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살해한 구혼자 8권30. (30/43)

나를 살해한 구혼자 8권

30.

‘이제 저를 살려주세요!’ ‘너의 소원은 이루어졌도다.’ 빈껍데기 몸뚱이가…

투이나는 차차 충격에서 벗어났다.

‘지금까지 봤던 비늘이 저기서 나온 거였구나.’

가만히 몸을 내놓은 시드룬을 보던 그녀가 중얼거렸다.

“영혼의 세계에 돌아간다고 해도 정말 그게 나을까요?”

“모릅니다.”

시드룬은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비늘에 감긴 부분을 치워냈다.

본인은 아프지 않다고 했지만 보는 사람은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유일한 해결책은 당신뿐입니다.”

지금까지 시드룬이 했던 기이한 행동들이 한 번에 납득되었다.

그녀에게 과하게 집착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투이나는 착잡해졌다.

“도와줄게요. 그런데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당신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투이나는 의아해졌다. 시드룬은 여전히 반짝거리는 비늘을 내버려둔 채 말했다.

“지난번에 당신과 함께 영혼의 세계를 열었을 때도 원하는 걸 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개입된다면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을 터.”

“제 요청이 시간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시드룬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당신이 정말로 다른 시간을 가지고 있다면, 왜 영혼의 세계가 당신에게만 반응하는 지도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몸과 기억을 되찾을 방법도 포함해서.”

“…….”

심호흡을 한 투이나가 시드룬의 손을 잡았다. 예상과 달리 시드룬은 바로 마법을 쓰지 않았다.

그가 잡은 손을 꽉 붙들어 자신의 몸에 드러난 비늘 쪽으로 당겼다.

느릿하게 위치를 가늠해보던 그가 어느 한 지점에 멈췄다.

“지금부터 절대로 움직이거나 비늘을 만져서는 안 됩니다.”

“알겠어요.”

바짝 긴장한 투이나가 팔에 힘을 주었다. 시드룬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자리만이 비늘이 파괴되지 않고 당신의 영향력만 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비늘은 그녀의 손이 닿자마자 까맣게 부서졌었다.

지금 시드룬의 몸에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걸 상상해본 투이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절대로 건드리지 않을게요.”

“내가 마법을 쓰면 가고자 하는 시간을 강하게 떠올리십시오. 지금까지는 내가 좌표를 잡았지만, 이번에는 당신이 해야 합니다.”

투이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드룬이 마법진을 열었다.

놀랍게도 그의 몸에 자라난 비늘들이 공명하듯 함께 빛을 내기 시작했다.

눈이 휘둥그레진 투이나가 서둘러 집중했다.

‘내가 살해당했던 시간으로 가고 싶어.’

투이나가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마법진은 점점 그들을 집어삼킬 듯이 커졌다.

단순히 과거를 보았을 때는 옆에 마법진이 나타났었는데.

어느 순간 그들 주위가 확 밝아졌다. 일렁이는 연보라색이 그들을 감쌌던 것이다.

투이나는 잠깐이지만 저절로 몸에 힘이 쭉 풀리고 말았다.

다행히 그녀가 완전히 중심을 잃기 전에 시드룬의 손가락이 강하게 그녀를 붙잡았고, 비늘에 닿기 전에 다시 주변 배경이 바뀌었다.

구혼자들을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날 밤의 방이다.

“……!”

투이나가 급하게 숨을 삼켰다. 모든 것이 똑같았다.

엄숙하게 휘장이 드리운 벽과 금빛 선으로 문양이 그려진 바닥까지.

그리고 초조하게 계속 앉았다가 일어서는 자신까지 보였다.

‘나야.’

투이나는 제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기묘한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어렸을 때 자신의 모습은 그래도 다른 사람 같았는데, 지금 보는 모습은 1년도 차이가 나지 않았으니까.

투이나는 과거이자, 곧 다가올 미래의 자신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모르고 베인과의 미래를 꿈꾸고 있는 표정은 사랑에 푹 빠져있기만 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행복해보여.’

투이나는 서성이던 과거의 자신이 창문으로 다가가자 서둘러 그녀의 앞쪽으로 옮겨갔다.

이번에는 뒤에서 그녀를 찌른 자의 얼굴을 똑똑히 보리라.

잠시 후 나타난 살인자의 얼굴은 아는 사람이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이기도 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황홀한 빛을 흩뿌리며 나타난 사람은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 희고 긴 검을 양 손에 쥐고 있었다.

예상했으면서도 투이나는 한 순간 숨 쉬는 법을 잊어버렸다.

‘베인.’

아름다운 그녀의 옛 연인은 소리 없이 칼을 들어올렸다. 단정하고 절도가 있는 동작이었다.

투이나는 두 눈을 뜨고 그가 자신의 등을 찌르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 때의 고통이 아직도 지금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베인이 피를 흘리는 자신의 등을 발로 밀어내는 동작에서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직접 눈으로 보기 전까지 그녀는 희망을 가졌었다. 세뇌 마법 때문일 거라고.

사람의 정신을 조종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베인이 살인자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거의, 그럴 뻔했다.

아무도 볼 수 없기에 드러난 베인의 표정을 보기 전까지는.

베인은 칼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갈 때 진정으로 슬퍼 보였고, 독을 삼킨 것처럼 괴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정말 자신이 이런 일을 하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거기까지만 보았다면 투이나는 베인이 세뇌 마법에 당했을 거라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칼을 뽑아내고 쓰러진 투이나의 위에서 그는 웃었다.

연인으로 지낼 때도 볼 수 없었던 환희의 찬가가 그의 얼굴에 울려 퍼졌던 것이다.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오려는 환희를 입술로 꾹 누른 그가 빠르게 몸을 돌려 도망쳤다.

밑에서 자신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투이나는 베인이 사라진 자리만 멍하니 응시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런 얼굴을 하지?’

현실에서는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표정이었다.

사람을 홀리는 방법을 설명하라면 지금 베인을 보여주리라. 이보다 더할 수가 없었다.

투이나가 정신을 차린 건 다시 누군가 다가오는 걸 발견했을 때였다.

‘맞아. 죽기 전에도 누가 오는 걸 봤었어.’

그녀는 그것이 소년의 모습으로 나타난 아르힘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앞에 나타난 건 마법사였다.

‘시드룬?’

투이나가 계속 손을 잡고 있는 시드룬 쪽을 올려다보았지만 그도 이 상황을 알 리가 없었다.

시드룬이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는 동안 고개를 갸웃한 마법 속 시드룬이 투이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시체를 발견했는데도 그는 놀라거나 비명을 지르는 대신 마법진을 열었다.

아마 몸을 가져가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마법진이 완성되기 직전에 갑자기 마법진이 일그러지더니 투이나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헉…!”

세계가 일그러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다음 순간 투이나와 시드룬은 원래 시간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튕겨 나온 건가?’

“그 시간은 거기서 끝났군요.”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시드룬이 중얼거렸다.

지금 본 장면에 완전히 핏기가 사라진 투이나는 계속 손을 떨었다.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던 시드룬이 손을 놓았다. 다리가 풀린 투이나는 그대로 풀썩 뒤로 주저앉았다.

‘베인이었어.’

드디어 살인자를 알아냈는데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충격을 받았다.

시드룬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지만 충격은 몸으로 나타났다.

심장에 달린 뿔처럼 꿈틀거리던 비늘이 조금 더 자라났던 것이다.

‘맙소사.’

놀란 투이나가 흠칫하자 시드룬이 다시 로브를 집어 들었다. 그가 신경 쓸 것 없다는 투로 말했다.

“찾고자 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네.”

