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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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영혼을 빼앗긴 빈 몸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이끌었노라.

투이나는 창문 하나 달린 좁은 감방에서 수호신이 될 자신의 미래를 들려주었다.

새로운 신화를 듣기엔 적절하지 못한 장소 같았으나, 적어도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귀 기울였다.

“…그러면 마지막에는 베인도 깨어나게 될 거예요.”

“아아…!”

레오나는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처럼 먹먹한 소리를 터트렸다.

“그렇게만 된다면 제 몸이라도 바치겠습니다! 무엇이든 하겠어요!”

무조건적인 감격에 겨운 레오나와 달리 마디악은 처음의 충격에서 벗어나 신중한 표정이 되었다.

“…자네, 집안에 재산이 얼마나 남았지?”

“그건 갑자기 왜 묻습니까?”

“의회에 매수한 자들이 얼마나 남았냔 말일세.”

비로소 레오나가 감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났다.

“아실 만한 분이 대놓고 묻는 걸 보니 당신도 루가 님의 뜻에 찬성하는군요?”

“그럼 내가 여기까지 들어놓고 거절하겠나?”

마디악이 바닥에 짚은 지팡이 위를 감싸 쥐었다.

“일전에 루가 님께 부탁을 드리면서도 못 할 짓을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역시 루가 님은 제 하찮은 걱정에서 벗어나 계시는군요.”

마디악이 소매 끝으로 눈물을 찍었다.

“저는 오히려 반갑습니다. 무턱대고 방황하는 것보다는 새 수호신이 저희를 책임져주신다면 기쁘지요.”

“고마워요, 마디악.”

“혹여 이 늙은 몸으로 루가 님이 신이 되시는 날까지 버티지 못한다고 해도 준비는 해놓겠습니다. 후임들 중에 입이 무거운 자가 많아요.”

투이나는 그녀보다 먼저 죽음을 이야기하는 마디악을 잠깐 바라보았다.

마디악에 비하면 새파랗게 젊은 투이나가 건네는 제안이 얼마나 기이할까?

앞으로 살아갈 날이 창창한 젊은이가 죽어 수호신이 되어봤자 사실 마디악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일 터였다. 큰 영향도 미치지 않을 거다.

그러나 마디악은 이 나라가 처하게 될 위기를 이해하고 투이나의 선택을 지지했다.

비록 그 대가로 치를 삶이 비록 얼마나 중요한지 서로에게 말하지 않아도.

미래를 위해서.

“부탁할게요.”

투이나는 단단히 다짐을 받은 뒤 레오나의 감방을 빠져나왔다. 스카차가 살짝 물었다.

“그런데 수호신이 사라진 공백기를 수습하기에는 크로퍼드 말고도 더 적절한 인물이 있지 않겠습니까?”

“레오나가 지금 갇혀있어서요?”

“예. 게다가 죄인이잖습니까. 재산도 이미 대부분 빼앗겼을 텐데요.”

스카차가 낮게 속닥거렸다.

“그래서 더 낫죠. 힘이 있는 사람한테 새로운 수호신을 알리는 일을 맡기면 거꾸로 그 사람한테 권력이 쏠릴 테니까요.”

신전이 얼마나 쉽게 레오나의 매수에 넘어갔는지 생각해보면 아무리 마법의 개입을 포함해도 모자랐다.

베인이 신까지 제 몸에 가둬 힘을 얻으려고 한 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레오나에게는 한 가지 장점이 있으니까요.”

“내깃돈 말씀이시군요.” 

마디악이 자연스레 말을 받았다.

“구혼식이 끝나면 모든 자가 내기에 건 돈을 받으러 크로퍼드 상단을 찾아갈 테니까요.”

마디악이 여전히 기절한 호위를 딱하게 한 번 내려다보았다.

“레오나 크로퍼드가 붙잡힌 이후로 원래 상단이 가져갈 수수료까지 패배한 자들에게 돌려준다면 확실히 빠질 자가 없을 겁니다.”

그것이 투이나가 레오나에게 부탁한 조건이었다.

감금된 상태에서도 레오나는 여전히 내기를 위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정보를 아는 자가 그녀밖에 없었으니까.

“그건 원래 상단 재건에 쓸 돈이었을 겁니다. 크로퍼드가 그렇게 쉽게 동생을 살릴 돈으로 넘긴다고 해 놀랐습니다.”

“베인을… 위해서도 그랬겠지만, 신을 잃고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돕고도 싶었을 거예요.”

레오나는 그게 뭔지 아니까.

직접 수호신을 잃은 상단을 일으켜 세운 장본인이라서 더욱 최선을 다해줄 거라 믿었다.

모든 의문을 해소해 한시름 던 마디악이 물었다.

“그럼 루가 님은 정확히 언제 수호신이 되시는 겁니까?”

투이나는 어쩔 수 없이 마디악에게서 정치인 특유의 무신경함을 느끼고야 말았다.

가급적이면 그 화제를 피하고 싶었다.

투이나가 수호신이 된다며 안도하는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건 그녀의 죽음이었다.

아르힘의 힘이 다하는 날, 그녀는 저 스스로 심장에 칼을 찔러 넣어야 한다.

누군가가 아르힘이 사라지는 순간 때맞춰 투이나를 살해해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토록 살고자 했는데/…/.’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먼 길을 돌아 다시 죽음을 마주하게 된 투이나는 마음을 결연히 다졌다.

‘당신을 위해서 다시 한번 되살아날게요.’

투이나는 마디악을 위해 자기가 죽을 시간을 언급했다.

“때가 되면 아르힘 님이 알려주실 겁니다.”

* * *

낙엽이 산산이 부스러졌다.

한때 벽을 근사한 초록빛으로 물들였던 나뭇잎은 호된 계절의 바람을 맞아 갈색으로 시들어갔다.

살아있을 때는 그토록 찬사의 대상이었으나 일단 겨울을 마주한 생명은 시들어 꼬부라져 제거의 대상이 되었다.

신전에 있는 시종들이 이동을 제한받은 탓에 원래 수행해야 할 대부분의 일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진작 빗자루와 막대기를 동원해 벽에서 벗겨냈어야 할 식물들은 고스란히 수직 정원에 매달려있었고, 고요한 신전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한층 더 으스스한 느낌을 풍겼다.

샨은 주변에서 만들어내는 불길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바깥을 거닐었다.

투이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그 모든 모습을 라카인과 호루니가 몸을 숨긴 채 지켜보았다.

투이나가 신전 밖을 빠져나가면서 부탁한 대로 샨을 감시하고 있었지만 호루니는 계속 등골이 오싹해졌다.

샨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인이 병에 걸려 나올 수 없는 집에 저토록 자연스럽게 머무는 사람이 좋아 보일 리는 만무하다.

게다가 상대는 정말로 집주인의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는 수호신이었다.

‘빨리 돌아오세요, 루가 님.’

호루니가 초조하게 입김을 뿜어냈다.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으나 그녀는 추위조차 느낄 수 없었다.

샨이 즐겁게 돌아다니는 동안 잘근거리며 밟히는 낙엽마저 시체가 지르는 비명처럼 빠각, 빠각 하고 들렸다.

호루니는 아까도 그랬던 것처럼 애써 라카인이 숨어있을 장소를 예측해보기로 했다.

샨을 계속 쳐다보고 있는 것보다는 그게 나았으니까.

