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되살아난 여자의 영혼은 인간을 잊고 신의 곁에만 머물렀다. 영원히.
당신이 살아만 있다면 내가 더 바랄 것이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라카인이 말했다.
“지켜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것은 제가….”
라카인은 한 호흡을 쉬었다. 말이 점점 부풀어 목을 꽉 메우는 것 같았다.
“저는…….”
좋은 말을 꺼내야 한다. 그녀를 설득할 만한 말을 꺼내야 한다.
그러나 사무치게 올라오는 압박에도 불구하고 정작 라카인은 자신이 무엇을 그토록 원하는지조차 가닥을 잡지 못한 상태였다.
‘당신이 신이 되는 게 싫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인간으로 남는 게 싫은가 물으신다면 그 또한 아닙니다.’
허면 도대체 그는 무엇을 원하는가.
‘적어도 당신이…….’
투이나는 차분히 라카인이 말을 마치길 기다렸지만 그는 끝끝내 원하는 형태를 찾지 못했다.
답답해진 그가 자신의 형편없는 말재주를 원망하며 반복했다.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투이나가 가만히 무릎을 모았다.
그녀는 라카인이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이해한 것 같았다. 듣지 않고도.
“……우리 식사할까요.”
투이나가 제 힘으로 일어났다.
여전히 기력 없는 모습이긴 했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을 생각할 여유는 되찾은 모양이다.
“집에 먹을 게 좀 남아있을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돌아올 때까지 식탁도 차릴 겸 준비해요.”
“아, 네에….”
“알겠습니다.”
호루니와 스카차가 재깍 답했다. 그들은 투이나가 태연한 척하려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라카인도 알아차렸지만, 곧장 장단을 맞추기엔 투이나가 일으킨 감정의 여파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투이나는 망설이다가 라카인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질 거예요.”
“…….”
라카인은 말없이 손 안으로 들어온 손가락을 꾹 움켜쥐었다.
그의 눈 밑이 미미하게 붉었다.
어쩐 일인지 투이나는 위로를 끝낸 뒤에도 곧장 손을 빼지 않았다.
“으흠!”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호루니가 노골적으로 헛기침을 해댔다. 그제야 두 사람이 떨어졌다.
투이나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여기 단지에 호두가 있네요!”
그녀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걸 보자 라카인은 비로소 심장이 제 속도로 돌아온 것 같았다.
아니, 평소보다 조금 빨랐던가?
투이나와 함께 있으면 언제나 이 박자였기에 알 수가 없다.
라카인이 투이나가 잡았던 손으로 심장 부근을 잠시 만져보았다.
투이나가 물을 끓인다며 불쏘시개를 찾으러 간 사이 호위들은 감자와 양파의 껍질을 벗겼다.
호루니는 무슨 이유에선지 뾰족한 눈으로 라카인이 일을 잘 하나 감시했지만, 식칼도 칼이라고 후루룩 살을 분리해내는 그를 보며 실망한 기색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스카차는 자기 동기가 그러고 있는 꼴을 보더니 푹 한숨을 쉬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겁니까?”
“뭐가.”
“루가 님이 수호신이 되신다는 얘기 말이야.”
감자 눈을 도려내던 라카인의 칼끝이 그대로 멈췄다.
호루니는 그가 이 얘기를 꺼낼 줄 몰랐는지 머뭇거리다 답했다.
“생각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루가 님이 수호신이 되시면 좋은 거잖아.”
“그럼 아르힘 님은?”
“아르힘 님은… 아르힘 님이지.”
“우리가 누굴 믿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루가 님이 수호신이 되는 걸 반갑게 여기겠어?”
스카차가 지적했다.
“난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니까. 루가 님이 수호신이 되시면 아르힘 님은 어떻게 되는 건데?”
“으…은퇴하시는 게 아닐까?”
호루니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스카차의 표정은 회의적이었다.
“사제님들 하는 걸 봐. 다른 사람들은 우리만큼도 루가 님을 안 믿을걸. 그런데 아르힘 님 대신 루가 님을 믿겠어?”
“그건 그 사람들의 믿음이 부족한 탓이야!”
분개한 호루니가 텀벙 깎아놓은 감자 그릇으로 칼을 빠트렸다.
“잊었어? 우리 셋만 루가 님의 첫 신도라고 했잖아. 우리가 사람들을 믿게 만들어야 하는 거라구.”
자연스럽게 우리에 라카인을 포함시켰던 호루니가 입을 합 다물었다.
정작 라카인은 호루니가 자신을 싫어하든 좋아하든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스카차도 호루니의 격분에 별로 공감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게 이상하단 거지. 어쨌든 우리는 루가 님이 아닌 신을 믿는 사람들이잖아. 개종이야말로 모든 수호신들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라고.”
그 말을 하며 스카차는 라카인을 힐끔거렸다.
양파를 집어 들려던 라카인이 문득 그의 의도를 이해했다.
“마법사는 내가 병에 걸렸기 때문에 신의 벌을 피해 갔다고 말했다.”
“그럼 당신은 더 이상 아르파를 안 믿는 겁니까? 전혀?”
스카차가 계속해서 캐물었다.
라카인은 잠깐 자신의 안에 남아있을 신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피와 공포와 절대적인 복종은 여전히 한쪽 구석에 달라붙어 있었지만. 라카인은 더는 그것이 전처럼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라카인은 마저 껍질을 벗겨내며 대답했다.
“그분의 존재는 믿지만, 더 이상 따르지 않는다.”
“그럼 된 거네.”
호루니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믿을 수 있다면 됐어.”
“말이 이상하잖아. 꼭 루가 님을 믿으려면 병에 걸려야 한다는 뜻으로 들린다고.”
스카차가 투덜거렸다. 라카인의 귀에도 이상하게 들렸다.
호루니와 스카차는 투이나를 위해서 얼룩병에 걸리기를 자처했지만, 그래도 찜찜하긴 하겠지.
라카인은 팔뚝까지 번진 얼룩이 떠올라 살짝 올라갔던 소매를 다시 내렸다.
“지금이야 어쩔 수 없지만 루가 님이 진짜 수호신이 되시면 걱정할 필요 없을 거야. …아마도.”
호루니가 자신 없이 대답했다.
스카차가 썩은 양파를 찌르는 것만큼이나 푹푹 들어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랬으면 좋겠다. 이게 곧 끝난다는 게 다행이야. 구혼식을 일 년 더 하라고 했으면 난 도저히 못 버티겠어.”
“멍청이!”
호루니가 눈꼬리를 치켜 올렸다.
그게 바로 정확히 투이나가 한 일이라고 대답하려던 호루니가 황급히 대화를 잘랐다.
투이나의 발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얼굴이 새까맣게 된 투이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칫 일어나려던 라카인은 그게 재라는 걸 깨닫고는 진정했다.
금세 얼굴이 발개진 호루니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루, 루가 님. 얼굴이 왜 그러세요?”
“아아. 굴뚝으로 통하는 뚜껑을 안 열고 불을 피웠더니 연기가 엄청 나더라고요. 그거 처리하느라 늦었지 뭐예요.”
투이나가 즐겁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일에 애먹을 제가 아니죠. 물은 팔팔 잘 끓고 있으니까 써는 거 도와주러 왔어요. 저 몰래 다른 거 썬 거 없죠?”
“아핫하. 그럼요. 루가 님.”
호루니가 열심히 웃어댔다. 일부러 만든 농담이었지만 라카인은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자기 집 화덕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투이나가 얼마나 이 집을 낯설어하는지 굳이 상기시켜줄 필요는 없으니까.
라카인이 깔끔하게 깎아낸 감자와 양파를 한 바구니 들고 일어섰다.
“손질은 다 끝났습니다.”
“아, 고마워요!”
투이나가 쾌활하게 답했지만 라카인에게서 바구니를 건네받을 때 손끝이 스치자 그만 바구니를 놓치고 말았다.
와르륵! 둥근 채소들이 연달아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아, 이런! 미안해요! 제가 왜 이러지.”
투이나가 허둥지둥 허리를 굽혔다.
라카인이 저 멀리 굴러가는 양파 하나를 가볍게 붙잡았다.
“제가 줍겠습니다.”
“미안해요….”
“아닙니다.”
“루가 님은 아직 힘이 덜 돌아오신 거예요! 앉아 계세요!”
“아니, 저 괜찮은데.”
호루니가 머리를 맞대고 바닥을 줍는 투이나를 얼른 끌어냈다.
투이나는 민망한 표정으로 주섬주섬 주웠던 감자를 옷자락에 푹 담았다.
호루니는 혹시라도 투이나가 다시 올까 봐 잽싸게 야채를 주워 담았다.
라카인은 잠깐 저 속도면 다시 대련을 시켜 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호루니는 다시 수북하게 쌓인 바구니를 혼자 들어 올렸다.
“제가 갖다 놓겠습니다!”
“야… 어차피 그거 다시 썰어야 돼.”
스카차가 창피한지 호루니를 붙잡았지만 그녀는 쌩하니 부엌으로 들어갔다.