투이나가 멍하니 속삭였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드물게도 그녀의 상태를 배려하는지 시드룬이 대신 입을 열었다.

“당신은 살해당했군요.”

“네.”

“베인 크로포드에게.”

“…네.”

투이나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손가락에 엉키는 머리카락만큼이나 생각이 엉겨 붙었다.

시드룬은 엄준한 재판관처럼 말을 이었다.

“어떻게 되살아났습니까?”

“…….”

투이나는 말없이 손을 맞잡았다.

몸을 웅크린 그녀가 턱을 괴듯 기도하는 손을 눌렀다.

시드룬은 이해했다.

“아르힘이 당신을 살렸습니까?”

“…….”

“하지만 그에게는 시간을 되돌릴 능력까지는 없습니다. 신에게는 오직 하나의 권능만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

투이나가 대답하지 않아도 시드룬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논리가 정확히 지적했다.

“아르힘이 나의 마법을 가져갔군요.”

투이나의 생각은 그녀의 몸으로 빨려들던 마법진을 떠나 심장으로 향했다.

호수에서 발견한 마법사의 심장.

아르힘이 가져간 마법사의 심장.

마법사의 육체만 있으면 누구나 그의 마법을 쓸 수 있다.

투이나는 여전히 몸 바깥에서 뛰고 있을 시드룬의 심장을 떠올렸다.

“……시드룬을 진실로 처음 만났을 때는 원래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났었습니다.”

“그때의 내가 신과 계약했군요. 이제 신이 마법사를 구혼자로 허락한 이유를 알았습니다.”

“…하지만 되살아난 다음에 시드룬의 심장은 소금 호수에서 발견되었어요. 그 때 영혼의 세계를 본 거예요.”

투이나가 꽉 눌린 턱에서 손을 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게 정말 당신의 심장이라면 왜 그곳에서 발견된 걸까요?”

“시간이 바뀌었을 때는 필연적으로 공간도 변합니다. 그 과정에서 오류가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당장 나는 신과 심장을 계약한 기억이 없으니 확신할 순 없군요.”

자기 심장의 위치가 급변했다는 소리에도 시드룬은 평온했다.

투이나의 정신이 대신 이상해질 것 같았다.

“놀라지 않았어요?”

“시간이 바뀔 때 그렇게 멀리까지 공간이 뒤틀릴 수 있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아르힘 님은 여전히 당신의 심장을 가지고 있어요, 시드룬.”

“그렇다면 당신이 이번에도 살해당할 때 똑같은 일을 할 수 있겠군요.”

“…모르겠어요.”

투이나가 혼란스럽게 머리를 헝클었다.

“왜 그 분이 저를 살렸는지도 모르겠는걸요. 베인은, 베인이 왜 저를 죽였는지, 정말 진심으로 그런 건지도 모르겠는데…!”

투이나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바깥에서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더 커졌을 것이다.

“루가 님.”

라카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차분한 그의 음성이 그녀를 진정시켰다.

언제나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을 발견할 때마다 그녀는 다시 일어서지 않던가.

놀랍도록 빠르게 마음이 고요해졌다.

파문이 이는 호수의 바람을 달이 잡아당기는 것처럼. 파랑을 잠재웠다.

마음 속 호수에 가라앉아 있던 투이나가 물 밖으로 걸어 나오는 동안 시드룬은 다시 로브의 걸쇠를 걸었다.

그리고 신을 대신하여 투이나의 질문에 답했다.

“그건 당신이 죽은 이유와 같겠지요.”

죽어야만 하는 이유는 언제나 살아야만 하는 이유와 맞닿아있으니까.

“…….”

투이나는 간절히 묻고 싶었다.

저는 살아났습니다.

살아난 다음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 * *

최근 라카인은 묘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마법사에게서 두 번째 시험의 대가를 받아낸 투이나는 그 후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마법사의 마을로 계속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 때마다 시드룬은 투이나를 데리고 자꾸만 사라졌다.

수리시의 말로는 계속 마법을 쓰는 중이라고만 했다.

호위를 서며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들을 수는 있었지만, 일단 마법이 시작되면 그 뒤의 일까지 볼 수가 없었다.

물론 투이나는 매번 그들을 위해 설명해주긴 했다.

“지난번에 알아낸 결과가 좀… 음, 이상해서요. 계속 시드룬과 함께 다녀보는 중이에요.”

“그 시간 마법이라는 걸로요?”

“네네.”

투이나가 호루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카인은 걱정스러웠다.

처음 투이나가 시드룬과 둘이서만 사라졌을 때 몹시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투이나는 폭풍우에 휩쓸렸다가 떨어진 사람 같았다.

그녀를 보자마자 다가가긴 했지만, 평소와 달리 말없이 그의 어깨를 짚고 일어서는 모습은 분명히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어서 가슴이 답답했다.

그저 시드룬과 함께 다른 시간에 다녀왔다는 말로는 해소되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귀가 좋아도 방 바깥에서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안쪽의 대화 소리까지 정확하게 알아듣기는 어려웠다.

신전으로 돌아온 투이나는 다소 회복된 듯 보였지만 신전에는 당분간 휴식을 취할 거라 전하고는 자신의 방에만 머물렀다.

“이제 수확 철이라 제가 크게 필요한 시기는 아니거든요.”

그간의 노력을 거둬들이느라 신전 밖은 활기차게 돌아갔다.

사제들도 투이나와 면담하는 대신 의회와 함께 주판을 두드려보는 게 더 즐거운 것 같았다.

그동안 가을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방안에서 투이나는 호위들과 노닥거리기만 했다.

“여기서부터 다시 해볼까요?”

투이나가 잉크로 길게 선을 그었다.

라카인이 보기엔 그녀가 일부러 감당하기 어려운 고민에서 벗어나고자 가벼운 일에만 집중하는 것 같았다.

괴로워하는 모습보다는 낫지만, 애써 밝은 척하는 걸 알기에 마냥 안도할 수도 없었다.

가슴 속에 자꾸만 무거운 것이 쌓였다.

집중하지 못한 라카인의 글씨 끝이 흐트러지자 투이나가 고개를 숙였다.

“모르겠어요?”

“…아닙니다.”

라카인이 다시 반듯하게 펜대를 세웠다.

이제는 다른 이유로 심장이 뛰었다. 번갈아 갈비뼈를 두드리는 둔통이 이제는 익숙했다.

투이나가 방에 은둔하는 동안 주로 하는 소일거리는 라카인에게 글을 알려주는 일이었다.

지나가는 말로 알려주겠다고 한 게 아니었는지, 제법 열심히 계획까지 짜 왔던 것이다.

“저 학교 다닐 때 사제님이 가르쳐주셨던 얘기 다 적어 왔어요.”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키득키득 웃던 투이나는 온갖 나라의 수호신 이야기를 적어준 종이를 내밀었다.

먼저 이야기를 들려준 다음 라카인이 글씨를 보고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루에 이야기 하나씩. 그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문장을 골라 따라 써보는 식이었다.

그의 눈에 글자의 형태가 익숙해지자 기초적인 작문에 들어갔다.

라카인이 배우는 속도는 무척 빨랐다.

투이나가 잘 짚어주기도 했고, 그가 그녀의 말을 절대로 놓치지 않기도 했으니까.

이미 오래 전에 글을 다 뗀 호루니와 스카차가 뒤에서 얼쩡거리며 구경했다.

“은근히 악필이네요.”

“칼 쓰는 손이랑 펜 쓰는 손이랑 다르다더니.”

“배운 지 얼마 안 됐는데 잘 쓰는 거죠.”

투이나가 두둔했다. 라카인은 물끄러미 자기가 쓴 글씨를 내려다보았다.

