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그러나 여자가 남겨둔 단 하나의 지혜가…
“미쳤습니까?”
뒤늦게 경악한 스카차가 소리쳤다. 스카차의 두 손이 당장이라도 라카인의 멱살을 잡을 듯이 올라갔다.
그러나 라카인의 멱살은 호루니가 먼저 잡은 뒤였다.
“지금 제정신이에요?”
“…….”
라카인은 강제로 멱살을 잡혀 끌려간 와중에도 침착했다.
반대로 호루니는 뺨이라도 한 대 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감히, 당신이 감히!”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죠?”
“그냥 고백한다고요? 고백한 다음엔 어쩔 셈인데요!”
“…글쎄.”
솔직히 라카인도 자신이 투이나에게 고백한 이후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놀라는 건 분명하겠지. 화를 내실까? 좋아하는 모습은 떠오르지 않는다.
어쨌든 그녀에게 고백해야 하겠다는 결심만큼은 확고했다.
“아무 생각도 없으면서 고백하겠다는 거예요?”
“그렇지는 않다.”
“그럼 대체 무슨 생각으로 고백하겠다는 거예요!”
라카인은 곤혹스러워졌다. 말로 설명할 수 있었다면 진작 그렇게 했을 것이다.
라카인은 어렵사리 시도해보았다.
“루가 님이 알아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게 당신 마음이에요?”
호루니가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누군 루가 님을 안 사랑하는 줄 알아요? 고작 마음 하나 말한다고 뭐가 달라진다고!”
“말을 하지 않고서는 무엇이 달라질지 모르지 않나.”
호루니가 움찔했다. 그 사이에 스카차가 치고 들어왔다.
“아니, 사람이 맥락이라는 게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고백이라뇨. 대체 무엇 때문에 갑자기 루가 님을 사랑하게 된 겁니까?”
“…갑자기가 아니라 꽤 오래됐어.”
호루니가 시큼털털한 목소리로 대신 말했다.
“뭐? 넌 알고 있었어?”
“몰라보는 게 바보지.”
전혀 몰랐던 스카차가 벙 찐 채 라카인을 쳐다보았다.
낯에 철판을 깔려던 라카인도 그 시선에는 약간 멋쩍어졌다.
“그리 되었다.”
“아니, 사람이 전혀 내색을 않다가 갑자기…. 와, 대체 언제….”
스카차가 턱을 쩍쩍 벌렸다. 호루니가 눈을 흘겼다.
“지금 그게 중요해?”
“그렇진 않지. 난 또 너만 루가 님한테 절절 매는 줄….”
호루니의 눈꼬리가 순식간에 뾰족해졌다. 스카차는 입을 다무는 게 현명하다는 걸 깨닫고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전혀 짐작도 못했습니다. 루가 님도 아마 들으면 기절하실 텐데요.”
“…그것보다는 희망적인 반응이길 바라고 있다.”
라카인이 대답했다. 아무리 봐도 사랑을 고백하려는 사람 같지는 않은데. 스카차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정말로 루가 님을 연모하시는 겁니까? 정말로?”
“…….”
계속 의심하던 스카차가 본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그 라카인이 슬며시 낯이 붉어지는 광경은 들춰서는 안 될 걸 들춘 것처럼 낯 뜨거웠다.
라카인을 질책하던 호루니마저 그 모습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손을 놓을 정도였다.
“…믿겠네요. 그 얼굴로 루가 님에게 고백하시면 확실히 믿기는 하시겠어요.”
누가 보아도 사랑에 빠진 사람이었으니.
스카차가 슬금슬금 라카인에게서 떨어졌다. 안 저러던 사람이 수줍음을 타니 괜히 자기까지 닭살이 돋았다.
“…핫. 중요한 건 그게 아니죠!”
호루니가 제정신을 차렸다.
“가뜩이나 루가 님이 심란하실 때 고백하겠다니, 호위로서 할 짓이 아닙니다!”
“그런 문제였어?”
“게다가, 게다가 만약에 루가 님이 받아주신다고 해도….”
호루니의 숨이 점점 가빠졌다. 그녀는 치를 떨고는 라카인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루가 님은 수호신이 되실 분이에요. 만에 하나라도, 당신 때문에 루가 님이 인간으로 남게 되면 용서 못해요.”
“…….”
“내 말 들었어요?”
라카인은 문득 호루니가 정말로 신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투이나가 수호신이 된다는 걸 안 순간, 그녀는 곧장 새로운 신을 믿는 길을 택했다.
자신이 그럴 수 없는 걸 보면, 그도 아직 한참은 부족한 인간이었다.
라카인은 호루니에게 결국 결정은 투이나가 내릴 거란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하려는 일 자체가 투이나를 흔들기 위해서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라카인은 묵묵히 손에 잡혀있던 투이나의 편지를 들어올렸다.
“…편지를 부치러 가야겠다.”
“말 돌리지 말아요!”
“진짜 고백할 겁니까?”
라카인이 발걸음을 옮기자, 금세 호루니와 스카차가 졸졸 쫓아왔다.
처음엔 그토록 험악한 분위기였는데 이미 두 사람은 새로운 사실에 적응해 버린 모양이다.
“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계획이라도 세워뒀어요?”
“아니, 하면 안 된다니까!”
“궁금은 하잖아. 난 아직도 저 사람이 뭔가 그… 낭만적인 일을 한다는 상상이 안 간다고.”
“그런 말 하지 마! 아악, 나도 상상하게 되잖아!”
라카인은 뒤에서 투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난감하게 뺨을 문질렀다.
이러다 루가 님에게 제대로 말하기도 전에 다 들킬 것 같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라카인이 그들을 오래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짧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니 호위들이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교대를 하지 않으려는 호루니와 스카차 덕에 세 사람은 함께 투이나의 방 밖에서 보초를 섰다.
그래서 아침이 되어 들어갔을 때 투이나가 어제 앉아있던 자세에서 한 치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걸 모두가 보고 말았다.
“…루가 님?”
라카인이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다.
사람이 아니라 조각상을 갖다둔 것 같았다.
불러도 대답이 없는 모습에 뒷덜미가 오싹 일어섰다.
라카인은 여전히 미동도 않는 투이나를 재차 불렀다.
“루가 님. 아침입니다.”
“……벌써 해가 떴나요?”
그제야 투이나가 가볍게 몸을 떨며 고개를 돌렸다. 지친 듯한 표정이었다.
스카차가 약간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한 숨도 안 주무신 겁니까?”
“아니요. 잠깐… 졸았어요. 그랬나 봐요.”
투이나는 평범하게 눈을 비볐다.
그러나 호위들은 두건 위로 옅게 내려앉은 먼지를 보고 있었다. 밤새 움직이지 않아야만 가능한 두께다.
라카인의 가슴에 덜컥 걱정이 차올랐다.
“꿈을 꾸신 겁니까?”
“아르힘 님을 만나신 거예요?”
“아뇨.”
투이나가 힘없이 답했다. 라카인은 우선 투이나의 상태가 좋아지는 것부터 신경 쓰기로 했다.
아무리 자신이 투이나에게 다가가려고 결심했다 한들, 호위의 본분을 잊을 수는 없었다.
라카인은 신중하게 투이나가 의자 밖으로 빠져나오도록 도왔다.
그러나 정작 투이나가 시달리고 있는 건 그가 볼 수 없는 쪽이었다.
* * *
거짓말쟁이.
“……!”
아침 식사를 받던 투이나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녀는 짧은 경련을 얼른 숨겼다.