라카인은 천천히 투이나가 앉은 자리를 확인하고는 하나 주웠던 양파를 올려놓으러 따라 들어갔다.
호루니는 식탁에 바구니를 올려두고도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이었다.
뒤따라온 라카인의 인기척을 느낀 호루니가 불쑥 말했다.
“…저는 상관 안 해요.”
“……?”
“루가 님이 신이든 사람이든 말이에요.”
호루니가 홱 몸을 돌렸다.
“아르힘 님을 믿는 게 뭐 어때서요. 병에 걸렸어도 저는 아르힘 님도 믿고 루가 님도 믿어요.”
그것은 마치 아르파를 외면한 라카인을 질책하는 말처럼 들렸다.
사람들은 아르파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제대로 된 신도라면 믿는 신을 버리지 않는 법이니까.
스카차에겐 태연하게 말해놓고 막상 호루니도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라카인은 자신이 아르파를 떠나왔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끊긴 것이다.
병으로 단절된 그의 신앙이 무언가 새로운 것으로 변해버리는 일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호루니가 말했다.
“루가 님이 사람으로 계시는 동안은 아르힘 님도 믿고 루가 님도 믿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할 겁니다. 그리고 루가 님이 수호신이 되시면, 더는 고민할 필요도 없어지겠죠.”
호루니는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는지 다닥다닥 빠르게 말했다.
“루가 님도 사람으로 계시는 걸 좋아한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렇게 말하고는 호루니가 길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주 꺼내기 버거운 이야기를 오랫동안 망설이던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그러니까 루가 님이 사람으로 계실 동안은… 데려가지 말아주세요.”
라카인은 그 말을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멍하니 호루니를 지켜보는 동안 저토록 푹 익은 토마토처럼 변해가는 얼굴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호루니는 묵묵부답인 라카인의 반응에 속이 터지는 지 쉬운 말로 다시 소리쳤다.
“루가 님 꼬시지 말라고요!”
라카인은 벙쪘다.
살아생전 누군가한테 이런 일로 노골적인 견제를 받아본 적이 있던가?
전쟁터에서 공적을 다투려고 싸움질은 해본 적이 있었지만….
“나는, 그런….”
라카인이 말을 더듬었다.
애초에 투이나가 넘어올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행동에 별다른 의도를 담지 않은 지 오래였다.
그냥 혼자만 간직하려고 했던 것마저 그렇게 티가 났던가?
아니, 더 중요한 것은. 호루니가 자신의 마음을 눈치 챘다는 건 진즉 알던 사실이다.
그런데 다시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면 도대체 투이나가 자신을 어떻게 보았단 뜻일까?
‘어떻게?’
당황한 나머지 라카인은 호루니가 씨근거리며 내뱉는 말을 그냥 듣고만 있었다.
“…머리 진짜 괜히 잘라줬어요.”
호루니가 원망스럽게 내뱉고는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말이 꼭 투이나가 자신을 보며 흔들리고 있다는 뜻처럼 들려 라카인의 심장이 정신없이 방황하기 시작했다.
남은 사람이야 어떻든 투이나는 음식을 푸짐하게 만들었다.
“언니 오빠들은 대부분 밖에서 일하지만 혹시 모르잖아요.”
“과연 다섯째십니다….”
스카차가 어마어마한 음식의 양을 보고 혼자 감탄했다.
콩과 토마토, 양파를 볶아 얹은 국수는 큰 쟁반에다 담아야 할 정도였고, 감자를 넣어 구운 납작 빵은 산더미처럼 쌓였다.
투이나는 아예 단지에 넣어둔 시큼한 야채절임까지 통째로 꺼내놓았다.
부모님에, 손위 형제가 네 명에, 동생들까지 둘 있는 사람이 식탁을 차리면 이런 법이다.
‘게다가 호위 분들까지 있잖아.’
엄청난 대인원을 가정한 덕분에 음식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으로 시야가 뿌옇게 될 정도였다.
늘 신전에서 주는 밥만 먹던 라카인은 아르힘의 가정식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자연스럽게 손을 씻고 오는 호루니와 스카차와 달리 멀뚱히 식탁 옆에 서 있었으니 말이다.
투이나는 괜히 속이 간질거렸다. 큼 하고 호흡을 고른 투이나가 라카인에게 권했다.
“같이 가서 손 씻어요. 빵이 그냥 들고 먹긴 힘들어서 찢어 먹어야 하거든요.”
“아, 칼이 있기에 써는 줄 알았습니다.”
“저 빵은 질겨서 잘 썰리지도 않고 그러다 속도 다 삐져나와요.”
호루니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녀를 본 라카인은 몹시 어색하게 식탁 옆에서 떨어졌다.
‘둘 사이가 또 안 좋은가?’
투이나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라카인을 데려갔다.
사이가 안 좋으면 잠깐 거리를 두게 할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호루니가 더 울상이 되었다.
영문을 모른 채로 투이나는 라카인과 함께 밀가루가 남은 팔을 씻으러 갔다.
‘별 일 아니야.’
투이나가 기운차게 다리를 옮겼다.
둘만 움직이는 일이 뭐 대수라고. 괜히 지금 이상하게 걷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식하는 일은 그만두자.
그래도 전과 달리 힐끔힐끔 라카인에게 시선이 갔다.
시원하게 물을 끼얹을 줄 알았던 라카인은 뜻밖에도 매우 조심하면서 손을 씻었다.
물이 튈 걸 걱정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가 계속 소매를 걷지 않는 걸 지켜보던 투이나의 미간이 갑자기 찌그러졌다.
“라카인.”
“…예.”
“소매 좀 걷어볼래요?”
라카인은 갑자기 옷이라도 벗으라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뭐, 뭐야? 내가 진짜 그랬나?’
말을 꺼낸 투이나가 오히려 혼란스러워질 정도였다.
다행히 투이나가 자신의 발언을 되돌아보기 전에 라카인이 머뭇거리며 팔뚝을 걷어 올렸다.
그러자 투이나의 머릿속에 남아있던 당황이 깡그리 날아갔다.
“병이 심해졌잖아요!”
투이나가 덥석 팔을 붙잡자 라카인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녀가 경악할 만큼 회색 얼룩은 이제 열댓 개를 넘어 팔꿈치를 향해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됐지?’
병의 진행 속도가 너무 빨랐다. 마음이 다급해진 투이나는 무작정 라카인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벌써 오셨어요?”
“팔 좀 보여주세요!”
투이나가 소리쳤다. 호루니와 스카차는 얼떨떨한 얼굴이었지만 이내 순응하고는 소매를 당겼다.
라카인 만큼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 모두 팔뚝에 흉측한 회색 얼룩을 대여섯 개씩은 달고 있었다.
“……!”
힘이 풀린 투이나가 그들의 팔을 툭 놓았다. 호위들은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저흰 정말 괜찮습니다, 루가 님.”
“아직 반년도 안 지났는데…….”
“다른 사람들에 비해 조금 빠르긴 하죠?”
분위기를 풀어보려던 스카차의 말에 오히려 공기가 싸해지고 말았다.
호루니가 말려 올라가 있던 소매를 돌돌 내렸다.
“이런 건 걱정 안 해요, 루가 님.”
호루니가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탕 쳤다.
“루가 님이 수호신이 되시면 이까짓 병쯤은 낫게 해주실 수 있을 거잖아요.”
“그, 그렇습니다.”
스카차가 맞장구를 쳤다.
라카인이 뒤에서 얼굴을 찌푸렸지만 투이나는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정말 신이 되면 다 낫게 해줄 수 있어야만 해.’
어차피 수호신이 될 거라면 그런 능력을 바라게 된다.
“제가 꼭 아르힘 님한테서 어떻게 낫게 하셨는지 배워올게요.”
“네!”
“기다리겠습니다.”
‘아르힘 님이 아니더라도, 이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꼭 수호신이 되고 싶어.’
투이나는 해맑게 믿음을 보내는 호루니와 스카차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상하게도 라카인이 있는 쪽은 바라볼 수 없었지만.
그를 보면 무슨 표정을 하고 있든 결심이 흔들릴 것 같았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복제를 볼 때처럼.
투이나는 잠깐 머릿속이 버벅이며 엉키는 걸 재빨리 잘라냈다.
“이제 얼룩병이 무엇인지도 알았고, 수호신님도 만나보았으니까, 아르힘 님 문제만 해결하면 돼요.”
호위들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얼마 안 남았어.’
마지막 해결 방법으로 마법이냐 신이냐를 고르기만 하면 되는 문제다.
투이나는 마지막 시험을 기다리고 있을 샨과 시드룬을 생각하며 이마를 꾹꾹 눌렀다.
세 번째 시험을 끝내고 나면 결국 그녀는 수호신이 되어 있을 테니까.
‘그 전까지는.’
투이나는 용기를 내어 라카인을 돌아보았다.
천만다행으로 그는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누구를 위해서일지 몰라도, 투이나는 그게 고마웠다.
탓하지도 바라지도 않고 그저 기다리는 모습에 눈 밑이 시큰거릴 정도였다.
‘정말 이걸로 됐어.’
쿡쿡 쑤시는 감정은 슬픔이 아니라 안도여야만 한다.
