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 (41/43)

외전 2.

바다를 절반으로 나누면…

단정하게 누워있는 시드룬은 꼭 인형 같았다.

그녀는 가만히 침대 옆에 앉아 시드룬이 눈을 뜨기를 기다렸다.

공들여 만든 공예품에 먼지가 앉을까봐 햇볕에 살짝 흩날리는 실오라기마저 닿지 않도록 훅 하고 날려 보냈다.

그러고도 시드룬이 깨어나지 않자 그녀는 살며시 그의 볼을 찔러보았다.

예상외로 부드럽게 푹 들어갔다.

혼자 키득거리는 소리에, 여전히 눈을 감은 시드룬이 손가락에 찔린 볼을 움직였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일어났어요?”

다정한 목소리가 인사했다.

“나에요. 복제된 투이나.”

시드룬이 천천히 눈을 떴다. 방긋 웃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매끄러운 적갈색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로 흘린 채 풍부한 색으로 반짝이는 개암 빛 눈동자가 듬뿍 넘쳐나는 호의로 가득했다.

“…….”

시드룬은 오랫동안 사람을 보지 못하다가 처음 발견한 듯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복제 투이나는 시드룬이 자신을 관찰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한참 동안 복제 투이나를 보며 느릿느릿 나머지 정신도 일깨우던 시드룬이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투이나가 당신의 심장을 찾아왔어요.”

복제 투이나는 크게 기복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장은 심장이 돌아왔어도 운신이 힘들 거예요. 아르힘이 사용한 힘이 너무 컸거든요.”

시드룬은 그녀의 경고를 듣지 않고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그러자 갈비뼈가 통째로 들썩이는 느낌과 함께 몸이 도로 바닥으로 꺼졌다.

“…!”

“거봐요.”

털썩 다시 침대로 떨어진 시드룬이 이상한 각도로 어깨를 꿈틀거렸다.

복제 투이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시 그의 자세를 바로잡았다.

시드룬은 삐걱거리며 돌아가는 심장보다 더 큰 몸의 변화를 깨달았다.

“비늘이 자라났군요.”

“전보다 훨씬 많이요.”

복제 투이나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시드룬은 별 감흥이 없는 표정으로 시선을 내렸다.

이제 로브로 감출 수 없을 만큼 자라난 비늘이 옷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몇 번 시험 삼아 몸을 움직여 보던 시드룬은 배를 중심으로 뿔처럼 솟아난 비늘에 침대가 걸려있다는 걸 확인했다.

그래서 일어나기 어려웠군.

시드룬은 납득했다.

“아르힘이 신전에서 영혼의 세계를 불러왔을 때 당신의 마법과 결합이 된 모양이에요. 내가 그 자리에 있던 건 아니라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해했습니다.”

시드룬은 세 번째 시험에서 아르힘이 보여주던 꿈을 기억했다.

망망대해처럼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그는 자신이 원하던 곳에 도달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곧바로 투이나를 잊어버린 그는 그 세계에 몰두했다.

이것이 꿈의 형태로 재현된 영혼의 세계이더라도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이기에.

몸에 자라난 비늘이 자신을 삼킬 듯이 커져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의 지식을 흡수하고 싶었다.

그러다 루가의 호위에게 뺨을 맞았다.

눈을 깜박거린 시드룬은 여기가 눈밭이 아니라는 걸 되새겼다.

쏟아지는 눈 속에서 부딪치던 영혼의 전쟁은 끝났다.

그는 도로 천장을 향해 누웠다.

“루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러자 복제 투이나가 슬픈 눈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지금 장례식에 참석 중이에요.”

* * *

끼익. 시드룬이 좀 더 쉴 수 있도록 복제 투이나가 방을 나왔다.

시드룬의 집은 적막했다.

누군가에게 들킬 걱정이 없는데도 복제 투이나는 소리를 죽여 걸었다.

그러다 정통으로 수리시에게 부딪치고 말았다.

“깜짝이야!”

펄쩍 뛰어오른 수리시가 너무 놀란 나머지 심장을 부여잡았다.

“제발 인기척 좀 내고 다녀!”

“죄송해요.”

복제 투이나가 얼른 사과했다.

수리시는 사과를 받을 생각도 않고 미심쩍게 그녀를 훑어보았다.

“너 복제된 쪽 맞지?”

“네.”

“후. 루가가 병이 낫고 난 다음엔 도무지 구분이 가야 말이지.”

복제 투이나는 사실 투이나의 병이 나은 게 아니라 달라졌을 뿐이라는 사실을 말하려다가 말았다.

