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 (27/43)

27.

'…두렵습니다. 무섭습니다! 죽고 싶지 않습니다!' 신이 가로되, '포기하기엔 이르다. 네게는…'

베인이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저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루가 님의 호위를 맡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도를 넘어 약하고 허술하더군요.”

“제게는 충분했어요.”

“루가 님이 원하신다면 말동무 삼아 만나시는 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베인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투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을 호위로 두는 건 자신의 결정이다.

‘마음에 안 들어도 내가 하는 일이면 일단은… 놔두겠다는 건가.’

베인이 상단에서 유감없이 재능을 발휘한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신전이 그에게 포섭된 일은 단순히 재능으로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아르힘 님은 어떻게 되신 거지?’

신이 동의하거나, 적어도 침묵이라도 하고 있어야 성립되는 상황이다.

이 모든 사건 뒤에도 여전히 /나타나지 않는 신의 모습이 불안했다.

‘하나씩 확인해보자.’

투이나는 여전히 눈에서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베인을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나갈 때 막을 건가요?”

“제가 어찌 루가 님이 가시는 일을 방해할까요.”

뻔뻔하게도 베인은 자신이 독침을 찔렀던 자리에다 입을 맞췄다.

“그저 여독을 걱정했을 따름입니다.”

“제 거처로 돌아가겠어요. 그리고 이제 허락 없이 거처 밖으로 나오는 걸 금합니다.”

“루가 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상황을 파악할 때까지 근신하라는 소리에도 베인은 태연했다.

솔직히 못 나가게 붙잡을 줄 알았다. 투이나가 미심쩍게 그를 흘끔거리자 베인이 한 손까지 내밀었다.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나오지 말라니까요.”

“거처에서는 함께 걸을 수 있지 않습니까?”

베인이 깍지를 껴 왔다. 투이나는 마지못해 그를 따라갔다.

둘은 원래 연인 사이였다. 이런 상황이 되었다고 칼처럼 쉽게 그를 잘라낼 수 없었다.

기쁜 듯이 웃으며 걷는 베인에게 투이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계기가 뭐죠?”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제멋대로 구는 거요.”

천천히 베인의 걸음이 멈췄다. 투이나는 말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베인은 또 무엇이 즐거웠는지 입술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당신이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단번에 투이나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저런 얼굴로, 저런 표정으로 할 말이 아니었다.

“……그전에도 신전을 나간 적은 많았어요.”

“압니다.”

“이번에는 달랐던가요?”

“글쎄요.”

베인은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투이나는 그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지도 못했으니까.

“……굳이 설명하자면 제 감정이 커진 탓이겠죠.”

그들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손을 풀려던 투이나에게 힘이 들어갔다. 베인의 손가락이 그녀를 얽어 왔다.

투이나가 힘을 주어 당겼지만 그의 손가락은 집요하게 따라왔다.

“바깥이에요.”

베인은 분명히 거처에서만 머물겠다는 이야기에 동의했다.

질책을 들은 베인이 갑자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온 신전이 모두 제 거처가 아니겠습니까.”

“네?”

“신께서 제한하신 곳이 신전이니까요.”

베인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구혼자들은 신전 바깥으로 나가지 말라.”

불길한 예감이 든 투이나가 몸을 비틀었다.

“제가 쫓을 수 없으니 루가 님을 나가지 못하게 할 수밖에요.”

베인의 뒤로 소리 없이 사람들이 나타났다. 음습한 광경에 투이나가 기어이 그를 뿌리쳤다.

‘…완전히 돌아버렸어.’

베인은 투이나가 억지로 잡아떼느라 새빨갛게 변한 손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웃었다.

섬뜩할 구석이 없는데도 순간 소름이 돋아났다.

저렇게 애정으로 점철된 동작이 왜 무서웠는지.

투이나가 뒷걸음질 쳤다.

‘내가 아는 베인은…. 저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베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투이나가 지금은 뿌리쳐도 결국은 그에게 돌아오리라는 듯.

“더 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을 에워싼 사람들을 뒤로한 베인이 말했다.

“제게는 루가 님께 드릴 휴식이 얼마든지 준비되어있습니다.”

독처럼 진하고 확실한 휴식을.

투이나는 홱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그를 더 쳐다볼 수가 없었다.

저 입에서 또 무슨 말이 나온다면…….

누군가 눈에 재를 뿌려도 지금보다는 그를 보기 쉬울 것 같았다.

베인은 그녀를 쫓지 않았다.

신전 안은 이미 베인이 풀어놓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어딜 가나 보여.’

예전에는 온통 사제들과 시종들뿐이었는데.

조용히 따라오는 인원들이 너무 많았다.

레오나가 말했던 병력은 오천이다.

상단의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인원을 빼면 신전에 몇 명이나 들어와 있을까?

“하아…! 하…….”

숨이 차도록 달린 투이나가 급제동을 걸었다. 성소 앞은 이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돌아가십시오, 루가 님.”

“베인 님이 걱정하실 겁니다.”

투이나는 언덕 앞을 메운 사람의 벽을 보았다. 헛수고다.

‘아르힘 님은 원하시면 직접 찾아오실 수 있어.’

투이나는 신을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노골적으로 길을 막은 사람들을 보며 그들이 어디까지 침투해있는지 확인하려던 것뿐이다.

그들의 방해에도 성소의 종탑은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 그대로였다.

변치 않는 모습에 아르힘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거면 됐어. 무슨 사정이 있으시더라도 곧 돌아오실 거야.’

투이나는 가슴 앞에 손을 모으고 오랫동안 종탑을 올려다보았다.

마음으로 보내는 기도를 끝낸 그녀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잠깐이라도 멈추면 금방이라도 상단에서 나온 이들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챌 것 같았다.