투이나가 손을 꽉 맞잡았다.
“빨리 나으려면 잘 먹어야죠. 다른 사람들이 지금까지 안 오는 걸 보면 먼저 먹어도 되겠어요.”
“네.”
“맛있겠네요.”
투이나와 호위들이 얼른 식탁에 둘러앉았다.
끝까지 서 있으려던 라카인을 겨우 앉혔는데, 바깥에서 문고리가 돌아갔다.
달그락.
투이나가 흠칫 고개를 돌리고 호위들이 무기를 잡았다.
그러나 경계한 것과 달리 바깥에 기대어 놓은 문을 밀고 들어온 건 까치발을 든 꼬마였다.
“문이 부서져 있네.”
“모주라!”
얼굴이 환해진 투이나가 벌떡 일어나 달려갔다. 어리둥절한 꼬마가 영문도 모르고 투이나에게 폭 안겼다.
긴장했던 호위들의 어깨가 금세 축 늘어졌다.
호루니가 눈을 반짝였다.
“세상에, 동생 분도 루가 님이랑 똑같이 생겼어.”
“…맞는 말이긴 한데 지금 그 표현은 좀 그렇지 않냐.”
하필 투이나의 복제를 보고 온 뒤라 스카차가 찜찜하게 중얼거렸다.
다만 모주라는 복제와 달리 투이나와 찐빵처럼 똑같긴 했지만 훨씬 눈매가 가늘었고, 무엇보다 남자아이였다.
“왜 이제 와? 다른 사람들은?”
“오늘 안 들어오는데.”
“정말? 막내도?”
“깜박했다. 아흐란은 집에 올 거야.”
투이나의 팔뚝에 볼이 눌려있던 모주라가 눈을 굴렸다.
“그런데 왜 누나가 집에 있어? 저 사람들은 누구고.”
“아, 저 분들은 내 호위 분들이야. 라카인, 스카차, 호루니.”
투이나가 열심히 손짓하며 알려줬지만 정작 모주라는 사람보다 음식에 더 관심이 많아보였다.
코를 킁킁거린 모주라가 몸을 비틀며 빠져나왔다.
“저녁 해놨네?”
“손 씻고 먹어야지!”
투이나가 뒤늦게 말려보았지만 뽀르르 달려간 모주라는 호위들보다 먼저 숟가락을 쥐고 국수를 퍼먹기 시작했다.
호위들은 동그래진 눈으로 열심히 음식을 씹어 삼키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투이나는 약간 미안한 얼굴로 권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여러분도 먹어야죠!”
“아, 예엡.”
“동생 분이 참 맛있게 먹네요!”
언제나 투이나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호루니가 칭찬했지만 모주라는 관심도 없었다.
투이나도 음식을 먹기 시작했지만 열심히 준비한 것치고는 먹는 양이 적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만난 가족에 그저 반가움만 드러냈다.
“아흐란은 언제 집에 온대?”
“몰라.”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간 건데?”
“일하러.”
“…루가 님에게 너무 버릇이 없는 거 아닙니까?”
결국 참다못한 스카차가 한 마디 했다. 그러자 모주라는 물론이고 투이나마저 눈이 동그래졌다.
“버릇이 없는 것처럼 보이나요?”
“…예에?”
“누나니까 그런 건데.”
모주라가 투이나를 계속 힐끔거리다가 약간 겁을 먹은 것처럼 스카차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요.”
“음, 이제 보니 어리광이 심하긴 하네요.”
투이나가 살풋 웃으며 모주라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쑥스러워서 이래요. 신전으로 간 뒤로 계속 못 봤거든요.”
모주라가 서둘러 투이나의 손을 털어냈지만, 자세히 보니 그의 뺨과 귀가 온통 새빨갰다.
“호오.”
스카차가 그제야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모주라는 투이나가 지적한 게 창피한지 아예 등을 돌리고 와구와구 음식만 먹었다.
투이나가 즐겁게 턱을 괴었다.
“다른 사람들도 보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엇갈리다니.”
“다음에 또 보시면 되죠.”
멋모르고 대답하던 호루니가 핫 하고 표정을 바꿨다.
이제 투이나가 수호신이 되면 다시 가족을 만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복제된 투이나가 그 자리를 대신할 지도 모른다.
투이나가 직접 그렇게 부탁했으니까.
소스라치게 놀란 호루니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죄, 죄송해요. 루가 님. 제가 말실수를…!”
“아니에요. 정말로 또 보러 오면 돼요.”
투이나는 싱긋 웃었지만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모두가 알았다.
복제된 자신을 본 투이나가 도망쳐온 곳이 집이었으니.
사실상 수호신이 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가족을 보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금 더 드십시오.”
라카인이 어찌할 줄 모르고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권했다.
라카인의 말에 투이나가 조금 더 먹긴 했지만 여전히 시선은 어린 동생에게 향해있었다.
‘마지막 인사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려나.’
투이나는 그냥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언젠가는 그들도 알게 되겠지.
모주라보다 조금 늦게 막냇동생인 아흐란도 집에 도착했다.
숫기 없는 투이나의 여동생은 낯선 사람들을 보자마자 투이나의 옷자락을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투이나는 더 집에 있고 싶어 했지만, 말도 없이 신전을 나온 뒤로 꼬박 한나절이 지났다.
“이제는 돌아가셔야 합니다, 루가 님.”
“사제님들이 찾고 계실 거예요.”
이미 캄캄하게 저문 바깥을 보며 호루니와 스카차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래요, 가야죠.”
투이나는 선뜻 옷자락을 털었다.
“누나 갈게, 모주라! 아흐란도 그만 이 손 놓자.”
수줍음을 탄다던 모주라는 그 소리를 듣고도 괜히 노는 척을 계속했다.
라카인은 어쩐지 그 모습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망설이던 그가 조심스럽게 소년에게 다가갔다.
“모주라 님.”
한 번도 존칭으로 불려본 적이 없었던 모주라가 깜짝 놀랐다.
호위들 중에서도 제일 낯설게 생긴 라카인이 머리를 들이대니 놀랐던 것이다.
퉁방울처럼 커진 눈동자가 라카인의 얼굴을 훑는 동안 그가 담담히 말했다.
“루가 님에게 인사하러 가지 않으십니까?”
“누…나는 또 온다고 했는데요.”
“……하지만 다시는 볼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욱신. 그 말이 무심코 진심을 퍼낸 까닭에 라카인의 목소리는 무척 진실 되게 들렸다.
혼란스러워하는 모주라의 머리위로 투이나가 말했다.
“전 괜찮아요, 라카인. 인사 안 해도 돼요.”
투이나는 웃었지만. 어린 마음에도 무언가 느껴졌는지 모주라가 허둥지둥 일어났다.
그리고는 투이나를 꽉 끌어안았다.
“사라지면 싫어할 거야.”
“으응?”
투이나가 엷게 웃었지만 절실하게 꼭 매달리는 작은 팔을 보고는 그녀의 표정도 흔들리고 말았다.
“또 와야 해. 거짓말 하면 나쁜 사람이니까.”
“……알았어.”
투이나가 모주라의 뒤통수를 꼭 안아주었다.
“너를 두고 어떻게 나쁜 사람이 되겠니.”
모주라가 코를 훌쩍였다.
비로소 이별다운 이별을 본 호위들은 감동과 안심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라카인은 은은히 번져오는 감정 속에서 처음으로 어떤 실마리를 잡은 것 같았다.
투이나에게 결국 답하지 못했던,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의 실마리를.
* * *
신전으로 돌아온 투이나 일행은 사제들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한참 찾았습니다!”
헐떡거리며 뛰어온 두르발 사제가 눈을 홉떴다.
‘하긴 아무리 몰래 와도 정문으로 들어오면 바로 알겠지.’
투이나는 신전을 빠져나간 걸 들켰으니 호된 꾸중을 기다렸다.
그런데 두르발은 혼내는 대신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대체 어디 있다 오신 겁니까? 아르힘 님이 나오셨습니다!”
“네?”
“빨리 오십시오!”
냉큼 두르발이 손짓하자 덩달아 투이나도 뛰기 시작했다.
‘맙소사. 아르힘이 나오셨다니?’
일단 말만 놓고 보면 분명한 희소식이다. 그동안 아르힘이 성소에서 나올 수 없어서 얼마나 걱정했던가.
‘내가 손쓰지 않아도 문제가 해결 된 거야? 그럼 좋을 텐데!’
투이나의 설레발은 오래가지 못했다. 두르발이 뛰면서도 용케 제대로 설명을 해냈기 때문이다.
“저로서도 정말 당혹스러운 일이라 얼마나 루가 님을 찾았는지…! 이제 더는 사제 서품식을 치를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제가 없는 사이에 아르힘 님이 다녀가신 거예요?”
“그렇다고 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도 못하고…. 다들 아르힘 님을 보았긴 보았습니다.”
“보았다고요? 직접이요?”
투이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기절한 게 아니라?’
두르발이 영 머쓱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게… 꿈속에서 보았다고 합니다.”
“꿈이요?”
