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해한 구혼자 10권
38.
보라, 우리가 이 공포에서 벗어나려면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맞서 그녀에게 기쁨을 돌려주어야 한다.
투이나는 아까부터 쿵쾅거리는 소리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스카차가 방으로 찾아와 신전의 이야기를 전했을 때도 지금처럼 정신이 없진 않았다.
그저 신전으로 돌아가면 라카인을 이곳에 두고 가야 한다는 사실만 선명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그러자 참을 수 없을 만큼 라카인이 보고 싶어져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밖으로 걸어 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무슨 낯으로 그를 본단 말인가.
아르파 신과 샨을 구분해내자 아르파는 샨을 떠나 다른 자의 몸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라카인이 죽기 직전까지 몰렸다. 아르파 신이 빠져나가면 아마 샨도 죽을 것이다.
자신이 수호신이 되는 길을 택할수록 점점 희생당하는 사람들만 늘어났다.
‘지켜줄 사람이 없다면 신이 될 이유가 없어.’
방황하는 마음은 잃고 싶지 않다는 부르짖음으로 바뀌었다.
당신이 필요해요. 나는 당신이 살아서 행복한 모습을 보고 싶어요. 나는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어지러이 흔들리던 마음으로 멈춰 섰을 때, 그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했다.
화드득.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투이나가 저도 모르게 옆을 살짝 훔쳐보았다.
수리시를 따라가는 라카인은 조금 비틀거리긴 했지만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이 단정했다.
병상에 있는 동안 조금 수척해지긴 했지만 그것마저 윤곽선이 도드라져 훨씬 근사해보였다.
‘어떡해.’
투이나는 자꾸만 튀어나오려는 감정을 감추려고 양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만 생각해.’
귓가에는 아직도 ‘사랑합니다.’를 속삭이던 라카인의 목소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민들레 홀씨를 잔뜩 삼킨 것처럼 속에서 노란 꽃잎들이 풍성하게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간질간질하고 속을 가득 채우는 이 여린 마음이.
투이나는 다시금 저려오는 가슴에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물어보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대체 언제부터 자신을 사랑했는지, 어째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그리고 왜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는지.
시작부터 포기하기엔 그의 애정이 너무도 달콤했다.
충분히 한 사람을 적시고도 남을 그 애정을 주면서도 왜 그는 사랑해달라고 이야기 하지 않는 걸까?
‘나는, 당신이 포기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투이나는 드러난 살결이 공기에 닿을 때마다 솜털이 곤두설 만큼 체온이 올라가고 말았다.
심장이 지나치게 두근거렸다.
“투이나!”
수리시가 시드룬의 현관문을 걷어차면서 소리쳤다.
뻔뻔한 입장에 정신없이 흩어져있던 투이나의 정신도 하나로 모아졌다.
라카인이 살짝 불편하게 입을 열었다.
“…루가님의 복제를 같은 이름으로 불렀습니까?”
“어차피 똑같은 사람이잖아. 그게 뭐가 중요해?”
수리시가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남편 때문에 일부러 더 과민반응하는 수리시를 이해한 투이나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복제 투이나는 시드룬과 함께 거실에 있었다.
그녀는 함께 들어오는 세 사람을 보며 마치 깜짝 놀란 것처럼 둥글게 눈을 떴다.
누가 보면 잠시도 집 밖에 나간 적이 없는 사람 같았다.
복제 투이나와 마주 앉아있던 시드룬이 대신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쟤가 이 인간을 깨웠어!”
수리시가 복제 투이나와 라카인을 번갈아 손가락질했다.
시드룬은 빈사상태에서 깨어난 라카인을 보고는 짧게 눈썹을 까딱였다.
“살아났군요.”
그걸로 끝이었다. 담담한 반응에 수리시만 속이 터지는지 가슴을 쿵쿵 쳤다.
“그게 끝이야? 넌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몰랐다.”
시드룬은 담백하게 대답하고는 복제 투이나를 돌아보았다.
복제 투이나는 그때까지 시드룬과 함께 풀고 있던 퍼즐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는 투이나를 향해 말했다.
“잠깐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좋아요.”
투이나는 선선히 대답했다. 어쩐지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것 같았다.
복제 투이나가 일어서자 라카인이 갑자기 투이나의 손을 잡아왔다.
“꼭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투이나가 복제 투이나를 보는 걸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알기에 꺼낸 말이었다.
정작 투이나는 라카인이 손을 잡는 순간부터 거부감이고 뭐고 다 잊어버린 상태였다.
‘우와아. 고백한 뒤로 어쩐지 라카인이 더 서슴없어진 것 같아.’
걱정스레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에 무릎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투이나는 잡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그의 손등을 도닥였다.
“괜찮아요. 이제 준비가 됐거든요.”
그녀의 친근한 접촉에 라카인도 움찔했다. 그의 눈이 의문과 함께 동그래지는 모습이 숨 막히게 귀여웠다.
“빨리 끝내고 올 테니까 라카인도 여기서 기다려줘요. 어디 더 불편한 곳은 없는지 꼭 확인하구요.”
“…예. 알겠습니다.”
머뭇머뭇 라카인이 물러났다. 마찬가지로 잡은 손을 빼기가 아쉬웠던 투이나가 천천히 뒷걸음질을 했다.
이미 복제 투이나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서있었다.
“갈까요.”
거울 앞에 서있는 한 쌍처럼 꼭 닮은 두 사람이 차례로 발을 디뎠다.
조용한 방에 다다른 복제 투이나가 먼저 들어오라는 듯 손짓했다. 심호흡을 한 투이나가 따라 들어갔다.
“라카인을 살려줘서… 고마워요.”
투이나는 우선 감사인사부터 했다.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영영 라카인을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생각할수록 끔찍한 일이다.
“별말씀을요. 당신도 할 수 있는 일인걸요.”
“네?”
복제 투이나가 살짝 손짓했다. 투이나가 얼른 방문을 닫았다.
“저도 할 수 있다구요?”
“당신은 영혼의 소리를 별로 듣지 않는 편이죠?”
복제 투이나가 대답 대신 엉뚱한 소리를 했다.
투이나가 멍하니 입을 벌린 사이 복제 투이나가 편하게 바닥에 앉았다.
“나는 당신의 복제예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당신의 영혼을 다 가져간 게 아니에요.”
“그게, 무슨…. 내가 아직 수호신이 되지 않았다는 뜻인가요?”
“아뇨, 당신은 인간의 몸에 갇힌 수호신이죠. 맞아요.”
복제 투이나가 싱긋 웃었다.
“하지만 모든 수호신들도 영혼을 갖고 있는 걸요.”
투이나는 어지러운 이야기에 잠깐 힘이 풀렸다. 그녀가 폭삭 주저앉았다.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당신의 영혼은 아주 아주 작아요.”
복제 투이나가 가볍게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태어났을 때부터 당신은 죽은 영혼들과 함께 살아왔어요.”
얼룩병 이야기였다. 회색 얼룩들은 모두 한 때는 살아있었던 죽은 영혼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영혼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에 익숙해요. 평범한 영혼은 자기 말고 다른 존재를 용납하지 못해요. 배척하고, 미워하죠.”
투이나는 무심코 자기 살갗에 있는 얼룩을 매만졌다. 당연하게 여겨온 병. 당연하게 여겨온 타인이다.
“나와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려면 영혼으로부터 자리를 내어줘야 해요. 하지만 얼룩병은 강제로 그 자리를 빼앗죠.”
복제 투이나는 말끔한 피부로 투이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얼룩병에 걸린 사람들이 결국엔 미쳐버리는 거예요.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지 못해서.”
“…어떻게 당신은 그렇게 잘 알죠?”
아연해진 투이나가 되물었다.
“우리 중에서 가장 짧은 인생을 살았잖아요.”
“투이나.”
복제 투이나가 신비로운 미소를 지었다.
“영혼의 빈자리에는 다른 것도 들어갈 수 있어요.”
어렴풋이 시드룬과 비슷한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떠올랐다.
“수호신과 마법.”
직관적으로 대답한 투이나가 눈을 크게 떴다.
“당신… 마법사군요.”
“맞아요!”
복제 투이나가 환하게 웃었다.
“내가 복제되었을 때 당신의 영혼은 이미 아주 작아서 마법이 들어갈 공간이 많이 있었어요.”
“하지만… 복제된 바즈아둡은 마법을 쓰지 못했잖아요.”
“그건 수리시가 바즈아둡을 완전한 상태로 복제해냈기 때문이에요. 수리시가 그의 영혼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에, 바즈아둡의 영혼은 더 이상 마법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죠.”
들을수록 놀라운 이야기였다.
‘수리시가 알면… 기뻐할 텐데.’
수리시는 자신이 남편을 제대로 복제해내지 못했다고 자책하며 그에게 마법을 돌려주려고 애썼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녀는 정말로 남편을 완벽하게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투이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마법사의 영혼은 모두 병들었기에….”
“…상처 난 자리에 새 살이 돋아났죠.”