힘을 주어도, 빼도 펜에 묻은 잉크는 자기 마음대로 흘러나왔다.

그래도 그가 보기엔 좋았다. 글은 입으로 부를 수 없는 말도 적을 수 있었으니까.

투이나.

처음으로 쓴 이름을 오랫동안 보던 라카인은 두 번 다시 그 이름을 잉크로 적지 않았다.

대신 펜 끝이 마르고 종이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을 때면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적어보곤 했다. 종이를 갉작이듯이.

심심해졌는지 호루니가 물었다.

“낮에는 마법사에게 안 가시나요?”

“마법사의 마을은 여기랑 시간이 반대잖아요. 몇 번 갔다가 잠 좀 자자면서 수리시가 쫓아냈어요.”

“그 마법사는 정말 마음에 안 듭니다. 루가 님에게도 너무 고압적이에요.”

“하하….”

투이나가 웃음 끝을 흐렸다.

스카차의 말대로 수리시는 방문이 잦아질수록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대체 이렇게까지 계속 반복해야 하는 이유가 뭐야?」

눈 밑에 피로가 잔뜩 낀 수리시가 노려보았다.

시드룬이 아직 옷을 벗고 있던 터라 투이나가 흠칫했지만, 역시 수리시는 변이한 그의 몸을 이미 알고 있던 모양이다.

보라색 비늘로 번쩍거리는 걸 본 수리시가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던지며 캐물었다.

「다른 시간축이 있다는 사실을 찾았으니 끝난 거잖아.」

「지금 일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시간이라 특이점을 대조 중이었다.」

시드룬이 로브를 뒤집어쓰며 대답했다.

그들은 고민 끝에 계속 투이나가 되살아나기 전의 세계로 가서 몇 가지 문제를 찾기로 했다.

첫째, 시드룬이 아르힘에게 심장을 줄 때 어떤 계약을 했는가?

둘째, 베인에게 세뇌 마법이 걸려있는가?

셋째, 수호신은 그들의 시간이 변화했음을 인지할 수 있는가?

「마지막 문제가 가장 중요합니다.」

시드룬은 떠나기 전마다 가급적이면 수호신이 나타났을 때를 떠올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투이나가 죽기 전에 수호신을 만난 건 아르힘 뿐이었는데, 매번 성소 안이었던 터라 좀처럼 시드룬의 마법으로 접근하기 어려웠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정말 치료를 받으러 갈 때만 아르힘 님을 만났었구나.’

시드룬은 아쉬워했다.

「과거에는 아르파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니 안타깝군요.」

「한 번도 너무 많아요.」

투이나가 입술을 눌렀다.

「꼭 샨의 수호신이나 다른 수호신을 봐야 할까요? 아르힘 님은 제가 되살아난 걸 바로 아셨는걸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당신의 기억이 남아있는 것처럼, 아르힘이 당신을 살렸을 때 시간이 함께 얽혔을 겁니다.」

그것도 신의 권능쯤으로 생각하고 있던 투이나는 기운이 빠졌다.

또다시 베인이 자신을 찌르고 지었던 표정이 떠오른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수리시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뭐, 그래. 네가 죽었다 살아났다니까. 일단은 넘어가지.」

시드룬까지 알았으니 투이나는 호위들과 수리시에게 자신이 회귀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호루니와 스카차가 어찌나 경악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던 라카인이 담담했기에 그들도 따라 애써 충격을 감췄다.

의외로 그들 중에서 수리시가 가장 늦게 투이나의 회귀를 받아들였다.

끝까지 그녀의 말을 미심쩍게 여겼던 것이다.

「병이 없었다가, 있었다가. 갑자기 신이 갇혀있다고 하고, 이제는 죽었다 살아나기까지 했다니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 말에 호루니가 울컥했다.

「루, 루가 님이 그러실 만한 이유가 있으셨겠죠!」

「나한테 얘기 안 하면 없는 거야.」

「미안해요. 저 혼자였다면 그냥 얘기했을 텐데.」

「…….」

툴툴거리던 수리시는 그 말에 좀 누그러진 것 같았다.

「어쨌든 쓸 만한 걸 계속 찾고 있으니까 너무 혹사시키진 마라. 신전을 털 때 실수하면 힘들어지니까.」

「…네?」

어딜 털어?

시드룬의 집에 새로 생겨난 고문서가 퍼뜩 머리를 스쳤다.

「신전에서 훔쳐온 거였어요?」

「빌렸습니다.」

「털었다는데요?」

시드룬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들은 털렸다고 느끼지 않을 겁니다.」

수리시가 맞장구를 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필 그날 마법 때문에 너무 지쳐있던 터라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그 문서들 모두 먼지가 쌓여 있었지.’

읽지도 않을 글이라면 잠깐 빌려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중에 돌려주면 되니까.

‘게다가 아무도 모른 채 쌓아만 두는 건 아까워.’

누군가는 그보다 훨씬 부족한 것마저 필요로 하는데.

턱을 받친 투이나가 라카인이 글씨를 쓰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사각사각 느린 소리가 듣기 좋았다.

한 시종이 물었다.

“쉬시는 것도 좋지만 구혼자는 더 이상 안 만나러 가시나요? 벌써 며칠 째 글씨 공부나 하시고. 가서 재밌게 노시면서 지내셔도 되잖아요.”

“안 만나요.”

투이나가 탁자에 팔을 괴고 엎드렸다.

그러다 무심코 튀어나온 말에 다들 놀란 것 같아 다시 정정했다. 

“아니, 만나긴 만나야죠. 곧 또 축제잖아요.”

라카인은 가만히 쓰던 걸 멈추고 그녀를 지켜보았다. 목소리에 의욕이 없어 보였다.

눈치를 보던 시종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별로 안 기뻐 보이십니다. 축제라면 제일 먼저 신도들한테 뛰어가시던 분이.”

“음, 두 번째 시험 때 생각보다 많이 지쳤나 봐요.”

“아무리 그러셔도요.”

일부러 밀어놓은 문제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 투이나가 슬쩍 말을 돌렸다.

“제가 안 놀아드려서 심심하세요?”

“어휴, 그럴 리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시종은 연이어 벌어지던 사건사고가 멈추자 약간 지루해보였다.

레오나가 지지를 철회했기에 왕위 논의도 멈췄고, 구혼자도 만나러 가지 않으니 감정적인 마찰을 빚어낼 일도 없었다.

‘여기서 한 발자국만 움직이기 시작하면 다시 모든 게 돌아가겠지.’

투이나가 제 팔뚝에다 대고 입술을 눌렀다.

‘돌아간 다음에도 지금처럼 웃으며 지낼 수 있을까?’

그러고 싶었다.

시종이 쾌활하게 말했다.

“축제 때 입을 옷이나 맞춰볼까요? 지난번처럼 호위 분들까지 함께요.”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간만에 밝은 이야기를 들은 투이나가 생기를 되찾았다.

“맞다. 라카인, 잠깐만 이쪽 봐줄래요?”

“예.”

영문도 모르고 라카인이 고개를 들었다. 상대가 투이나였기에 그는 아무 방비를 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녀가 손가락을 교차하듯 이마를 쓸어 올리자 너무 놀라 의자를 덜컹거리고 말았다.

그러나 당황만으로는 드러난 그의 외모를 다 가리지 못했다.

“헉……!”

주변 사람들이 모조리 탄성을 터트렸다.

“어떤가요?”

“세상에, 저런 얼굴을 지금까지 가리고 다녔단 말이에요? 낭비다!”

“제법 수준이 아니라 훌륭하잖아요?”

“정말 의외로…….”

방금 전까지 지루해하던 시종들의 눈빛이 돌변했다.