가뜩이나 자신이 멍하니 밤을 새운 바람에 호위들의 신경이 예민해져있었기 때문이다.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그들이 걱정해서 달라질 문제가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투이나는 전혀 식욕도, 수면욕도 들지 않는 몸을 낯설게 자각했다.
평소 같았으면 배고파, 졸려 하고 입을 모아 종알거렸을 몸의 신호들은 다른 목소리들로 대체되어 있었다.
죽은 영혼의 목소리로.
“바보 같은 루가. 바보 같은 루가 같으니.”
“우리를 쫓아낼 생각이야?”
“동정심도 없어. 자비심도 없어. 너도 똑같아.”
“…….”
투이나가 주먹 쥔 손으로 턱을 꾹 눌렀다.
‘호위들이 옆에 있으니 뭐라고 대꾸도 못하겠네.’
밤새 그들의 목소리에 시달리느라 투이나는 해가 뜨는 줄도 몰랐다.
그나마 호위들이 오기 전까지는 제발 그만하라고 말할 틈은 있었는데.
‘하지만 이상해. 잠깐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 감각까지 사라지다니.’
호위들이 놀란 얼굴로 지금 아침이 되었다고 했을 때 투이나도 만만치 않게 놀랐다.
밤새 같은 자세로 있었다면 몸이 뻐근해야 하는데 그런 통증도 없었다.
정말로 눈 깜박할 사이에 하룻밤이 지나가버린 것이다.
투이나는 불안한 눈길로 얼룩을 내려다보았다. 몸에 난 얼룩들은 지은 죄가 없다는 듯 얌전히 붙어있었다.
몸에 난 얼룩들이 영혼들이라면 대화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 건 아주 잠깐이었다.
바람에 지푸라기가 흔들리는 것처럼 미약하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순식간에 시끄러워지고 말았다.
투이나는 아무 맛도 안 나는 밀전병을 질근질근 씹었다.
뚫어져라 그녀를 지켜보던 호위들이 그 위에 꿀을 부어주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맛이 없으십니까?”
“네? 아….”
투이나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몸에 있는 영혼들이 아우성쳤다.
“맛없어! 양파와 고기를 넣고 아삭아삭 씹어야지!”
“아니야. 호박과 고추를 넣어서 맵고 달게 먹어야 해!”
“난 음식이 싫어. 신전이 싫어.”
‘시끄러워요!’
투이나가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안 그러면 제 목소리로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호위들만 눈이 동그래졌다.
“음식은…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애써 변명한 투이나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영혼들 때문에 호위들과 거리를 두려는 결심이 훨씬 더 어려워졌다.
투이나는 결혼 대신 죽음을 택해 수호신이 되겠다는 다짐을 거의 완성해가고 있었다.
아직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죽을 지는 생각만 해도 끔찍해서 결정하지 못했지만.
최소한 갑자기 그녀가 사라지기 전에 주변을 정리할 준비는 해야 했다.
떠날 사람이 계속 다정하게 구는 건 가슴 아프니까.
‘그렇지만 수호신이 되면 계속 영혼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댔지.’
영혼들과 대화를 나누며 투이나는 수호신이 되겠다는 결심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수호신은 언제나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고 했던 것이다.
어젯밤, 투이나가 물었다.
「내가 수호신이 되면 당신들은 나와 함께 영혼의 세계로 가는 게 아닌가요?」
「우리는 그렇지.」
「하지만 우리는 또 생겨나.」
「모르겠다. 귀가 먹먹해.」
「왜 살아있어서 우리를 헷갈리게 만드는 거야?」
「잠깐만요.」
투이나가 몸을 굳혔다.
「당신들이 더 있나요? 전에 내게 얘기했던 목소리는 여러분과 달랐는데.」
「우리도 몰라.」
「수호신이 되면 너를 믿는 자가 더 생겨나겠지.」
다시 정리해 봐도 도움이 되는 말은 없었다.
‘아르힘 님의 말이 맞아.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안 돼.’
투이나는 머릿속에 윙윙거리는 소음들을 쫓아냈다.
몸에 난 얼룩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호위들이 하는 말에 집중할 수는 있었다.
먼지가 쪼그라들듯이 작아지는 영혼의 목소리에 안심한 투이나가 다시 현실에 집중했다.
“…사제들이 사태가 정리될 때까지 시종들도 함부로 신전에 돌아다니지 않도록 처리했습니다.”
“간곡하게 면담을 요청한다는 말도 전해달라고 합니다.”
“오늘은 안 돼요.”
투이나가 거절했다. 그녀에겐 갈 곳이 따로 있었다.
외출 준비를 하며 투이나는 상복을 골라 입었다. 얼굴을 가려도 수상하게 보이지 않을 옷은 그것뿐이었다.
투이나는 머리를 올려 빗으로 고정한 다음, 양 방향으로 나 있는 빗살에 긴 베일을 꽂아 고정시켰다.
그러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천이 앞과 뒤를 동시에 덮었다.
더 평범하면 좋겠지만 신전에서 입는 옷이라 화려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신전에서 나와야 하니 축복을 받으러 온 부유한 상인으로 착각하길 바랄 뿐이다.
준비를 마친 투이나는 호위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다시 멀쩡하게 행동하는 그녀를 보며 그들은 그나마 좀 안심한 듯 했다.
정확히는 보다 사람다워진 모습에 안심한 것 같았다. 여전히 얼굴 한 쪽에 미심쩍어하는 기색이 보였던 것이다.
투이나가 살짝 눈가를 움직였다.
그들 중에서도 유독 라카인이 뭔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주 비장한 표정이라 호위들에게 많은 관심을 쏟지 않으려던 투이나마저 모른 척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녀만 그걸 눈치 챈 게 아니라 호루니와 스카차마저 뭔가 긴장한 기색으로 라카인을 힐긋거렸다.
마치 그의 입에서 뭐가 튀어 나올지 몰라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나 몰래 무슨 이야기를 한 건가?’
투이나는 잠깐 기다려보았으나, 정작 라카인의 입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다만 라카인의 시선이 전과는 다르게 느껴지긴 했다.
늘 침착하게 감정을 갈무리한 그의 표정을 이제 자신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면 너무 과한 착각일까?
라카인도 사람인 이상 모든 감정을 숨길 수는 없었다. 시드룬이 정말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과는 달랐다.
라카인은 가끔 즐거워했고, 언제나 도구로서 갈무리되던 평온한 눈동자가 흔들리기도 했다.
간혹 그조차도 너무 슬퍼서 참지 못하고 배어나오는 고통을 내비칠 때면 단단하게 뭉쳐있던 라카인의 몸에 핏대가 일어서며 더욱 굳어가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눈을 가리던 머리를 잘라낸 이후로는 그러한 변화가 더욱 잘 보였다.
투이나의 시야에 라카인이 잡히면, 처음에는 행동이 더욱 조심스러워지며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지켜보면, 이내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그녀를 마주 보았다.
어찌 보면 명령을 기다리는 것처럼 순종적이기도 했지만, 저를 쳐다보는 눈빛은 다른 의미로도 읽혔다.
나를 더 보아주십시오.
그러면 늘 굳어있던 눈매가 조심조심 풀렸다.
한없이 애틋하고, 다정해서 살짝 만져주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미쳤어.’
투이나가 인상을 썼다. 속에서 확 불이 끓었다가 식는 것 같았다. 가슴이 기분 나쁘게 두근거렸다.
라카인을 두고 이런 생각을 한다니 죄책감이 밀려왔다.
