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나는 당신을 사랑하러 가겠습니다. 그것이 내가 왔던 길이기에.
목표를 찾으니 행동하는 건 쉬웠다.
투이나는 조금 바보처럼 보였지만 제 몸에다 대고 소리쳤다.
“다들 잠깐만요!”
말 안 듣는 영혼들은 계속 웅성거렸다. 투이나는 이리저리 메아리치는 잡소리들을 하나로 모았다.
“만약 제가 수호신이 된다면 여러분이 대답해줘야 할 게 있어요!”
“그런 건 상관없잖아.”
“저 수호신이 되지 말까요?”
영혼들의 소리가 멈칫했다. 투이나는 일부러 능청맞은 표정을 유지했다.
‘와, 내가 살면서 이런 협박을 해볼 줄이야!’
영혼들은 너무도 쉽게 초조해했다.
“그건 안 되는데….”
“우린 쉬고 싶어.”
“아르힘이 오기 전에 죽어주면 안 될까?”
“그러니까 그 전에 대답을 해주세요.”
투이나가 단호하게 밀어붙였다.
“왜 아르힘 님을 두려워하는 거예요? 왜 저를 수호신으로 택한 거죠?”
“그건 당연한 거야.”
“우리가 결정한 게 아닌 걸.”
영혼들이 잠시 조용해져서 잔잔한 물소리만 들려왔다.
곧이어 하나둘씩 목소리가 떠올랐다.
“우리는 영혼의 세계에서 강제로 끌려나온 영혼들이야.”
“영혼은 육체 없이 버틸 수 없어. 그래서 살아있는 생명에 자꾸 달라붙게 되지.”
“하지만 우린 수호신도 마법사도 아니야.”
“힘이 약해서 정말로 살아있는 영혼이 있는 육체에는 들어갈 수 없지.”
“그렇지만 우리도 사라지고 싶지 않으니까 갓 죽은 시체 같은 데 자꾸 들어가는 거야.”
투이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반…!”
신전에서는 죽은 자를 염하는 일도 겸하기 때문에 시체를 볼 일이 많았다.
죽은 사람들은 커다란 자주색 반점이 몸에 나타나곤 했는데, 그걸 시반이라고 불렀다.
사제들이 한 때 시반이 얼룩병과 무슨 관련이 있지 않을까 연구한 적이 있었지만, 결국 얼룩병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그게 결국 얼룩병이었다는 거죠!”
“시체를 움직여 보려던 흔적이지.”
“실패한 흔적.”
“그나마 동물은 성공하기 쉬운데. 움직이는 방법이 헷갈려.”
투이나는 갑자기 맥박이 빨라졌다.
“예전에 샨의 거처에서 산양이 살아났던 것도 당신들 짓이구요!”
“맞아.”
그들이 태연하게 인정했다. 그때 놀랐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놀랍도록 태평했다.
어안이 벙벙해진 투이나가 캐물었다.
“대체 왜 그때 산양에게 들어간 거예요?”
“우린 원래 어디나 들어가.”
“아까 말했잖아. 영혼은 육체 없이 살 수 없다고.”
“하지만 전에는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는걸요?”
시체가 움직이는 일이 또 있었으면 소문이 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적어도 신전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었을 거다.
영혼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그거야 아르힘이 수도에서는 도축을 금지했으니까.”
“게다가 아르힘에선 바로 시체를 태우잖아.”
“신전은 발이 빨라.”
“…잠시만요. 수도에서만 아르힘 님이 금지했다구요?”
투이나의 머릿속이 어지럽게 돌았다.
‘왜 하필 수도에서만?’
아르힘이 얼룩병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크게 놀랍진 않았다.
수호신이 가장 영혼을 잘 알 테니까.
하지만 수도로 한정지어놓은 아르힘의 지시는 몹시 마음에 걸렸다.
‘……얼룩병자들은 어떻게 병에 걸리지?’
갑자기 투이나가 머리를 헤집었다.
‘지금까지 다른 지역에서 얼룩병자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나?’
오직 아르힘에서만 걸리는 병.
투이나가 숨을 들이켰다.
얼룩 병은 만져서는 옮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와 가까운 자들은, 직접 얼룩을 떼어 가져가다가 병에 걸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얼룩은 영혼이며, 영혼은 육체이며,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어. 이 병은 죽은 영혼이 육체에 머무르는 방법.’
투이나가 정신없이 파고들던 생각의 끄트머리를 간신히 잡아냈다.
“……라카인.”
“응?”
“라카인이 병에 걸렸던 순간을 알았어요.”
투이나가 넋이 나간 소리로 중얼거렸다.
“라카인이 나를 사랑하게 된 순간 병이 옮아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다른 때는 움직이지 못하던 영혼이 다른 육체로 옮겨 탈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할 수 없었다.
“예전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었죠.”
그때 어떤 목소리가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
소스라치게 놀란 투이나가 고개를 홱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성소에는 자신뿐이었다.
하지만 투이나는 어느 때보다도 격렬하게 동요했다.
‘이 목소리, 누구인지 알고 있어.’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투이나가 간신히 몇 번 더 숨을 들이쉬었다.
“……베인?”
다른 영혼들이 모두 조용해졌다. 투이나는 몸에 있는 피가 모두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정말 당신이에요?”
“……네. 그렇습니다.”
흐리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귀에 익어서 투이나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다시는 베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어…떻게, 당신이…….”
“…….”
베인의 목소리는 가까운 듯 먼 듯 아련하게 울렸다.
“제가 당신에게 진실을 보여드릴 수 있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믿어요.”
투이나가 곧장 대답했다. 베인은 영혼의 상태로도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미 당신을 속인 자를 그렇게 쉽게 용서하신다는 겁니까?”
“베인.”
“저는 당신을 가두고, 다치게 하고, 배신했습니다!”
베인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투이나 또한 그와 있었던 일이 떠올라 가슴이 저려왔다.
얼마나 많이 그 시간을 바꿀 수 있었다면 하고 후회했던가.
베인조차도 통렬하게 후회를 뿜어내고 있었다.
“어쩌면 당신을 또 배신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런 꼴이 되었더라도, 나는 여전히 당신을 원해서…!”
“베인.”
투이나는 꽉 막힌 목으로 다시 속삭였다.
“괜찮아요.”
“……!”
떨리던 베인의 숨이 마치 정말로 피부에 느껴지는 듯했다. 온몸의 감각이 곤두선 기분이다.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만나게 되었을까. 이런 꼴로.
투이나는 무겁게 매달린 눈물을 떨어트렸다.
“날 도와주고 싶어서 왔잖아요.”
“…….”
“그것만으로도 기뻐요. 당신이 그 시간을 후회해줘서…….”
잠시 울컥해서 말을 멈췄던 투이나가 이윽고 희게 웃었다.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잖아요.”
담담히 속죄를 이야기하는 투이나의 목소리에 베인이 어떤 표정을 하고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는 결코 알 수 없으리라.
그러나 마침내 흘러나온 목소리는 일부나마 그를 짐작하게 했다.
“결코 달가운 진실은 아닐 겁니다.”
고통에 젖은 목소리로 베인이 힘겹게 털어놓았다.
* * *
덜컹덜컹.
마차 바퀴가 튀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베인은 문득 자신을 알아차렸다.
베인 크로퍼드. 나이는 열다섯.
‘그런데 왜 여기에 나와 있더라?’
“도련님! 곧 아르피기아에 도착합니다!”
말 부리는 칸에 앉아 있던 부부야가 소리쳤다. 부부야는 전쟁터에서 도망쳐 나온 자신을 받아준 크로퍼드 상단을 좋아했다.
그래서 가족들 몰래 혼자 빠져나와 아르피기아에 데려가 달라는 베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내가 왜 아르피기아에 가려고 했지?’
머릿속이 멍했다.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가족들 모두가 아르힘에 있었다.
‘나는 아르힘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몽롱한 베인의 정신은 부드러운 목소리에 눌렸다.
곧 아르힘으로 돌아가게 될 거다. 그러니 쉬고 있거라.
베인은 명령에 순응했다. 몸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도 움직이는 게 편안했다.
잠시 후 아르피기아의 신전 앞에서 멈춘 마차에서 베인이 내렸다.
아르피기아의 축복을 받기 위해 신전 앞은 언제나 시끌벅적했다.
그러나 마차에서 내린 베인을 본 순간 모두가 잠깐의 탄성과 함께 숨을 죽였다.
어린 나이에도 고결한 소년의 모습은 주변을 단숨에 사로잡았던 것이다.
고혹적인 얼굴을 한 소년은 흐뭇하게 그를 바라보는 마부에게 베인의 말투로 말했다.
“금방 다녀올게요, 부부야. 잠시만 기다려줘요.”
“예! 도련님!”
시원하게 대답한 그를 남겨두고 베인은 아르피기아의 신전으로 들어갔다.
금화를 쓸어 담고 건성으로 축복을 뿌리는 아르피기아의 제사장은 금세 발견할 수 있었다.
“응? 뭐냐! 축복을 받으러 왔으면 줄을….”
베인을 발견한 제사장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베인의 미모 때문이 아니었다.
쿠당탕 소리를 낸 제사장이 허겁지겁 일어났다.
“아, 아르힘!”
“꽤 눈이 좋아졌구나, 피기아.”
베인의 몸을 빌린 아르힘이 사륵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제사장은 몹시 당황하며 뒤로 물러났다.
“남의 아이를 데리고 지금 무엇 하는 짓이냐! 감히 그 꼴로 내 신전에 들어오다니!”
제사장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점점 새된 여자 목소리로 변해갔다.
제사장의 얼굴에는 영 어울리지 않았으나 신의 힘을 쓸 때마다 아르피기아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르힘은 눈에 띄게 힘을 끌어 모으는 아르피기아 앞에서도 담담했다.
“없애고 싶은 죄가 하나 있어서 말이다.”
“!”
제사장의 표정이 변했다. 아르힘의 말은 죄인들이 죄를 걸고 벌이는 신의 도박을 요청하는 문구였다.
미심쩍게 아르힘을 훑어보던 아르피기아의 제사장이 소리쳤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수호신의 몸으로 남의 나라에 들어오고도 무사할 줄 알아?”
“우리에게 달리 뭐가 필요하겠어.”
아르힘은 짐짓 권태로운 사람처럼 제 손톱을 들여다보았다.
“모자란 제사장 때문에 네겐 아직 영혼이 많이 부족할 텐데? 나도 그렇고.”
“어, 어떻게 할까요, 아르피기아님?”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제사장은 다시 제 원래 말투로 돌아와 말했다.
잠깐 고민하던 아르피기아의 목소리가 다시 그의 목을 통과했다.
“…흥. 웃기는 소리. 너처럼 탐욕스럽게 영혼을 긁어간 수호신도 없는데 누굴 속이려고? 딱 한 가지, 그렇게 오래 산 재주만 인정해주겠어.”
아르힘이 빙긋 웃었다.
“그래서, 안 할 텐가?”
아르피기아가 침묵했다.
아르힘의 말대로 제사장이 제물에 너무 욕심을 부린 나머지 신도들이 많이 떨어져나간 상태였다.
