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 (28/43)

28.

'…영혼이 아직 남아있지 않느냐.' 그 말을 듣자 그녀는 굴복하여 영혼을 넘겼다.

시드룬이 남은 보물을 다시 정리해서 옮겼다. 마법사들은 아쉬운 눈빛으로 사라지는 보물들을 곁눈질했다.

“혼자 다 먹으려는 건 아니지?”

“시드룬이 그러겠냐.”

“루가가 부를 때 튀어 나간 놈들한테 확실히 정산해 줄 테니까 걱정 마.”

수리시가 툴툴거렸다. 물론 레이벡은 예외였다.

투이나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제안을 받아줄 것 같아 안심했다.

마음을 놓은 투이나가 문득 수리시에게 다가갔다.

“저기, 수리시.”

“왜.”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말해 봐.”

수리시가 팔짱을 꼈다. 그나마 주변에서 이런 사사로운 조언을 얻을 만한 사람은 수리시뿐이었다.

투이나는 얼굴이 빨개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물었다.

“혹시 남편분이랑 싸워본 적 있으세요?”

대번에 수리시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왜 그런 걸 물어봐?”

“아, 그게….”

“우린 문제없어.”

수리시가 매몰차게 몸을 돌렸다. 투이나는 그대로 그녀를 놓쳐버렸다.

베인에 대한 걸 묻고 싶었던 투이나가 사과할 틈도 없었다.

‘너무 무례한 질문이었나 봐.’

투이나가 뺨을 감쌌다. 그녀는 베인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조언을 얻고 싶었다.

…하긴 보통의 연인은 그들 같은 일을 겪지 않는다.

일을 끝낸 시드룬이 투이나에게 다가왔다.

“돌아가겠습니까?”

“그래요.”

투이나는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베인만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졌다.

설레고 들떴던 감정들에 추가 매달리듯 자꾸만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답답하고 숨이 막히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를 보면 아리고 애틋해서 완전히 놓아버릴 수가 없다.

‘이게 정말 연인일까.’

한때는 그리도 눈부셨던 사람인데. 자신을 만나 변한 것 같아 두려웠다.

‘정말로 나 때문에…….’

투이나의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그녀가 베인을 생각할 때 베인도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매인 강한 의지가 신전으로 향하는 시드룬의 마법을 비틀어놓았다.

마법이 완성되기도 전에 마법진을 찢으며 두 팔이 튀어나왔다.

“어?”

“루가 님!”

투이나의 몸이 홱 뒤로 쏠렸다. 라카인이 가까스로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러나 당길 수가 없었다.

“한참 찾았습니다.”

베인이 투이나를 꽉 끌어안았다. 단 한 순간에 뒤바뀐 배경에 당황한 건 투이나도 마찬가지였다.

“베인? 여길… 어떻게…!”

“거처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약속, 지키고 있습니다.”

투이나가 몸을 움찔거렸다. 여전히 끌어안은 채 놓아주질 않는 베인 때문에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 여전히 투이나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라카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도 잠깐 어찌할 줄 몰라 굳어 있었다.

베인은 투이나의 연인이다. 그 때문에 라카인은 한순간 망설였다.

허나 이건 누가 보아도 투이나를 억지로 데려간 모양새였다.

라카인이 잡은 손을 고쳐 쥐었다.

“루가 님. 돌아오시겠습니까?”

“저자는 방향도 모르는군요.”

베인이 귓가에서 웃었다.

“루가 님은 이미 돌아오셨는데 말입니다.”

베인이 살며시 뒤쪽으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 순간 기이하게도 시드룬의 마법진이 깨지더니 투이나와 연결되어 있던 모든 사람이 신전 바닥으로 떨어졌다.

“윽!”

“라카…!”

베인이 투이나의 입을 막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입에 들어오자 놀란 투이나가 말을 멈추자 베인이 빠르게 말을 불어넣었다.

“밤마다 마법사를 몰래 만나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투이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베인이 가볍게 흘겨보듯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하십니다, 루가 님. 저를 두고 다른 남자를 만나고 다니시다니.”

“네에? 그런 게 아니….”

“제가 그리도 부족하십니까?”

투이나가 질겁했다. 뺨에 뚝뚝 뜨거운 액체가 떨어져서였다.

“베, 베인, 울어요? 지금?”

“보기 흉하십니까?”

베인이 그렁그렁한 눈물방울을 매달고 중얼거렸다. 등에 쭈뼛 소름이 돋아났다.

이건, 유혹하는 거다.

본인이 가진 미모가 정확히 어떤 방향으로 발휘되는지 꿰뚫지 않고서야 저런 표정으로 눈물지을 수 없었다.

마력처럼 감싸는 향기와 눈물에 투이나는 정신이 더 어지러워졌다.

‘아니야. 안 돼.’

투이나는 손바닥에 눈물이 묻어나는 걸 감수하고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가렸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한결 나았다.

이 모든 짓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한때 사랑하던 사람의 것이었으니까.

투이나가 이를 긁으며 빠져나간 베인의 손가락을 뱉었다.

“정신 차려요, 베인.”

“루가 님…….”

“대체 제게 뭘 바라는 거예요? 아무리 당신을 사랑해도 제게는 할 일이 있어요. 영원히 베인과 함께 살 수는 없다고요.”

투이나는 가만히 그녀의 손바닥에 얼굴을 문지르는 베인에게 소리쳤다.

“베인이 정말 아르힘 님을 믿는다면 이럴 수는 없어요!”

“…….”

베인은 말이 없었다. 그는 천천히 눈물이 투이나를 흠뻑 적시도록 내버려 두다가 속삭였다.

“정 그게 싫으시면 저만 보아주십시오.”

투이나가 흠칫 굳었다. 베인의 말은 막힘없이 이어졌다.

“다른 누구 아닌 저만 보고, 저만 사랑하고, 저만 알아주십시오. 그 입술로 어떤 이름도 부르지 않고 오직 제게만 허락해주십시오.”

베인이 떨리는 손으로 투이나의 손등을 붙잡았다. 말문이 막힌 그녀를 향해 그가 얼굴을 가린 것을 열었다.

젖은 두 눈동자가 모두 드러났다.

“다른 자와 있더라도 저 말고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제게 미쳐주십시오.”

매달린 눈물과 달리 그의 표정은 정적이었다. 그녀를 집어삼킬 해일처럼 그의 목소리가 밀어닥쳤다.

“저는 이미 그리되었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살 수 없다.

사람의 전부는 사랑이 아니다.

하지만 언제나, 사람에게 사랑이 있기를 바라지 않았나? 모든 죄악을 넘어선 사랑이 있기를?

‘만약 정말로 사랑으로만 가득 찬 자가 있다면.’

그것은 신이리라.

투이나는 힘없이 팔을 내렸다. 베인의 입으로 직접 바라는 것을 들었기에, 이제는 답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제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로군요.”

베인의 턱이 굳었다. 가엽게도. 굳어가는 그의 표정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의문으로 가득했다.

투이나야말로 그의 감정을 받아줄 단 한 사람이어야만 한다.

오직 그녀만이.

하지만 투이나는 그를 멀리 있는 사람처럼 올려다보았다.

“미안해요, 베인. 우린 더 이상 안 되겠어요.”

“……지금, 그 말씀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베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베인이 바라는 대로는 될 수 없어요.”

투이나가 쓰게 웃었다. 그녀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를 보는 동안 계속 차올랐던 열이 끝끝내 터지려는 것처럼.

정말로 좋아했는데.