산전의 지리를 손바닥처럼 읽어내는 그녀라도 먼저 나간 호위들이 어디에 있을지 짐작하는 건 어려웠다.

다행히 행운이 따라주었는지 사제들과 뒤섞여 걸어가는 호위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눈에 띄게 높은 머리꼭지를 가진 라카인을 발견한 덕분이기도 했다.

거처로 돌아가던 호위들은 숨이 턱에 차서 달려온 투이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루가 님? 왜 이렇게 급하게 오셨어요?”

“하…. 다행이다. 따라잡았네요.”

“천천히, 숨부터 고르십시오.”

라카인이 선뜻 투이나를 부축하려고 들자 옆에 있던 사제가 금세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따로 얘기 좀 할게요.”

“안 됩니다.”

투이나가 땀에 젖은 고개를 들었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사제가 내뱉었다.

“루가 님. 신전으로 돌아오신 뒤에 하실 말씀이 정녕 그것뿐이십니까?”

‘책임을 물으라는 건가?’

투이나는 허파에 잔뜩 숨을 채워 넣으며 호흡을 가라앉혔다.

“제가 잘 다녀왔는지 궁금하셨어요?”

“루가 님!”

“농담이었어요. 미안해요.”

투이나는 후 하고 허파에 숨을 잔뜩 채워넣었다.

“그런 식으로 떠나버려서 놀랐죠?”

“정말로 어떻게 되신 줄 알았습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투이나는 노여워하는 사제의 팔을 붙들었다.

“아직도 여기 있으면 사형당할 사람뿐인가요?”

“…….”

“도망친 대가는 제가 치르겠습니다.”

“너무 늦으셨습니다.”

사제가 어색하게 그녀의 손을 털어냈다.

“어차피 사형이 취소되어서 돌아오신 것 아닙니까. 설마 저자가 함께 올 만큼 뻔뻔할 줄은 몰랐지만.”

“제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아르힘 님은 왜 나타나지 않으시는 거예요?”

“저희는 모릅니다.”

사제가 울컥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루가 님이 계시지 않는데 저희가 어찌 알겠습니까?”

투이나의 눈이 커졌다. 사제는 화를 내기보다는 필사적인 어투였다.

그러나 그녀가 자세한 이야기를 묻기도 전에 사제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뒤로 크로퍼드 상단의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던 것이다.

그들에게 목소리가 들릴 거리가 되자 사제는 갑자기 표정을 싹 지워버렸다.

“이들은 어차피 계속 신전 안에 머무를 테니 다른 시간에 만나러 오시면 됩니다.”

“네, 루가 님. 저희 금방 다시 찾아뵐게요.”

호루니가 그들을 거들었다.

그녀의 말투는 기이하게 발랄했다. 스카차도 비슷하게 해맑았다.

마치 그녀만 모르는 들뜰 일이 생긴 것 같았다.

‘이렇게나 빨리?’

두 사람도 달라진 신전의 모습에 그녀만큼이나 놀라지 않았나?

그들을 눈여겨 본 투이나가 말했다.

“저도 원래 거처로 돌아갈게요. 신전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을 할 예정이거든요. 그때 약속한 일을 꼭 해주세요.”

투이나는 그들이 암시를 알아듣길 간절히 바라며 말했다.

‘마법사의 마을에 갈 때는 함께 가겠다고 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시드룬을 부르려면 신전에서만 가능하다고 했던 일도 기억하겠지?’

투이나는 확신하고 싶었지만 호위들은 아리송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보다 확실한 암시를 건네고 싶었지만 상단 사람이 금세 투이나의 팔을 붙잡아왔다.

“루가 님. 돌아가셔야 합니다.”

라카인은 붙잡은 팔을 보다가 무심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희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아…. 알겠어요.”

약간 당황한 투이나가 인사를 받았다. 그들 중에서 라카인이 가장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아냐, 괜찮아.’

그녀처럼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기에 일부러 더 순순히 갔을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상황을 알 수 없을 때 소란을 일으켜 봤자 손해를 보는 건 투이나뿐이다.

‘그러니까 믿어.’

투이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원래였다면 그처럼 무조건적으로 믿을 상대가 더 많았다.

하지만 신은 응답이 없었고 연인은 변질했다.

지금은 조각난 믿음이라도 품고 가는 수밖에.

씁쓰레한 표정을 지은 투이나가 팔을 잡은 손등을 붙들었다.

“걱정 말아요. 갈게요.”

“시중을 들 자들은 이미 데려다 놓았습니다. 원래 루가 님을 모시던 자들로…….”

“그전에 한 군데만 더 다녀가겠습니다.”

투이나가 슬며시 말을 끊었다.

호위들이 없는 지금, 의아한 표정을 짓는 상단 사람들이라도 필요했다.

* * *

샨의 거처로 가는 동안 불안은 더욱 커져만 갔다.

‘아직 샨의 거처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분위기가 심각하잖아?’

원래 샨의 거처에만 모여 있던 하인들이 곰팡이처럼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은 경계를 맞댄 신전을 감시하듯 서 있었는데, 하인 한 사람당 무사제와 상단 사람들이 거리를 두고 주시하고 있었다.

침묵으로 서로를 찌를 듯했다.

조금만 불씨를 댕기면 금세 불길이 번질 것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돌아온 투이나의 모습에도 하인들은 그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완벽한 무관심이 여유 없는 모습을 대변하는 듯했다.

‘분명 샨이 얌전해져서 거처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했어.’

이건 그 반작용일까?

하인들이 샨의 명령도 없이 움직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왜 샨이 직접 나서지 않는 것인가. 그가 화를 내지 않을 리가 없는데.

거처가 가까워질수록 이상한 술렁임이 깃들었다. 거처의 입구를 본 투이나는 자신이 왔음을 알리려고 했다.