복제 투이나가 자연스레 말을 받았다.
“모든 사람은 다치고 상처입어요. 그리고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간절히 다른 힘을 원하게 되죠.”
그녀가 무릎을 모았다.
“왜 큰 고통을 받은 사람들이 마법사가 되기 쉽겠어요?”
나직한 물음에 투이나는 쿵하고 심장이 뛰었다.
피해갈 수 없는 물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대로라면 나는 왜 수호신이 되었죠?”
만약 투이나도 똑같이 과거에 살해당한 순간 힘을 바랐다면, 마법사가 되어야 맞았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수호신이었다. 신도를 갖고, 인간의 몸에 갇힌 수호신.
복제 투이나는 그녀가 그 질문을 할 줄 알았다는 듯 천천히 대답했다.
“마법사가 영혼의 세계에서 힘을 얻는다면, 수호신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서 힘을 얻어요.”
“…….”
“당신은 죽음의 순간 사랑하는 영혼을 떠올렸어요. 그들이 당신의 신도가 되어준 거예요.”
‘아르힘 님.’
투이나가 무심코 떠올린 이름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칼에 찔려 쓰러져갈 때 투이나는 아르힘을 부르고, 그에게 안식을 구했다.
그 결과가 수호신이 되는 것이라면.
“설마… 내가 아르힘 님이 가진 신도들을 빼앗았나요? 그래서 수호신이 될 수 있었던 거예요?”
복제 투이나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마주보았다.
“모든 사람이 수호신이 되진 않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단조롭게 울렸다.
“모든 영혼이 그렇게 쉽게 믿고 사랑할 대상을 결정하진 않죠.”
갑자기 이 순간, 라카인이 자신에게 고백하던 장면이 너무도 세게 그녀를 치고 지나갔다.
그런 사랑이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흔할 수는 없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언제나 지독히도 어렵기에.
“당신이라서 가능했던 거예요, 투이나.”
그녀의 목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리듯 흘러나왔다.
“당신은 죽을 때까지 사랑했으니까. 영혼들은 그런 당신을 믿어보기로 한 거예요.”
새벽녘이 잠시 흔들고 간 하늘이 연한 푸른빛으로 방안에 드리웠다.
그러자 조금씩 안개가 걷히듯 어두웠던 방안의 그늘이 실금을 긋는 것처럼 천천히 물러났다.
투이나를 바라보던 복제 투이나가 가볍게 턱을 괴었다.
“아르힘의 생각대로 당신이 결혼한다고 구혼자들이 수호신으로 바뀌진 않을 거예요.”
투이나가 흠칫했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로 아르힘을 쉽게 부르는 게 굉장히 이상해 보였다.
“결혼하면 제가 수호신이라서 갖고 있던 사람들의 믿음을 그에게 넘기는 게 아닌가요?”
“그랬으면 모든 수호신들이 전쟁만 벌였겠죠? 다른 신도들을 빼앗아오기만 하면 자신의 힘이 되니까.”
투이나가 생긋 웃었다.
“아르파가 조금 특이한 경우지, 그렇게 쉽게 믿음을 바꿀 순 없어요.”
“하지만 아르힘 님은 힘을 잃어가고 있잖아요.”
“그건 그의 문제에요, 투이나.”
“하지만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은 바로 아르힘에 있는 걸요.”
두 사람의 시선이 엇나갔다. 투이나가 단호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하나의 수호신이 사라진다면 그들을 지킬 신이 필요해요. 내가 지키고 싶어요.”
복제 투이나는 묘한 눈길로 투이나를 마주보았다.
“라카인이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투이나의 호흡이 단번에 흐트러졌다.
“그, 그게 왜 지금…….”
“뭐라고 하던가요?”
당황하던 투이나가 떠올렸다.
그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희생하지 말아달라고.
그제야 라카인이 자신의 무엇까지 감싸 안으려는 건지 깨달은 투이나가 얼뜨게 뛰는 심장을 자각했다.
“나, 난 희생이라고 생각한 적 없는데…. 수호신이 되어도 여전히 나인걸요.”
“그럼요. 다른 신도들이라면 분명히 좋아했을 거예요.”
그치만 라카인이 무슨 마음으로 투이나를 품었기에 그걸 거절했는지 떠올려보라는 듯한 그녀의 표정에 투이나가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세상에.”
그녀의 얼굴이 화드득 달아올랐다. 귀 끝까지 빨개진 투이나가 어쩔 줄 모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세상에…!”
“역시 이건 연인들끼리 풀어야 할 문제겠죠?”
복제 투이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내가 답을 알고 있다면 실은 당신도 알고 있다는 뜻이니까 괜찮을 거예요.”
복제 투이나가 열이 오른 투이나를 살짝 지나쳤다.
장난스럽게 문고리를 당긴 그녀는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속삭였다.
“아르힘은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투이나. 모든 사람을 지켜줄 필요는 없어요. 그들에게도 힘이 있는 걸요.”
복제 투이나가 살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슬며시 새어 들어온 바람으로는 투이나의 열을 식히기엔 한참 부족했다.
달뜨는 마음이 이렇게도 아릴 수가 있나 싶었다.
전신을 내달리는 더운 기운은 이제 더 이상 외면할 수가 없다고, 부정할 수가 없다고 스며드는 각인 같았다.
어쩔 줄 모르고 흔들리던 투이나의 속눈썹이 무너지듯 한 번 깜박였다.
‘라카인이 좋아.’
투이나가 인정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마음속으로 긋던 선이 사라졌는데도 훨씬 더 편안하게 느껴졌다.
오래 전부터 그를 볼 때마다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갔다.
정작 본인은 개의치 않는 일을 두고 전전긍긍한 적도 많았다.
허나 그들 사이에 위험한 일들이 많았기에 이것은 사랑이 아닐 거라 치부하기만 했다.
공포와 걱정을 사랑으로 착각했을 거라고. 무서운 일을 함께 겪고 나면 기묘한 연대감이 생겼을 뿐이라고.
그렇게 충성심으로, 동지애로, 신앙으로 그의 마음을 격하시켰다.
마땅한 이름을 붙일 때마다 조심스럽게 그 이름에 걸맞는 마음을 되돌려주면서.
그를 아껴주고 있다고 믿었다.
‘아니었어.’
투이나는 그것 때문에 일부러 자신의 문제를 껴안으려던 나날을 회상했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 너무도 급박했기에 서로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고. 곁에 있어주기만 하면 족하다고.
그런 그녀에게 라카인이 먼저 말해주었다.
공포에 눈이 멀어도 가릴 수 없는 이 마음은 분명히 사랑이라고.
오히려 평화로운 때 그를 만났다면 훨씬 더 빨리 알았을 것이다. 훨씬 더 빨리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었으리라.
어쩌면 그녀가 먼저 사랑한다고 말했겠지.
주체할 수 없는 이 마음을 눌러 담기엔 그녀의 애정은 넘쳐흐르는 것이니까.
‘라카인…….’
투이나는 이제야 비로소 라카인의 고백을 들었을 때 자신이 하고 싶었던 모든 말들을 깨달았다.
축복처럼.
숨을 들이켠 투이나가 방을 뛰쳐나갔다. 복도를 달리는 소리조차 종소리처럼 일정한 박자로 울려 퍼졌다.
복제 투이나가 먼저 내려가는 바람에 사람들은 계단 밑에 모여 있었다.
왜 혼자 내려왔냐고 캐묻는 소리 속에서도 투이나는 정확하게 라카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드룬을 빼면 다른 사람보다 살짝 높은 위치에서 진지하게 투이나를 걱정하고 있는 모습이 가슴에 사무쳤다.
제일 먼저 발소리를 듣고 투이나를 향해 고개를 든 것도 그였다.
눈이 마주치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진 투이나가 울컥 소리쳤다.
“사랑해요.”
주체할 수 없이 마음이 쏟아져 나왔다.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라카인.”
사위가 조용해졌다.
무섭도록 떨리는 가슴으로 숨을 몰아쉬며 투이나는 오로지 라카인만 응시했다.
아주 세세한 곳까지 그가 보였다.
진중하게 눌려있던 눈가가 펴지며 놀란 듯이 커지는 눈동자가 얼마나 빨리 마음을 사로잡는지.
검고 새카만 동공에서 희미하게 감돌던 믿을 수 없다는 그림자가 어떻게 서서히 깊은 환희로 바뀌어 가는지.
보일 수밖에 없었다.
투이나는 울음을 터트리고 싶은 건지 웃음을 터트리고 싶은 건지 몰라 새된 소리를 흘려보냈다.
원래 고백이라는 게 이렇게도 사람을 떨리게 하는 거였구나. 전신을 불사르는 느낌이다.
이윽고 마침내 라카인이 입술을 떼었다.
그러나 살짝 벌어진 입술로는 어떤 말도 이루지 못한 라카인은 다만 벅찬 마음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가 내뻗은 팔을 보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투이나가 그 자리에서 달려갔다.
그리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의 뺨을 붙잡고 깊게 입을 맞췄다.
