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그녀를 남겨두고 일어났다. 피를 닦아낸 몸은 살아생전과 똑같았으나…
투이나가 얼룩투성이 몰골로 베인의 거처에 도착했을 때, 기대와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머나!”
따라오던 시종 하나가 탄성을 흘렸다. 베인의 거처로 가는 길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신전 벽과 바닥을 가득 메운 꽃과 자수가 빈틈없이 빼곡했다.
그에게 오는 발걸음마다 축복을 주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는 것처럼 금실과 보석을 아끼지 않고 짜 넣은 천이 바닥부터 계단까지 깔려있었다.
‘선물을 보내지 않았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베인이 적극적인 태도를 걷어치우고 소극적으로 기다린 것 치고는 정성이 과했다.
그때는 베인을 거부해놓고 지금에서야 찾아가는 건 순전히 우연이 겹친 결과였지만, 뒷맛이 찝찝했다.
베인이 기다릴 때만 그녀가 와줄 거라고 생각할까 봐 걱정되었다.
게다가 사뿐히 깔아놓은 양탄자는 선뜻 발을 올려서 더럽히기도 아까워질 만큼 귀해 보였다.
신전을 가로질러 오느라 신발에 흙이 묻은 시종들은 선뜻 그 위로 올라가지도 못했다.
한숨을 쉰 투이나가 신을 벗어서 바닥에 턴 후, 맨발로 천을 밟았다.
그녀가 신발을 벗고 걸어가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따라 했다.
계단을 올라가자 난간마다 화려하게 장식한 꽃향기가 코를 찔렀다.
아직 맺힌 이슬이 마르지도 않은 걸 보니 갓 딴 게 분명했다.
‘대체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베인의 거처로 올라갈수록 투이나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다.
짙어지는 낯빛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베인을 보자마자 정점을 찍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베인이 화사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화려한 주변 풍경에 결코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이 눈 덮인 산 정상에 걸린 달처럼 빛났다.
‘발소리가 들렸을 리도 없는데, 어떻게 미리 알고 나와 있던 거지.’
아까부터 예민해져 있던 솜털이 올올히 곤두섰다.
베인이 눈웃음을 지었다.
“들어오시겠습니까?”
베인이 계단 위에서 손을 내밀기에 투이나가 어깨를 틀었다.
명백한 거부의 몸짓에도 그는 내내 웃는 낯이었다.
거처 안도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원래 바닥과 벽을 차지하고 있던 가구가 모두 사라지고 정중앙에 딱 하나, 의자만 놓여있었다.
색만 화려했을 뿐 재판장에서 심문받는 장소와 똑같았다.
투이나가 굳어있는 동안 베인은 여전히 나긋나긋하게 굴었다.
“얼굴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
베인이 얼룩을 직접 건드리려고 하자 놀란 투이나가 급히 물러났다. 베인이 서글프게 웃었다.
“아프셨습니까?”
“…닿지도 않았는걸요.”
투이나는 마지못해 중앙에 놓인 의자로 다가갔다.
계속 서서 얘기하다간 베인이 끝까지 빙빙 이야기를 돌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베인은 싱글거리며 투이나의 뒤편에 섰다.
“앉지 그래요?”
“조금만 더 보다가 그러겠습니다.”
베인이 감정이 담뿍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루가 님이 오랜만에 제게 찾아오셨으니까요.”
투이나는 친근하게 구는 베인이 부담스러워서 자꾸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마치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투이나는 일부러 딱딱하게 선을 그었다.
“이렇게 찾아온 건 베인을 용서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아직도 제가 건 세뇌 마법 때문에 화가 많이 나셨지요.”
투이나의 어깨까지 머리를 기댄 베인이 싱긋 웃었다.
설마 코앞에서 그걸 인정할 줄 몰랐던 투이나가 잠깐 움찔했다.
‘왜지? 순순히 인정할 이유가 없잖아.’
혹시 투이나가 레오나를 의심하는 걸 알고 다시 세뇌 마법을 쓴 것일까?
혹은 지금 하는 말들이 전부 베인의 진심인 걸까.
투이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레오나를 만난 걸 알았나요?”
“그것도 알고는 있었습니다.”
베인이 귓가에 가볍게 속삭였다.
“더 해볼까요? 저를 아르힘 님을 가둔 사람으로 의심하고 계시지요. 제정신이 아니라고도 여기시고, 변했다고도 느끼시지만…….”
베인이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을 했다.
“그래도 여전히 저를 사랑하시기도 하지요.”
덜컹.
투이나가 급하게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나동그라졌다.
베인은 짚고 있던 등받이가 사라져서 아쉽다는 듯이 눈을 깜박였다.
“다… 알면서 하는 소리예요?”
“제가 알아낸 것이 아닙니다.”
떨리는 투이나의 모습에 베인이 나긋하게 손을 내밀었다.
“아르힘 님이 알려주셨지요.”
“거짓말!”
투이나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지켜보던 호루니가 참지 못하고 소리친 것이었다.
“당신이 아르힘 님을 가뒀잖아요!”
베인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조용히 얘기하고 싶군요.”
“어림없는 소리! 당신을 루가 님과 그냥 남겨둘 것 같아?”
스카차가 외쳤다. 그러나 베인이 손을 뻗자 갑자기 그들이 방 밖으로 밀려나더니 쾅 문이 닫혔다.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투이나가 경악했다.
“또 마법인가요?”
“아닙니다.”
베인이 차분히 답했다.
“신의 힘이지요.”
투이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루가 님, 제게 가까이 오십시오.”
“…그럴 수 없습니다.”
“치료해드리려는 겁니다.”
베인이 무해하게 양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것보다 아르힘 님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겠습니까?”
투이나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럴 리 없어. 아르힘 님께서….’
차마 생각으로도 뒤를 다 이을 수가 없었다.
베인은 끈질기게 기다렸다. 투이나는 차오르는 불안 속에서 주춤거리며 그에게 한쪽 팔을 내밀었다.
망설임이 묻어나는 동작에도 베인은 기꺼이 그녀의 손을 받아들더니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이 닿은 자리가 뜨거워지더니, 새까맣던 얼룩이 옅어졌다.
‘말도 안 돼.’
이 느낌은. 저 치료법은. 그는.
아르힘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으로 일그러진 투이나를 본 베인이 작게 웃었다.
“이제야 믿으시겠습니까?”
“…….”
투이나는 하얗게 물들어가는 머릿속에서 간신히 입을 벌렸다.
“……그 안에 계시나요?”
“이 안에 계십니다.”
베인이 투이나의 손바닥을 끌어다 제 가슴에 올렸다. 두근두근하는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언뜻 베인의 시선에서 아르힘이 보여주곤 하던 연민이 스쳐 갔다.
충격을 참으려고 애쓰던 투이나가 그 눈빛에 무너져 내렸다.
“어떻게…… 어떻게 당신이……아니, 그분이….”
투이나는 제대로 말을 이을 수조차 없었다. 베인이 나직하게 말했다.
“루가 님이 모르시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베인은 드디어 제 손에 들어온 투이나의 손에 감격한 듯이 긴 속눈썹을 아래로 향하고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원래는 당신께서 기억하셨어야 할 이야기입니다.”
더 크게 떠질 수도 없이 떨리는 투이나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베인이 속삭였다.
“왜 어릴 적 친구를 잊으셨습니까?”
“…무슨 소리예요?”
“저는 당신을 바로 알아보았는데, 왜 당신은 저를 바로 알아보지 못하셨습니까?”
베인의 목소리는 점점 더 낮고 빨라졌다. 그의 눈빛이 원망하듯이 격렬해졌다.
“병이 사라졌다는 건 똑같았는데. 오직 저만이 당신을 그리워했던 겁니까?”
“베인! 대체 무슨 소리를…….”
혼란스러워하던 투이나의 말이 갑자기 멎었다. 베인의 문장이 기억 어딘가를 건드렸던 것이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한 아이가 있었다. 의식적으로 잊으려고 애썼던 아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 애는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투이나는 얼어붙었다. 베인은 치미는 감정을 가누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예. 원래라면 그랬겠지요.”
얼룩병에 걸린 자는 살아남지 못한다.
어렸을 때 병에 걸린 자는 대개 성장기를 지나지 못하고, 나이 들어 병에 걸린 자는 미쳐버린다.
오직 투이나만이 그 병에서 치유되었다고 알려졌다.
지금까지는.
베인이 둑이 터지듯 말을 토해냈다.
“아르힘 님께서 제게 먼저 오셨습니다. 허나 당신께서 저를 기억하지 못하신다면 차라리 다시 병에 걸리는 게 백 배, 천 배는 낫겠습니다.”
베인은 이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제 몸에 다시 얼룩이 번져야만 이름을 기억해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았다.
호소하는 베인의 얼굴 위로 누군가의 표정이 겹치기 시작했으니까.
투이나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기억 속의 이름을 불렀다.
“……크로?”
베인의 얼굴이 환희로 물드는 것과 동시에 투이나는 소용돌이처럼 몰아쳐오는 기억 속으로 휩쓸려갔다.
* * *
“베인, 커튼을 닫아라.”
마차 밖을 들여다보고 있던 아이가 얼른 의자 위에 다시 앉았다.
마차 안에 가득 찬 근심에도 아이는 마냥 들썩거렸다.