그러나 입구를 지키던 하인은 아무런 말도 없이 한 쪽으로 비켜섰다. 한차례 심판을 받은 형인처럼.

걷는 동안 조바심이 새어 나왔다.

“샨은 좀 어땠나요?”

“…….”

앞서 걷는 하인은 말이 없었다.

투이나를 보고 루가가 왔다며 알리는 과정도 없었다.

공기는 불온하고 예감은 조심하라는 신호를 계속 울려댔다.

‘그래도 만나지 않을 수는 없어.’

무슨 속내인지 몰라도 샨은 사형을 철회하는 데 동의했다. 그가 그녀 좋으라고 그랬을 리는 없다.

하인은 투이나를 샨이 머무는 천막 앞에 데려간 뒤로 움직이지 않았다.

샨에게 그녀의 도착을 알리지도 않았다.

“안 들어가나요?”

“…아무도 방해치 말라 하셨습니다.”

하인이 답했다. 팔을 드러낸 하인에게 보이는 흉터가 유난히 신경 쓰였다.

새로 생긴 것 같았다.

흉터를 응시하던 투이나가 입구를 가린 천을 당겼다.

‘어둡네.’

투이나가 샨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어림짐작으로 더듬더듬 주변을 만지며 다가갔다.

분명 샨이 여기 있다고 했건만. 사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샨?”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딱 하고 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부싯돌이었는지 곧 시야가 밝아졌다.

등잔을 든 샨이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투이나는 인사말마저 잊어버렸다.

“그대로군.”

샨의 눈동자에 불길이 일렁였다.

“오랜…만이에요.”

“…….”

샨은 정말로 화가 나지 않은 것 같았다.

만나자마자 그녀의 멱살을 잡을 줄 알았던 터라 그가 보여주는 차분함이 기이하기만 했다.

“라카인의 사형을 취소해줬다고 들었어요.”

투이나가 뻑뻑한 입으로 말문을 텄다.

“죽이지 않을 결심을 해줘서 고맙…….”

“그렇게 하면 그대가 돌아올 줄 알았다.”

샨이 투이나의 말을 끊었다.

그가 말할 때마다 호흡을 따라 불꽃이 흔들렸다.

“그대가 사라진 뒤로 온 거처를 다 뒤집어 보았다. 나가는 걸 본 자가 없으니. 그런데 그대를 목격한 건 엉뚱하게 신전에 있는 놈이더군.”

“…….”

“마법사에게 뭘 대가로 주었지?”

샨은 마법사가 투이나를 데려갔다고 확신한 채 묻고 있었다.

‘하긴 다른 결론을 내기도 어렵지.’

“시드룬과 저는 모종의 계약을 했어요. 자세한 내용은 알려줄 수 없지만, 지금까지 절 도와준 걸 보면 짐작하리라 믿어요.”

“사냥터.”

샨이 기억났다는 듯이 답했다. 투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샨이 물었다.

“결혼을 전제로 한 계약인가?”

“네? 아, 아뇨! 오히려 결혼에서 멀어지려는 계약이죠.”

급한 마음에 투이나가 안 해도 될 말을 해버렸다. 샨이 약간 흥미를 드러냈다.

“시드룬의 일이 잘 풀린다면 꼭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는 약속이었어요. 내용은 알려줄 수 없지만요.”

“내용엔 관심 없다.”

샨이 단조롭게 대꾸했다.

“어쨌든 그대의 마음은 마법사에게 없다는 거로군.”

“그…렇긴 하지만….”

‘샨이 그걸 물어봐요?’

“그리고 내게도 없지.”

불길한 느낌이 빠르게 척추를 핥았다.

하지만 그녀의 두 눈으로 보인 샨은 여전히 미동도 없이 서 있었을 뿐이었다.

“그대가 떠난 뒤에 나는 계속 이곳에 있었다.”

샨의 시선이 향한 곳은 투이나가 썼던 침상 위였다.

정리되지 않고 흐트러진 모양이 이상하게 눈에 박혔다.

투이나가 같은 장소를 보는 걸 알았는지 샨이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대가 건든 이후로 감히 아무도 이곳을 만지지 못했지.”

그런 것치고는 꽤 뒤적인 흔적이 많이 보였다.

투이나의 잠버릇이 저렇게 나쁘진 않은데.

그녀가 묻는 듯한 시선으로 돌아보자 샨이 비죽 윗입술을 들어 올렸다.

“나를 빼고는.”

샨이 갑자기 등잔을 쥔 손을 놓았다.

투이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샨의 천막은 바닥이 천과 가죽이다.

불에 타기 쉬운 모든 것들 위로 기름이 엎질러졌다.

화르륵!

“샨! 불이!”

“왜 걱정하지?”

순식간에 타오르는 화염 위로 샨이 중얼거렸다.

“불은 아르힘의 힘이 아니던가?”

“아니에요! 이쪽으로 와요!”

투이나가 급하게 불을 끌 걸 찾아보려고 방심한 찰나, 열기를 뚫고 샨의 손아귀가 날아왔다.

“윽?”

꼼짝없이 붙잡힌 투이나가 발버둥 쳤다.

타는 듯한 느낌이 목을 조여 왔다.

“하긴 걱정해야지.”

“샨, 이거… 놓….”

“나를 속이고 기만했으니.”

투이나의 손톱이 샨의 손을 긁었다. 그의 눈이 붉었다.

‘아르파 신이?’

불티와 화염 때문에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의 손가락이 점점 더 억세졌다.

“더는 못 참겠군.”

“헉…윽….”

“나를 떠나?”

확실하게 변질되는 눈동자가 무서웠다.

새빨간 색으로 뒤집힌 걸 보고 나서야 지금까지 했던 대화는 기적적으로 신을 누른 대화라는 걸 깨달았다.