주변에서 번쩍거리는 시선보다도 이마에 닿아있는 투이나의 손에 더 신경이 쏠렸다.

라카인이 간신히 말을 빚어냈다.

“…루가 님.”

“아, 싫었나요? 얼굴을 제대로 보여야 제대로 옷을 맞춰줄 것 같아서요.”

“싫지… 않습니다.”

라카인의 귀 끝이 미미하게 붉어졌다.

싫기는커녕 이마에 올라간 그녀의 손에 감사했다.

그에게 소원이 있다면 이 순간이 또 다시 찾아오리라는 희망뿐이다.

투이나가 라카인의 얼굴을 제대로 공개한 덕분에 따사롭던 공기는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할 일을 찾아 기쁜 건지 라카인의 얼굴이 기쁜 건지 시종들이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거기 호위님들도 다 이리로 오세요!”

“예? 저희도요?”

“축제 때 같이 호위하실 거잖아요. 미리 좀 맞춰 봐요.”

시종들이 호루니와 스카차까지 끌어다 탁자에 앉혔다.

네 사람이 모여 있을 때 어떻게 보일지 재어보려는 모양이다.

투이나를 빼면 셋 다 무술을 익혀서 그런지 모아놓으면 위압적인 느낌이 들었다.

중간에 낀 투이나가 묘하게 그들의 분위기를 눌러주어 균형이 잡힐 정도였으니.

이리저리 살펴보던 시종들이 흥미롭게 눈을 빛냈다.

“네 분이서 같은 색을 입어도 괜찮겠어요.”

“루가 님을 부각시키는 것보다 그 편이 훨씬 낫겠는 걸요?”

“그래요?”

투이나는 그저 호위들과 함께 맞춘 다는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시종들이 상의했다.

“색은 어떻게 하지?”

“풍요제니까 당연히 밝은 색이 낫지 않겠어?”

“봄도 한참 전에 지났는데 너무 야단맞은 색은 쓰지 말자.”

시종들이 이럴 때 쓰는 꾸러미를 꺼냈다.

따로 보관해둔 옷을 일일이 가져오는 대신, 미리 잘라둔 천 조각으로 분위기를 가늠해보는 것이다.

호루니와 스카차는 시종들이 척척 천을 대어보는 걸 반은 난감하고 반은 재밌게 바라보았다.

원래라면 라카인에게 다가가는 걸 꺼렸을 시종들도 한 번 얼굴을 보고 나니 거리낌이 없었다.

무지개로 써도 절반은 남을 색을 다 대어보고도 시종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다 아쉽네요. 한 분이 어울리면 다른 분이 어색하고.”

“진짜 비싼 걸 가져와볼까요?”

“비싸서 천을 따로 안 잘라낸 건데 네 분이서 입으실 수 있겠어?”

“그럼 저건 어떤가요?”

투이나가 바구니 맨 바닥에 깔려있던 천을 가리켰다.

고개를 갸웃한 시종 대신 직접 천 조각을 꺼낸 그녀가 길게 네 사람의 턱 밑에 받쳐보았다.

“어울리지 않아요?”

“그렇긴 합니다만.”

“색이 축제에 쓰기엔 너무 어두운걸요.”

시종들이 난색을 표했다. 투이나가 꺼내들었던 건 까만색이었던 것이다.

“수확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입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텐데요.”

“그냥 천만 쓰면 그렇겠지만, 보세요.”

투이나가 간식으로 가져다둔 과일바구니에서 하나를 집어 천 위로 굴렸다.

통통하게 익은 과일이 동그랗게 올라가자 얼핏 보석처럼 보였다.

“그럴싸하죠?”

“으음…….”

“봄맞이 축제 때는 꽃이었잖아요. 오히려 잘 어울릴 거예요. 꽃에서 열매로. 어때요?”

투이나가 빙긋이 웃으며 설득했다.

“사제님들이 좋아하실지 모르겠네요.”

“에이, 그래도 옷은 우리 권한 아닙니까. 무엇보다 루가 님이 직접 고르신 거니까요.”

“그럼요, 그럼요.”

투이나가 적극 찬성했다.

“아예 무늬도 종려나무 열매를 쓸까요? 진짜 열매도 올리구요. 아직 축제 때까지 시간이 있으니까 수를 놓기엔 충분하잖아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종려나무 열매를 고르셨어요?”

하고 많은 열매들 중에서 무심코 그걸 골라낸 투이나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러게요.’

안온하게 일상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신실한 루가의 정체성은 그녀가 신을 잊도록 놔두지 않을 모양이다.

투이나가 빤히 열매를 내려다보았다.

“…여기가 원래 사막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그랬나 봐요.”

시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막에서만 열리는 이 열매는 한때 유일한 식량이자 구원이 되어주었다.

신이 오기 전까지는.

아르힘이 가져온 풍요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투이나는 문득 시선을 느꼈다.

앞의 소란에도 불구하고 반듯하게 앉은 라카인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눈이 마주친 순간 고개를 숙였을 텐데, 그는 주저하더니 말까지 걸었다.

“돌아오실 겁니다.”

“……고마워요.”

투이나는 조금 놀랐다. 어떻게 라카인이 지금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들려준 걸까.

지금 그녀가 신을 생각하는 걸 알아차린 것도 신기했다.

‘그만큼 오랫동안 지켜본 거구나.’

갑자기 가슴 속이 간질거렸다.

투이나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놓고 힐끗 다시 라카인을 곁눈질했다.

라카인은 시종들이 이제 어떤 열매가 어울리는지 투닥거리는 걸 물끄러미 구경하고 있었다.

‘라카인에겐 산사나무 열매가 어울릴 것 같은데.’

투이나는 아까 쓸어 넘겼던 머리카락 너머로 붉은 열매를 드리운 광경을 상상해보았다.

꼭 어울릴 만큼 아름다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얼른 라카인에게 해보라는 소리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뭐가 목에 걸린 것 같았다.

‘이상하다. 망설일 이야기도 아닌데.’

투이나는 의아해했다. 어딘가 멍했다.

잠깐 든 의문은 스카차가 어색하게 눈을 굴리며 호두를 꺼내는 바람에 곧 잊어버렸다.

“귀엽네요!”

“거, 호위님. 더 화려한 걸로 좀 골라보십시오.”

“저번부터 느꼈지만 저는 진짜 이런 데 취약합니다.”

스카차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종이 핀잔을 주었다.

“수를 놓는 건 저희가 하니까 제대로 고르기나 하셔요.”

“쟤 취향은 글러먹었으니까 차라리 다른 사람이 골라주는 게 나을걸요.”

호루니가 곯리는 목소리로 놀렸다. 스카차가 투덜거렸지만 부정하지 않았다.

투이나는 다시 소소한 일상으로 발을 들였지만, 라카인과 한 대화는 이상하게도 오래 자국을 남겼다.

‘……아르힘 님이 그리워서 그렇겠지.’

투이나는 떠올릴수록 자꾸만 가슴 한 쪽이 눌리는 기분을 그렇게 해석했다.

우연인지 투이나는 그날 밤, 신의 구출과 관련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 * *

“안된다니까!”

오늘도 시드룬의 마법으로 건너가려던 투이나가 깜짝 놀랐다.

마법진이 열리자마자 수리시의 고함이 들렸던 것이다.

“무슨 일 있어요?”

“…….”

시드룬이 한참 있다가 대답했는데, 누가 봐도 변명을 지어내는 꼴이었다.

“…그녀의 몸 상태가 나쁩니다.”

“목소리가 우렁찬데요.”

현명하게도 시드룬은 그냥 입을 다물고 있기를 택했다.