아이는 온몸을 뒤덮은 회색 얼룩에도 불구하고 몹시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마치 신이 꼬마의 몸으로 현신한 듯한 자태를 감추기 위해서 병에 걸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라스 크로퍼드와 빌헬미나 크로퍼드는 베인에게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병만 아니었어도 세상에 걱정할 게 없었을 아이다.
지금도 마차 멀미로 잠든 레오나와 달리 태연하게 호기심을 드러냈다. 베인이 순진무구하게 눈을 반짝였다.
“엄마, 바깥에는 저랑 똑같은 친구가 있어요.”
“…앉으라 했잖니!”
안색이 달라진 빌헬미나가 베인의 옷을 끌어당겼다.
안절부절못하는 부모님의 모습에도 베인은 기어이 조막만 한 손까지 흔들고서야 앉았다.
“이번에도 아르힘에서 쉬었다 가는 거예요?”
“…그래. 사흘은 머무를 거다.”
라스의 대답에 베인이 생긋 웃으며 의자에 올라간 다리를 흔들었다.
저렇게 멀쩡해 보이는데 성장기를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니.
크로퍼드 부부는 다시금 참담한 기분에 휩싸였다.
크로퍼드 상단이 전염병 때문에 아르힘에 방문한 것은 보름 전의 일이다.
아르힘의 신전은 이미 뛰어난 치유로 유명했다. 신전에 바칠 돈도 충분했으니 치료는 쉬웠다.
그러나 상단의 인원이 워낙 많았기에 모두를 치료하느라 잠시 수도에서 머무르는 사이, 그들의 아들인 베인이 얼룩병에 걸려버린 것이다.
하루아침에 생겨난 회색 얼룩에 비명을 지른 크로퍼드 부부는 황급히 신전으로 아이를 데려갔으나, 뜻밖에도 이 병은 신전에서도 치료하지 못한다는 대답을 듣고 말았다.
믿을 수 없는 대답에 온갖 나라를 수소문해본 부부는 이 병의 존재를 알기라도 하는 건 그나마 아르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그들은 실낱같은 희망을 쥐고 끊임없이 아르힘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울컥한 빌헬미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만져서 옮는 병은 아니라는데 대체 어디서 저런 병을……!”
라스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제 품으로 쓰러지는 빌헬미나를 다독였다.
“분명히 무슨 방법이 있겠지. 이러다 당신도 병나겠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 상단에서만 지내는 아이가 어떻게 저런 병에 걸릴 수 있겠어요?”
고통스러운 빌헬미나의 말과는 달리, 베인은 상단을 빠져나와 아르힘을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실은 지금도 그때 생각뿐이었다.
투이나.
그 애의 이름이다.
베인은 바보가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 그가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던 상단 사람들이 슬그머니 자신을 피하는 걸 알고 있었다.
볼 때마다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먹을 걸 챙겨주던 사람이 황급히 자리를 뜨거나 남몰래 눈물을 훔치는 광경을 몇 번이나 겪으면 싫어도 알게 된다.
그럴 때마다 베인은 자신이 무언가 잘못한 것 같다는 기분에 휩싸였다.
엄마 아빠는 그저 병에 걸렸을 뿐이라고 다독였다.
하지만 늘 명랑하던 레오나까지 자신을 보고 표정이 어두워지는 걸 보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난 잘못한 거 없어.’
베인이 짐마차에서 내리는 짐에 섞여 상단 밖을 뛰쳐나왔던 날도 그런 날이었다.
엄마 아빠는 상단에서 벗어나면 위험하다고, 분명히 눈에 띄어 납치당할 거라고 누누이 경고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병에 걸린 뒤부터 그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사라졌다.
예전에는 어딜 가나 시선이 달라붙었는데.
이 병의 딱 한 가지 좋은 점이라고 생각하던 베인이 달리기를 멈췄다.
조그마한 아이가 제 몸보다 큰 짐을 들고 뒤뚱뒤뚱 걸어가고 있는 것을 봐서였다.
그것만 해도 벌써 신경이 쓰이는데, 위태위태하던 짐에서 막대기 하나가 굴러떨어지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머뭇거리던 베인이 허리를 숙여 막대기를 집었다.
병에 걸린 몸으로 만졌다고 싫어하진 않을까.
줍고서도 망설이던 베인은 결국 조심스럽게 막대기 끝으로 꼬마를 톡 쳤다.
“이거 떨어뜨렸어.”
내 얼굴을 보여주기 전에 돌아설까, 하고 고민하던 베인의 눈이 커졌다.
“고마워!”
베인은 놀랐다.
함박만 하게 입을 벌리고 웃는 아이의 앞니가 하나 빠져서도 아니었고, 그 애가 자신과 똑같은 얼룩병에 걸려서도 아니었다.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이 무척이나 환했기 때문이다.
‘…병에 걸린 뒤로는 웃는 얼굴 처음 봤어.’
흉측한 모습을 봤는데도 아이는 비명을 지르거나 도망가지 않았다. 아마도 같은 병에 걸렸기에 태연한 것 같았다.
그제야 베인은 자신이 잔뜩 긴장해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평소에 태연하게 굴려고 해도 몸 어딘가 구석에 계속 남아있는 것.
그건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과 만나고서야 비로소 풀리는 긴장이었다.
“떨어진 줄도 몰랐어. 깜박 잊어버릴 뻔했네!”
아이가 종알거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베인이 대답했다.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야.”
“난 투이나야!”
“나는 베….”
그때 하필 바깥에서 이름을 함부로 밝히지 말라는 부모님의 가르침이 떠오른 건 왜였을까.
‘어느 나라에서든, 다른 나라 사람은 환영하지 않으니 조심하거라.’
대부분 이름만 들어도 낯선 어감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왔다는 걸 알아차리는 경우가 많았다.
기껏 만난 아이의 친근한 태도가 배척의 눈길로 바뀔까 봐 걱정이 됐다.
살짝 혀를 깨문 베인이 얼른 바꿔 말했다.
“…인이 아니라 크로. 크로라고 불러주면 돼.”
“크로. 안녕, 크로? 어디 살아?”
“난, 어, 저기 북쪽 광장 골목에…….”
이름을 알자마자 곧장 신상을 캐묻는 어린아이 특유의 태도에 베인이 당황했다.
게다가 대답을 끝마치도록 기다려주지도 않았다.
“나는 저기 살아! 놀러 올래?”
“지, 지금?”
“도와줬으니까 지금!”
투이나가 덥석 베인의 손을 붙잡았다.
조막만 한 주제에 힘이 강했다. 베인이 엉겁결에 그녀를 따라갔다.
처음 보는 수도의 빈민가로 접어들었을 때도 베인은 주변 풍경에 놀라기보다 거침없는 투이나에게만 당황하고 있었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도 베인의 부유한 옷차림보다 그의 몸에 난 얼룩만 보았다.
자연스럽게 주변에 녹아든 두 사람이 달음박질을 했다.
아이가 빨라봤자 얼마나 빠르겠냐만, 베인은 똑같이 달리는 속도를 맞추면서 숨이 가빴다.
거침없이 환영받는 기분이었다.
집에 도착한 투이나는 뽀르르 들어가 문을 열어주었다.
낮은 천장에 베인이 주저했지만 투이나는 예의도 차리지 않았다.
“밖에 추워!”
아르힘은 다른 나라보다 따뜻한 편이었지만, 바깥에 오래 서 있으면 큰일 난다는 투로 잡아끄는 아이를 거부하기도 어려웠다.
투이나가 우르르 가져온 짐을 풀어놓는 동안 베인은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주워준 것은 막대기가 아니라 길게 말려둔 뿌리였으며, 그걸로 차를 끓여 먹으면 맛있다는 사실.
투이나에겐 네 명의 언니 오빠와 동생이 있다는 것. 저쪽에 잠들어있으니 깨우면 안 된다는 것.
신기하게도 같은 병에 걸린 사람과 지내면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는 것.
서슴없이 팔을 당기고 금발이 예쁘다며 만져오는 사소한 접촉이 실은 몹시 그리웠다는 것.
그게 너무도 좋아 돌아갈 시간이 되었는데도 베인은 미적거리며 떠나지 못했다.
아마 투이나가 웃으며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더 오래 머물렀을 것이다.
“또 놀러 와!”
베인은 기꺼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또 오겠다고.
아르힘을 떠나있는 동안에도 베인은 혹시나 투이나가 너무 오래 기다릴까 봐 노심초사했다.
아르힘의 신전에서 사제들이 그를 둘러싸고 얼룩병을 치료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동안에도 언제 여길 나갈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세 번째 만날 때쯤에는 자신이 아르힘 출신이 아니라는 걸 털어놓았다.
왠지 투이나라면 이 얘기도 기꺼이 받아들여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짐작대로 투이나는 오히려 신나 보였다.
“그럼 또 올 때까지 맨날 맨날 마중 나갈게!”
“아냐. 언제 올지도 모르는걸. 네가 힘들 거야.”
“기다리는 거 재밌는걸?”
투이나가 오히려 갸웃했다.
결국 베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도 마차에 탈 때마다 투이나가 어디서 기다리고 있나 찾아보게 됐다.
이젠 자신을 보며 우는 어머니의 모습도 한숨을 쉬는 아버지의 모습도 버거워하기 지쳤다.