수리시가 정말 궁금해 하는 게 아닐뿐더러, 원본과 더더욱 똑같아진 그녀가 껄끄럽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괜히 멋쩍어졌는지 수리시가 이미 다 했던 말을 반복했다.

“시드룬의 심장은 잘 움직여?”

“네. 문제없어요.”

투이나가 시드룬을 데려왔을 때 그의 심장은 반대편에 쥐어진 상태였다.

신전의 일이 복잡하여 그를 데려오는 게 늦었다고 사과했지만, 복제 투이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잊지 않고 그의 심장까지 찾아다준 투이나에게 고마울 뿐이었다.

“아르힘은 완전히 사라졌나요?”

“적어도 제가 느끼기엔 그래요.”

투이나는 어색하게 시드룬의 심장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었다.

복제 투이나는 영혼의 세계에서도 아르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얘기해 그녀를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그녀의 얘기에 투이나는 희미하게 웃긴 했지만 완전히 안심한 눈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르힘을 보호하던 힘은 아직 그대로예요. 수호신이 사라졌는데도요. 사람들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어요.”

“그가 어딘가에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인가요?”

“…글쎄요.”

투이나와 복제 투이나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쌍둥이도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지는 부분이 생긴다는데, 두 사람은 오히려 더욱 똑같은 모습이 되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거부감을 느낄 만도 하련만, 투이나는 오히려 개운한 표정이었다.

처음부터 복제된 자신을 꺼림칙하게 여겼던 건 수호신이 되어야 하는 투이나의 운명 때문이었다.

그 운명에서 해방된 지금 투이나는 복제가 예전보다 더 똑같아졌는데도 사근사근했다.

“어쨌든 당분간은 신전을 돌봐야 해서요. 수호신이 사라졌어도 사제님들의 마법까지 사라진 게 아니라서 설득이 좀 필요해요.”

“그 힘이 사실 자기 영혼을 쓴다고 하면 멈추지 않을까요?”

“모든 사제님들이 병자 앞에서 초연하시진 않아서요.”

지금까진 사제들이 수호신의 이름으로 보호되었지만, 이제는 그들을 어떻게 할지 고민이라고 투이나는 말했다.

사실을 털어놓으면 힘을 이용당할까 봐,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원치 않게 계속 희생당할까 봐.

망설여진다고.

복제 투이나는 수호신이 사라졌으니 이제 당신도 루가 노릇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떨어져 나온 자신이 갸웃거리는 것과 달리 투이나의 영혼은 살래살래 고개를 내저어서 복제 투이나는 그냥 인사만 했다.

“또 봐요.”

투이나는 신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지금은 스카차의 장례식에서 너무 펑펑 우느라 마법사의 마을에 있는 자신에게까지 슬픔이 느껴질 정도였다.

딱. 딱.

“또 멍 때려?”

수리시가 눈앞에서 손가락을 부딪쳤다.

자신의 것이 아닌 슬픔에 잠겨 있던 복제 투이나는 깜빡 깨어났다.

“음… 죄송해요.”

또 한 소리 할 줄 알았던 수리시는 더 뭐라 하지 않았다.

그저 불편하게 팔짱을 낀 손을 꿈틀거렸다.

“네가 여기 나와 있는 게 이상해.”

들킬 걱정이 사라졌기에 복제 투이나는 더 이상 숨어 지내지 않았다.

그래서 수리시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정말 어떻게든 다른 마법사들을 찾을 수 없는 거니?”

“네.”

복제 투이나는 약간 미안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힘이 시드룬의 심장을 이용해 날려 보낸 마법사들은 다른 차원으로 사라졌다.

시드룬의 마법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몰랐기에 아르힘은 힘을 조절하지 않았다.

그 결과 마법사들은 온갖 차원으로 날아갔고, 시드룬은 저렇게 몸져눕게 된 것이다.

수리시가 잔뜩 미련이 남은 목소리로 채근했다.

“하지만 이제 시드룬이 깨어났으니까 달라질지도 모르잖아. 걔는 이상한 차원도 많이 드나들었으니까. 안 그래?”

“어쩌면요.”

하지만 시드룬이 그들을 찾고 싶어 할지는 모르겠네요.

복제 투이나가 조용히 속으로 속삭였다.

* * *

그녀의 짐작대로 자리에 누운 시드룬은 사라진 마법사들의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아르힘은 영혼의 세계를 다뤘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시드룬은 오로지 신전에서 겪었던 경험에 몰두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던 것인가?’

언제나 영혼을 매개체로 하여 마법과 수호신의 힘이 이뤄진다는 사실은 입증되었다.

