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신은 기뻐하였다. '참으로 아름답구나!' 영혼을 빼앗긴 여자가 애원했다.
“왜 루가 님이 그런 걸 묻는 거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신전에 있는 자들은 비밀을 들킬까 봐, 광장에 있는 자들은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봐 걱정했다.
투이나의 말을 전하면서도 사제들은 불안하게 그녀가 있는 곳을 흘끔거렸다.
그래서 투이나는 평소보다 더 당당하게 턱을 들어 올렸다. 그들이 보고 안심할 수 있도록.
죄짓고 굶주린 사람처럼 투이나를 응시하던 베인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기회를 주신다면 제가 먼저 루가 님의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투이나가 몸을 돌렸다.
사람들에게 들려줘야 할 대답임에도 베인은 투이나를 향해서만 말했다.
“만에 하나라도 신께서 사라지는 불우한 일이 있다면, 제 모든 걸 바쳐서라도 그분께서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지킬 것입니다.”
“당신은 신을 대신하여 자신을 바치려는 건가요?”
“예. 저를 이루는 모든 것들을 드리겠습니다.”
베인의 대답이 끝나자 사람들은 만족스럽게 웅얼거렸다.
정석적인 대답이었고, 그가 가진 재산을 생각하면 흡족함을 넘어서기까지 했다.
샨은 군중이 보이는 반응에 코웃음을 치더니 다음 차례로 나섰다.
“어리석기는. 신을 잃은 자에게 또 다른 인간이 무슨 쓸모가 있겠나.”
샨은 자신만만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광장을 빼곡하게 메운 사람들을 부담스러워하긴커녕 오히려 흡족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게 오라. 나약하고 비루먹은 백성일지라도 복종한다면 다른 신을 빼앗아서라도 신을 마련해주지.”
“당신은 신을 대신하여 다른 신을 주려는 건가요?”
“그렇다. 이자들의 믿음은 가냘프기 그지없어 제대로 된 지지대를 만나지 못하면 무너지기 십상이거든.”
샨에게 이성이 있다면 당연히 이런 대답을 하고도 열화와 같은 반응을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광장에 모인 자들은 대부분 아르파를 싫어했고, 몇몇은 증오하기까지 했으니까.
그러나 샨은 어리석지 않았기에 그들이 무시할 수 없는 지점을 짚었다.
“신이 없는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기억하라. 신의 보호 없이는 그 어떤 재산과 인간이라도 남아날 수 없을 것이다. 지키지 못할 약속에 무슨 의미가 있나?”
샨의 대답에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아무리 악한 신일지언정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게다가 샨의 신은 악랄할지언정 강한 안정은 확실히 보장해주었다.
전쟁에서 늘 이기는 편이라면, 전쟁도 치러볼 만하지 않겠는가.
샨의 대답을 들은 베인은 안색이 차갑게 굳어있었다.
자연스럽게 베인의 대답을 부정한 샨의 태도도 그렇지만, 그의 말은 베인의 원래 고향인 아르피기아를 상기시켰다.
베인은 신을 잃었을 때 정말로 재산과 약속이 사라져버린 장본인이다.
신의 몰락을 몸소 겪은 사람에게 샨의 말은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비록 베인과 헤어졌더라도 그와의 기억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걱정 때문에 투이나는 지그시 이를 물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투이나의 시선을 의식한 베인은 다시 밀랍처럼 평온함을 덧씌웠다.
그리고는 금세 다시 방긋 웃어 보였다.
‘웃지 말아요. 그런 얘기를 듣고서는… 웃지 않아도 돼요.’
투이나는 서글퍼졌다.
샨은 사람들이 충분히 자신의 대답에 넘어왔다고 생각했는지 만족스럽게 자리로 되돌아갔다.
확실히 샨이 던져놓은 대답에 사람들의 반응이 엇갈리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시드룬뿐이다.
차례가 된 시드룬이 천천히 계단 쪽으로 움직였다.
이미 그가 할 말을 알고 있음에도 투이나는 몸 한구석이 떨렸다.
긴장을 감추려고 투이나가 먼저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줄 건가요?”
“…신을 잃은 사람들에게 마법을 보여주겠습니다.”
시드룬이 아래쪽을 향해서 양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러자 광장 위로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아닛?”
“저, 저게 뭐야?”
시드룬은 말끄러미 자신이 열고 있는 차원을 올려다보았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며 하늘을 온통 차지한 마법진 속의 세계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곳은 가을과 어울리지 않는 선명한 색채를 뿜어냈다.
기기묘묘한 꽃과 초목으로 가득한 세계는 진하고 식욕을 돋우는 향을 뿜어냈다.
사람들이 킁킁거리며 새로운 세계를 탐닉해보는 사이 시드룬의 말이 이어졌다.
“이곳은 신도 인간도 없습니다. 굶주리지도 늙지도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믿음은 쓸모가 없는 세상입니다.”
투이나가 알려준 대답을 살짝 각색한 말이었다.
마법사의 입에서 들린 표현은 실제보다 훨씬 무시무시하게 들렸다.
샨과 베인마저 미간을 찌푸리며 시드룬이 펼친 세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시드룬이 말했다.
“나는 신을 잃은 인간에게 오로지 쓰이기 위한 세계를 주겠습니다.”
사람들은 매혹당했다.
아직 신을 가졌음에도 그들은 마법으로 만든 세계를 잡아보려 허우적거렸다.
머리 위로 팔을 뻗은 자가 수없이 많았다.
대답을 마친 시드룬은 아무런 감흥 없이 마법진을 다시 닫았다.
갑자기 사라진 세계에 어느 때보다도 큰 탄식이 터져 나왔다.
지금 신이 갇혀있다고 털어놓아야 겨우 비슷한 반응이 나올까 싶을 만큼 강한 반응이었다.
“세 사람의 대답을 모두 들었습니다.”
투이나는 시고 떫은 레몬을 삼킨 사람처럼 입술을 물었다.
“여러분이 가장 바라는 결과는 무엇인가요?”
사제들이 숫자를 세기도 전에 동시다발적으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시드룬!”
“마법사입니다!”