더운 체온이 훅 차가워진 몸을 덮었다.
라카인이 그녀를 더 깊게 안으려고 애쓰는 동안 투이나는 한없이 그의 뺨을 붙잡고 매달렸다.
깊이, 더 깊이.
몇 번이고 그의 입술에 입 맞추면서도 그녀는 흐느끼는 듯한 기묘한 소리를 멈추지 못했다.
그래도 그것은 분명한 기쁨과 환희의 소리였다.
절절히 녹아 흐르는 애정의 결합에 복제 투이나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시드룬의 팔에 몸을 기댔다.
* * *
“나 원, 세상에.”
수리시는 여전히 기가 막힌 얼굴로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을 놀래킨 것 치고는 투이나와 라카인의 표정은 몹시도 평화로웠다.
물론 서로를 향한 감정을 확인한 뒤부터는 바보처럼 자꾸만 실실거리긴 했지만.
라카인의 팔을 꼭 감싸 안은 투이나는 더 없이 행복해보였다.
라카인도 자꾸만 눈으로 그녀를 담고 조심스레 손끝을 만져보곤 했다.
이게 진짜인지 확인해보는 사람처럼.
자기 현역 때도 이렇게 애정행각을 떨진 않았던 수리시가 헛웃음을 지었다.
“대체 언제 둘이 눈이 맞은 거야?”
“그러게요.”
투이나가 자꾸만 방실방실 올라가는 입 꼬리를 겨우 가라앉혔다.
“저도 모르겠어요.”
말하자면 모든 순간 같기도 했고, 그것만으로는 지금 감정이 되기엔 한참 부족한 것 같기도 했다.
그 모든 시간들이 쌓여서 지금에 이르렀겠지.
투이나는 다시 한 번 물씬 올라오는 애정에 뿌듯해졌다.
아까부터 넋이 나가 있던 호루니와 스카차는 보고서도 제 눈을 믿지 못했다.
“그, 그럼 진짜로 두 분이….”
“대체 언제…….”
놀람을 뛰어넘어 거의 허망한 지경에 이른 호위들은 턱을 다물지도 못했다.
수리시도 경악한 건 마찬가지라 혼란스러운 머리를 진정하기 바빴다.
“잠깐 그럼… 시드룬은 어떻게 되는 거야? 세 번째 시험은?”
“세 번째 시험은 예정대로 치를 거예요.”
투이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처음부터 세 번째 시험은 누구도 이기게 할 생각이 없었거든요.”
원래는 자신이 수호신이 될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제 그녀는 죽지 않으려고 한다.
살아서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란 확신이 생겨났으니까.
복제된 자기 자신이 건네준 말도 사랑하는 라카인이 전해준 말도 모두 그녀에게로 왔다.
‘혼자가 아니야.’
그러니 이제 남에게서 답을 구하지 않아도 된다.
투이나는 스스로에게 넘쳐나는 믿음에 즐거워졌다.
“다른 구혼자들이 모두 세 번째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고 구혼기간을 넘기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잖아요.”
“…….”
그 말에 괜히 라카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직 구혼자인 시드룬이 앞에 있는데도 대놓고 하는 소리에 수리시가 입을 쩍 벌렸다.
“야… 넌 아무렇지도 않냐?”
수리시가 휙 화살을 돌렸다. 복제 투이나와 멀뚱히 서있던 시드룬이 대꾸했다.
“내가 뭘 느껴야 하나?”
“네 구혼자잖아! 지금 다른 사람한테 고백하고 결혼까지 하겠다고 그러는데 아무 생각이 안 드냐?”
“…아기는 못 얻겠군.”
“에라이!”
복장이 터지는지 수리시가 소리를 질렀다.
머리털을 쥐어뜯는 수리시를 본 복제 투이나가 살짝 까치발을 들었다.
“복제된 몸으로도 아기는 가질 수 있어요. 바즈아둡도 그렇게 했는걸요.”
“아, 쿠즈의 사례가 있군요.”
시드룬이 흥미로운 눈으로 복제 투이나를 내려다보았다.
복제 투이나는 기대했던 반응인지 생긋 웃었다.
그 꼴을 본 호루니와 스카차는 물론 수리시까지 오소소 소름이 돋아나고 말았다.
경악하다 말고 오만정이 다 떨어진 수리시가 슬금슬금 둘에게서 떨어졌다.
“진짜 내가 맹세코 다시는 마법 안 쓸 거다. 살다 살다 너희 때문에 내 마법에 치를 떨게 될 줄이야….”
“무슨 문제 있나?”
“제발 루가님 얼굴로 그러지 마십시오. 악몽에 나오겠습니다.”
“너넨 마법사 중에서도 심각해. 이 일만 끝나면 다신 상종하지 말자.”
수리시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이 흉악한 대화에 투이나마저도 약간 떨떠름해졌다.
하지만 좀 전의 대화로 두 사람은 다르다는 걸 확실하게 깨달아서 그렇게까지 거부감이 들진 않았다.
‘복제된 나는 시드룬을 좋아하는 걸까?’
그녀는 마법사였다.
복제된 이후로 자신의 영혼이 어딘가 달라졌다면 시드룬을 좋아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라카인을 택했다.
그 결정에 어떤 후회도 없을 것이다.
투이나가 옆을 맴돌던 라카인을 찾아 더듬자 그가 곧장 손가락을 얽어왔다.
투이나가 행복하게 볼을 물들였다.
‘언제까지 그녀를 복제된 나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 이름을 하나 짓는 게 좋겠다.’
곰곰이 숙제 하나를 정리해둔 투이나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더 이상 수호신이 되지 않을 거라면 아르힘 님을 치료할 방법이 필요해요.”
수호신을 치료하는 방법을 얘기하던 중, 잠들어있던 다른 마법사들이 라카인이 사라진 걸 알고 놀라 뛰어 들어왔다.
“이봐! 큰일…!”
허둥지둥 들어온 마법사들이 멀쩡히 서 있는 라카인을 보고 기함했다.
“일어났잖아!”
“뭐, 워야?”
라카인의 몸 상태를 확인하려 달려드는 열두 명의 마법사에게 전부 상처를 보여준 뒤에야 그가 풀려났다.
“허 참….”
“말도 안 돼.”
“지금까지 우리가 고생한 게 다 어디로 간 거야?”
“여러분이 있었기에 라카인이 살아난 거예요. 고맙습니다.”
투이나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아니 뭐… 우리가 한 게 있나.”
“사실 아직도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다고.”
라카인이 바깥의 기척을 느끼고 바로 이야기했기에 복제 투이나는 2층으로 돌아가 숨어 있었다.
수리시가 복제 마법을 쓸 줄 아는 건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비밀이었기에 그들의 의문은 영영 풀릴 일이 없을 것이다.
허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던 마법사들은 결국 살아난 걸 축하하기로 했다.
“어쨌든 잘 됐네.”
“도와준 대가로 우리한테 주기로 했던 금화를 조금만 주면 좋을 것 같은데….”
“습!”
“아, 보상은 제가 따로 챙겨볼게요.”
포보의 말에 수리시가 눈치를 주었지만 다행히 투이나가 웃어넘겼다.
그 말에 게누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우리가 신전으로 쳐들어가는 건 대체 언제 하는 거야? 언제? 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으음. 그게….”
맞다. 원래 아르힘을 구하기 위해서 마법사들의 도움을 구해뒀었지.
아르힘이 풀려나서 딱히 그들이 필요 없게 된 투이나는 난감해졌다.
‘저렇게 눈을 반짝이며 기다릴 줄은 몰랐는걸.’
게누아가 양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 돈 좋아해. 필요해. 얼마든지 싸워줄게!”
“레이벡은 이미 받을 거 받아서 나오려나? 하루 종일 집에서 구슬만 끼고 있던데.”
“내버려둬. 어차피 마법사가 된 이상 수호신을 다시 모실 수도 없는걸. 그래도 싸울 땐 불러달라곤 했어.”
“음, 그러면 혹시 이런 것도 알 수 있을 까요?”
“어떤 거?”
“영혼 하나가 다른 영혼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요?”
토론 주제가 던져지자 마법사들이 호기심에 가득 차 눈을 빛냈다.
어차피 마법사의 마을에서 하는 일도 없이 죽치고 있던 그들이다. 아예 시드룬의 집에 눌러 앉은 그들이 저마다 떠들었다.
“정신 마법 얘기하는 거야?”
“상대방이 강해도 얼마든지 바꿔놓을 수 있지! 내 특기야! 내 저주가 얼마나 사람들을 바꿔놓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
“역시 현상금까지 걸렸던 마법사답다.”
“알다시피 마법은 육체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치니까, 상대방을 때리면 멍드는 거랑 똑같겠지?”
“명색이 마법인데 고급지게 설명합시다, 좀!”
“그래도 아직 남의 영혼을 건드렸다가 마법사가 됐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어. 어떤 영혼이든 본인만의 영역이 분명히 있을 거야.”