삐끗. 놀란 나머지 투이나의 발목이 꺾여 휘청거렸다.
그 바람에 잠깐 멈춘 틈을 타 두르발이 우다다 말을 쏟아놓았다.
“예. 원래 사제 서품을 받기로 했던 자들이 같은 날, 같은 시에 동시에 같은 꿈을 꾸었답니다. 그런데 그 자들이 꿈속에서 본 소년이 아르힘이라고 한사코 주장하는데다가 외양묘사가 평소에 루가 님이 말씀하시던 모습과 똑같지 뭡니까.”
“잠, 잠깐. 조금만 천천히 말씀해주세요.”
“루가 님이 보시기에도 기이하지 않습니까? 정확히 서품을 받기로 했던 자들만 그 꿈을 꾸었단 말입니다.”
“아르힘 님이 꿈으로 오셨다는 건 확실히 이상하지만… 적어도 그분들은 확실하게 사제가 되신 거 아닌가요?”
“그게 바로 문제입니다.”
두르발이 노회한 얼굴 위로 당혹을 땀처럼 흘려댔다.
“그들이 꿈속에서 아르힘이 더 이상 사제를 만들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투이나의 안색이 변했다. 왜 두르발이 이렇게 허둥지둥 뛰어나왔는지 즉각 이해가 갔다.
“…성소부터 가볼게요. 그 분들을 불러다 주세요.”
“벌써 모여 있습니다!”
두르발이 밤중에도 환하게 불이 켜진 건물 하나를 가리켰다. 입술을 깨문 투이나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거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투이나가 종탑이 있는 언덕을 단숨에 올라갔다.
두르발은 뒤쫓아 오기 바빠 라카인을 포함한 호위들까지 성소로 올라오는 걸 말리지 못했다.
“흐엑. 헤….”
뒤에서 기묘한 소리를 내며 가슴을 두드리는 두르발을 스카차가 부축해주는 동안 투이나는 서둘러 종탑에 손을 올렸다.
“아르힘 님?”
투이나가 벽에 양 손을 올린 채 바짝 귀를 붙였다.
아르힘이 갇혀있었을 때와 달리, 종탑은 원래대로 따듯하고 부드러운 촉감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러나 안쪽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투이나가 매일 해왔던 것처럼, 아무리 기도를 올려도 계속 묵묵부답이다.
이쪽에서는 답을 얻지 못하리라 판단한 투이나가 바로 방향을 바꿨다.
“서품식을 받은 분들을 봐야겠어요.”
“예에….”
간신히 숨을 돌린 두르발이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뛸 준비를 했다.
그 연세까지 책상에만 앉아있던 사제로서는 좀 괴롭긴 할 것이다.
“사제님은 천천히 와도 괜찮으니까 자세한 얘기는 가서 들을게요.”
“그, 그러시겠습니까?”
여기가 성소라는 생각에 간신히 퍼질러 앉지 않을 수 있었던 두르발이 고개를 끄덕였다.
투이나랑 호위들이 처음에 두르발이 가리켰던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잔뜩 모여 있던 사제들이 웅성거렸다.
“루가 님!”
“이제 오시면 어떡합니까!”
“대체 어디 계셨어요?”
“미안해요. 간략한 얘기는 두르발 사제님께 들었어요! 그 분들은 어디 계시죠?”
아르힘의 꿈을 꾼 예비 사제들은 둥근 바닥에 모여 앉아있었다.
계단식으로 낮게 만들어둔 바닥에 오도카니 모인 그들은 무척이나 불안해보였다.
한밤중에 불을 켜둔 사제들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그들을 둘러싸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투이나가 이마를 짚었다.
“…이렇게 모여계시면 꼭 이단 심판 같잖아요.”
“아니라고 단언도 못하잖습니까!”
눈썹에 흰 털이 삐죽하게 솟은 사제 하나가 맹호처럼 답했다.
“더 이상 사제가 나오지 않는다니 이게 무슨 망발이에요!”
“저흰… 진짜 들은 대로 말한 죄밖에 없습니다….”
이제 갓 열일곱이나 되었을까 싶은 청년이 달달 떨며 대답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얼룩투성이로 등장한 투이나를 보고 흠칫했다.
“저, 저 분이 진짜 루가 님이세요?”
“루가 님은 병이 다 나은 줄 알았는데…?”
“시끄럽다!”
이 자리에서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눌 생각이 없었던 사제 하나가 일갈했다. 다른 사제가 말렸다.
“지금은 자네들이 보았다는 아르힘 님의 이야기가 더 중요하네.”
“그 말을 믿나? 루가 님도 아니고, 저런 풋내기들이 어찌 아르힘 님과 대화했단 말인가!”
“루가 님이 가려내주시겠지.”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죠.”
투이나가 서둘러 그들을 진정시켰다.
꼭 옛날 투이나가 처음 루가가 되었던 때를 보는 것 같았다.
투이나는 저 예비사제들과 달리 혼자서 저 사제들과 맞서야 했던 것이다.
‘그 때도 이겨냈는데 지금이라고 못할 거 없어.’
투이나가 무릎을 굽혔다.
“어떤 꿈이었는지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어요?”
“그게… 작은 방에 저희가 앉아있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거의 아무것도 없는 방이요.”
예비 사제가 더듬거리며 말을 시작했다.
“있는 거라곤 평범한 의자 하나에… 벽과 천장 모두 하얬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그냥 꿈이 아니라 신전의 방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서야 벽에 문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누가 그 문을 두드리는 걸 듣고서야 깨달았죠.”
이야기를 들을수록 투이나의 표정이 조금씩 이상해져갔다.
라카인은 전혀 불쾌한 내용이 아니었는데 묘하게 반응하는 투이나가 눈에 걸렸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문을 열어주려고 다가갔는데, 손을 대기도 전에 저절로 문이 열렸습니다. 거기에 웬 꼬마가… 아, 아니 아르힘 님이 계셨습니다.”
“까만 머리카락에 생전 처음 보는 빼어난 미모의 소년이라, 보자마자 도저히 평범한 사람 같지가 않았습니다.”
“게다가 엄청 성스러운 목소리로 스스로를 아르힘 님이라 말씀하시는데… 꿈이라서가 아니라 진짜로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게 허튼 소리가 아니라고요?”
사제가 으르렁거렸다.
“차라리 마법사의 장난질이라고 믿는 게 더 합당하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아르힘 님은 정말 사제 서품 때문에 오셨단 말입니다!”
“그러면 왜 너희들은 기도해도 치유할 수가 없단 말이냐!”
“아르힘 님께서 갑자기 사제를 만들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어!”
주변이 순식간에 와글와글 시끄러워졌다.
투이나는 소란 속에서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내면이 훨씬 더 시끄러웠던 것이다.
“…저도 비슷한 꿈을 꾼 적이 있어요.”
작은 목소리였는데도 순식간에 목소리가 뚝 끊겼다.
“…무어라고요?”
“정말이십니까, 루가 님?”
구명줄을 잡은 것처럼 예비 사제가 얼른 되물었다.
“몇 번인가요.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어떤 방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꿈이 있었어요. 똑같이 누가 문을 두드리고, 의자에 앉아….”
투이나가 이마를 찡그려가며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아르힘 님이 직접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는 걸요.”
긴장하고 있던 사제들이 그 말에 한숨 비슷한 걸 잔뜩 토해냈다.
그들의 표정이 금세 그럼 그렇지 하는 기색으로 바뀌었다.
“역시 아르힘 님이 아니셨던 겁니다!”
“개꿈이에요!”
사제들은 쉽게 말했지만 정작 투이나는 그 말에 반대되는 심정이었다.
‘직감일 뿐이지만, 같은 꿈인 것 같아.’
그들의 어조에서 배어나는 기묘한 느낌이 투이나가 꿨던 꿈과 맞아떨어졌다.
다만 투이나가 있던 곳은 텅 비어있긴 했지만 방보다는 집에 가까웠고, 훨씬 어두운 회색빛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언제 그 꿈을 꿨지?’
마지막으로 그 꿈을 꾼 뒤, 그녀는 라카인이 독을 먹고 죽어간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떻게 한 번도 의아해하지 않았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왜….’
몸이 오싹해졌다. 의식도 못한 사이에 이미 아르힘은 그녀에게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던 걸까?
‘꿈으로?’
투이나의 뒷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저는 여러분의 말을 믿어요.”
“…루가 님!”
“루가 님!”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루가 님 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예비 사제들은 살았다는 감격으로, 사제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의심으로.
“자세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이런 일을 아르힘 님이 아니면 도대체 누가 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허락받은 구혼자인 시드룬조차 요즘 신전에 드나드는 걸 어려워하고 있어요. 그런데 다른 마법사가 일부러 사제 서품을 받을 분들만 골라서 마법을 걸었다구요?”
“…….”
“그게 더 말이 안 돼요.”
“하지만 증명할 수가 없잖습니까.”
“이제 다시 루가 님이 성소로 들어가 아르힘 님을 만나 뵐 수도 없고 말입니다.”
사제들의 눈빛이 불신을 띠었다.
울컥한 호루니가 나서려고 했으나 투이나와 스카차가 제지했다.