떠나기 전의 잔상처럼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무도 죽지 않고, 아무런 기억도 없이 그와 함께 미래를 꿈꾸던 과거는 밝았었다.

눈이 부신 나날이여, 안녕.

그녀가 피 웅덩이에서 일어났을 때부터 이미 세상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선언을 마친 뒤였다.

‘미련을 가진 건 나였어.’

되살아난 순간부터 이미 그들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었다.

의심을 갖고서도 순수했던 시절을 반복할 수 있을 거라 믿은 그녀의 잘못이다.

헤어지자는 이야기에 넋을 놓아 버린 베인을 보며 투이나는 혀뿌리에 차오른 말을 꾹 눌렀다.

‘그런 식으로 나를 사랑했기에 나를 죽였나요?’

베인은 답해줄 수 없었다. 지금의 그는 모르는 일이니까.

투이나는 감정의 파편을 삼켰다.

‘여기서 무너지지 마.’

투이나는 여전히 살인자가 왜 자신을 죽였는지도,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베인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시드룬을 통해서 봐야만 해. 다른 시간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내면 끝나.’

시간과 함께 얽혀버린 매듭을 풀어 버릴 것이다.

그래도 둘의 관계는 돌아오지 않겠지.

투이나가 꾸욱 손바닥을 눌렀다.

“두 번째 시험 때까지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흔들릴 테니까.

베인은 이미 더 충격을 받을 수도 없었다. 처참한 표정을 도저히 계속 볼 수 없었던 그녀가 방 밖으로 나갔다.

“루가 님…!”

그제야 베인이 다급하게 정신을 차렸다. 그가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루가 님!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투이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루가 님!”

쾅.

닫힌 문 너머로 미친 듯이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투이나는 그대로 문에 기댄 채 몸으로 전해져오는 충격을 견뎠다. 베인이 두드리는 충격이었다.

뒤늦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끝이야.’

일부러 애타게 부르는 소리를 들어가며 정신을 혹사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필요가 없는데도.

투이나는 베인의 목이 쉬어갈 때까지 문 앞에서 자리를 지켰다.

몇 번이고 흔들리는 손잡이를 꽉 틀어쥐면서.

그녀는 소리만 내지 않았을 뿐, 끝끝내 그와 함께 울고 말았다.

투이나의 눈이 부르트고 뺨이 소금기로 갈라질 때까지 라카인은 묵묵히 기다렸다.

* * *

다음 날. 새빨갛게 부어오른 눈으로 나타난 투이나를 본 사제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와 베인이 헤어졌다는 이야기가 돈 걸까.

투이나도 아무런 언급 없이 착석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루가의 업무였다. 미뤄뒀던 일이 산더미다.

“시작할까요?”

투이나의 목소리가 칼칼하게 갈라졌다.

태연한 척하려고 해도 듣기 안쓰러울 만큼 애처로운 음성이다.

사제들이 애써 투이나를 외면했다. 모두가 지금이 평범한 일상인 척 굴고 있었다.

“올해 사제 서품을 기다리는 자는 모두 여섯 명입니다. 가을 수확이 끝나기 전에 발령받을 마을을 정리했습니다.”

“확인할게요.”

“저어… 아르힘 님의 서품식은 언제로 정하면 좋겠습니까.”

투이나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아르힘 님께 답을 듣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

사제들이 불편한 침묵을 교환했다. 그들도 아르힘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듯했다.

설마 다른 사람이 아르파가 얘기했던 대로 신이 갇혀 있다는 소리를 퍼뜨릴 리는 없지만.

그들도 이 모든 사건사고에도 나타나지 않는 수호신이 이상하다는 것쯤은 추측할 줄 알았다.

투이나는 그들이 은연중에 보내는 의혹들을 모조리 무시했다.

‘대놓고 물어보는 것도 아닌걸.’

가령, 정말 신전이 예전처럼 돌아올 수 있겠습니까?

혹은, 아르힘 님에게 정말로 답변을 들을 수 있는 겁니까?

아니면, 이제 더 이상 병을 숨기지 않으실 겁니까?

같은 이야기들은 서로 껄끄러워질 뿐이다.

돌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군데군데 안건을 건너뛴 투이나가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춰 섰다.

“이건…….”

그건 예전에 라카인 독살 미수 사건으로 쫓아냈던 사제의 행적이 적힌 문서였다.

아르힘의 명예를 실추시킬까 염려해 사제를 신전에서 쫓아낸 후에도 감시를 붙였다.

투이나가 입술을 눌렀다.

“전에도 사제의 자리를 잃은 사람이 있었나요?”

“그렇습니다.”

“그 자료도 보고 싶어요.”

시종이 곧장 바깥으로 나갔다. 잠깐 기다린 투이나가 가져다준 종이를 확인했다.

‘역시. 사제님들이 마법사일 리가 없어.’

사제의 직위가 박탈되면 다시는 치유하는 힘을 쓰지 못한다.

마법이었다면 신전에서 쫓겨난 뒤에도 힘을 잃을 리가 없다.

확신하려던 투이나는 문득 마지막 단락을 보았다. 얼마 안 되는 사례들의 마지막 부분이 다 똑같았다.

신전에서 쫓겨난 사제들은 모두 병사했던 것이다.

투이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모두?’

웬만한 병은 모두 치유되는 아르힘에서 병사했다면 원인은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얼룩병에 걸린 것이다.

투이나는 단순히 병사라고만 적혀있는 부분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녀의 침묵이 길어지자 사제가 물었다.

“무언가 이상한 게 있습니까?”

“아, 아뇨.”

투이나가 반사적으로 종이를 덮었다. 그러다 마음을 바꿔 다시 물었다.

“쫓겨난 사람들은 언제까지 감시하죠?”

“그들이 정착한 곳을 담당한 사제가 특별한 사항이 있을 때만 보고해옵니다.”

도주, 사망 같은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눈치 못 챘나?’

사제가 쫓겨난 사례 자체가 적은데다, 긴 세월에 걸쳐 띄엄띄엄 적혀있었다.

기록만 해뒀지 투이나처럼 전체를 훑어볼 이유가 없었다.

누가 죄인의 끝을 염려하겠나.

‘하고많은 병 중에서 하필 얼룩병이라니.’

얼룩병은 아르힘에서만 발병한다. 만약 얼룩병이 신이 내리는 형벌이라면?

‘그럴 리가 없잖아.’

아르힘은 태어날 때부터 병에 걸린 그녀를 루가로 만들었다. 투이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사제들은 그녀가 고민하도록 기다려주지 않았다.

“사소한 문제는 잠시 미뤄두셔도 되겠습니까.”

“두 번째 시험을 준비하셨다 들었습니다. 아무리 루가 님의 혼인 문제라지만 저번처럼 신전의 도움을 받지 않는 건 위신상 곤란합니다.” 

투이나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재빠르게 손 안으로 보던 종이를 접어 넣었다.

‘일단 이건 기억해두자.’

“이번에는 다를 거예요.”

투이나가 두 번째 시험 내용을 알려주자 사제들은 난색을 표했다.

“사람들 앞에 나서실 생각입니까?”

“그런 불분명한 기준이라니요.”

“두 번째 시험을 치를 때는 다시 분장할게요.”

투이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그동안 그녀가 협조했던 걸 아는지라 사제들은 입술만 꿈틀거렸다.

그녀가 덧붙였다.

“사람들이 원하는 답을 들어야만 여러분이 기다리던 문제에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잠깐 정적이 흘렀다.

‘뭐지?’ 하는 표정이던 사제들은 그제야 그녀가 신전을 떠나기 전에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기억해냈다.