‘아까 그냥 같이 따라갈 걸 그랬어.’

루가 님이 주신 임무라 괜히 자존심을 세워 호루니와 라카인은 따로 행동하기로 했다.

그 결과 라카인이 대체 어디 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호루니는 몸을 숨기고 있으면서도  몸에 달라붙는 불길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들키고 말 거야.’

자신의 기척과 긴장한 땀방울마저 샨에게 위치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

만약 자신이 인질로 잡혔을 때 투이나가 무슨 표정을 지을지 감히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주 깊은 내면 한쪽에서는 그런 상태가 되어서라도 정말로 투이나가 자신을 아끼는지 궁금해했다.

‘정신 차려.’

호루니가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호위로서 이런 불측한 마음을 품을 때마다 얼마나 기도를 올렸는지 모른다. 얼마나 죄책감에 빠졌는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투이나에게 고백하겠다는 라카인을 더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하.”

갑작스런 숨소리에 호루니가 바짝 기둥으로 등을 붙였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샨의 상태를 다시 확인했다.

계속 주변을 서성이던 샨의 동작이 갑자기 멎어있었다.

‘뭐지?’

샨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단단히 굳은 등만 보아도 그가 갑자기 엄청 화가 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나와라.”

호루니가 창을 잡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들켰나?’

자신에게 한 소리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만약을 대비해 샨과 싸울 각오까지 해두었지만 혼자 대적해서 얼마나 시간을 끌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혼자가 아니야.’

라카인도 분명히 이 자리에 있을 것이다. 그러자 모순적이게도 안심이 되었다.

투이나를 좋아하는 것만 빼면 라카인은 믿을 만한 사람이었으니까.

호루니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샨이 다시 으르렁거렸다.

“거기 있다는 거 아니까 빨리 튀어나와!”

하마터면 반사적으로 뛰쳐나갈 뻔한 호루니가 용기를 끌어 모았다. 그리고 다시 흘긋 샨을 확인했다.

흉흉한 기세를 피워 올리는 샨은 호루니가 있는 쪽이 아니라 다른 방향을 향해 있었다.

혹시 투이나라도 도착한 건가 싶어 호루니의 시선이 필사적으로 근방을 훑었지만 투이나는커녕 스카차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노려보던 샨이 중얼거렸다. 

“뭐, 좋다. 네가 올 줄 알았으니까.”

여전히 공기 중에는 샨의 목소리 말고 들려오는 소리가 없었다. 호루니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미친 걸까?’

아까부터 수호신을 가지고 농락해댔으니 머리가 이상해질 만도 했다.

차라리 그렇게라도 사라져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며 호루니가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놀랍게도 샨은 웃고 있었다. 멀리서 살짝 드러난 이가 보일 정도였으니까.

“네가 나를 도와줘야겠다.”

“…….”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차가운 바람이 호루니의 머리를 흔들고 지나갔다.

‘대화하고 있다면.’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그녀를 제외하고는 샨과 라카인뿐이다.

그리고 라카인은 원래 샨의 사람이다.

호루니의 눈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같은 모하세스에서 자란 인간들은 서로가 숨는 방법에 가장 익숙할 지도 모른다.

인기척을 느낀 샨이 라카인이 따라왔을 거라 지레짐작한 것일 수도 있었다.

‘뭐가 됐든, 대답하지 마세요.’

호루니가 질끈 눈을 감았다. 라카인은 절대로 루가 님을 배신해서는 안 된다.

라카인이 투이나에게 고백하겠다는 이야기와 별개로, 지금 샨의 부름에 대답한다면 정말 큰 배신감을 느낄 것 같았다.

당신은 그러지 않을 사람이잖아요. 

호루니가 작게 되뇌었다. 투이나가 하는 방식대로 사람을 믿어보고 싶었다.

“…….”

호루니에겐 다행스럽게도, 끝끝내 샨의 말에는 대답하는 목소리가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나 샨은 오랜 침묵을 기꺼이 견뎌냈다. 무언가 만족스러운 사람처럼.

* * *

의회 건물을 나온 투이나와 스카차는 걸음을 서둘렀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투이나가 다급하게 옷자락을 붙들었다. 뛰어가면 아슬아슬하게 늦지 않을 것 같았다.

마음이 조급해진 건 스카차도 마찬가지였다. 스카차가 서둘러 길을 헤치려고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런데 엉뚱한 손이 스카차를 붙잡아갔다. 놀란 투이나가 앞서가던 스카차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스카차!”

엉겁결에 투이나와 떨어져버린 스카차가 자신을 잡은 손을 쳐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행동을 몹시 후회했다.

“스카차?”

투이나가 뒤늦게 그를 불렀다. 처음 스카차를 부른 사람은 그녀가 아니었던 것이다.

완전히 당황한 스카차가 말을 더듬었다.

“네, 네가 왜 여기에….”

“너야말로 왜 신전 밖에 나와 있는 거야?”

‘여자 목소리잖아?’

투이나가 답답하게 시야를 가리는 베일을 성가시게 당겼다.

어렴풋하게 스카차 앞에 누군가가 서있는 게 보였다.

‘아는 사람인가 봐.’

괜히 나서서 시선을 끌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투이나는 먼저 신전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상대방도 그녀를 본 뒤였다.

스카차 앞에 서있던 작달막한 그림자가 투이나의 앞으로 다가왔다.

“당신은 누구세요?”

“아, 그, 그게….”

스카차가 횡설수설하는 동안 투이나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설마 목소리만 들어도 루가인줄 알까?’

투이나는 일단 양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이 무해한 사람임을 알리려고 했다.

그러나 오늘은 자신이 분칠을 하지 않았다는 걸 잠깐 간과하고 말았다.

손바닥에 난 회색 얼룩을 본 여자가 경기하는 소리를 내며 스카차를 잡아당겼다.

“얼룩병자잖아!”

“그….”

“루가 님을 호위하는 사람이 병자를 가까이 하면 어떡해! 당장 신전으로 돌아가!”

스카차를 데려간 여자가 이번엔 신전 쪽으로 그를 마구 밀기 시작했다.

자칫하다가 투이나와 떨어지게 생긴 터라 갈등하던 스카차가 결국 몸을 돌려 여자의 손을 잡아챘다.

“미안, 르나이! 난 이분과 함께 있어야 해!”

“뭐?”

여자의 팔이 툭 떨어졌다. 대단히 충격을 받은 목소리였다.

“지금… 우리 약혼을 깨겠다는 거야?”

‘약혼?’

투이나가 입을 딱 벌렸다. 스카차는 펄쩍 뛰어올랐다.

“뭐!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갑자기 낯선 사람과 나타난 이유가 뭐야?”

“그건…!”

정신없이 오가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투이나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굉장히 오해를 풀어주고 싶은 상황이지만 샨에게 약속했던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초조해진 투이나가 스카차의 옷깃을 당겼다. 그걸 두 사람 다 못 보고 지나칠 리가 없었다.

약혼자와 루가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스카차가 눈 딱 감고 투이나의 팔을 붙잡았다.

“나중에 꼭 설명해줄게, 르나이! 지금은 가봐야 해!”

“스카차! 너 정말 이럴 거야?”

“미안해! 사랑해!”

스카차가 후다닥 투이나를 이끌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야 이 나쁜 놈아!”