투이나와 아르힘이 맞붙을 때 보았던 영혼의 소용돌이는 넋을 빼앗길 만큼 강대했다.

언제나 그가 원해왔던 모습 그대로였다. 지식과 힘이 넘치도록 존재하는 것.

투이나가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내려온 영혼의 세계를 없애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그걸 알아야 했다.

영혼과 육체의 관계가 그토록 자유롭다면, 더 이상 신체에 구속받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오로지 갈망만 할 수 있도록.

시드룬은 불만스럽게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이 비늘이 있는 자리를 덮었다.

‘이 또한 영혼과 육체가 교환된 흔적이건만.’

투이나에 비하면 한참 부족했다.

시드룬은 눈썹을 찌푸렸다.

번쩍.

작은 마법진이 침대와 비늘 사이에 나타났다.

무겁고 답답한 갑옷처럼 침대에 끼었던 비늘 주변이 마법으로 비워져 갔다.

그때 누군가가 덥석 그의 손을 낚아챘다.

“안 돼요!”

집중력이 곧장 끊겼다.

시드룬은 엄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여자를 발견했다.

“왜 방해하는 겁니까?”

“그야 당신이 도망갈 생각이니까요.”

잡은 손을 꼭 움켜쥔 채 복제 투이나가 뇌까렸다.

시드룬은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했다.

“나는 도망가지 않습니다.”

“말을 바꿀게요. 당신은 그냥 떠난다고 생각하겠죠. 그게 싫어요.”

복제 투이나가 찡그렸다.

“투이나에게 가도 당신이 원하는 답은 들을 수 없어요. 지금은 회복만 생각하세요.”

“어차피 바뀌어버린 육체는 회복할 수 없습니다.”

시드룬은 그녀가 당연한 사실을 왜 모르는 것처럼 구는지 의아해졌다.

복제 투이나가 되물었다.

“목표를 위해서 육체를 불태우면 대체 뭐가 남죠?”

“모릅니다.”

시드룬은 비스듬히 짙은 눈썹을 내렸다.

“어차피 답을 알기 전까진 다른 일들은 모두 과정일 뿐입니다.”

한순간 복제 투이나는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만들어진 것도 그저 과정인가요?”

복제 투이나가 그에게서 떨어졌다.

태어난 뒤로 그녀는 지금까지 강제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이 태생적인 영혼의 성격이 그런지, 일부러 태연한 척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타격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뜨겁게 눌러오는 그녀의 손바닥은 시드룬에게 자국을 남기고 싶어 하는 듯했다.

“당신이 나를 몇 번이나 더 투이나에게서 훔쳐낼 수 있을까요?”

딱히 그녀를 원본에게서 훔쳐냈다는 식으로 생각해 본 적 없던 시드룬은 그녀의 반응이 낯설었다.

마법은 마법일 뿐.

시드룬과 시선이 엇갈리던 눈동자에 희미한 물기가 어렸다.

“……그런 식으로는 영원히 답을 얻지 못할 거예요.”

돌연 손을 놓은 복제 투이나가 밖으로 나갔다.

침대맡까지 밀어붙여져 있던 시드룬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녀의 온기가 자취를 감춘 뒤에도 그는 오랫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방금 받은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으니까.

시드룬은 그 후로 회복에 집중했다.

갑자기 복제 투이나의 경고를 따르기로 결정한 건 아니었다.

그저 다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는 투이나를 만나러 갈 수도 없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다.

“어차피 아르힘도 사라졌으니 신전으로 갈 때 큰 마법을 쓸 필요도 없어. 조금만 회복하면 돼.”

누워있는 시드룬의 입에 사과를 처넣어주며 수리시가 말했다.

시드룬은 먹을 필요가 없다고 누누이 얘기했다.

하지만, 수리시는 그가 입을 열고 있으면 더 홧병이 나는지 그냥 음식을 집어넣는 쪽을 택했다.

“어쨌든 안 먹는 거보다 도움이 되겠지.”

서툴게 사과를 깎으며 수리시가 투덜거렸다.

복제 투이나가 그렇게 나가버린 뒤로 시드룬의 안부를 챙기는 사람은 수리시로 바뀌었다.

가끔 음식을 들고 들어오는 수리시에게 복제 투이나가 어떻게 됐느냐고 물어보려던 시드룬은 번번이 입을 다물어야 했다.

시드룬이 희미하게 짜증이 난 미간으로 입에 들어온 사과를 우물거렸다.

“…왜 그녀는 오지 않지?”

“누구? 복제?”

수리시가 와작와작 소리를 내며 남은 사과의 절반을 먹어치웠다.