가뜩이나 자신의 방법으로는 신도들을 많이 모으기 어려워 정말 전쟁이라도 치러야 하나 고민하던 때였다.
그러던 차에 다른 수호신에게서 영혼을 받을 수 있다면 엄청난 이득이었다.
게다가 아르힘은 어떤 수호신보다 오래 산 수호신이니까.
고민하던 아르피기아가 냉큼 말했다.
“……영혼 받고, 네가 만들어낸 치유 사제들도 줘. 사제들은 너의 내기를 받아주는 보증금으로 해. 한 번 할 때마다, 열 명씩.”
아르피기아가 탐욕스럽게 조건을 올렸다.
말도 안 되는 조건에 제사장은 자기 입으로 신의 음성을 전하면서도 파랗게 질려갔다.
그러나 아르힘은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 * *
두 수호신의 도박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이미 알려져 있다.
베인의 이야기에 투이나는 유리로 된 공이 머리에 부딪쳐 깨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날카롭게 조각난 말들이 뇌리로 파고들었다.
“……아르힘 님이 당신의 몸을 빌려서 아르피기아를 멸망시켰다구요?”
“…….”
“당신의 고향을… 자기 손으로…?”
제발 부정해달라는 듯한 간청에도 베인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투이나는 차마 더 묻는 것조차 베인에게 모욕이 될 것 같아 간신히 충격을 삼켰다.
그러나 지금 베인의 영혼은 투이나와 똑같이 처절한 배신감이라는 육체를 공유했다.
“내기에서 패배한 아르피기아가 사라지는 모습과 사람들이 죽는 걸 직접 보면서도 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베인은 되도록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과거를 상기할수록 자꾸만 기억이 되살아나 버티기 어려운 듯 했다.
“아르힘은 홀로 아르피기아를 걸어 나오면서… 하다못해 제 부탁으로 그곳에 간 부부야조차 구해주지 않고 강에 빠져 죽는 모든 신도들의 영혼을 거둬들였습니다.”
수호신이 사라진다고 모든 신도가 죽는 건 아니었다.
나라는 망해도 도망칠 기회가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아르힘이 벌인 학살이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투이나는 추락하기 직전에 바닥을 목격한 사람처럼 심장이 떨리며 숨이 턱 막혔다.
“대체 왜…….”
“아르힘의 힘은 정신 조종입니다.”
베인은 고통스럽게 털어놓았다.
“그러니 얼마나 쉽게 강대한 수호신이 될 수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으시겠죠.”
“맙소사….”
투이나는 아연해졌다.
왜 아무도 그를 보지 못하고 기절했는가.
투이나만 아르힘의 현신을 볼 수 있도록 태어난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아르힘의 선택이었을 뿐이다.
‘내가 너만을 사랑한다는 걸 모르겠느냐?’
아르힘의 말이 다시 떠오른 투이나가 휘청거렸다. 머리가 아찔했다.
“일부러… 그랬다니. 지금까지 그 모든 게 다 속임수였다니…….”
“모두가 속았습니다.”
베인이 비통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물며 저조차도 아르힘을 다시 몸에 받아들인 뒤에야 간신히 기억해냈을 정도니까요.”
투이나가 입을 틀어막았다.
레오나는 베인이 병이 나은 뒤 기억을 잃었다고 말했다.
그 후로 베인과 그의 가족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아르힘에 감사하며 개종했다.
투이나는 진실을 깨달았을 때 베인이 얼마나 절망했을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제가 어리석은 탓입니다.”
“베인,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아니오. 루가님. 당신은 아직 모르십니다.”
베인의 말투가 격해졌다.
“기억을 잃었더라도 때때로 아르힘의 영향에서 벗어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때 저지른 죄를 직면하기 두려워 일부러 기억해내지 않으려했습니다.”
베인은 괴로워했다.
아무리 조종당했다고 한들 벗겨낼 수 없는 현장의 끔찍함이 있었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반드시 막았어야 하는 일을. 왜 제정신이 아니어서 보고만 있던 걸까?
그걸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베인이 절망적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스스로를 거부할수록 아르힘은 더 많이 저를 장악했고, 이내 자신과 아르힘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투이나는 순간 섬찟해졌다.
‘샨과 똑같아.’
처음에 샨을 아르파와 다를 바가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투이나 때문에 샨이 아르파와 다른 선택을 하게 되자 비로소 둘은 분리되었다.
거의 자해에 가까울 정도로 서로를 공격하며 장악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들이 제물로 사용하는 것이 피였기에 벌어졌던 사건들을 떠올린 투이나는 베인의 정신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으리라 짐작했다.
‘베인에게서 느껴졌던 이상한 집착이 전부….’
그제야 과거의 기억과 한참 다르게 변해버린 베인이 이해가 갔다.
“지금까지 만난 베인은 베인이 아니었다니….”
“온전한 상태로 당신과 다시 대화하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베인의 목소리가 점점 잠겼다.
“투이나, 나는…. 아르힘과 만나기 전의 기억만을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을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 있던 시절을 되풀이하기만 했습니다.”
투이나가 볼 수만 있었더라면 베인의 눈은 눈물로 젖어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보았던 얼굴 없는 그의 모습처럼, 베인의 목소리는 절박하고 절실하기에도 버거웠다.
“그러나 당신은 아르힘에게 장악당한 나를 다시 만났고, 나 또한 베인이 지은 죄를 더는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베인이 지은 죄라니요…?”
투이나는 지금까지 뇌리에다 대고 직접 속삭이는 영혼이 베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당신은 베인이잖아요?”
베인은 그런 짐작을 부정하는 대신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속삭였다.
“…나는 보다 어린 시절, 베인이 당신에게 준 마음이자 영혼입니다.”
베인이 작게 답했다.
“나의 병이자… 당신의 병이지요.”
투이나는 단숨에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했다. 누군가는 풋사랑이라고 쉽게 말하겠지만, 그만큼 주저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죽은 자의 영혼이 몸에 흔적을 남긴다면, 살아있는 사람의 영혼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영혼을 쪼개어 넘겨줄 수 있을까?
투이나는 이미 그게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수호신이 살아가는 방식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모든 신도들에게서 조금씩 받아낸 믿음, 즉 영혼의 일부가 준 힘 덕분에 그들은 육체를 잃고도 살아남았다.
복제된 자신도 그렇기에 살아 있었다.
투이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우리 둘 다 얼룩병에 걸려 있었기에 몰랐던 거예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엔 너무 많은 영혼이 함께 있었으니까!”
“아르힘도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 영혼을 교환할 수 있을 줄은 몰랐을 겁니다. 나중에서야 그걸 알아차리고는 이 결혼을 준비한 거죠.”
“하지만 그게 왜 필요한 거죠? 그러지 않아도 이미 강한 신이잖아요.”
“아마도 아르힘의 목표는 영혼의 세계일 겁니다.”
베인은 가냘프게 말했다.
“당신의 몸으로 옮겨온 영혼이지만, 베인이 여전히 살아있기에 저는 그와 함께 모든 일들을 겪었습니다.”
“…….”
“가장 끔찍한 건…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빌미로 아르힘이 하는 일을 방치했다는 겁니다.”
베인이 조금만 의심했더라면 아무리 기억을 지웠더라도 분명히 아르힘의 존재를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투이나의 애정은 베인의 눈을 감게 만들었다.
아르힘이 지시하는 대로 말하고, 아르힘이 가리키는 대로 바라면 투이나가 옆에 있어주었으니까.
투이나를 사랑하는 그가 자신이라 믿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서도 여전히 자신은 투이나를 사랑할 수 있다고, 자신이 선택한 일이라고.
하지만 그건 모두 기만이었다.
“다 잃은 주제에 그렇게라도 애정을 얻으려 했던 자신이 끔찍하고 경멸스럽습니다! 루가 님, 저는…!”
“베인.”
점점 격해지는 베인의 말투에 투이나가 울컥했다.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자 베인이 흐느끼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모든 일이 비틀려가는 와중에도 제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아십니까? 당신과 끝끝내 헤어지고… 이럴 거라면 아르힘을 믿는 게 아니었다고 후회했을 때….”
그 때 아르힘은 강제로 베인의 몸에 들어갔다.
투이나가 너를 저버릴지라도 아르힘을 저버리는 일은 없을 거라면서.
“그래서 나는 비참하게도 다시 그를 들여놓았습니다.”
베인의 고통이 절절하게 전해져와 투이나는 아프게 헐떡였다. 후회가 사람의 목을 매단다면 이럴까.
베인은 푸르게 목이 졸려가듯 말했다.
“저는 나약한 인간입니다. 당신에게 이렇게 겨우 말할 수 있는 것도… 당신이 수호신이 된다면 드디어 아르힘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베인이 처참하게 파헤쳐진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더는 감출 수가 없었다.
베인이 고해하듯 스스로를 계속 뜯어냈다.
“그렇게 계속 잘못을 반복하다가, 또 후회하고 그러다 다시 사랑하고 결국 스스로를 증오하는 것 말고는 택할 길이 없었던 저를….”
사무치는 감정에 베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죽여주십시오.”
투이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어떤 연민과 동정으로 그를 구할 수 있을까. 다른 영혼들의 호소보다도 베인의 말이 가장 크고 아팠다.
얼룩지고 더럽혀진 그의 삶은 투이나에게서 겨우 한 끗만 빗나가 있었을 뿐이다.
만약 아르힘이 투이나 대신 베인을 선택했더라면.
지금 고통 받는 사람은 자신이었을 것이다.
저릿하게 올라오는 통증은 시간이 지나도 멈추는 일이 없이 더욱 거세지기만 했다.
‘내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투이나는 차갑게 몸을 덮는 진흙 같은 절망 속에서 유일하게 뜨거운 사람을 떠올렸다.
“알겠어요.”
투이나의 승낙에 베인은 슬퍼했지만 비로소 감정을 억누를 수 있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루가 님.”
투이나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대신 다른 영혼들이 투이나의 선택에 기뻐 날뛰었다.
“죽으려는 거구나!”
“죽이려는 거구나!”
“잘됐어, 정말 잘 됐어!”
투이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시끄러워지는 영혼들을 아릿하게 인지했다.
‘라카인.’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수호신이 되지 않기엔 세상에 고통 받는 자가 너무 많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살할 거야?”
“칼로? 밧줄로?”
“아무것도 없잖아. 바보야.”
“익사해! 물에 빠지면 돼!”
영혼들이 떠드는 소리는 기껏해야 여섯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투이나의 몸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얼룩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때까지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숨죽여 투이나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를 믿고 있었다.
모든 얼룩들이 각자의 영혼이라는 걸 깨달은 뒤로, 투이나는 그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힘을 주었는지 비로소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영혼은 언제나 타인과 함께였다.
그것을 수호신이라 부르며, 인간의 몸을 빠져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면.
‘당신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카인이 고백해주었다. 그 말에 깊이 위로받았지만.
‘역시 사랑하지 않고서는 당신을 만나러 갈 수 없어요.’
투이나의 가슴 속이 열이 번지듯이 뜨거워졌다.
“나는 죽지 않아요.”
“……뭐?”
당황한 영혼들이 술렁였다.
“죽지 않으면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려고?”
“수호신이 되지 않을 거야?”
“아르힘이 널 풀어줄 거라 생각해?”