투이나가 훨씬 차분해진 눈빛으로 그들을 마주했다.
“여러분, 제 말은 믿나요?”
“……루가 님이시면 믿지요.”
그 말에는 당신이 아르힘에게 인정받은,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일 때만 믿을 수 있다는 뜻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었지만.
투이나는 화내지 않았다.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니까.’
막혀있던 우물이 뚫리는 것처럼 정신이 또렷해졌다.
“제가 직접 예비 사제님들의 말이 맞는지 확인해보면 문제없겠죠.”
“그건 그렇습니다만.”
“어떻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여기 이불 하나 깔아주세요.”
투이나가 비장하게 말했다.
비장한 목소리에 사제들이 잠시 헷갈려 했다.
“이, 이불 말씀이십니까?”
“여기서… 주무시게요?”
“제가 직접 꿈을 꿔보면 명확해지겠지요.”
투이나가 빠릿하게 대답했다. 살아났다 싶었던 예비 사제들의 얼굴이 가엽게 찌그러졌다.
“그, 그건 좀….”
“저희도 그 뒤로 다시 아르힘 님의 꿈을 꾸지 못했습니다.”
“다시 잠들어 보셨어요?”
“예. 너무 긴장한 나머지 이 친구가 깜박….”
지금도 눈을 반쯤 감고 있던 예비 사제는 호된 사제들에게 시달려 눈 밑이 퀭했다.
투이나는 얕은 한숨을 쉬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말을 철회하지는 않았다.
‘아르힘 님이 성소에서 나올 수 없는 대신 다른 방법으로 대화를 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낸 것 같아.’
급하게 사라지면서 아르힘은 자신이 다시 오겠다고 말했다.
투이나가 신전을 잠깐 나간 걸 알아차리고는 예비 사제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확인은 해볼게요.”
크게 안심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투이나의 의지가 굳건하자 예비 사제들은 혹시나 하는 기대를 살짝 품었다.
반대로 사제들은 영 미덥지 못한 표정들이었다.
“차라리 성소로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런 정결치 못한 곳에서 주무시다니요.”
“벌써 다녀온 걸요.”
투이나도 성소에 못 들어갔단 소리에 사제들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결국 위층에서 급히 찾아낸 이불을 바닥에 깔고 말았다.
루가를 어떻게 맨 바닥에 재우냐고 짚을 깐다 천을 올린다 시끄러웠지만, 투이나는 그냥 이불 속으로 쏙 굴러들어가 버렸다.
‘힛, 차가워라.’
이제 막 사람이 들어가 서늘한 이불의 감촉에 투이나가 부르르 떨었다.
투이나가 눕자 호위들과 사제들이 그녀의 주변으로 동그랗게 모여 다가왔다.
‘누운 채로 이렇게 올려다보려니 이상한 걸.’
투이나가 어색하게 이불을 끌어당겼다.
수많은 얼굴들이 동시에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장면이 조금 무섭긴 했다.
“…그렇게 계속 쳐다보시면 잠 못 들 거 같은데요.”
“불안해서 그렇습니다.”
“정말 방으로 가 주무시지 않을 겁니까?”
“네. 일어나자마자 바로 알려드리는 게 좋잖아요. 제가 언제 깰지도 모르는데.”
둥근 사람의 원 끄트머리에 예비 사제들도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제발 아르힘 님 꿈을 꾸고 저희의 결백을 증명해주세요!’ 하는 표정들이 귀엽고 우스웠다.
투이나가 어서 잠들려고 몸을 뒤척이는데 옆에 무언가 따스한 온기가 다가왔다.
“도움이 되실 겁니다.”
라카인이 화로 하나를 옆으로 끌어온 것이다.
꽤나 무겁고 뜨거웠을 텐데 천 하나만 대충 감아서 끌고 온 요령이 감탄스러웠다.
따듯하게 일렁이는 불빛과 함께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라카인을 보자 갑자기 몸이 노곤해졌다.
잔뜩 긴장과 기대를 품은 눈동자들과 달리 담담한 그의 눈매 때문일까.
투이나는 가물거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무도 없는 텅 빈 방이었다.
‘…이렇게 빨리 꿈을 꾼다고?’
아무래도 아르힘이 그녀가 잠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더 타당했다.
“아르힘 님?”
투이나는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며 아르힘의 모습을 찾았다.
그러나 텅 빈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 한 가운데 놓인 의자와 탁자가 꿈속에서 찾을 수 있는 전부였다.
그 때 투이나는 탁자 위에 무언가 흰 빛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주변이 온통 어두운 무채색뿐이라 하얀 빛이 더욱 눈에 띄었다.
‘저게 뭐지?’
투이나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것은 소복하게 쌓인 하얀 가루였다. 투이나가 주저하며 그것을 만져보았다.
힘없이 부서지는 가루들을 본 투이나가 무심코 손가락에 묻은 가루를 입으로 가져갔다.
짠 맛이 났다.
투이나는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나 꿈을 꾸고 있을 때는 입 안 가득 작은 알갱이들을 물고 있었다. 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런데 그게 왜 바깥에 나와 있지?
투이나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투이나가 가루들을 그러모을 틈도 없이 바깥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 똑.
꿈에서 들었던 요란한 소리와 달리 작고 단호한 박자였다. 마치 아이가 두드리듯이.
투이나가 엉거주춤 허리를 세웠다. 조용하던 바깥에서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야, 문을 열거라.”
아르힘의 목소리였다. 왈칵 반가움이 치민 투이나가 서둘러 문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돌연, 까만 문을 바라보자 갑자기 무서움이 치밀었다. 아니, 정확히는 망설임이었다.
투이나가 말했다.
“…들어오세요. 잠겨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구나.”
“어째서죠?”
“네가 열어주어야만 한다.”
“어째서 제가 그래야 하죠?”
“네가 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투이나가 벌컥 문을 열었다. 문을 연 곳에는 가만히 서 있는 소년이 있었다.
그립고도 아릿한 소년이 자신을 올려다보자 투이나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알고 계셨군요.”
“그래.”
아르힘이 안타까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투이나는 주르륵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눈높이가 맞게 된 그녀에게 아르힘이 천천히 걸어 왔다.
“잠시 걷겠느냐?”
“……언제부터 제가 신이라는 사실을 아셨어요?”
자기 자신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아르힘은 안쓰러운 눈으로 투이나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바다에서 신전을 세웠던 일을 기억하느냐?”
기억했다.
기억하지 못해도 지금 자신의 집 밖에서 그 때의 바다가 되살아나는 풍경을 보면 알 수밖에 없었다.
쏴아아.
파도 소리가 해변 대신 건물 외벽에 닿아 부딪쳤다.
투이나는 소금이 낀 바위와 모래 사이로 호위 세 사람이 엉성하게 만든 천막을 볼 수 있었다.
거기에 힘겹게 끼어들어가 앉은 자신도.
그때 그들은 어린애 장난 같은 짓으로도 신전이라 인정받고, 시드룬을 불러내는 데 성공했다며 즐거워했었다.
투이나의 목이 잠겼다.
“그 때 시드룬을 부를 수 있었던 이유가… 아르힘 님의 신전을 지었기 때문이 아니었군요.”
“너의 신전이었다.”
아르힘이 담담하게 사실을 인정해주었다.
“그래서 호위 세 사람이 너의 첫 신도인 것이다.”
투이나의 신도.
정식으로 신의 이름을 받으면 이제 아르투이나로 불릴….
꿈인데도 불구하고 투이나의 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투이나는 떨리기 시작하는 턱을 악물었다.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네가 겪은 일은 나와 같다.”
아르힘은 투이나의 시선을 따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신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 인간의 몸에 갇혀 대부분의 능력은 발휘되지 않았다. 네가 몸을 떠나 영혼의 세계에 홀로 접촉할 때 비로소 완전한 신이 될 것이다.”
아르힘이 말한 영혼의 세계는 시드룬과 함께 갔던 외곽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아르파가 마법사는 절대로 못 열 것이라 단언하던 그 문. 새까만 통로.
시드룬의 몸이 변해버린 곳이다.
투이나는 양손을 꽉 맞잡았다.
“제가… 신이 되려면 죽음과 결혼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죽음은 말 그대로 너의 육체를 죽여 영혼을 해방하는 방법이다.”
아르힘은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투이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결혼은 상대방에게 너의 신성을 주는 방법이다.”
투이나의 눈이 커졌다.
“그 말씀은….”
“혼인식에서 이루어지는 신성한 결합의 순간, 감당할 수 있는 자에게 신의 자리를 넘긴다는 뜻이다.”
아르힘은 차분히 답했다.
“신의 영혼은 아무 몸이나 담을 수 없다. 내가 모은 구혼자들은 하나의 수호신을 감당할 수 있는 자들이다.”
투이나는 갑자기 현기증이 치밀어 혀를 깨물 뻔했다.
‘하나의 수호신을 감당할 수 있다니.’
영혼의 세계에서 몸이 변질된 시드룬이 신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것도 충격적이었고, 얼룩병에 걸렸던 베인도 수호신을 감당할 수 있는 몸이 되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아르힘의 말에는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다른 부분이 있었다.