아르힘에는 노예가 없었지만 권위는 있었다. 간혹 의회나 신전에서도 위계에 의한 추행 사건이 일어나곤 했다.
투이나도 그런 자들을 몹시 경멸했다.
라카인 또한 엄밀히 따지자면 투이나의 아랫사람이었으니, 그에게 다른 감정을 품는 건 정말 잘못된 일이다.
‘게다가 라카인은 내… 신도야. 신이 명령하면 무엇이든 하는 걸 봤잖아. 자기 감정까지 억누를 게 분명해.’
심장이 욱신거렸다.
‘괜찮아. 그냥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똑같이 사랑하면 돼. 게다가 베인에게 느꼈던 감정과는 전혀 다른 걸. 이건 연인의 사랑이 아닌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술렁이던 뱃속이 좀 가라앉았다.
베인과의 연애는 다정하고 한없이 그 속으로 잠겨들고 싶은 관계였다.
사랑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다면 이와 같으리라.
그러나 라카인을 떠올리면 무서웠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틀림없이 둘 사이의 무언가가 바뀔 것이다. 돌이킬 수 없이.
그게 좋을지 나쁠지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무엇인지 알 수가 없으니 더 덜컥 겁이 났다.
‘지금 나를 믿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수호신이 되어 그를 지켜줄 수 있다면… 그걸로 됐어.’
놔두면 또 한 번 라카인을 훔쳐볼 것 같아 투이나는 생각을 끊었다.
“스카차. 저와 함께 잠깐 신전을 나갔다 와야겠어요.”
“저 말씀입니까?”
지목당한 스카차가 움찔했다.
“모두 가기엔 너무 시선을 끌 거예요.”
“알겠습니다.”
호루니는 투이나가 자신을 고르지 않자 금세 풀이 죽었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자신이 그들 중에서 제일 눈에 띄지 않는다는 소리라 스카차도 별로 기뻐보이진 않았다.
의외로 반대할 줄 알았던 라카인마저 순순히 명령에 따랐다.
“그렇다면 신전을 나가시기 전까지 호위하겠습니다.”
“…그래요.”
그것까지 거절할 순 없어 투이나가 승낙했다.
하지만 바깥에 누가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다면 다시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문을 열자마자 베일의 끝을 누군가 홱 잡아당겼다.
“어딜 가나?”
“!”
투이나가 휘청거리기도 전에 바로 뒤에 서있던 스카차가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이미 검을 빼들고 있던 라카인은 상대를 확인하고는 칼날을 옆으로 눕혔다.
투이나를 습격한 남자는 능청맞게 베일을 들어올렸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섭섭하군. 그대가 보고 싶어서 온 사람한테.”
샨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말과는 달리 그의 눈빛이 위험스레 빛났다.
시종을 줄였더니 그가 돌아다니는 걸 목격할 사람도 확 줄어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아무 예고도 없이 샨을 맞닥트리게 된 투이나가 난감하게 그를 훑어보았다.
한껏 꾸민 차림새로 보아 그녀를 만나러 온 건 사실인 것 같은데.
‘보고 싶어서 만나러 왔다는 사람이 저런 표정을 지을 필요가 있나?’
투이나가 올려다보자 샨이 시퍼렇게 뜬 눈으로 싱글거렸다.
“그대가 왜 그런 꼴을 하고 있는지 내가 물어봐야 할 차롄가?”
“무슨 소리죠?”
“상복이라니.”
샨이 사납게 천을 잡아챘다.
“이미 뒈져 누워있는 놈에게 차리는 예의치고는 너무 호사스럽지 않은가?”
투이나는 샨이 보자마자 그녀를 닦달하자 그만 어이가 없어졌다.
“내가 베인을 만나러 간다고 생각했다니.”
“아닌가?”
샨은 당장이라도 그렇게 답하라는 듯 으르렁거렸다.
당장 내면에 치닫는 열기를 본인조차 제어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니까 이건 질투였구나.’
놀랍게도 자신을 향해서 있는 그대로 감정을 불태우는 샨을 보면서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한 때는 그에게 겁을 먹고 두려워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아르파 신을 자주 만난 탓일까. 샨이 평범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자신과 같은 사람.
샨은 투이나가 대꾸는 않고 물끄러미 올려다보기만 하자 성질이 뻗치는지 투이나를 잡아당겼다.
“내 말 듣고 있나?”
“…말하면 듣긴 할 건가요?”
그 말에 샨이 소름끼치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샨이 팔뚝을 움켜쥐었다.
“그대가 무슨 말을 하든 내 옆에 있으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
샨은 험악하게 굴면서도 짐짓 다정한 양 그가 눈을 굴렸다.
“좀 봐주도록 해라. 그대가 먼저 찾아올 날을 기다리다간 내 인내심이 다 닳아버릴 지경이니까.”
“최근에 만났잖아요.”
“단 둘이 아니었잖아. 게다가 시험 얘기뿐이었지.”
샨이 심술궂게 말했다.
“나 또한 구혼자인데 이렇게 내팽개쳐도 되는 건가?”
누가 들으면 둘 사이가 하루라도 못보고 못 사는 애 끓는 연인인줄 알겠다.
“시드룬도 당신과 비슷해요.”
“하지만 그 누워있는 놈은 매일 보러 갔지.”
잠깐 투이나의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찾아온 거였어.’
샨은 바람피운 아내를 붙잡은 사람처럼 기세등등하게 눈을 번득였다.
“죽은 놈이 아직도 생각나나? 그 놈을 못 잊겠어?”
“안 죽었고, 기도하러 간 거였어요.”
“거짓말 마라. 어차피 소용없다는 걸 그대도 나도 알지 않나.”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그걸 말해요!”
투이나가 샨을 밀쳐냈다.
베인은 여전히 그녀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게다가 그녀를 살해한 이유도 아르힘이 밝혀낸 까닭에 부채감은 더욱 커진 상태였다.
샨은 자신의 가슴을 정통으로 때린 투이나의 손바닥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직접적으로 그를 때린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 때문인지 분노보다는 차갑게 피가 식은 듯한 표정으로 샨이 투이나를 쳐다보았다.
“우린 결혼할 사이잖아.”
“…하.”
“그대가 진정으로 그 말라빠진 마법사를 사랑한다고는 여기지 않아.”
“…….”
“빌어먹을, 내 입으로 정말 그런 구질구질한 이야기까지 꺼내야겠나? 상인 놈은 뒈졌고, 이제 그대에게 나 말고 대체 누가 남았지?”
애초에 샨과 그녀 사이에는 그런 구질구질함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감정적인 관계를 쌓지 않겠다고 선언한 건 샨이었으니까.
‘이제 와서.’
투이나는 샨이 공격적으로 내비치는 마음에 피로해지기만 했다.
수호신이 될 작정을 하고 일부러 사람에게 정을 주지 않으려는 마음도 컸다.
투이나는 차라리 여기서 끊으려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내게 고백이라도 할 건가요?”
움찔. 사납게 달려들던 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 봐.’
오만한 샨의 얼굴 위로 치욕스럽다는 반응이 뚝뚝 떨어졌다. 자존심이 상해서 미칠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샨이 투이나에게 어떤 호감을 가졌을지언정, 그는 받아야만 하는 자였다.
애걸복걸 애정을 구걸하느니 차라리 눈을 찌르고 다리를 잘라 끌고 갈 사람이다.
게다가 본래라면 투이나가 그를 사랑하는 게 당연해야만 하니, 자신을 사랑하라고 윽박지르는 행위가 투이나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어버린다.