아르힘의 왕위를 논하고 있었다.

사제들이 술렁였다.

“두 번째 시험을 겪고 나면 긍정적인 대답이 나올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도 준비해야지.”

사제들은 수군거림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루가 님이 바라시는 대로 준비하겠습니다.”

서로에게 숙제를 안겨준 투이나와 사제들의 면담이 끝났다.

사제들은 분주하게 왕과 시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흩어졌다.

투이나는 종이를 쥔 채 바깥으로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라카인이 그녀를 맞았다. 그가 물에 적신 수건을 건넸다.

“…그렇게 안 좋아 보여요?”

“아프실까 염려됩니다.”

라카인의 말이 위로가 됐다. 투이나는 마음 놓고 부은 눈을 식혔다.

“이것 좀 읽어 볼래요, 라카인?”

투이나가 가져온 종이를 건넸다. 반사적으로 받아들긴 했지만, 라카인은 머뭇거렸다.

투이나가 수건에서 얼굴을 뗀 뒤에도 그는 받은 종이를 펴지 못했다.

그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라카인이 주저하며 입을 뗐다.

“저는 글을 읽지 못합니다.”

“아! 세상에, 미안해요!”

당황한 투이나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황급히 종이를 덮었다.

아르힘에서는 신전에서 학교를 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단히 읽고 쓸 줄은 알았다.

‘그건 보통 신이 가르치는 법이니까… 당연히 아르파 신은 다르겠지!’

투이나는 몹시 미안해했다. 라카인은 오히려 그 모습에 더 쩔쩔맸다.

“알려줄 게 있어서 줬던 건데 그냥 말로 할 걸 그랬어요.”

“아닙니다.”

“제가 알려줄게요! 혹시 관심 있다면요.”

“루가 님을 번거롭게 할 수는….”

“하나도 안 번거로워요.”

투이나가 다짐하듯 그의 손을 꽉 눌렀다.

라카인은 잡힌 부위가 아려오는 듯 해 저도 모르게 손을 떨었다. 떨림을 느낀 투이나가 시선을 내렸다.

라카인은 혹시라도 자신의 마음을 들켰을까봐 긴장했으나 투이나의 시선은 다른 데 박혀 있었다.

“아직도 사제님에게 이 상처를 안 보여줬어요?”

투이나가 라카인의 손을 덜렁 들어올렸다. 아까보다 더 당황한 라카인이 변명거리를 찾을 때였다.

“루가 님.”

다른 목소리가 그들을 불렀다. 두 사람이 돌아보자 뜻밖의 인물이 거기에 서 있었다.

“호루니?”

호루니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세뇌에 걸려 있다는 추측에도 불구하고 투이나는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쩐 일이에요? 여기까지.”

호루니는 그녀 스스로도 왜 왔는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루가 님이 안전하신지 보려고요. 아니, 안전하시겠지만…….”

호루니가 말끝을 흐렸다. 

“제가 루가 님의 호위를 서야 했는데요. 왜 혼자 움직였을까요?”

호루니가 횡설수설했다. 꼭 뭐에 홀린 사람 같았다.

‘세뇌가 풀려가고 있나? 하지만 어떻게?’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기엔 장소가 적절치 않았다. 투이나가 호루니를 붙잡았다.

“좀 더 편안한 곳으로 갈까요?”

재빨리 작은 방으로 들어온 투이나가 문을 잠갔다. 라카인은 주변을 확인하고는 문 앞에 섰다.

호루니는 그저 두 사람을 초조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좀 더 일찍 오려고 했어요. 그런데 계속 호위를 서도 되는지 알 수가 없어서….”

호루니의 시선이 힐긋 라카인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명백한 질투였다.

찔리는 구석이 생겨버린 라카인이 어색하게 고개를 틀었다.

“괜찮아요, 호루니. 자세하게 말해 봐요.”

호루니는 안절부절못하다가 투이나가 밀어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저번에 루가 님이 저희를 부르시지 않았나요?”

“맞아요! 마법사의 마을로 갈 때 말이에요. 오려고 했었어요?”

“라카인을… 만난 기억은 나요.”

호루니가 애매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당연히 루가 님이 부르시면 가야 하는데, 왜 그 때는 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는지….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이 정도면 거의 확신이다. 라카인과 시선을 교환한 투이나가 침착하게 말했다.

“놀라지 말고 들어요, 호루니. 혹시 세뇌 마법에 당했을 지도 몰라요.”

“네엣?”

당연히 호루니는 기겁했다. 놀라는 그녀에게 투이나는 베인이 마법을 썼을 가능성을 설명했다.

설명을 듣고서도 호루니는 의아함을 지우지 못했다.

“정말로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요? 아르힘 님의 신전에서 세뇌 마법이라니, 간도 크게….”

“시드룬도 마법으로 다니는 걸요.”

“하지만 그런 마법이 있다면 루가 님께 쓰는 게 낫지 않나요?”

투이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게요?”

잠시 생각해보던 라카인이 의견을 냈다.

“루가 님이 얼룩병에 걸린 것을 보고 마법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병은 마법이 통하지 않으니까요.”

“기억하고 있었네요!”

라카인이 얼룩병에 관심을 가질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이다.

라카인은 어딘가 켕기는 기색으로 뒷짐을 졌다.

“루가 님의 일이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좋은 추측이지만 제가 신전에 막 도착했을 땐 얼룩이 안 보였는걸요. 베인도 그 땐 제 병을 몰랐을 테고요.”

“게다가 루가 님은 마법이 통하시잖아요. 모르고 썼으면 통했을 텐데요.”

“그러게요.”

세 사람은 똑같은 의문에 빠져버렸다. 투이나는 부스럭거리며 아까 감춰온 종이를 꺼냈다.

“이것도 같이 봐주세요.”

투이나가 얼룩병으로 사망한 사제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자 호위들은 한층 더 심각해졌다.

“얼룩병이 대체 뭐길래…?”

호루니가 중얼거렸다. 투이나가 방안을 서성거렸다.

“아르파 신을 만났을 때 반응도 그렇고, 이 기록까지 더해지면 신이랑 관련 있는 병인 게 확실해졌네요.”

“아르힘 님은 그 병을 낫게 하실 수 있잖아요.”

호루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멈칫한 투이나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호루니가 움찔했으나 그녀의 방향은 라카인 쪽이었다.

“잠깐 빌릴게요.”

투이나는 그가 말리기도 전에 칼을 꺼내 손가락을 찔렀다.

“루가 님!”

“제 몸엔 이제 회색 피가 흘러요.”

투이나가 그들에게 손을 펼쳐보였다. 방울방울 솟아나오던 핏방울이 붉었다.

그러나 그녀가 손가락을 기울이자 손가락을 타고 흐르던 피는 곧 거무스름해지더니 완전한 회색빛으로 변해버렸다.

“맙소사.”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색에 호루니가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병이 악화되셨군요.”

그녀가 울먹였다. 투이나는 착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힘 님은 만날 수 없어요.”

예전이었다면 그녀의 상태를 알아차린 아르힘이 직접 만나러 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기도에도 아르힘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게 확실한 표시 같아서 마음이 아파. 정말로 갇혀 계시다니.’

피는 금세 멎었다. 상처엔 새로 생겨난 얼룩처럼 회색 딱지가 앉았다.

그 모습이 마치 멀쩡한 살마저 얼룩으로 점점 덮여가는 듯해 입맛이 썼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아르힘이 계속 갇혀있게 되면 결국 그녀도 자기 손으로 제 살을 뜯어내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라카인은 두려워졌다.