곧 쿵쿵거리며 계단을 내려온 수리시가 투이나 일행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구겼다.

“너희구나.”

“위층에서 뭘 하고 계셨어요?”

“아무것도.”

투이나의 눈썹이 휘어졌다.

누가 그런 거짓말에 속냐는 표정에 수리시가 마지못해 말을 바꿨다.

“쿠즈가 떼를 써서 그래.”

여전히 미심쩍은 말이었다. 투이나가 본 수리시는 쿠즈를 끔찍하게 아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수리시라도 아이한테 소리를 지를 사람 같진 않았는데.’

하지만 방금 수리시가 문을 닫고 나온 방에서 바즈아둡까지 나오자 의심할 이유가 줄어들었다.

“괜찮아. 안에서 잠들었어.”

“…그래.”

바즈아둡이 빙긋 웃으며 수리시의 어깨를 짚었다.

“반가워요.”

“안녕하세요. 별일 없으시죠?”

“그럼요.”

마법사 중에서도 손꼽히게 상냥한 태도를 본 호위들이 약간의 호의를 드러냈다.

수리시가 불편한 기색으로 남편의 손을 떼어냈다.

“당신은 들어가 있어. 오늘은 얘기가 길어질 거야.”

“깨어날 때까지 내가 보고 있을게.”

바즈아둡이 비스듬히 물러났다.

태도가 퉁명스럽긴 해도 그를 배웅하는 수리시의 모습엔 분명한 애정이 드러나 있었다.

투이나가 물었다.

“저분이 쓰는 마법은 뭔가요?”

“네가 절대로 당하고 싶어 하지 않을 만한 거.”

수리시가 단호하게 그녀의 팔을 잡았다.

라카인이 칼자루를 잡았으나 수리시는 그저 그녀를 질질 끌고 가기만 했다.

순순히 따라가던 투이나가 인상을 쓰고 수리시의 손등을 꼬집자 그녀가 피식 웃었다.

“말은 제대로 해야죠.”

“세뇌 마법은 아니니까 걱정 마.”

“자꾸 숨기면 궁금해져요.”

“정말로 별로 필요 없어서 그래.”

수리시가 의자에다가 투이나를 앉혔다.

“어차피 지금은 마법을 못 쓰거든.”

시드룬이 고개를 끄덕여 그 말을 보장해주었다.

바즈아둡이 시드룬의 집에 자주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었나?

얌전해진 투이나가 발끝을 모았다.

투이나가 미안해할 여유도 없이 수리시가 무릎에다 뭉텅 자료를 올려놓았다.

“이건 새로 훔쳐 온 거야.”

“말로 설명해주면 안 될까요?”

“들으면서 봐. 아르힘만큼이나 오래된 나라에서 훔쳐 온 거니까.”

찝찝해하던 투이나가 그 말에 고개를 숙였다.

종이가 아니라 길쭉한 나무판에 적힌걸 보니 정말로 오래된 물건인 게 틀림없었다.

“아르델키나의 신전에 보관되어있던 유물인데, 거기에 델키나라는 영웅의 이야기가 적혀있어.”

투이나가 빠르게 글을 읽어 내렸다.

거기에는 델키나라는 사람이 흰 산새를 타고 내려와 사람들에게 글과 사냥을 가르친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밑에도 계속 읽어. 그 아래는 매히구라는 나라에서 가져온 사라는 영웅의 일대기고, 거기에서는 수호신 아르사를 모시지.”

투이나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녀가 팔락팔락 아래쪽으로 빠르게 종이를 넘기기 시작했다.

“이게 다… 설마.”

“그래.”

수리시가 턱짓을 까딱 했다.

“수호신은 한때 다 인간이었어.”

걱정스레 지켜보던 호위들이 동시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그들이 말을 더듬었다.

“예?”

“그, 그게 무슨…….”

투이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나머지 문서들을 계속 확인했다.

모든 기록이 수호신과 인간의 이름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옛 민담과 설화에서 나타난 상징이 수호신의 상징으로 변화한 경우도 있었고, 수리시는 그런 부분마다 정확히 표시를 해 두었다.

“까마득한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신이 되었다는 건가요?”

“정확히는 몰라.”

수리시가 빠르게 말을 다닥다닥 붙였다.

“우리가 만난 수호신들은 대부분 영혼조차도 아니었어. 넌 루가니까 수호신들이 신도들의 믿음으로 유지된다는 걸 잘 알잖아.”

“그래요.”

“여기서 시드룬과 나는 한 가지 가설을 세웠어.”

“마법사와 신을 믿는 자들의 영혼은 서로 다릅니다. 일전에 신이 말했던 것처럼 우리의 영혼이 병든 자리에 마법이 깃들었다면, 신을 믿는 자들의 영혼에는 무엇이 있겠습니까?”

시드룬의 눈이 고요히 빛났다.

“그들의 영혼에도 신을 위한 자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수리시가 딱 하고 손톱으로 앞니를 두드렸다. 초조해지면 나오는 동작인 모양이었다.

“이미 꼬락서니를 보아서 알고 있겠지만 마법사가 된 자들은 하나같이 큰 충격을 받아 영혼에 문제가 생긴 자들이야.”

투이나는 이제 완전히 동작을 멈춘 채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신을 찾아달라는 부탁에 이런 이야기가 굴러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조사 끝에 다다른 내용에 놀란 투이나가 멍하니 귀를 기울였다.

수리시가 말했다.

“내가 볼 때는 신을 믿는 너희도 만만치 않게 문제가 있는 거 같지만, 어쨌든 만약 이게 정말 사실이라고 치자.”

수리시가 내는 딱, 하는 소리가 더 커졌다.

“너희 신도들은 수호신에게 영혼의 일부를 내어준 게 아닐까?”

시드룬과 수리시의 가설에는 그럴듯한 부분이 있었다.

우선 수호신의 힘은 신도들의 믿음에 따라 좌우된다는 점이 그렇다.

신도들의 숫자는 곧 영혼의 숫자를 의미하니까.

‘게다가 샨이 있잖아.’

샨은 아예 자신의 영혼에 신을 담고 다녔다.

게다가 모하세스의 왕이 죽으면 아르파 신은 다음 왕으로 옮겨간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전부 알고 있던 이야기야. 왜 지금까지 연결해 볼 생각은 못 했지?’

막연히 마법과 신의 힘이 비슷하다는 것과 영혼이 동력이 된다는 내용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달랐다.

진작 알았더라면 신전에서 교육받은 투이나가 마법사인 수리시를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

지금도 수리시가 투이나보다 더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가설이긴 해. 영혼이 쪼개서 나눠 먹는 찐빵도 아니고 그렇게 쉽게 줄 수 있을 것 같진 않아.”

“모든 수호신은 각자의 방식대로 제물을 받는다고 하면요? 아르파 신은 피를 대가로 힘을 발휘한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영혼에도 영향을 미칠까요?”

“…그럴싸한데? 다른 수호신들은 뭘 받는지 알아?”

“사고를 제물로 대체한다면 위험성을 줄인 채 영혼의 일부를 받을 수 있겠군요.”

투이나가 위화감 없이 마법사들과 떠드는 장면을 본 호위들만 어리둥절해졌다.

더군다나 대화의 주제가 선뜻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도 아니었다.

“그, 그럼 신께서 저희를 인도하는 게 아니라 저희의 영혼을 가져가신단 말이에요?”

벙찐 채 듣고 있던 호루니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그때까지 호위들의 존재를 잊고 있던 수리시가 찡그렸다.

“아, 그래. 너희도 듣고 있었지. 깜박했네. 루가만 아니었다면 평생 벙어리로 만들고 손가락을 지져놓았을 텐데.”