아르파가 강림하고 있었다. 샨의 입을 빌어 아르파가 뇌까렸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아야지.”

투이나가 버둥거렸다.

불길이 점점 번져가는 데도 그는  직일 생각을 안 했다.

연기를 발견한 바깥에서 소란이 이는 게 어렴풋이 느껴졌다.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인간이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는 것도 지겨워 미칠 때에, 겨우 이런 피로 나를 식히려고.”

그가 잡은 목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강제로 빼앗긴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

‘아무도 없어요?’

점점 흐려지는 시야로 투이나가 새된 소리를 냈다.

“여기 있으면… 우리 둘 다… 죽어요.”

샨의 얼굴이 알 수 없는 빛으로 물들었다.

이 와중에도 그의 목숨을 챙기는 그녀가 어이없는 건지, 하찮다고 여기는 건지.

그가 오만하게 말했다.

“나는 죽지 않는다.”

저자는 샨이 아니니까.

‘신이시여, 용서하세요.’

비로소 아르파 신임을 확신한 투이나가 그를 걷어찼다.

샨의 몸에 강림한 아르파가 너무도 쉽게 그녀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가 그쪽으로 정신이 팔린 틈을 타 투이나가 발끝으로 떨어져 있던 등잔을 밀어냈다.

데굴데굴 굴러간 등잔이 침상 옆에 툭 부딪혔다.

남은 기름으로 타던 불꽃이 점점 작아지는 걸 보며, 투이나는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기도와 어울리지 않는 보라색 마법진이 터져 나왔을 때도 간절함은 이어졌다.

“마법사를 불렀나?”

“…….”

불길이 난무하는 난장판을 본 시드룬은 침착했다.

샨이 투이나의 목을 붙잡고 있는 광경을 보고도 그랬다.

“구해야겠군요.”

“카악!”

샨의 손목에서 보라색 마법진이 번쩍였다.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지만 제대로 된 타격인 것 같았다.

손목에 시커멓게 화상을 입은 샨이 투이나를 떨어트렸다.

“커헉! 콜록, 콜록…!”

곧장 바닥으로 떨어진 투이나가 기침했다.

숨을 다시 쉬려고 해도 사방이 온통 연기라 쉽지 않았다.

“이 더러운 것이…!”

눈이 뒤집힌 아르파의 목소리가 태산처럼 울렸다.

그를 정면으로 마주 본 시드룬의 눈과 코에서 울컥 피가 터져 나왔다.

시드룬의 얼굴이 점점 새빨간 가면처럼 변해 가는데도 그는 멈추지 않고 거대한 마법진을 열었다.

불에 타들어 간 천장 위로 폭풍우가 치는 구름이 보였다.

다른 세계라는 걸 직감한 순간 세찬 빗줄기가 얼굴을 때렸다.

투두두두!

혹독하게 떨어지는 물줄기가 아프다고 느껴질 만큼 강했다.

이제 아르파의 분노는 온전히 시드룬을 향했다.

그러나 같은 자리에 있던 투이나 또한 신의 분노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얼룩이 있는 자리가 아파…!’

샨을 향해 솟구치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토할 것 같아진 투이나가 입을 틀어막았다.

“우욱…!”

참으려고 애를 쓰던 투이나가 왈칵 피를 토했다.

그러나 손가락 사이로 떨어지는 건 붉은 색이 아니었다.

‘회색 피?’

투이나의 몸에 있던 모든 얼룩들이 진동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아르파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새빨개진 두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것과 달리 진정으로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감히, 이런 것을 내 눈앞에 보이다니.”

아르파 신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내리꽂혔다.

“아르힘은 이런 것을 거두어 데리고 있었던 거냐?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투이나는 흠뻑 젖은 몸으로 떨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르힘 님.’

“네 신은 오지 않는다.”

아르파가 다시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목덜미에 거대한 칼이 드리워진 것 같았다.

“멍청하게도 갇혔으니까.”

아르파의 손에 아까는 보이지 않던 칼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와 시드룬이 흘린 피가 모여들어 얇은 칼날을 이루고 있었다.

다만 그녀가 마지막으로 흘렸던 회색 피만은 여전히 옷에 고여 있었다.

“지저분한 것. 너만큼은 지금 죽여 다시는 어느 세계에서도 보지 못하게 하리라.”

칼이 치켜 올라갔다. 투이나는 그것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머리 위에 칼이 떨어지더라도 도저히 이대로는 눈을 감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때 둘 사이를 누군가 뛰어들었다.

“신이시여.”

투이나는 무너지듯 신음했다.

“라카인…….”

그에게는 시드룬처럼 자신을 보호할 수단이 없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순간은 아주 찰나였다.

그의 몸에 돋아난 새빨간 점이 곧 피가 되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신의 신을 가로막은 라카인은 산 채로 뽑혀 나가는 피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르파 님께 고합니다.”

라카인의 목소리는 이런 순간마저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제물의 피가 바다를 이뤘으니 그 자리를 박차고 하늘로 돌아가소서.”

“내게는 한참 모자라다!”

아르파가 발광하듯 소리쳤다. 라카인과 투이나의 귀에서 검붉은 액체가 흘렀다.

“신의 피는 하나로 세계를 이루는지라.”

라카인이 목소리보다 피를 더 많이 토해내며 말했다.

“당신께서 보신 피는 돌려받을 자가 있습니다.”

라카인이 모든 힘을 짜내어 아르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르파가 거칠게 후려쳤으나 라카인 또한 단련된 자였다.

고통을 받아낸 라카인이 샨의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를 가슴에 박아 넣었다.

아르파가 아닌 샨의 피가 분출했다.

“…어리석은 것! 내 너를 기억하리라!”

쩌렁쩌렁하게 울리던 고함이 갑자기 뚝 끊겼다.

쏴아아.