“너 꼴 보기 싫다고 안 오는 애는 왜 찾아.”

“자꾸 그녀의 꿈을 꾼다.”

“커흑.”

갑자기 사레가 들린 수리시가 미친 듯이 명치를 두드렸다.

“켁, 크헥! 죽을 뻔했네. 아니, 무슨 헛소리야? 네가 걔 꿈을 왜 꿔?”

“자꾸 꿈에 나온다.”

“본체랑 헷갈린 거 아냐? 콕 집어서 복제된 걔만 나온다고?”

“구분할 수 있다.”

시드룬의 표정은 진지했다.

꿈속에서도 그는 졸고 있었다.

어딘가 무거운 늪에 갇힌 것처럼 몸이 무거운데, 몸에 자라난 비늘만이 산호처럼 가지를 뻗어갔다.

그대로 검은 호수에 잠겨 들어갈 때쯤, 가만히 물 바깥에서 지켜보는 존재가 있었다.

그녀였다.

시드룬은 꿈속에서 몹시도 심한 갈증에 시달렸다.

비쩍 마른 영혼이 뼈와 비늘만 남은 육신을 벗고 탈출하고 싶어 했다.

그때마다 시드룬은 절박한 심정으로 움직이려 했지만, 번번이 갇혀 있는 채 꿈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수리시는 황당한 표정이었다.

“네가 애인 생각으로 잠 못 이루는 낭만적이고 구역질 나는 짓거리를 할 리도 없고.”

“…….”

“게다가 꿈 내용도 되게 찝찝하네. 그거 혹시 걔 마법 아니야?”

“아니다.”

몇 가지 시험해 보았기에 시드룬은 보다 정확하게 복제 투이나의 마법을 꿰뚫고 있었다.

“그녀의 마법은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오는 것이다.”

본체인 투이나의 힘과 마찬가지로.

수호신과 같은 마법이다.

갑자기 그 부분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신경 쓰였다.

시드룬이 눈살을 찌푸렸다. 수리시는 눈치채지 못했다.

“꿈으로 개수작 부리는 건 아르힘 특기 아니었어? 신이 뒈져서 힘만 남았나.”

“알아봐야겠어.”

시드룬이 몸을 일으켰다.

말리려던 수리시는 그가 꽤 나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는 내버려 두었다.

“애 겁주지 말고 똑바로 해.”

“…그녀는 날 무서워한 적이 없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어.”

시드룬은 갑자기 복제 투이나가 만들어지던 순간을 떠올렸다.

흠뻑 가져온 투이나의 피가 마법진으로 덮이고, 수리시가 마법으로 복제를 해내던 순간.

어지러웠던 영혼의 색이 자신이 갈구했던 연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광경이 기이했다.

갓 만들어진 복제는 백치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시드룬은 그녀가 태어났을 때부터 무언가를 깨달았다고 직감했다.

세상에서 시드룬과 가장 닮은 사람을 꼽으라면 그녀였으니까.

시드룬은 몇 번이나 침대에 걸린 비늘을 빼내며 몸을 일으켰다.

수리시는 날이 갈수록 시드룬이 점점 사람 모습이 아니게 되어간다고 생각했다.

“흠.”

수리시는 시드룬이 나갈 수 있도록 의자를 뒤로 끌어당겼다.

시드룬의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침대에서 튀어나온 지푸라기와 뒤엉켜 바닥에 질질 끌렸다.

“…너 정말로 다른 마법사들을 찾아올 생각은 없는 거지?”

“아직 그들에게 받지 못한 게 있나?”

시드룬의 대답에 수리시는 한숨과 함께 어깨를 늘어트렸다.

틱틱거리는 녀석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약간이나마 정이 든 건 자신뿐인 모양이다.

“됐다. 나가봐.”

그러나 시드룬은 곧장 나가지 않고 수리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즈아둡에게 필요하다면 찾아보겠다. 네게는 빚이 많으니까.”

수리시의 얼굴이 잠깐 침통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원망하는 대신 발끝으로 시드룬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너나 잘해, 이 녀석아.”

빨리 나가기나 하라는 시늉에 시드룬은 쫓겨나듯이 복도로 나왔다.

환자를 차면 안 된다는 개념이 없던 시드룬은 무심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며칠 만에 제 스스로 걷는 다리가 꽤 어색했다.

그 바람에 앞에 누가 튀어나오는 줄도 모르고 계속 걸어가려다가 상대방의 다리를 걸어버릴 뻔했다.

“와앗!”

새된 소리에 시드룬이 물러났다.