“샨은 저와 결혼하는 순간 아르파 신을 잃고 새로운 신이 되는 건가요?”
“…그러하다.”
아르힘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같은 곳에 있다면 어떤 수호신이라도 결국 더 강한 신에게 밀려날 수밖에 없으니.”
“…….”
잔인한, 이토록 잔인한 선택이 될 줄은 샨도 미처 몰랐을 것이다. 아르파도 알았다면 왔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왜 여기까지 청혼하러 온 거지?’
의문을 가진 투이나는 곧바로 답을 알았다.
‘…자신이 이길 줄 알았을 테니까.’
그대로 결혼에 성공했다면 손쉽게 다른 수호신 하나를 손에 넣는 꼴이다.
솔직히 투이나도 만약 자신의 신성을 넘기는 게 가능하다면 아르파가 우세할 것 같았다.
아르투이나라는 신이 정말로 있다고 생각했을 때, 고작 신도가 세 명밖에 없는 신이 무슨 수로 전쟁의 신을 압도 하겠는가.
‘하지만 그 신성을 줘버리면, 내가 인간으로 남을 수 있어.’
차가운 진흙이 목덜미에 얹힌 것처럼 몸이 서늘해졌다.
만약 그녀가 사람으로 남는다면… 어쩌면….
갑자기 누군가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누구인지 정확히 볼 수가 없었다. 보면 안 된다.
지금만큼은.
아르힘이 그녀의 정신을 다시 깨웠다.
“아이야. 내가 왜 결혼을 고집했는지 알겠느냐?”
“…하지만 제가 인간으로 남고 싶어할 줄은 모르는 거잖아요. 어떻게… 저를 신전으로 데려와 이 모든 일을 준비하신 거예요?”
아르힘이 살짝 웃었다.
“너에게 선택권을 주고 싶었다.”
아르힘은 작은 몸으로 다가와 그녀의 머리를 안아주었다.
“아이야. 너를 알아본 뒤로 오랫동안 너를 지켜보았다. 너는 사람으로 지내며 행복해 보였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너른 목소리에 그만 투이나의 눈에 물기가 핑 돌았다.
“그랬어요. …저는 행복했어요.”
“가여운 아이야. 네가 신이 될 것을 알기에 사람으로 행복해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네가 모르는 사이에 그런 신성 따위는 다른 자에게 넘겨주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전 죽고 말았어요…!”
투이나가 참아왔던 목소리를 터트렸다.
“베인이 저를 죽여 버리고 말았어요! 아르힘 님이 그렇게나 준비해주셨는데…!”
투이나의 머릿속은 참아왔던 질척한 감정으로 터져 나왔다.
실은 그가 미웠다.
사랑해주었는데 자신을 살해하고 웃은 베인을 볼 때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했냐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가 깨어나길 바라며 매일 기도를 올리러 가면서도 실은 매일, 매번 도망가고 싶었다.
보고 싶지 않으니까.
아르힘은 투이나의 감정에 동화된 것처럼 입술을 꾹 눌렀다. 소년은 참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베인의 병은 내가 낫게 해준 것이 아니란다.”
“……네?”
“그의 수호신이 사라졌을 때 몸에 있던 죽은 영혼들을 같이 데리고 간 것뿐이다.”
투이나의 울음이 멈췄다. 그녀가 멍하니 아르힘을 올려다보았다.
소년의 모습을 한 아르힘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찬란하고도 성스럽게.
“나는 네가 베인을 선택한다면 죽은 영혼들이 차지했던 자리에 너의 신성을 집어넣을 생각이었다.”
감히 소년의 볼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이 별처럼 빛났다.
“그런데… 한 번 병든 영혼에 사라지지 않고 남은 영혼이 있을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베인이 마지막 밤에 너를 살해한 이유는 그 숨어 있던 죽은 영혼이 마지막 순간 깨어난 탓이다.”
네 영혼은 죽음을 원해.
투이나를 둘러쌌던 영혼들이 속삭인 말들이다.
그녀를 죽여 새로운 수호신이 된 투이나를 따라 영혼의 세계로 돌아가려는 죽은 영혼들이 있었다.
지금도 이렇게, 그녀의 몸에 한 가득 회색 얼룩으로 남아 있다.
엉겨 붙은 자들이.
아르힘이 끔찍함과 공포에 잠식되어가는 투이나를 힘겹게 붙들었다.
그것은 자신이 죄인을 미리 알아보지 못한 죄이며, 새롭게 신이 될 자를 향한 연민과 애정이 모두 섞인 몸짓이었다.
“미안하구나.”
아르힘은 깊이 입술을 눌렀다.
“투이나.”
베인은 한 번도 배신한 적 없었다.
죄가 있다면, 마지막 순간에 죽은 영혼에게 몸을 빼앗겼다는 것뿐이다.
얽매여있던 가슴에서 텅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동안 그녀를 조여 오던 압박의 고삐가 풀려났다.
투이나는 그때까지 몸을 이루고 있던 먹먹함이 신경을 타고 손바닥으로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은 거짓이 아니었어.’
아르힘은 한 가지 압박에서 풀려난 투이나를 진득하게 기다려주었다.
신은 과연 이어질 투이나의 생각도 꿰뚫어보고 있는 걸까?
베인의 결백함을 안 뒤에도 투이나의 마음은 뒤를 향해 돌아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투이나는 아르힘의 품에서 제 생각을 숨겼다.
‘그걸 뺀 나머지 선택은 세뇌 마법도, 영혼의 개입도 아닌 정말로 베인의 선택이었다는 뜻이니까.’
투이나는 서글퍼졌다.
베인은 그녀를 사랑했다. 사랑하기에 아르힘을 제 몸에 가두면서까지 투이나를 제 옆에 두려고 했다.
그 때부터 둘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가지고 말았다.
‘죽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
투이나는 속눈썹을 흠뻑 적시고 있던 눈물방울을 닦아냈다.
‘되살아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모른 채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
베인은 영원히 잠들고, 자신은 영원해질 신이 되었으니.
둘 다 인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전처럼은 살 수 없다.
‘…더 생각해봐야 베인의 몸을 빼앗긴 걸 원망하게 될 거야.’
그럴 바에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걸 해주고 싶었다.
“제가 신이 된다면 그들을 구해주고 싶어요.”
“그것은 너에게 달렸다.”
아르힘은 투이나를 일으켜 세웠다. 투이나는 곧게 일어났다.
아르힘은 소년의 모습에는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신이 된 이후에 어떤 능력을 얻을 지는 아무도 모른다.”
투이나는 아르힘의 인도를 따라 천천히 집 밖으로 걸어 나갔다.
집 바깥은 온통 검은 암흑뿐이었으나, 자세히 보면 그것들이 마치 강처럼 각기 다른 곳으로 흐른다는 걸 볼 수 있었다.
검은 바닥을 밟은 투이나는 첫 발에 늪처럼 빠질 줄 알고 긴장했으나, 의외로 그녀의 발은 부드럽게 그 위를 타고 지나갔다.
마치 성소에서 물 위를 걷는 감각과 비슷했다.
투이나가 낯선 세계에 정신이 팔린 사이 아르힘은 먼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너는 나의 아이다.”
“…….”
“네가 살아있을 때 나를 믿는 신도였기에 나는 네게 그들을 구원할 힘을 빌려줄 수 있다.”
투이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르힘은 그 빛을 꺼트려야 한다는 게 못내 아쉬운 사람처럼 말했다.
“하지만 나는 쇠약해져가고 있다.”
“그럴 수가…!”
투이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직 아르힘 님을 믿는 신도가 많습니다!”
“그들의 믿음과는 관계없다.”
아르힘은 시선을 내렸다.
“인간의 몸에 들어가면 자신이 신이라는 사실은 쉽게 잊고 만다. 아직 제 영혼과 육체를 가졌던 시절로 쉽게 돌아가고 말지.”
아르힘의 눈동자가 진한 갈매 빛으로 어두워졌다.
“그래서 사람들의 믿음을 감당하기엔 내 감정이 지나치게 사람다워지고 말았구나.”
그 순간 아르힘이 정말로 그 나이의 소년처럼 보였다. 어리고, 감정을 애써 참는 듯한….
망연해진 투이나가 믿을 수 없는 사실 앞에서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아르힘 님. 아르힘 님은 이미 베인의 몸을 빠져나오셨잖아요. 게다가 다른 신과 달리 현신하실 수 있는 육체가 있으십니다!”
“바로 그 때문이다.”
아르힘은 조용히 투이나의 바람을 꺾었다.
“내게 아직도 육체가 남아있는 까닭에 감정을 제어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
“차라리 아르파처럼 몸에서 몸으로 전전하며 감정에 나를 내맡기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렇기엔 내 그릇이 될 아이들이 가엽구나.”
아르힘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바람조차 없는 암흑의 공간이었기에 그 한숨에도 가벼운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베인의 영혼이 내게 붙잡혀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지.”
“……네에.”
투이나는 콱 틀어 막힌 목으로 간신히 대답했다. 아르힘이 서글프게 웃었다.