빗소리로 가득한 곳에서 샨이 다시 푸른 눈을 떴다.

크게 부릅뜬 시야로 샨이 처음 보는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투이나와 라카인이 흘린 피는 이미 빗줄기에 모두 씻겨나갔다.

여전히 마법진 건너편에 있던 시드룬만이 붉은 핏줄기를 흩뿌리며 다시 마법진을 닫고 있었다.

천천히 잦아드는 빗속에서 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금 전까지 가득했던 분노보다 회한과 체념이 더 강해 보였다.

“그래, 또 내가 이걸 다 했군.”

왕의 자존심은 결코 샨에게 후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하여, 불쾌감이 대신 그를 거세게 짓눌렀다.

그의 입꼬리가 비틀린 채 올라갔다.

“과연 신의 말대로 지저분한 꼴이 아닌가.”

그의 시선은 분칠이 모두 씻겨나간 투이나를 향해 있었다.

화상처럼 모나고 멍처럼 새카만 얼룩을 향해서.

샨의 피는 신을 불러올 수도, 돌려보낼 수도 있었다.

신을 담고 있는 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샨은 아르파가 될 수 있었지만, 아르파는 샨이 될 수 없었다.

샨이 때때로 자신을 신처럼 말하는 걸 듣기만 했을 때는 실감하지 못했던 문제점이었다.

이러면 샨에게 신의 잘못을 물어볼 수가 없었으니까.

그들을 둘러싼 사제들이 신과 마법사가 불러낸 재해가 휩쓸고 간 자리를 멍하니 응시했다.

“왜 아르파 신을 불러내셨습니까.”

사제들의 치료를 거절한 샨이 질문한 자를 빤히 노려보았다.

“내 감정이 격해졌을 따름이다. 신이 오는 일을 한낱 인간이 결정하겠나?”

샨은 한쪽 팔을 들어 올려 목걸이에 찔린 자리에 붕대를 감았다.

그를 다치게 한 장본인인 라카인은 정작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감히 주군을 찔렀다는 사실에 오히려 다른 하인들이 표정 관리를 못 할 정도였는데도 말이다.

먼저 치료를 받은 투이나는 혹시라도 라카인이 다시 머리를 박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라카인은 지난번에 샨을 거역했을 때 스스로 손을 찧어버렸었다.

‘내가 안 볼 때 하는 건 아니겠지?’

지금은 얌전하고 안정되어 보이지만.

하긴 라카인에게만 걱정을 쏟아붓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샨의 천막은 완전히 불타버렸고, 바로 폭우가 쏟아진 바람에 복구할 것도 없이 모든 흔적이 떠밀려갔다.

치료는 받았지만 불과 연기를 들이마신 목이 여전히 칼칼했다.

피가 뽑혀 나갔던 자리도 다 나았지만 꺼림칙한 간지러움이 남아있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치료받는 걸 보면서도, 워낙 강렬했던 일이라 좀처럼 충격적인 장면들이 잊히지가 않았다.

“목걸이는 압수해야겠군요.”

유일하게 차분한 목소리가 말했다. 베인이 팔짱을 낀 채 샨이 일으킨 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기가 아니라 고려하지 않았지만, 아르파 신을 불러낼 수 있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멍청한 놈. 그걸 뺏는다고 신이 나타나지 않을 것 같나? 내 이로도, 손톱으로도 얼마든지 피가 나는 것을.”

그러자 베인은 샨 자체를 압수해서 추방해 버리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주 오랜만에 구혼자 세 사람이 모였건만.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지금이 가장 살벌한 구혼자 모임이었다.

“그보다 내가 묻겠다.”

샨이 냉혹한 눈으로 투이나를 응시했다. 그녀를 응시하기는 시드룬도 마찬가지였다.

아까부터 그들의 시선을 느끼고 있던 투이나는 잠자코 눈을 내렸다.

“저렇게 병든 자와 혼인하라고 했던 건가?”

“놀랍군요.”

샨과 시드룬의 반응은 대조적이었다.

‘저 표정들. 무슨 마음인지 잘 알지.’

모른척하기엔 그녀가 구혼자들의 마음을 너무 잘 꿰고 있었다.

샨은 생각보다 심한 병에 짜증도 났고, 상황을 수습하기도 귀찮아 화를 내는 중이다.

시드룬은 당장 연구를 다시 시작하고 싶을 것이다.

둘 다 눈이 번쩍거렸다.

그러나 베인만큼은 무슨 마음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가장 늦게 나타난 베인은 엉망진창이 된 샨의 거처에서 부상자들을 끌어내고 치료를 지휘했다.

그도 투이나의 몸에 드러난 선명한 얼룩을 보았을 테지만, 적절한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병에 대해 묻지도 않았다.

아르힘 님이 병을 모두 치료한 게 아니냐는 의문을 품을 법한 사람은 그밖에 없었는데도 말이다.

‘베인이 그만큼 감정을 누르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던 걸까.’

베인의 마음을 모르겠다. 수줍음과 애틋함이 책처럼 읽히던 그는 자취를 감춰버렸다.

투이나는 또다시 새까맣게 타들어 간 얼룩을 응시했다.

이미 문제들이 산더미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응어리가 그녀의 명치를 살살 문질렀다.

너의 신이 갇혀 있다.

‘아르파 신이 했던 말이 정말 사실일까?’

지금도 아르힘의 힘으로 치료받고 있으니 더더욱 믿기 어려웠다.

게다가 도대체 신을 무슨 수로 가둔단 말인가?

‘감금이 사실이라면 납득은 돼.’

이 모든 난리에도 불구하고 아르힘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신이 수도에 강림하고 신전이 불타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 있을 리가 없다.

신을 가두는 방법이 정말로 있다면.

“루가 님.”

부드러운 목소리가 다시 주의를 끌었다.