주변을 두리번거린 베인은 오늘도 몰래 상단을 빠져나왔다.
그러면 투이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 아까 크로 마차 봤어. 손 흔들었는데 봤어?”
“응, 봤어.”
베인이 발그레한 투이나의 뺨을 얼른 감싸주었다.
마차를 타고 와 따듯한 자신의 손과 달리 내내 서 있던 투이나는 차가웠다.
베인은 가슴이 저렸다. 투이나의 집안 사정이 별로 좋지 않다는 건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러나 아직 어린 자신이 상단의 재산에 손을 댈 수도 없었기에 간식거리를 몰래 챙겨주는 게 고작이었다.
‘더 잘해주고 싶은데.’
베인이 투이나의 머리에 아무렇게나 둘둘 감긴 천을 꼭 여며주었다.
“안 추웠어?”
“추웠어!”
냠냠 맛있게 간식을 오물거리면서 투이나가 답했다.
“근데 그거보다 크로가 더 보고 싶었어!”
베인은 또 가슴이 찌르르 했다. 꾸밈없이 애정을 이야기하는 투이나는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남몰래 사심을 담아 베인이 투이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중에 내가 크면 절대로 추울 일 없게 해줄게.”
“어떻게? 크로 마법사야?”
“마법사는 아니지만, 돈이 생길 거야.”
베인이 말했다. 이때는 아직 어리기도 했고, 수호신 아르피기아를 믿을 시절이었다.
“돈이 있으면 마법도 신도 다 살 수 있댔어.”
“우와. 진짜? 아르힘 님은 믿어야만 볼 수 있는데.”
“믿는다니?”
투이나는 먹던 것도 내려놓고 조그마한 양손을 모았다.
“아무것도 없어도 좋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진정으로 나를 믿는다면, 내가 찾아가리라. 사랑해주겠다.”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온 기도문임에도 제법 성스럽게 들렸다.
베인이 잠깐 멍해졌는데도 투이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잘했지? 학교에서 배웠어. 우리가 아르힘 님을 잘 믿고 따르면 그분이 우리를 돌봐주신대.”
“그건 거짓말이야.”
불쑥 말해놓고도 베인이 더 깜짝 놀랐다.
투이나의 눈이 동그래진 걸 본 베인이 더듬거렸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는걸.”
아르피기아는 그렇게 가르쳤다.
한없는 사랑도 끝없는 증오도 결국은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그렇다면, 정확하게 계산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아르피기아의 바친 만큼 돌려주는 축복은 다른 나라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기에 유명했다.
엉겁결에 배운 대로 말했던 베인이 서둘러 놀란 것 같은 투이나를 달랬다.
“물론 아르힘이 투이나를 돌봐주실 거야. 나도 믿어.”
베인은 말이 없는 투이나의 태도에 겁이 났다. 화가 났을까.
조마조마한 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투이나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크로 말도 믿어.”
“으응?”
“아르힘 님 말도 맞고 크로 말도 맞을 거야. 왜냐면 크로한테도 그분이 수호신이시니까.”
투이나는 단순하게 결론지었다.
“우리를 돌봐주는 신은 많을수록 좋은 거잖아.”
“하핫.”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진 베인이 입을 가렸다. 보통은 다른 신을 견제하기 바빴다.
하지만 투이나처럼 다른 사람의 신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어딜 가든 믿음으로 가득해진다.
“그래. 나도 많은 게 좋아.”
“그치?”
베인이 수줍게 투이나의 손을 잡았다. 서로 잡은 체온이 어린 마음에도 뜨거웠다.
베인이 다시 작게 중얼거렸다.
“응. 좋아.”
그의 고개가 투이나의 머리에 툭 얹혔다. 조그마한 심장이 먼저 자라나 버린 듯 쿵쿵 뛰었다.
어린 가슴이 애정을 얻은 날, 그는 꿈을 꾸었다.
‘꿈?’
베인은 눈을 감고 있는데도 누군가 머리맡에 있는 모습을 보았다.
자신이 잠들어있다는 걸 알면서도 정신이 깨어있는 기분은 낯설었다.
무서워진 베인이 일어나려고 애쓸 때 누군가가 말했다.
“다른 나라의 아이까지 이 병에 걸릴 줄은 몰랐구나.”
위엄으로 가득 찬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베인이 움츠러들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는 그를 부드럽게 짓누르는 것 같았다.
“더 자거라. 너는 나를 보지 못한다.”
가볍게 베인의 팔을 스친 감촉이 의외로 다정했다.
베인은 꿈속에서 다시 잠들었고, 이 꿈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르힘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 * *
베인은 투이나가 그를 기억해내는 모든 순간을 낱낱이 지켜보았다.
한없이 기쁠 줄 알았는데, 막상 감정이 몰아닥친 끝에 남은 것은 서글픔이었다.
“병이 나은 부작용으로 기억을 잃었을 때도 저는 내내 누군가를 그리워했습니다.”
베인이 투이나를 향해서 호소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질린 것은 안타까웠지만, 그 속에 자신이 가득 차 있는 모습은 기묘한 희열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아르힘에서 루가 님을 다시 보았을 때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베인이 눈물이 번진 입가로 희게 웃었다.
“제가 아르힘 님의 은혜를 받아 살아난 건, 오직 당신을 다시 보기 위해서였던 겁니다.”
누군가 모래로 그녀를 덮은 것처럼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왜 말하지 않았어요?”
투이나는 고작해야 이런 말밖에 하지 못하는 자신이 싫어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덜덜 떨리는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기억을 잃었었어요?”
“예.”
베인이 서슴없이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왔다.
투이나가 받은 충격이 기뻤다. 그녀가 그만큼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뜻이니까.
뒤에서 덜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베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제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예전에 루가 님께 말씀드렸던 것처럼, 제가 아니라 아버지가 아파 아르힘에 찾아온 줄 알았으니까요.”
“…….”
“기억하지 않는 편이 좋다더군요. 그러나 루가 님은 그보다 제게 소중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보자마자 모든 것이 이토록 선명해질 수 있었겠습니까.”
베인의 눈에 빛이 깃들었다. 어떻게 저렇게 확신하는 눈으로 자신을 볼 수 있었을까.
잃었던 기억마저 단숨에 되찾을 만큼 자신을 사랑했다 말하는 베인이 낯설었다.
‘그래서였어.’
머릿속이 천천히 과거를 짜맞춰갔다.
베인은 구혼자로서 처음 신전에 발을 디뎠을 때, 이미 투이나가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되살아나기 전의 베인은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다시 만난 기쁨과 약간의 서글픔이 뒤섞였을 테지.
분명하게 따지자면 결국 그에게도 어렸을 때의 추억에 불과하니까.
그런 씁쓰레한 감정은 곧 만날수록 회복되는 애정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내가 되살아난 다음엔, 내가 이미 베인의 연인이었기에 친근했던 그 태도를 기억이 돌아온 거라고 착각했던 거야.’
투이나가 질끈 어금니를 깨물었다.
왜 말하지 않았냐고, 지금도 자꾸만 튀어나오려고 하는 그 말이 베인에겐 너무나 잔인했다.
처음 밀려왔던 충격이 쓸고 지나가자 그녀에게도 베인이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던 이유가 보였기 때문이다.
“저 때문이었군요.”
투이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제가 루가가 되었기 때문에 얼룩 병에 걸렸다는 사실도, 저를 알았다는 것도 계속 비밀로 했던 거예요?”
“……믿음이 부족한 자들은 루가 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당신을 유일하게 불치병을 치료받은 자로 알렸습니다.”
베인이 부서질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제가 당신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투이나가 터져 나오려는 격한 말들을 삼켰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
자신의 병도, 자신의 과거도, 베인은 전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숨긴 거야. 사제님들처럼, 기적을 유지하기 위해서. 루가의 직위를 지켜주려고…….’
투이나조차도 아르힘을 통해서 병이 다 낫지 못했다. 낫기 직전에 살해당했으니까.
실은 베인이야말로 신전의 찬양을 받고 아르힘의 기적을 찬미 받을 대상이었다.
그러나 베인은 사제들이 신의 선택을 포장하기 위한 짓거리에 기꺼이 동참할 만큼, 그래서 자신이 얻을 영광마저 외면할 만큼 그녀를 사랑했던 것이다.
아르힘이 투이나를 택했는데도.
투이나는 어떤 표정으로 베인을 보아야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지금, 베인 안에 갇혀있는 아르힘도 이 대화를 듣고 있을 테니 더더욱.
베인은 여전히 보기 힘겨울 만큼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밉지 않았어요?”
“제가 어떻게 루가 님을 미워하겠습니까.”
“베인을 잊어버렸으니까요. 루가의 자리도 원래는 베인의 것이었을지도 모르니까요. 아르힘 님이 베인을 치료해주셨는데…!”
“루가 님.”
베인이 가만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참고 있던 투이나의 몸이 기어이 부르르 떨렸다.
어디선가 쿵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아르힘 님은 당신을 택하셨습니다. 그건 처음부터 제 자리가 아니었으니 한 점의 미련조차 없습니다.”
베인은 투이나가 굳어있느라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틈을 타 그녀의 등을 꼭 끌어안았다.
“아르힘 님을 받아들인 지금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또다시 쿵.
투이나는 그 소리가 자신의 머리에서 난 것인지 바깥에서 난 것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베인이 달콤하게 속살거렸다.