“아뇨.”
투이나의 눈동자가 불타올랐다.
“살아 있는 채로 수호신이 되겠어요.”
점점 모든 일이 분명해졌다. 온몸이 기운차게 깨어나는 것 같았다.
“그건, 그건 불가능해.”
“수호신이 되지 않으면 영혼의 힘을 쓸 수 없어!”
“우리를 버리고 마법사라도 되겠다는 거야?”
“영혼의 세계에서 힘을 끌어온다면 마법사겠지만.”
투이나는 믿음이 자신을 이끄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웅성거리며, 불안해하며, 그래도 나아가고 싶어 하는 영혼들이야말로 힘이었다.
‘왜 진작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투이나는 터질 것처럼 가슴이 부풀었다.
“제게는 이미 여러분이 있잖아요.”
투이나는 성소 바닥을 향해 두 팔을 힘껏 찔러 넣었다.
처음부터 그녀를 거부한 적이 없었다는 듯 차가운 물이 그녀를 삼켰다.
‘왜 소금인지 이제야 알겠어.’
투이나는 영혼들이 끊임없이 속삭였던 말들과 꿈에서 보았던 상징을 떠올렸다.
‘우리는 슬퍼할 때야 비로소 사랑할 수 있는 거야.’
당신을 위해 아주 보잘 것 없는 눈물이라도 흘릴 때, 영혼이 열리고 서로를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영혼이 이미 길을 통해 갈 수 있다면.
육체가 통과하기 위해선 아주 약간의 마법만 있으면 된다.
“나는 영혼의 세계 대신, 지금 나와 함께 있는 당신이 준 힘으로 나가겠어요!”
깊은 물이 발끝까지 그녀의 몸을 삼켰다.
투이나는 믿었다.
그러자 그들도 믿음에 화답했다.
모든 영혼에 슬픔이 닿을 때.
소금기가 쓰라리게 얼룩을 어루만지자, 몸을 수놓는 수많은 영혼들이 같은 슬픔을 위해 힘을 빌려주었다.
눈부신 빛과 함께 투이나는 영혼의 길을 통과했다.
* * *
겨울이 되면 소금 호수는 조용해졌다.
매일 소금을 만드느라 바쁘던 일꾼들도 호수가 얼어서 잠시 일손을 놓고 쉬었기 때문이다.
실종 사건 때문에 다들 혼자 호수에 가길 꺼렸지만, 겨울에 언 호수는 꽤 볼 만했기에 사제 리안크사는 바람도 쐴 겸 잠깐 숙소를 나왔다.
“후우우. 추워라.”
그녀가 부르르 팔을 문지르며 입김을 내뿜었다. 호수에서 많은 겨울을 보내 보았지만 유독 이번 겨울이 더 춥게 느껴졌다.
“아르힘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가칠가칠한 털모자를 다시 꽉 눌러쓴 그녀는 문득 이상한 소리를 잡아냈다.
퉁. 투퉁.
“응?”
리안크사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무언가 느리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리안크사는 갑자기 으스스하게 소름이 돋았다. 밤은 고요했고 멀리서 새조차 울지 않았다.
그러나 퉁, 하는 소리와 함께 쩍 하는 파열음까지 들리자 정말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게 무슨 소리야?”
정말로 호수에 뭐가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루가가 다녀간 뒤로 더는 호수에서 사람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도 안심하고 여기까지 나왔건만.
두려움과 호기심이 생긴 리안크사는 조심조심 호숫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얼음 밑에 무언가 커다란 것이 위로 올라오려는 듯 쿵쿵거리고 있는 걸 발견했다.
리안크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끼, 끼아악! 괴물이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정작 비명을 지르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었는데 말이다.
머리맡에 아른거리던 그림자가 사라지자 울상이 된 투이나가 부글거리며 소리쳤다.
‘가지 마세요!’
얼음 밑에 갇힌 투이나가 답답함에 허우적거렸다.
천만다행으로 도망쳤던 사제는 한 무리의 일꾼을 데리고 다시 돌아왔다.
“여기 진짜 뭐가 있잖아!”
“사람 같은데?”
시끌시끌한 소리에 투이나가 속으로 기도를 천 번쯤 올렸다.
‘아, 세상에, 감사합니다!’
쾅!
곧 망치와 정을 동원해 머리 위의 얼음을 깨는 소리가 났다.
콰직 콰직 조각을 낸 끝에 간신히 투이나가 호수에서 빠져나왔다.
투이나를 구출한 사람들이 그녀를 알아본 건 조금 뒤였다.
“맙소사! 이건 루가 님이잖아!”
“뭐?”
얼음물에 푹 잠겨 있던 투이나는 오들거리며 턱을 딱딱 부딪치느라 제대로 말하지도 못했다.
“그, 그, 그, 고… 고….”
“일단 빨리 안으로 데려가 드려!”
“어서!”
투이나는 누군가 벗어준 외투를 생명줄처럼 꼭 붙잡았다. 호되게 내리치는 겨울바람에 정신이 다 어질어질했다.
‘진짜 죽는 줄 알았어.’
성소를 빠져나오는 길이 소금 호수로 연결되어 있을 줄이야.
숨을 쉴 때마다 찬 공기가 얼어붙은 폐를 깎아내듯 들어왔다.
그나마 투이나를 발견한 사제가 안절부절못하며 계속 기도를 퍼부었기에 동상이나 심각한 폐병에 걸리는 건 피할 수 있었다.
숙소에 피워놓은 거대한 모닥불 앞으로 끌려간 투이나는 덜덜 떨며 열기를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그동안 사람들이 몰려와 웅성거렸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호수 바닥에 갇혀계셨다니…. 호수가 언 지 벌써 며칠짼데 그게 말이 돼?”
“하지만 지금 루가 님을 거기서 꺼내왔다잖아!”
혼란에 빠진 사람들이 마구 속삭여댔다.
투이나는 코를 훌쩍이며 최대한 빨리 기력을 되찾으려고 애썼다.
“괜찮으세요?”
“말씀하실 수 있겠어요?”
“저, 저, 전 괜찮아요.”
에취! 하고 요란하게 말끝에 재채기를 붙이자 사제가 얼른 다시 기도를 해 주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아르힘의 힘에서 뿜어져 나온 빛을 본 투이나가 서둘러 입을 떼었다.
“호, 혹시 여기 호루니가 아직 있나요?”
“누구요?”
“제 호위요. 키가 크고, 머리가….”
투이나가 열심히 설명하려던 순간, 쿵쿵쿵. 발소리 하나가 다급하게 가까워졌다.
소식을 듣자마자 쏜살같이 달려온 호루니였다.
“루가 님이 여기 계신다고요?”
“호루니!”
투이나가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어리둥절하게 있던 호루니는 물에 빠진 생쥐 같은 투이나의 몰골에 기겁했다.
“루가 님! 어, 어떻게 여기 계세요?”
“만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혹시라도 길이 엇갈렸을까봐…!”
허둥지둥 일어나던 투이나가 비틀거리자 호루니가 후다닥 달려갔다.
아직도 축축한 투이나를 본 호루니는 당황하면서도 서둘러 옷을 벗어 투이나를 감쌌다.
“어쩌다 이런 모습이 되신 거예요? 라카인은요?”
“말하자면 길어요, 하하.”
호루니를 보자 너무도 안심한 나머지 긴장이 풀린 투이나가 바보처럼 웃었다.
“지금 여기 계시면 안 돼요. 몸이 다 씻겨나가셔서 얼룩이….”
“그것보다 호루니, 아직 시드룬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죠?”
“네?”
얼떨떨하게 호루니가 되물었다. 그러나 마음이 다급했던 투이나는 설명을 다 잘라먹었다.
“그게 필요해요. 당장요.”
호루니는 투이나가 두 번 부탁하게 만들지 않았다.
“비켜 주세요!”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서 안달을 내는 사람들을 호루니가 단호하게 뚫고 나왔다.
‘다행이야.’
투이나 일행이 마법사의 마을에서 갈라질 때 호루니에게는 가족들의 안부를 챙겨달라고 부탁했었다.
시드룬의 마법이 있는 만큼 이동은 쉬울 테니 말이다.
‘만약 가족들을 걱정하지 않았더라면 호루니가 여기 없었겠지.’
투이나는 안도했다. 운이 좋았지만, 그 운을 만들 기회조차 없었다고 생각하면 아찔했다.
“여기라면 안전해요, 루가 님.”
호루니가 서둘러 방문을 잠갔다. 투이나가 성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호루니. 이제 마법사의 마을로 가는 문을 열면 돼요.”
“신전이 아니라요?”
시드룬의 머리카락을 꺼내던 호루니가 당황해서 되물었다.
워낙 투이나가 다급해 보여서 신전에 무슨 큰일이 난 줄 알았던 것이다.
투이나가 고개를 흔들었다.
“마법사가 먼저예요.”
겨울 호수가 씻어 내려 청명해진 얼굴로 투이나가 말했다.
“이제부터 아르힘과 싸우러 갈 거라서요.”
“……예?”
툭. 경악한 호루니의 손에서 미끄러진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팔랑팔랑 아래로 떨어졌다.
* * *
투이나는 미쳤냐는 소리를 열 번쯤 듣고, 똑바로 설명하라는 윽박을 비슷한 횟수만큼 들은 다음에야 마법사들에게 상황을 전달할 수 있었다.
최대한 간추리고 간추린 설명이었지만 수리시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네가 뭘 빠져나오고 아르힘이 뭘 해?”
“다 들었잖아요, 수리시. 다시 설명할 시간 없어요.”
“하지만…!”
“전~~쟁이다!”
또랑또랑한 눈으로 듣고 있던 게누아가 참지 못하고 팔짝 뛰어올랐다.
“드디어 마법사의 손으로 신의 명줄을 끊어 버리는 역사적인 사건이 내 손에서 이뤄지는구나! 꺄하하!”
“가만있어봐! 정신 사나워!”
“뭘 망설이는 거야? 설마 겁먹은 건 아니겠지? 어머나~.”
“그 신은 사람을 조종한대잖아!”
모여 있던 마법사들이 웅성거렸다. 특히나 포보는 겨울철에 굶주린 곰이라도 마주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리시는 내내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쓰잘데기없는 공포까지 봐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마법 허투루 배웠어? 우리가 신한테 마법을 못 쓰는 것처럼 그 신도 우리 정신은 못 건드려. 수호신과 마법이 같은 영혼의 힘을 쓴다는 걸 방금 루가가 증명했잖아.”
“하, 하지만 그러면 더더욱 우리를 데려갈 이유가 없잖아.”
“여러분이 수호신을 직접 공격할 수는 없겠지만 제가 아르힘까지 가려면 분명히 다른 방해가 있을 거예요. 그걸 막아주세요.”
본격적인 전투가 발생하면 신전에 있는 사제들까지 아르힘의 편에 넘어간다고 봐야 했다.
그들도 아르힘이 침략당하지 않도록 지킨 요인 중 하나였으니까.
한순간에 적이 된 사제들을 생각해 보던 투이나가 침울해졌다.
“…지금도 아르힘은 구혼자들을 상대로 세 번째 시험을 치르고 있어요. 그게 무엇인진 몰라도 시드룬이 위험에 처해 있는 건 분명해요.”