“아까 그거 다시 한 번만 보여주세요!”
“지금 데려가 줄 순 없습니까?”
“시드룬!”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베인과 샨을 외치는 걸 제외하면, 시드룬을 부르는 소리로 광장이 떠나갈 것 같았다.
심지어 사제들이 막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직접 계단을 올라오려고 했다.
여전히 계단 위에 우뚝 서 있는 시드룬이 그들에게 손짓하는 것처럼.
그만큼 고난과 걱정이 사라진 세계는 달콤했다.
심지어 눈으로 직접 보기까지 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결과가 나온 것 같군요.”
시드룬이 딱히 기쁘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샨과 베인의 얼굴은 부정할 수 없는 패배감으로 일그러져있었다.
거기에는 자세히 파악하고 싶지 않은 감정의 잔재들이 남아있었다.
‘예상했잖아.’
투이나는 찬바람에 묻어 다가오는 시드룬을 응시했다. 그에게서 시든 가을의 냄새가 났다.
투이나는 혹시라도 결과를 부정할 사람이 있나 조금 더 기다렸다.
그러나 압도적인 결과에 아무도 반발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투이나는 승리를 선언했다.
“이의가 없으니 두 번째 시험의 승자는 시드룬으로 결정하겠습니다.”
그 어떤 축하도, 박수 소리도 없었다. 시드룬이 가져간 승리는 그녀가 직접 건네준 것이다.
그러니 뒤에 이어질 일도 역시 그녀가 감당할 몫이겠지.
* * *
“왕이 되겠습니다.”
투이나는 신전 안으로 내려오자마자 말했다.
아직 이번 시험의 여파를 수습하지도 못한 사제들의 낯빛이 한층 당혹스러워졌다.
“루가 님.”
“지금 하기엔 적절치 못한 이야기 같습니다.”
“적절한 때가 언제죠?”
투이나는 부산스럽게 오가는 시종들 속에서 되물었다.
시드룬이 보여줬던 마법의 충격이 차차 가시고, 두 번째 시험의 승자라는 사실이 새로운 물결이 되어 광장을 덮치고 있었다.
또 한 번 내기의 판세가 뒤엎어졌다는 사실에 군중들이 흥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험 결과를 파악하러 간 사제들과 무사제들은 임무를 바꿔 사람들을 흩어놓느라 바빴다.
아마 저녁쯤 되면 여기저기서 오늘 있었던 일을 떠드는 술판이 벌어지겠지.
투이나는 여전히 온갖 장신구를 걸친 채 서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풍기던 고고함은 사라진 뒤였다.
피곤과 실망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루가의 모습에 사제들은 한층 안절부절못했다.
한 사제가 용기를 끌어내어 대들었다.
“지금 루가 님이 무슨 짓을 하신 건지 아십니까?”
“저는 시험을 냈죠.”
투이나가 대답했다. 그녀의 어조가 씁쓸했다.
시드룬이 승리하지 않았다면 왕이 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드룬에게 환호했다.
“이제 대답을 들었으니 차라리 왕이 되는 게 처리하기 쉬워 보여서요.”
대들었던 사제가 입을 꽉 다물었다.
정말로 사람들이 신앙심으로 충만했다면 샨에게 승리를 줬어야 한다.
그걸 샨도 알았다.
“루가!”
성난 기세로 쫓아내려온 샨이 투이나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그는 만지기만 해도 데일 듯한 분노를 뿜어내고 있었다.
“알고 있었던 거지!”
“…무슨 말이죠?”
“그 마법사가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었잖나!”
샨이 소리쳤다. 투이나는 놀랐다.
‘증거도 없는데 어떻게 안 거지?’
시퍼런 분노로 확장된 동공을 보니 논리적인 의심은 아니었다. 아마도 아르파 신의 본능이리라.
투이나는 불에 달군 집게로 지지고 있는 듯한 어깨를 애써 무시했다.
“샨에게는 답이 아니라 승리가 중요한 것 아니던가요?”
“이건 나를 위한 문제였다. 첫 번째 시험처럼 또다시 속임수로 가져가게 둘 것 같은가!”
“루가 님에게서 떨어지십시오.”
고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녀의 고통을 알아차린 라카인이 다가와 있었다.
투이나는 그를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눈이 돌아간 샨이 라카인을 후려쳤다.
뻑 하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라카인!”
“그것들이 단순히 말만으로는 현혹되지 않을 거란 걸 알았던 거야!”
샨이 고함을 질렀다. 그는 피를 쏟아내는 라카인에게 손가락질했다.
“저 멍청한 것이 감히 대드는 것만 보아도 알겠어! 그대도 알았겠지! 어리석은 것들은 그저 좋아 보이기만 하면 넘어가리라는 걸!”
“아니에요!”
“보이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도 모르고 환호하는 꼴이라니!”
샨이 분통을 터트렸다.
“그 얼빠진 마법사 놈이 직접 마법을 보여 사람들을 꼬여낼 생각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분명히 그대가 알려준 것이겠지!”
참다못한 투이나가 손등으로 그의 뺨을 갈겼다. 헉 하는 숨 막힌 신음과 함께 샨의 눈이 희번득 돌았다.
“작작 하세요! 이 시험 결과를 보고도 부끄럽지도 않아요?”
지금까지 계속 그녀를 참담하게 만들었던 감정들이 분노와 섞여 튀어나왔다.
“당신이 그렇게 욕하는 사람들에게 계속 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었어요? 사람들이 신에게서 위안을 찾지 못하는 건 그들의 실패가 아니라 우리가 실패했다는 거라구요!”
투이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터져 나왔다.
“우리?”
“그래요. 신께서 다하지 못한 말을 전하라고 부른 사람들 말이에요.”
투이나는 이미 사제들과 사람들의 모습에서 어렴풋이 알아차리고 말았다.
그들에게는 사실 신이 필요하지 않은 게 아닐까.
두 번째 시험은 그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투이나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눌렀다.
수호신은 그저 지켜주면 그만인 존재일까?
투이나는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지금 그녀로선 설명할 수 없지만…….