“많이 놀라진 않으셨습니까.”

“아…….”

투이나가 입술을 떼었다. 베인이 상냥하게 물었다.

“저자가 루가 님께 무슨 짓을 했는지 모두에게 설명해주시겠습니까?”

“…….”

화났구나.

표정이 저래서 무심코 넘겼는데, 베인도 사실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열이 올라 있었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투이나가 샨에게 죽을 뻔했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고의가 다분하다는 점도 물론이다.

다만 베인이 그의 입으로 지적하지 않고 투이나에게 넘긴 걸 보니 은근히 그녀의 질책을 신경 쓰고 있는 모양이다.

정말 루가가 되고 싶었던 거냐고.

베인은 결코 그런 적이 없는 듯 한발 물러나 있긴 했지만, 그 배려부터가 이미 그의 위치를 말해준다는 걸 모르는 걸까?

‘알고 있겠지.’

투이나는 말없이 내밀어진 베인의 호의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루가라는 직위는 호의로 돌아가는 신분이 아니었다. 왕도 마찬가지겠지.

투이나는 모두가 그녀의 원망을 기대하는 시선을 끊어냈다.

“두 번째 시험을 치를 예정이에요.”

“예?”

뜬금없이 튀어나온 주제에 사람들이 당황했다.

투이나는 일부러 샨의 살해 시도나 베인의 신전 점거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아르힘의 부재까지 감출 생각이었다.

하나를 설명하면 다른 하나까지 줄줄 딸려 나올 판이었으니까.

아르파가 여기에 강림했다는 사실에서 주의를 돌려야 했다.

‘그렇지만 이대로 넘어가선 안 되겠지.’

다분히 경고를 담은 눈짓으로 투이나가 말을 이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지만, 여러분이 신전에 온 목적을 잊진 않으셨겠죠. 다들 두 번째 시험에만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투이나는 여전히 얼룩을 찌르듯이 응시하는 시선을 무시했다.

“물론 지금이라도 저와 결혼할 뜻이 사라진 분은 돌아가셔도 좋아요.”

베인이 짐짓 아프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절대로 그의 마음이 변할 리가 없는데 의심하는 말을 들어 슬프다는 뜻이다.

“당연히 받아들이겠습니다. 루가 님께선 이미 우리의 다음을 생각하고 계셨군요.”

베인이 자연스럽게 그녀를 자신과 하나로 묶었다. 샨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시드룬은 평소처럼 대답했다.

“참가하겠습니다.”

“샨은요?”

투이나가 직접 물었다.

샨이 분노를 드러낼 기회는 미리 차단해버리는 게 현명했다.

그가 그녀를 죽이려 드는 게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테니까.

투이나는 지금은 딱 거기까지만 기억하기로 마음먹었다.

의외로 샨은 투이나가 말을 걸자 사납던 기세가 가라앉았다. 여전히 입은 퉁명스러웠지만.

“결혼할 즈음에는 전부 나아있겠지?”

“…물론이죠. 아르힘 님의 뜻대로.”

아르파가 강림했을 때 샨의 정신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도 신이 했던 말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아르힘이 갇혀 있다는 이야기에 기회를 잡았다며 기뻐할 줄 알았어.’

샨은 오히려 생각이 더 많아진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대의 말이 진실인지 확인해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겨야겠군.”

투이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샨의 바람과 달리 두 번째 시험은 가장 그에게 불리한 시험이 될 것이다.

“지쳤을 테니 다들 돌아가는 게 좋겠네요. 샨의 거처는 어떡하죠?”

“예비용으로 가져온 게 쌓여있다.”

“잘됐네요. 신전에 보내놓은 하인들도 도로 불러들이세요.”

투이나가 권고했다.

“시험이 시작된 이상 필요 없는 긴장을 조성하고 싶지 않아요.”

“깔끔하게 승부하자는 거군.”

샨이 턱을 까딱였다.

“그래서 시험 내용은?”

“준비가 마련되면 여러분을 한 자리에 불러놓고 두 번째 과제를 내겠습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은 사람이 승리합니다.”

“무슨 시험인지 미리 알려주시지 않을 겁니까?”

“네.”

투이나가 잠깐이나마 시드룬 쪽으로 쏠리려는 시선을 참았다.

‘완벽하게 돕는다는 약속은 못 하지만 그래도 이번엔 시드룬이 이기는 방향으로 해야겠지.’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회는 있다.

‘그래도 만약 다른 구혼자들이 두 번째 과제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찾아낸다면. 고민이 줄어들 거야.’

“여러분의 지혜를 기다리겠어요.”

투이나가 말을 맺었다.

* * *

샨의 거처를 떠나는 투이나에게 베인이 직접 옷을 내밀었다.

공작새 무늬가 비단실로 수놓아져 손으로 만지면 날아갈 것같이 화려한 옷이었다.

투이나가 돌아올 줄 알았다는 듯이 베인이 비단옷을 그녀의 어깨에 둘렀다.

“…바닥에 끌려요.”

“루가 님의 몸에 닿은 사실만으로 이 옷에게는 영광이 될 것입니다.”

베인이 태연하게 말했다. 투이나는 잠시 아연한 표정이 되었다.

“이제 제 말을 듣지 않기로 결심하셨나요?”

“저를 떠나 샨에게 가시면 서운합니다.”

베인이 떨어지지 않도록 겉옷을 여며주었다. 어깨에 닿는 온기가 유독 길었다.

“루가 님의 목숨을 걱정하다 제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듯합니다.”

“…….”

투이나는 질척이는 땅바닥에 끌리지 않도록 옷의 밑단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하지만 베인이 모르는 척 그녀의 손을 잡아 와 결국 아름다운 천은 진흙탕에 떨어지고 말았다.