“…….”
마법사들은 영 마뜩잖은 기색이었다. 하지만 이미 투이나에게 선수금까지 받았으니.
수리시를 통해 미리 돈을 쓴 마법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전에는 아르힘을 구해달라더니 얘기가 완전히 다르잖아.”
“어려운가요?”
투이나는 가만히 되물었다.
투덜거렸던 마법사는 곧 입을 다물었다.
수호신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그들이었지만, 막상 싸우려니 주저하는 기색이었다.
“난 가겠어.”
그때 레이벡이 불쑥 선수를 쳤다. 그는 지금도 투이나가 전해 주었던 성물 상자를 등에 지고 있었다.
“수호신도 마법사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네게는 빚이 있으니 도와주겠다.”
“레이벡…….”
감격한 투이나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걸 보고 있던 수리시가 결국 허리를 짚었다.
“밥값 해라, 이것들아. 시드룬 죽으면 우리 다 거리에 나앉는 거야!”
“아, 그렇지.”
“그럼 싸워야지.”
그제야 마법사들이 엉덩이를 일으켰다.
마법사의 마을은 시드룬이 보호하고 있었으니 그가 죽으면 결국 마법사들이 위험해진다.
‘그래도 혼자 도망가지 않고 싸움을 결심하는 건 대단한 일이야.’
결정을 끝낸 마법사들이 단숨에 시끌벅적해졌다.
“바깥에 집합해!”
“시드룬 머리카락 남은 사람 있냐?”
“출발하기 전에 시드룬의 집에 들르면 돼. 청소를 안 해서 조금만 뒤져봐도 여기저기 흘려뒀을걸.”
“싸우러 가는 거니까 이번에는 수리시도 뭐라고 못할 거야.”
어떤 마법사는 키득거리며 나갔고, 또 어떤 마법사는 앞으로 있을 싸움을 생각하는지 무거운 표정이었다.
투이나는 그럼에도 함께 맞서주는 그들이 너무 고마웠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수리시가 투이나의 등을 툭 쳤다. 사실 여기서 가장 생각이 많을 자가 그녀였다.
“고마워요, 수리시. 당신이 없었으면 마법사들을 한데 모으는 것부터 어려웠을 거예요.”
“그건 일도 아냐.”
수리시가 픽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마법사들이 시끌시끌하게 싸움을 준비하는 걸 보자 다시 눈빛이 어두워졌다.
“시드룬, 괜찮겠지?”
“…그럼요. 그렇게 만들 거예요.”
“차라리 소심한 자식이었으면 덜 걱정했을 텐데, 겁도 없는 놈이라.”
투이나는 문득 수리시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차렸다.
“당신은 싸우러 가지 않아도 돼요, 수리시.”
“…….”
수리시의 마법은 강력했지만, 그렇기에 꺼려지는 마음도 이해가 됐다.
게다가 무엇보다 그녀는 힘없는 가족을 데리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싸우러 떠나는 지금, 이곳을 텅 비워둘 수는 없었다.
몇 번인가 사양해보려고 입술을 달싹이던 수리시가 결국 인정했다.
“……미안하다. 난 쟤네들이 돌아올 자리도 지켜야겠어.”
“그게 옳은걸요.”
투이나는 수리시를 안심시키고 바로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누군가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
“야, 너!”
그녀를 알아본 수리시가 눈을 홉떴다. 몰래 빠져나온 복제 투이나가 투이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투이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 자기도 싸우러 가겠다는 걸까?’
복제 투이나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계속 손짓했다.
묘한 느낌이 든 투이나가 창문으로 다가갔다. 호루니와 수리시가 자신의 등 뒤를 지키고 있어서 마음이 평온했다.
창문이 열리자 복제 투이나가 까치발을 들었다.
“아르힘에게 왜 아르힘의 수도를 그곳으로 정했는지 물어봐요.”
“네?”
뜬금없는 소리에 투이나가 되물었다. 복제 투이나는 몹시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소금 호수로 나왔을 때 나도 함께 봤어요.”
“!”
베인이 얘기했던 대로 같은 영혼은 사건을 함께 겪는 모양이었다.
‘그때 무언가 다른 게 있었나?’
투이나가 성소의 바닥을 통과할 때는 눈을 감고 있어서 주변을 보지 못했다.
게다가 설령 뭘 봤더라도 곧장 얼어붙은 호수로 이동하는 바람에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거기 뭐가 있었는데요?”
“당신이 빠져나올 때 누구의 힘을 빌렸는지 기억하면, 금방 알 거예요.”
복제 투이나가 투이나의 손을 꼭 잡았다. 투이나는 평범한 온기에 깜짝 놀랐다.
“조심해요, 투이나.”
“…고마워요.”
복제 투이나가 짧게 손등에 입 맞췄다.
“시드룬을 부탁해요.”
그녀는 재빨리 돌아 풀밭을 달려 나갔다.
투이나는 더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바깥에 모인 마법사들이 재촉하는 소리에 결국 돌아서고 말았다.
마법사들은 각자 시드룬의 마법을 사용했다.
아무래도 원래 마법의 주인이 아니어서 그런지 시드룬이 했던 것처럼 모두가 통과할 만큼 커다란 마법진을 만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투이나는 연보랏빛 마법진이 물안개처럼 겹쳐지는 걸 지켜보았다.
연달아 같은 자리에 열리는 마법진은 그 자체로 꽤 장관이었다.
“이 정도면 됐어요.”
신전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그들은 충분한 크기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마법진을 넘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정말로 예상치 못한 장면이었다.
“이게 뭐야?”
뒤에서 들려온 당황한 목소리만큼 투이나는 잠시 멍해졌다.
폭설이 신전을 뒤덮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놀란 건 눈이 아니라 사제 때문이었다.
종탑을 중심으로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사제들의 모습은 눈조차 쌓여있지 않아 더욱 기괴해보였다.
“사제님…?”
초점 없이 허공을 응시하는 사제들은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을 만큼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눈과 바람이 세차게 그들을 스치고 지나가 피부가 푸르게 질린 사제들은 마치 시체가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기이한 장면에 전투 의지를 불태우며 넘어왔던 마법사들조차 당황해 주춤했다.
“돌아왔구나.”
아리따운 목소리가 머리 위로 드리웠다. 투이나가 흠칫했다.
처음에는 눈 때문에 아르힘을 발견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눈에 들어오니 아르힘이 얼마나 여유로운 자세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지 똑똑히 보였다.
투이나의 속에서 순식간에 복잡한 감정이 한데 치고 올라왔다.
“구혼자들은 어디 있죠?”
“그들은 시험을 치르는 중이다.”
아르힘은 달라진 투이나의 태도에도 여전히 유유자적했다.
‘시험이라니.’
아르힘의 말과는 다르게 어느 곳에서도 구혼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종탑 아래가 유독 눈이 높게 쌓여있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설마!”
경악한 투이나가 앞으로 달려가려고 하자마자 굳어있던 사제들이 갑자기 움직였다.
“히익!”
“징그러!”
“루가 님! 위험해요!”
호루니가 급하게 투이나를 쫓아갔다.
그러나 사제들은 투이나의 앞길만 가로막았을 뿐, 여전히 고요한 표정이었다.
‘아르힘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거야.’
참담함에 눈앞이 핑 돌 정도였다. 이렇게 한꺼번에 사람이 휘둘리는 꼴이 끔찍했다.
“그들을 다 죽일 생각인가요!”
“아니다.”
아르힘은 앞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들이 진정 자격이 있다면, 이 시험을 치르고 일어날 것이다.”
스르릉.
갑자기 여기저기서 칼을 뽑는 소리가 났다.
사제들뿐만 아니라 무사제들과 시종들까지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 속에서 일어난 자들이 마법사들을 향해 무기를 세웠다.
“다들 정신 차려!”
마법사들이 뒤늦게 마법진을 만들어냈다.
투이나에게 공격적이지 않던 신전의 인원들이 한순간에 태세를 바꿨다.
“물러나지 마!”
“공격!”
순식간에 주변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급하게 여기저기서 마법진이 터져 나왔고 급한 김에 보잘 것 없는 무기라도 휘두르는 자가 많았다.
“이것들 마법이 안 통해!”
“신이 장악해서 그래! 정신 차려 봐라!”
마탄타가 마법으로 빼앗은 방패로 호되게 머리를 후려쳐댔다.
포보는 계속 히익거리면서도 공격궤도를 예측해 마법을 써가며 용케 사람들을 질식시켰다.
“카아악! 비켜!”
레이벡은 아예 통제하지 못하는 마법을 풀어 젖히고는 무사제들을 야수처럼 물어뜯고 다녔다.
그러나 분투하는 마법사들의 우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완전히 정신을 잃지만 않으면 사제들이 곧장 치유해 전장으로 복귀시켰던 것이다.
“아악! 또 왔어! 사기잖아!”
“젠장! 빨리 시드룬을 안 찾고 뭐해!”
시드룬만 찾아내면 단체로 도망치든 보내버리든 할 수 있었다.
하필 적에게 통하지 않는 마법을 가진 탓에 게누아는 꺅꺅거리면서 시드룬의 마법을 쓰고 적들을 걷어차 보내버리고 있었다.
전투 마법이 아니었던 다른 마법사들도 곧 게누아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빨리! 이것들 다 보내려면 끝도 없겠어!”
“루가!”
투이나는 전황을 살피는 것과 동시에 전투 중이었다.
사제들이 투이나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걸 이용해서 일부러 접근한 뒤, 그 방심한 틈을 타 호루니가 그들을 기절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도 처음 잠깐뿐이었다. 투이나가 하는 짓을 알아차린 사제들이 그녀를 붙잡으려고 손을 뻗어왔다.
다급히 몸을 빼낸 투이나는 모여드는 사제들을 숨 가쁘게 돌아보았다.
“호루니, 사제들을 맡아줘요!”
“루가 님은 어쩌시게요!”
호루니가 빠르게 창을 휘둘렀다.
한 때 같은 신전에서 지내던 자들이었지만 호루니는 이를 악물며 망설이지 않았다.
“전 구혼자들을 구할게요!”
호루니의 창이 투이나를 향해 다가오는 팔들을 쳐내자마자 투이나는 뛰기 시작했다.
‘왜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거지?’
차가운 눈이 걷어차일 때마다 사방으로 튀었다. 온통 눈이었다.
새하얗게 물든 세상은 눈을 멀게 만들 정도로 경계선을 없애버렸다.
저 언덕 어딘가에, 구혼자들이 파묻혀 있다. 투이나의 가슴이 아프도록 뛰었다.
‘더 시간을 끌면 죽고 말 거야. 하지만 대체 어떻게? 무슨 수로? 신의 힘으로도 샨과 시드룬의 정신까지 장악할 수는 없을 텐데…!’
“네가 모르는 게 하나 있구나.”
“!”
투이나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방금 전까지 새하얗던 세상이 순식간에 까맣게 변해 있었다.
온도와 색채가 사라진 세상은 꿈속에서 보았던 세계와 똑같았다.
“이게, 어떻게.”
투이나가 비틀거리자 다시 세상은 혹독한 겨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투이나의 정신은 아찔하게 비틀려있었다.