“그분께서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시는지. 제 안에 있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십니다.”
베인의 목소리에 점점 신성함이 섞였다. 그가 아르힘의 음성을 불러내고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얼마나 외로우셨습니까. 홀로 시험을 감내하시는 걸 더는 지켜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제 제가 곁에 있습니다.”
베인이 투이나의 양 뺨을 붙잡고 들어올렸다.
“아르힘 님이 계십니다.”
그렁그렁하게 일그러진 투이나의 눈에 베인이 담겼다.
“괴로운 시간은 끝났습니다. 신께서 제게 응하셨으니, 루가 님은 그저 한없이 사랑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베인이 아르힘의 미소를 지었다.
저항할 수 없이 강력한 거대함이 투이나를 사로잡았다. 그녀가 믿는 신이다.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승낙하기만 하면 그녀의 고통은 끝난다. 방황할 필요도 의심할 필요도 없다.
그는 신과 인간의 마음을 모두 담아 그녀를 사랑해줄 테니까.
쾅!
이제 더 이상 착각할 수 없는 소리가 바깥에서 터져 나왔다.
굳어있던 투이나의 시선이 천천히 문 쪽으로 향했다.
투이나는 그들을 가로막은 문을 두드리는 몸짓을 보았다.
점점 더 크게 들썩이는 문짝은 두드린다기보다는 거의 박살을 낼 지경으로 바뀌어갔다.
육중한 나무문에 점점 빠직, 빠지직 하고 금이 그어졌다.
베인이 신의 힘으로 호위들을 쫓아냈지만 그들은 문을 부숴서라도 들어오려고 했다.
‘그래서 안 돼.’
투이나가 입을 악다물었다.
설령 베인이 했던 말이 모두 진실이자 진심이더라도 그녀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바깥에서 저토록 간절하게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있는 한 그를 받아들이고 편해질 수가 없었다.
아르힘은 그녀만을 위한 신이 아니니까.
베인은 자신의 가슴팍을 밀어내는 손길을 느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여전히 어깨를 쥔 그가 투이나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고 있었지만 투이나는 모든 유혹으로부터 벗어났다.
“왜 죽여야만 했나요?”
베인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르힘 님은 분명히 베인 안에 계십니다. 하지만 베인이 하는 말이 아르힘 님의 말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정말로… 잠깐은 그렇게 믿고 싶을 만큼 효과적이었어요.”
투이나가 얕게 웃음을 터트렸다.
울고 싶을 때 나오는 웃음소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고리처럼 덜그렁거렸다.
“하지만 이젠 알겠어요. 제가 베인에게 살해당하던 밤에는 그토록 누가 어떻게 저를 죽였는지 알고 싶었는데. 그런 건 이제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요.”
“제가 당신을 죽였다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베인이 투이나를 흔드는 것과 동시에 뒤에서 문이 박살났다.
콰지직!
칼끝이 찢고 들어온 문에서 날아온 파편이 방 안으로 튀어 들어왔다.
곧이어 날카롭게 갈라진 틈으로 주먹이 내리꽂히더니, 균형을 잃은 문짝이 바닥으로 기울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부딪친 문 위로 한 사람의 그림자가 드러났다.
라카인이었다.
거친 숨을 내쉬며 들어온 라카인은 지금까지 문을 부수려 한 노력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베인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한 투이나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가 짧게 말했다.
“떨어져라.”
투이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라카인이 명령을?’
거의 낮과 밤이 뒤바뀐 듯한 충격이었다.
멍해진 투이나가 그를 쳐다보는 동안 라카인은 두 번 말하지 않고 다가왔다.
마지못해 베인이 그를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마법이나 신의 힘을 쓸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빛이 번쩍였는데도 라카인은 나가떨어지지 않았다.
베인의 고운 눈썹이 구겨졌다.
“너….”
“루가 님은 당신을 원치 않습니다.”
라카인이 내뱉었다. 다시 존댓말로 돌아오긴 했지만 내용은 여전히 충격적이었다.
베인의 낯빛이 바뀌고 투이나가 놀라 입술을 벙긋거렸다.
‘정말 내가 알던 라카인이야?’
누가 보면 몸에 신이 들어간 자는 베인이 아니라 저쪽이라고 착각할 것 같았다.
라카인은 미동도 없는 베인을 보더니 유예는 충분히 주었다는 듯 그를 붙잡았다.
그러나 베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리석은 자여. 내가 아르힘이다.”
성난 베인의 목소리 대신 아르힘의 음성이 들렸다.
베인의 거죽을 입은 신이 라카인을 쏘아보았다.
“네 영혼이 병든 것이 보인다. 너는 잘못된 곳에서 찾아 헤매고 있다.”
“…….”
라카인은 묵묵히 신의 경고를 듣더니 답했다.
“나는 다른 신을 믿는다.”
그가 움직이지 않는 베인 대신 투이나를 끌어당겼다.
탄력을 받아 떨어져 나온 투이나가 급히 그를 더 멀리까지 물러나게 했다.
투이나는 라카인을 감추듯이 부여잡았다.
“방금 누구였죠?”
“…….”
“그건, 방금 그건 아르힘 님도 베인도 아니었어요.”
투이나의 말에 베인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다물린 입술이 다시 열리는 게 무시무시해 보였다.
“아이야. 영혼은 병들기가 쉽다.”
이번에는 부정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아르힘의 말투였다.
“아르파가 자신을 잊고 분노가 되었듯이, 신일지언정 영혼의 본질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다.”
바로 이해할 수 없는 말에 투이나가 숨을 삼켰다.
그러나 더 해석하기도 전에 베인의 표정이 뒤바뀌었다.
“어찌 그리 잔인한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당신을 죽인다는 말까지 해가며 떠나고 싶으신 겁니까?”
다시 베인이었다. 그 자신과 아르힘이 번갈아 튀어나오는 모습이 소름끼쳤다.
투이나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 일을 모르나요? 당신이 나를 죽인 그 날….”
“……제 질투를 사시려거든 이미 충분하십니다. 당신을 죽여서라도 곁에 있고 싶다는 말을 듣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베인이 원망에 차 가슴을 움켜쥐었다.
질시가 가득 담긴 눈초리가 용암처럼 흘러내렸다.
“이미 신을 가둔 제가 어디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모른다.
투이나의 숨이 가라앉았다.
‘베인은 자기가 나를 죽였다는 사실을 몰라.’
그렇다면 베인은 아직 완전히 신을 가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아르힘을 장악했다면 과거의 일까지 알았을 테니까.
‘아르힘 님이 풀려나기만 하면…!’
베인은 여전히 라카인 쪽에 붙어있는 투이나를 참을 수 없는지 거칠게 손바닥으로 얼굴을 훔쳤다.
그리고 명령했다.
“가서 루가 님을 제게 데려오십시오.”
그가 대체 누구에게 말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던 투이나는 곧 뒤에서 잡아당기는 시종들의 무수한 손과 마주쳤다.
박살 난 문을 타고 시종들이 덤벼들었다. 라카인이 급히 그들을 쳐냈지만, 확연히 힘이 덜 실렸다.
방금 전까지 같이 루가를 섬기던 사람들이다.
게다가 마법으로 조종당하는 걸 뻔히 아는데 사정없이 칠 수가 없었다.
“그만 하세요!”
투이나가 자신을 움켜쥐는 시종들을 어렵게 떼어냈다.
허나 한 사람을 밀어내면 두 사람이 다시 달려들었다.
“그만 하라니까요! 내 말 안 들려요? 베인!”
베인은 건조한 표정으로 시종들 너머를 지켜보았다. 어디를 보나 싶었던 투이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호루니랑 스카차!’
투이나를 보호하느라 움직임이 제한된 라카인은 시종 한둘을 기절시키는 게 고작이었다.
시종도 그러할진대 칼과 창을 빼들고 다가오는 호위들의 표정 없는 얼굴은 무시무시하게까지 보였다.
‘다치게 해서라도 막아야 하나?’
투이나가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베인에게 붙잡히면 그를 멈출 방법이 없었다.
적어도 여기서 나가 시드룬과 마법사들을 불러올 시간이 필요했다.
투이나는 베인의 너머에 있을 아르힘에게 필사적으로 기도했다.
‘저를 베인에게 가도록 이끄신 건 아르힘 님이셨습니다! 제발 그 이유를 깨닫게 해주세요!’
투이나가 높이 올라간 호루니의 창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빡!
그런데 라카인에게 내찔릴 것 같았던 창은 기묘한 방향으로 내뻗었다.
‘소리가?’
황급히 다시 목을 펴는 투이나에게 털썩 쓰러지는 시종이 보였다. 경직되긴 했지만 또렷하게 초점이 잡힌 호루니가 소리쳤다.
“어서 나오세요!”
너무 놀라 말도 안 나오는 투이나와 달리 라카인이 그 틈을 타 재빨리 투이나를 달랑 안아 들었다.
끝까지 그녀를 붙드는 시종을 스카차가 때려눕혔다. 스카차도 제정신처럼 보였다.
‘세뇌 마법이 안 통했어?’
라카인이 단숨에 뛰쳐나갔다.
혀를 깨물까 봐 라카인을 꽉 끌어안은 투이나가 뒤쪽을 돌아보았다.