결국 턱을 바득바득 악물던 샨이 내뱉은 말은 고백은커녕 인정조차 하지 않는 쪽이었다.
“그 따위 건 중요하지 않아.”
“그럼 돌아가세요.”
“어차피 그 입으로 아직 상인 놈을 사랑한다 나불거릴 거 아닌가?”
샨의 눈이 사나워졌다. 그나마 그가 찾아낸 타협점이라는 게 고작 그 정도였다.
“착각은 지겹다! 그대가 어리석은걸 나더러 어찌하란 말인가! 지금 그대의 꼴을 보라! 시체를 사랑하는 인간도 있던가?”
나야말로 당신이 말하는 시체인데?
불쑥 그 말이 투이나의 목구멍을 치고 올라올 뻔 해 투이나는 간신히 참았다.
자신의 영혼이 복제된 투이나에게 갔다면, 과연 그녀의 몸에 무엇이 남아있을지.
그걸 알고도 샨이 계속 투이나에게 결혼하자고 할지 궁금했다.
그와 결혼하면 아르파가 사라지고 샨이 수호신이 될 거란 걸 알아도 결혼을 원할지 정말로 궁금했다.
‘하지만 알려주지 않을 거야.’
내가 수호신이 될 테니까.
당신이 무시하는 모든 것들을 지킬 테니까.
투이나는 똑바로 샨을 노려보았다.
“내가 사랑하는 건 내가 지켜요.”
샨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그건 분명한 선이었다.
당신과 나는 다르다는 선언을 넘어 그녀가 사랑하는 것들에 결코 샨이 포함되는 일이 없으리란 확고한 전언이었다.
그것이 독한 산처럼 샨의 위장을 녹이고 속을 뒤집었다.
고작해야 한 여자가 이토록 몸을 활활 태우고 머릿속을 끓어오르게 만들 줄은 몰랐다.
사람을 죽일 때도 느껴본 적 없던 처절한 기분에 샨이 기어이 폭발했다.
“그럼 어디 이것도 지켜보라!”
샨이 투이나의 멱살을 쥐고 끌어올렸다. 그의 몸에서 피가 분출했다.
투이나는 후두둑 얼굴로 떨어지는 뜨거운 액체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처음엔 자신의 피인 줄 알았다. 그러나 고통이 없었다.
다시 눈을 떠보니 샨의 눈에서 붉은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당황한 투이나는 그가 아르파를 불러낸 줄 알았다.
그러나 샨의 눈은 여전히 푸르렀으며 일견 침착해 보이기까지 했다.
눈에서 흐르던 피는 샨의 가슴으로 떨어졌는데, 자세히 보니 그곳에서도 피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예전에 아르파를 돌려보내기 위해 칼로 찔렀던 자리였다.
‘내가 지켜야 할 게 그의 목숨인가?’
그 생각에 투이나는 머뭇거렸고, 샨이 원한 것도 그게 전부였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피를 흘리던 샨은 너무도 멀쩡하게 투이나의 허리를 휘감았다.
그리고는 깊게 입술을 파묻었다.
“!”
뒤에서 작게 비명소리가 났다.
그러나 투이나는 얼굴이 맞닿자 그대로 쏟아지는 피를 고스란히 맞느라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게다가 샨은 흡사 가둬둘 기세로 밀어붙이느라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샨이 억지로 입 맞춘 적이야 많았지만 지금이 가장 최악이었다.
투이나가 샨의 혀를 깨물었지만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기뻐 보였다.
비릿한 혈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투이나는 손톱으로 샨의 팔을 긁었다.
그러나 상처가 나면 날수록 피는 진해지고 샨의 힘은 더욱 거세지는 것만 같았다.
힘겹게 씨름을 하던 투이나의 손이 간신히 샨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뻣뻣하게 손가락에 감기는 머리칼을 아무리 쥐어뜯어도 샨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러다 죽겠어!’
이딴 식으로 닿는 게 싫기도 했지만, 잠시도 떨어지지 않는 샨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고개를 비틀어도 쏟아지는 검붉은 액체가 피부에 달라붙었고 그 틈을 타 샨이 집요하게 다시 달려들었다.
시야가 잠깐 하얗게 됐을 쯤에야 비로소 샨이 지켜보라고 윽박지른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녀 자신의 목숨이었던 것이다.
점차 차가워지는 피부와 달리 몸에 닿은 피가 너무 뜨거웠다. 마치 자신이 죽어가는 걸 숨기려는 듯이.
샨은 잔혹한 눈으로 머리채를 휘어잡은 손가락에서 점차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그 때 문득 투이나는 입 안으로 흘러들어온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걸 알아차렸다.
독하고 비리고, 약간 짠 듯한 맛이 느껴지는 순간 갑자기 몸이 꿈틀거렸다.
주어진 적 없는 힘이 차오르는 느낌이 투이나를 지배했다.
“……!”
갑자기 샨이 투이나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그것도 한두 발자국이 아니라 족히 복도 하나만큼은 될 거리였다.
돌바닥에 끼기긱 하고 긁히는 소리가 날 만큼 격한 움직임이었다.
몸을 낮춘 샨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투이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라카인이 거의 잘라놓은 팔에도 관심이 없었고-투이나를 껴안고 있던 쪽의 팔은 이미 살이 아니라 피로 연결된 상태였다.-호루니와 스카차가 베어놓은 상처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 했다.
아르힘의 치유 따위가 없더라도 신이 거하고 있는 자신의 몸은 피만 있다면 얼마든지 복구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피만 있다면.
그런데 투이나의 육체로 떨어졌던 피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다.
투이나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분명 아까까지 피딱지가 굳어가던 속눈썹이 쉽게 움직여졌다.
‘몸이 가벼워.’
투이나는 넋이 나간 샨을 내려다보았다.
그를 공격했던 호위들마저 완전히 얼이 빠진 채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상태였다.
‘내가 샨의 피를 흡수한 건가?’
정확히는 신의 힘을?
몸속의 핏줄마다 지글지글 끓는 열기가 느껴졌다. 지독하게 답답하고 불쾌한 감각이었다.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한 대 후려치거나 박살내지 않고서는 이 들끓는 감각을 해소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너… 뭐냐.”
완전히 정지한 샨의 입술에서 기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샨이 묻는다기보다는 아르파의 말투에 가까웠다.
이어지는 말엔 인간과 신의 경악이 모두 담겨있었다.
“너 같은 게 수호신이라고?”
투이나가 입을 다물었다. 전신을 훑고 지나가던 불쾌한 감각이 되살아났다.
‘듣기 싫어.’
샨이 저런 눈으로 쳐다보는 것도 싫었고, 호위들이 괴물을 보듯 입을 벌린 것도 싫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들고 있던 라카인조차 놀란 표정이라는 게 가장 싫었다.
그러나 라카인은 아주 잠깐 만에 표정을 뒤바꾸었다.
그는 자신조차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투이나의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것이다.
라카인이 칼을 떨구었다.
챙그랑, 하고 바닥에 날카로운 소리가 부딪쳤다.
“…루가 님.”
“…….”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간곡한 목소리가 투이나를 헤집어놓았다.
라카인이 꽉 조여드는 목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르파 신의 힘입니다.”
라카인은 샨이 하려던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왕이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 노예로 부리려 할 때 자신의 피를 먹여 꼭두각시로 만드는 의식이었다.