그러나 수리시가 엉덩이를 찼을 때도 놀라지 않던 그는 상대방을 보고선 조금 동요했다.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시드룬을 본 그녀가 물었다.

“시드룬? 괜찮아요?”

“……당신이군요.”

진짜 투이나였다.

이유 모를 실망감이 퍼져나갔다.

투이나가 멍청하게 서 있는 시드룬을 보고 걱정했다.

“이렇게 나와서 돌아다녀도 되는 거예요?”

“괜찮습니다.”

시드룬은 성의 없이 대답했다.

확실히 얼룩이 사라진 투이나는 복제된 그녀와 똑같이 생겼다.

하지만 시드룬의 눈에는 어지러울 만큼 다채로운 색으로 가득한 투이나의 영혼이 보였다.

복제 투이나의 영혼은 일관된 연보랏빛으로 채워져 있는데.

시드룬은 저도 모르게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혼자입니까?”

“아뇨, 다른 사람들도 같이 왔어요.”

곧 투이나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기다리고 있던 라카인이 살짝 앞으로 나섰다.

시드룬은 그를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누굴 찾고 있었어요?”

“복제된….”

시드룬의 말이 갑자기 뚝 끊겼다.

‘내가 만들어진 것도 그저 과정일 뿐인가요?’

복제라는 말에 그녀가 했던 말이 굴러 나왔다.

그녀는 투이나와 다르다.

더 이상 복제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투이나는 시드룬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리다가 그냥 먼저 말했다.

“찾고 있는 사람이 겹치는 것 같은데 같이 가요. 시드룬의 집에는 없던걸요.”

시드룬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까 굴러 나왔던 생각에 골몰하느라 투이나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라카인과 얘기하느라 투이나는 시드룬이 조용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참, 제 복제 말인데요. 더 이상 복제라고 부르는 것도 그래서 새로 이름을 하나 지어봤어요.”

“무엇입니까?”

“그녀의 이름은…….”

시드룬은 전에 없던 집중력으로 투이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투이나가 시드룬에게 이름 하나를 흘려 넣자마자 라카인이 말했다.

“저기 있습니다.”

투이나와 시드룬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나무 밑에 앉은 여자가 보였다.

여름 햇살이 나뭇잎을 통과하며 생긴 얼룩덜룩한 그늘이 그녀의 다리에 드리우고 있었다.

마치 복제가 원래 주인을 닮아가려는 듯해 시드룬은 덜컹거리며 심장이 고장 나는 느낌을 받았다.

그저 햇볕을 쬐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시드룬은 돌아온 심장이 야기한 불안이 낯설어 삐걱거렸다.

원래 살아있다는 게 이런 건가?

복제 투이나는 새로 나타난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살짝 손을 흔들었다.

“안녕, 투이나?”

“안녕하세요.”

투이나가 인사하며 그녀의 앞에 앉았다.

복제 투이나는 며칠 만에 시드룬을 처음 보고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시드룬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무슨 일인가요, 투이나?”

“당신이라면 알고 있을 것 같아서요.”

투이나가 슬프게 눈꼬리를 떨어트렸다.

“아르힘이 사라진 뒤에도 베인이 깨어나지 않아요.”

아르힘에게 사로잡혀 있던 영혼들이 뿔뿔이 흩어진 뒤로 투이나는 꾸준히 베인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심장을 되돌려 받은 시드룬도 회복하고 깨어날 때까지 시간이 걸렸으니 베인도 분명히 그럴 거라 믿었다.

그러나 스카차의 장례식을 치르고, 신전을 정리한 이후에도 베인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복제 투이나는 조용히 투이나의 말을 듣고 있다가 천천히 답했다.

“그는 죽었어요.”

투이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베인의 몸은 아직 살아있어요.”

“베인이 아니더라도 죽은 채 몸만 살아남은 환자들은 많이 있었어요. 당신도 잘 알잖아요.”

끝끝내 희망을 붙잡아보려던 투이나에게 어떤 여지도 없이 잘라내는 말이었다.

“사제들도 그런 환자는 고치지 못했죠.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착각일 뿐이에요.”

투이나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복제 투이나는 일말의 동정심을 느끼는 듯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당신은 더 이상 그에게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어요. 베인이 바랐던 죽음인걸요.”

“……영혼의 세계에서 베인을 본 적 있나요?”

“없었어요.”

복제 투이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아주 오래, 오래 고통받았잖아요. 곧바로 문을 넘었을 거예요.”

투이나가 질끈 눈을 감았다.

“……베인에게 다시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아르힘이 한 짓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잊어버려요.”

복제 투이나는 투이나의 눈을 덮었다.