언뜻 베인조차도 놀란 것 같았다.
후두둑 시종들을 떨궈낸 호루니와 스카차가 뒤쫓아 왔다.
정신없이 흔들리던 투이나가 계단을 내려간 뒤에야 간신히 말할 엄두를 냈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라카인 덕분입니다!”
스카차가 대답했다. 그에 이어 호루니가 창을 한 손으로 바꿔 들더니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거기엔 새까만 얼룩이 있었다.
“전날 밤 라카인이 저희를 찾아왔습니다.”
“얼룩병에 걸리면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면서요!”
호루니와 스카차가 번갈아 소리쳤다. 그들의 손에 난 얼룩을 본 투이나가 아연해졌다.
“일부러 병에 걸렸다고요? 그게 가능한 거였어요? 세상에 아무도 병에 걸리는 방법을 모르는데!”
“라카인이 옮겨줬습니다!”
스카차가 냉큼 고자질했다.
투이나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마치 남의 일처럼 듣고 있던 라카인의 옆얼굴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라카인, 정말이에요? 대체 언제 이 병에…?”
“…….”
라카인은 묵묵히 뛰기만 했다.
“그가 손바닥에 있는 얼룩을 잘라냈습니다! 그걸 악 소리 한 번 안내고 양쪽을 다 도려내더니 저희에게 건넸다니까요!”
“진짜 병이 옮는 것보다, 그냥 방패막이 정도의 역할을 기대한 것 같았지만…. 아무튼 정말, 정말로 저희도 병에 걸린 거죠?”
“마법이 안 통했잖아! 아까 시종들 봤지?”
라카인보다 호루니와 스카차가 더 난리였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말의 홍수에 투이나가 아찔해졌다.
‘도려내?’
투이나는 라카인의 손에 새로 감긴 붕대를 보고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저 손으로 그녀를 안고 뛰고 있다.
신을 신을 여유도 없이 뛰쳐나온 터라 맨발로, 신전의 돌바닥을 달리고 있었다.
울컥 감정이 북받쳤다.
매달려 있던 투이나가 옷자락을 세게 움켜쥐자 라카인이 어색하게 안고 있는 팔을 바르작거렸다.
“결과적으로 효과가 있었으니 잘된 일입니다.”
잘 됐다니. 투이나는 그건 불치병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호위들은 너무나도 의기양양하게 눈을 빛냈다.
“루가 님이랑 같아진 것뿐인걸요.”
“저희는 루가 님을 믿습니다.”
그들이 쫓기는 와중에도 활짝 웃었다.
이런 기분이구나.
투이나는 자신에게 아낌없는 신뢰를 보내는 호위들을 보며 왜 신이 그토록 신도들을 아낄 수밖에 없는지 깨달았다.
어떻게 저 애정에 보답하지 않고 견디겠는가. 이미 충분한데도 더 해주려고만 드는 사람들에게.
“사제님들 치료가 듣지도 않을 텐데 곪으면 어떡하려고 그랬어요….”
할 수만 있다면 투이나는 아르힘이 되어 그들에게 당장 축복이 가득한 치료를 퍼붓고 싶었다.
라카인이 얼굴을 묻은 투이나에게 작게 대답했다.
“잘 처리했습니다.”
당장이라도 내려와 호위들의 병과 상처를 확인하고 싶은데 쫓아오는 쪽이 심상치 않았다.
기절했던 시종들을 억지로 깨웠는지 시체처럼 꾸물거리는 인간들과 함께 베인이 다시 나타났다.
어디서 대기하고 있었는지 상단 사람들까지 함께였다.
심상치 않은 기세에 놀란 사제가 그들에게 소리치다가 오히려 그 무리에 합류해버리기까지 했다.
‘맙소사.’
인간을 파도처럼 부리며 베인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멀리서도 그녀에게 못 박힌 시선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젠 신전이고 뭐고 작정했나 봐요!”
“지금 바로 마법사에게 가실 거죠?”
“네!”
투이나가 마음을 다잡았다.
‘아르힘 님을 구해야 이 사람들도 치료할 수 있어.’
지금은 병에 걸리면서까지 자신을 보호할 수단을 마련한 호위들에게 감사할 때다.
반드시 그들의 병도 치료해버리겠다고 다짐하며 투이나는 가까운 방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투이나와 마법사의 마을로 가는 데 이골이 난 호위들도 목표를 알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투이나는 이때를 위해 미리 준비해뒀던 마법사들을 불러올 수 없었다.
샨이 그들의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
길을 막고 있는 샨을 본 라카인이 급하게 발을 멈췄다.
숨이 턱 막힌 건 투이나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왜 여기에 샨이?’
샨은 창백해진 투이나를 거만하게 내려다보았다.
“꼴이 볼만하군.”
샨의 시선이 흘긋 투이나의 어깨를 넘었다. 샨을 발견한 베인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비켜줄래요?”
초조해진 투이나가 앞뒤를 번갈아 보았다.
이미 뒤쪽에 있던 호루니와 스카차는 무기부터 들었다.
샨이 아니라 벌써 쫓아오는 시종들을 쳐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사람 수가 너무 차이가 나. 더 가까워지면 마법이 안 통해도 잡힐 거야.’
샨은 가까워지는 사람들의 무리를 보고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투이나가 내려가 그를 제지할 생각으로 팔을 푸는데, 뜻밖에도 라카인이 그러지 말라는 듯 다시 잡아 왔다.
샨의 손에 칼이 들려 있던 것이다.
“그거 어디서 났어요?”
“내가 뭘 할지 묻는 거보다 그게 우선인가?”
샨이 피식 웃었다. 그 눈이 어딘가 돌아있는 것 같았다.
“가끔 보면 그대는 목숨이 두 개라도 되는 것 같아.”
라카인의 상체가 긴장하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가 멀쩡한 상태로도 샨을 상대할 수가 없었는데, 지금 샨을 대적하기란 불가능했다.
점점 선연해지는 살기를 피부로 느끼며 투이나가 똑바로 샨을 마주보았다.
“날 죽이러 왔나요?”
“그대를?”
샨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아니, 난 그대에게 돌려받으러 왔다.”
샨이 칼의 방향을 바꿨다. 그의 눈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대가 할 일을 대신해줄 테니 내게서 가져간 소원을 토해내야겠다.”
투이나가 반응할 겨를도 없이 샨이 단숨에 짓쳐들어갔다.
촤아악.
눈 한 번 깜박할 사이에 앞줄에 있던 시종들이 주르륵 쓰러졌다.
경계하고 있던 호위들마저 놀라 주춤했다.
“꺄아아악!”
“무슨 짓입니까!”
“이 정도로는 죽지도 않을 인간들이 죽는 게 두렵나?”
피를 뒤집어쓴 샨이 투이나를 돌아보았다.
얼어붙은 투이나는 멍하니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샨이 그녀를 돕고 있나?
아니면 그저 이 기회를 틈타 신전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려는 걸까.
그 짧은 생각을 하는 동안 샨은 두 번째로 밀려오는 사람들을 쓰러트렸다.
“길게 생각하지 마라, 루가. 이들이 죽기 전에 상인 놈을 죽이면 풀려난 아르힘이 치료해주겠지.”
샨이 칼에 묻은 피를 흩뿌렸다. 그의 눈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안 그런가, 아르힘? 인간의 몸에 갇힌 기분이 어떠신가.”
당장이라도 샨을 죽여버릴 것처럼 일그러져 있던 베인의 표정이 한순간 변했다.
“……유쾌하진 않군.”
투이나가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아르파에 반응해 베인의 안에 있는 아르힘이 겉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이게 정말로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몸을 전전하며 자신마저 잊을 가치가 있었나?”
“네 놈은 현신할 수 있는 몸이 있으니까 모르겠지.”
샨이 흠뻑 피어오르는 비릿한 피 냄새를 들이마셨다.
아르힘이 베인에게 갇혀 있는 지금, 그는 거의 완전한 강림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약한 소리를 하는군. 나는 결코 잊히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인간의 몸을 갈아타도 그들은 결국 내 종복이 될지어니.”
“그렇기에 모하세스의 왕족들이 점점 너와 닮은 모습으로 태어나는가?”
베인의 몸을 입은 아르힘이 빙그레 웃었다.
“욕망을 버려라, 아르파. 그들의 영혼을 억눌러 너의 힘을 불어넣어도 다시는 육체를 얻지 못한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게 뭘로 보이나?”
아르파가 코웃음을 쳤다. 그의 팔 근육이 팽창했다.
샨의 몸은 원래부터 아르파의 것처럼 능란하게 움직였다.
“오늘 네 목을 치고 그 피로 이곳에 강림할 것이다. 한 번도 신의 피를 제물로 받아본 적은 없었지. 다른 것들은 육체조차 없었으니.”
“역시 너는 모르는구나.”
아르힘이 손을 까딱였다. 그러자 물러나 있던 사제들이 텅 빈 눈으로 쓰러진 사람들에게 몰려갔다.
아르파는 아르힘이 한 말이 신경 쓰여 그들을 방해하지 않았다.
“내가 뭘 모른다는 거냐!”
“너는 나를 죽여야 할 간절한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러지 않는 편이 낫지. 이 아이의 몸에 갇혀 있을 때 이용하기 더 편하니까.”
