을 겪었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있었기에 단 하나 남은 영혼이 돌아올 수 있었다.

고통은 신과 함께 죽었다.

베인은 기쁨을 참을 수 없어 누이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다 끝났어.”

레오나는 여전히 당황스러워하면서도 기꺼이 동생을 받아주었다.

호루니는 비로소 임무를 마칠 수 있어 안도한 표정이었다.

“아르힘은 사라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르루가를 믿게 될 거예요.”

“그게 대체 무슨 신이죠?”

“이제 루가의 이름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지게 된다는 뜻이에요.”

투이나는 마지막까지 혼자 남겨질 호루니를 걱정했다.

구혼자 내기로 주어질 막대한 재산과 루가라는 직위까지 넘겨주고서, 투이나가 당부했다.

「내가 할 수 있었다면 당신도 할 수 있어요, 호루니. 누구라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렇게 할게요, 루가 님.」

호루니는 울면서 맹세했다.

투이나는 라카인과 함께 떠나지만, 그녀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루가를 믿는 한 이곳을 지키는 신의 힘을 이어받는 자가 계속 생겨날 테니까.

그걸 증명하기 위해 떠나야 했다.

호루니는 새로운 신의 이름을 아르투이나로 하고 싶어 했지만 투이나가 반대했다.

「누구나 루가가 될 자격이 있다고 믿게 해주세요.」

사람이 서로를 믿을 수 있다면.

기꺼이 당신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수호신이 될 수 있다.

호루니가 기어이 참고 참던 울음을 흘렸다. 투이나의 이야기를 모두에게 해줄 것이다.

지금까지 어떤 신이 사람을 거쳐 왔는지 전해지도록 할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태어나 하늘을 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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