투이나가 악화된 모습이 두려움을 부채질했고, 그 두려움이 끈질기게 따라붙던 이유 모를 저항감을 눌렀다.

라카인의 혀가 떨어졌다.

“……어떻게 된 일인지 신께 물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물어볼 수나 있을까요?”

투이나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라카인은 그녀의 짐작과 다른 신을 말하고 있었다.

“아르파 신께서 이 병과 아르힘 신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알고 계실 것입니다.”

“아르파 신께 묻자는 건가요?”

“예.”

투이나의 표정이 이상야릇해졌다.

마지막으로 아르파를 만났을 때 무슨 꼴을 겪었는지 너무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탓이었다.

“다치지 않고 아르파 신을 뵐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라카인이 말했다.

지금부터 그가 하려는 이야기는 절대로 다른 나라 사람에게는 유출해서는 안 될 이야기였다.

허나 라카인은 투이나에게 그 방법을 말할 수가 있었다.

병에 걸린 이후로 선을 넘을 수 있게 된 느낌이다.

혹은 그의 마음이 이미 선을 넘어버린 탓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라도 좋다. 투이나에게 도움만 된다면 상관없으니.

라카인이 움푹 가려진 두 눈을 들었다.

“하지만 모하세스 님을 설득하셔야만 합니다.”

* * *

회색 얼룩을 몸에 두른 자는 흉측하다.

샨은 못난 것을 생각하는 취미가 없었다.

그러나 요 며칠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건 세상에서 제일 흉한 몰골의 여자였다.

하인들은 침묵 속에서 왕의 심기를 살폈다. 그나마 지난번과 달리 살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바람에 녹이 슬길 기다리는 것처럼 샨은 턱을 괴고 한참을 앉아있었다.

좀이 쑤신 아르파 신이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뭐라도 사냥하지 않느냐고 채근해댔다.

그러나 샨을 제자리에 붙잡아둔 건 완전한 비관 속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던 투이나의 모습이었다.

그때 단번에 피가 식어버리는 느낌은 비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아르파가 그를 이곳으로 이끈 이유가 정말 결혼이던가?

자신 안에서 투이나를 죽이고 싶은 충동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신을 부르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주도권을 잃은 감각은 불쾌했고, 그래서 하인이 투이나의 방문을 알려왔을 때 샨의 반응은 냉담했다.

“루가가 왔다고?”

“예.”

“…….”

샨이 입을 다물자 하인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돌려보내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테지만.

샨이 턱을 내렸다.

“들여보내라.”

하인이 소리 없이 물러났다. 잠시 후 투이나와 함께 익숙한 호위들까지 따라 들어왔다.

샨은 밝은 곳에서 찬찬히 다시 투이나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이젠 얼룩을 가리지 않는데도 자꾸만 시선이 갔다.

머릿속으로 그려볼 때는 치를 떨 만큼 흉측했건만, 지금 저리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투이나는 그냥… 그녀였다. 자신이 구혼하던 자.

“왜 왔지?”

샨이 물었다. 투이나도 자신만큼이나 낯설어하는 것 같았다. 하루아침에 몰골이 바뀐 건 그쪽이면서.

하긴 신이 그녀를 허락지 않았지.

투이나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한 채 서 있기만 하자 점점 부아가 치밀었다.

샨은 다시 아르파 신이 나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투이나가 입을 열었을 때 그는 무척이나 놀라고 말았다.

“아르파 신을 만나고 싶어요.”

“제정신으로 하는 소린가?”

샨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불편한 듯 찡그리는 투이나를 보고 나서야 샨은 제 언성이 높아진 걸 깨달았다.

“아직까지는 제정신이에요.”

그녀의 말에 지나칠 수 없는 가시가 있었다.

샨이 부릅뜬 눈으로 쏘아보자 투이나가 한숨을 쉬었다.

“제 병은 단순한 피부병이 아니에요. 증상이 심각해지면 정말로 제정신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놀랍지도 않고 달갑지도 않은 소리였다.

‘역시 보통 병은 아니었군.’

일부러 그녀에게 하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아 자신을 포기시킬 셈인가 했는데, 뜻밖에도 포기할 생각이 없는 건 그녀였다.

“아르힘 님이 계속 치료해주셔서 곧 나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분을 만나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걸 왜 내게 말하지?”

“아르파 신께서 아르힘 님이 갇혀있다고 하셨으니까요.”

샨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이제 왜 겁도 없이 그의 신을 부를 작정을 했는지는 이해했다.

“또한 아르파 신께선 제 병에 대해서도 알고 계십니다. 저는 그 답을 들어야겠어요.”

“배짱은 마음에 들지만 너무 자신을 하찮게 대하는 거 아닌가?”

샨이 일부러 비아냥거렸다. 그의 손가락이 자꾸만 못마땅하게 턱을 두드렸다.

“이번에 신께서 그대를 보면 확실히 죽일 텐데.”

추측도 아닌 단정이었다. 샨이 직접 말한 일이니 투이나가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는 그녀의 목을 바라보았다. 한 손으로 감싸고도 남겠지. 부드러울 테고.

그 시선을 받고도 용케 달아나지 않은 투이나가 입을 열었다.

“아르파 신께서 유일하게 답해주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샨의 눈빛이 달라졌다.

당장 손에 잡히는 대로 후려치려던 샨은 간신히 참아냈다. 더한 분노를 위해서였다.

“네가 감히 금기를 들먹였더냐!”

주제도 모르고 서 있던 라카인에게 고함이 날아갔다.

그는 마땅히 받아야 할 처벌을 받겠다는 듯 가만히 있었다.

샨의 눈이 뒤집혔다.

모하세스에서도 함부로 말해선 안 될 일을 아르힘의 신전에서 털어놓다니.

‘저것이 정녕 미쳤군!’

그러나 투이나가 그 사이를 가로막았다.

“제가 부탁한 일입니다!”

“비켜라!”

샨이 들은 척도 않고 투이나의 어깨를 밀쳐냈다.

그대로 그녀가 천막 바깥까지 밀려났으면 싶었다.

이미 아르파가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라카인은 신에 버금가는 샨의 분노를 피하지 않았다.

자신을 마주하는 자세가 어쩐지 그가 새롭게 섬기게 된 주군과 비슷해진 것 같아 불쾌해졌다.

투이나와 비슷해져야 할 건 그가 아니라 자신이다.

“진작 죽였어야 했거늘.”

샨이 으르렁거렸다. 그의 팔이 위로 확 올라갔다.

그대로 목을 부러뜨릴 심산이었다. 피를 보면 아르파를 막을 수 없을 테니까.

그러나 신보다 강한 구속력이 그의 팔을 붙들었다.

“샨, 이곳은 당신의 나라가 아니에요.”

투이나였다. 그에 비하면 하찮기 짝이 없는 힘이 안간힘을 다해 팔을 당기고 있었다.

이번에 후려치면 진짜로 뼈가 부러지게 될 거란 생각이 그를 멈추게 했다.

“아무리 아르힘 님이 갇혀 계신다 한들 멋대로 누군가를 죽일 순 없습니다!”

“그럼 그대가 대신 죽겠나?”

샨이 참아왔던 분노를 토해냈다. 

“이것이 무슨 소리를 했는지 그대는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어!”

“그럼 저를 탓하세요.”

투이나가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은 이미 라카인을 제게 넘겼습니다.”

순간 샨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처벌을 기다리고 있던 라카인마저 놀라 눈을 크게 뜨는 것이 보였다.