르니아가 소리를 지르며 쫓아왔지만 오래 가진 못했다.

가뜩이나 죄책감에 시달리며 도망가던 스카차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바람난 애인을 보는 것처럼 쳐다보자 얼굴이 점점 시뻘개졌다.

재밌어하면 안 되지만,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스카차한테 약혼녀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숨길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스카차가 모기만한 소리로 대답했다.

“루가 님의 구혼식이 끝나면 그 때에 맞춰서 결혼하려고 했거든요.”

보통 높은 직위에 있는 자가 결혼식을 열면 거리부터 화려하게 꾸며지기에 평범한 사람들도 그 때를 맞춰 결혼하는 자가 많았다.

“괜찮아요. 축하할 일이잖아요.”

“그, 감사합니다.”

투이나는 어색해서 몸을 꼬는 스카차에게 짓궂게 한 마디 던졌다.

“파혼당하기 전에 꼭 오해를 풀었으면 좋겠네요.”

“……예.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스카차가 울상이 되어 먼 산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투이나의 정체를 숨겨야 한다지만, 일을 꼬아버린 건 그의 어이없는 말솜씨였다.

같은 말을 해도 오해받게 말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아마 호루니가 옆에 있었으면 이런 주제에 자기한테 조언을 해댔냐고 기가 막혀 할 것이다.

‘아직 병을 감춰야 되는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직접 오해를 풀어줬을 텐데.’

투이나의 문제들이 워낙 징검다리처럼 남아있는 터라 그런 사소한 일들은 그냥 물에 떠내려가도록 둬야만 했다.

살면서 느끼는 재미는 그런 거겠지.돌덩이처럼 무겁기만 한 신과 영혼의 이야기가 아니라.

고고한 자태로 그들을 굽어보는 신전의 돌담을 마주한 투이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늦진 않았어.’

투이나는 신전으로 들어오자마자 거추장스럽던 베일을 벗어던졌다.

머리카락을 아프게 잡아당기던 빗도 더는 필요 없었다.

“저 왔어요!”

투이나가 숨 가쁘게 소리쳤다. 아까 샨이 있던 장소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딱히 샨을 부른 건 아니었다. 호루니나 라카인 둘 중 아무나 대답해주길 바라서였다.

“왜 아무도 없지…?”

당혹스러워진 스카차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복도에 조금 핏자국이 남았을 뿐 인기척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샨의 거처로 돌아간 걸까요?”

“모, 모르겠습니다.”

스카차가 난감하게 허리를 짚었다. 그들은 분명히 약속했던 시간에 제 때 도착했는데 샨이 직접 보지 못했다고 트집을 잡으면 곤란했다.

서성이던 투이나가 빠르게 몸을 틀었다.

“일단 샨의 거처로 가요. 적어도 그의 하인들이 우릴 기억해주겠죠.”

“알겠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도 못해서 그들은 방향을 바꿔야했다. 비명이 들렸던 것이다.

“꺄아아악!”

“호루니!”

놀란 투이나와 스카차가 동시에 달려갔다. 성소가 있는 방향이었다.

금세 소리가 들린 장소를 찾아낸 두 사람이 복도 아래로 뛰어내렸다.

놀랍게도 하인의 머리채를 잡고 서있는 건 샨이 아니었다.

“아아, 왔군.”

선명한 핏빛 눈동자가 투이나를 향해 번뜩였다.

‘아르파 신이잖아.’

투이나가 멈칫했다. 신전을 나서기 전에는 샨이 계속 주도권을 잡고 있기에 당연히 돌아왔을 때도 그가 맞아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수호신의 이름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라. 아르파가 다시 샨의 몸을 차지해버렸다.

샨이 신의 힘을 다루는 것도 끔찍했지만, 역시 살육의 신을 직접 보는 것도 충분히 무시무시했다.

이미 제물로 쓸 만큼 충분한 피에 푹 절어있던 아르파가 별 힘도 들이지 않고 

“지금 내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루가. 그 이유는 너도 충분히 짐작하겠지.”

“…….”

피를 뒤집어쓴 괴물 같은 모습에 투이나는 아주 천천히 그에게 접근했다.

질척하게 엉겨붙은 액체 때문에 어느 방향으로 보든 아르파가 그녀를 쏘아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르파는 아랑곳하지 않고 뇌까렸다.

“처음부터 이렇게 나올 생각이었는지 주변엔 이렇게 허약한 놈들만 있더군.”

투이나는 바닥에 피를 토하고 쓰러져 있는 하인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들의 머리카락 끝이 아주 약간 붉은 색으로 변해있었다.

‘아르파 신이 다른 몸으로 옮겨가려다 실패했구나.’

투이나의 살갗에 한기가 훅 끼쳤다. 언뜻 봐도 신을 받아들이는 데 실패한 인간들은 죽은 것처럼 보였다.

그 때 투이나는 라카인과 호루니도 그 자리에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들은 더 이상 몸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둘 다 잔뜩 몸을 긴장한 상태였다.

게다가 더 신경 쓰이는 건 라카인이 어딘가 다친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어디를 다친 거예요…!’

투이나가 본능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이미 아르파는 그녀의 동요를 읽어냈다.

아르파의 입술이 쩍 벌어졌다.

“너만 없었더라면 저 몸으로 바꿔 탈 수 있었을 텐데. 그나마 튼튼한 녀석이니까 왕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버틸 수 있었겠지.”

“…….”

라카인은 계속 고르지 못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이미 체력을 많이 소모한 것 같았다.

투이나가 나타났을 때도 몸 하나 꼼짝하지 못하고 있는 그를 보는 건 이미 금이 가 있던 머리를 두드리는 듯한 충격을 주었다.

심장이 꽉 조였다가 간신히 풀려나며 힘겹게 두근거렸다.

“…돌아가세요.”

“이제는.”

아르파가 뚜둑 소리를 내며 잡고 있던 하인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투이나는 눈을 돌리고 싶은 그 장면을 분노로 참아냈다.

“모든 인간들이 내가 우습게 보이는 모양이지?”

“그렇다면 답해보세요.”

투이나는 진심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인간을 택해 계속 그 우스운 꼴을 유지하는 거죠? 인간에게 갇힌 신을 그렇게나 비웃은 건 당신이에요.”

“왜냐하면, 꼬마야. 너희들은 무서울 때마다 웃기는 짓거리를 하거든.”

아르파가 팔을 휘둘러 묻어있던 피를 뿌렸다.

“지나친 두려움은 너희를 웃게 만들지. 나는 너희의 웃음을 지워주는 대가로 공포를 받아가는 거다.”

아르파가 문득 사납게 낄낄거렸다.

“이게 너의 세 번째 시험인가? 그러하냐?”

“안타깝지만 틀렸습니다.”

투이나가 주먹을 부르쥐었다.

“구혼자들은 마지막 우물이 얼어붙는 날 신전에서 가장 좁은 곳을 찾아내 그곳에 보관되어있는 보물을 가져가야 합니다.”

투이나가 그 때까지 정하지 못했던 시험이 단숨에 제 입에서 흘러나왔다.

분노 앞에서, 다치고 상처받은 사람 앞에서는 고민보다 먼저 행동이 튀어나왔다.

언제나 그래야만 한다.

“만약 단 한 사람이라도 답을 찾아낸다면 신전에서 가장 귀한 보물과 함께 결혼까지 해드리지요.”