“당신은 이제 라카인과 행복해질 일만 남았잖아요.”

어쩐지 씁쓸함이 배어 있는 어조였다.

자신은 그럴 수 없다는 듯한 말투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시드룬은 그녀의 말이 자신을 향해 있다는 걸 알았다.

복제 투이나는 투이나의 눈을 가린 동안 잠깐 시드룬을 응시했다.

이때까지와 달리 자신이 관찰당하는 감각이었다.

이윽고 복제 투이나가 짧게 속삭였다.

“이제 더 이상 영혼의 세계는 보지 말아요, 투이나. 당신은 그러지 않아도 모든 걸 알 수 있어요.”

투이나가 머뭇거리는 동안 복제 투이나가 투이나의 품에서 시드룬의 머리카락을 가져갔다.

처음부터 거기에 있는 줄 알고 있던 것처럼 빠른 동작이었다.

“돌아가는 문은 내가 열어줄게요. 잠깐만 기다려줄래요?”

“…알겠어요.”

투이나가 훌쩍이며 물러났다. 라카인이 슬픔에 겨워하는 그녀를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복제 투이나는 배웅하듯 마지막으로 투이나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 당신 차례네요.”

시드룬이 저벅, 한 걸음을 내딛었다.

시드룬은 자신이 무엇을 물어보아야 할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그녀를 눈앞에 두니 단어들끼리 딱딱거리며 문장으로 붙지를 않았다.

“…….”

“…….”

시드룬이 아무 말도 않고 보기만 하는데도 복제 투이나는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었다.

투이나는 잠깐 걱정스레 두 사람을 곁눈질했으나, 개인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자리를 피해주었다.

한참 뒤에야 비로소 시드룬이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내가 갖고 있는 것은 이미 당신이 모두 가졌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거래로 제안할 것이 없군요.”

“……그래요.”

복제 투이나가 앉은 채로 무릎을 당겨 끌어안았다.

“당신이 평생 찾던 영혼의 세계는 내게 있어요.”

시드룬은 갈구하는 시선으로 뚫어져라 그녀를 응시했다.

여전히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빛이 그녀의 영혼에 가득했다.

그러나 영혼을 넘어 살갗으로 가면, 복제 투이나는 여전히 실망한 표정이었다.

“운과 마법이 겹쳐 태어난 내가 당신이 평생 찾아다니던 걸 쉽게 얻어서 화나나요?”

“아니오.”

시드룬은 또다시 갈증을 느꼈다.

“그걸 원합니다.”

복제 투이나는 생각이 많아진 표정으로 팔을 내렸다.

“내가 왜 당신에게 화를 냈는지 잊었나요?”

“당신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입니다.”

이번에는 제법 매끄럽게 대답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표정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드룬.”

그녀가 바닥에 닿은 손바닥으로 웃자라난 풀의 잎사귀를 만지작거렸다.

“투이나를 다시 복제하면 나 같은 마법사는 또 생길 거예요.”

“…….”

“투이나의 영혼이 그렇게 만든 거니까. 내가 아니라 투이나를 찾아가는 게 맞죠.”

“이미 그녀와 당신은 다른 사람입니다.”

시드룬은 명쾌하진 않지만 더듬더듬 올바른 과정을 거치듯 대답했다.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어떤 의미로?”

그녀가 빤히 맑은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똑바로 말하지 않으면 주지 않을 거예요.”

그게 무엇이든.

복제 투이나가 앉은 자리는 변하지 않는데도 몹시 멀게 보였다.

시드룬은 자신이 꿈속의 늪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곳과 다르지 않다.

그녀는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결코 구해줄 수는 없다.

다만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시드룬은 문득 시작부터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기로 했다.

“이리나.”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시드룬은 투이나에게서 받은 그녀의 이름을 다시 불러보았다.

“이리나, 나는 당신을 따르고자 합니다.”

시드룬은 언젠가 어설프게 보았던 기억을 재현했다.

무릎을 굽히고 스스로를 낮추는 동작은 배에 자라난 비늘 때문에 제대로 완성되지는 못했다.

스스로에게 구속된 시드룬은 위태롭게 자세를 유지했다.

“루가는 한 인간이 쉽게 이룰 수 없는 경지에 도달했습니다만. 그것은 수호신의 길이며, 내가 얻을 수 없다는 걸압니다.”

구혼 기간 동안 시드룬은 끈질기게 투이나가 가진 영혼을 탐구해 왔다.

실제로 그녀를 통해 진전을 이뤄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르힘에서 있었던 마지막 시험에서 시드룬은 벽에 부딪쳤다.