“협박하지 마세요.”

“어디 가서 입 잘못 놀렸다간 알지? 손으로든 발로든 떠벌렸다간, 콱!”

투이나가 말리거나 말거나 수리시는 꿋꿋하게 협박을 완성했다.

그동안 시드룬이 대신 말을 이었다.

“영혼을 가져간다는 표현은 모르겠군요. 우리는 모든 인간이 죽으면 영혼의 세계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수호신께 돌아간다고 믿습니다.”

“수호신이 영혼의 세계까지 데려다주나 보지. 꼬꼬마들 데리고 산책 나가듯이. 그게 더 정확한 거 아냐?”

“꼬꼬마라뇨.”

수리시가 종교 문제는 아무래도 좋은지 적당히 넘겨버렸다.

“아무튼 중요한 건 신도 일종의 영혼일 가능성이 있다는 거야.”

“혹은 적어도 예전에는 영혼이었겠지요.”

“그리고 여기서 신끼리는 대화가 된다는 점에 주목해 봐. 우리도 신과 대화할 수 있지 않겠어?”

수리시가 강하게 주장했다. 그녀가 워낙 의기양양한 표정이라 투이나는 다소 머쓱하게 지적했다.

“…저는 원래 대화가 됐는데요.”

“그건 아르힘이 현신할 수 있는 몸이라 가능했던 거잖아. 네가 특별하단 이야기는 좀 나중에 하지?”

“이해가 안 갑니다.”

스카차가 꿋꿋하게 끼어들었다. 다행히 수리시는 일단 들어나 보자는 태도로 팔짱을 꼈다.

“수호신은 각각의 나라에만 묶여있는 존재신데 어떻게 서로 대화를 한다는 겁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은 말을 쓰잖아.”

수리시는 신전에서 사는 놈이 이런 것도 모르냐는 얼굴로 대꾸했다.

“무슨 재주로 바다 건너, 산 너머 인간들까지 똑같은 말을 쓰겠어? 가르쳐 준 신들이 똑같은 말을 쓰고 있으니까 그렇지. 걔네끼리 꿍꿍이를 꾸미느라 말이야.”

“걔네라뇨! 꿍꿍이라뇨!”

“아무리 그래도 존칭은 갖추십시오! 신을 어찌 그리 낮춰 얘기하십니까?”

“난 신을 안 믿는데 어쩌라고?”

호위들이 수리시와 아옹다옹하는 와중에도 시드룬은 무표정하게 말을 이었다.

“수호신은 새로운 신이 탄생했을 때도 즉시 그 신의 존재를 알아차립니다.”

“맞아요…!”

투이나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나라가 생기면 아르힘이 그 나라 신의 이름을 알려주며 축하한다는 서신을 보내라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으레 있던 일이라 넘겼던 일인데 지금 들으니 이 또한 증거가 되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신들끼리 교류한다면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시드룬이 덧붙였다.

“그리고 나는 그 대화가 이뤄지는 곳이 영혼의 세계일 거라 짐작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 멀리 돌아왔지만 결국 영혼의 세계에 답이 있을 거라는 얘기야.”

수리시가 항의하는 호위들을 딱 잘라 무시하고 다시 투이나에게 말했다.

“현실에선 갇혀있을지라도 신들이 원래 영혼이었다면 영혼의 세계에 계속 한 발 걸치고 있을 거거든.”

“영혼의 세계로 가서 신을 직접 부르라는 건가요?”

“바로 그거지!”

수리시가 만족스럽게 소리쳤다. 정작 투이나는 회의적인 얼굴이었다.

수리시가 수선스럽게 말했다.

“신이면 적어도 자기 신도는 알아보겠지. 믿음을 받아 갈 때 직접 영혼에 닿아보았을 거 아냐.”

“게다가 당신은 원래도 아르힘과 대화하던 사이였으니 더욱 접촉하기 쉬울 겁니다.”

“시도해볼 가치는 있겠네요.”

고민하던 투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혼의 세계에서 아르힘을 만날 수 있다면 의외로 쉽게 돌파구를 마련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지난번에 아르파 신을 만났을 때 갇혀있는 신을 꺼내려면 다른 신이 와야 한다고 했어.’

정말로 신들이 영혼의 세계에서 교류한다면 아르힘을 도와줄 신을 하나쯤은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과하게 희망찬 전망이었지만 걸어보지 않을 수도 없었다. 투이나의 눈빛이 흐려졌다.

시드룬과 몇 번이고 죽기 전의 시간으로 돌아갔지만 뚜렷한 소득을 얻을 수 없었다.

투이나가 죽기 전인, 이미 사라진 시간으로 갈 때는 마법을 다루기 훨씬 어려워졌다.

처음엔 살해당한 기억이 워낙 강하고, 현실과 가까웠던 터라 바로 성공했지만, 그 뒤로 갈수록 적중률은 점점 떨어졌다.

어렵게 원하는 시간을 찾아도 베인이 세뇌 마법에 걸려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시드룬이 비늘을 드러내고 마법을 쓸 때는 다른 것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해서였다.

결국 투이나가 베인의 이상한 점까지 찾기 위해 관찰해야 했는데, 마법 속에서 만난 베인은 마냥 다정하여 그를 보고 있기도 힘들었다.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은 자신도 한없이 다정하고 행복했다는 사실이다.

작금의 현실과 비교하면 속에서 쓴물이 올라올 지경이다.

비록 투이나는 한 번도 시드룬에게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친 적 없었지만, 시드룬은 현실로 돌아와 숨을 고르는 그녀를 무언가 아는 것처럼 응시하곤 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그 상황을 말로 표현한 적은 없었다.

시드룬은 그저 다음에 다시 해보자는 말만 했다.

구혼자들을 처음 만났던 시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투이나를 탓하지도 않았다.

나름대로의 배려였을 것이다.

이제 시드룬의 비늘은 어깨까지 자라났다.

그걸 생각해서라도 더는 물러날 수가 없었다.

“가 봐요.”

수리시가 말한 것처럼 지금 할 수 있는 방법 중에는 최선이다.

“알겠습니다.”

죽기 전의 시간으로 가는 게 아니라 시드룬은 다른 사람들을 내보내지 않았다.

투이나는 오랜만에 옷을 입은 채 마법을 쓰는 시드룬에게 다가갔다.

지금까지 내내 그들을 지켜보기만 하던 라카인은 순간 가슴이 술렁였다.

마법사의 마을에 다녀온 다음에 유독 괜찮은 척 굴었던 투이나의 모습도 지금처럼 위태로워 보이지 않았다.

신에게 선택받은 루가가 믿음을 잃고 마법에 가까워지는 모습은 그의 뱃속으로 연결된 끈에 톱질을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

무언가 끊어지는 느낌과 함께 라카인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저도 같이 갈 수 있겠습니까.”

놀란 투이나가 그를 돌아보았다. 라카인은 조심스레 주장했다.

“지금까지 한 말이 옳다면 저 또한 아르파 님에게 영혼의 일부를 바친 셈이 됩니다.”

당장이라도 거절할 생각이었던 수리시가 대답을 늦췄다.

집중된 시선 속에서 라카인이 말을 이었다.

“만약 아르파 님께서 제 존재를 알아차린다면 가설이 증명될 것이고, 모른다 하여도 아니라는 증명이 될 것입니다.”

사리에 맞는 요구에 수리시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사례가 많을수록 좋긴 하지.”

민숭맨숭한 마법사들의 반응에 투이나만 그를 말렸다.

“일부러 그럴 필요 없어요, 라카인! 이미 여기까지 따라온 것만 해도 너무 큰 부담인걸요.”