아르힘은 연민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살아있는 한 힘을 가진 영혼은 내가 건드릴 수 없다.”
투이나가 뒤늦게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발을 떼는 즉시 현실의 세계는 사라지고, 벌이 귓속에 파고든 것처럼 윙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영혼의 세계에서 들려오는 속삭임들이었다.
조근조근 들려오는 메아리.
“허나 사람은 살아있으면서도 죽음과 가까워질 때가 있다.”
“그만…! 제 마음을 읽지 마세요!”
“하지만 너의 기도는 언제나 내게 닿는구나.”
투이나가 절박하게 저항했지만 아르힘은 여전히 희미한 동정심을 보이기만 했다.
“너를 도와주려는 것이다, 투이나.”
차라리 아르힘이 그녀를 탓하고 미워했더라면 훨씬 대적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아르힘은 끝까지 투이나에게 애정을 감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꿈속의 일로 고통스러워한다. 일어나지 않은 일로 괴로워한다. 그들의 정신이 계속 영혼에게 죽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르힘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나는 너희들이 공포를 잊기를 바란다.”
아무도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다.
꿈속에서마저 누군가를 잃으면 비명을 지르게 된다.
삶을 꼭 잡고, 육체를 갖고, 가진 만큼 사랑하고 더 원하고, 욕망하면서 산다.
그러니 반대를 두려워할 수밖에.
투이나도 한때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두려움을 지워주고 싶었다.
수호신이 되어서라도.
“…당신이 연민하심을 믿습니다.”
아르힘이 더 없이 환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투이나와 똑같이 사람을 사랑하는 감정이 그 곳에 있었다.
“그러나 저는 두려움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투이나는 꼿꼿하게 머리를 치켜들었다.
“후회하고 끔찍해하는 일이 있더라도 살아서 겪는 고통보다 죽음이 앞설 수는 없습니다.”
아르힘은 그저 안타깝다는 눈빛이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곤 하지. 하지만 정말로 그걸 바라는 영혼은 없다.”
“아니요.”
투이나가 자꾸만 시야를 가리는 눈을 벅벅 문질렀다. 눈물이 얼음이 되어 스스로를 할퀴는 행위가 되더라도 앞을 보아야 했다.
“그 길을 택해준 사람이 있습니다.”
투이나는 아르힘처럼 죽음을 택한 사람들을 연민했다.
베인이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그녀의 몸에 갇힌 영혼들이 죽여 달라 부르짖는지 이해했다.
그들을 사랑하기에.
‘하지만 라카인이 고백해줬어.’
혼자 겪는 고통은 의미가 없다.
그가 함께 겪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다치는 것도 감수하며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둘 이상이 있어야 한다.
돌아가야 할 삶이 무엇인지 뒤돌아볼 존재가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영혼의 세계에서 길을 잃고 말 테니까.
“전 그를 믿어요.”
다시 삶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투이나는 신에 맞섰다.
아르힘은 오랫동안 투이나를 응시했다. 그녀가 개의치 않고 자기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다.
눈이 내린다.
아르힘은 가만히 사람들의 꿈으로 불러낸 영혼의 세계를 손끝으로 어루만져보았다.
신의 눈에는 지금 현실과 그들의 영혼이 헤매고 있는 세계까지 한 눈에 보였다.
언제나 둘 이상의 세계가 보였다.
문득 아르힘은 시험해 보고 싶어졌다.
“그렇다면 그 자만 죽는다면 너는 내게 돌아오겠구나.”
“!”
당황한 투이나가 입을 벌린 사이 아르힘은 거세게 내리는 눈으로 사람들을 덮었다.
* * *
아주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살갗에 닿은 눈 결정의 끄트머리를 느낄 수 있다.
그토록 차가운 것이 간질거리며 부드러울 수 있다는 사실은 기묘했다.
왜 스스로를 얼려버릴 걸 알면서도 다가가게 만드는 걸까?
느린 고통은 사람을 취해버리게 만들기 때문일까. 죽음이 결국 갈망으로 뒤바뀐다면.
움찔.
라카인이 속눈썹 위에 사각거리며 얹혀있던 눈을 떨어트렸다.
“……?”
힘겹게 눈을 뜨고서도 그는 한참동안이나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라카인은 자신을 덮은 희고 포근한 것을 멍하니 응시했다. 몸이 무거웠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 거지.’
분명 조금 전까지 열이 나도록 체온과 고통이 사무쳤던 걸 기억했다.
그러나 지금은 부러졌던 뼈도, 머리가 뜨거울 만큼 간절했던 대상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졸렸다.
추위는 편안했다. 라카인의 눈앞이 가물거렸다.
이대로 다시 눈을 감으면 꿈도 꾸지 않고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꿈….’
그랬다. 그는 꿈을 꾸고 있었다.
다른 구혼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추위가 강제로 불러온 잠은 쉽게 신이 기다리고 있는 꿈으로 그들을 인도했다.
눈과 추위에 저항하던 자들은 약속된 시험이라는 말에 무너졌다.
아르힘은 그들이 찾아야 할 보물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겠다고 말했다.
‘아르힘.’
그 이름을 떠올리니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그가 기억해야 할 사람이 있었다.
그가 찾아야 할….
“아이야.”
라카인은 몽롱한 상태로 작게 꿈틀거렸다. 누군가 그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라카인은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꿈이라서 볼 수 없는 빛인지, 눈에 반사된 희미한 빛인지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비스듬히 힘을 잃고 누워있는 채로 라카인은 골똘히 생각에 빠져들었다. 머릿속이 군데군데 비어있는 것처럼 멍했다.
“네가 잃어버린 걸 찾아주마.”
목소리는 다정하게 약속했다.
라카인은 자신을 어루만지는 따듯한 손끝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눈에 얼어버린 몸이 순식간에 녹아갔다.
신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라카인은 여전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좁은 머릿속을 벗어날 수 없었다.
보물을 찾기 전까진 이 곳에서 나갈 수 없다는 의지가 그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이미 답을 찾았다. 사람이 가진 가장 좁은 곳에 숨겨진 보물은 영혼이다. 그렇기에 상으로 너의 영혼을 돌려주겠다.”
목소리는 계속 속삭였다.
라카인은 목소리의 말이 옳게 들린다고 여겼다.
그는 영혼을 받기 위해 손바닥을 움직여보았다. 아주 조금 움직여지는 듯도 같았다.
환한 빛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자신이 무엇인지 떠올랐다.
‘나는 시험을 치를 자격조차 없다.’
구혼자가 되지도 못한 한낱 평범한 인간.
가치 없는 영혼의 주인.
그렇기에… 고귀한 존재는 그에게 영혼을 돌려줄 수 없다. 그가 갖고 있기엔 너무 비천한 영혼이니까.
“당신이 아니야.”
라카인이 잠긴 목으로 중얼거렸다. 목소리를 실망시켜야 한다는 사실이 슬펐다.
“미안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줄 것이 없습니다.”
“…….”
거부당한 목소리는 충격을 받았는지 한동안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너도….”
이윽고 선연히 떨리는 목소리가 강렬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너도 아르투이나가 되었구나.”
라카인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목소리가 풍기는 의미보다, 어리석게도 말 그대로의 뜻을 쫒기 바빴으니까.
‘투이나.’
다음 순간 그는 꿈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라카인은 갑자기 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눈의 무게와 추위와 고통을 한꺼번에 다시 깨달았다.
작게 신음한 그가 몸을 움직였다. 되돌아온 현실감각은 서릿발처럼 그의 온몸에 돋아났다.
“…루가 님.”
라카인은 잠깐 따끔거리다가 곧 무감각해진 살갗으로 눈을 헤쳤다.
심각한 동상의 전조였으나 아직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처지였다.
‘얼마나 잠들었던 거지?’
라카인은 몸이 아직 움직인다는 걸 확인했다.
용케 무기도 여전히 손에 쥐어져 있다. 그거면 루가 님을 충분히 찾으러 갈 수 있었다.
라카인은 빠르게 몽롱한 상태에서 벗어났다. 그가 뻣뻣하게 굳은 어깨를 당겼다.
멀지 않은 곳에 누군가가 소년과 대치하고 있는 게 보였다.
“…무엇을 위해… 이러는….”
“…차피… …실패했다.”
눈보라 때문에 그들의 말이 드문드문 들렸다. 이만큼 들을 수 있는 것도 라카인이니까 가능한 거였다.
그리고 라카인이 투이나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것도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저기 계신다.’
라카인이 한 걸음 움직였다. 그러자 놀랍게도 발밑의 눈이 전부 녹아버렸다.
발을 헛디딜 뻔한 라카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군가 그를 공격했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오랫동안 물의 증기를 쐬는 것처럼 라카인의 머리가 뿌옇게 흐려졌다 맑아지기를 반복했다.
이토록 새하얀 세상에서 왜 간간이 모든 것이 까맣게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언젠가 꿈속에서 보았던 세계라는 것도 인지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를 둘러싼 세계가 조금씩 끓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속삭이듯이.
조금씩 억눌려있던 피가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윽.”
그때, 바로 뒤쪽에서 털썩 털썩 하고 한꺼번에 눈이 떨어졌다.
“대체 어떤 놈이…….”
쏟아지는 눈 속에서 붉은 것이 얼핏 비쳤다.
샨보다 먼저 아르파가 반응했는지 새빨간 눈을 한 몸이 일어나고 있었다.
라카인은 자신이 아니라 아르파가 힘을 썼으리라 짐작하고 다시 투이나를 향해 움직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라카인이 걸을 때마다 눈이 녹아 사라졌다.
눈 속에서 다가오는 사람을 발견한 투이나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 또한 곧장 라카인을 알아보았다.
“오면 안 돼요!”
투이나가 비명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라카인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쿵!
곧장 종탑에 부딪친 라카인은 척추까지 흔들리는 고통에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일어나라.’
그러나 이미 만신창이였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라카인이 기력을 회복하려고 애쓰는 사이 소년은 사박거리는 소리를 내며 눈 위를 걸어왔다.
“…네가 아르파도 깨웠구나.”
무미건조하다 못해 경멸스럽기까지 한 어조였다.
‘아르힘이 나를 공격했다.’
라카인은 상황을 이해했다.
‘아르힘이 루가 님의 적이 되었구나.’
그와는 달리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아르파가 울부짖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아르힘!”
아르힘은 온몸에서 김을 뿜어내는 아르파를 서늘하게 무시했다. 아르힘은 계속 라카인에게 뇌까렸다.
“네가 방해가 되리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쓰고 버려질 하수인이었는데.”
아르힘은 가볍게 그를 짓밟았다.
“네가 감히 내 아이에게 손을 댔더냐?”
“아르히이임!”
아르파가 성난 짐승처럼 달려들었기에 아르힘은 살짝 물러났다.
그러나 샨의 손아귀는 놓치지 않고 그의 현신을 움켜쥐었다.
“감히 나를 농락했겠다!”
아르힘은 멱살이 잡혀 올려간 상태에서도 여전히 태연했다.
“내가 약속했던 건 변하지 않았다.”
“웃기지 마라! 영혼이고 뭐고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겠다!”
“안타깝군. 내가 지금 죽는다면 너 또한 죽음을 면치 못할 텐데.”