투이나가 건방지게까지 들리는 말투로 내뱉었다.

아르파는 턱을 내밀어 짐짓 고민하는 모양새를 만들어보였다.

“마법사에게도 그리 말했나?”

“아직 전하지 않았습니다.”

“좋아. 잘했다.”

투이나가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아르파가 칭찬할 순간이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르파는 여전히 새빨간 두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그 망할 시험을 치르기 전까지는 신전에 나타나지 말고 그 마법사 놈에게 붙어있도록 해라.”

“…어째서죠?”

“아무래도 이 건방진 몸의 주인이 너를 볼 때마다 기운이 솟는 모양이니까.”

아르파가 시큰둥하게 내뱉었지만 눈만큼은 잔인하게 이글거렸다.

“한 번은 빼앗겼으나 두 번은 없다. 내가 마음이 내켜 돌아가기 전까지 이 몸에게 절대 자유를 허락지 않을 것이다.”

순간 샨의 어깨가 움찔했으나, 아르파는 코웃음을 치며 그것을 가벼운 경련처럼 넘겨버렸다.

“그렇게 내가 돌아가면 분명히 주변에 있는 걸 닥치는 대로 죽이려고 들 테니 미리 꺼져두라는 거다.”

“……왜 내게 그런 친절을 베푸는 거죠?”

“왜냐하면 말이다.”

아르파가 비꼬았다.

“널 죽여서 내가 다 잡아놓은 아르힘을 웬 떨거지 수호신으로 바꿔놓고 싶지 않거든.”

아르파가 경멸스럽게 투이나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네가 수호신이 되면 아르힘이 몇 백년간 모아둔 영혼들이 그대로 날아갈 게 뻔해.”

그게 무슨 손해냐는 듯이 아르파가 혀를 찼다.

“나는 당신 손에 여기 사람들을 맡겨두고 떠나지 않아요.”

투이나가 흔들리지 않고 대답했다.

“게다가 오래 버티기 힘들어 보이는데요.”

그녀의 지적대로 아르파의 몸에서 점점 피가 벗겨져나가고 있었다.

샨이 주도권을 되찾으려고 하는 건지 아르힘이 도와주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곧 사라질 거란 사실만큼은 명백했다.

지적을 받은 아르파가 화를 낼 줄 알았건만, 그는 오히려 소름끼치는 소리로 웃어젖혔다.

“내가 왜 꺼지라고 했는지 전혀 이해를 못했군.”

아르파가 자기 팔을 손톱으로 확 잡아당겼다. 그러자 잠깐 샨의 팔뚝이 꿈틀하더니 거꾸로 꺾였다.

“나는 명령을 한다.”

문자 그대로 핏발이 곤두서더니 뒤이어 신전 안에 비명과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멀리 숨어있던 사제와 시종들이 아르파 신에게 강제로 끌려오는 중이었던 것이다.

투이나가 흠칫했다. 아르파 신이 비아냥거렸다.

“내 하인들이 이미 아르힘의 자식들을 좀 손봐주었지.”

먼 메아리처럼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제 발이 멋대로 어디론가 달려 나가는 경험은 분명히 기묘할 테니까.

비로소 투이나가 동요했다.

‘아르힘 님이 전혀 힘을 못 쓰고 계셔.’

강제로라도 아르파 신을 돌려보내야 한다.

그러나 그 방법을 제대로 아는 라카인은 이미 반 주검이 되어있었다.

사제들과 시종들이 아르파 신과 맞닥뜨리는 순간 대재앙이다.

초조해지는 마음과 달리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당신, 정말 샨보다 못한 인간이군요.”

아르파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투이나는 여전히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거렸다.

“당신이 아직 사람이었을 때 무슨 일을 겪었는지 영영 알 수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똑똑히 보여요. …추하게.”

투이나가 그를 쏘아보았다.

“다른 사람의 몸에 숨어서 그를 흉내 내는 게 신이라니.”

“네까짓 게 감히 나를 능멸하느냐?”

“당신이 능멸하고 있는 건 샨이에요.”

투이나가 더욱 대담하게 되받아쳤다.

“이미 샨이 인질로 잡은 사람들을 당신이 다시 끌고 오면 제가 두려워할 줄 알았나요?”

이미 샨이 한 짓을 따라하고 있다는 지적에 아르파가 움찔했다.

어쩐 일인지 항상 사람들에게 통하던 공포와 피가 그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원래 죽음은 아무리 반복해서 겪는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지금쯤 공포에 떨어야 하지 않나? 평범한 인간이라면 저렇게 태연할 수가 없을 텐데.

투이나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갑자기 아르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설마 벌써……!”

아르파가 혼란에 빠진 틈을 샨이 놓치지 않았다.

그가 방심한 사이 샨은 몸의 주인답게 가슴을 움켜쥐더니 빠르게 기도문을 읊조렸다.

곧 신전을 가득 메운 불온한 공기가 단숨에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원래대로 돌아온 샨이 털썩 주저앉았다.

“…허억!”

샨이 한꺼번에 숨을 몰아쉬었다.

아르파에게 사로잡혀있는 동안 줄곧 정신이 답답하게 눌려있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투이나는 크게 떠진 푸른 눈 옆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걸 지켜보았다.

‘샨이다.’

그를 보면서 이렇게 안도할 날이 올 줄이야. 투이나도 덩달아 긴장이 풀렸다.

“다행이다…….”

투이나가 무심코 중얼거리자 샨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녀가 순전히 신전 사람들의 안전을 지킬 수 있게 되어서 안도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샨은 그것이 내심 자신 때문이기를 바라게 되었다.

나를 보게 되어서 기쁜 것이라고.

하지만 샨이 형형한 눈으로 다시 일어나자마자 투이나가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순식간에 마음이 비틀렸다.

“남의 신을 모욕하는 방법도 아는 줄 몰랐군.”

샨이 내뱉었다. 투이나 덕분에 아르파 신을 눌렀다는 사실이 갑자기 전처럼 유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나 손발처럼 사용하던 신의 힘이 점점 거북하게 분리되는 느낌이었다.

투이나가 아니었더라면 몰랐을 감각이겠지만, 자신이 선명하게 혼자 남은 다음엔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언제나 신이었기에.

샨은 너무도 인간답게 다치고 피로 범벅이 된 몸을 잠깐 내려다보았다.

“…그 말대로, 그대는 잠깐 떠나있는 게 좋겠어.”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던 투이나가 고요한 샨의 표정을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투이나를 협박하던 때와 너무도 다른 말끔한 표정이 보였기 때문이다.

언뜻 무심하게도 보이는 얼굴로 샨이 상처 위를 덮었다.

“…다친 건 치료하고 가도록 할게요.”

투이나의 말에 샨은 저도 모르게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놓아주면 신나서 가버릴 줄 알았더니.”

“…그러게요.”

웃음이 확실한 신호가 되어주었는지 투이나가 한숨을 쉬었다. 그걸 보니 뼈끝까지 저릿저릿했다.

더 보고 있으면 다시 아르파를 불러내서라도 제 옆에 묶어두고 싶어질 것 같아 샨은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보내줄 때 가는 게 좋아. 나도 아르파와 별반 생각이 다르지 않거든.”