피를 먹은 자는 끝없는 분노와 폭력을 향한 갈급에 사로잡히지만, 적어도 피를 마신 동안은 마음대로 조종할 순 있었다.
샨이 그렇게라도 투이나를 붙잡으려는 사실에 놀랐고, 팔을 잘라내서라도 떼어놓으려던 시도가 막힌 것에도 놀랐다.
샨이 여전히 푸른 눈을 유지하고 있었는데도 아르파 신의 힘을 쓸 수 있던 것이다.
라카인은 그 사실에도 경악했으나, 투이나를 볼 때만큼 온 심장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투이나는 마치 아르파를 흡수한 새로운 수호신처럼 보였던 것이다.
인간의 몸에서 벗어나는 건 시간문제라는 듯, 그녀의 육체는 주변과 유리된 것처럼 보였다.
라카인은 피부 위로 서리가 달라붙는 것 같았다.
‘수호신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루가 님과 접촉할수록 그녀를 깨우고 있다.’
아르파 신이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다른 수호신들이 받아야 할 숭배를 갈취한 것처럼, 투이나 또한 다른 방법으로 인간들의 믿음을 받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라카인은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손바닥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자라고 해도, 루가 님은 사랑하신다.
그러니 라카인은 다시 한번 그녀를 목 놓아 불렀다.
“루가 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괜찮습니다.”
일부러 무장을 해제한 라카인이 손에 묻은 샨의 피를 급하게 닦아냈다.
투이나가 더 아르파의 피를 흡수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두려웠다.
투이나는 망설이는 것처럼 라카인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라카인은 되도록 자신이 안전한 상대로 보일 수 있도록 양 팔을 벌렸다.
그는 그것이 연인이 상대에게 하는 것처럼 보이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투이나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는 곧장 샨에게로 걸어갔다.
여전히 충격에 휩싸인 채 앉아있는 샨이 무방비하게 투이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투이나는 완전한 분노에 휩싸인 채 그의 뺨을 후려갈겼다.
“…헉!”
철썩하는 소리와 함께 샨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러나 투이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당신이 뭔데…!”
투이나가 그의 멱살을 잡고 다시 반대쪽 뺨을 후려갈기자 샨의 눈에 붉은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당장 그녀를 후려치려던 샨의 팔이 팽팽해지며 강제로 멈추었다.
투이나가 그를 외면한 것에 고통 받을 사이도 없이 달려온 라카인이 제지했던 것이다.
“정신 차리십시오, 루가 님!”
“이거 놔라!”
“싫어! 싫어어!”
“호루니! 스카차! 루가 님을 데려가라!”
라카인이 온몸으로 투이나를 껴안아 샨에게서 떨어트렸다.
투이나가 샨의 뺨을 때릴 때 튀었던 핏방울들이 고스란히 피부에 흡수되는 걸 보자 더는 방치할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분노한 샨은 더 이상 신을 감추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나타난 아르파가 이를 드러내며 소리쳤다.
“이 저주받을 것!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
“당신이야말로 내게 무슨 짓을…!”
투이나가 악을 썼다. 건방진 모습에 억지로 일어나려던 아르파가 도로 털썩 주저앉았다.
아르파의 눈이 뒤집혔다. 아르파 신은 말을 듣지 않는 육체에 활화산 같은 분노를 쏟아냈다.
“뭐 하는 거냐! 멍청히 있지 말고 움직여라, 모하세스!”
샨의 몸 어딘가에서 아르파 신이 당장이라도 날뛰고 싶어서 아우성치는 게 고스란히 보였다.
그러나 정작 붉은빛에 다 물들지 못한 눈동자의 푸른 점이 샨의 몸을 꿋꿋하게 지배하는 것 같았다.
샨은 호위들이 투이나를 멀리 떨어트려 놓으려고 애쓰는 광경을 빨아 삼키는 것처럼 쳐다보았다.
“…내가 그렇게 만든 거냐?”
“……!”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에 라카인은 저도 모르게 샨을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라카인은 샨을 섬기면서 그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오직 아르파 때문이라고 믿었다.
강한 힘과 그에 걸맞은 제물을 필요로 하는 신을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광기가 느껴지는 쪽은 샨이었다. 샨 아르파 모하세스. 인간의 왕.
어떤 위대한 신이라도 그를 존재하고 쓰게 하는 것은 인간이다.
한 쪽 팔이 잘리고 피투성이가 된 채로 투이나의 모습을 연신 삼켜대는 샨의 눈은 탐욕스러웠으며, 정욕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대는 화를 낼 때가 가장 아름답군.”
아무리 투이나라고 할지언정, 그 말에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맛보고 말았다.
“……무슨.”
심지어 샨의 몸에 있던 아르파 신마저 그 말도 안 되는 기세에 눌려 움츠러드는 것 같았다.
아까보다 훨씬 차갑고 냉정한 빛이 돌아온 한 쌍의 눈동자가 빛났다.
“내가 곧 아르파이자, 아르파가 곧 나일진대. 그대가 수호신이 된들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그건 예전에 샨이 투이나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투이나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려는 것처럼 들렸다.
마치 샨이 아르파 신에게 직접 보내는 경고 같았다.
“…….”
아르파 신마저 자신의 신도가 이토록 무도한 말을 한 것에 놀라 말을 잃고 말았다.
반면에 샨은 지금까지 자신의 몸을 빌려 써온 아르파에게 대가를 받아낼 시간이 된 것처럼 싱글거렸다.
샨이 피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내겐 그대밖에 없어. 정말로.”
샨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투이나. 그대가 나를 깨운 거야. 그러니 끝까지 책임져줘야지.”
애정을 향한 갈급으로 기어이 자신의 수호신까지 손아귀로 누른 샨이 후련하게 웃어댔다.
샨이 바닥에서 일어났다. 지금까지 몸을 눕히고 있던 짐승이 덫에서 풀려난 것처럼 빠른 동작이었다.
긴장한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데도 샨은 느긋하게 눈짓했다.
“가 보라.”
샨이 흔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 없던 여유로움에 그녀는 당황했다.
“가… 보라니요?”
“나가던 길 아니었나?”
샨은 상의를 손가락 하나로 당겨 남은 피를 털어냈다. 대부분 옷에 스며든 터라 별로 소득은 없었지만.
그런 소탈한 동작에 오히려 투이나는 더 어리벙벙해졌다.
“무슨 꿍꿍이죠?”
“어차피 그대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테니까.”
샨이 너그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게다가 여기만큼 그대를 위한 인질이 많은 곳은 또 없거든.”
샨이 손가락을 까딱했다. 그러자 뒤늦게 이 모든 일을 기둥 뒤에서 훔쳐보고 있던 시종이 저절로 뛰쳐나왔다.
“꺅!”
“…!”
투이나가 반사적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샨이 곧장 시종의 목을 휘감는 바람에 말릴 틈을 놓치고 말았다.
겁에 질린 시종은 자신이 왜 붙들려 왔는지도 모르고 벌벌 떨었다.
“사, 살려주세요, 다… 다시는 몰래 나오지 안, 않, 않겠습니다….”
“루가에게 들리도록 더 큰 소리로 애원해라.”
샨이 가녀리게 파들거리는 시종의 턱을 검지 끝으로 눌렀다.
한낱 손톱이 피에 물들자 그토록 위협적으로 보일 수가 없었다.
시종은 감히 반항도 하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따랐다.
“루, 루가 님… 잘못했어요. 사아… 살려 주세요…!”