왁자지껄한 이야기를 열심히 듣던 투이나가 살짝 어깨를 건드리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아, 라카인!”
그녀의 뺨이 금세 발그레해졌다. 라카인은 약간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루가 님. 잠깐 나가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얼마든지요.”
투이나가 활짝 웃었다. 두 사람이 입술이고 뭐고 부딪칠 걸 다 부딪쳤는데도 라카인은 여전히 그녀가 옆 자리에 서 있는 게 낯선 모양이었다.
조심스레 자리를 빠져나가는 두 사람을 본 마법사들이 짓궂게 빤히 지켜보았다.
“저거, 분명히 연애하는 거죠?”
“아아~ 좋겠다! 나도 연애하고 싶어!”
“대체 언제 눈이 맞았대? 신기하네.”
“구혼자들 문제는 어쩌려고 저러는지? 쯧쯧. 사랑이 뭔지.”
스카차가 슬쩍 호루니를 건너다보았다.
망연자실하게 앉아있던 호루니는 마법사들이 한 마디 할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얻어맞는 것 같았다.
이미 둘의 사이는 확실하게 공인되고 있었다.
점점 더 풀이 죽은 호박잎처럼 쪼그라드는 호루니를 본 스카차가 어색하게 어깨를 두드렸다.
“…나중에 술이나 한 잔 하자.”
“…….”
멍하니 혼이 빠져나가 있던 호루니가 갑자기 와락 얼굴을 파묻었다.
“나, 나 욕심 부릴걸 그랬어!”
“어?”
“욕심 부리지 않고 임무에 충실하면 언젠가 루가 님이 알아주실 줄 알았는데…!”
후회막심한 표정으로 호루니가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당황한 스카차는 친구가 고백도 못 하고 까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달래줘야 할지, 갑자기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마법사들은 또 왜 이러는지 몰라 진땀을 흘렸다.
“보지 마십시오!”
“에구, 가여워라.”
“루가가 죄가 많네.”
낄낄거리는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호루니가 더 크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라카인 정말 싫어!”
안절부절 못하던 스카차는 이러다 투이나가 돌아오면 더 쪽팔리게 될 거란 말로 호루니를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 * *
“왜 그래요?”
갑자기 라카인이 시드룬의 집 쪽을 돌아보자 투이나가 물었다.
“…아닙니다.”
라카인은 분명히 무슨 외침인지 알아들었지만 말을 아꼈다.
호루니도 자신이 들으라고 외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서러워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어서 그랬겠지.
자신조차도 투이나가 고백했다는 사실을 몇 번이나 다시 곱씹어봐야 할 만큼 믿기지가 않았다.
어떻게 이 품에 당신을 안고 입술을…….
라카인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앞서 걷고 있던 투이나가 덩달아 화들짝 놀랐다.
“라, 라카인?”
“죄송합니다.”
라카인이 허둥지둥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까 생각을 하여….”
“…!”
투이나의 귀가 덩달아 빨개졌다.
어쩔 줄 모르고 입을 가린 라카인이 제 뺨을 억누르면서도 올곧게 시선을 맞춰오는 모습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어떻게 아까 전에는 대담하게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췄는지 모를 노릇이다.
두 사람 다 지금 모습만 보면 이제 막 만난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어색하게 꼼지락거리던 투이나가 말했다.
“…많이 놀랐죠?”
“예.”
“저어, 그렇게 갑자기 할 생각은 없었어요!”
라카인은 열심히 항변하는 투이나가 너무 좋아서 죽을 것 같았다.
변명할 이야기도 아닌데.
오히려 다시 한 번만 더 해달라고 간청하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있는 지경이었다.
라카인은 입가를 꽉 눌러가며 자꾸만 지어지려는 미소를 참았다.
“루가 님.”
“네?”
“사랑합니다.”
투이나의 입술이 다물리더니 그대로 붉게 물든 색이 퍼져나가듯 입가로 번졌다.
라카인이 무릎을 꿇었다.
“어떤 마음으로 제게 오셨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당신께서 짊어진 짐을 간신히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한 때는 당신을 신처럼 모셨습니다.
당신을 위한 제단을 짓고 영원히 당신을 위해 기도하며 살아가도 좋다고 여겼습니다.
라카인은 조심스럽게 투이나의 손끝을 더듬어 찾았다.
나란히 놓인 손가락은 그 자체로 신의 축복과도 같았다.
이 위를 더듬어 올라가도 내려가도 온통 당신뿐이라니.
벅찬 마음에 라카인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하지만 저는 기꺼이 당신의 짐을 나누겠습니다.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하고 무엇이든 되겠습니다.”
잠깐 동안 투이나가 거쳐 온 시간을 가늠해보던 라카인은 아득히 먼 기분에 사무쳤다.
그를 위해 투이나는 신의 자리를 포기했다.
모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포기할 각오를 저버렸다.
라카인은 그게 너무도 감사했다.
‘죄를 짓는 기분이 이토록 달콤할 줄은 몰랐습니다.’
라카인의 명치가 뻐근하게 조여 왔다.
“절대로 후회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신이 아니더라도 괜찮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도록.
‘모두가 당신을 사랑하게 할 것입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듯이 사랑하도록 할 것입니다.’
라카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손끝에서부터 천천히 입을 맞춰 올라갔다.
경건한 동작에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건 투이나도 마찬가지였다.
라카인은 한 번 내려앉을 때마다 깊은 맹세를 새겼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라카인은 드물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제게 당신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윽고 얼굴로 다가오는 라카인을 본 투이나가 거세게 뛰는 심장을 참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뼛속까지 저릿한 긴장감 끝에 부드럽게 라카인의 입술이 와 닿았다.
조심스럽게 윤곽을 따라 그리는 라카인의 마음이 그대로 차올라서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기다림이 찬사가 되고 접촉이 희열이 되는 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아, 그러나 지금에 비교할 때는 언제라도 없으리라.
길고 긴 시간동안 서로에게 깊이 잠겨들던 두 사람이 마침내 다시 떨어졌다.
‘행복하다.’
라카인은 지금 이 순간 투이나도 같은 생각을 한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더없이 행복했다.
투이나가 마침내 가쁘게 차오른 호흡을 내쉬었다.
그때까지 라카인을 꽉 붙잡고 있던 투이나가 어질어질한 눈으로 살짝 속삭였다.
“…라카인은 대체 언제 허락한 거예요?”
라카인이 그 질문에 더 없이 즐거움이 차올라 웃고 말았다.
“처음부터였습니다. 루가 님.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제 마음은 허락 없이 열린 문이 되어 피할 수 없는 시험을 받고 있었던 겁니다.”
투이나는 가슴이 저렸다.
만약 라카인이 구혼자가 되어 시험을 치르는 입장이었다면 어땠을까?
투이나는 자신이 만든 시험이 남편이 아니라 살인자를 찾는 시험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생각해보았다.
그래도 그는 모든 시험에 통과했으리라. 그리고 그와 결혼했으리라.
확신이 투이나를 가득 채웠다.
기꺼이 자신의 죄를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사랑하려고 하는 라카인을 만나 그녀도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감당하려고 했던 게 얼마나 거대하고 무거운 일인지 비로소 똑똑히 보였다.
그토록 버거운 짐을 한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나눠질 수 있다는 해방감이 다시없을 믿음과 충족감을 가져다주었다.
괜찮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도 괜찮다.
신이 되지 않을지라도 죄를 함께 이겨가기로 했으니까.
투이나가 라카인의 손을 맞잡았다. 그녀도 화사하게 웃고 말았다.
“사랑해요, 라카인! 우리 이제 세 번째 시험을 끝내러 가요!”
* * *
샨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그는 본래 즐기지 않던 산책을 겨울이 되어서야 자주 나섰다.
자리를 비운 신전의 주인을 기다린다고 말하기에는 마음이 용납하지 않았으니, 산책이라고 부르련다.
게다가 신전을 돌아다니면서 급하게 숨는 미천한 것들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아르힘의 자식들은 아르파가 만들어놓은 시체를 만지는 것조차 거부했기에 하인들이 직접 시체를 치워야했다.
그들은 전쟁터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두려움에 떨었다. 새삼 아르파 신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깨달은 듯 했다.
가차 없이 자신의 신도를 죽여 버리는 신을 보며 그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아르파가 원하는 대로.
“…….”
샨은 우물을 덮어놓은 뚜껑 위로 쌓인 눈을 보았다.
원래 아르힘의 겨울은 이보다 따듯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아르힘의 힘이 약해진 지금, 첫 눈이 내리자마자 빠른 속도로 신전까지 추위가 침범하고 있었다.
끼익.
샨은 가볍게 한 손으로 우물 뚜껑을 들어올렸다. 찰랑이는 수면 대신에 매끄러운 살얼음이 낀 우물로 빛이 반사되었다.
샨이 씨익 웃었다.
이 장면을 보기 위해서라도 산책을 나올 가치가 있었다.
이제 곧 세 번째 시험이다.
그리고 우물가에서 기다려야 그대가 나타날 걸 아니까.