언제부터 그녀가 라카인을 제 것으로 여겼던가.

이상하게 다른 것보다 그 사실에 맥이 풀렸다.

투이나는 잡은 팔에서 빠져나간 힘을 느꼈는지 조심스럽게 손을 뺐다.

그러나 이미 흩어진 분노의 방향이 바뀐 샨이 덥석 다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설명하라.”

“뭐, 뭘 말이죠?”

샨의 입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불만이 배 속에 그득 찼는데도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입 밖으로 꺼내면 틀림없이 유치한 표현이 될 테니까.

그는 대신 고집을 부렸다.

“내 신을 정말 만나고 싶나?”

“…그래요.”

“허나 천금을 가져온다고 한들 그대의 부탁은 들어줄 수 없다.”

샨이 일부러 더 냉정하게 거절했다. 아무리 투이나라고 할지라도 들어줄 수 있는 한계가 있었다.

샨은 마치 자신이 평소에는 투이나의 부탁을 잘 들어준 것처럼 생각했다.

이미 그의 마음이 그녀에게 상당히 물러진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으면서.

투이나는 이미 거절을 예상한 것처럼 침착하게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소원, 기다리고 있겠다 했었죠.”

“……!”

그제야 샨은 내기에 걸었던 소원이 떠올랐다. 사실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동안 전혀 언급도 없더니.’

이럴 때 돌려받을 줄은 몰랐다.

투이나는 샨이 점점 잡은 손에 힘을 주는 걸 깨달았는지 재빠르게 덧붙였다.

“천금은 없지만 제게는 샨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부족한가요?’

투이나의 표정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의 루가는 현명했다. 자신의 입으로 한 약속마저 깰 수는 없었다.

한 방 먹은 기분이다. 그런데 묘하게 열이 빠졌다. 그 반대여야 정상인데.

이미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게 될 거라는 예감을 느끼면서도, 샨은 괜히 심통을 부려보았다.

“내가 다른 소원을 빌라고 한다면?”

투이나는 이미 샨의 속내를 짐작했는지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보니 인정하긴 싫지만 남아있던 화마저 사라지는 기분이다.

‘허나 그리 쉽게 줄 수는 없지.’

샨은 일부러 투이나를 압박하듯 응시했다. 그녀가 잠깐 고민하더니 답했다.

“…샨은 늘 아르파 신을 따라 타오르는 듯 굴지만, 실은 더 냉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르파 신이 아니라 샨에게라면 소원을 빌 수 있을 거라 여겼습니다.”

샨은 타오르는 횃불을 그대로 삼킨 기분이 들었다.

그런 사소한 일 따위를, 알아차리고 있었던가.

‘신이 곧 나이고 내가 곧 신이건만….’

몸이 뜨거웠다.

불이 옮겨 붙듯 몸에 열이 퍼져나갔다.

열기를 느꼈을 때는 이미 입이 움직인 뒤였다.

“……그 소원, 들어주겠다.”

환하게 밝아지는 투이나의 얼굴이 열기에 따르는 빛을 대신했다.

* * *

샨의 허락을 받아낸 다음엔 일이 쉽게 굴러갈 줄 알았다.

라카인에게서 간단한 설명을 듣긴 했지만 막상 준비하는 과정을 보니 아뜩했다.

샨이 쇠사슬을 꺼내 들었던 것이다.

“정말 괜찮은 거죠?”

투이나가 불안하게 물었다. 샨이 콧방귀를 뀌었다.

“물어보기엔 너무 늦은 거 아닌가.”

샨이 시큰둥하게 쇠사슬을 손목에 감았다.

“그대의 소원이라니 좀 더 즐겨보는 건 어때.”

황금 의자에 앉은 샨이 목을 뒤로 젖혔다.

라카인이 조심스럽게 그를 사슬로 의자에 묶었다.

다른 하인을 불러오면 말이 새어나갈까 봐 그들끼리 처리하기로 했다.

지금 하려는 일은 혹시라도 깨어난 아르파가 그들을 해칠지도 몰라 샨의 몸을 미리 구속해놓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안전하다고 들었는데 묶는다니 이상하잖아요.”

“웬만하면 안전하겠지만 그대라는 변수 때문에 안심할 수가 있어야지.”

샨이 강도를 시험해보듯 힘주어 몸을 움직여보았다.

철그렁 소리가 불길했지만 다행히 끊어지지 않고 튼튼했다.

그렇게까지 해도 샨은 여전히 위험해 보였다.

의자에 앉아있던 그가 눈을 홉떴다.

“그대니까 이렇게까지 해주는 것이다.”

“고마워요, 샨.”

샨이 입꼬리를 삐죽 올렸다.

“아까 말했던 대로 질문은 내가 하겠다.”

지금부터 샨이 하려는 의식은 아르파가 강림하는 것과는 달랐다.

샨은 아르파를 부른 다음 자문자답하는 형식으로 대답을 얻을 것이다.

아르파는 타인이 아니라 자신의 질문에 답하는 줄 알 테고, 이는 신을 속이는 행위이다.

때문에 모하세스에서도 이 의식은 철저히 비밀로 부쳐졌다.

‘그럴 만도 해.’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니.

이 의식을 치르는 동안 타인의 존재를 들키면 아르파는 무조건 그 사람을 공격할 것이다.

그래서 의식을 치르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아르파가 그들의 피 냄새를 맡지 못하도록 입을 다물고 샨의 피를 몸에 발라야 했다.

완전한 암흑 속에서 의식을 시작해야 해서, 투이나는 미리 샨의 손을 잡고 있다가 원하는 질문을 손바닥에 써주기로 했다.

투이나는 걱정스레 묶여있는 샨을 바라보았다.

‘게다가 이번 일이 정말 위험한 이유는, 샨까지 들켜서는 안 된다는 거야.’

타인에는 샨도 포함된다.

샨과 아르파는 하나이지만, 몸을 가진 건 샨뿐이다.

투이나는 몇 번이고 주의사항을 반복해서 기억했다.

‘절대로 실수하지 않겠어.’

다짐을 거듭하는 투이나를 샨이 흘긋 올려다보았다.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편 샨이 춤이라도 청하듯 손바닥을 내밀었다.

“나를 놓치지 마라.”

투이나가 샨의 손을 잡자 라카인이 천을 내렸다.

두꺼운 양모 천이 햇빛을 완전히 차단했다.

아주 작은 등잔불 하나만 켠 라카인이 긴장한 호루니를 바라보았다.

샨을 찔러 피를 내는 역할을 맡은 그녀는 손마디가 하얗게 될 만큼 세게 칼을 움켜쥐고 있었다.

“시, 시, 시작하겠습니다.”

“해라.”

샨은 사나운 눈초리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라카인이 샨의 손바닥으로 불빛을 비추었다.

이를 악문 호루니가 샨의 손바닥을 그었다.

긴 자국 위로 금세 피가 샘솟았다.

“신께서 저희를 모르시나니.”

라카인이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기도했다.

호루니가 떨리는 손으로 뜨거운 액체를 문질렀다.

“모르는 자의 질문은 해소될 길이 없어라.”

라카인이 뚝뚝 떨어지는 액체를 받았다.

그는 자신보다 투이나에게 먼저 피를 발라주었다.

희미한 빛 속에서도 서로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끝을 모르고 쌓여가던 질문은 결국 신에게 닿을 것이니.”

라카인은 잘게 떨린 손끝을 빠르게 되돌렸다.

상황도 모르고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려고 그는 자신의 얼굴을 꾹꾹 눌러가며 칠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신의 혼잣말에서 해답을 얻는다.”