손가락 깍지를 꽉 낀 베인이 사르르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루가 님과 함께 걷는 것도 오랜만이군요.”

산책이라도 나온 듯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샨이나 시드룬이 보든 말든 상관도 않겠다는 애정행각이 위화감을 더했다.

한때는 베인을 살리기 위해서 관계를 숨기려고 필사적이었다.

‘그럴 필요가 없던 걸까.’

결국은 이렇게 되돌려 받게 될 거였는데.

투이나는 작지만 그의 귀에는 똑똑히 들어가도록 말했다.

“아르힘 님을 가둬가면서까지 얻고 싶은 게 이런 힘이었나요?”

베인은 미소만 지을 뿐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맞닿은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감촉이라도 달라질까 싶었는데, 그는 작게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루가 님.”

베인이 애정이 담뿍 묻어나는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아르힘 님은 언제나 루가 님 곁에 계십니다.”

그가 귓가에 속삭이며 장담했다. 그것으로 그녀의 마음속에서 둘의 연인관계는 끝장나고 말았다.

투이나는 한때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사람이 일방적으로 돌변한 장면을 슬프도록 오래 바라보았다.

아무리 마음을 전해도 이제 더 이상 베인에겐 닿지 않는다. 마음을 포기하면 적어도 그의 사랑을 받겠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

베인은 이제 거짓을 숨기지도 않는데.

투이나가 그를 밀어냈다.

“…다음 시험 때 무슨 대답을 할지 기다리고 있을게요.”

* * *

투이나는 창문을 열었다. 제법 쌀쌀해진 밤공기가 가득 밀려들었다.

‘벌써 가을 날씨네.’

그녀가 창틀에 팔을 걸쳤다.

한동안은 등 뒤에서 칼을 맞았던 기억 때문에 창문에 다가가는 걸 꺼렸었다.

그러다 온갖 방법으로 죽을 위기를 겪고 난 뒤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조심할 게 너무 많으면 오히려 무뎌지는 모양이다.

투이나는 마음껏 밤바람을 즐겼다. 일부러 시원한 날씨에 집중하려는 마음도 있었다.

그녀가 떠난 뒤로 신전이 겪은 몸살을 생각하면 편히 쉬기는 힘들어졌다.

‘내 책임이야.’

투이나는 반성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라카인을 데리고 떠나는 대신 정말 왕이라도 될 걸 그랬다.

그럼 지금과 달리 후회는 해도 반성은 안 했을 텐데.

피식 웃은 투이나가 유달리도 밝은 별을 올려다보았다.

‘이번 시험으로 산과 베인이 움직이는 배경을 찾아야 해.’

그녀의 패인은 구혼자들이 마음을 바꿀 수 있었던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누가 보아도 예전과 달라졌다. 그게 단순히 감정 때문일까.

너무도 사랑하고 미워해서 변해버렸다기엔 지나치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투이나가 창문 옆으로 물러났다.

별빛을 받아 더 진해진 그림자가 창문에 드리웠다. 사람 모양 그림자를 본 투이나가 인사했다.

“어서 와요, 라카인.”

라카인이 소리 없이 방안으로 착지했다. 그가 올 줄 알았다는 듯 투이나가 자연스럽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요?”

“오지 못했습니다.”

라카인도 이 기이한 만남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답했다.

“그들을 만나기는 하였으나 반응이 이상하여 강권하지 못했습니다.”

“반응이 이상하다니요?”

“제게만 그리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나, 신전의 안전을 이상할 정도로 과신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루가 님은 안전해요!」

신전으로 돌아오자마자 호루니와 스카치가 입을 모아 말했다.

투이나가 바깥에서 한 일에 그토록 감탄하던 사람들이 신전에 돌아오자마자 갑자기 안전에 열광하다니.

‘아냐. 바로는 아니었어.’

정확히는 베인에게 붙들려간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였다. 투이나와 라카인의 눈이 마주쳤다.

“세뇌당했다는 말인가요?”

“확신할 순 없습니다.”

라카인이 사실만을 말했다.

“저희가 끌려간 다음에 특별히 무슨 짓을 하진 않았습니다. 다만 크로퍼드가 잠깐 나타나 루가 님이 바깥에서 무슨 일이 없었는지 간단하게 물었을 뿐입니다.”

투이나가 정신을 잃고 있었을 때다.

‘베인이 계속 옆에 있는 줄 알았는데. 호위들을 만나러 갔었다니.’

투이나의 낯빛이 시시각각으로 변해갔다.

“뭐라고 대답했나요?”

라카인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호위들에게 질문하던 베인은 상냥하게 미소 지었지만, 라카인을 보는 순간 요동치던 감정까지 숨기진 못했다.

감히, 네가.

투이나가 사랑하는 자이기에 정중하게 대하려던 라카인에겐 당황스러울 정도의 적대감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치미는 반항심을 억눌렀다. 치기 어린 충동이 그를 뒤흔들지라도.

루가 님이 알면 놀랄 것이다.

라카인은 이미 베인을 의심하느라 괴로울 투이나에게 짐을 더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잊기로 했다.

“…모두 평범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호루니와 스카차의 상태가 그렇게 나빠 보이진 않았거든요.”

“심하게 호의적으로 바꾸면 불리하다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루가 님도 돌아오셨으니 들키는 일은 피해야 하니까요.”

투이나였다면 세뇌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방법의 부당함은 둘째치더라도, 들킬 위험이 컸으니까.

‘설마 내가 호위들의 작은 이상까지 눈치챌 만큼 친하다고는 생각 안 했겠지.’

투이나는 입가를 매만졌다.

“사람을 세뇌하는 건 쉽지 않아요. 마법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이제 그녀도 마법이라면 이골이 나 있었다.

“혹시 그때 마법진을 봤나요?”