아르힘이 직접 시드룬에게 영혼의 세계를 열어주었는데도 마지막 한계를 넘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모든 마법사는 루가의 방식으로 문을 넘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모르지만 마법사인 채로 영혼의 세계를 넘었지요.”

복제 투이나, 아니, 이제는 이리나가 입술을 떼었다가 다물었다.

이름을 얻은 그녀는 비로소 허물을 한 꺼풀 벗어버린 것처럼 느른하게 몸을 떨었다.

“왜 영혼이 다니는 길이 소금인지 알고 있나요?”

“…….”

“눈물을 흘릴 때가 아니라 그것이 말라버렸을 때 비로소 형태를 갖출 수 있거든요.”

이리나가 살짝 웃었다. 그러자 시드룬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마법사들은 다들 고집쟁이죠. 그러면서도 배우려고 하는 모습이 좋았어요.”

그리고 이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무언가 망설이듯 오랫동안 아랫입술을 말며 생각에 잠겼던 것이다.

시드룬은 가만히 주저앉은 채 그녀가 움직이는 대로 시선을 따라가기만 했다.

결국 가볍게 제 뺨을 쓸어내린 이리나가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요, 시드룬.”

이리나가 엄숙하게 말했다.

“이제부터 당신이 가는 길은 내가 정해요. 당신이 배울 것도 내가 정하겠어요. 어디에 머물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줄 테니, 당신은 길을 멈춰선 안 돼요.”

“대가는 무엇으로 주면 되겠습니까?”

“모든 일이 끝날 때 내가 직접 가져갈게요.”

“알겠습니다.”

오랜만에 만족감이 시드룬의 몸을 타고 흘렀다.

둑이 터진 물길은 오랫동안 쓸려나가 쓰지 않던 곳까지 도달해, 그가 까맣게 잊고 있던 단어로 이끌었다.

몸을 일으킨 시드룬이 물었다.

“당신을 스승님이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그것이 경의의 표현이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시드룬, 당신이 나를 만들었는데?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관념에 이리나가 한숨 같은 웃음을 흘렸다.

“…상관없어요. 하지만 제가 스승이 되면 다시는 시드룬이 절 이리나라고 부를 일은 없어질 거예요.”

그래도 좋아요? 하고 묻는 그녀의 눈빛을 시드룬은 지나치고 말았다.

미래에 얼마나 후회하게 될 줄도 모르고 시드룬은 이 자리에서 보여준 새로운 가능성에 완전히 매혹되어버렸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스승님.”

이리나는 가여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때때로 한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순간은 얼마나 하찮고 빠르게 지나가는지.

겨우 모래 한 알이 떨어질 시간 만에 짤깍. 시드룬은 영원히 떠돌아다니는 삶을 택하고 말았다.

그가 인간으로서 죽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까.

다만 알고자 했다.

이리나는 서글퍼졌다.

내가 당신에게서 가져온 마법은 점점 누구에게도 필요 없어질 테고.

내가 당신에게 준 마음을 갈구하게 될 쯤에는 이미 산산이 흩어져 있겠죠.

이리나는 필연적으로 엇갈리게 될 미래를 선명히 볼 수 있었다.

시드룬의 마법은 너무 강했기에 잘못된 길로 멀리까지 가버렸다.

그러니 한참을 돌아와야 할 것이다.

지식을 향한 갈망으로 번뜩이는 집착적인 눈동자가 연민하려는 이리나를 설득했다.

그래도 지금은 당신을 사랑하니까.

이리나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아주 작게 남아있는 투이나의 영혼이 그녀에게 힘을 주었다.

이리나가 시드룬의 손을 잡았다.

“그래요, 함께 가요.”

* * *

물론 그 전에 약속대로 투이나에게 문을 열어주어야 했다.

투이나 일행은 수리시와 함께 시드룬의 집에 모여 있었다.

집에 들어오는 이리나를 본 투이나가 일어났다.

“대화는 잘 끝났나요?”

“네.”

이리나가 살짝 미소 지었다.

시드룬은 다시 평소처럼 돌아와 무심한 표정이었다.

아무도 둘 사이에서 어떤 맹세가 이뤄졌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이리나는 일부러 쾌활하게 말했다.

“덕분에요. 제 이름을 지어준 것도 당신이죠?”

“시드룬이 말해줬어요?”

투이나가 쑥스러운지 살짝 뺨을 물들였다.

“마음에 들지 모르겠어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꼭 당신이랑 자매가 된 것 같은걸요.”

“어머나! 기뻐요, 이리나.”