아르힘이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네 몸의 주인인 모하세스는 루가의 마음을 원한다. 그래서 너 또한 나를 죽여야 한다고 믿게 된 거다. 나를 풀어 주고, 환심을 사기 위해서.”
“헛소리하지 마라!”
아르파가 아르힘을 향해 다시 돌진해갔다.
아르힘은 베인처럼 사람들로 그의 앞을 가로막지 않았다.
오히려 길을 터주었다.
“아르파. 네가 신일지라도 인간의 영혼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너만 그들에게 영향을 주는 게 아니라, 그들 또한 네게 힘을 발휘하니까.”
아르파는 듣지 않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근육이 단숨에 치켜 올라갔다. 아무도 거기서 떨어진 칼날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칼이 닿기 직전, 베인의 얼굴을 한 아르힘이 투이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네게는 조금 미안하구나.”
뜨거운 피가 솟구쳤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라카인이 다급하게 투이나를 붙들었기에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경련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진정하십시오, 루가 님!”
“라카인! 베인이, 베인이 베였어요! 아르힘 님도!”
샨의 칼이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투이나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어 목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안 돼.’
천천히 베인이 뒤로 쓰러지는 모습은 마치 황금빛 밀밭에 불을 지른 듯 했다.
시작은 미미했으나 대각선으로 내리그은 자리를 따라 검붉은 피가 물들더니 삽시간에 번져가기 시작했다.
잔혹한 신이시여.
그녀가 온갖 노력을 퍼부었던 것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해가는 걸 보여줘야만 했을까?
들불이 번져가는 가운데 갇혀버린 것 같았다.
도망칠 때를 놓쳐 어디로도 나가지 못하고 그저 다 탈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생쥐처럼.
‘아직 늦지 않았어.’
투이나가 울음이 쏟아지려는 이를 악물었다.
‘치료하기만 하면, 사제님들이 살릴 수 있어!’
이렇게 베인을 죽이려고 되살아난 게 아니다. 아직도 그에게 듣지 못한 말이 있었다.
그녀는 원망을 주고, 과거를 받고, 그리하여 마침내 벗어나야만 했다.
투이나가 베인에게 가까이 가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라카인이 놓아주지 않았다.
“위험합니다.”
“지금이라도 가야 해요!”
당장이라도 사제를 끌고 베인에게 가려던 투이나의 손이 미끄러졌다. 피 때문이었다.
아르파의 강림 때문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서 피가 강제로 뽑혀 나왔던 것이다.
“이, 이게 뭐야.”
“아아아악!”
“사, 살려줘! 끄아아!”
고통 때문에 세뇌 마법에서 깨어난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아비규환이 되어가는 와중에도 아르힘은 여전히 평온했다.
“안타깝구나.”
“주절대지 말고 무릎을 꿇어라.”
아르파가 베인의 다리를 걷어찼다. 아르힘은 여전히 무방비하게 몸을 드러낸 채 쓰러졌다.
샨의 얼굴을 한 아르파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와 달리 네놈은 신을 받아낼 신도가 없으니 이제 이곳은 나의 땅이다.”
피로 물든 상체를 가만히 손바닥으로 누른 아르힘이 답했다.
“나의 아이를 잊었나?”
“어리석은 놈. 병든 자에게는 깃들 수 없다!”
통렬한 비웃음을 지은 아르파가 피에 젖은 검으로 베인의 배를 찔렀다.
“아르힘 님!”
칼이 그를 꿰뚫자 피와 비명 대신에 거센 빛이 터져 나왔다.
“!”
“헛수작을!”
으르렁거린 아르파가 빠르게 칼을 회수했으나, 칼과 함께 끌려나온 것은 더욱 더 눈부신 빛이었다.
모든 소리와 색채가 그 빛에 압도되었다.
눈이 아니라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빛은 곧 단 하나의 소리로 수렴하였다.
종소리.
신전의 성소에 있는 종탑에서 종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첫 번째 종소리에 다친 자들이 모두 나았고, 두 번째 종소리에 아르힘의 형태가 갖춰졌으며, 세 번째 종소리에 아르힘을 본 자들이 모두 기절했다.
빛이 걷히고 허공에서 소년의 모습을 한 아르힘이 나타났다.
짧은 흑발 머리가 휘날리고 잠든 듯이 눈을 감았던 아르힘이 다시 눈을 떴다.
압도적인 광경에도 불구하고 아르파는 미간을 찌푸린 채 똑바로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아르파의 시선은 빛이 터져 나왔을 때부터 정확히 아르힘이 나타날 자리를 가리켰다.
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 놈도 인간의 몸에서 온전하게 버틸 수 있더냐?”
“그렇지 않다.”
아르힘은 간단히 부정하고는 주변을 내려다보았다.
피 웅덩이에 쓰러진 사람들 너머로 엎드려있는 투이나가 있었다.
다시 본 신의 모습에도 그녀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어떤 말을 부르짖을지 몰라 숨가빠하던 입이 속삭였다.
“아르힘 님. 베인… 베인을….”
아르힘은 들었다. 그러나 허물어진 베인의 몸을 돌아보는 대신에 슬픈 듯이 미소 지었다.
“와서 데려가거라.”
투이나가 숨을 들이켰다.
‘아직 살아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바닥에 허물어진 베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 투이나가 힘이 빠져나간 몸을 다시 일으켰다.
그동안 그녀가 쓰러지지 않도록 지탱해주던 라카인이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움직이다니?’
기절해 쓰러진 인간 속에서 움직이는 건 투이나와 호위들뿐이었다. 투이나는 곧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들이 걸린 얼룩 병은 마법도 신의 힘도 통하지 않게 만들어버렸으니까.
그러나 사실은, 그녀도 기절해야 한다. 마법이 통하니까.
투이나는 복잡하게 몰아치는 정신으로 어리둥절해진 호위들의 모습을 집어넣었다.
두 명의 신 앞에서 죽지도, 기절하지도 않은 호위들의 모습이야말로 시드룬의 가설을 증명하는 증거였다.
“세상에….”
“…….”
호루니와 스카차가 경외감을 숨기지 못하고 아르힘을 올려다보았다.
그들로서는 처음으로 보는 수호신의 모습이다.
아르힘은 소년의 모습이었음에도 피를 뒤집어쓴 괴물처럼 서 있는 샨에게 결코 뒤지지 않았다.
허공에 떠 있던 아르힘이 가볍게 몸을 돌렸다.
“많은 자가 희생당했다.”
“내게 바쳐질 희생이다.”
사납게 대꾸한 아르파가 현신한 아르힘에게 칼을 겨누었다.
“결국 누가 너를 가둔 자를 죽여주기만을 기다렸나? 한심하군.”
“글쎄.”
아르힘이 묘한 눈으로 제게 들이댄 칼끝을 응시했다.
피가 달라붙어 원래 가져온 칼의 길이보다 두 뼘은 더 길어져 있었다.
“상태를 보니 이미 그 아이의 몸을 완전히 장악했구나.”
“그래. 항상 네놈이 어떻게 몸을 얻었는지 궁금했었지. 이번에 직접 갈라 확인해 봐야겠다!”
아르파가 공중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폭풍처럼 몰아친 기세가 하늘을 찢듯이 갈라놓았다.
칼은 피했으나 아르힘은 바람에 휘말리듯 흔들렸다.
송곳니를 드러낸 아르파가 연달아 공격했으나 아르힘은 흔들리기만 할 뿐 결코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꼭 거미줄에 매달린 나뭇잎을 베어내려는 동작 같았다.
대롱대롱 흔들리며 아르파의 공격을 피한 아르힘이 흘긋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투이나가 휘청거리며 베인을 향해 다가갔다.
‘아르힘 님은 괜찮으실 거야. 지금은, 말씀하신 일을 해.’
투이나는 밑단을 피로 적시는 것도 개의치 않고 베인의 앞에 무릎 꿇었다.
베인은 시체처럼 핏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로 누워있었다.
눈을 감은 그는 모든 미련이 끊긴 것처럼 의식이 없었다.
투이나가 손을 떨며 그의 머리를 안아들었다.
“베인?”
힘없이 들리긴 했지만, 분명히 체온이 느껴졌다.
식어가는 게 아니라 자신의 맥박으로 뛰는 온기였다.
투이나의 옆에 꿇어앉은 라카인이 그를 확인했다.
“상처가 없습니다.”
투이나의 시선이 내려갔다. 칼에 찢긴 옷 밑으로 깨끗한 피부가 보였다.
투이나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아르힘 님이 낫게 해주신 거예요.”
역시 아르힘이 베인을 그냥 외면할 리가 없었다.
깊이 안도한 투이나가 긴 숨을 토해냈다.
죽지 않았어.
비록 한참동안 잠만 자면서 요양해야 될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어쨌든 베인은 숨을 쉬며 살아있었다.
그거면 족했다.
“다행이다…. 다행이에요.”
뒤이어 달려온 호루니와 스카차가 그녀의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들의 등에서 잔뜩 경계심이 느껴졌다.
‘다 무사한데 왜…?’
영문을 몰라 하던 투이나가 고개를 들자 곧장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아르파가 시선이 닿는 곳마다 못을 때려 박을 기세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분노는 단순하고 순수하기까지 했으나, 지금은 타오르는 불에 불티가 섞인 듯 일그러지고 탁했다.
보다… 인간적이었다.