파아앗.
밝아지는 보랏빛에 샨이 텅 뚜껑을 내려놓았다.
“딱 맞춰왔군.”
그가 뒷짐을 짚었다. 곧 하늘에서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지며 세 사람이 나타났다.
시드룬과 투이나, 그리고 라카인이었다.
샨은 느긋하게 그들이 아래로 내려올 때까지 기다렸다.
갑자기 찬 공기를 맞아 뺨이 빨갛게 얼긴 했지만 셋 모두 건강해보였다.
다 죽어가던 꼴로 떠나던 마지막 모습과 비교될 정도였다.
내심 생기가 넘치는 투이나의 모습에 만족한 샨이 다가갔다.
“세 번째 시험을 시작할 준비가 됐나?”
“벌써 우물이 얼었나요?”
깜짝 놀란 투이나가 다가왔다. 샨은 자신이 매일 신전을 돌며 모든 우물을 확인했다는 사실을 굳이 말하진 않았다.
“거의 다 얼었다. 내가 모르는 곳이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제가 없는 동안 신전 구경을 실컷 했군요.”
“그대가 언제 돌아올 줄 알아야 말이지.”
샨이 삐뚜름하게 우물에 기댔다.
“날 완전히 잊어버린 줄 알았다.”
“치료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투이나는 어깨를 살짝 으쓱이며 인정했다. 샨은 돌아온 투이나가 어쩐지 더 예뻐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평소보다 들뜬 동작에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 보기 좋았고, 시선을 두는 곳마다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이상할 만큼 눈이 부셨다.
아마 세 번째 시험이 끝날 때가 다가오니 마음이 감상적으로 변한 것이겠지.
속이 불편해진 샨이 일부러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시험 준비는 끝났나? 신전을 떠나있는 동안 우리가 찾아야 할 보물을 숨겨둘 시간이 없었을 거 아닌가.”
“보물은 이미 신전에 있어요.”
투이나가 태연하게 답했다.
“문제는 시작할 때인데…. 신전 중심에 있는 우물까지 얼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겠네요.”
“루가.”
갑자기 시드룬이 고개를 들었다.
“느껴집니까?”
“네?”
시드룬은 꼿꼿하게 머리를 세운 채 신전의 바깥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투이나와 라카인이 영문을 모르고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리는 게 보였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때 샨은 뒷골에 붙어있던 근육이 급하게 당겨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아르파가 나타날 때처럼, 기묘하고 불길한 예감이었다.
눈빛이 날카로워진 샨이 홱 고개를 돌렸다.
그도 시드룬이 무슨 소리를 하는 지 단박에 이해했다.
“아르힘의 힘이 약해지고 있다.”
“그건 원래….”
말을 잇던 투이나가 헉 소리를 냈다.
신전은 높은 지대에 있어 멀리까지 수도를 내다볼 수 있었다.
겨울임에도 온화한 기온으로 사근사근 내리던 눈송이가 갑자기 휘갈기듯 빠르게 사라졌다.
그건 바람이었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휘말린 눈발이 순식간에 수도를 덮쳤다. 도시를 보호하던 신의 힘이 거둬들여지고 있던 것이다.
“맙소사…!”
폭풍이 다가오듯 선명하게 변해가는 걸 보자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산이라도 뒷덜미가 쭈뼛 섰다.
‘젠장!’
아르힘의 힘 때문에 날씨가 미적지근하게 따듯하다고 불평할 때가 좋았지.
루가랑 결혼하기도 전에 수호신이 버티지 못한다면 이 땅은 이대로 재앙에 휩쓸리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아르파를 불러와 아르힘을 완전히 죽여 버려야 하나?’
샨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결혼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다면 유일하게 수호신을 가진 그가 아르힘을 먼저 장악해야 했다.
순서는 조금 뒤바뀌게 되겠지만 아르힘을 얻고 그 다음에 투이나와 결혼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샨은 선뜻 생각대로 나서지 못했다. 마음 속 어딘가에서 슬며시 주저하는 목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이 그렇게 되어버리면 루가가 자신을 선택하는 일은 영영 없을 거라고.
처음부터 강제로 치러지기 원했던 결혼이지만 지금 그는 투이나가 자발적으로 자신을 택해주기를 바랐다.
이기적이게도, 이제야.
샨이 이를 빠득 갈았다.
‘내가 두 번 다 시험에서 떨어진 탓이다. 그까짓 아무것도 아닌 선택에 이토록 절절 매게 된 건 다 그 때문이야!’
샨이 소리쳤다.
“이봐! 아르힘에게 돌아가 봐라! 이걸 멈춰 봐!”
명색이 루가라면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테지만.
돌아오는 정적이 몹시도 불길하게 샨의 귀를 때렸다.
대신 고막을 찌르는 가시처럼 거슬리는 목소리가 대신 쩌렁 울렸다.
“루가 님!”
호위 놈이었다.
샨은 잠시 그가 왜 얼간이처럼 미친 듯이 주변을 뛰어다니는지 알지 못했다.
눈앞에서 눈 폭풍이 몰려오고 있는데 한눈을 팔 겨를이 있나?
그러나 머리보다 빨리 가슴이 서늘하게 조여들었다.
있어야 할 사람이 없었다.
“루가?”
샨은 저도 모르게 위엄 없이 주변을 휙휙 둘러보고 말았다. 그러나 여전히 찾는 사람은 보이질 않았다.
투이나가 사라졌다.
당황한 샨은 저도 모르게 시드룬을 향해 냅다 고개를 틀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을 숨길 수 있는 건 저 마법사뿐이니까.
그러나 시드룬은 여전히 심각한 눈으로 다가오는 눈 폭풍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당혹이 점점 심장까지 번지는 걸 외면하며 샨이 고함을 질렀다.
“루가를 내놔라, 마법사!”
“…….”
그제야 시드룬이 비스듬히 고개를 틀었다.
“루가가 사라졌습니까?”
무덤덤한 대답보다도 저 무표정한 얼굴을 보자 갈기갈기 베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확 치밀었다.
저런 놈이 끝까지 구혼자 행세를 하다니.
샨의 속에서 애써 불길이 끓어올랐지만 차가운 불안이 자꾸만 그것을 꺼트렸다.
시드룬은 지금 투이나의 행방을 모른 체 하는 게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던 것이다.
‘어디에, 어디로 갔어?’
맥박이 사납게 뛰놀았다.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이던 호위가 이미 어디론가 뛰어갔다는 사실은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투이나가 바로 여기에 있었는데.
샨이 불처럼 진노했다.
“네가 아니라면 감히 누가 루가를 숨길 수 있단 말이냐!”
시드룬은 갈 곳 없는 화를 괜히 자신에게 푸는 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온 몸을 떨리게 할 만큼 차갑게 내려앉는 기온과 어지럽게 사그라드는 신의 힘도 함께 보였다.
마법사답게 그는 판단했다.
“나는 모릅니다.”
“뭐라?”
“하지만 세 번째 시험이 시작된 것 같군요.”
“……!”
그제야 샨은 자신의 손가락이 하얗게 얼어붙은 우물에 닿아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얼음에 살이 달라붙는 것조차 느끼지 못한 그는 이 추위라면 신전에 있는 모든 우물이 곧장 얼어버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찾아야 할 보물이 무엇인지도.
‘마지막 우물이 얼 때 가장 좁은 곳에 숨겨진 보물을 찾으라.’
‘투이나.’
쩌적. 우물에 붙어있던 살점을 망설임 없이 떼어내며 샨이 달려 나갔다.
* * *
똑.
물이 떨어지는 소리에 투이나는 잠깐 눈을 깜박였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물소리는 갑자기 이동된 투이나의 발에서 튄 소리였다.
분명히 방금 전까지 구혼자들과 라카인과 함께 신전으로 다가오는 눈발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눈 깜짝할 사이 이곳으로 옮겨져 있던 것이다.
‘어떻게?’
투이나가 당혹스럽게 몸을 틀었다.
바닥은 온통 찰방거리는 물로 가득했고, 좁은 벽면은 따듯했다.
그녀는 성소 안에 있었다.
“라카인?”
투이나는 혹시 다른 사람도 함께 옮겨온 건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성소에 다른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투이나의 표정이 싸해졌다.
그녀가 자리를 비운 동안 아르힘에 정말 무슨 문제가 생기긴 생겼구나 싶어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르힘 님!”
“나를 두 번째로 부르는구나.”
“!”
화들짝 놀란 투이나가 고개를 돌렸다.
분명히 아까까지 아무도 없던 장소에 소년의 모습을 한 아르힘이 서있었다.
멀쩡히 서있는 모습에 가슴이 내려앉을 만큼 안도한 투이나가 서둘러 다가갔다.
“아르힘 님! 괜찮으세요?”
아르힘은 약간 찡그린 얼굴로 투이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걱정이 와락 치민 투이나가 어쩔 줄 모르고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췄다.