투이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 가세요. 라카인이 저 대신 맞은 거 알고 있습니다.”
“…….”
샨은 침묵했다.
라카인이 나서지 않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러했을 것이기에.
“…이럴 거면 나를 찾아오지 말았어야지.”
샨의 어금니 사이로 말이 갈려 나왔다.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배신감이 스민 음성이었다.
혹시 누가 듣는다면 그가 그녀에게 다른 마음을 품었다고 오해라도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짐작을 부정하듯 샨이 추호의 여지도 없을 만큼 차갑게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준 것이 그리도 가벼워 보이던가?”
감정을 절제했는데도 샨은 아까보다 훨씬 멀게 느껴졌다.
투이나는 뱃속을 긁힌 듯이 따갑게 느껴졌다.
무수한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를 위해 금기를 깼다. 그것도 심지어 아르힘을 위해서.
고맙다는 표현이 적절하겠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라카인의 얼굴이 시퍼렇게 멍이 든 걸 넘어서서 검게 부풀고 있었다.
투이나는 이제 샨에게 아무런 거리낌도 느끼지 못할 것 같았다.
거대하게 서 있는 샨의 존재감을 완전히 무시해버린 투이나가 라카인 앞에 무릎 꿇었다.
“고개 들 수 있겠어요?”
투이나가 만지기도 아파 보이는 라카인의 턱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퉁퉁 부은 얼굴로 라카인이 끄덕였다.
그제야 마법에서 깨어난 것처럼 사제들이 눈치를 보았다.
샨은 잠깐이나마 잠잠해진 게 거짓말 같았다.
그의 머리털에 직접 불을 붙여 타오른다고 해도 지금보다는 덜 화나 보였을 것이다.
도저히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나 라카인을 붙잡고 있는 투이나의 압박도 덩달아 강해지고 있었다.
환자를 두고 당장 오지 않고 뭘 하냐는 무언의 질책과 다가가기만 해도 죽여 버릴 것 같은 분노 사이에서 그나마 대담한 자가 나섰다.
원래 걸어와야 할 거리의 세 배를 돌아온 사제가 상처를 확인했다.
“코뼈가 부러졌군요. 이대로 치유하면 뒤틀린 채로 굳을 테니 다시 맞춰야겠습니다.”
“혼자서 할 수 있나요?”
“여기서는 조금… 힘듭니다.”
대답하면서도 사제가 계속 눈치를 보았다.
어떻게 투이나는 저런 기세를 뿜어내는 샨을 뒤에 두고도 태연한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 제대로 된 치료는 시작하지도 않았는데도 식은땀을 흘리는 사제를 본 투이나가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샨의 시선이 화살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되받는 투이나의 시선은 비를 피하듯 그 사이를 지나 찌르듯이 올라갔다.
샨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정말로 그녀에게 그가 한 일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던 모양이다.
그럼 대체 무엇을 하란 말인가.
목에 커다란 것이 걸린 것처럼 샨은 속을 게워내고 싶었다. 토해내면 시원해지겠지만…….
이제는 토해낸 감정을 대신 맞아줄 자가 없었다.
분풀이 삼아 그가 기둥을 후려치자 신전을 뒤흔드는 소리와 함께 금이 갔다.
사제들이 기겁했으나 투이나는 라카인의 상처에 완전히 정신이 팔려있었다.
부어오른 코 밑으로 손가락을 가져간 투이나가 계속 호흡을 확인했다.
너무 부어서 숨쉬기도 어려워 보였다.
라카인은 가까이에 선 투이나를 그저 보고, 또 보고. 그저 보려고만 해도 숨이 가빴다.
샨이 사라진 뒤에야 긴장이 풀린 사제가 라카인을 뒤쪽 기둥에 기대도록 했다.
“아프더라도 잠깐 참으십시오.”
치료에 방해되지 않도록 투이나가 라카인의 앞머리를 걷어 올렸다. 곧 뚜두득 하는 소리가 들렸다.
투이나는 아까도 멀쩡했던 간담이 서늘해졌다. 라카인은 신음 하나 흘리지 않았다.
촉감이 꽤나 끔찍했는지 뼈를 맞추자마자 사제가 재빨리 기도문을 외웠다.
곧 흰 빛과 함께 라카인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
치료하던 사제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원래대로 돌아온 라카인의 얼굴이 너무도 또렷하게 그를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크고 시원한 눈매에 잠깐 시선을 빼앗긴 사제가 뒤늦게 얼굴을 붉히며 치료를 끝냈다.
투이나는 라카인이 완전히 멀쩡해진 걸 확인하고서야 다시 앞머리를 내려주었다.
‘아르힘 님, 감사합니다.’
여전히 건재한 힘에 투이나가 거듭 기도를 올렸다. 애초에 이런 일은 없어야 했는데.
‘정말 다행이에요.’
그 말을 하려고 어렵게 입을 벌렸던 투이나는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미, 미안해요…….”
낫고 나서야 힘이 풀린 그녀가 주저앉았다. 불가항력이었다.
라카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젖혀져 있던 허리를 세웠다.
“…울지 마십시오.”
라카인의 말에 투이나는 오히려 통곡했다. 내장까지 튀어나올 듯한 울음소리였다.
당황한 라카인이 망설이다가 자신의 어깨 한 귀퉁이를 내주었다.
당장 매달려오는 투이나는 그것을 제대로 의식하지도 못했다.
서럽게 우는 사람이 붙들 게 필요한 건 당연하다.
라카인은 감각을 잊으려고 애썼다.
될 수 있다면 석상처럼 굳어 그녀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다.
그동안 그녀는 죄책감과 실망이 뒤범벅된 진탕에 빠져 있었다.
왜 나아가려고 할 때마다 넘어지는 일이 이렇게나 많을까?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전생이 훨씬 무사하고 편안했다.
‘그래도 일어나야 해.’
그녀를 통곡으로 끌고 온 과거의 일들이 여전히 길게 패인 자국으로 남아있지만.
이제 거기에 씨를 뿌리면 되는 거 아닌가.
코와 눈시울이 새빨개진 투이나가 문득 라카인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고통과 고난에도 끈질기게 따라오고 집요하게 살려낸 한 사람을.