기도를 마친 라카인이 등잔불을 껐다.

파즈즈.

마지막 기름이 타는 소리와 함께 완전한 암흑이 찾아왔다.

투이나는 피를 흘린 탓인지 평소보다 맥박이 빠른 샨의 손을 꼭 잡았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샨이 말했다.

“나는 아르파다.”

일렁.

분위기가 일변했다.

어둠 속에서도 솜털이 곤두설 만큼 공기가 날카로워졌다.

‘왔다.’

지금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건 신이었다.

투이나는 숨소리 하나까지 크게 내지 않도록 조심했다.

강림한 아르파는 막 잠에서 깨어난 짐승처럼 길고 뜨거운 숨결을 토해냈다.

곧이어 그가 주변을 둘러보는 게 느껴졌다.

“내가 이곳에 있군.”

미리 귀띔받은 말이었다.

투이나가 재빨리 손가락을 움직여 샨의 손바닥에 질문을 썼다.

샨이 대신 질문했다.

“나는 갇혀있는 아르힘이 궁금하다.”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똑같은 목소리가 곧장 대답했다.

“아르힘은 어리석게도 나와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나 나는 빠져나올 방법을 알고 있고, 그는 모른다.”

“나는 빠져나올 방법이 궁금하다.”

“가두고 있는 인간을 죽여라.”

투이나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베인을 죽이면 아르힘 님이 풀려난다고?’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다. 투이나가 다시 썼다.

“나는 다른 방법이 궁금하다.”

“죽일 수 없다면, 그가 아닌 다른 신이 꺼내줄 수 있다.”

역시나 까다로운 조건이었다. 당장 아르힘을 구해줄 신을 어디서 찾겠나.

아르힘이 갇혀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도움은커녕 침략부터 할 것이다.

고민하던 투이나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나는 마법이 신을 대신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내가 생각했지만 정말 멍청한 질문이군. 절대로 마법은 신을 대신할 수 없다. 그자들은 문을 열 수 없으니까.”

‘문?’

통로 하나가 투이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시드룬이 끈질기게 가려고 하는 영혼의 세계가 떠오른 것이다.

시드룬은 영혼의 세계에서 신이 왔다고 했다.

투이나는 조급해졌다.

“나는 마법으로 문을 열 수 있게 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하다.”

“지저분한 것들이 생겨나지. 마법사의 뜻대로는 안 될 것이다.”

투이나의 손이 멎었다.

‘아르파 신은 나를 지저분한 것이라고 불렀었어.’

그건 단순히 생김새를 보고 한 소리가 아니었단 말인가.

투이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나는 얼룩병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아르힘이 처리하지 못한 것이다.”

투이나는 기다렸지만 아르파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그녀가 재차 물었다.

“나는 지저분한 것과 얼룩병이 같은 것인지 궁금하다.”

“같다. 내가 왜 자꾸 당연한 걸 묻고 있지?”

그의 목소리가 위험하게 올라갔다. 간담이 서늘해진 투이나가 긴장한 손가락을 오므렸다.

‘이 문제는 더 못 물어보겠어.’

들킬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투이나는 신중하게 다음 질문을 골랐다.

잠시 후 질문을 이해한 샨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을 콱 물었다가 놓았지만 결국 질문해주었다.

“나는 왜 아르힘으로 와 루가에게 청혼했는지 궁금하다.”

“아르힘은 내게 빚이 있다. 끝까지 내게 도움이 되었다고 주장하며 빠져나가겠지만, 그것은 나의 능력이지. 그자가 생색낼 수는 없다. 그러니 대가를 받아내야겠다.”

신나서 떠들던 아르파의 목소리가 갑자기 바뀌었다.

“아니지. 아르힘이 데리고 있던 자가 이미 오염되었으니 받을 수 없겠군.”

투이나가 움찔했다.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표현은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하물며 오염이라니?

굳어있던 투이나의 손가락을 느끼고 있던 샨이 그녀가 질문도 안 했는데 불쑥 말해버렸다.

“나는 그 자가 나을 것이라고 알고 있다.”

“나아? 그럴 리가 없다. 영혼에 들러붙는 마법과 달리 그것들은 육체에 자리를 잡는다. 우리가 마법에 침입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육체에도 침입할 수 없다.”

투이나는 오한이 들었다.

그녀가 빠진 충격을 헤아리지 못하고 샨은 계속 아르파와 언쟁했다.

“나는 아르힘이 아닌 다른 치료법이 궁금하다.”

“다른 치료법은 없다. 아르힘도 치료하지 못하겠지만.”

아르파가 비아냥거렸다.

의식이 길어지자 점점 그의 존재가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이러다 아르파가 샨의 존재를 눈치 챌 것만 같아 투이나는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마지막 질문을 적었다.

“나는 마법도 신처럼 얼룩병에 걸린 육체에 침입하지 못하는지 궁금하다.”

“당연한 소리군.”

“그렇다면 얼룩병에 걸린 채 마법과 신의 힘이 통하는 자는 무엇이지?”

이어지는 투이나의 질문에 열중한 나머지 샨이 주어를 빼고 말해버렸다.

그도 지금까지 이어지는 질문이 투이나의 이야기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실수를 알아차렸을 때는 너무 늦었다.

“…….”

막힘없이 이어지던 문답이 불길한 침묵으로 뒤바뀌었다.

“너는 누구지?”

소름 끼치는 소리가 되물었다.

지금까지 샨의 목소리를 빌리던 아르파가 압도적인 존재를 드러냈다.

목소리를 빼앗긴 샨이 억지로 자신의 음성을 끌어내어 소리쳤다.

“나는 돌아가겠다!”

“누구냐! 누가 나를 대신한 것이냐!”

“불을 켜라!”

덜컹, 덜컹!

의자가 요란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절대로 끊어지지 않을 것 같던 사슬이 끼긱 하는 마찰음을 튕겼다.

놀란 호루니가 저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자 샨의 고개가 그쪽으로 홱 꺾였다.

“거기에도 있구나!”

투이나를 잡고 있던 샨의 손이 울분에 차 그녀의 손등을 긁어댔다.

깊이 파고드는 통증에 투이나도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아윽…!”

“더러운 것! 더러운 것들! 나를 능멸하다니! 모조리 죽여주마!”

아르파가 발광하는 소리에 점점 더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크고 요란한 소리가 귀청을 찢어놓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말라붙었던 샨의 피 아래로 그녀의 피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아르파의 힘이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다.

라카인이 곧장 천막의 문을 걷어 젖혔다.

단번에 거센 빛이 안으로 들이쳤으나 아르파는 멀쩡했다. 의식의 핵심은 그게 아니었다.

신을 억누르려고 이를 악문 샨의 입가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그가 윽박질렀다.

“의식은 끝났다! 나는 돌아가겠다, 아르파!”

“건방진 놈! 이제는 누가 주인인지도 잊었더냐!”

아르파의 목소리는 이제 샨의 몸에서 나오고 있지 않았다.

샨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피에서 들리고 있었다.

칼에 베인 상처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엄청난 양의 액체가 꿀렁이며 흘러나왔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것은 죽으리라!”

아르파가 저주하듯 소리쳤다.

샨의 손톱이 뼈를 긁어낼 기세로 손등을 파고들었다.

그를 떨쳐내려던 투이나는 고통 속에서 어떤 절박함을 읽어냈다.

‘왜 나를 잡지?’

아르파라면 그녀를 잡는 것보다 죽이는 데 힘쓸 것이다.

그렇다면 이 힘을 쓰고 있는 건 샨인가?