“내가 사라지면 베인의 영혼은 제 몸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런 방법은 싫습니다!”
투이나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어찌 그렇게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쉽게 하시나요? 아직도 아르힘 님을 따르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이 남았습니다!”
“…내가 남아있으면 너는 영영 사랑하는 자를 다시 볼 수 없다.”
“당신도 제가 사랑하는 분입니다!”
아르힘은 잔뜩 무언가를 삼킨 사람처럼 미간을 좁히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감정이 스쳐지나간 아르힘이 주저하며 말했다.
“…나를 포기하면 모두를 얻을 수 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네가 신이 된다면, 나는 너에게 모든 힘을 물려주고 사라질 수 있다. 그러면 너는 호위들의 병도 고칠 수 있고, 베인도 깨어나게 만들 수 있다.”
투이나가 입을 벌렸다. 그녀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단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마냥 좋은 일이라면 아르힘이 저토록 힘들게 이야기 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르힘 님이 사라지는 순간 제가 강제로 수호신이 될 수 있다는 뜻인가요?”
“그러하다. 네가 죽는다면.”
“…….”
“만약 네가 결혼한다면 너는 잊힌 신이 될 것이다.”
아르힘이 성급히 선택하지 말라는 듯 천천히 설명을 이었다.
“신의 삶을 포기하면 너는 태어나지도 못한 신이 되겠지. 다른 자가 네 자리를 대신해 신이 될 테니까.”
“그럼 아르힘 님은 어떻게 되시는 건가요? 나을 수… 있는 건가요?”
“그래도 나는 사라지겠지.”
아르힘이 세월이 한꺼번에 밀어닥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게 된 신을 누가 계속 믿겠는가.
“허나 천천히 사라져가며 인간으로 사는 너의 마지막까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자의 목소리였다.
베인의 몸에 갇힌 순간, 그는 너무 많이 변질되어 버렸다.
아르힘은 망연자실하게 그를 바라보는 투이나를 보며 진하게 끓어오르는 목소리를 올려 보냈다.
“…왜냐하면 너는 끝까지 나를 믿어주겠지? 투이나.”
투이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평생, 아니 어쩌면 영원토록 약한 소리를 하지 않았을 신의 불안에 어떻게 평정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아르힘은 무너지는 투이나를 다시 팔로 안아주었다. 투이나가 얼굴을 파묻었다.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나요? 베인의 영혼을 다시 데려갈게요. 당신을 낫게 하고 싶어요. 제가 이미 신이라면…!”
“고맙구나.”
아르힘이 작게 중얼거렸다.
“네가 정말로 영혼을 구하는 능력을 얻었다면 좋았을 텐데.”
투이나는 귓등에 스친 실낱 같은 목소리를 결코 놓칠 수가 없었다.
다급히 투이나가 몸을 떼었지만 아르힘은 더는 질문을 받아줄 수 없다는 듯 물러났다.
“이제 깨어날 시간이구나.”
무한히 펼쳐진 검은 평야도 회색빛 벽도 단숨에 멀어졌다.
쏜살같이 멀어진 풍경은 하나의 점으로 귀결해 하얗게 변했다.
그것이 탁자 위에 쌓여있던 소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순백의 초점은 하나의 빛으로 바뀌었다.
투이나는 자신이 멍하니 눈동자에 반사된 빛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건 조금 뒤였다.
라카인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기에 화로에 담긴 불빛이 몇 번이나 일렁여도 같은 자리에 빛이 남아있었다.
신과의 대화로 아득해져 있던 투이나에게는 딱 알맞은 현실감이었다.
“루가 님이 깨어나셨어!”
“루가 님, 정신이 드십니까?”
곧 다른 사람들도 투이나가 눈을 떴다는 사실을 알고 소란스러워졌다.
라카인이 손을 내밀었기에 투이나는 무심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라카인은 천천히 잡은 손을 당겨 투이나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혼몽한 머리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무수한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투이나가 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이불이라도 물어뜯을 기세였다.
신이 사라지면 곧바로 길을 잃고 혼란에 빠질 모습 그대로.
욱신.
투이나가 엄습하는 두통에 찡그렸다.
어떤 꿈은 깨어난 뒤에야 비로소 의미를 알아차리기도 한다.
“…알겠어요.”
“예? 루가 님?”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투이나는 듣지 못했다.
정신없이 머리를 몰아치는 무채색의 향연 속에서 라카인을 붙잡은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상냥하신 아르힘이시여.
“……이제야 당신이 무슨 뜻으로 말씀하셨는지 알겠습니다.”
사제들의 미간이 좁아졌다. 라카인은 투이나가 말한 당신이 그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장 알아차렸다.
아르힘이 꿈에 나온 것이다.
그리고 투이나는 너무 잔혹하기에 신이 결코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못했던 부분을 깨닫고 있었다.
신이 될지 인간이 될지 선택하라는 아르힘의 물음은 사실 다른 선택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신이 되어 이 나라, 아르힘을 지킬 것인지.
인간이 되어 자신을 지킬 것인지.
아르힘은 투이나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주저 없이 그녀를 희생해 나라를 지키는 새로운 수호신이 되라는 압박을 할 테니.
그리고… 아르힘은 투이나가 인간으로 남고 싶어 하는 이유도 알았을 테니까.
투이나는 대꼬챙이로 머리를 찌르는 것처럼 아찔하게 엄습하는 두통에 신음했다.
“괜찮으십니까?”
곧장 걱정을 물씬 담아 바라보는 라카인을 보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숨이 더 답답하게 조여들었다.
‘그에게 마음을 주면 안 돼.’
은혜를 아는, 과거의, 책임감을 지닌 모든 것이 합쳐진 투이나가 움트려는 심장에게 경고했다.
‘사람들은 베인도 아니고, 다른 나라에서 온 라카인을 위해 인간으로 남은 신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인간으로 남는다는 것은 저주를 받고, 욕을 먹고, 지탄받으며, 원망을 쏟는 일이 될 것이다.
“알아요.”
투이나가 신음했다.
‘아르힘 님이 아무리 너를 사랑해서 신이 되지 않는 너를 허락하신다고 해도, 너는 그러면 안 돼.’
아르힘은 신의 이름이자 세상의 이름이기도 했다.
‘다른 누구라도 안 돼. 사람들에겐 신이 필요해. 아르힘 님이 사라지면 누가 저들을 지켜주겠어? 새로운 수호신은 그들을 모두 으깨어버릴 거야.’
신의 자리를 넘겨 새로운 수호신이 탄생해도, 샨과 시드룬은 충분히 그럴만한 사람들이었다.
투이나는 애타는 눈빛으로 투이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예비 사제들을 알아차렸다.
그보다 앞에서 불안에 떠는 사제들과 걱정을 보내는 호위들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내내 그녀의 곁을 지킨 라카인까지 더해지자 머릿속의 울림은 더욱 시끄럽게 커졌다.
‘네가 신이 되어야만 해. 너만이 그들을 사랑하니까. 너만이 그들을 지켜주고 싶어 하니까.’
“루가 님?”
“안다니까요!”
투이나가 고민을 계속하려는 자신의 영혼에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는 싫다고 울먹거리는 작은 소리에 직접 종지부를 찍었다.
이미 겪어본 일이라 그렇게 끔찍하지도 않았다.
쿡. 깊게 찔리는 감각과 함께 머릿속이 조용해졌다.
‘내가 할게.’
투이나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사제들은 대체 무슨 일인지 몰라 불안에 떨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라카인만큼 초조해진 사람은 없었다.
격렬하게 움직거리던 투이나의 손에서 맥박이 가라앉고 진정하는 모습이 이토록 섬뜩한 적이 없었다.
마치 살아있는 인간에서 다른 무언가로 변해가는 과정처럼 보였다.
투이나의 모습은 그대로였지만.
드러나지 못했던 새로운 일면이 비로소 겉으로 올라온 듯 했다.
라카인의 등줄기를 따라 예리한 오한이 등뼈를 찍어 눌렀다.
어렴풋이 그가 두려워하던 일이 구체화되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보고 반드시 신이라고 부르리라.
“……아르힘 님이 제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투이나의 목소리는 방금 잠에서 깨어난 사람 같지 않게 고요했다.
시끄럽게 떠들던 사제들까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마치 예언자처럼, 그녀의 목소리에서 그만한 강제력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동안 아르힘 때문에 투이나를 억지로 섬기고 은근히 홀대하던 사제들은 남몰래 땀을 비 오듯이 쏟았다.
인간에게 한 손을 얹고 그들을 굽어보는 저 여자가 정말로 루가였던가?
“아르힘 님께서 꿈으로 전하신 말은 진실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르힘 님의 힘에 의존하지 않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그 말씀은…….”
연로한 사제가 와들와들 떨며 입술을 벌렸다.
하얀 수염을 파들거리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그러나 여느 때 같았으면 그렇게 겁먹지 말라고 한 마디 했을 투이나는 잠잠했다.
“…아르힘 님은 건재하십니다. 그러니 다른 자들을 벌하지 마시고 물러가 근신하세요.”
