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에서 계속
외전 1.
태양을 절반으로 나누면…
‘내가 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수백 마리의 말발굽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그 밑을 지나가는 게 무엇이든 흔적도 없이 깔아뭉갤 수 있는 거대한 힘이 순식간에 길을 진흙탕으로 만들었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그들이 가는 길에서 진작 도망쳤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은 죽음의 나팔처럼 달려오는 군사들을 보며 앞길을 가로막았다.
계단에 선 자의 붉은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날렸다. 장작을 먹은 불길처럼.
강잉한 턱을 감싸다 더 높은 곳으로.
‘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샨은 아르파의 군대가 수도를 가로질러 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거리낄 것 없이 베어 넘기고 오로지 신의 명령만을 수행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이들.
그가 그렇게 만들었다.
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아르파가 사라졌을 때 샨은 공허함을 느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과 다름없던 신을 빼앗겼는데도 샨은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은 여전히 그대로였기에.
투이나가 애써 자신과 아르파를 구분해서 보려고 한 노력이 우스울 만큼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왕이자, 모하세스를 통치했으며, 다른 자들에게 분노했고, 피로 그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어 하는 인간.
그런 인간에게 어리석은 하인이 땅에 꽂아두고 간 아르파의 칼을 선택할 시간이 있었다.
허나 샨은 아르파라면 망설임 없이 칼로 달려갔을 그 순간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투이나를 올려다보았다.
앞서나간 자가 그녀를 부둥켜안고 힘을 이기지 못해 바닥에 뒹구는 장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스스로 눈 속에 몸을 처박는 바보 같은 짓이었으나, 샨은 저도 모르게 투이나를 안고 구르는 자의 얼굴에 자신을 넣어보고 말았다.
게다가 제 품으로 그녀를 안아본 적이 있었기에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닿는지 그 크기까지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다.
가슴팍에 부드러운 정수리가 닿으면 남은 자리로도 넉넉히 들어오는 어깨를 잡아볼 수가 있었다.
샨의 낯빛이 흐려졌다.
기억은 연쇄적으로 작동했다.
한 번 그 감촉을 떠올리자 순식간에 다른 기억들까지 아우성을 쳤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하찮은 것들까지 함께 떠올랐다.
투이나가 종종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턱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라든지.
골똘히 알 수 없는 생각에 잠길 때마다 괴었던 팔꿈치를 떼면 얼마나 작은 그림자가 고였다가 사라지는지도 기억났다.
너의 눈이, 너의 입술이 어떤 모양으로 움직이는지.
너와 함께 있던 순간이 어떤 것인지.
그 모든 것을 평생 기억하게 될 줄도 모르고 알았다.
샨은 두 사람이 떨어진 자리를 모조리 태워버릴 것처럼 응시했다.
잠자코 있던 눈 더미에서 마침내 두 팔이 뻗어져 나왔다.
드러난 맨살을 본 그는 무심코 그녀가 추울 거라 짐작했다. 추워 보였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 샨은 얼음과 피가 엉겨 붙은 겉옷을 벗으려 했다.
그러나 추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뒤이어 투이나가 함께 나뒹군 자의 목덜미를 껴안고 웃음을 터트리는 걸 보자 그만 몸이 굳어버렸다.
한 번도 그렇게 웃은 적 없었잖아?
그것은 금세 웃는 듯 우는 듯 새된 소리로 바뀌어 갔다.
자신이 짐작도 하지 못할 높은 곳에서 아래로 떨어지듯 변화하는 목소리에 멍해져 있는 사이, 하인은 익숙하고도 당연하게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걸 더 이상 하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샨은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잃은 것이 무엇인지 실감이 났다.
수호신을 빼앗기고도 멀쩡했던 심장이 뒤늦게 빨라지며 초조해졌다.
그러나 몸이 이상 신호를 울리며 당장 사냥에 나서라고 한들.
그를 충동질할 분노가 사라져 있었다.
“…….”
머리가 차갑다는 것이 이런 건가.