“바깥에서 축복이 무너지는 걸 보았어요! 대체… 갑자기 어떻게 된 일이세요? 상태가 더 안 좋아지신 건가요?”
“그렇지 않다.”
걱정을 퍼붓는 투이나를 향해 아르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여전히 전과 같은 상태다.”
“그런데 왜 갑자기….”
“아이야. 왜 마법사의 마을로 갔느냐?”
아르힘이 불쑥 투이나의 말을 끊었다. 어리둥절해진 투이나가 되물었다.
“알고 계셨어요? 아니… 바보 같은 말이었습니다. 당연히 알고 계시겠죠.”
“왜 갔느냐 물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눈이 동그래진 투이나가 대답했다.
어쩐지 분위기가 전과는 달랐다. 아르힘이 마치 그녀를 힐책하는 듯한 말투였던 것이다.
아르힘은 여전히 어두운 표정으로 투이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더냐?”
“네? 무슨, 그렇지 않아요!”
놀란 투이나가 저도 모르게 평소에 쓰던 말투로 대답하고 말았다.
“제가 어찌 아르힘 님을 속이겠습니까?”
“나를 믿지 못하고 마법사의 힘을 택한 걸 속였다는 말이 아니면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지?”
투이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런…! 그건 라카인이 얼룩병에 걸렸기 때문이지 결코 아르힘 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어째서?”
아르힘이 재차 다그쳤다.
투이나는 더욱 당황했다.
얼룩병에 걸린 자는 아르힘의 힘으로 고칠 수 없다는 건 당연한 상식이지 않나.
유일한 예외가 있긴 했지만.
“그건…….”
투이나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점점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어떤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침범했다.
그러나 그 문장은 루가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아르힘은 투명하고 맑은 눈동자로 점점 하얗게 질려가는 투이나의 얼굴을 그대로 지켜보았다.
혹시나 하고 커져가는 예감을 지우려고 투이나는 필사적으로 예외에 매달렸다.
“……아르힘 님은 저 말고 다른 사람의 얼룩병을 고쳐주실 수 없으니까요. 얼룩병자의 모든 상처를요.”
“내 뜻을 오해했구나.”
아르힘이 차분하고도 아름다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치료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이다.”
투이나의 믿음은 아르힘의 선함에 기대어 왔다.
사람들을 치료하고 약하고 아픈 자들을 돌보는 신을 따르는 것은 제 삶을 돌보는 것보다 더 벅차고 숭고한 일이니까.
그러나 지금 투이나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소년이 낯설었다.
자신의 신이 낯설었다.
“하지… 않는다니요.”
투이나는 부정하고 싶었다.
“일부러 다친 자들을 내버려두었다는 뜻은 아니시겠죠.”
“네가 이해한 뜻이 옳다.”
“……어째서.”
아르힘은 묘한 눈길로 투이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오직 너만을 사랑한다는 걸 몰랐더냐?”
머리 위로 종이 떨어졌다.
둔탁한 충격과 함께 퍼져나가는 멍한 소리는 그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투이나의 머리 위에 매달린 황금빛 종은 건재했고, 방금 들은 목소리도 의심할 여지없는 진실이었다.
아르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투이나에게 천천히 읊조렸다.
“마법으로 훔쳐간 너의 복제가 어떻게 호위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 거냐.”
“…….”
“복제가 훔쳐낸 것은 나의 힘이다. 그 삿된 것은 너의 모습을 하고 영혼의 세계에서 내 힘을 끌어다 썼다.”
아르힘은 고요히, 그러나 숨길 수 없는 분노를 한 자락 드러냈다.
그것만으로도 평범한 사람은 눌려버릴 만큼 위압감이 밀어닥쳤다.
아르힘은 이내 투이나가 영향을 받을까봐 감정을 거둬들였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투이나의 다리는 이미 실낱같은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서있는 게 기적일 만큼.
아르힘은 상냥히 물었다.
“정녕 몰랐더냐?”
투이나는 가까스로 끝없는 나락에서 스스로를 붙잡았다. 이런 곳에서 무너지기 위해 믿어온 것이 아니다.
투이나가 간신히 속삭였다.
“아르힘 님은 병에 걸리신 겁니다.”
여전히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목으로 투이나가 애써 숨을 쉬었다.
“베인의 몸에 갇히셨을 때, 아르힘 님이 그의 영혼에 영향을 받아 버리신 겁니다.”
“그 아이가 너를 사랑했으니까?”
아르힘은 참으로 소년답게 되물었다. 해맑은 질문이 긴 가시처럼 투이나의 심장을 찔렀다.
죄책감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네. 그러합니다.”
그러나 투이나는 버텨냈다. 가혹함이 다시 그녀의 눈을 트이게 했다.
“아르파가 샨에게 물러나듯, 사람을 아끼는 아르힘 님의 마음이 베인에게 잠식당하셨다면. 그래서 당신의 힘이 약해지고 지금 같은 오해를 불러오셨습니다.”
아르힘은 흥미로운지 잠자코 투이나의 가설을 끝까지 들어주었다.
“그럴 지도 모르지.”
선선한 대답에 투이나의 안색이 미약하게 밝아졌다.
그러나 아르힘은 그녀의 기대를 무참히 박살냈다.
“하지만 아이야. 너도 이제는 내가 인간이었던 시절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 않느냐?”
쿵. 투이나의 심장이 떨어진 자리에서 꿈틀거렸다.
아르파의 분노는 겪을수록 점점 사람처럼 보였다.
원래 그러하였던 것을 수호신이라는 이름으로 가려두었던 것처럼.
아르힘이 살짝 턱을 당겼다.
“내가 정말로 아무 감정도 모를까?”
아르힘이 쓴 것을 어금니로 지그시 물고 단 것을 찾는 아이처럼 웃었다.
“나도 사랑이 무엇인지 안다. 너를 이토록 아껴주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어찌 잊겠느냐.”
아르힘은 깨지기 쉬운 것을 다루듯 투이나를 향해 손을 올렸다.
그 모습이 한 때 베인이 하던 동작과 몹시 비슷해서 투이나는 순간 소스라쳤다.
짜악.
감히 신의 손등을 쳐낸 투이나는 잠시 아찔해졌다.
모든 것이 망가지고 있었다.
아르힘은 투이나가 쳐낸 손을 내리더니 슬프게 웃었다.
“…그의 영혼은 단순히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믿어다오.”
“…아니요.”
투이나는 완강하게 물러났다.
‘라카인.’
할 수만 있다면 그를 힘껏 끌어안고 싶었다. 그와 함께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라카인만 있다면.
투이나는 이럴 리 없다며 방황하는 마음을 질끈 그로 묶었다.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라카인도 있다.
투이나는 똑바로 턱을 치켜들었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르힘이 한때 자신을 향해 모든 믿음과 기도를 바쳤던 아이를 응시했다.
그 아이가, 투이나가 말하고 있었다.
“제 마음은 라카인과 맞바꾸었습니다. 더 훌륭한 것도, 더 모자란 것도 없이. 전 그를 사랑해요.”
그 때까지 온화하던 아르힘에게서 감정의 여파가 사라졌다.
투이나는 처음으로 아르힘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그 민낯을 본 것 같았다.
기절하리만큼, 외경이 정신을 짓눌렀다.
“너를 결혼시키려 했던 일을 후회한다.”
인간의 흔적이 사라진 아르힘의 목소리가 멀리서 치는 천둥처럼 울렸다.
“그와 만나게 했던 일을 후회한다.”
투이나가 눈가를 움찔했다.
“너에게 선택권을 주려던 일을 후회한다.”
투이나는 가슴이 갈라지고 찢어지듯이 아팠다.
단순히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달리 아르힘은 그녀에게 믿음이요, 진실이자, 선의이며 축복이었다.
그 모든 걸 한꺼번에 저버리게 된 자신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만큼 괴로웠다.
그럼에도.
“당신의 후회를 받겠습니다.”
투이나는 기어이 눈물을 참아냈다. 오장육부를 뒤틀며 올라오는 고통을 겸허히 인정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투이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니 당신이 가진 병과 함께 그 마음을 거둬주세요. 다시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신의 자리로 돌아가시길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러나 사랑한다던 투이나의 애걸하는 목소리에도 아르힘은 무표정했다.
“너는 포기했다.”
“…네?”
“너는 수호신의 자리를 포기했다. 그러니 내게 그리 빌어서는 아니 돼.”
투이나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아르힘은 그녀가 라카인을 위해 무엇을 포기했는지 듣지 않고도 너무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너 또한 사람을 위해 수호신이 되는 길을 저버렸다. 내 마음이 그보다 못하다고 믿느냐?”
“그건…….”
아르힘의 말이 옳았다.
수호신의 자리를 포기한다는 무게는, 투이나 자신보다 아르힘을 믿는 자가 많다는 사실로 반박할 수 없다.
하나의 믿음은 다른 모든 믿음과 같게 대해져야 하므로.
투이나가 자신의 신념에 가로막힌 사이, 아르힘이 말을 이었다.
“나도 너를 사랑한다, 투이나.”