“제가 그러고 싶습니다.”

투이나의 말문이 막혔다. 언제나 라카인에게 그 자신의 뜻대로 살라고 부탁하지 않았던가.

자신이 원한다는 데 말릴 수가 없었다.

라카인이 심지어 안심하라는 듯 미미하게 미소까지 그려 보여서 투이나는 더욱 놀라고 말았다.

수리시가 다시 확인했다.

“네가 따라간다고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는 건 알지?”

“예.”

“그래도 이 녀석은 저 땍땍거리는 애들보다 사고 칠 위험은 적겠지. 따라가 봐.”

투이나는 불안스레 라카인을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정말 가야겠어요? 저나 시드룬도 라카인이 어떻게 될지는 몰라요.”

라카인은 한참 내밀어진 손을 보다가 대답했다.

“……그래도 좋습니다.”

그가 느리게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별생각 없었던 투이나조차 극도로 조심스러운 접촉에 움찔하고 말았다.

어떻게 하찮은 동작마저 극히 대담한 행동처럼 느껴지게 하는지.

천천히 맞물리던 그의 손가락이 곧 손을 꾹 잡아 왔다.

체온이 뜨거웠다.

“루가 님이 가시는 길에는 저도 갑니다.”

라카인은 보다 확고해진 결심으로 투이나의 옆에 섰다.

투이나는 잡힌 손가락을 까딱 움직여보다가 어깨를 내렸다.

‘괜찮을 거야.’

투이나는 반대쪽 손으로 시드룬을 잡았다.

“그럼 가겠습니다. 어느 쪽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알겠어요.”

찬란한 보랏빛과 함께 시드룬이 영혼의 세계를 열었다.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는 느낌이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한없이 부드럽고 속삭이는 세계.

빠져들면 죽는 세계.

투이나는 더듬더듬 여전히 제게 잡혀있는 육체를 되새겼다.

이번에는 라카인이 있었다. 잡고 있어도 불안한 시드룬과 달리 라카인은 단단히 의지가 되어주었다.

돌아갈 현실의 이정표 같았다.

투이나는 영혼의 세계의 소리에 집중했다. 곧 주변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귓가에 사각거릴 만큼 커졌다.

“어정거리는 아기 양의 다리를 부탁하였는데.”

“또다, 또. 지겨워서 이제는 돌아가라는 말도 잊어버렸어.”

투이나는 산만하게 떠드는 목소리들을 무시하고 그토록 찾던 신을 불러보았다.

“아르힘 님?”

속삭이는 소리들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갑자기 대화 소리가 줄었다.

‘들린 건가?’

시드룬은 굳어가는 얼굴 너머로 눈짓했다. 계속하라는 뜻인 것 같았다.

영혼의 세계를 여는 마법을 쓰면 시드룬의 몸은 천천히 결정화되었다.

위험해지기 전에 반드시 돌아가야만 한다.

라카인은 처음 보는 세계의 모습에 크게 긴장했으면서도 투이나를 잡은 쪽으로는 한 점의 흔들림도 보내지 않았다.

“아르힘 님?”

“쉿.”

주변이 흔들리고 멀게 들렸던 목소리들이 성큼 가까워졌다.

“들어오지 못한다.”

“누구세요?”

“그때의 마법사가 또 찾아왔구나.”

“산 자는 들어오지 못한다.”

“산목숨이 둘이로구나.”

“아르힘 님? 제 말이 들리시나요?”

투이나가 꿋꿋하게 소리쳤다.

그동안 일렁이는 연보랏빛 세계 너머로 커다란 암흑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둥글고 커다란 공허는 다가올수록 압도적으로 주변의 소리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바깥보다 더 크고 수많은 목소리가 드글거리고 있었다.

차가운 목덜미에 누군가 습하고 뜨거운 숨을 불어넣은 것처럼 오싹 소름이 돋아났다.

“아르파 신이시여, 미천한 자가 당신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때 라카인이 목소리를 냈다. 혼자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투이나가 힘을 주었다.

라카인의 기도 소리에 맞춰 투이나는 간절히 아르힘을 불렀다.

“듣고 계신다면 부디 대답해주세요!”

“…찾아가라.”

투이나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무척 작고 미약한 소리긴 했지만 그건 아르힘의 목소리였다.

“아르힘 님이세요?”

“아이야, 너의 연인을 찾아가거라.”

투이나가 흠칫했다. 분명한 문장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캐물을 여유는 없었다.

빠각, 하고 시드룬의 몸 어딘가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와서였다.

투이나는 재빨리 고개를 뒤로 돌렸다. 곧 영혼의 세계에서 벗어난 세 사람이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루가 님!”

“다들 괜찮으십니까?”

“으…….”

투이나가 고개를 마구 휘저었다. 고막에 달라붙었던 목소리들의 여운이 강했다.

‘분명히 아르힘 님의 목소리였어.’

연인을 찾아가라니.

투이나가 어찔어찔한 정신을 되찾는 동안 수리시가 시드룬의 턱을 이리저리 돌렸다.

“반응은?”

“……성공적이었다.”

시드룬의 피부가 한층 더 유백색으로 보였다.

“괜찮아요, 시드룬? 너무 오래 있었던 거 아니죠?”

“감당할 만했습니다.”

말과는 달리 휴식이 필요한지 시드룬은 그대로 잠시 바닥에 앉아있었다.

당장이라도 그의 옷을 들추고 비늘의 상태가 악화되었나 확인해보고 싶은 걸 꾹 참아야 했다.

시드룬도 목적에만 관심이 있었다.

“무언가 들었습니까?”

“들었어요.”

투이나가 한숨을 삼켰다.

“아르힘 님이 제게 연인을 찾아가라고 말씀하셨어요.”

한순간 라카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감히 기대한 적도 없었지만 단순히 두 사람이 연인이라는 말을 듣는 것과, 신의 입으로 공언하는 건 전혀 달랐다.

심박수가 높아진 라카인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아르파 신을 말하는 건가요?”

듣고 싶지 않은 건 주군의 연인 이야기였지만, 라카인은 정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파 님의 목소리는 물론 아르힘 신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것도요?”

놀란 투이나가 되물었다.

“영혼의 세계에 갔을 때 다른 목소리들이 엄청 시끄럽지 않았어요?”

“제게는 루가 님의 목소리만 들렸습니다.”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그냥 곧이곧대로 사실을 전하는 말이라는 걸 약간 늦게 알아차린 투이나가 우물거렸다.

“…이상하네요. 시드룬도 전혀 못 들었어요?”

“그렇습니다.”

“애초에 거기까지 갈 수 있는 게 네 덕분이니까 너한테만 들려도 이상할 건 없지.”

수리시가 별로 대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느꼈는지 휙 걷어냈다.

“그보다 연인한테 가라니. 시드룬이랑 뭘 하라는 거야?”

“아, 아뇨.”

“내가 아니라 베인 크로퍼드를 말하는 거다.”

당황한 투이나가 말을 더듬자 시드룬이 대신 답했다.

무슨 일이든 무심하게 넘기는 시드룬이 자신의 연인관계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수리시가 짓궂게 휘파람을 불었다.

“호우, 루가가 이미 다른 남자랑 잘 되고 있었어? 큰일 났네, 시드룬.”

“놀리지 마세요. 애초에 구혼자로 모인 걸 알고 있었잖아요. 게다가 이젠…….”

한때 정말 심각했던 문제가 이렇게 튀어나오니 저절로 낯이 뜨거워졌다.

건수를 잡아 즐거운지 수리시가 일부러 히죽거리며 말꼬리를 올렸다.