열 마디 말보다 그 한 사람이 자신의 여정을 더 설명하는 것 같다.
상처가 다 나았는데도 투이나가 얼굴을 건드려오자 라카인은 내심 당황했다.
그러나 가만가만 만져오는 손길이 심장을 저릿하게 하는 것과 별개로 너무도 절실해 보였기에…….
투이나는 그가 완전히 멀쩡하다는 걸 두 손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듯했다.
라카인은 치솟는 감정을 꾹 눌렀다.
그녀를 사랑했다. 여전히. 걷잡을 수도 없다.
그렇기에 라카인은 감히 먼저 투이나의 손을 떼어냈다.
동그랗게 떠지는 그녀의 눈을 보며 라카인이 말했다.
“…루가 님. 왕이 되러 가셔야지요.”
놀란 투이나가 우는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비로소 라카인도 옅은 미소를 그릴 수 있었다.
이만하면 되었다. 정말로 이만큼이나 당신에게 가까워졌기에 저는 행복합니다.
* * *
사제들은 일단 왕이 되겠다는 대답 자체는 환영했다.
두 번째 시험에서 몰린 사람들을 죄다 쫓아낸 뒤에도 그랬다.
“하지만 좀 더 편한 길이 있으셨잖습니까.”
면담을 시작하자마자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 배어 나왔다.
투이나는 얌전히 앉아 그들의 질책을 달게 받았다.
“문제가 바뀌었죠?”
“다들 내기에 정신이 팔려있으니 왕위 얘기를 제대로 들을지조차 의문입니다.”
“의회에서도 이쪽의 움직임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을 테고요.”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사제들이 눈을 굴렸다. 이미 내용을 짐작하고 있던 투이나가 물었다.
“크로포드 쪽에서 협조를 철회했나요?”
“예.”
투이나가 한숨을 삼켰다.
‘그래. 그쪽에서 먼저 제안했으니 빼놓고는 이야기가 안 되겠지.’
두 번째 시험도 베인에게 유리하게 끝난 게 아니라 여전히 껄끄러웠다.
투이나가 쥐고 있던 펜대를 만지작거렸다.
“그쪽은 제가 직접 얘기해볼게요.”
“실은 아까 전부터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제가 냉큼 말을 받았다.
“벌써요?”
“꽤 오래전부터 루가 님이 돌아오시는 대로 만나겠다는 요청을 넣었습니다.”
알 만했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선물을 들려 보내는데 바깥에서 기다리는 일 정도야 대수겠는가.
투이나가 그를 꺼려하는 것과 반대로 사제들은 은근히 지금 만나러 갔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쳤다.
어쩐지 중요한 얘기들을 먼저 꺼내더라니. 일찍부터 그녀를 보내버릴 속셈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계속 피해 다닐 수도 없잖아. 이미 시험 때도 봤고.’
애잔해진 투이나가 승낙했다.
“알겠어요. 지금 만나러 갈게요.”
“옆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시종이 문을 열었다.
“후우….”
베인을 볼 마음의 준비를 하던 투이나가 걸음을 멈췄다.
방 안에서 기리고 있던 사람은 베인이 아니라 레오나였다.
방으로 들어오는 투이나를 본 그녀가 살짝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루가 님.”
“절 기다리는 사람이 레오나였어요?”
“실망하신 건 아니죠?”
레오나가 높은 목소리로 답했다. 쾌활한 말투와는 달리 공기에는 긴장이 흘렀다.
기다리던 사람이 베인이 아니라고 안심할 처지가 아니었다. 투이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많이 실망했군요, 레오나.”
“역시 루가 님은 제 마음을 너무 잘 알고 계셔요.”
레오나가 나긋나긋한 동작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투이나가 자리에 앉자마자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화려하게 차는 모습이 볼만하긴 하더군요. 왜 시험을 세 번이나 치르시나 했는데.”
투이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했다.
게다가 레오나는 이런 얘기를 하면서도 여전히 싱글싱글 웃는 얼굴이었다.
“많이 놀랐죠.”
“아주 놀라진 않았습니다. 동생이 차였다는 소문이 워낙 파다해서 말이에요. 게다가 두 번째 시험에서 어떻게 마법사가 홀렸는지 자다가도 알겠더군요.”
“…다른 일로 절 찾았다 들었어요.”
“왕위 말씀이세요? 물론 그 얘기도 해야지요. 하지만 그 제안이 베인과의 관계를 전제로 한 것임을 루가 님도 잘 아시잖아요.”
레오나는 다른 주제로 돌리려는 투이나의 시도를 차단했다.
빨리 원하는 부분을 도마 위로 올려놓으라는 식이다.
졸지에 전 연인의 가족과 이별한 얘기를 하게 생겼다.
어떻게 해도 거북한 주제였다.
“이유를 설명하고자 나온 자리가 아닙니다.”
“이유는 궁금하지 않습니다, 루가 님. 굳이 연애할 필요도 없으신걸요.”
“네?”
“그저 결혼만 베인과 해주시면 됩니다.”
투이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레오나가 태연하게 턱을 괴었다.
“베인이 이런 얘기를 했다는 걸 알면 저를 죽이려고 들 테지만, 결혼을 꼭 마음에 드는 사람과 할 필요는 없지요.”
“잠, 잠깐만요. 레오나.”
“어떤 곳에선 아예 후궁은 다섯부터 시작한다죠? 루가 님도 격을 맞추시면 되겠군요.”
“레오나!”
투이나는 대경실색했다.
“지금 제게 정부를 두라는 말씀이세요?”
“원하시면 후보도 적어드릴 수 있습니다. 당장 뒤쪽에도 한 명 있지 않나요?”
레오나가 턱짓으로 라카인을 가리키는 바람에 투이나가 기겁했다.
덩달아 불똥이 튄 라카인도 심장이 떨어져 나갈 뻔했다.
멀쩡한 남녀의 속을 가볍게 뒤집어놓은 레오나가 능청맞게 미소 지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싫으시면 베인과 다시 만나겠다는 뜻인가요? 어머나. 베인이 좋아하겠군요.”