갑자기 의식을 치르기 전에 했던 샨의 말이 떠올랐다.

‘나를 놓치지 마라.’

한계까지 끌어당겨진 사슬이 끊어질 것처럼 불꽃이 일었다.

명령으로 가장했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하는 부탁이나 다름없었다.

정신을 다잡은 투이나가 억지로 그와 깍지를 꼈다. 덜덜 떨리며 튀는 팔의 힘이 심상치 않았다.

“샨! 나 안 놓쳤어요!”

자신까지 따라 떨리면서도 투이나가 소리쳤다.

“놓치지 않을 테니까 돌아와요!”

“듣고… 있다! 빌어먹을!”

샨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기운찬 욕설 덕분인지 흐르는 피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샨이 소리쳤다.

“이 땅에서 볼 일은 다 보았으니 그만 꺼져라!”

자신에게인지 신에게인지, 화풀이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른 뒤에야 살은 물론 뼛속까지 떨리게 하던 신의 기운이 사라졌다.

쿵.

의자 다리가 다시 바닥을 찍은 다음에도 샨은 한참 동안이나 숨을 골랐다.

요동치는 신을 억누르는 모양이었다.

투이나가 걱정스럽게 오르내리는 샨의 상체를 지켜보았다. 그때까지 손은 놓지 않은 채였다.

다시 빛이 들어오는 덕분에 샨의 눈동자가 붉은색에서 서서히 푸르게 돌아오는 광경을 지켜볼 수 있었다.

원래 눈동자 색을 되찾은 샨이 턱을 까딱였다.

라카인이 바로 의자에 묶인 사슬을 풀기 시작했다.

투이나의 몸에서 긴장이 빠져나갔다.

“끝났군요.”

“이제 시작이지.”

샨이 담담해서 더 소름 돋는 말투로 말했다.

“다음에 신을 부르면 여기 있는 자들은 확실히 죽는다.”

‘어차피 죽은 목숨이었는걸.’

투이나는 칼부터 들이대던 아르파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이미 그 점은 포기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샨이 투덜거렸다. 

“소원을 들어주려다 낭패를 본 건 나다. 나의 신을 보면 죽는 신부를 어떻게 데려가겠나?”

투이나의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다채로운 감정이 스쳐 가던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럼… 우린 안 되겠네요?”

빠른 포기를 들은 샨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샨이 일부러 세게 손을 움켜쥐었다.

“그대가 절대로 나의 신을 마주하지 않도록 곱게 다뤄주지.”

말과 행동이 맞아떨어져야 말이지.

샨이 세게 잡는 바람에 다시 상처에서 피가 나기 시작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얼마나 곱게 다뤄줄지 상상도 안 되네요.’

만날 때마다 피를 봐서 이제는 익숙해졌다.

투이나의 손등을 힐긋 내려다본 샨이 힘을 풀었다. 어쩌면 부드럽게까지 느껴지는 동작이었다.

부담스러워진 투이나가 슬며시 손을 뺐다.

“소원을 들어줘서 고마워요, 샨.”

“고마우면 두 번째 시험이나 얘기해주면 좋겠군.”

샨이 심술궂게 대꾸했다. 그는 일부러 그녀 쪽을 쳐다보지 않으려는 듯 등받이에 목을 기댔다.

“뭘 준비하고 있나?”

“알면 놀랄걸요.”

너무 간단해서.

투이나는 두 번째 시험을 들은 샨이 화가 나서 아르파를 부를 확률은 얼마나 될까 생각에 잠겼다.

‘반반일 거야.’

그녀는 시험을 치르는 동안 샨과 좀 떨어져 있기로 다짐했다.

피를 뒤집어쓴 몰골로 신전에 돌아간 투이나 일행은 시종 하나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아이쿠!”

그는 바로 기절했다.

호루니가 잽싸게 잡아주긴 했지만 그녀도 아르파 신을 만난 여파에 좀 넋이 나가 있던 상태였다.

“우리 꼴이 말이 아닌가 봐요.”

투이나가 라카인을 돌아보았다. 하긴 밤에 보면 그녀도 기절할 것 같긴 했다.

온통 피가 굳은 모습을 한 라카인은 위협적일 만큼의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잘 눕혀주세요.”

“설마 또 오해하는 건 아니겠죠?”

“제가 살아있으니 지난번처럼 살해범으로 오인당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투이나가 농담 삼아 말했지만 호위들은 웃을 수 없었다.

‘이런.’

실패한 농담을 치워버릴 겸 투이나는 우물가로 향했다.

그런데 얼마 걷지도 않아 다시 방해를 받았다.

이번에 나타난 사람은 기절하지도 않았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인사했다.

“루가 님.”

공손하게 인사한 여자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상단에서 가져온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베인 크로퍼드 님께서 루가 님의 용서를 빕니다.”

투이나의 발이 멈췄다. 벌써 몇 번이나 겪은 일인데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베인과 헤어진 이후로 그는 정말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얌전하게 그녀를 기다린다는 뜻은 아니었다.

베인은 투이나가 이동할 때마다 끊임없이 사람을 보냈다. 매번 선물과 편지를 내밀며 용서를 빌었다.

‘…사과할 일이 아닌데.’

가뜩이나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던 투이나를 정통으로 들쑤시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물러가세요.”

투이나는 애써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무릎을 꿇었던 여자가 조용히 일어섰다.

어차피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또 다른 선물을 든 자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르파 사건만 아니었어도 그들을 모두 내보냈을 텐데.

사제들은 고조된 긴장을 견딜 수 없다며 반대했다.

내보내기엔 아직 필요한 무력이라고 말이다.

순진하고 애처롭게 그녀의 용서만을 비는 베인의 태도도 그들의 의견에 한몫 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의 미모는 남녀노소를 불문하니까.

라카인은 투이나 모르게 주변을 훑었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그는 모퉁이 너머에서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상단 사람이 나타날 때마다 매번 베인의 기척도 같이 느껴졌다.

아마 투이나가 용서하는 순간만을 기다리다가 나타나려는 것이겠지.

라카인은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지경에 빠져있을지는 이해했다.

한 때 투이나의 연인이었는데. 계속 그녀의 연인일 수 있었는데.

문장을 떠올리기만 해도 입 안이 썼다. 그러나 라카인은 결코 베인을 동정하지 않았다.

어떻게 감히 그러겠는가. 그녀가 지금 겪는 감정의 십 분의 일도 나눠 받지 못할 자신이.

라카인은 사랑을 받는 자신을 상상해볼 수가 없었다. 투이나가 베인에게 하던 대로 그를 끌어안아…….

…….

그럴 수가 있겠는가.

라카인은 자신의 얼굴이 피로 뒤덮인 걸 감사했다. 표정을 들키지 않을 테니까.

투이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베인을 보고 내가 무슨 표정을 지을지 모르겠어.’

위험을 감수하고 싶진 않았다.

투이나는 끈질기게 애정을 표현하려는 베인의 시도를 애써 외면했다.

“스카차는 여전한가요?”

투이나가 일부러 다른 이야기를 꺼내며 지나쳤다. 화들짝 놀란 호루니가 급하게 장단을 맞췄다.

“네, 네에. 루가 님. 아직 다른… 일에 바쁜 모양이에요.”

“호루니라도 일찍 돌아와서 기뻐요.”

투이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호루니는 힐끔거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따라갔다.

라카인까지 지나치자 희미하게 다른 발소리도 따라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또 다른 장소에서 다시 용서를 빌 것이다.