“이젠? 아니야? 그럼 다음은 시드룬이랑 잘해볼 생각인가? 시험 순서대로 굴러가는구만?”

“수리시!”

“알았어, 알았어. 놀리는 건 나중에 하고. 그래서 아르힘이 연인을 찾아가라고 했을 때는 그 베인이라는 녀석을 말하는 게 확실해?”

“아마도요.”

투이나의 표정이 굳어가자 덩달아 라카인까지 심각해졌다. 헤어진 연인을 다시 만나러 가야 한다니.

시드룬이 느리게 무릎을 세워 앉았다.

“그가 아르힘을 가둔 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엥? 뭐야, 범인을 알고 있었어?”

“추정… 이긴 하지만요.”

“답 나왔네. 베인이라는 놈이 자길 가두고 있으니까 걔를 죽여 달라는 거지.”

“그럴 리가 없어요!”

긴가민가하던 투이나가 강하게 부정했다.

“아르힘 님은 누굴 죽여 달라고 할 만큼 잔인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거야 너희들 생각이지. 신만큼 잔인한 족속들도 없을걸.”

수리시가 잔혹하게 눈을 빛냈다.

손속이 혹독한 건 마법사도 만만치 않으면서 남 말하는 모양이 뻔뻔했다.

발끈했던 투이나가 열을 식혔다.

“…그걸 원하셨으면 연인을 죽이라고 하셨겠지요. 말씀이 어려우셔도 돌려 말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뭐, 그래. 신과 직접 대화하는 성스러운 루가의 말이니까 일단 맞다고 치자.”

수리시가 허리를 짚었다.

“그래서 만난 다음에는? 걔가 널 보자마자 갑자기 잘못을 후회하면서 신을 풀어주기라도 한대?”

“…….”

“그게 안 되니까 지금 마법사의 집까지 찾아와서 이 난리인 거잖아.”

베인이 어떻게 나올지 예상할 수 없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만남을 계속 미뤄왔으니까.

두 번째 시험이 끝나자 베인은 끊임없이 보내던 선물 공세도 멈추고 자신의 처소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쪽으로 오라는 시위 같기도 했고, 투이나처럼 더는 상대방을 보기 힘들다는 의사표시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구혼자 신분이었기에 그대로 무시해버릴 수도 없었다.

“…아르힘 님이 찾아가 보라 하신 이상 만나면 달라질 점이 있다는 거겠죠.”

무엇보다 오랜만에 직접 들은 신의 목소리였다. 소홀히 넘겨버릴 부탁이 아니었다.

“뭐, 좋아. 그건 네가 알아서 하면 되는 문제니까.”

수리시가 시드룬을 곁눈질했다.

“하지만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전달해야 할 거야.”

갑자기 투이나가 실소를 흘렸다. 수리시의 눈이 매서워졌다.

“왜 웃어?”

“아뇨, 그냥. 수리시도 마법사지만 사제님들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자신이 아르힘만 만나면 모든 대화를 기록해달라고 아우성치던 모습이 겹쳐졌다.

“누구랑 비교하는 거야, 기분 나쁘게.”

“아마 사제님들도 똑같이 말씀하실걸요.”

작게 웃은 투이나가 문득 자신이 아직도 라카인의 손을 잡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놓을 생각으로 팔을 들어 올렸는데도 라카인의 손이 그대로 따라왔다.

멋쩍어진 투이나가 말했다.

“음…. 그렇게 놓기가 싫었어요?”

“아, 아닙니다.”

라카인이 드물게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면서도 손을 놓을 생각은 안 했다.

“…….”

투이나가 고개를 갸웃하자 라카인은 마지못해 아주 천천히 잡은 손을 잡아 뺐다.

그리고는 정말로 놓기가 싫었다는 것처럼 주먹까지 쥐는 게 아닌가.

호위들이 뜨악한 표정으로 라카인을 쳐다보았다. 영락없이 ‘혹시?’ 하는 얼굴들이다.

투이나도 순간 의심할 정도였다. 누가 봐도 라카인이 자신에게 호의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설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라카인은 의심한 사람이 민망할 만큼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쉬신 뒤 크로퍼드를 만나러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야겠죠.”

다시 튀어나온 옛 연인의 이름에 투이나의 정신이 산만해졌다.

자신을 좋아하는 데 굳이 옛 연인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겠는가. 투이나는 그냥 착각일 거라 여겼다.

라카인은 평소의 군인 같은 태도로 돌아가 물러났다. 그래서 그녀를 부축하는 일은 호루니가 맡았다.

수리시가 계속 의심해보려는 듯 라카인을 지켜보았지만, 그녀도 더 수상한 점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실제로 라카인은 자신의 애정을 숨기는 게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그는 손바닥의 얼룩을 감춰야만 했다.

신전으로 돌아와 모두가 잠든 밤이 되고서야 라카인은 계속 쥐고 있던 주먹을 펼쳤다.

새까맣게 타 들어간 얼룩이 그를 마주했다.

무슨 징조일 것인가.

라카인은 불길하게 지끈거리는 자신의 검은 얼룩보다도 투이나의 몸에 똑같이 새겨졌을 얼룩을 걱정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투이나를 따라가 본 영혼의 세계는 결코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끔찍한 곳이었다.

영혼의 세계는 몸이 몸으로 있지 못하고 머리가 머리로 있지 못하였다.

천천히 보랏빛 결정으로 변해가던 마법사의 모습도 끔찍했고, 저주와도 같은 공허에다 대고 말을 거는 투이나의 모습도 견딜 수 없었다.

그런 곳에 계속 마법사와 드나들었다는 생각에 라카인은 불안해졌다.

손바닥에 난 얼룩을 감추고 투이나의 이름을 쓸 때도 느껴보지 못한 강한 불안이었다.

* * *

“정말 크로퍼드 님에게 가시는 거죠?”

아침부터 잔뜩 들뜬 시종의 목소리가 그녀를 반겼다.

그동안 휴식을 취한다며 루가의 거처에서 나가지도 않다가 첫 외출을 한다니 기뻐하는 것이다.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고 베인을 찾아간다니, 베인에게 내기를 걸었던 시종들은 당연히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침대 위에 늘어져 있던 투이나가 기운 없이 답했다.

“네, 맞아요.”

“꺄악!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니잖아요! 빨리 일어나 단장하셔야죠!”

“……제가 베인과 헤어진 건 알고 계시죠?”

시종이 잠깐 멈칫했지만 금세 기운차게 소리쳤다.

“그러니까 더 아름답게 보이셔야죠! 원래 사귀는 사람보다 헤어진 사람한테 더 밉게 보이기 싫은 거 아니겠어요?”

“맞아요, 맞아요!”

시종들이 금세 맞장구를 쳐댔다. 하는 수 없이 투이나가 침대에서 내려갔다.

어제 영혼의 세계에 다녀온 여파로 몸이 찌뿌둥했다.

‘아르힘 님을 못 뵈니 병이 점점 더 심해지네.’

얼룩은 새까맣게 타 들어간 것도 모자라 주변 피부로 도망가고 싶다는 듯 작은 실금까지 생겨나 있었다.

상태를 직접 본 시종들은 구역질이 치민다는 표정을 급하게 숨기고는 화장에 들어갔다.

하지만 회색 얼룩이었을 때와 달리 새까맣게 변한 얼룩은 분가루로도 덮기가 쉽지 않았다.

분통을 든 시종이 발을 동동 굴렀다.

“어머, 어떡하면 좋아. 잘 안 가려지네.”

“괜찮아요. 그냥 이대로 갈게요.”

투이나가 살래살래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베인을 만나면 자신의 얼굴 같은 건 얘기할 거리도 못 될 테니까.

그녀의 예상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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