비로소 겨울이 그에게 왔고, 입김이 새어 나왔다.
희게 흩어지는 제 감정 너머로 보이는 투이나를 응시하던 샨은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늦었다.
그러나 늦었기에 비로소 모든 일이 끝났다는 사실 또한 느낄 수 있었다.
그게 약간 나쁘지가 않았다.
너를 대신할 만큼의 감정은 아니었지만, 원래 사랑은 바보 같은 자들만 하는 게 아니던가.
샨은 마지막으로 투이나를 한 번 더 눈에 담았다.
본능적으로 이제 다시는 그녀를 보게 되지 못할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들이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아르파 때문이었고, 이제 신을 잃은 그가 다시 투이나를 만나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겠지.
두두두두두.
군대의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샨은 그들이 자신을 더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허리를 세웠다.
원래 샨은 아르파가 몸을 장악했을 때도 기억과 정신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허나 수도 바깥에서 주둔 중이던 군대를 부른 기억만큼은 없었다.
추측컨대 사람의 정신을 조종할 수 있는 아르힘이 아르파를 잠깐 도왔을 거다.
투이나가 신전으로 돌아오는 시간을 재는 동안의 기억이 드문드문 빠져 있었다.
군대를 부른 기억은 물론이고, 갑자기 하인들이 죽어 나자빠져 있는 광경도 그랬다.
이제 보니 아르파 신도 조급했던 모양이지.
한 번도 주도권을 빼앗겨본 적 없던 수호신이 인간에게 거꾸로 장악당하는 건 처음일 테니까.
그러나 아르파가 도움을 청했던 아르힘마저 거꾸로 자신이 기르던 아이에게 패배하여 사라졌다.
샨은 피식 웃었다.
내가 인간이라면 수호신들의 패배를 조롱할 수 있겠군.
샨은 만족했다.
그러나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람으로 돌아왔다고 한들, 그가 신으로서 행했던 모든 일들은 모두 자신에게로 되돌아왔다.
시체를 끌어안고 노려보던 여자는 옆구리에서 창을 빼내며 내뱉었다.
“아르파가 죽었어도 당신 또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투이나에게 사로잡혀 있던 샨은 조금 늦게 상처를 움켜쥐었다.
신의 힘을 잃은 자는 너무도 무력하게 피를 흘렸다.
그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리자 호위는 짧은 동작으로 창을 돌려 피를 털어냈다.
잠시도 그의 것을 보관하는 게 끔찍하다는 표정이었다.
“아르파를 잃었으니 이제 아르파의 군대가 직접 당신을 찢어발길 겁니다.”
그건 흡사 저주였다.
샨은 두 수호신을 모두 잃은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그를 원망하고 시체를 수습하러 떠나버린 호위에게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책임을 지고 죽으라는 건가?
자신의 오만한 성정이 슬슬 기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과연 그것들이 정말로 자신에게 반기를 들 수 있나?
그토록 뿌리 깊게 길들여 놓았는데?
샨은 그걸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신전에서 홀로 내려오는 동안 샨은 스스로 옆구리를 틀어막았다.
눈은 그쳤으나 여전히 차가운 공기가 매섭게 달라붙었다.
그를 치료할 만한 인간은 모두 쓰러지고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손에 맡겨진 죽음에다 대고 윽박지르는 것도 제법 괜찮았다.
샨은 꽉 다물린 옆구리를 짚고 소리쳤다.
“멈춰라!”
쩌렁쩌렁한 고함이 퍼져나갔다. 그러나 달려오는 짐승들과 함성 속에서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샨은 발광하는 말머리들을 응시했다. 아르파의 힘을 사용한다면 즉각 그들을 멈출 수 있겠지만.
그의 눈빛이 시퍼렇게 형형해졌다.
샨은 타오르는 분노 속에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내가 너를 사랑했기에 인간이 되었다면.’
투이나가 보였다. 온 사방에서 그녀의 두건이 드리우던 그림자가 보였다.