투이나의 미간이 딱딱하게 굳었다. 비로소 레오나가 진지하게 말했다.
“루가 님. 우리의 결속을 결혼이 아닌 것으로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레오나의 재산과 의회에서의 영향력은 보증되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건 다른 의원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힘이었다.
크로퍼드는 다른 의원들과 확실히 선을 그으려는 것이다. 조력자가 아니라 왕의 이름으로.
그리고 결혼만큼 확실하게 왕의 권위를 빌려다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구혼자 신분만으로도 신전에서 크로퍼드 상단이 활개를 칠 명분이 되어주었다.
그러니 왕비가 된다면?
‘레오나도 내가 베인과 결혼하지 않고 왕이 된 상황을 가정해 본 거야.’
투이나가 크로퍼드 상단을 제외할 가능성을 고려해보고도 이 자리에 나온 것처럼.
똑같이 계산을 끝낸 레오나가 그래도 결혼을 종용한다면 말이 통할 가능성은 적었다.
“그러니 어떻게 하실지 아실 테지요.”
“……제가 이제라도 다른 의원에게 협조를 구할 수도 있지 않나요?”
“떠보시는 거예요? 짓궂으셔라. 이미 신전에 들어온 병력들과 설득하는 과정을 고려하시면 제 제안이 제일 낫습니다. 그치들과는 왕이라는 직위부터 시작하셔야 될걸요.”
하긴 그랬다. 의원들은 그들의 머리 위에 새로운 권력자를 원하지 않을 게 틀림없었으니까.
의원 자리를 차지하고도 왕을 원하는 레오나만이 베인이라는 연결고리가 있으니 예외였다.
‘예외.’
갑자기 투이나의 머릿속을 어떤 생각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투이나가 손가락 끝으로 입술을 눌렀다.
그녀가 골몰할 사이 레오나는 벌써 끝난 거래처럼 굴었다.
“이미 루가 님께서 왕위를 승낙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뻐할 마음으로 왔습니다. 결혼 선물로 큰 걸 받으셔야지요.”
말 한마디마다 유리한 제안이라는 자신감이 물씬 배어 나왔다.
실제로 투이나가 줄 수 있는 게 없기에 그녀가 우위에 있기도 했다.
그러나 투이나는 무심코 떠오른 생각을 잡아당겨 보았다.
“처음부터 이럴 목적으로 베인을 들여보냈나요?”
투이나의 입술에서 손가락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내내 태연하던 레오나의 입매가 떨렸다.
지금까지 완벽하게 그리고 있던 미소라 더욱 눈에 띄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빠르게 변화하던 레오나의 표정이 더더욱 이상해졌다.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루가 님. 설마. …그 애의 마음은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레오나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커졌다. 그녀도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세상에, 제발 그 이유로 둘이 헤어진 건 아니라고 말씀해주세요! 맙소사.”
레오나가 서성거렸다. 예상보다 과격한 반응에 오히려 머리가 차가워졌다.
“앉으세요, 레오나.”
“루가 님, 어떤 오해를 하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그 애는 진심으로 신전에 들어왔습니다. 루가 님만을 그리면서요!”
레오나의 말투가 격해졌다.
강하게 나오는 모습에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의심이 피어났다.
불온한 분위기를 눈치챈 레오나가 다시 의자에 앉았지만, 아까의 여유롭던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다.
“좋아요. 제가 좀 과하게 밀어붙였다는 건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결코 구혼자를 들이는 과정에 개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베인의 선택이었어요.”
“하지만 결혼을 원했잖아요.”
“왕위를 담보로 했으니 제안자로서 당연한 요구였을 뿐입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레오나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기회가 있으니 잡는 건 상인의 도리입니다. 게다가 루가 님께 왕위를 제안하기 위해서 준비한 병력에 큰 투자 비용을 들였으니까요.”
“어떻게 확신도 없이 그런 준비를 할 수가 있죠?”
레오나가 깍지를 낀 손으로 턱을 눌렀다.
그녀가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망설임을 눌렀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당연히 루가 님이 베인과 사랑에 빠질 줄 알았습니다.”
레오나는 너무도 강한 확신을 담아 말했다. 투이나가 묻기도 전에 레오나가 말을 던졌다.
“베인이 신전에 들어오기 전부터 루가 님을 사랑하고 있던 걸 정녕 모르셨나요?”
투이나의 숨이 멎었다.
방금 들은 소리가 이명이 되어 퍼지는 모습을 파문으로 그린다면 투이나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투이나가 말을 더듬었다.
“그건… 말도 안 돼요.”
만나지도 못한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가 있나.
투이나가 루가로서 사람들 앞에 나선 것도 몇 번 되지 않았다.
운 좋게 먼발치에서 보았다고 첫눈에 사랑에 빠질 수는 없다.
‘……정말?’
처음 만날 때부터 애정을 숨기지 않던 베인의 모습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투이나의 반응을 본 레오나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레오나의 목소리에 다시 힘이 실렸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꼭 베인과 다시 얘기를 해 보세요.”
레오나의 눈동자가 번득였다.
“그러셔야 합니다.”
“…….”
투이나는 그녀의 권고를 거절할 수 없었다.
“…이만 일어나야겠어요. 오늘 했던 제안은…… 고려해보겠습니다.”
머리에 드리운 두건이 유난히도 무겁게 느껴졌다. 마음이 답답한 탓이다.
참담한 표정으로 일어나려는 레오나에게 투이나가 손을 저어 보였다.
“인사하려고 일어나지 마세요. 우리 둘 다 생각할 게 많잖아요.”
“……배려 감사드립니다.”
쓴웃음을 지은 레오나가 이마를 눌렀다.
투이나가 방을 떠난 다음에야 그녀가 탁자를 쿵 내리쳤다.
“젠장, 베인! 대체 신전에서 뭘 하고 다닌 거야?”
* * *
방을 나오고서도 투이나는 뭐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따라 나온 호루니가 불안하게 그녀를 흘깃거렸다.
“괜찮으세요, 루가 님?”
“아, 네. 그럼요. 생각이 많아져서요.”