아르힘이 달콤하게 귓가에 속삭였다.
“너를 사랑하게 된 까닭에. 나는 병이 낫지 않는 길을 택했다. 너만을 곁에 두고 싶어진 게 그리도 큰 죄였더냐? 너의 사랑이 죄더냐?”
아르힘은 그녀를 흔드는 말을 너무도 잘 알았다. 오랫동안 그녀의 믿음을 받아왔기에.
투이나가 터져버릴 것 같은 가슴을 움켜쥐고 말을 잃은 그 모습이 아르힘을 만족스럽게 했다.
투이나가 라카인을 사랑하는 한, 그녀는 절대로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리라.
일부러 소년의 모습을 택한 아르힘이 담뿍 기대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이야.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는 말 못 하겠지.”
“……!”
투이나의 신앙을 헤집어놓고 아르힘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다시 되살렸다.
투이나의 눈빛이 변했으나 아르힘은 만족했다. 그녀는 약한 자, 다친 자, 고통 받는 자를 끝끝내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끝까지 사랑할 것이다.
설령 그것이 신일지라도.
“그거면 되었다.”
만족한 아르힘이 서 있던 자세 그대로 서서히 물러났다.
그의 모습이 점차 벽 너머로 흐려지자 투이나는 다급히 찰방거리며 뛰어갔다.
“아르힘 님, 안 됩니다! 절 내보내주세요!”
“세 번째 시험은 걱정하지 말거라.”
아르힘은 다시 멀리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말했다.
“내가 대신 끝내주겠다.”
“아르힘 님!”
찰박찰박 물 위를 뛰어간 투이나가 새하얀 벽에 부딪쳤다.
쿵!
주먹으로 벽을 내려친 투이나가 다급하게 출구를 찾았다.
그러나 성소에 몇 번이나 드나드는 동안 이곳에 출입구가 없다는 사실이 없다는 건 그녀가 제일 잘 알았다.
오직 아르힘의 허락이 있을 때만 받아들여지는 성소가 이제는 철통같은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안 돼.’
초조해진 투이나의 마음을 불안이 치고 올라왔다.
아르힘은 단단히 변해 있었다.
숨기지 않는 그의 마음에 당혹한 만큼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걱정이 뇌리를 지배했다.
아르힘의 병이 진실이라면.
만약 그의 병이 베인에게서 옮아온 사랑이라는 감정이라면.
투이나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놔둘 리가 없었다.
이미 베인에게서 한 차례 겪어보았던 오싹함이 투이나의 가슴을 할퀴었다.
‘제발 그건 베인의 영혼이 준 영향이 아니어야해.’
‘하지만 처음부터 아르힘님이 나를 사랑했다고?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이 왜 일어난 거지?’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그만. 그만 생각해. 집중하자.’
투이나는 괴롭게 파고드는 진실을 어지러운 마음에서 걷어냈다.
지금 중요한 건 여기서 나가 아르힘을 막는 것이다.
투이나는 물에 젖은 바닥과 벽을 암담하게 올려다보았다.
나갈 수 있는 단 하나의 출구만 있다면…!
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투이나는 간단히 포기하지 못했다. 그녀는 벽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같은 시각, 라카인은 똑같이 벽에 가로막혀 있었다. 거칠게 흩어지는 입김이 점점 차갑게 얼어붙었다.
“…….”
라카인은 겨울을 대비해 옷을 껴입었음에도 뼈끝까지 스며드는 추위를 막을 수가 없었다.
고향인 모하세스에서 이보다 더 혹독한 추위도 겪어보았으나, 투이나를 잃어버린 지금처럼 오한이 들고 턱이 덜덜 떨린 적이 없었다.
“루가!”
멀리서 샨이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라카인은 아까 전부터 먼저 도착해 시도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사라진 투이나가 성소에 있을 거란 직감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본능보다 더한, 영혼에서 울부짖는 듯한 경고였을까.
라카인은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도달한 성소를 보면서 지독한 막막함을 느꼈다.
종탑의 새하얀 벽에 점점 서리가 올라왔지만, 자신이 방금 전까지 공격했던 흔적은 실금만큼도 새겨지지 않았다.
어깨가 바수어지도록 칼을 내려치고 이를 악물며 탑의 벽을 때렸지만 그 어떤 충격도 제대로 가 닿지 않았다.
마치 탑이 모든 힘을 흡수해버리는 것 같았다.
혹은 그의 힘으로는 이까짓 벽조차 뚫지 못한다는 경고처럼도 보였다.
라카인이 이를 악물었다.
그런 이유로 포기할 거라면 진작 포기했을 것이다.
이미 추위와 연이은 공격에 혹사당한 손가락이 비명을 지르는데도 라카인은 다시 한 번 종탑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빠득.
뼈가 꺾이는 느낌이 났다.
“비켜라!”
그 때 한 발 늦게 도착한 샨이 노성을 내질렀다.
이미 비 오듯이 땀을 흘리고 있던 라카인은 그가 어떻게 성소로 왔는지, 왜 루가를 찾는지 관심조차 없었다.
다시 한 번, 또 한 번 더 탑을 공격하는 데 그의 온 정신이 집중되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미친 듯이 달려왔던 샨이 단숨에 남은 언덕을 뛰어 올랐다.
라카인을 발견한 그가 경멸스럽게 소리쳤다.
“어리석은 것! 나서지 말고 꺼져라! 방해된다!”
라카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이미 샨은 탑에 정신이 팔린 뒤였다.
호위 놈이 여기 온 것을 보니 루가가 성소에 있다는 판단이 맞아 떨어진 게 틀림없었다.
신전에서 가장 좁은 곳, 그곳에 숨겨진 보물.
내가 정답을 찾아냈다는 희열이 샨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샨은 가쁜 숨으로 재빨리 손가락을 물어뜯었다. 추위 탓에 피는 천천히 흘러나왔지만 아르파를 부르기엔 충분했다.
눈이 붉게 물든 샨이 똑같이 탑을 향해 힘을 뿜어냈다.
“루가를 꺼내라!”
쾅!
탑이 뒤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폭설이 그들의 등을 덮쳤다.
라카인은 후두둑 떨어지는 눈과 뜨거운 피에 잠시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보랏빛 마법진이 나타난 것도 언뜻 본 것도 같았다.
그 때문에 라카인은 감각이 없는 손으로 다시 탑을 공격하기 전에 문득 종탑의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한 소년이 앉아 있었다.
온 세상을 하얗게 덮는 눈보라 속에서도 소년은 가벼운 차림이었다.
소년은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영혼 또한 육체이기는 하였으나, 일부로는 전체를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수호신도 이만큼이나 육체를 회복한 적은 없었다.
아르힘이 아래쪽을 굽어보았다.
종탑을 둘러 싼 구혼자들이 탑을 공격하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 중에서 가장 자격도 없고, 용납도 할 수 없는 남자가 이쪽을 올려다보는 게 느껴졌다.
아르힘은 일부러 그를 못 본 체했다.
그를 보고, 마음을 읽고, 그러다 참을 수 없게 되면 곤란했다.
아직은 수호신이어야 했다.
투이나가 자신의 성소 안에 갇혀있는 한 쉽게 사라질 수는 없지.
아르힘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모든 구혼자가 모였구나.”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비로소 다른 자들도 고개를 들었다.
아르힘은 신전 안에 팽팽하게 맞서는 다른 힘을 가늠해보았다.
아르파 신의 기세야 대단했지만 그가 쓸 제물은 많이 남지 않았다. 그동안의 일로 대부분의 인력이 대피했기 때문이다.
또한 아르파 스스로 제 하인을 죽여 놓았으니.
마법사의 힘은 늘 똑같았지만, 투이나를 복제해 간 이후로는 약간의 변화가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는 복제한 투이나를 데려오지 않는 실수를 범했다.
결국 마지막에 결과가 뒤집히는 일은 없으리라 판단한 아르힘은 약간 실망했다.
투이나에게 더 좋은 구혼자를 구해줄 것을.
“성급히 마지막 시험에 응하기 전에 구혼자 모두에게 알리겠다.”
종탑 끝에 걸터앉은 아르힘은 근엄한 목소리와 달리 다리 한 쪽을 아이처럼 까딱거렸다.
“이번 시험은 다른 시험과 달리 내가 직접 주관할 것이며, 통과하지 못한 자는 죽게 될 것이다.”
싸늘한 바람이 종탑을 타고 올랐다.
아르힘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가여운 아이야.’
투이나는 세 번째 시험을 통과자 없이 넘기려고 했지만, 아르힘은 그녀의 생각을 손바닥처럼 읽고 있었다.
‘내가 왜 너를 사랑하면서도 다른 자와 결혼시키려고 했겠느냐.’
성소에 있는 동안 머리가 차분해지면 투이나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수호신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자에게 신의 힘을 넘길 수는 없다.
‘네가 라카인과 결혼하면 그를 죽이게 된다.’
‘그래도 고집을 부리겠느냐?’