자신에게 달려오는 군사들은 거꾸로 도망치는 투이나의 모습 같았고, 피를 열망하는 울부짖음은 기괴한 그녀의 울음소리로 바뀌어 갔다.
샨의 미간이 더더욱 단단해졌다.
‘너는 여전히 나를 증오하도록 해라.’
샨은 질질 끌고 왔던 칼을 들어올렸다.
‘공포에 사로잡혀 있기를 바란다.’
아무렇게나 쓰러져있던 시체들 속에서 칼을 주워야 했을 때가 가장 그를 화나게 했다.
언제나 무기는 그의 손에 쥐어져 있어야 하는 것을.
투이나가 강제로 다른 곳에서 무기를 찾도록 만들어버렸다.
어느새 샨의 머릿속에서 아르파를 빼앗아간 건 하인도, 아르힘도 아니고 오로지 투이나이기만 했다.
너를 만나고.
너로 인해서.
나는 싸워야 한다.
샨은 휘몰아치는 감정을 어금니로 눌러 씹으며 칼을 던졌다.
매서운 겨울바람의 소리를 내며 날아간 칼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한 퍽 소리를 내며 달려오던 말 앞에 꽂혔다.
선두에 있던 말이 놀라 앞발을 들어올렸다.
고삐를 잡고 있던 자가 급히 말을 진정시키는 꼴을 보며 샨은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군사들은 여전히 달려오고 있었기에 거의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샨은 망설이지 않았다.
‘저것들이 아르파의 군대라고?’
웃기는 소리.
‘저것은 나의 군대다.’
그들의 왕국은 모하세스다.
수호신이 없어져도 이대로 망하게 둘 것 같으냐?
샨은 비로소 되찾은 분노에 짜릿하게 몸을 떨었다.
그들이 자신의 왕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직접 죽여주겠다고 생각하며 샨은 나머지 칼을 들어올렸다.
옆구리의 통증은 이미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범람하는 군사들 앞에서 샨은 칼을 들어올렸다.
당장이라도 첨예하게 부딪치는 긴장감이 끓어올랐다.
샨이 가장 가까이에 있던 군사의 다리를 베어버리는 것과 동시에 비로소 거대한 군대가 멈췄다.
익숙한 피 냄새와 함께 말 위에서 떨어진 군사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샨은 그를 무시한 채 속도를 늦추기 위해 천천히 원을 그리는 말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자신을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주군?”
마침내 샨을 알아본 그들이 서둘러 말에서 내렸다.
감히 왕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말에서 내려오는 인간들로 사방이 가득 찼고, 심지어 아까 샨이 다리를 베어버린 인간마저 끙끙거리며 서둘러 엎드렸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는 인간도 없었다.
왕의 허락 없이는 말할 수도 없는 자들이었으니까.
샨은 심술궂은 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은 여전히 그들의 신이다.
자신이 인간임을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이자들은 얼마나 걸릴까? 투이나.’
그녀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자기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인영이 어쩐지 안타까운 듯, 서글픈 듯한 표정을 짓기만 할 뿐이다.
그는 투이나가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속삭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왜 알면서도 위험한 길을 택하느냐고 질책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부질없이 가슴에 파고드는 통증을 샨이 거칠게 잡아 뜯었다.
‘상관없다.’
샨은 사납게 투이나의 기억을 질겅질겅 씹었다.
더 이상 나올 게 없어도 끈질기게 제 안으로 집어넣었다.
당신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고 투이나가 붙잡아 주었더라면, 그는 남았을 것이다.
반드시 남았을 것이다.
샨은 턱이 부서져라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일어나지 않을 일로 치기를 부리기엔 자신의 열망이 도무지 사그라들지 않았다.
나는 다시 왕이 될 테다.
샨은 아무 곳도 다치지 않은 것처럼 날렵하게 등자에 발을 올렸다. 어색한 동작도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고 위풍당당하게 샨이 명령했다.
“모하세스로 돌아간다.”
그러자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