투이나가 걷는 게 불안해 보였는지 라카인이 거리를 좁혔다. 다행히 그녀는 휘청거리지 않았다.
한참을 멍하게 걷던 투이나가 중얼거렸다.
“레오나는 거짓말을 했어요.”
“예?”
“기회를 잡았기에 왕위를 제안했다는 말이요. 사제님들을 설득한 것과 병력을 준비한 게 시간이 안 맞아요.”
“그럼 구혼자를 모집하기 전부터 왕이 될 야심을 가졌단 말씀이세요?”
“아마 제가 루가가 되기 전부터 준비했을걸요.”
투이나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말에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경악했다.
시종 하나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배은망덕한…! 망한 나라의 백성을 데려다 의원까지 시켜주지 않았습니까!”
내내 멍하던 투이나가 그 말에는 찡그렸다.
“무슨 소리예요. 레오나는 아르힘 님의 백성이고, 정당하게 시험을 통과했어요.”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이니 아르힘 님께 다르게 충성할 수 있잖아요. 정말 그른 마음이었다면 아르힘 님이 레오나를 용서하셨겠어요?”
“…….”
의장에게 공개적으로 처벌이 내렸던 걸 떠올린 시종이 입을 다물었다.
이 문제는 이미 라카인과 오랫동안 겪어왔던 것이기에 담담했다.
투이나가 화제를 돌렸다.
“제가 궁금한 건 따로 있어요. 그녀가 거짓말을 과연 한 번만 했을까요?”
투이나의 말에 모두가 의아해했다.
걷는 것까지 멈춘 그녀가 갑자기 호루니와 라카인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두 사람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세뇌 마법을 정말 베인이 썼는지 의심스러워졌어요.”
라카인과 호루니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그 말씀은…!”
저도 모르게 말하려던 호루니가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가 들릴락말락 한 소리로 속삭였다.
“레오나 크로포드가 세뇌 마법을 썼다는 말씀이세요?”
“어쩌면요.”
레오나가 세뇌 마법을 썼다면 베인에게 똑같은 마법을 쓰게 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마법사의 육체가 담긴 물건을 전달해주기만 하면 되니까.
게다가 베인이 첫눈에 반해서 신전에 들어왔다는 소리보다는 그게 더 논리적이다.
‘맙소사.’
투이나는 정신이 어지러웠다.
‘내가 이렇게 사랑을 안 믿는 사람이었어?’
사실 첫눈에 운명 같은 사랑을 느끼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었다.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정말 그랬다면 왜 내게 말하지 않은 거예요?’
죽기 전에도 되살아난 다음에도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워낙 낭만적인 걸 좋아하는 사람이니 실수로라도 말했을 법한데.
남의 입으로 들으니 더더욱 이상했다.
차라리 세뇌 마법에 걸렸다는 편이 납득하기 쉬울 만큼.
‘지금 물어봐도 대답을 믿지 못할 거야. 세뇌 마법의 존재를 알았으니까.’
골머리를 앓던 투이나가 방향을 바꿨다.
“스카차는 계속 방에 있죠?”
“예? 예에.”
“데려가야겠네요.”
투이나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뜻을 알아차린 라카인이 운반을 맡았다. 그가 스카차를 보자마자 들쳐 멘 것이다.
“으아아, 루가 님?”
졸지에 라카인의 어깨에 들린 스카차가 버둥거렸다.
“왜, 왜 이러십니까?”
“저랑 좋은 곳 갈래요?”
투이나가 스카차의 머리를 붙들었다. 영문을 모르던 스카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여기가 좋은 곳이지요! 신전이요!”
투이나는 주의 깊게 스카차의 말을 들었지만 진지하게 듣진 않았다.
그의 반응을 살핀 투이나가 확신했다.
‘역시 아직도 세뇌가 걸려 있는 게 틀림없어.’
스카차가 고지식하긴 해도 이런 황당한 상황에서까지 신전 제일을 외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인 투이나가 해괴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시종들에게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제 호위들과 긴밀한 대화를 나눠야 할 것 같아요. 자리 좀 피해주시겠어요?”
“하지만 바로 다음 일정이….”
“대신 여러분이 오늘 얘기를 들었다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요.”
“…저희가 말하지 않는 게 아니라요?”
눈이 동그래진 시종이 되물었다. 투이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짐작한 내용을 사제님들이 모를 리가 없죠. 크로포드 쪽이 더 경계가 심할 거예요.”
비밀이 새어나갈 것 같으면 세뇌 마법을 써버릴 것이다.
주변을 그런 마법에 걸린 사람들로 채우고 싶지 않았다.
“비밀을 지켜주세요. 지금은 서로를 지켜야 할 때니까요.”
“알… 겠습니다.”
시종들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창백한 낯빛으로 수긍했다.
그녀의 말이 생각보다 으스스하게 들린 모양이다.
‘차라리 잘 됐어. 경계하는 편이 마법을 피하긴 쉽겠지.’
투이나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빛을 조심하세요.”
마법은 빛과 함께 오니까.
문을 닫은 그녀가 돌아섰다. 스카차는 여전히 버둥거리고 있었다.
“루가 님, 전, 도무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같이 가려는 거예요.”
문을 닫은 투이나가 두건을 벗었다.
비로소 머리가 개운해졌다.
“신전을 떠나는 게 무섭나요?”
스카차가 움찔했다. 투이나가 재차 물었다.
“저를 찾아 아르케데프까지 쫓아왔던 적이 있으면서요?”
“그때는…!”
반박하려던 스카차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세뇌에서 풀리자마자 투이나를 찾아온 호루니가 짓던 표정과 비슷했다.
스카차가 아리송해진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그때는… 그때…지요. 루가 님.”
“세상에. 저도 저랬나요?”
지켜보고 있던 호루니가 대신 수치스러워했다.
투이나가 빨개진 얼굴을 파묻은 그녀를 도닥여주었다.
“지금부터 시험의 대가를 받으러 마법사의 마을에 갈 거예요. 가는 김에 스카차의 마법도 풀어 봐요.”
“루가 님! 루가 님은 안전한 곳에 계셔야 합니다!”