이미 불쑥불쑥 성질이 돋는 참이었다. 투이나의 관심이 이미 자신을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파가 강림했을 때조차도 투이나의 시선이 그녀의 호위들에게 돌아가는 게 미친 듯이 거슬렸었다.

자신조차도 신의 힘을 쓰지 않겠다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니 아르파 신이 경계했겠지.

하지만 이제 세 번째 시험이 무엇인지 들었다.

그 시험에서 이겨 투이나를 손에 넣으면 된다고, 군침을 흘리는 욕망이 속에서 뒤척였다.

시험이 닥치기도 전에 신전을 샅샅이 뒤질 생각을 한 샨이 손을 내저었다.

“어쨌든 제 시간에 돌아왔으니 신전의 인간들도 건드리지 않겠다.”

“시드룬에게 세 번째 시험을 알려주는 건 이곳으로 불러서도 가능해요.”

“내가 불안정해서 그래.”

샨이 씨익 웃었다. 투이나는 웬일로 샨이 자신의 약점을 순순히 드러내나 싶었다.

샨의 꿍꿍이속을 알았더라면 절대로 떠나지 않았겠지만, 샨은 짐짓 피투성이로 다친 몸이 버거운 척 일부러 약한 척을 해댔다.

“아직 그대의 호위가 잘라놓은 팔이 다 낫지도 못했어. 지금도 아르파 신이 분개해서 날뛰는 걸 붙잡고 있기 버겁다.”

거짓말이다. 아마 아르파 신이 들었다면 누굴 팔아 먹냐고 분통을 터트렸을 것이다.

하지만 샨은, 신과 분리된 샨은 얼마든지 전략을 짜고 약한 척 약점을 드러낼 수 있었다.

아무리 신이 힘을 빌려줬더라도 전쟁에서 사람들을 이끈 왕은 샨 아르파 모하세스니까.

투이나는 낯선 샨의 태도가 진실인지 가늠해보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는 차마 보기도 끔찍한 몰골을 한 샨이 실실 웃는 게 보기 힘들었던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진정하는 대로 돌아올 거예요.”

“좋을 대로. 집주인은 그대니까.”

“이 신전의 주인은 아르힘 님이에요.”

투이나가 곧장 반박했지만 샨은 아무려면 어떠냐는 듯 어깨를 까딱였다.

“상관없어. 그대가 이곳으로 돌아올 테니까.”

샨은 그제야 비로소 다친 몸을 수습했다. 이렇게 심하게 다친 적은 전쟁터에서도 드물었다.

그가 느릿하게 벌어진 상처를 눌렀다.

그 모습을 보란 듯이 투이나에게 보여주는 꼴을 보니 확실했다.

상처에서 피가 흐르지 않으니 아직 아르파 신이 떠나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그러니 빨리 가라는 재촉에 투이나가 산만하게 흐트러져있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오늘 일은 잊지 않겠어요.”

“얼마든지.”

샨이 드러난 턱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투이나는 당장이라도 호위들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뒤를 돌았다.

괜히 샨이나 아르파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호위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져서 샨에게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투이나가 낮게 속삭였다.

“괜찮아요?”

그 때까지 간신히 버티고 있던 라카인이 눈을 깜박였다.

계속 감겼다 뜨는 시야에 어른어른하게 투이나의 얼굴이 비쳤다.

아, 그가 계속 기다려왔던 사람이다.

“……루가 님.”

라카인은 신이 자신을 데리러 왔다고 느꼈다.

아르파 신은 그를 완전히 망가뜨리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자신의 손을 벗어난 신도를 향한 아르파의 징벌이자 샨의 질투가 섞였다는 걸 라카인이 알 리가 없었다.

자신을 부축한 호루니의 손이 쉴 새 없이 떨지 않더라도 이미 그의 몸은 저절로 떨리고 있었다.

투이나의 동공도 마찬가지였다.

멀리서 볼 때는 단순히 긴장한 것처럼 보였던 라카인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했던 것이다.

샨과 아르파를 상대할 때도 기꺼이 투쟁을 감내했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텅 비어버렸다.

갑자기 바보가 된 것처럼 투이나가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도… 대체 어떻게….”

“루가 님…….”

라카인은 계속 눈을 뜨고 있으려고 애썼다. 그의 검은 이미 지팡이 대신 짚고 있게 된 지 오래였다.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던 투이나가 간신히 라카인의 손등을 붙잡았다. 그나마 그의 몸 중에서 멀쩡한 부분이었다.

“사제님, 사제님을 부르면….”

“라카인도 얼룩병자입니다.”

호루니가 불안한 호흡으로 울먹였다. 상대적으로 상처가 적었던 그녀는 라카인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한 차례 구토하고 말았다.

사제들이 그를 치료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투이나가 그제야 제정신을 붙들었다.

‘내가 무너지면 안 돼.’

투이나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품을 뒤져 시드룬의 머리카락을 꺼냈다.

“라카인, 들려요? 지금 당장 마법사의 마을로 갈 거예요. 거기서 당신을 치료할 마법사가 분명히 있을 거예요.”

소용없습니다, 루가 님. 저희는 마법도 통하지 않는 몸이잖습니까.

문득 라카인은 그런 생각을 했으나 그걸 말로 꺼내면 투이나가 너무도 슬퍼할 것 같았다.

라카인은 그저 마지막 순간까지 투이나를 보기 위해서 계속 애를 썼다. 눈앞이 회색빛으로 어른거려서 그녀가 울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로지 목소리만이 계속 라카인의 의식을 붙잡아 끌어냈다.

“내가 당신을 지킬 거예요. 지금까지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저는 언제나 당신이 지켜온 사람입니다.’

라카인이 마른 소리만 나는 목구멍으로 말을 하려고 애썼다.

죽기 전에, 투이나가 죽기 전에 자신은 그녀에게 고백해야 하는데.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가시면… 안 됩니다.”

찬란하게 펼쳐진 보랏빛 너머로 투이나가 흐릿하게 보였다.

라카인은 이대로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 자신이 죽어 투이나가 수호신이 되어버리는 걸 막지 못한 게 더 안타까웠다.

숨이 끊어지도록 애가 닳았다.

‘복제된 루가 님에게 돌아가 저를 구할 만큼 사랑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는 것조차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고, 증오하는 인간을 설득하고, 신과 대립하고, 원망을 각오한다.

투이나는 계속 그런 일을 하려고 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에. 라카인은 그것이 안타까웠다.

‘당신은 그만 사랑하셔도 됩니다.’

내내 눌러와 더는 들어가지 못할 감정이 결국 그의 마지막 숨구멍까지 옥죄었다.

‘신이 되지 마십시오.’

끝끝내 버티지 못한 라카인의 몸이 앞으로 허물어졌다.

* * *

온 몸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어떤 순간은 얼음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계속 헤매기도 하고, 때때로 경련하기도 했다.

투이나는 매일 밤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이곳이 신전이 아니며 시드룬의 집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에는 더 끔찍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여전히 자신은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이 이 집안에 먹구름처럼 드리우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투이나가 신전으로 돌아가지 않은 까닭은 라카인이 다친 장소를 다시 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아, 하아….”

흠뻑 젖은 채로 일어난 투이나가 몸을 가리듯 천을 끌어 모았다.

방문 틈 사이로 언뜻 지켜보는 눈동자가 보였다. 어두운 방 안에서 다시 소름이 끼쳤다.