투이나가 주위를 죽 둘러보았다.
무서워 죽을 것 같으면서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어 하는 사제들을 보자 옅은 연민이 일었다.
하찮도록 미미한 감정이었지만.
“곧 모두가 알게 될 것입니다.”
“…….”
투이나의 말을 협박이나 경고로 이해한 사제들이 깊이 허리를 숙였다.
예비 사제들과 시종들도 입에 고철을 매단 것처럼 침묵을 삼키며 물러났다.
투이나가 호위들과 남게 되자 라카인은 일말의 희망을 걸어 보았다.
언제나 투이나는 그들끼리만 남게 되면 격식이나 예의를 벗어던지고 편하게 굴었다.
‘제발.’
라카인은 이번에도 그러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투이나는 천천히 그의 손에서 몸을 빼내었다.
“편지를 써야겠어요.”
또렷한 눈동자가 자신을 외면하자 라카인은 단숨에 발밑이 꺼지는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 * *
사각사각.
펜이 종이 위를 긁는 소리가 적막한 방 안에서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소음이었다.
호위들은 뒷짐을 진 채 문을 지켰지만 어느 때보다도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처음 투이나에게 배치되었을 때보다 더 힘이 들어간 자세가 된 호루니와 스카차와 달리, 라카인은 처음으로 호위에 소홀해졌다.
그는 주변의 민감한 소리나 움직이는 인기척을 찾는 대신 투이나에게만 온 신경이 쏠린 상태였다.
겉으로만 보기엔 투이나는 아주 멀쩡해 보였다.
깔끔하게 소매를 걷어 팔꿈치에 고정하고, 펜을 들어 잉크에 찍었다 떼는 과정 모두가 어긋남이 없었다.
그러나 라카인은 투이나가 글을 쓸 때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거나 손가락을 까딱이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글씨가 마르기도 전에 무심코 손을 올렸다가 잉크가 묻어 깔깔거리기도 했다.
자신의 회색 얼룩과 까만 얼룩 중에 어떤 게 더 크냐고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도 거리낌 없이 했었다.
지금은 그 중에 어떤 것도 없이, 심지어 몸에 난 얼룩마저도 버티지 못하고 도망칠 것처럼 정결해보였다.
감히 다가갈 수조차 없는 아우라를 뿜어내던 투이나가 가볍게 편지봉투를 꺼냈다.
지금까지 쓰던 종이를 두 번 접어 봉투에 넣은 투이나는 어떠한 재미도 느끼지 못하는 얼굴로 봉투를 꿰맸다.
누군가 뜯어보면 알 수 있도록 편지를 봉하면서도 종이에 바늘을 찌르는 감각을 우스워하던 투이나는 이제 없었다.
라카인은 또 한 번 가슴이 욱신거렸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그녀의 농담을 받아주거나 건넬 수 없었다.
투이나가 선을 긋자 비로소 그들의 사이가 분명해졌다.
지금까지 라카인이 거리낌 없이 투이나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그녀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원래 라카인이 섬기는 주군의 위치는 그러하였다고.
태어나면서부터 배웠던 자리로 돌아간 것뿐인데도 라카인은 추락과도 같은 절망을 느꼈다.
“이 편지를 마디악 말라루크에게 전해주세요.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로 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라카인이 먼저 나서 투이나에게서 편지를 받아갔다.
라카인이 거리를 좁혔는데도 투이나는 편지를 건네줄 때조차 그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다.
라카인은 뱃속을 저며 내는 고통 속에서 물러났다.
“다른 분들은 돌아가 쉬세요. 오늘은 더 이상 호위가 필요 없습니다.”
투이나가 그들을 물렸다. 호위들은 재빨리 명령에 순응했다.
달라진 투이나를 보며 덩달아 긴장하긴 했지만, 그래도 호위들까지 하루아침에 사람이 달라진 건 아니었다.
참담한 심정으로 나온 라카인과 함께 방을 나선 뒤에야 비로소 호루니와 스카차가 호들갑을 떨었다.
“휴우. 너, 너무 떨렸어.”
“너도? 아무 말이 없기에 나만 그런 줄 알았네.”
스카차가 십 년 동안 묵은 체를 내려 보내는 사람처럼 가슴을 두드렸다. 그의 뺨에 비지땀이 한 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때 루가 님이 대체 아르힘 님한테서 무슨 얘기를 들으신 거지? 저렇게 달라지셔서는.”
“꼭 다른… 사람이 되신 것 같아.”
호루니가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라카인은 격하게 동의하고 싶었다.
자신만 투이나를 감싼 위화감을 느낀 게 아니라니.
그러나 호루니의 반응은 좀 다른 방향이었다.
“저렇게 위엄에 가득 차게 변하시다니… 이제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겠어!”
말의 내용은 공감하는데 목소리는 이상하게 설레어 보였다.
스카차의 얼굴이 즉각 해괴한 표정으로 변했다.
“어째 말투가 들떠 보인다?”
“그렇잖아. 그동안 루가 님이 편해 보인다고 얼마나 무시하는 사람이 많았어?”
호루니는 변명하는 어조로 덧붙였다.
“루가 님이 수호신이 되실 몸인데, 오히려 지금이 더 적당하다고 생각해. 이젠 아무도 루가 님을 무시하지 못하겠지.”
“네가 그동안 많이 쌓이긴 쌓였나 보다. 난 오싹하기만 하던데.”
스카차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아니. 하룻밤 만에 사람이 저렇게 달라질 수가 있어? 난 루가 님이 말하던 세뇌 마법에 본인이 걸리신 줄 알았잖아.”
“그게 무슨 망발이야! 다 아르힘 님의 힘이신 거지.”
호루니가 소리치자 라카인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러나 호루니는 자신의 얘기를 하는 데 바빠 그런 라카인을 눈치 채지 못했다.
“난 이제야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간 것 같아. 훈련소에 있을 때는 다른 사제님들도 전부 나 같을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얼마나 실망했는지 몰라.”
호루니는 그동안 투이나를 흠모해온 티를 숨기지 않았으니 지금 상황에 뿌듯할 만도 했다.
게다가 다른 사람이 몰라본 진짜 수호신을 먼저 알아봤다는 자부심도 섞여있었다.
“이제 다른 사람들이 나처럼 변하게 될 거야.”
“…그럼 넌 계속 이러고 지내는 게 괜찮다는 거야? 이제 루가 님과 우리 관계가 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고 해도?”
스카차가 되물었다. 호루니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그건 그렇지만… 감수해야지.”
호루니는 풀이 죽은 어깨로 터벅터벅 걸었다.
투이나와 예전처럼 지내지 못해 섭섭해 하는 건 호루니도 만만치 않았다.
“……신이 되실 분의 길을 내가 가로막고 싶지 않아.”
호루니가 수줍게 진심을 내비쳤다.
스카차는 딱하기도 하고 이해하기도 하는 마음인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리고는 내내 침묵하고 있던 라카인을 향해 조심스레 질문을 쏘아 보냈다.
“당신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겁니까?”
“…….”
라카인은 스카차의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보았다.
루가 님은 수호신이 되실 거다.
어쩌면 이미 신이 되셨는지도 모른다.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이나 아르힘을 만났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뒤늦게 자각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복제된 투이나가 자신의 영혼을 갖고 있단 소리에 충격을 받은 뒤로… 투이나는 자신이 가진 인간의 길을 슬며시 포기해버린 것 같았다.
남겨진 사람들에게도 사랑할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괴롭지 않을 테니까.
‘알겠다.’
라카인은 어두운 절벽을 더듬어 올라가듯 자신의 내면을 짚어보던 손가락에 무언가 단단한 것을 잡아냈다.
그건 깨달음이었다.
“…내가 복제된 그 분을 사랑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예?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입니까?”
뜬금없는 소리에 스카차가 되물었다.
호루니의 눈도 동그래졌으나 라카인은 당장 자신이 잡아낸 실마리로 깨달음을 단단히 묶기 바빴다.
“내가 루가 님이 사랑하라고 남겨둔 길을 결코 갈 수 없다는 뜻이다.”
복제된 투이나는 병도 없고, 튼튼하고, 깨끗했으며 심지어 그가 마음을 바쳤던 영혼과 성격, 외모까지 그대로 갖추었다.
원한다면 투이나 대신 마음껏 사랑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라카인은 그러기 싫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이건 분명한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래서 중요한 거다.
깨달음을 잡아당길수록 라카인의 머릿속은 분명해졌다.
무저갱에 갇혀있던 죄인이 처음으로 벽 속에서 불을 발굴해낸 것처럼.
라카인의 눈이 밝아졌다.
여전히 얼이 빠진 채 라카인의 영문 모를 소리를 기다리고 있는 호위들에게 라카인이 선언했다.
“나는 루가 님에게 고백해야겠다.”
“예에?”
“뭐라고요?”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씀드려야만 한다.”
당신이 영원히 떠나버리기 전에.
라카인이 선명히 투이나의 모습을 머릿속에 되살려냈다.
언제나 기억보다 더 찬란할 당신을 사랑하는 일보다 중요한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당신이 살아있기에.
사람은 사람으로 남아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