스카차의 반응은 강경했다. 살짝 기대했던 투이나가 아쉬워했다.
‘호루니처럼 저절로 풀리지는 않네.’
그래도 마법사에게 데려가 보이면 무슨 수가 나오겠지.
투이나는 라카인이 스카차를 잘 잡고 있는 걸 확인하고는 시드룬을 불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드룬을 따라 마법진을 넘어가 보니 수리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와.”
수리시는 들고 있던 고문서를 내려놓았다.
텅 비어 있던 시드룬의 집안에는 다시 자료가 쌓여있었다. 처음 있던 양에 비하면 한 줌 정도로 적었지만.
살짝 훑어보니 모두 신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안녕하세요?”
“안녕 못 하겠네. 쟤는 상태가 왜 저래?”
수리시가 스카차를 가리켰다. 볼썽사납게 업혀 들어온 스카차가 버둥거렸다.
투이나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세뇌 마법에 걸린 것 같아요.”
“저 말씀이십니까?”
덩달아 스카차까지 깜짝 놀랐다. 수리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걸 왜 데려왔어? 이젠 다른 사람한테 들키는 게 신경도 안 쓰이나 보지?”
“마법사 분들을 만나볼수록 정말 위험한 분은 몇 안 되던걸요. 수리시만 괜찮으면 괜찮아요.”
“말은 잘하네.”
수리시가 스카차 쪽으로 다가갔다.
“그래서. 어떻게 해줘?”
“마법을 풀어줄 수 있나요?”
“가능하지. 그런데 오늘은 시드룬한테 볼 일 있는 거 아니었어?”
“잠깐이면 돼요.”
척척 주고받는 말에 당황한 건 스카차뿐이었다.
“루가 님, 세뇌 마법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괜찮아. 나도 겪었어.”
옆에서 호루니가 말했다. 그 말에 오히려 스카차의 눈알만 더 무섭게 돌아갔다.
아직까지도 신전에 미련을 갖던 스카차는 마법진을 닫는 시드룬을 보고 좌절했다.
게다가 무시무시한 마법사인 수리시가 그를 향해 마수를 펼치기까지 했으니.
겁에 질린 스카차가 소리쳤다.
“루, 루가 님! 신전으로 돌아가시죠!”
“가만 있어 봐.”
수리시가 스카차의 머리를 고정시켰다.
“정신 못 차리는 덴 이게 최고지.”
짝! 짝!
그녀가 시원하게 스카차의 뺨을 갈겼다. 깜짝 놀란 투이나가 말렸다.
“수리시? 그건 저도 할 수 있는데요?”
“마력을 담아 때리는 거랑은 달라.”
“…정말요?”
“아마도.”
수리시가 찜찜한 뒷말을 남겼다. 졸지에 따귀를 맞은 스카차가 억울해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맞기 싫으면 혼자 돌아가던가.”
“뭐라고요!”
스카차가 격분했다.
“내 의무는 루가 님을 지키는 겁니다! 절대로 안 돌아갑니다!”
“아까부터 신전에 가야 한다며?”
“루가 님이 안전하신 게 중요하지, 장소가 문제겠습니까!”
“어, 돌아왔다!”
저도 모르게 투이나가 소리쳤다. 사람들이 돌아보았다.
“예?”
“세뇌가 풀렸어요!”
투이나만 놀라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금도 신전이 안전하게 느껴지나요?”
“아, 아닙니다. 거기서도 어차피 루가 님을 노리는 자들이 있으니까요.”
얼떨결에 스카차가 대답했다. 대답하고 나서야 그가 갸우뚱했다.
“어라?”
“진짜 풀렸네요?”
호루니가 감탄했다. 라카인만 약간 미심쩍은지 수리시를 흘긋거렸다.
스카차를 내려놔도 되는지 헷갈리는 모양이다.
수리시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처음부터 강한 세뇌도 아니었어. 신전에 대한 집착만 건드려놓은 거라 본인이 모순을 느끼면 그만이지.”
“그래서 때린 거였어요?”
“하지만 저는 저절로 풀렸는걸요.”
호루니가 스스로를 가리켰다.
“그럼 그쪽이 알아서 본인이 이상한 점을 찾았나 보지. 원래 이런 건 영혼 문제야.”
수리시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마력이란 것도 어차피 영혼에 기생해서 쓰는 거거든. 영혼이 반발할수록 풀리기 쉬워져.”
과정은 미심쩍었지만 어쨌든 결과는 확실했다.
“강한 마법일수록 반발하기가 어렵겠네요.”
“글쎄. 보통 정신을 건드리는 건 영혼까지 망가뜨리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 그래서 저것들한테는 일부러 약하게 세뇌했을지도 모르지.”
수리시는 아무렇지도 않게 무서운 얘기를 했다.
호루니와 스카차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심각한 위험에 노출되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투이나도 신전에 남아있는 사람들 걱정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녀가 수리시를 붙들었다.
“영혼이 다친다는 게 정확히 뭐죠? 마법을 얘기할 때마다 그 얘기를 하잖아요.”
“뭘 자꾸 그렇게 캐물어? 네가 마법사라도 될 거야?”
그때 천장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났다.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투이나는 수리시의 안색이 아주 잠깐 변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위층에 누가 있나요?”
“쿠즈야.”
수리시가 재빠르게 말했다.
“너 도와준다고 여기 와 있느라 애 신경 쓸 여유도 없었거든. 혼자 놀게 두는 거야.”
“혼자서요?”
“무슨 상관이야. 다른 데 정신 팔리지 말고 할 일이나 해.”
“루가 님께 너무 무례하잖습니까!”
“마법사한테 예의 찾고 앉아 있네.”
수리시가 스카차와 말다툼을 시작했지만 어쩐지 투이나의 눈에는 일부러 시비를 거는 것처럼 보였다.
주의를 돌리려고 말이다.
‘위층에 있는 게 정말 쿠즈일까?’
투이나의 관심이 여전히 위쪽을 향해 있는 걸 알았는지 수리시가 소리쳤다.
“시드룬! 빨리 네 루가 데려가. 네가 언제부터 기다릴 줄 알았다고 그래?”