투이나가 입술을 깨물며 일어나자 방 밖의 눈동자가 금세 도망갔다.

타닥타닥, 멀어지는 발소리에 어지러운 마음이 한층 더 괴로워졌다.

바깥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건 또 다른 자신이다.

복제된 투이나는 다시 만나면 둘만 보자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계속 투이나 주변을 맴돌았던 것이다.

그러나 도저히, 투이나는 지금 상태로는 그녀를 만날 수가 없었다.

복제된 자신을 보면 수호신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떠오를 테고, 그럼 자연스럽게 라카인도 떠오를 테니까.

투이나는 힘겹게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녀가 채 다 마르지 못한 버거움에 젖어 고개를 파묻었다.

파도가 씻겨나간 바위에 소금기만 말라붙은 듯 투이나가 흐느꼈다.

“라카인…….”

이제 막 시작된 밤은 새벽이 될 때까지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 * *

깨끗한 살갗을 가진 여자가 복도를 디뎠다. 그녀는 맨발이었다.

일부러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한 것도 있었고, 아직 신발이 없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소리를 죽이고 걸어도 주변 사람들은 금세 그녀의 존재를 눈치 챘다.

“…!”

복도 끝에 서 있던 여자가 흠칫하며 물러섰다. 크게 뜬 눈으로 그녀를 보던 여자가 물었다.

“방금 루가 님 방에서 나오신 거예요?”

“아뇨.”

방에는 들어가지 못했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눈에 띄게 안도한 그녀가 자신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닿는 것도 조심하는 모습에 멋쩍어진 여자는 지나가기 좋으라고 얌전히 서 있었다.

그러나 투이나의 방에 갈 줄 알았던 여자는 대신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오세요.”

복제 투이나는 얌전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호루니는 움찔하며 손을 잡는 대신 가만가만히 그녀를 데리고 나오기만 했다.

2층에서 내려온 두 사람은 1층에 있던 수리시와 시드룬과 마주쳤다.

“너 또 올라갔었어?”

“네.”

복제 투이나가 얌전히 대답했다. 눈에 띄게 수척해진 수리시가 이마를 짚었다.

“가지 말라니까 왜 자꾸 올라가는 거야?”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아요.”

복제 투이나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수리시는 짜증스럽게 이마를 주무르기만 했다.

시드룬이 물끄러미 복제 투이나를 올려다보았다.

복제된 투이나는 태어나자마자 본 사람들이 수리시와 시드룬이라 그들을 좋아했다.

하지만 수리시는 요새 자신을 볼 때마다 짜증과 한숨이 늘었고, 걱정하면 더 싫어했기에 자연스럽게 시드룬의 옆에 머물게 되었다.

“걔는 내버려두는 게 도와주는 거야.”

“하지만 아파 보이는 걸요.”

“당신은 여기 있으면 됩니다.”

시드룬이 말했다. 계단 위에 서 있던 호루니가 눈살을 찌푸렸다.

“다녀왔습니다.”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온 스카차 덕분에 딱딱했던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상황은 좀 어때?”

“안 좋아요.”

스카차가 목도리를 풀며 대답했다. 목도리에 쌓여있던 눈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곳은 여름이었기에 복제 투이나는 작은 눈송이 하나를 몰래 건드려보았다.

그걸 본 시드룬이 작게 마법진을 열어 남은 눈을 손바닥으로 옮겨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르힘의 신전에 다녀온 스카차의 보고에 귀를 기울였다.

“아르파 신 사건 이후로 다들 불안해져서는 꼼짝도 안 해요. 와도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여길 알려줘도 안 오려고 할 겁니다.”

스카차는 열린 문 너머로 계속 드러나 있던 신전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원래 같았으면 마법사 정벌이라며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을 텐데. 그런 의욕도 없어요.”

시드룬이 천천히 신전으로 열려있던 마법진을 닫았지만 집안 분위기는 여전히 암울했다.

“루가 얘기 분명히 한 거 맞아? 어떻게 자기들 루가인데도 이렇게 방치할 수가 있어?”

“…겁을 먹은 거죠.”

호루니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계속해서 나타나지 않는 아르힘에, 자기 마음대로 신전을 휘저어놓은 아르파까지 더해져 신전은 거의 초상집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신도들 응대하고 외부인을 치료하는 일은 계속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신전 내부에선 인적이 완전히 끊겼어요.”

“…….”

“그리고 눈을 봐서 알겠지만, 물이 얼기 시작했어요.”

스카차가 침울하게 덧붙였다.

산의 겨울은 빨랐다. 아르힘의 수도는 산 위에 있었기에 다른 마을보다 훨씬 빠르게 추워졌다.

그나마 아르힘의 힘이 강한 신전은 아직 괜찮았지만, 바깥에 있는 우물은 벌써 하나 둘씩 얼기 시작했다.

투이나가 얘기했던 세 번째 시험의 조건을 들었던 터라 수리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마지막 우물이 얼 때 신전에서 가장 좁은 곳에 보물을 숨겨두었다니.

알쏭달쏭한 수수께끼에 시드룬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도무지 답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시험, 확실히 루가가 준비해둔 거 맞아?”

“모르겠어요.”

호루니가 풀이 죽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급하게 여기로 와서 그런 걸 물어볼 겨를이 없었어요.”

“…그건 그랬지.”

수리시도 투이나 일행이 갑자기 나타난 순간 기절할 만큼 놀라고 말았다.

피투성이가 된 투이나는 이미 시체와 다를 게 없어 보이는 남자를 끌어안고 있었다.

간절하게 치료해달라고 외치는 그녀가 얼마나 절박해 보이던지, 왜 아르힘에서 치료하지 않느냐고 되묻지도 못했다.

그리고 힘없이 축 늘어진 팔에 얼룩덜룩하게 남은 회색 자국과 익숙한 생김새를 보았을 때는 이미 파국이었다.

수리시는 시드룬을 흘끗 돌아보았다.

저 마법만 쓸 줄 아는 멍청이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 아는지 모르는지 복제된 루가와 눈 장난이나 치고 있었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린 수리시가 짓씹듯이 말했다.

“역시 루가는 돌려보내야겠어.”

“그 얘긴…!”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자던 얘긴 이미 들었어.”

수리시가 성마르게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저 꼴을 봐. 절대로 괜찮아질 리가 없어. 그럴 바에는 대충이라도 시험을 마무리하고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게 나아.”

“하지만 도저히 시험을 치르실 상태가 아니잖아요.”

호루니가 이를 악물었다. 요새 수리시와 가장 많이 싸우는 사람은 호루니였다.

“기다리면 반드시 저희에게로 돌아오실 거예요.”

“정말 그렇게 믿어?”

수리시가 지긋지긋한 논쟁에 진절머리를 냈다.

“저 앤 너무 빨리 많이 잃었어. 그 것도 둘 다 보통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었잖아.”

“…….”

“웬만한 사람이었으면 저만큼도 못 버텼어. 무너지는 게 당연해.”

“하지만 루가 님은 다르십니다.”

맹목적인 믿음이 호루니의 눈에서 번뜩였다.

이래서 신을 믿는 종자들은.

수리시가 혀를 찼다.

“마음대로 해. 하지만 사흘 뒤까지 내 제안을 받아들이든지 꺼지든지 분명히 선택해야 할 거야.”