“뭐라?”
“이 자리에는 인간신이 있으니까.”
그때 라카인은 다급하게 자신을 끌어안고 일으켜 세우는 손길을 알아차렸다.
“정신 차려 봐요!”
투이나가 힘겹게 라카인의 상체를 껴안았다.
아르파의 손에 잡혀있던 아르힘은 그때까지 차갑던 눈동자가 믿기지 않을 만큼 갑작스레 표독스러운 얼굴로 뒤바뀌었다.
“나의 눈앞에서 그까짓 것을 치유하려고 내 힘을 앗아가느냐?”
억눌렀기에 더욱 격렬한 분노였다. 분노의 이유를 모르던 라카인은 잠시 후, 자신의 부상이 나아간다는 걸 알아차렸다.
‘…얼룩병이 나았나?’
본래라면 마법이든 신의 힘이든 통할 리가 없었다.
라카인은 복제된 투이나가 그를 치유했을 때도 여전히 몸에 얼룩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었다.
그렇다면 자신도 투이나처럼 얼룩병에 걸린 채… 마법과 신이 통하는 몸이 되었단 말인가?
아르힘이 딱 하나의 동작으로 자신을 붙잡고 있던 아르파를 쳐냈다.
“지금 저것을 죽여라.”
“내게 명령하지 마라.”
“네 몸의 주인만큼이라도 생각을 해봐라! 지금 저것이 너의 힘을 쓰는 게 느껴지지 않느냐?”
아르힘이 다그쳤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빛이 달라진 아르파가 돌연 목표를 바꿔 라카인에게 칼을 후려쳤다.
얼마 안 되는 피로 만들어낸 짧은 칼날이었으나, 그마저도 라카인에게 닿기 전에 도로 액체가 되어 떨어졌다.
“…….”
스스로도 놀란 라카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르파의 표정은 그보다 더 심하게 일그러졌다.
“설명해라.”
“네가 지배해야 할 영혼에 휘둘려놓고도 아직도 설명이 필요하나?”
아르힘이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내내 고고하던 그였으나 투이나가 라카인에게 간 이후로는 감정을 참을 수 없는 듯했다.
“네가 차지한 영혼이 거꾸로 인간에게 흘러 들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문을 열지도 못한 인간이 그걸 받아들인다고?”
“저 둘은 죽은 적이 있다.”
아르힘이 딱 부러지는 말투로 말했다. 어떤 반박의 여지도 받지 않겠다는 어조였다.
아르파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나 분명한 현상을 거짓이라 치부하기에는 아르파도 영혼의 흐름을 느끼고 있는 터였다.
“…그래서 저들이 저토록 더러운 영혼을 가지고 있는 거냐?”
“그래.”
“왜 네가 죽이지 않고?”
아르힘은 자신이야말로 그러지 못해 분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모르는 상태였다면 나의 힘이 미쳤겠으나 그들의 영혼이 깨달은 탓에 더는 내 힘으로 범접할 수가 없다.”
“하! 네놈이 그런 얄팍한 힘으로 지금까지 버틴 게 늘 신기했지.”
아르파는 슬슬 분노가 가라앉고 흥미가 돋는 표정이었다.
“거짓말입니다.”
그때 투이나가 외쳤다.
뒤쪽에서 끌어안은 투이나가 움직이는 느낌에 라카인은 본능적으로 그녀를 감쌌다.
“당신이 더럽다 말하는 그 영혼들은 죽지 않아도 살아있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게다가…!”
“그딴 건 상관없다.”
아르파가 성가신지 말을 잘랐다.
“이유가 무엇이든 감히 내 힘을 훔쳐 쓴 놈을 죽이기만 하면 되니까.”
라카인이 긴장했다.
어떤 이유에선지 아르파의 힘이 상쇄되어도, 샨의 육체는 신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강건했던 것이다.
거의 원상태로 회복된 몸을 다행으로 여기며 라카인이 검을 움켜쥐었다.
전투태세로 들어간 라카인이 같잖은지 아르파가 이를 드러냈다.
“이제는 네 몸으로 갈아탈 이유도 사라졌으니 마음껏 죽일 수 있겠군?”
라카인이 투이나를 붙잡고 벌떡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바닥이 푹 꺼졌다.
“?!”
당황한 라카인이 엉겁결에 투이나를 붙잡고 바닥으로 착지했다. 공중으로 연결된 마법진을 통과한 것이다.
“아자! 성공했습니다!”
“스카차!”
놀란 투이나가 소리쳤다.
불끈 주먹을 쥔 스카차가 눈 속에서 끄집어낸 시드룬을 어깨로 떠받치고 있었다.
간신히 잠에서 깼는지 시드룬은 잔뜩 눈이 달라붙은 채 눈을 깜박이고 있었습니다.
“…시험이 아직 안 끝났습니까?”
용케 마법진으로 두 사람을 옮겨놓은 시드룬이 눈을 털어냈다.
방금 전까지 앞에 서있던 아르파와 아르힘이 성난 표정으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무사했군요! 다행이에요!”
“루가 님,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투이나가 감격하든 말든 시드룬은 태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여전히 사제들과 싸우고 있는 마법사들을 발견했다.
“왜 저들이 이곳에 있는 겁니까?”
“아까 설명했잖습니까!”
말이 끊긴 스카차가 당황해서 쏘아붙였다.
그러나 시드룬은 비몽사몽한 상태여서 못 들었는지, 처음부터 그냥 투이나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는지 갑자기 위쪽으로 목을 꺾었다.
그때까지 그들을 방해하며 내리던 폭설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헉…!”
스카차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연보랏빛 번개가 하늘을 한 번 갈라놓자 모든 먹구름이 사라진 것 같았다.
실제로는 신전 위에 드리운 거대한 마법진이 하늘을 훑고 지나간 거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놀라운 위력이었다.
“이제 무슨 일인지 얘기할 수 있겠군요.”
“야! 시드룬!”
“저 놈 저기 있다!”
눈이 그치자마자 시드룬을 발견한 마법사들이 왁왁거리며 소리쳤다.
마법사들이 빨리 문 열라고 떠드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시드룬은 살짝 찌푸린 눈으로 그들을 돌아보았고, 그 틈을 타 투이나가 스카차에게 물었다.
“스카차, 아까 하려던 얘기가 뭐예요?”
라카인은 투이나가 대화에 집중할 수 있도록 주변을 경계했다.
마지막 장애물을 거꾸러트린 호루니가 여기로 달려오는 건 괜찮았고, 마법사들을 공격하던 사제들이 비틀거리는 것까지도 괜찮았으나, 수호신 둘이 움직이질 않는 건 이상했다.
당연하게도 라카인의 주의는 아르파 쪽으로 쏠렸다.
아르힘이 무어라 속삭일수록 험상궂은 아르파의 표정이 기이한 색으로 바뀌어갔다.
오싹오싹한 불길함이 무엇인지 감지하느라 라카인은 스카차의 말에 조금 늦게 반응하고 말았다.
“…밖에 아르파의 군대가 오고 있습니다!”
“네?”
그 순간 라카인의 시야에서 아르파가 사라졌다.
바짝 긴장하고 있던 라카인은 거의 본능적으로 움직여 투이나를 끌어당겼고, 그 때문에 다음 동작이 늦고 말았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치는 천둥처럼 나타난 아르파가 허공에서 피로 만든 작살을 내리찍었다.
푸욱.
빗나가지 않은 작살은 살을 가르고 근육을 찢는 끔찍한 소리를 냈다.
“…아, 아아아아악!”
비명은 호루니의 것이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작살에 찔린 스카차가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울컥 피를 뿜어내는 걸 보고도 정신이 멀쩡할 수가 없었다.
“스카차아!”
“쯧. 보내려면 조금 더 일찍 보낼 것이지.”
아르파가 혀를 차며 스카차의 몸에서 작살을 뽑아냈다. 무수한 피가 그를 따라 움직였다.
라카인은 그것을 허락할 수 없었다.
모하세스에서는 동료애를 배척했다.
전장에서 개인적인 감정은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작전 수행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군인에게는 감정도 사치였다. 그러니 전쟁터에서 마음껏 분노를 발산하는 권리는 오직 신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
그러나 라카인은 아르힘으로 왔다. 그리고 아무리 내켜하지 않더라도 함께 싸워온 자들이 생겼다.
그 시체를 밟고 피로써 모욕하는 것만큼은 용서할 수 없었다.
한때 신이 자신을 다루던 방식으로 남을 다루려는 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다.
피를 내달리는 분노가 뜨겁게 라카인의 머리를 잠식했다.
카앙!
눈앞이 붉게 물드는 듯한 증오심에 라카인이 휘두른 검을 아르파가 가볍게 받아냈다.
오만하게 가늘어졌던 눈이 완연한 비웃음으로 물들었다.
“하! 내 힘으로 나를 상대하려 하느냐?”
“…….”
라카인은 대꾸하지 않았다. 다음, 그 다음 공격을 퍼붓기 위해 온 정신이 쏠려 있었다.
상대가 자신보다 얼마나 강한지 판단할 겨를도 없었다.
그가 오랫동안 자신의 목숨을 관장했던 신이라는 사실도 상관없었다.
그는 사라져야 한다.
라카인은 한때 신을 믿었던 신도가 보낼 수 있는 가장 큰 모독을 아르파에게 바치려 했다.
“아…아아… 스카차! 제발 눈 떠 봐요!”
스카차는 대답 대신 거세게 헐떡이기만 했다.
무릎을 꿇은 투이나가 다급하게 스카차의 상처를 눌렀다.
그녀는 라카인을 낫게 했을 때처럼 힘을 사용하려고 해 보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무자비하게 뽑힌 상처는 그대로였다.
“낫질 않아요! 왜… 대체 왜!”
“그자는 얼룩병에 걸려있습니다.”
“하지만 라카인에겐…!”
분명히 라카인에겐 통했다고 시드룬에게 소리치려던 투이나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아르힘은 두 사람이 인간신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마법도 신의 힘도 통하게 되었다고.
그럼 자격이 없는 자는 이대로 죽어야 한단 말인가?
압도적인 절망감이 투이나를 휩쓸었다.
스카차와 똑같이 병에 걸린 채 신이 되지 못한 호루니가 울면서 그의 상처를 감싸는 게 보였다.
그렇다면 결국 그녀도 구해줄 수 없나?
투이나는 어지러운 머릿속으로 손안에서 빠져나가는 스카차의 생명을 붙잡으려고 애를 썼다.
이렇게 그들을 보내려고 사랑한 것이 아니다. 수호신의 힘을 얻으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둘 순 없어.’
아득히 떨어지던 구렁텅이에서 투이나는 필사적으로 기어올랐다.
“그렇게 둘 순 없어요.”
투이나가 이를 악물었다. 아르힘이 고개를 돌리는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아르힘의 손에 심장이 들려 있었다.
* * *
호루니는 누군가를 잃어본 경험이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모두 아르힘에 살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스카차가 죽어간다는 사실을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나 좀 똑바로 봐봐!”
호루니가 스카차의 머리를 돌려세웠다. 저항하는 힘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무서웠다.
“어떻게 너는… 이런 순간까지… 화를 내냐…….”