“…….”
어느새 옆까지 다가와 있던 시드룬이 스르륵 팔을 잡았다.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아, 네.”
일단 오늘 목적은 위층이 아니었으므로 투이나는 시드룬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평소보다 피곤해보였다. 머리카락에 윤기가 덜하다고 해야 할까.
“당신이 부탁한 마법을 시험해보았습니다.”
투이나가 긴장했다.
정말 자신이 살해당했던 시간으로 갈 수 있는 걸까?
“처음에는 다른 차원의 공간처럼 시간에 접근해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발생한 차원은 열리지 않더군요.”
“시간만 그렇다는 거예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은 언제나 미지수입니다. 하지만 시간은 온전히 내게 종속된 것이지요.”
시드룬이 허리를 숙였다.
“그래서 시간의 차원은 언제나 다른 대상을 이용해야만 합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시드룬의 눈빛이 어쩐지 불길했다.
“단순히 과거와 미래를 보는 것만으로는 일어나지 않았던 시간까지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이 요구했다면…….”
투이나가 움찔했다.
“이 시간에는 없는 일을 당신이 직접 겪어본 게 아닙니까?”
라카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이미 투이나가 죽었다 살아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수리시가 일부러 시끄럽게 스카차에게 시비를 걸며 떠들었지만, 그의 귀에 이 정도 거리에서 나누는 대화는 모두 들렸다.
투이나가 자신에게 비밀을 털어놓았을 때는 그녀의 사인을 짐작하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투이나를 지키겠다고 다짐하기만 했으니까.
그런데 투이나가 마법사에게 그 때의 시간을 다시 보여 달라고 요청한 까닭은 무엇인가?
혹시 투이나의 죽음에 그녀조차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던 거라면.
심각해진 라카인이 투이나를 주시했다.
투이나는 잠깐 시드룬에게서 물러나려는 듯이 주춤했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다면요?”
시드룬의 눈이 한 순간 번쩍였다.
“지금 당장 봐야겠군요.”
지식의 갈구로 번득이는 눈동자를 코앞에서 본 투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녀가 원하던 것이니 상대방이 서둘러도 상관없었다.
‘확실하게 알기만 하면 돼.’
시드룬이 로브의 걸쇠로 손을 가져갔다.
그 때까지 아무리 거추장스럽게 몸을 덮어도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던 복장이다.
그런데 처음으로 그가 로브를 풀고 있었다.
“수리시. 다른 자들을 데리고 나가라.”
“따라와.”
수리시가 호위들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 때까지 말싸움을 하던 스카차가 펄쩍 뛰었다.
“이봐요!”
“저희는 루가 님 곁에 있을 거예요!”
“아무리 너희라도 이건 못 보여줘. 바로 옆방에 있을 테니까 이상하면 언제든지 쫓아올 수 있잖아.”
수리시가 그들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도저히 다른 사람이 거부할 수 없도록 험상궂은 얼굴이었다.
“비명을 질러도, 이상한 소리가 나도 들여다보지 마. 루가, 넌 정말로 호위들이 필요할 때만 이름을 불러.”
“루가 님이 반드시 소리를 지르실 거란 뜻입니까?”
유일하게 수리시의 손에서 벗어나있던 라카인이 물었다.
그와 똑같이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던 수리시가 대꾸했다.
“안 지르면 오히려 내가 놀랄걸.”
‘무슨 뜻이지?’
투이나와 라카인이 동시에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수리시는 엄중한 표정으로 호위들을 끌어내는데 집중했다.
“괜찮아요, 위험하면 꼭 부를게요.”
기어이 투이나의 배웅까지 받고 나서야 문이 닫혔다.
그리고 라카인은 문이 닫히자마자 작게 억눌린 비명이 터져 나오는 걸 듣고 말았다.
바짝 긴장한 라카인이 문으로 붙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투이나는 그들을 부르지 않았다.
잠시 후, 다시 희미하게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지만 라카인은 긴장을 풀지 못했다.
옷을 벗은 마법사가 투이나에게 할 수 있는 일에는 꼭 위협만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카인은 초조하게 뛰는 심장을 억눌렀다.
광기에 젖은 신을 보았을 때보다 자신이 가진 상상력이 이토록 가슴을 서늘하게 할 줄 누가 알았을까.
‘이름을 불러주십시오.’
‘저의 이름을.’
라카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돌아가면 반드시 이 불온한 감정을 벌하리라.
계속 품고 있다간 호위조차 되지 못할 이 감정을.
* * *
라카인이 바깥에서 홀로 힘겨워하는 사이 투이나는 완전히 시드룬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들이 나가자마자 시드룬의 로브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던 것이다.
시드룬은 상체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는데, 어떤 옷이라도 그의 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맙소사…!”
투이나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벼락이 그를 꿰뚫고 지나가려다 굳어버린 것일까.
광석처럼 반짝거리는 비늘들이 긴 상체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렀다.
시드룬은 영혼의 세계에서 자신이 변했다고 말했다.
그것이 단순히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일 거라고 생각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의 몸은 더 이상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
투이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어깨와 팔까지는 매끄럽고 하얀 살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가슴의 정중앙부터 시작된 보라색 비늘은 다닥다닥 매달려 배를 가로질러 옆구리까지 튀어나와 있었다.
아래쪽도 같은 상태였다. 하체를 가리기 위해서 억지로 비늘 위로 허리끈을 둘렀는데, 불룩 튀어나온 자리에는 비늘이 꺾여 보석 같은 가루를 남겼다.
입술을 떨던 투이나가 간신히 속삭였다.
“아픈가요?”
“아무 느낌도 없습니다.”
시드룬이 대답했다. 그는 이미 자신의 몸에 익숙해 보였다.
그렇다고 비애가 덜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래서였구나.’
투이나는 절망했다.
‘그가 영혼의 세계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이걸 보고도 투이나는 시드룬을 끝까지 거절할 수 있을까?
시드룬이 했던 어떤 말보다도 지금 드러낸 몸이 그녀를 결혼으로 끌고 갔다.
자발적인 동정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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