투이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샨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르힘이 사람을 감추려고 해 봤자 이미 이곳은 내 손바닥 안이다. 그가 약해졌다는 사실을 내가 모를 것 같았나?”
그건 더 이상 아르힘의 힘으로 아르파를 막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샨은 아르파의 힘을 완전히 손에 넣었으니.
이제 샨을 견제해야 할 사람, 혹은 견제할 수호신은 투이나뿐이었다.
투이나는 샨을 더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
“…원하는 게 뭐죠?”
“돌아올 시간을 말해라.”
샨이 톡톡 손가락을 두드렸다.
“돌아와서 마지막 시험을 치를 때까지 나와 매일 시간을 보내주면 좋겠군.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잖은가?”
“히, 히익…!”
샨이 손가락으로 가볍게 치는 동작에도 목에서 피가 흐르자 시종이 기절할 듯이 울먹였다.
투이나가 시종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걸 본 샨이 입 꼬리를 스르르 올렸다.
“나도 아주 무도한 사람은 아니야. 약속을 하면 지키겠다. 그 시간에 내게 돌아오겠다고 말하기만 하면 돼.”
이미 더 큰 것을 원한다는 음험함이 그의 눈 뒤에서 번뜩거리는 걸 알면서도 투이나는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세 시간 뒤에 돌아오겠어요.”
“좋아.”
샨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떠있는 방향을 보고 시간을 가늠한 그가 싱긋 웃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보도록 하지.”
투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샨이 시종을 놓아주었다. 그는 거의 무릎걸음으로 달아났다.
시간이 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투이나는 그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협박할 거라면 왜 굳이 시험에 연연하는 거죠?”
어차피 협박할 거라면 결혼해달라고 하는 편이 더 합리적인데 말이다.
샨은 투이나의 질문에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대가 나를 선택해주었으면 하거든.”
“…….”
“그 과정이 얼마나 험악하든 결국 그대가 자발적으로 내게 걸어오는 장면이 너무나 기대가 돼.”
샨이 다시 웃기 시작했다. 차라리 듣지 않느니만 못한 대답에 치를 떨며 걸어갔다.
“가요, 스카차.”
“예? 아, 예!”
스카차가 서둘러 뒤를 쫓았다. 끝끝내 샨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라카인이 마지막으로 뒤따랐다.
‘세 시간.’
투이나는 엉망이 된 상복을 다시 뒤집어쓰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빨라지는 다리만큼이나 생각이 어지럽게 뛰놀았다.
‘샨이 아르파를 지배하다니.’
언제나 수호신이 인간보다 더 강대하고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에 갇힌 후 약해진 아르힘처럼, 인간에게는 신을 압도할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게다가 샨이 변한 이유가 자신을 향한 욕망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끔찍했다.
‘그런 건 사랑이 아냐.’
샨은 단 한 번도 자신에게 고백한 적 없었지만, 자꾸만 오싹오싹하게 솟아오르는 소름은 일관된 방향을 가리켰다.
그가 정말로 사랑에 빠졌나?
투이나는 머리를 휘저어 생각을 쫓아냈다.
“…우리가 나가있는 동안 신전에 있는 사람들을 대피시킬 순 없나요?”
“그건 어렵습니다.”
“신전에 거주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광장에서 노숙을 한다고 해도 오래가지 못할 거예요.”
“게다가 전부 내보내면 성소까지 막을 사람도 사라지고요…?”
“네.”
가뜩이나 약해진 아르힘이 아르파와 충돌하는 일만큼은 막아야 했다.
투이나는 잘근잘근 입 안쪽 살을 씹었다.
라카인이 걱정스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대피시켜도 소용이 없을 겁니다. 아까 시종을 데려왔던 건 아르파 신의 힘입니다.”
“방금 그게…?”
“사냥감이 제 발로 그에게 뛰어오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라카인은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샨이 사냥터에서 그 힘을 썼을 때 투이나가 무슨 꼴을 겪었는지 떠오른 탓이다.
“신전에 있는 자들은 다 같은 아르힘의 축복을 받았을 테니 누구의 피를 쓰든 모두가 몰려오게 될 겁니다. 어쩌면 신전 바깥의 신도들 까지요.”
“…….”
이것 또한 결코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투이나는 꾸역꾸역 밀려오는 사람들의 중심에서 학살을 벌이는 샨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정말로 이제는 샨이 아르파인지 아르파가 샨인지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타다닥.
빠르게 계단을 내려간 투이나는 신전의 경계에서 잠시 멈췄다.
“어쨌든 최대한 빨리 다녀오도록 할게요. 그 때까지 샨이 무슨 짓을 하지 않도록 감시해주겠어요?”
“예! 루가 님!”
“알겠습니다.”
호루니가 힘차게 대답했다.
라카인은 고작 호위 한 명이 따라붙는 루가의 안위를 걱정스레 내려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가 따라가고 싶었지만 다시 설득하며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주먹을 꾹 쥔 라카인이 당부했다.
“부디 몸조심해서 다녀오셔야 합니다.”
투이나는 아주 잠깐 그를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스카차와 함께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 * *
바깥은 소란스러웠다.
“이러!”
“돌아와, 이 말썽꾸러기 녀석아!”
“고기 두 근은 더 받아야겠어!”
“이런. 양아치 같으니!”
투이나와 스카차가 어렵게 사람들을 헤쳤다.
방금 전까지 소름끼칠 만큼 조용하던 신전과 비교되어 훨씬 더 귓가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시끄럽게 물을 튀기고 마차가 굴러가며 겨울을 대비하는 사람들로 골목마다 북적였다.
아무리 투이나가 얼굴을 가렸다지만 자신 혼자 루가를 지켜야 된다는 생각에 스카차는 필사적으로 사람들을 밀쳤다.
“비켜주십시오!”
“아이 씨, 뭐야?”
“비켜주세요!”
스카차는 최대한 정중하려고 노력했지만, 오히려 이목만 더 끌고 말았다.
얇은 천 너머로 힐끔거리는 사람들의 인영을 본 투이나가 더욱 단단히 천을 붙들었다.
다행히 투이나가 입고 있는 상복을 본 사람들은 큰 불만 없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무사히 북새통을 빠져나온 스카차가 바짝 긴장한 어깨로 투이나의 위치를 확인했다.
“루… 아, 아니. 저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 겁니까?”
“의회 건물로요.”
“예? 몰래 가시려는 곳이 그곳이었습니까?”
그곳이라면 오히려 루가의 신분으로 가는 게 더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스카차가 난감하게 손을 꿈지럭거렸다.
“루가 님도 알고 계시겠지만 거긴 의원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자들은 못 들어가잖습니까. 전 거기 경비들 중에 아는 사람도 없고요.”
“그 문제는 걱정 안 해도 돼요. 게다가 본 건물에 들어가려는 것도 아니에요.”
“그럼 대체 어디를…?”
투이나는 대답대신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청회색으로 겉을 칠한 건물이 가까워지자 스카차는 한층 더 곤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의회 건물은 다른 광장이나 골목에서 한 층 더 떨어진 곳에 있는 터라 두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는 모습이 훨씬 눈에 띄었다.
왜 투이나가 굳이 자신을 골랐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에 스카차는 최대한 평범해 보이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무리 상을 당한 여자와 그녀의 보호자인 척 굴어도 의회 건물의 경비들은 이미 그들이 들어섰을 때부터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다섯 걸음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지자 창을 잡고 있던 경비가 한 손을 들어올렸다.
“거기 정지하십시오.”
“성명을 밝히십시오.”
“아, 저는….”