“말은 하지 말고! 제발…!”
호루니는 간절히 기도할 대상을 찾았으나 대체 누구에게 기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르힘은 그들을 저버렸다. 아르파는 논의할 가치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붙잡을 만 한 건.
“루가 님…!”
투이나는 밀랍처럼 굳어 있다가 호루니의 부름에 움직였다. 비인간적인 움직임이었으나 오히려 그래서 안심이 되었다.
그녀가 인간이 아니어야만 스카차를 구할 방법이 있을 테니까.
호루니의 볼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스, 스카차가….”
“……찾아올게요.”
호루니가 우는 소리에 투이나가 일어났다.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몰라도 어쨌든 다음 행동에 나선다는 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루가 님이 끅, 방법을 찾아주실 거야….”
스카차를 붙잡은 호루니가 흐느꼈다.
“죽지 말아 봐…!”
그러나 스카차는 이미 자신이 손 쓸 도리가 없다는 걸 몸에서부터 체감하고 있었다.
“…나 대신… 좀…부탁해.”
스카차는 자신이 남겨두고 가는 모든 것들을 뭉뚱그렸지만, 호루니라면 알아들을 거라 믿었다.
호루니의 팔이 파들거리며 떨렸다. 스카차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구에게 그 말을 전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았지만.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 난 못 해, 차라리… 차라리 내가 찔렸어야 하는데…. 난 너, 너만큼 간절한 사람도 없단 말이야!”
스카차는 화를 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럴 기운조차 없었다.
“너… 그 버릇 고쳐….”
“말하지 말라니까!”
스카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짜낼 수 있는 마지막 말이 말라가고 있었다.
“크로퍼드의…… 내기…에 루가 님이… 네 이름으로… 걸어둔 게 있어.”
“뭐?”
“……내가 왜… 늦었는데…. 멍청아.”
그러니까 그만 좀 포기해.
스카차는 자신이 유언 대신 욕설을 내뱉으며 죽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울다 말고 얼빠진 눈으로 바라보는 호루니의 표정을 보니, 이게 낫다 싶었다.
르나이, 미안해.
스카차는 멋대로 신전을 빠져나온 약혼자에게 결국 입맞춰주던 연인을 떠올렸다.
이윽고 그가 저항을 멈추었다.
“아아아아아!”
기어코 터져 나온 호루니의 날카로운 비명에 투이나의 걸음이 흔들렸다.
이미 부러질 듯이 휘청거리던 그녀는 아르힘이 피하지도, 다가서지도 않는 모습에 미칠 것 같았다.
‘신이시여.’
투이나는 아르힘의 손에 들린 심장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얌전히 손바닥에 놓인 심장은 아주 느리게 쿵, 하고 뛰었다.
‘시드룬의 심장이야.’
투이나는 아르힘이 뿌듯하게 차오르는 기쁨으로 투이나가 다가오는 걸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샨의 몸을 입은 아르파가 라카인과 싸워대고, 신과 대적하기 위해 불러온 마법사들은 시드룬의 주의를 빼앗았다.
그에게는 어차피 이 모든 일이 시험에 불과했다.
그러니 죽어가는 자들을 도와줄 이는 아무도 없다.
이미 날을 벼리고도 모자라 또다시 모루에 올라간 것처럼. 내리쳐질 망치에 대한 예감으로 투이나는 몸서리쳤다.
“…하지 마세요.”
아르힘은 입술 끝이 찢어져라 웃었다.
“이미 했구나.”
투이나는 절망적으로 아르힘의 손에서 심장이 빛을 내는 광경을 목격했다.
곧게 서 있던 시드룬이 갑자기 비틀거리는 것과 동시에 빛의 파동이 그들을 덮쳤다.
“야, 왜 그래?”
“시드…!”
당황한 마법사들의 목소리가 한 순간에 지워졌다. 투이나는 귀가 먹먹한 정적에 소리를 지를 뻔했다.
모든 마법사가 사라졌다.
마법사들을 상대하던 사제들은 공격할 대상이 사라지자 곧 힘을 잃고 털썩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용도를 잃어버린 육체들은 죽은 듯이 정신을 잃었다.
흡사 역병이 휩쓸고 간 듯한 광경이었다.
딱 한 사람, 유일하게 남은 마법사인 시드룬만이 바닥에 쓰러진 채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역시 이 정도로 큰 마법을 쓰면 무리가 오는군.”
아르힘은 가볍게 개미 다리를 떼어본 아이처럼 통통거리며 심장을 흔들었다.
투이나는 당장이라도 뛰어가 심장을 빼앗고 싶은 것을 참았다.
저건 시공간을 다루는 마법이다. 섣부른 행동은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아르힘은 그녀의 정신도 읽을 수 있었으니.
투이나는 애써 머리를 비웠다.
‘생각하지도, 움직이지도 마.’
자신이 아니라 아르힘을 흔들어놓아야 한다.
‘무엇으로?’
혹시라도 읽을 수 있는 상념이 남지 않도록 투이나가 곧장 내뱉었다.
“베인의 영혼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죠?”
“아직도 그가 내게 영향을 미쳤다고 믿느냐?”
아르힘은 그다지 동요하지 않았다.
“그 아이는 나의 신도다. 나를 대신해 너를 사랑하고, 네게 속삭이고 안아준 것이다.”
아르힘은 쉴 새 없이 투이나를 내리쳤다.
“감히 너에게 그럴 수 있어 베인은 내게 감사하고 있다.”
투이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신에게 죽여 달라고 외치던 베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한데, 저토록 선한 얼굴로 거짓을 말하다니.
모두가 자신을 위해 준다는 그 말에 속았다.
정말로 상대방을 위해주면서도 얼마든지 자신의 이익을 갈취할 수 있었는데.
절박한 사람들은 내어주는 것보다 받는다는 사실에 감격해 스스로를 전부 바쳐버렸다.
베인도 마찬가지일 테지.
“그럼 당신은?”
아르힘은 물끄러미 투이나를 올려다보았다. 투이나는 배신감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나를 사랑하는 당신은 왜 나를 죽여 수호신을 얻고자 했죠?”
“내가 너를 죽여야만 나와 동등해질 것이기 때문이란다.”
아르힘이 매끄럽게 답했다.
“너도 인간들을 보았다. 투이나. 그들에게 실망하기를 몇 번이더냐? 그들에게 고통 받기를 몇 번이더냐?”
몹시도 안타까운 목소리였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더 깊은 상처를 주었더냐?”
감히 그들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는 않았으나, 아르힘이 그들을 암시하는 것만으로도 투이나는 고통스러웠다.
“……당신에게는 스카차의 영혼이 가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 그건 너에게로 갔다.”
당신은 스카차의 영혼을 받을 자격도 없다고.
투이나가 보내는 비탄 섞인 경멸에도 아르힘은 담담히 인정했다.
스카차의 죽음을 확실시하는 말에도 투이나는 당장 슬퍼할 수 없었다.
“아무리 사람을 사랑해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너를 구원해주고 싶었다, 투이나.”
아르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투이나는 참으려 했으나 움찔하고 말았다.
“내가 한 때 그러했던 것처럼, 수호신이 되어 인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괴로움을 끝내는 길은 그것뿐이었으니까.”
진실된 감정이 섞여 나온 목소리가 투이나를 누그러트리듯 우렁우렁 울렸다.
그녀는 아르힘이 말하는 괴로움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았다.
“…당신도 그만큼 인간을 사랑했다구요?”
아르힘은 떨리는 고개로 살짝 끄덕였다. 간절히 대답을 기다리는 소년처럼.
투이나는 자신이 거의 흔들릴 뻔했다는 걸 알았고, 아르힘도 그것을 눈치챘다는 걸 알았다.
오로지 아르힘에게만 대답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굴었으니까.
그래서 드디어 기회를 얻었다.
“아르힘. 그렇다면 당신은 왜 이곳을 수도로 정했는지도 말할 수 있나요?”
아르힘의 눈동자가 한순간 가늘어졌다. 투이나는 잔뜩 긴장하고 있던 다리를 마침내 앞으로 내딛었다.
“당신이 성소에 가둬놓은 모든 영혼들의 시체는 어디에 묻어뒀죠?”
날카롭게 내지른 투이나가 아르힘의 손목을 낚아챘다.
한순간, 그토록 애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르힘의 낯빛이 쇳덩이처럼 바뀌었다.
“…네 복제가 말해주더냐?”
낮게 갈라지는 쇳소리가 투이나의 귀를 갈라놓았다.
아르힘의 눈빛은 더 이상 소년이 아니라, 몇 백 년을 살아온 노회한 영혼이 되어있었다.
등골에 소름이 돋아나는 만큼 투이나는 더욱 거세게 그를 움켜쥐었다.
‘말할 필요도 없었어!’
아르힘이 거칠게 그녀를 떼어내려 마법을 쓰는 순간까지 투이나는 그를 놓지 않았다.
* * *
똑같은 동작으로 움직이고 똑같은 자세로 공격한다.
라카인과 아르파는 육체와 그림자의 싸움처럼 끊임없이 무기를 맞댄 채 혈투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공격하는 쪽이 라카인이었음에도 눈에 띄게 열세를 보이는 쪽은 그였다.
그가 쓰는 검술, 그가 쓰는 동작 하나하나가 모두 아르파에게서 배워 인간에게 전해져 내려온 무술이었으니까.
“어리석구나!”
아르파가 광소하며 라카인을 걷어찼다.
예측하고 있었음에도 머리와 어깨를 동시에 공격하는 동작을 막아내느라 그는 피하지 못했다.
“대적할 수 없는 상대에게 뛰어드는 것이 용기더냐? 그것은 차라리 오만이다!”
라카인은 들을 수 없었다. 피가 너무 뜨거웠다.
아르파의 힘을 다루면서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살육 충동을 다스리면서 공격하기에도 버거웠다.
찌르고 베고, 그런 지경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라카인의 머릿속은 열기로 혼탕 되었다.
그래서 아주 간단한 목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카앙! 카가가각.
무기가 부딪치며 들리는 소리가 바뀌자마자 아르파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라카인의 태세가 바뀌어 있었다.
“동귀어진?”
놀랍다는 듯이 살짝 올라간 말끝은 이내 진한 비웃음으로 뒤바뀌었다.
“좋다. 내게 죽어서라도 칼을 찔러 봐라!”
점점 더 빨라지고 사나워지는 라카인의 공격에 아르파도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어차피 이 몸이 죽어봤자 그는 모하세스로 돌아가 다른 육체로 들어가면 그만이다.
그 때가 되면 굳이 군대를 이끌고 돌아올 필요도 없이 아르힘이 망가져있으리란 사실은 뻔했다.
아니, 오히려 지금 죽는 게 나았다.
루가의 하수인이 아르파의 군대가 온다고 알릴 정도였으니 그들은 이미 수도에 진입한 상태일 것이다.
약해빠진 하인들과 다르게 제대로 피를 먹인 군인들은 아무나 골라잡아도 수호신인 자신을 감당할 수 있겠지.
그걸 알면서도 고작해야 눈앞의 루가 한 명을 지키겠다고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가며 강림한 몸을 죽이겠다는 그가 어리석게만 보였다.