투이나가 환하게 웃는 걸 보자 이리나도 다시 즐거움이 몽글거리며 생겨났다.

그녀가 베인 얘기로 오래 슬퍼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동떨어져있던 수리시가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허, 이제 너한테 이름이 생겼구나.”

수리시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껄끄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이리나는 그녀를 이해했다.

수리시의 눈앞에서 복제와 본체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죽기 직전에 바즈아둡을 복제하고, 그를 남편과 동일인물이라 믿어오며 살아온 수리시에게 이만큼 잔혹한 일이 있을까.

복제가 본체와 똑같다고 믿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자 삶을 지탱해주는 기둥이었는데.

그녀가 지금까지 사랑해온 사람은 누가 되어 버렸나?

어렴풋이 예감은 했었지만 막상 뿌리부터 뒤흔들어오는 광경을 보자 수리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속이 우그러들었다.

애꿎은 두 사람에게 쏟아낼 수 없는 감정에 그녀의 속만 타들어갔다.

이제 그녀의 속을 썩일 다른 마법사도 없는데.

서글픈 모습에 이리나는 잠깐 시드룬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힘껏 수리시를 안아주었다.

“괜찮아요, 수리시.”

“뭐가.”

어깨에 매달리는 이리나를 수리시가 퉁명스럽게 밀쳐냈다.

그러나 이리나는 힘 있게 그녀를 붙잡았다.

“다르면 어때요. 두 번째 사람을 사랑한다고 죄 될 일은 없잖아요.”

수리시의 입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이리나를 밀어내던 손에선 힘이 빠졌다.

자기보다 훨씬 나이 들고 커다란 사람을 도닥여주면서 이리나는 어렴풋이 가족이라는 개념을 만져보았다.

이리나가 수리시의 어깨에 턱을 올렸다.

“과거에서 미래까지. 그를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당신이 사랑한다면 그걸로 됐어요.”

“…….”

“당신이 이토록 사랑해서 괴로워하는데, 어떻게 행복해지지 않을 수 있겠어요.”

주륵.

그 때 수리시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 자신조차 울 줄 몰랐다는 듯 약간 입이 벌어져 있었다.

이리나가 살며시 수리시를 놓아주었다. 그녀 스스로 울 수 있도록.

설마 그 수리시가 울 줄은 몰랐던 투이나와 호루니의 턱이 쩍 떨어졌다.

“정말이지 못 쓰겠다.”

우는 모습을 보여서 부끄러워할 줄 알았던 수리시는 한 점의 수치심도 없는 빨개진 얼굴로 이리나의 등짝을 때렸다.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다 하는 걸 보니 아주 떠날 생각인가 보지?”

“아야야.”

“어딜 가나요?”

투이나가 동그래진 눈으로 물었다.

“네. 앞으로 보기 힘들어지겠네요, 투이나. 시드룬과 나는 잃어버린 마법사들을 찾으러 가려구요.”

“아!”

투이나는 탄성과 같은 짧은 소리를 냈다.

“제 마음에도 그 분들이 계속 걸렸어요. 그런데 당신이 가준다니…”

“당신의 일은 제 일이기도 해요, 투이나.”

그리고 시드룬에게도 필요한 일이지요.

투이나는 기뻐했다.

“꼭, 반드시 모두 찾아내길 바랄게요. 이리나. 당신의 앞길에 축복이 있기를.”

“고마워요.”

“아마 너희가 찾아내도 그 놈들은 엄청나게 투덜거릴 거다.”

수리시가 툭 내뱉었지만, 그래도 내심 안도한 표정이었다.

“만나면 뭐라고 투덜거릴지 기대될 정도인 걸요.”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찾을 생각이야?”

“일단 시드룬의 몸에 남은 영혼의 흔적을 거꾸로 되짚어보려고요.”

“……거꾸로요?”

갑자기 투이나가 뭔가 깨달은 표정이 되었다.

“네. 아직 살아있다면 마법을 쓸 때 조각난 그들의 영혼이 육체의 위치를 알려줄 테니까요.”

확실히 영혼들과 대화할 수 있는 이리나가 써볼 만한 방법이었다.

이리나의 설명에도 투이나는 내내 멍해 보였다. 영문을 몰라 이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는 동안 시드룬은 드물게 초조해 보이는 모습으로 출발만을 기다렸다.

그를 더 애태워볼까 하다가, 이리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그럼 잘 있어요, 투이나.”

이리나가 시드룬을 껴안았다.

그녀가 비늘에 손을 얹자 시드룬은 곧장 가야할 좌표를 알았다.

그리고 거대한 마법진이 두 사람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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