“사람을 한 명 만나러 왔어요.”
스카차가 쩔쩔 매는 동안 투이나가 선선히 말했다.
명령한 대로 그 자리에 멈춘 그녀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는지 경비가 말했다.
“성을 받은 자라고 할지라도 의원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자는 함부로 건물 출입이 불가합니다.”
“의원을 만나고자 한다면 자택으로 직접 방문하십시오.”
지극히 원론적인 이야기였다.
투이나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만 하면 해결될 문제라 스카차가 슬쩍 눈치를 보았다.
나오는 건 비밀이었으나 이제는 말할 차례일 것 같아 스카차가 내심 기다렸다.
그러나 투이나는 그들 대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경비들은 투구 속에 가려진 눈썹을 흘긋 올리더니 다시 말했다.
“대답을 하지 못하겠다면 돌아가십시오.”
“다른 항의가 있어서 왔다면 본 건물이 아닌 오른편에 있는 건물로 가십시오.”
경비들이 노란 건물을 가리켰다. 그러나 투이나는 여전히 그 쪽이 아니라 반대편을 보고 있었다.
스카차가 경계를 늦추지 않으려고 애쓰며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헐떡이며 뛰어오는 노인이 보였다.
저 연세에는 저렇게 뛰면 안 될 것 같은데, 하고 스카차가 생각하기 무섭게 노인이 소리쳤다.
“기다리게! 그 분은 내 손님이야!”
마디악이 허공에 지팡이를 휘두르며 달려왔다.
스카차의 눈이 커지는 것과 동시에 투이나가 서둘러 달려가 노인을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마디악이 쌕쌕거리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녀를 알아본 경비들이 경계를 늦추었다.
“말라루크 님 아니십니까.”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내 조카딸께서 내게 자문을 구했네.”
마디악이 숨넘어가는 소리로 투이나를 붙잡았다.
멍하니 있던 스카차가 뒤늦게 다른 위협이 없는지 살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디악은 또렷하게 말을 이었다.
“이번에 제디아 말라루크가 의원 시험에 통과했다는 건 자네들도 알고 있겠지? 자격상 문제가 없으니 통과시켜주게.”
“하지만 아직 본 의회가 열리는 날도 아닌데 벌써 건물에 들어가신단 말입니까?”
“내 손녀 같은 아이야. 내가 살짝 먼저 구경시켜준다고 한들 원칙상 문제될 게 있겠나?”
연로한 노인이 숨넘어가는 소리로 말하는 데 매정하게 굴기는 어려웠다. 결국 경비들은 문에서 비켰다.
“알겠습니다. 말라루크 님이니 믿고 넘어가겠습니다.”
“다른 분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주십시오.”
“유념하겠네.”
마디악이 투이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얼빠지게 서있던 스카차가 마디악의 눈짓에 서둘러 뒤를 쫓았다.
경비들은 잠깐 스카차를 눈여겨보았으나 의원이라면 호위를 대동해도 괜찮았으므로 그를 막지는 않았다.
의회 건물로 들어오자마자 마디악은 순식간에 숨 가쁜 척 쉬던 호흡을 싹 지워버렸다.
“이리 저를 부르신 연유가 꼭 타당하셔야 합니다, 루가 님.”
마디악은 예전에 투이나가 와 보았던 곳과 다른 장소로 그녀를 인도했다.
그동안 마디악을 거동도 불편한 노인으로만 알고 있던 스카차는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늙은 의원들은 다 사기꾼이라더니….”
“난 오래전에 은퇴했네, 젊은이. 면전에다 욕할 때는 좀 더 신중해지게나.”
마디악이 성큼성큼 걸어가며 대꾸했다. 투이나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마디악. 조카딸이라고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래야 설득할 시간이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일부러 변장까지 하고 오셨는데.”
마디악이 한숨을 쉬며 투이나의 얼굴을 가린 상복을 곁눈질했다.
“게다가 제디아는 워낙 천방지축인 애라 자기가 의회 건물에 들렸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런가? 하고 믿어버릴 반푼이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런 반푼이가 어떻게 의원 시험에 통과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자네도 평생 집안의 돈을 빨아다가 공부만 해보게. 통과 못 하나. 자네 꼴을 보니 딱 제디아 두 배만큼의 시간이 있으면 성공하겠구만.”
투이나가 알기로 제디아의 나이는 서른 살이었다.
‘스카차가 제디아의 나이를 모르는 게 다행이네.’
그래도 대충 모욕이란 건 알아들은 스카차가 투덜거렸다.
“의원들이 다 그 모양으로 뽑히는 줄 알았으면 나도 지원해볼 걸 그랬습니다.”
“적성에 맞게 살아. 루가 님 호위까지 됐으면서 딴 길을 찾나?”
마디악이 모퉁이를 꺾었다. 그들이 한가로운 대화를 나눌 만큼 건물 내부는 인적이 드물었다.
가끔 몇몇이 모여 바삐 지나가는 의원들이 보이긴 했지만 가끔 마디악에게 인사할 뿐, 큰 관심을 보이진 않았다.
“건물 안까지는 제가 데려다드릴 수 있지만 그 뒤는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네. 알고 있어요.”
“그런데 루가 님은 여기까지 왜 오신 겁니까?”
“자넨 그것도 모르고 따라왔나?”
“제가 일부러 말을 안 했어요.”
투이나가 살짝 스카차를 향해 몸을 틀었다.
“여긴 레오나를 보러 온 거예요.”
“예? 그 죄인을요?”
“목소리 낮추게.”
마디악이 쉿 소리를 냈다. 막 의원이 된 신참들이 동경하는 눈빛으로 굽신거리며 옆을 지나갔다.
그들에게 인자하고 노련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마디악이 다시 휙 하니 걸음을 옮겼다.
“루가 님이 뜻이 있어 제 제안을 고려해보셨겠지요. 그러니 이런 부탁을 주신 거 아닙니까?”
“…고려했죠.”
투이나가 흔들리는 베일 너머로 옅게 입꼬리를 당겼다.
“아마 오늘 이야기를 들으면 제 결정이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해내실 걸요.”
마디악의 얼굴로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러나 곧 직접 해소하면 된다고 생각했는지 군말 없이 길을 안내했다.
그들은 건물의 지하로 향했다. 좁고 낮은 돌계단을 내려가자 작은 문과 경비를 서는 자가 보였다.
마디악이 곧장 경비에게 나아가려고 하기에 투이나가 그녀를 붙잡았다.
“잠시만요.”
“레오나를 보러 오신 게 아니었습니까?”
막연히 이쯤에서 투이나의 정체를 밝히리라 짐작한 마디악이 되물었다.
그러나 투이나는 마디악을 꼭 잡은 채 스카차에게 손짓했다.
투이나의 계획을 들은 스카차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이 되긴 했지만 어쨌든 막힘없이 수행해냈다.
“누구냐!”
“미안합니다.”
뚜둑.
스카차가 경비를 붙잡고 기절시켰다. 경비가 힘없이 풀썩 쓰러졌다.
투이나가 뭔가 엄청난 계책을 쓸 줄 알았던 스카차는 허무해했다.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으면 간단한 쪽이 좋다고 생각한 투이나는 결과에 만족했다.
쓰러진 경비를 한 쪽으로 눕혀준 투이나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다소 놀란 눈으로 보고 있던 마디악이 그를 건너뛰며 한 마디 했다.
“그래도 자네가 무력에는 재능이 있긴 있군. 의회에서 나름대로 가려 뽑은 자인데.”