아르힘의 신전에는 몸을 숨길 만한 장소가 너무 많았으니까.

우물가에서 몸을 씻어내며 투이나는 아르파에게서 들었던 문답에만 집중했다.

병에 대한 것보다도 그녀가 얼마나 예외적인 존재인지가 더 신경 쓰였다.

‘왜 나만 예외일까? 병에 걸린 자들 중에서 왜 나만 마법이 통하고, 내게만 루가의 자리가 주어진 거지?’

투이나가 몸을 다 닦은 뒤에야 라카인이 버리는 물로 몸을 씻으려고 해 그녀는 새로 물을 길어주었다.

‘하지만 적어도 아르힘 님을 구할 방법은 찾았잖아.’

아르파는 마법이 절대로 신의 힘으로 향하는 문을 열지 못할 거라 단언했다.

하지만 그건 시드룬이 이미 영혼의 세계에 갔다 온 적이 있으며, 지금도 투이나의 도움을 받아 문에 근접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한 소리였다.

시드룬의 연구가 완성되는 날 아르힘을 꺼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어떻게 신이 갇혀있는지도 알아내고 말이다.

‘그러니 예정보다 앞당겨버리자.’

투이나가 결심했다.

* * *

두 번째 시험이 열리는 날이 밝았다.

투이나는 오랜만에 반듯하게 앉아서 분칠을 하는 시종들의 손에 자신을 내맡겼다.

그동안 실컷 맨몸으로 다니긴 했지만 그건 신전 안에서의 이야기였다.

신민들은 여전히 아르힘이 건재함을 믿고 싶어 하니까.

그리하여 라카인은 투이나가 신에 필적하는 아름다움을 걸치는 장면을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고요히 내리깐 속눈썹만 빼고 모든 부위에 시종들의 손길이 닿았다.

두건 위로 드리운 보석과 옅게 칠해진 연지가 더해지자 보는 자들은 그 아름다움에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시선을 제어하듯 손목과 목에 채워진 황금이 엄숙함을 더했다.

신전이 원하는 대로, 누구나 함부로 쳐다볼 수 없는 고고한 존재로 변모해가는 것이다.

신의 축복을 받은 조각가라도 만들어내기 어려운 자태였으나, 라카인은 감탄할 수 없었다.

왜 그토록 아름다운 것을 보았는데도 가슴이 조여들고 슬픔이 먼저 차오르는지, 그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마치 숨조차 쉴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다 되었습니다.”

투이나가 나풀거리는 천을 끌지 않도록 살짝 잡아당겼다.

‘꼭 결혼식 때 입는 것 같네.’

다섯 가지 문양이 겹쳐있는 예복은 화려했지만 색은 놀랍도록 절제했다.

샌들마저도 빛깔이 미묘하게 다른 세 끈을 꼬아 만든 고급품이다.

‘이런 자리에서 신전이 쓸 물건이 아닌걸.’

투이나는 뒤늦게 이것마저 베인이 보낸 선물일 거라는 데 추측이 닿았다. 아니, 확실했다.

‘미리 받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투이나의 낌새를 눈치챘으면서도 시종들은 시치미를 뗐다.

어차피 지금 갈아입기엔 시간이 없다는 걸 그들도 알았다.

하긴 시종들은 처음부터 베인에게 걸었던 사람들이다.

이제 와서 그들의 내기 돈이 사라지는 걸 보느니 투이나와 베인이 다시 잘 되기를 바랄 것이다.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바람에 투이나는 헛웃음을 지을 뻔했다.

“늦으시겠습니다, 루가 님.”

시종이 능청스럽게 재촉했다.

투이나는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바깥으로 나섰다.

‘겨우 이런 일로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거란 생각은 안 하겠지. 영리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투이나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베인은 단번에 알아본 눈치였다.

그녀를 다시 본 기쁨에선지 혹은 그의 선물을 입었다는 환희에선지.

당신을 보았다고 확연히 달라지는 낯빛이 멀리서도 선명했다.

기쁨으로 일그러진 표정이 두 사람의 앞날을 기대하는 것 같아 속이 불편해졌다.

나부끼는 바람 속에서 투이나는 고개를 돌렸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계단이 왼편으로 보였다.

두 번째 시험은 군중들 앞에서 치러질 것이다.

다만 구혼자들이 신전 밖으로 나갈 수 없기에 바깥과 너른 계단으로 이어져 있는 북쪽 광장을 시험 장소로 택했다.

사제가 미리 공지했기에 광장에는 수도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기대감과 경탄에 젖어 웅성거리고 있었다.

지금 올려다보는 사람들이 바로 내기로 수도를 들끓게 만든 장본인들이다.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흰 대리석 바닥 위, 구혼자 세 사람은 시험을 치르기 위해 서 있었다.

샨은 여느 때처럼 오만하고 고집스러운 자태로 사람들을 굽어보았다.

다소 쌀쌀한 바람이 그를 할퀴는데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을 것처럼 생겼다.

그 옆에 선 시드룬은 긴 머리카락을 두터운 로브 안에 감추고 눈동자를 굴렸다.

투이나를 발견한 그가 인사를 하듯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베인은 투이나가 나타난 순간부터 모든 것에 관심을 끊고 그녀만 응시했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선을 의식하며 투이나가 계단의 끝으로 나아갔다.

“두 번째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녀가 말하자 정렬해있던 사제들이 반복해서 다시 외쳤다. 광장 구석구석까지 들릴 수 있도록.

사람들의 관심이 한 데 모였다.

“지난 시험에서는 크로퍼드가 이겼었지?”

“이번에도 이기시려나.”

“그런데 왜 우리까지 필요한 거야? 구혼자들끼리 겨루는 일이잖아.”

그들의 의문은 바로 해소되었다. 투이나가 말을 이었다.

“이 자리에서 구혼자들에게 두 번째 과제를 내겠습니다. 그러나 답은 제가 아닌 여러분이 들을 것입니다.”

모인 군중들이 웅성거렸다.

“순서는 상관없습니다. 모든 대답을 들은 후 가장 만족스러운 답을 한 사람을 정해주세요. 그러면 승자가 나올 것입니다.”

투이나는 계단의 양옆에 정렬한 사제들과 시종들을 가리켰다. 그들이 수를 셀 것이다.

하지만 시험이 그녀의 생각대로 흘러간다면 숫자를 일일이 셀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투이나의 말을 전하는 동안 누군가 외쳤다.

“그래서 질문이 뭡니까?”

“알려주세요, 루가 님!”

“재밌겠는걸.”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분위기가 금세 가벼워졌다.

투이나는 그들의 마음이 깃털처럼, 공기에 얹혀 날아갈 만큼 가벼워지기를 바랐다.

이 질문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들어선 안 되니까.

투이나는 사제들에게도 미리 밝히지 않았던 질문을 입 밖으로 던졌다.

“신이 사라진다면,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건가요?”

투이나가 구혼자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표정이 각양각색으로 바뀌어있었다.

팔짱을 푼 샨이 진담인지 가늠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고, 베인은 금방이라도 넘치기 직전이었던 눈물을 거둬들였다.

미리 투이나에게 귀띔 받았던 시드룬만이 고요했다.

‘그는 마지막 차례야.’

두 번째 시험을 알려줄 때 투이나는 시드룬에게 함께 당부했다.

다른 사람이 대답할 때까지 나서지 말아 달라고.

시드룬이 이길 거라 예상하면서도 투이나는 여전히 다른 두 구혼자가 내놓을 대답이 필요했다.

술렁임이 커지는 군중처럼 투이나의 긴장도 파도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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