수리시가 한 말에 호루니의 어깨가 다시 축 늘어졌다. 스카차도 속이 거북해졌다.

라카인은 열두 명의 마법사가 달려들어 간신히 목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나마도 그에게 직접적으로 마법을 쓸 수 없는 탓에 엄청나게 편법을 동원해가며 간신히 영향력이라도 발휘한 결과였다.

그러나 마법사들의 힘에도 한계가 있었고, 수리시는 라카인을 포기하는 대신 새로 복제를 만들어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복제된 인간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라카인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냐고 되묻는 수리시를 보며 하얗게 질린 투이나는 그 때부터 식음을 전폐했다.

호루니가 불안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러지 말아요.”

호루니를 말린 건 떨어져있던 복제 투이나였다. 그녀의 손이 닿은 호루니는 흠칫 놀라더니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이 상황을 견디기 어려운 건 모두가 마찬가지겠지.

스카차도 멀쩡하게 서 있는 복제 투이나를 볼 때마다 위화감이 울컥울컥 치솟았다.

왜 투이나가 그토록 수리시의 제안을 거부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무리 똑같이 생겼어도 저건 다른 사람이다.

“전… 루가 님에게 가보겠습니다.”

스카차는 자리를 피하기 위해 계단을 빠르게 올라갔다.

쿵쾅거리는 소리를 듣던 복제 투이나는 물끄러미 스카차의 등을 올려다보았다.

“갈 겁니까?”

시드룬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때때로 복제 투이나는 시드룬과 같은 눈빛을 지을 때가 있었다.

그건 한 때 영혼의 세계에 발을 담가본 자만이 공감할 수 있는 저편의 감각에서 유래하였다.

수리시가 끝끝내 복제한 자신의 남편을 완벽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이기도 한 시선을 보내던 복제 투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자신이 복제되었을 때 우연히 시드룬이 옆에 있었기에 복제된 투이나는 남들보다 많은 것을 시험해볼 수 있었다.

마법부터 영혼의 세계까지 그녀를 거쳐갔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에 다다랐다.

“저에겐 빚이 있으니까요.”

복제 투이나는 스스럼없이 2층에 있는 투이나를 자신이라 칭했다.

가여운 사람.

시드룬은 복제 투이나를 잠깐 끌어안고 싶은 것처럼 한 발 다가갔다가, 천천히 물러났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탁. 복제 투이나가 가볍게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그 방향은 계단 쪽이 아니었다.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갔다.

“울지 말아요.”

습한 바람이 복제 투이나를 감싸며 날아갔다. 그녀는 자신을 이루고 있는 육체가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당신에게 알려줄게요.”

속삭인 목소리는 2층까지 닿지 못했지만 그녀는 충분히 알 것이라 믿었다.

“당신이 무엇인지.”

복제 투이나는 가볍게 달려 나갔다.

그녀가 라카인이 있는 방문을 열었을 때, 그 자리의 마법사들은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라카인은 알 수 없는 마법진과 구체에 둘러싸인 상태였다.

그를 연결한 모든 마법은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완전히 망가질 수 있었다.

복제 투이나는 그런 힘의 균형을 살금살금 건너뛰었다. 그리고는 파리한 안색의 라카인을 잠깐 내려다보았다.

“안녕.”

복제 투이나는 한 때 자신이 사랑할 수도 있었던 사람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고 곧 이미 시간이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음을 순순히 인정했다.

“일어날 시간이에요.”

그녀의 손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도저히 눈을 뜨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빛에 라카인의 눈꺼풀이 희미하게 움찔했다.

보글보글.

작은 거품이 연달아 터졌다. 물 끓는 소리였다.

누군가가 당신을 위해 아침을 준비할 때 들을 수 있는 다정한 소리.

잠에서 깨어나기엔 이보다 행복할 수가 없으리라.

몸을 감싸는 따듯한 기운에 라카인은 눈을 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왜냐하면 라카인이 몸을 일으켰을 때 그는 아무 것도 없는 회색 방 안에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

라카인은 곧장 자신이 쓰러지기 직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그가 급히 투이나를 찾았다.

다행히 방 안에는 자신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서 있었다.

곧장 투이나를 부르려던 라카인이 멈칫했다. 그녀의 뒷모습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기에, 라카인은 곧장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당신이군요.”

라카인이 손을 내렸다. 그러자 투이나의 얼굴을 한 사람이 빙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깨어났네요.”

복제 투이나가 그 곳에 있었다. 라카인은 보다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여긴 어디입니까.”

“당신의 꿈속이에요.”

라카인이 주변을 짧게 둘러보았다.

“그런 것 같군요.”

“놀라지 않네요?”

라카인은 자신이 이토록 멀쩡하게 서 있는 일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기에 특별히 더 놀라지 않았다.

“루가 님에게 돌아가야겠습니다.”

“깨어나면 지금처럼 완벽한 몸 상태는 아닐 거예요.”

복제 투이나가 당부했다.

“아르힘의 힘을 빌려오긴 했지만 다른 사람의 마법을 완전히 밀어낼 순 없었거든요.”

복제 투이나가 말끝을 흐렸다.

“그 덕에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이긴 하지만…….”

“저는 마법이 통하지 않는 몸으로 알고 있습니다.”

“병 때문에요?”

그녀가 싱긋 웃었다. 투이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라카인은 조금 움찔거리고 말았다.

“당신도 지금쯤이면 차이를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당신은 투이나를 믿잖아요.”

복제 투이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본체를 불렀다.

“그래서 내가 조금 길을 열어두었을 뿐이에요.”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곧 알게 될 거예요.”

복제 투이나는 허공에서 물이 끓던 주전자를 들어올렸다.

라카인은 그녀가 집어 들기 전까진 거기에 주전자가 있는 줄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잔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물을 따르더니 거기에 하얀 가루를 약간 떨어트렸다.

그리고는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그에게 잔을 내밀었다.

“투이나가 당신을 많이 그리워했어요. 꼭 제일 먼저 보러 가 주세요.”

라카인은 잔을 받았다. 할 일을 마친 복제 투이나는 그대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검게 일렁이는 바깥으로 사라진 그녀를 응시하던 라카인이 그대로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짠맛이 입 안 가득 퍼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그는 현실에서 눈을 떴다.

“…….”

현실은 정적과는 거리가 멀었다.

늦은 밤이었지만 누군가 푸우푸우 하고 코를 고는 소리와 쌕쌕거리는 밭은 숨소리까지 뒤엉켜 있었던 것이다.

라카인은 멍하니 생생한 삶의 순간들을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따끔 저려오는 몸도 깨달았다.

엉망진창으로 감아놓은 붕대며 꿰매놓은 자국까지 만신창이였지만, 적어도 당장 죽을 걱정은 없을 만큼은 몸이 나아있었다.

몸에 힘을 주자 가까스로 움직일 정도는 되었다.

부스스 침대 밑으로 발을 디딘 라카인은 잠시 자신이 왜 움직였는가 생각했다.

답은 바로 나왔다.

투이나가 보고 싶었다.

그는 열두 명의 마법사들이 잠든 자리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집안 풍경은 낯설어서 어디로 가야 투이나를 찾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살아있다면 언젠가는.

천천히 현관 쪽으로 발을 끌며 움직이던 라카인은 문밖에 서 있던 인영을 하나 발견했다.