“으흠. 제가 괜히 신전 무사제까지 갔겠습니까.”
스카차가 슬쩍 잰체하는 동안 투이나가 문을 열었다.
방 안은 좁았다. 작고 높은 창 하나만 달려있는 곳에서 빛이 희미하게 비쳐들었다.
레오나는 길게 등을 돌리고 누워있었다. 깨어있었는지 그녀가 설렁설렁 뒤로 손짓했다.
“식사는 됐다니까.”
“레오나, 저예요.”
투이나의 목소리에 레오나가 황급히 몸을 돌렸다.
투이나는 천천히 얼굴을 가리고 있던 베일을 벗었다.
“루가 님!”
잠시 멍하게 투이나를 보던 레오나가 황급히 일어났다. 부스스하게 늘어진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뻗쳤다.
“여기까지 어떻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베인의 일인가요?”
레오나의 눈빛이 찌르듯이 간절해졌다. 레오나가 재빠르게 투이나의 손가락을 확인했다.
그러나 자신이 보냈던 반지가 보이지 않자 레오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실망으로 바뀌었다.
투이나가 가만히 대답했다.
“베인에게도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레오나의 안색이 밝아졌다. 어쨌든 투이나가 찾아온 건 기회였다. 레오나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루가 님이 오실 줄은 몰랐지만, 환영합니다. 초대하신 다른 손님들도 들어도 되는 이야기인가요?”
레오나는 마디악과 스카차를 넘겨다보았다.
만약 투이나가 온다면 데려올 거라고 생각했던 인물들에서 한참 빗나가 있었던 것이다.
“네, 이분들도 들을 자격이 있어요.”
투이나가 하나 있던 의자에 마디악을 앉혔다. 그러고 자신은 벽에 기댔다.
“예전에 베인한테 들었던 이야기지만 당신이라면 좀 더 자세히 알고 있겠죠.”
“무슨 이야기를 묻고 싶으신 거죠?”
“수호신 아르피기아가 사라졌을 때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궁금합니다.”
레오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제 와서 저희의 출신을 문제 삼으시려는 건 아니실 텐데요.”
“미안하지만 약간 관련이 있어요. 어떻게 하나의 수호신이 사라진 다음에 다음 수호신을 믿을 수 있게 되었는지 그 과정이 필요해요.”
“어려운 이야기를 청하시는군요.”
레오나가 한숨을 쉬었다.
“아르피기아 신이 내기에 패배하는 순간 모든 신도들도 함께 신의 소멸을 깨달았습니다.”
레오나는 아직도 어제처럼 생생한 상실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던 추억 하나를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과 비슷했다.
그리움이었나, 사랑이었나.
분명한 것은 잃어버린 게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위로이자 영혼의 일부였다.
멸망하는 도시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했다. 그들이 수호신을 잃었다고.
전쟁터에 나간 가족이 죽었으리라 짐작하면서도 정말로 부고를 듣고 나서야 무너지는 경우와 같았다.
“…저희 가족은 아르피기아에 없었음에도 다른 자들보다 빨리 신의 소멸을 알 수 있었지요.”
“어떻게 말이죠?”
“멍한 얼굴로 나타난 베인의 몸에 얼룩이 하나도 없이 사라져있었으니까요.”
이유 모를 슬픔에 잠겨있던 가족들은 갑자기 불치병이 나은 베인의 모습에 놀라 눈물을 흘렸다.
그 때가 아르힘의 마지막 치료였기에 아르힘이 베인을 낫게 해준 것이라 오해한 것이다.
“아르힘 님이 그런 저희에게 찾아와 오해를 풀어주며 아르피기아가 멸망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적어도 베인의 말로는 그랬습니다. 저희는 기절하여 들을 수 없었으니까요.”
“베인도 아르힘 님과 대화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요?”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레오나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다.
“어떻게 아르힘 님을 믿게 되었나 물으신다면 외람된 말이지만 저희가 신을 잃었을 때 가장 가까이에 있던 수호신이 그분이었기 때문입니다.”
투이나는 속으로 호흡을 골랐다.
‘그래, 그런 간단한 이유라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아르힘이 사라졌을 때 곧장 자신을 믿어주는 편이 투이나가 사람들을 지키기 좋을 테니까.
‘그래도 되겠죠, 아르힘 님?’
아르힘이 사라진다는 생각만 해도 체온이 내려갔다.
그 자리를 자신이 대체해야 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투이나는 아르힘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가늠할 수가 없어서 불안해졌다.
자신이 그만큼 빨리 뒤를 따를 수 있을까.
“그래도 진정한 신도라면 사라진 신일지언정 끝까지 믿음을 유지하는 게 바람작한 도리겠지요.”
레오나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어쨌든 무수한 신들 중에서 아르힘 님이 가장 가까이에 있어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그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자네는 꽤 독실한 편이었지.”
대화를 듣고 있던 마디악이 중얼거렸다. 레오나가 살짝 턱을 끄덕거렸다.
“하지만 루가 님이 제게 이런 얘기를 물으시면 독실한 제 믿음이 흔들려 버립니다. 왜 굳이 사라진 신의 이야기를 물으시는지요.”
“…아르힘 님의 상태가 좋지 못하십니다.”
“!”
투이나가 처연하게 털어놓은 이야기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조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지 못하시다니요?”
“…….”
“루가 님! 아르힘 님의 일이라면 저희 또한 알아야 합니다!”
마디악이 다그쳤다. 그러나 레오나는 무언가 집히는 게 있는지 부릅뜬 눈으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이런, 세상에. 설마 베인의 일 때문입니까?”
“그래요.”
레오나가 털썩 주저앉으며 입을 틀어막았다. 꼭 욕설을 참는 것 같기도 하고 구토를 참는 것처럼도 보였다.
투이나는 차가운 벽에 몸을 기댄 채 레오나가 몸을 흔드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몇 번이나 입을 벙긋거리던 마디악은 단단히 굳어있는 투이나의 시선에 결국 더 말을 붙이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마디악의 무릎이 눈에 띄게 후들거렸다.
“맙소사…. 맙소사 이 나라가… 아르힘 님이….”
마디악이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한참 만에 레오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저를 죽이러 오신 겁니까? 아르힘 님이 복수를 명하셨나요?”
“아니요. 레오나, 당신도 아르힘 님이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건 알고 있잖아요.”
투이나는 몇 번이나 고민해보았던 문제를 다시 꺼내보았다.
그리고 역시 그녀가 가장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레오나 크로퍼드. 당신이 아르힘 님이 사라지신 후에 새로운 수호신이 나타난 뒤에 사람들을 수습하는 역할을 맡아주었으면 합니다.”
“……!”
레오나의 턱이 툭 떨어졌다. 주변에서 경악이 퍼져나가는 데도 투이나의 눈은 내내 고요했다.
“당신이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레오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제안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그건 형벌이나 다름없었다.
신을 잃은 자들을 통제하라니.
하지만 왕을 만들어 권력을 잡으려던 자가 맡을 일로는 몹시 적합했다.
투이나는 약간의 연민을 내비쳤다.
“저도 그 자리에 있을 겁니다. 조금 다른 모습이겠지만.”
투이나는 아주 천천히 말에 사이를 두었다.
그녀가 듣기를 원하는 자들은 모두 영민했으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로지 충격만 가득했던 눈동자에 차츰차츰 새로운 깨달음이 찌르듯이 동공에 나타났으니.
“루, 루가 님. 혹시….”
“당신이 수호신이 되시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