‘샨?’
저도 모르게 투이나가 뒤로 주춤했다. 피처럼 뜨거움만 뿜어내던 샨의 표정이 차갑게 뒤바뀌었다.
“이리로 와라.”
“…네?”
“그대는 누가 아르힘을 꺼내주었는지도 모르는가?”
이미 붉은색으로 변해있던 샨의 눈동자가 짙은 감정으로 번들거렸다.
오해할 수 없을 만큼 명백한 질투였다.
신이 인간을 질투할 리가 없다.
아르파가 베인을 질투할 리가.
하지만 지금 그녀가 오해하는 게 아니라면 저기 서 있는 건 아르파인 동시에 샨이기도 했다.
베인의 머리를 껴안고 주저앉은 투이나를 미워하고, 아르힘을 따르는 그녀를 질시하는 건.
자신을 그대라고 부르는 사람뿐이다.
“……샨, 당신이에요?”
“닥쳐라!”
다급하게 아르파가 소리쳤지만 샨의 표정은 이미 일그러진 뒤였다.
아르힘이 개구쟁이처럼 미소 지었다.
“훌륭하구나, 아이야. 알아차릴 줄 알았다.”
아르힘이 샨을 향해 내려갔다. 아르파가 방어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맞은편에 있던 천장 하나가 날아갔으나 아르힘은 무사했다.
“꺼져라, 아르힘!”
“모하세스. 깨어나라.”
아르힘이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의 신은 돌아갈 때가 되었다.”
아르파가 두 번째 공격을 하려고 팔을 휘두른 틈을 타 아르힘의 손가락이 샨의 이마를 눌렀다.
“이 건방진 놈들이!”
아르파가 고함을 질렀으나 이미 그의 음색에 깃들어있던 힘이 안으로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투이나는 숨을 죽이고 샨이 다시 그의 신을 억누르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아르파가 깃들었던 힘이 사라지자 칼의 형태로 굳어있던 피가 다시 끈적거리며 바닥으로 쏟아졌다.
오래도록 샨의 이마를 누르고 있던 아르힘의 손이 떨어진 것은 타의에 의해서였다.
새파란 눈빛이 돌아온 샨이 이마에서 소년의 손을 쳐냈던 것이다.
이번에는 순순히 맞아준 아르힘이 물러났다.
“어서 오거라.”
“…….”
샨은 얼음을 삼킨 사람처럼 뼛속까지 서늘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감히 너에게 간섭을 허락했지?”
아르파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는 투이나가 알던 샨이었다.
저렇게 수호신을 무시하는 태도까지 아르파가 그의 영혼에 불어넣은 것인지.
어디서부터 샨이고 어디까지가 아르파인지 딱 잘라 구분할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미친 듯이 날뛰던 아르파보다는 신에게 경멸을 드러내는 샨이 나았다.
아르힘이 빙긋 웃었다.
“너는 이미 알고 있다.”
샨이 못마땅하게 턱을 굳혔다. 그리고 그때까지 일부러 쳐다보지 않으려고 뻣뻣하게 고정시킨 목을 뚜둑 소리 나게 돌렸다.
샨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토록 찾던 신을 해방시켜줬으니 내게 기뻐 달려올 차례 아닌가?”
투이나가 멍하니 샨을 올려다보았다.
신이 막 떠난 여파일까. 순순히 감정을 원하는 그가 무척이나 낯설었다.
자신이 말해놓고도 만족스럽지 않은지 샨이 미간을 구겼다.
“됐다. 어쨌든 그대는 이제 내게 빚을 진 거다.”
“그, 그래요.”
투이나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얼떨떨했다.
‘지금은 샨이 좀 달라졌다고 말할 때가 아니겠지.’
그랬다간 기껏 아르파를 돌려보냈는데 다시 튀어나올 수도 있었다.
그때 누군가 투이나의 어깨를 건드렸다.
어깨를 짚은 사람은 아래로 내려온 아르힘이었다.
투이나는 이제 다 끝났다는 안도감으로 가득 찼다.
아르힘은 풀려났고, 베인은 살아있었으며, 마법사를 신전에 끌어들였다는 오명을 사지 않고도 해결했다.
심지어 저 샨까지 아르파를 돌려보냈는데도 화를 내지 않았다.
‘빚을 지웠다는 얘기는 조금 찜찜하지만, 이번에도 해결할 수 있을 거야.’
투이나가 활짝 웃었다. 아르힘도 웃었다.
그 소년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서려 있는 건 라카인이 보았다. 그래서 그는 웃을 수 없었다.
투이나도 라카인을 보았다.
그가 감히 아르힘을 똑바로 보고 있다는 점이 아니라, 기뻐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발견한 그녀의 미소가 가라앉았다.
라카인의 시선을 따라가자 아르힘이 비로소 제대로 보였다.
아르힘은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어째서 신이 그녀에게 사과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것도 풀려나기 직전에.
서서히 투이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 * *
쿵쿵.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한 저택을 헤집어놓았다.
갑작스런 침입자에 놀란 하인이 어렵게 그들 앞을 막아섰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자격으로 여길 들어오는 겁니까?”
“네 주인은 어디 있나?”
“예?”
“비켜라!”
그를 밀친 병사가 거침없이 안쪽으로 나아갔다.
화려한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바깥에 있는 정원이 보였다.
원래는 가지런히 정리되었을 정원은 잠시 돌봐주는 주인을 잃은 듯이 삐죽삐죽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벌떡 일어났던 레오나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정원의 모습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늘 베인에게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뭐라 했으나 막상 그가 가꾸던 정원을 보니 심란해졌다.
떼거리로 몰려온 사람들이 그녀를 잡으러 왔으니 일이 실패한 게 틀림없었다.
‘베인. 어떻게 된 거냐.’
레오나는 침착하게 불을 붙이고 이번 일과 관련된 서류를 태우기 시작했다.
루가를 왕으로 세울 계획을 짰을 때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다.
레오나는 베인에게 사람을 설득하는 재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반쯤 농담 삼아 베인의 미모가 설득력이라는 찬사를 하고 다녔지만, 사람들이 넋을 놓고 그의 말을 귀담아들을 때는 분명 그 이상의 수완이 있었다.
그때까지 평범한 소년이었던 베인은 열다섯 살에 부모님을 잃고 갑자기 재능에 꽃을 피웠다.
아르피기아에 있던 대부분의 재산을 잃고도 상단을 재건할 수 있었던 건 레오나의 노력도 있었지만 중요한 자리마다 동행한 베인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었다.
레오나는 어린 동생이 스스로를 너무 이용하는 게 아닌가 싶어 말려 보았지만, 베인은 정말로 괜찮다며 꽃처럼 웃곤 했다.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쁘다면서.
그게 일종의 세뇌 마법이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상단에 도는 마법 물품을 잡아내기 위해 신전에서 성물을 빌려온 레오나는 베인에게 반응하는 성물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그때 말렸어야 했나.’
베인은 어떤 경로로 세뇌 마법을 입수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갑자기 고아가 된 아이의 방어 본능처럼, 꽉 쥐고 놔줄 수 없는 문제였으니까.
그리고 레오나 또한 수호신과 부모를 동시에 잃은 자였다.
그래서 묵인했다.
‘묵인이라고 하면 기만이군. 알고 난 뒤로는 내가 더 적극적으로 이용했으니까.’
불꽃에 타들어 간 종이가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레오나가 훅 촛불을 껐다.
바깥에서 몰려오는 발소리가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런 베인이 갑자기 투이나를 사랑한다며 신전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는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다.
갑자기 사춘기가 왔거나 미쳤거나 둘 중 하나니까.
베인이 진심이라는 걸 알고, 심지어 만나자마자 두 사람이 연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자 레오나까지 괜히 가슴이 근질거릴 지경이었다.
정말로 운명인가 싶었다. 그래서 근사한 결혼 예물을 하나 쥐여 주고 싶어졌을 뿐이다.
예를 들면, 왕관 같은 것.
‘너희들이 연애할 동안 골치 아픈 일은 다 해주려고 했더니. 갑자기 그렇게 깨지는 게 어디 있냐.’
의회와 신전의 아들딸이 만난다는 근사한 명분은 자취를 감추었다.
베인이 아르힘을 가둔 순간부터 사제들은 선을 넘은 그들에게 맹렬한 분노를 쏟아낼 테니까.
‘왜 그랬니, 베인.’
둘 사이가 아무리 삐걱거려도 신을 가두면 루가인 투이나가 베인을 용서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은 자명했다.
그걸 알면서도 베인은 아르힘을 제 몸에 가뒀다.
‘뭐가 널 그렇게까지 만든 거니?’
신전 밖에 있는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일이 완전히 어그러졌지만 묘하게 기분은 개운했다.
신전으로 끌려가면 사제들도 뒤에서 자신과 결탁했다는 사실을 실컷 언급해주리라는 다짐을 하며 레오나가 돌진해오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잠그지도 않았던 문짝이 쾅 부서지며 사람들이 밀려 들어왔다.
“죄인 레오나 크로퍼드는 무릎을 꿇어라!”
“이봐, 그 문 비싼 거란 말이야.”
여유롭게 농담 따먹기를 하려던 레오나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녀를 잡으러 온 사람들이 사제복을 입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 잠깐. 무사제님들이 아니네?”
“우리는 의회에서 나왔다.”