문틈 사이로 머뭇거리는 그림자는 안으로 들어와도 좋을지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라카인은 이상하게도 불쑥 뜨거운 기운이 몸에서 치밀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벌컥.

갑자기 열린 문에 당황했는지 바깥에 서 있던 사람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는 가쁘게 벅차오르는 가슴에 한순간 몸을 가누지 못했다.

“라카인……?”

진짜 투이나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라카인을 올려다보았다.

라카인 또한 투이나를 발견하고는 마음이 탁 놓여나는 느낌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더는 아무런 고민도 망설임도 없이 투이나를 끌어안았다.

“!”

깜짝 놀란 투이나가 어깨를 움찔하는 게 느껴졌지만 라카인은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제 품을 가득 메우고도 모자라 극렬히 떨리는 기쁨까지 선사하는 당신을 보려고 이 밤을 걸어온 것이다.

살아난 것이다.

투이나는 조금의 틈도 남기지 않고 부둥켜안는 라카인에게 놀랐으나, 곧 스스로도 놀랄 만큼 마주 안은 팔에 꾹 힘을 주었다.

아무리 힘껏 안아도 그가 살아있다는 이 감각, 이 체온과 맞바꿀 수 있는 건 세상에 없었다.

라카인은 투이나가 자신 못지않게 절실하게 매달리는 걸 알아차리고는 가슴이 뻐근해졌다.

“루가 님….”

드물게 라카인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몸으로 몇 번이나 참아왔던 숨을 들이켰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투이나가 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라카인은 조금 허리를 낮추었을 뿐 쏟아지는 마음을 멈추려 들지 않았다.

“사랑합니다.”

라카인은 조심스럽게 등 쪽으로 팔을 가져가 움직임이 멎어버린 투이나의 손을 잡았다.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이 된 투이나가 그가 양손을 붙잡을 때까지 미동도 하지 못했다.

라카인은 그 모습에 한없이 마음이 아리면서도 넘쳐흐르는 애정 앞에 겸허히 무릎을 꿇었다.

그는 잠시 모아 쥐었던 투이나의 양손으로 이마를 눌렀다. 그 작은 접촉에도 뱃속이 뜨거워졌다.

“저는 어떤 말로 이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세상에 많은 미사여구가 있었지만, 그 무엇도 투이나에게 바쳐진 것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었다.

“그러니 저는 오로지 진실을 전하고자 합니다.”

라카인은 맹세를 하듯 기도를 하듯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당신이 사람일 때도 저는 당신을 사랑하였습니다. 당신이 신이 되었을 때도 저는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투이나의 몸이 가냘프게 떨리기 시작했다. 라카인은 다시 한번 마음을 끌어올렸다.

“다만 당신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저는 모든 것을 포기해도 좋습니다.”

“……난….”

투이나가 먹먹해진 목소리로 간신히 입술을 떼어놓았다.

그녀는 라카인의 몸에 아로새겨진 모든 고통과 상처를 보았다. 그가 사랑했기에 감내한 모든 일을 보았다.

라카인도 그것을 알았다.

자신도 그녀를 볼 때마다 같은 것을 보았기에.

“그러니 당신은 저를 사랑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투이나의 몸이 크게 떨렸다.

동요하는 눈동자를 본 라카인은 최후의 입맞춤을 보내듯 천천히 마음을 흩어놓았다.

“당신은 그만 사랑하셔도 됩니다.”

줄곧 그녀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었다.

자신은 이미 넘치도록 받았으니까. 이제는 당신을 위해 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내가 그만큼 당신을 사랑할 테니.”

라카인은 눈을 감았다. 잡은 손으로 뜨거운 것이 계속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더는 희생할 필요가 없습니다.”

되었다.

라카인은 몸속에 남아 있던 뜨거운 것들이 모두 녹아 사라져가는 것 같았다.

“사랑합니다. 루가님.”

모든 것을 고백했다.

아무것도 걸리는 것이 없이.

그저 사랑할 수 있어서 자유로웠다.

라카인을 속박하던 마지막 아르파의 굴레가 떨어져 나갔다.

그것은 신의 이름이었고, 더는 신이 아니게 된 자의 축복이었다.

라카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는 투이나를 향해 다시 일어섰다.

두 사람의 사이는 결코 전과 같지 않으리라.

투이나는 말로 뭉치지 못할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고, 라카인은 언제까지나 그녀의 대답을 기다릴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오래가지 않아 방해받고 말았다.

“깨어났잖아!”

라카인을 알아본 수리시가 경악했다. 그녀가 성큼성큼 달려왔다.

투이나와 라카인을 묶어두던 감정의 연결고리는 끊어지지 않았으나 투이나는 중대한 일을 방해받은 것처럼 소스라쳤다.

형형한 눈을 뜬 수리시의 모습에도 투이나는 애써 하려던 말을 이어 붙이려고 했다.

“라카인, 지금 한 말…!”

“괜찮습니다.”

라카인은 그녀에게 미소를 지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해 있었다.

투이나가 무슨 대답을 하든 그는 기뻐할 수 있었다.

그저 그녀가 옆에 있고, 자신의 말을 받아들였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평생 해야 할 일을 마친 것처럼 벅찼다.

동그랗게 눈을 뜬 투이나가 다급히 그의 손을 도로 붙들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절박하게 라카인을 감쌌다.

“아니요. 당신도 들어야만 해요. 라카인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투이나의 말을 가차 없이 끊으며 수리시가 라카인을 돌려세웠다.

라카인은 바로 투이나의 뒷말을 듣고 싶었으나 막 깨어난 몸으로는 사납게 옷을 젖혀대며 상처를 확인하는 수리시를 막기가 어려웠다.

“어떻게 살아난 거지?”

“…그건.”

결국 투이나도 지금 라카인에게 답하는 걸 포기하고는 수리시를 말렸다.

“방금 깨어난 사람이에요. 제발 살살 다뤄주세요, 수리시.”

“상처가 거의 다 아물었잖아!”

그러거나 말거나 수리시가 험악하게 라카인을 당겼다.

그녀가 정통으로 상처를 건드린 바람에 저절로 신음 소리를 낸 라카인이 방어하듯 팔을 내렸다.

“……다른 자가 다녀갔습니다.”

“다른 자? 누구?”

라카인은 상대를 지칭하기 어려워 잠깐 망설였고, 그것만으로도 수리시는 기민하게 눈치를 챘다.

“복제된 루가 말이야?”

“!”

뒤에 있던 투이나가 화들짝 놀랐다.

“그녀가요?”

“예, 그렇습니다.”

라카인은 어렴풋이 기억나는 꿈의 내용을 떠올렸다.

“정확히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정신을 잃은 사이 그녀가 꿈에 나타났고, 어떤… 힘을 사용한 것 같았습니다.”

“꿈?”

“그녀의 말로는… 아르힘의 힘을 빌려왔다고 하더군요.”

그러자 그는 깨어나 투이나에게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투이나와 수리시의 표정이 동시에 이상야릇하게 변했다.

투이나는 라카인이 자신에게 했던 말과 아르힘이라는 이야기에 혼란스러워진 것이었고,

수리시는 희대의 도주범을 찾아낸 것처럼 눈이 번쩍거렸다.

“가서 정확히 알아내야겠어.”

수리시는 당장 투이나와 라카인을 붙잡고 그들을 복제 투이나에게로 이끌었다.

-10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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