아르힘은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하는 투이나 대신 소리치는 샨과 시드룬을 보았다.
“당연히 응하겠다!”
“상관없습니다.”
아르힘은 어리석은 구혼자들을 향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에게 시련이 있으리니.
그 때, 또 다른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아직 다른 구혼자가 이곳에 오지 못하였습니다.”
라카인이었다.
설마 베인을 언급할 줄 몰랐던 아르힘의 눈이 갸름해졌다.
눈 속에서 라카인과 아르힘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샨과 시드룬조차 황당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무어라?”
“그에게도 참여할 권리가 있습니다.”
“크로퍼드는 대답할 수 없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저 무뢰한 것이… 시체라도 끌어들일 셈이냐?”
“정당함을 말할 뿐입니다.”
아르힘은 라카인이 시간을 벌어보려는 수작인 걸 알면서도 기분이 나빠졌다.
투이나를 위해 일부러 그를 살려두려고 외면한 보람도 없이 저 어리석은 것은 자신을 보라 선언했다.
게다가 마치 투이나와 똑같은 믿음을 가졌다는 듯, 당당히 말하는 꼴을 참을 수 없었다.
아르힘은 날이 서린 혀끝으로 내뱉었다.
“그는 걱정할 필요 없다.”
“허나….”
“내가 그의 영혼을 데리고 있다.”
아르힘의 몸에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가 받은 모든 믿음과 영혼과 함께.
“내가 베인의 답을 들려줄 것이다.”
거센 바람이 그들을 휩쓸었다.
* * *
투이나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고작 벽 하나를 사이에 두었을 뿐이지만. 완벽한 침묵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라카인! 시드룬! 샤아안!”
계속 소리를 지르던 투이나가 기침을 했다. 목이 천 갈래로 찢어지듯이 아팠다.
그러나 바깥의 상황을 알 수 없다는 답답함이 투이나를 잠시도 쉬지 못하게 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찰팍.
물 위에 주저앉은 투이나가 무심코 바닥에 고인 물로 손을 가져갔다.
벽을 때리느라 퉁퉁 부은 손을 식힐 겸, 갈라진 목을 조금이라도 적실 겸 투이나는 성소의 물을 받아 마셨다.
“욱…!”
그러나 물을 조금 떠 입에 가져가자마자 투이나는 쓰라린 고통에 몸서리쳤다.
‘소금물이잖아?’
물이 맑고 투명했기에 설마 다른 게 섞여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반사적으로 찡그렸던 투이나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영혼들.’
예전에 바다에서 영혼의 소리를 들었을 때, 그들은 소금을 통해 건너온다고 이야기했다.
‘나도 영혼의 세계에 갈 수 있을지도 몰라!’
투이나가 물을 움켜쥐었다.
시드룬은 영혼의 세계를 열기 위해서 자신을 필요로 했다.
‘내가 열쇠라면.’
투이나가 결심을 내렸다.
마법사 없이 영혼의 세계에 가는 건 몹시도 위험한 일이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바다에서 겪었던 일을 딱 한 번만 재현하면 된다.
운이 좋다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 테고, 그러지 못해도 다른 신이 상황을 알아차릴 수도 있었다.
‘아르파도 수호신이니까 영혼의 세계에서 부르면 분명히 들을 수 있을 거야.’
설령 아르힘에게 들킨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가 성소로 돌아와야 설득이라도 해볼 테니까.
긴장한 투이나의 호흡이 가빠졌다.
‘아아. 시드룬의 머리카락을 가져왔으면 좋았을 걸.’
신전에 올 때 투이나는 시드룬과 함께 출발하여 그의 마법이 별로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투이나는 같이 오지 않은 다른 호위들에게 각각 그의 머리카락을 맡겼던 것이다.
각자 할 일이 끝나면 다시 신전으로 돌아오기로 했지만, 투이나는 호루니와 스카차가 언제 도착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신전에 도착하면 너무 늦어.’
투이나는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복제 투이나는 영혼의 소리를 듣는 걸 아주 쉽게 얘기했었다.
‘나도 할 수 있어.’
처음부터 자신에게서 온 힘이니까.
투이나는 양손으로 성소의 물을 떠올렸다.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이보다 성스러운 제물은 없으리라.
바닥없이 흐르는 물이 그녀의 팔을 타고 흐르며 희미한 소금기를 남겼다.
아르힘이 성소를 지키는 한 결코 그녀를 적시지 못했던 물이 조금씩 옷자락에 스며들었다.
‘부디 대답해주세요.’
몸이 무거워지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투이나는 간절히 기도에만 집중했다.
‘만약 제 안에 정말로 수호신이 있다면. 나의 병이 정말로 다른 사람의 영혼이라면.’
‘나는 당신을 믿겠습니다.’
파아앗.
시드룬의 마법진처럼 화려한 빛은 아니었으나, 서서히 강에서 폭포를 만나듯 귓가에 소음이 생겨났다.
“나비 바람에 여울 듯 가는 소리.”
“들려? 들려? 들려?”
“루가야. 복제된 쪽이 아니라.”
“우릴 불렀어.”
들을 때마다 소름끼쳤던 속삭임들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투이나는 벌떡 일어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자제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말 여러분이 있었군요!”
“우린 언제나 언제나 있었는걸.”
“기다리고 있었어.”
“너도 알았지. 너도 알겠지.”
흥얼거리는 소리들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그러다 투이나는 그 사방이라는 게 정확히 자신의 얼룩들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신기한 눈으로 손등의 회색 얼룩이 조금씩 꼬물거리며 움직이는 걸 본 투이나가 금세 다급해졌다.
“아르힘 님이 절 여기에 가뒀어요. 혹시 여기서 나가는 방법을 아세요?”
“나가?”
쏴아아.
영혼들이 한꺼번에 떠드느라 파도에 여기저기서 자갈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났다.
“알면서 물어보다니, 기억력이 나쁘, 나쁘구나.”
“우린 계속 네게 말해왔는데.”
“방법은 딱 하나야.”
“죽으렴.”
순식간에 투이나의 흥분이 가라앉았다.
“……네?”
“너도 알잖아. 네가 죽어서 수호신이 되어야 진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거.”
“우린 육체에 갇혔어. 이제 그만 영혼의 세계로 돌아가 편해지고 싶어.”
“그러니까 네가 필요해.”
망연자실해진 투이나가 멍하니 얼룩처럼 새겨진 타인의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아르힘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정말로 병이구나.
타인을 희생해서라도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희생하는 길 위에 서있을 때는 몰랐다.
그러나 그 길에서 내려오자 비로소 그들의 잔혹함이 보였다.
왜 라카인이 절절하게 고백하면서까지 자신을 막으려 했는지 비로소 똑똑히 보였다.
그들을 통해서 수호신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녀는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모든 걸 준 뒤에도 여전히 살아있다면, 결국은… 다시 되돌려받고 싶어질 테니까.
그게 수호신이니까.
그들에게 준만큼 사랑을, 믿음을 다시 되돌려 받아야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는 신.
투이나는 텅 빈 가슴이 갑자기 서늘해지며 약동하기 시작하는 걸 깨달았다.
‘방금….’
아주 중요한 실마리가 그녀를 스쳐지나간 것 같았다.
어떻게 이것이 중요한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허나 오래전에 투이나는 아르힘에게 비슷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막 되살아나 살인자를 찾을 때, 신에게 말했다.
사람이 그럴 수 있고, 그러고 싶다고 해도 정말로 살인에 이르는 이유를 물어보겠다고.
그리고 그녀는 지금 세 번째 시험을 치르는 중이다.
투이나는 멍하니 아득함에 빠져들었다.
‘아르힘 님도 나처럼 수호신이 되는 과정을 거친 사람이야. ……사람.’
거기에 해답이 있지 않을까?
이미 아르힘은 모두를 굽어 살피며 사람들을 돌보는 신의 자리에서 반쯤 내려와 있었다.
원래 사람이었던 자가 지나치게 사람에 가까워져 위험해졌다는 말은 몹시도 비정하게 들리지만.
투이나가 마음을 다잡았다.
“우리 말 안 들려?”
“죽으라니까?”
“수호신이 되어줘!”
투이나는 소란스럽게 영혼들이 떠드는 소리에 귀를 닫았다.
아르힘이 변화한 이유, 변화할 수 있었던 이유가 손에 잡힐 듯이 명료해지고 있었다.
그것만 알아낸다면 아르힘은 멈춘다.
‘게다가 어쩌면 모든 구혼자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녀에게 얽힌 이들은 모두 영혼의 문제를 겪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조차도.
그 모든 일들을 해결할 열쇠를 지금 막 찾아낸 것 같았다.
답은 언제나 문제 속에 있다.
구혼식을 끝내는 방법은 구혼식을 시작한 이유에 있을 것이다.
‘이 시험의 해답을 풀어야 하는 건 나야.’
투이나의 초점이 똑바로 맞춰졌다.
짙은 갈색으로 움츠러들어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빛을 받아들이며 밝아졌다.
마음 가득히 의지가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