레오나는 어리둥절해졌다.
과연 지금 그녀에게 창을 들이대고 있는 자들은 각기 다른 의원 가문의 옷을 입고 있었다.
“너희들이 무슨 자격으로 나를 잡아가?”
“설명은 가서 듣도록 해라!”
사납게 소리친 병사가 그녀의 오금을 걷어찼다. 레오나가 윽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재빨리 손목을 당겨 묶는 병사를 따라 휘청거리며 레오나가 항의했다.
“뭐야, 잡아가려면 똑바로 설명을 해 줘야지!”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병사가 대꾸했다.
“아르힘 님이 풀려나셨다.”
그거면 충분하다는 듯한 선언이었고, 레오나도 입을 다물었다.
* * *
저택에서 끌려 나온 레오나는 의회 건물 지하로 향했다.
본래 중범죄 이상의 재판에나 쓰는 터라 레오나도 오랫동안 지하에 가 볼 일이 없었다.
건조한 푸른 벽면에 횃불이 줄지어 걸렸고, 둥근 원탁에는 의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들이 동시에 자신을 쳐다보자 레오나는 기어코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입법회의 때도 전원 출석하는 꼴을 못 봤는데, 다 날 보려고 이렇게 나온 거야? 감격스러워라.”
“앉게 해라.”
의장이 말했다. 억지로 잡아 온 것치고는 정중한 목소리였다.
눈을 찡그린 레오나가 딱딱한 의자에 앉았다. 눈높이가 낮아지자 의장 뒤쪽에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다.
“루가 님?”
깜짝 놀란 레오나가 반사적으로 외쳤다.
투이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만큼이나 발랄하던 사람이 미소를 잃자 몹시도 심각하게 보였다.
레오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라 놀랐습니다.”
“루가 님께서 직접 신전에서 여기까지 이곳의 열쇠를 가져오셨다.”
“왜 사제님들이 안 하고?”
의장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주제 모르고 푼수 같던 전 의장 대신 새로 임명된 의장은 호락호락하게 대답해 주지 않았다.
“죄인이 당도했으니 회의를 시작하겠다.”
“잠깐 기다려 봐.”
레오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원래 재판은 신전의 몫이잖아. 왜 의원들이 여기 앉아 있는 거지?”
“이번 일은 사제들이 논의할 자격을 잃었다.”
아무래도 의회 쪽 귀에도 크로퍼드 상단과 사제들의 결탁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저렇게나 당당하게 나오다니.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궁금해지는걸.’
사제들이 재판을 열면 실컷 빠져나가 볼 생각이던 레오나가 다리를 꼬았다.
“좋아. 재판 열어. 하지만 이거 월권일 텐데?”
“루가 님께서 신전이 가진 권한을 대리중이시다.”
그래서 투이나를 저 자리에 데려다 놓았나?
레오나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러나 단순히 이용하려고 데려왔다기엔 이곳의 중심이 투이나에게 맞춰져 있었다.
마치 투이나가 회의를 원하는 것처럼.
“본 회의는 아르힘 님을 가둔 크로퍼드 상단의 죄를 묻고자 열렸다.”
“잠깐만.”
의장이 또 말을 끊는 레오나에게 약간의 짜증을 보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레오나는 정당한 의문을 표시했다.
“그 문제라면 당연히 베인도 같이 불러와야지. 아니면 나 모르게 따로 벌써 회의를 거쳤나? 재판도 없이 무슨 짓을 한 건 아니겠지!”
“그는 올 수 없다.”
“어째서? 지금 다른 방에 있나?”
“레오나.”
그때 계속 잠자코 있던 투이나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당신을 죄인이라 부르고, 이 회의도 재판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당신과 의원님들이 함께 결정해야 할 일이 있어서 모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말이 격해져 있던 레오나마저 단숨에 진정할 만큼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투이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짙게 배어 있는 비통한 감정에 레오나는 강한 불길함을 느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베인은 이제 다시는 눈을 뜰 수 없습니다.”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레오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 애가… 그 애가 죽었다는 뜻입니까?”
“아니요.”
투이나는 제 입으로 이 사실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이 무척 괴로워 보였다.
“살아있습니다. 허나 다시는 어떤 것도 보지도, 듣지도, 걷지도 못합니다. …죽은 것과 다를 게 없어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레오나가 어찌나 큰 소리로 고함을 쳤는지 그녀를 끌고 왔던 병사가 움찔할 정도였다.
“여기는 아르힘입니다! 죽지만 않는다면 무슨 병이든 낫게 하지 않습니까!”
“바로 그 아르힘 님께서 확언하신 일이네.”
의장이 퉁명스럽게 끼어들었다.
노여움 때문에 얼굴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진 레오나가 그를 노려보았다.
의장이 맞받아쳤다.
“화가 나나? 역시 오만한지고. 그럼 감히 아르힘 님을 넘본 자가 무사하리라 여겼나?”
“차라리 그분이 직접 베인의 목을 쳤다면 받아들였을 겁니다.”
이를 바드득 간 레오나가 응수했다.
“허나 살아있지도 않고 죽어있지도 않은 그딴 말도 안 되는 상태에 내 동생을 버려두겠다는 겁니까? 제가 아는 아르힘 님은 베인을 살려낸 다음에 제대로 죗값을 치르게 할 분입니다!”
“이번에는 그렇게 가벼운 사안이 아니니까 그렇지!”
투이나는 언쟁이 오가는 곳을 참담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레오나가 하는 말에 공감했기에 더욱 다음 말을 꺼내기가 힘겨웠다.
“…아르힘 님이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언쟁이 멈췄다. 투이나가 속을 비틀어 짜내듯 한 마디 한 마디를 이었다.
“베인이 겪은 일은 일반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있어 아르힘 님의 힘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레오나의 말이 맞아요. 베인이 깨어나지 못하는 건 사고입니다.”
“본인이 불러온 사고지.”
그 잠깐을 참지 못하고 한 의원이 이죽거렸다.
부릅뜬 눈으로 투이나를 바라보고 있던 레오나가 순식간에 몸을 틀더니 의원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어억!”
“그만 하세요!”
“어디 내 앞에서 그딴 말을 해! 네 새끼가 그리 됐어도 비아냥거릴 수 있을 것 같아!”
“이, 이 죄인 주제에 감히!”
“진정! 진정하시라니까!”
금세 벌떼같이 소란이 일어났다.
투이나가 무릎 위에 둔 주먹을 꾹 쥐었다.
그녀가 억지로 토해내고 싶은 말들을 참는 사이 겨우 의원에게서 떨어진 레오나가 엉망진창이 된 몰골로 다시 의자에 앉았다.
“…루가 님 말씀은 잘 전달받았습니다.”
레오나가 애써 침착한 말투를 꾸며냈다.
“그럼 이 자리에 저를 왜 부르신 겁니까? 베인이 치르고 있는 죗값이 아직 부족했기 때문인가요?”
“…….”
“다른 피해를 보상하라면 하겠습니다. 저희 상단의 재정을 털어가려고 저 의원들까지 데려오신 게 아닙니까? 어차피 아르힘 님이 주신 것, 아깝지도 않습니다.”
베인과 똑같이 길게 드리운 레오나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그녀가 베인을 닮았다는 사실이 이처럼 사무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베인은… 베인은 돌려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죄인의 시체도 가족에게는 돌아가는 것이 법도입니다.”
비로소 가장 하기 힘든 말에 다다른 투이나가 가시 같은 숨을 삼켰다.
고통이 따갑게 뱃속으로 퍼져가는 걸 느끼며 투이나가 내뱉었다.
“베인은 지금 신전 밖을 나갈 수 없습니다. 그는 아직 죽지 않았고, 여전히 구혼자의 신분이기에, 아르힘 님이 거신 제약에 따라 신전에 머물러야 합니다.”
레오나의 몸이 뻣뻣해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는 그녀에게 투이나가 목구멍을 긁어 올리듯 말을 끄집어냈다.
“그러니 제가 결혼하거나 베인에게서 구혼자 지위를 박탈해야만 신전에서 나갈 수 있습니다.”
정적이 모루를 때리는 망치처럼 그들을 후려쳤다.
멍청히 투이나를 바라보던 레오나는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대로 기력을 잃고 쓰러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굳어 있던 레오나의 입술이 달싹였다.
“죽지도 못한 인간에게서 더 빼앗아 갈 게 있었군요.”
“…….”
“어떻게 그리 잔인한….”
이 자리에서 레오나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자가 있다면 투이나였다.
‘결혼을 하거나 구혼자의 지위를 빼앗으라고?’
이 모든 일들이 왜 일어났는데.
베인이 신을 가두는 죄까지 저지르면서 끝끝내 지키려고 했던 게 무엇인데.
그 마지막 미련과 집착까지 끊어내라니.
그가 더는 사람으로서 남을 방법이 없다는 선언이었다.
투이나의 손톱이 피가 나도록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하지만 적어도… 적어도 이러면 베인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잖아.’
아무리 베인이라도 그가 나락으로 떨어진 신전에 계속 남아 있고 싶어할 리가 없었다.
투이나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이자 마지막 배려였다.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던 레오나가 고개를 숙였다.
필사적으로 숨을 쉬려 애쓰던 그녀가 간신히 속삭였다.
“제 눈으로 베인을 직접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