그런 주제에 자신의 힘을 빌려다 쓰다니.
아르파는 멍청한 짓을 벌이는 라카인의 흐름에 일부러 맞춰주었다.
점점 더 격렬해지는 공격은 이제 어느 한 쪽이 쓰러진다고 해도 반드시 둘 다 칼에 찔리고서야 끝날 만큼 위험해져 있었다.
누군가 말리려고 해도 이들의 동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결코 간섭할 수도 없을 만큼.
푸욱.
“크아아아악!”
가죽이 찢겨나가는 소리와 함께 아르파가 비명을 질렀다.
정확하게 아르파의 옆구리를 찌른 호루니가 눈물에 젖은 얼굴로 창을 비틀었다.
‘와주었구나.’
라카인은 비로소 온 몸을 뻐근할 정도로 내달리던 공격을 멈추었다.
루가의 호위를 서면서 스카차와 호루니에게 동귀어진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었으나 라카인은 가르쳤고, 그들은 배웠다.
그들이 열심히 배우려고 했기에 어쩌면 이 최후의 동작까지 알려줄 수 있던 것이리라.
아르파의 손에 쥐어져 있던 칼날이 허망하게 피가 되어 바닥으로 쏟아졌다.
“이, 이, 네까짓 게 감히!”
“당신이 스카차를 죽였어.”
발악하는 아르파에게 호루니가 서슬 퍼런 복수심으로 대꾸했다.
“다시는 나타날 수 없게 해주겠어.”
“미천한 것들이!”
“그대로 잡고 있어라.”
라카인은 신음을 흘리며 자신의 칼마저 아르파의 어깨에 꽂아 넣으며 찍어 눌렀다.
원래였다면 이 정도 호위 둘쯤은 그대로 날려 보냈겠으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라카인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게 문제였다.
아르파가 미친 듯이 날뛰었지만 이미 라카인의 손에는 새로운 칼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빼앗긴 힘이 검붉은 검신의 형태를 이뤄갔다.
“가만두지 않겠다!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돌아와 너희를 모두 찢어발기리라!”
위기를 감지한 아르파가 필사적으로 발광했다.
도대체 어떻게 한 일인지, 피를 통해서 자신의 힘만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수호신을 이루는 영혼 자체가 빨려나가는 것 같았다.
“이노옴! 내게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라카인은 그저 본능에 몸을 내맡긴 상태였다. 생각보다 앞선 행동이 중얼거렸다.
영혼이 얼룩이 되어 육체가 될 수 있다면.
영혼을 조금씩 쌓아서, 다른 형태로 빚어낼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라카인은 무의식적으로 아르파의 의식에서 사용하는 기도문을 외웠다.
그럴수록 아르파의 몸에서 빠져나온 피는 한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엄청난 양이 되어갔다.
벼랑 끝에 몰린 아르파가 꿀럭꿀럭 꺼져가는 힘에 낯빛이 푸르게 변했다.
그가 갑자기 주먹으로 스스로를 힘껏 내려치기 시작했다.
“빨리 뒈져! 빌어먹을 몸뚱이! 죽으란 말이다! 지금 내가 무슨 짓을 당하고 있는지 안 보이나!”
아르파가 악담을 퍼부었다. 그러나 샨의 몸은 뻣뻣하게 경직된 채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신이 선택한 왕답게.
“죽으란 말이다 샤아안!”
“……그리하여 당신은 나의 검이 되어 모든 적들을 없앨 것입니다.”
고막을 먹먹하게 하는 고함 속에서 라카인이 마지막 기도문을 외웠다.
기도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한 손으로 들기도 어려울 만큼 거대한 대검이 라카인의 손에 들려있었다.
그 무게에 라카인은 잠시 칼끝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바닥에 처박히고도 오랫동안 신도들의 두려움을 먹어온 칼은 예리하게 흙을 갈랐다.
“커헉…!”
이윽고 샨의 몸이 거세게 꿈틀거렸다. 라카인과 호루니는 조용히 그의 눈이 파랗게 돌아왔다는 걸 확인했다.
“……허억.”
샨은 간신히 깨어나고서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몸에서 아르파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텅 빈 감각.
샨은 한 때 자신이 턱 끝으로 부리던 하인을 올려다보았다.
그와 한순간에 처지가 바뀌었다는 사실이 어떤 무기보다도 매섭게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너…….”
“당신이 아직 왕이라면, 아르파의 군대를 맡으십시오.”
라카인은 다시 어깨에 힘을 주어 칼을 들어올렸다.
칼로 형태를 바꾸었으나, 그건 여전히 아르파였기에 칼을 쥐고 있는 동안은 힘이 느껴졌다.
“저는 주군에게 가겠습니다.”
종탑을 향해 몸을 돌린 라카인은 곧 탑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대신 허공에 뜬 두 수호신이 검은 경계 속에서 싸우고 있었다.
‘루가 님.’
폭풍은 이미 그쳤는데도 그 속은 이미 재해였다.
라카인은 아르파의 칼로 그곳을 겨냥하려 했으나, 잡은 손잡이가 오히려 그걸 바라는 것처럼 짧게 떨려 그만 두었다.
저곳이 수호신이 돌아가고자 하는 장소라면 보내서는 안 된다.
영혼의 세계로 보내서는 안 된다.
라카인은 태풍의 눈처럼 새까만 세계의 경계가 연한 보랏빛으로 일렁이는 걸 보았다.
그는 땅바닥 깊숙이 아르파를 꽂아 넣었다.
* * *
투이나는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파도의 소리를 듣는 건 바다 바깥에서야 가능했다.
이토록 휩쓸리는 와중에는, 잠겨 죽는 와중에는 소리에 집중할 수 없었다.
“취해 죽는 고름에 빠진 새들이 알을 쪼아 먹는 고함에 일전의 우리가 마아비 되었던 신! 신! 시이인!”
“살려줘!”
“아아아아! 끼야아아아악!”
죽음이 만들어낸 불협화음이 투이나의 머리를 뒤흔들었다.
비명을 지르려고 입을 벌렸던 투이나는 대신 온갖 영혼들이 제 속으로 들어오려는 듯 해 발버둥 쳤다.
아르힘은 성소를 덮었던 벽을 없애버리고, 그곳에 갇혔던 모든 영혼들을 투이나에게 보내면서도 힘겹게 그의 손에 매달리는 투이나를 떨쳐내지 않았다.
“왜 편해지질 않는 거냐?”
투이나의 몸에 있는 얼룩이 점점 커져갔다.
회색빛에 잠식될수록 투이나는 청각을 잃고, 시각을 잃고, 촉각마저 잃어갔다.
그건 모조리 다른 영혼들이 차지했다.
아르힘은 그녀의 마음에 대고 직접 말했다.
“네가 대체 살아 있다고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단 말이냐.”
“……!”
“너는 나의 사랑받는 제물이자 인간들의 수호신이 될 수 있었다.”
아르힘은 여전히 안타까운 눈빛이었다.
‘그러면 당신은?’
아르힘이 잠시 그녀를 응시했다.
투이나가 필사적으로 손끝으로 시드룬의 심장을 눌러가며 마법을 확장하는 걸 멈추고 있었지만, 그는 듣고자 했다.
‘사랑만으로는 영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상하구나.”
아르힘은 여전히 평온했다.
“그럼 내가 사랑한 영혼들은 무엇이지?”
아르힘은 투이나에게 자신의 영혼을 일부 흘려 넣었다.
이미 오랫동안 받아온 신도들의 영혼으로 자신의 흔적은 아주 미약했지만, 기억으로 대신할 수 있었다.
투이나는 영혼의 힘에 이끌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건너 다시 이 산으로 돌아와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산 제물로 바쳐지는 어린 아르힘이 있었다.
사막을 지나오느라 굶주리고 피폐해진 유목민들은 차분히 눈을 뜬 소년에게서 터번과 옷을 차례로 벗겨냈다.
그것은 시체에게 바쳐지기에는 귀한 재산이었다.
“…부탁한다. 힘.”
“…….”
고대에 불행을 피해가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나온 아르힘은 해가 저물자 스스로 불을 피우고 짐승을 유인하는 향을 던져 넣었다.
절대로 비명을 지르거나 저항해서는 안 된다.
그러하면 의식은 실패하니까.
선연히 전해져오는 고통에 투이나가 몸을 쥐어뜯었다.
모든 수호신은 반드시 죽음을 겪어야만 한다. 그 과정이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울수록 좋다.
사람들이 네게 갖는 죄책감만큼 신의 힘은 커진다.
아르힘은 기억과 한 치도 달라지지 않은 얼굴로 투이나를 돌아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는다면 괜찮을 거라 말하는 자들이 있었지.”
까마득히 먼 곳에서부터 이미 그는 온전한 사랑에 자신을 내던졌다.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고통을 감수하고 수호신이 되었다.
아무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아르힘이 읊조렸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도대체 너희들은 무엇을 믿는 것이냐.”
‘…고통을 믿어요.’
투이나가 괴롭게 마음을 짜냈다.
‘나를 나약하게 만드는 모든 사랑과 증오와 사람들이, 언제라도 내게 닥칠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아르힘의 입술이 다물렸다.
그러나 투이나는 심장을 쥔 아르힘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일순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랑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삶을 믿습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약한 존재라고 믿을 때야 비로소 내어주는 부족한 자리를 믿어요.’
처음부터 자신의 영혼에 집착하지 않는 자들은 쉽게 마법과 신에게 영혼을 내주었다.
깊은 상처나 힘을 받고 강해진 영혼들만이 다른 자의 힘을 거부해왔다.
그것이 결국 스스로를 죽게 만들지라도.
그렇기에 모든 죽은 영혼들은 회색빛 얼룩이 되어 사람의 육체에 집착하면서도 다른 자들을 거부해 결국 자신까지 죽게 만든다.
투이나의 몸에서 점차 회색빛 얼룩이 사라져갔다.
그것은 없어진다기보다 투이나와 같은 영혼으로 변해가는 것에 가까웠다.
투이나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이제 당신도 사랑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아르힘은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자신의 영혼들이 잡을 수 없는 곳으로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아르힘은 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게서 영혼을 다 빼앗을 수는 없다. 투이나. 나는 아르파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의 세월을 살았다. 그 영혼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는 없어.”
‘다른 것으로 대체하지 않아요.’
투이나는 아르힘을 끌어안았다.
‘나는 당신이 그것을 감당하게 할 것입니다.’
파아앗!
빛과 함께 마법과 신의 힘이 어우러져 폭발했다.
영혼의 세계를 향해 가던 라카인은 곧 자신이 절박해지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았다.
모든 영혼들이 각자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투이나는 품 안에 있던 아르힘이 결국 다시 시드룬의 심장을 움켜쥐는 걸 보았으나, 아르힘에게서 모든 영혼이 빠져나왔다는 걸 알았기에 그를 보내주었다.
‘당신을 위해 죽음을 감당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는데.’
투이나는 아릿하게 눈을 감았다. 곧 잡을 수 있는 건 모두 흩어지고 시드룬의 심장만이 남아 그녀의 손을 눌렀다.
투이나는 완전해진 기분으로 하늘에서 떨어졌다. 추락을 걱정하진 않았다.
나약한 자신을 받아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