“그들이 올 때 많은 등잔을 가져와 만약 마법을 썼다고 해도 빛으로 알아차리기는 어려웠습니다.”

결국 확실하진 않다는 이야기였다. 생각에 잠긴 투이나가 손가락으로 입술을 눌렀다.

“아르케데프에서 마법사의 머리카락을 넣은 천으로 마법을 썼었죠.”

라카인은 투이나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곧장 이해했다.

달라진 베인의 복장과 터번은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베인은 신전에 냉각 마법을 들여올 정도였으니 마법사의 육체로 마법을 쓰는 방법은 꿰뚫고 있다고 봐야 했다.

‘터번을 빼앗아볼까?’

투이나가 망설였다.

아직 베인이 마법을 쓰고 있다는 증거도 없고, 마법이 거기에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호루니와 스카차가 정말 마법에 걸린 거라면 그때 분명히 마법을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하는걸.’

얼룩병을 보고도 눈감아준 그의 머리에서 터번을 잡아채는 건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그뿐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

“그 정도 되는 상인이 신전에서 마법을 쓰기로 작정했다면 준비를 허술하게 하진 않을 겁니다.”

라카인이 조심스럽게 한발 더 나아갔다.

“…주제넘은 말이지만 저는 신을 가둘 방법으로 마법밖에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투이나의 목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었다.

그녀의 신이 갇혀 있다.

그 말도 안 되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 중에서 그녀와 같은 걱정을 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까지 켜켜이 겹쳐있던 걱정이 뜨거운 물 속으로 한 데 잠겨 들었다.

라카인은 젖은 눈이 되어가는 투이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가 신념을 담아 맹세했다.

“루가 님의 신은 반드시 무사하실 것입니다.”

“고마워요, 라카인.”

투이나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적어도 한 사람은 아르힘 님이 걱정된다는 이야기를 해주기를 바랐어요.”

투이나는 와락 그를 껴안고 고맙다고 계속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밤이고, 둘뿐이다.

평소처럼 굴었다면 아이든 어른이든 가리지 않고 안아주고 위로했을 투이나는 처음으로 망설였다.

‘라카인에게는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낯선 저항감이다. 투이나가 이상한 표정을 짓는 걸 상심으로 받아들였는지 라카인이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호위들도 곧 원래 의무에 충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도 제정신이었다면 루가 님과 한 약속을 잊지 않았을 겁니다.”

“약속이요? 아 그랬죠.”

정신 차리자, 정신.

투이나가 머릿속으로 뺨을 짝짝 때리고는 원래 하려던 일로 돌아왔다.

“그래요. 일단 여러분이 안전하니까 됐어요. 가능하면 오늘 일을 하기 전에 호루니와 스카차에게도 제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투이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것부터 해치워야겠네요.”

“오늘도 마법사를 도우러 가시는 겁니까?”

“그 반대에요.”

투이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는 제게 마법사가 필요해졌거든요.”

* * *

시드룬은 샨과 아르파 때문에 난리를 겪어놓고도 특유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쑥 나타났다.

“몸은 좀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시드룬은 어제도 본 사람처럼 여상스럽게 답했다.

투이나는 여전히 흘러내리는 그의 보라색 머리카락을 보며 말했다.

“오늘은 좀 다른 일을 부탁하고 싶어요.”

“이제 얼룩을 숨기지 않습니까?”

시드룬이 딴소리를 했다. 역시 관심은 거기밖에 없는 모양이다.

“음, 다 알게 되었으니까요.”

“당신이 여전히 얼룩병에 걸려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연구의 많은 부분을 수정해야 했습니다.”

시드룬은 딱히 원망하진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양심이 쿡쿡 찔린 투이나가 대답했다.

“그건 미안해요. 연구를 일부러 방해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부분으로….”

시드룬의 말이 느려졌다. 갑자기 말을 멈춘 그를 투이나가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잠깐 다른 세계에 가 있던 것처럼 시드룬이 말을 뚝 잘라 다른 곳에 이어 붙였다.

“…당신이 부탁했던 마법은 시험해보았습니다. 가능한 마법이니 두 번째 시험에서 승리할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아, 그건 간단해요.”

투이나가 손을 내저었다.

“시드룬에게 꼭 맞는 방법이 있거든요. 잠깐 귀 좀 줄래요?”

시드룬이 스르륵 머리를 기울였다. 투이나는 그에게 귓속말로 두 번째 시험의 문제와 답을 알려주었다.

“다른 사람의 답이 더 훌륭할지도 모르지만 일단 이 대답으로도 괜찮을 거예요. 그렇죠?”

“충분한 것 같군요.”

시드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카인이 은연중에 호기심을 드러냈는지 투이나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앗, 루가가 하기엔 적절한 말이 아니라 저도 모르게 숨겼네요. 라카인에게도 알려줄까요?”

“아닙니다.”

라카인은 그저 투이나가 자신도 신경 써 주는 게 좋아 거절했다.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만약 그가 시험에 참가할 자격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녀를 위해 적절한 답을 찾을 수 있었을까?

라카인은 스스로 생각하고도 소스라쳤다.

다행히 그가 움찔거리며 놀라는 꼴은 시드룬의 말에 가려져 들키지 않았다.

“그럼 오늘의 용건은 시험을 알려주는 것으로 끝나는 겁니까?”

“아니에요. 실은 더 중요한 일을 부탁하고 싶어요.”

투이나는 가리지 않고 늘어트린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묶었다.

아르힘을 만나지 못해 몸에 있는 얼룩들은 여전히 새까만 색이었다.

‘차라리 잘 됐을지도 몰라. 밤손님 노릇을 하려면 어두운 편이 잘 어울리니까.’

투이나가 심호흡을 했다.

“오늘 짐을 나를 일이 많을 거예요. 여러 번 다녀가야 할 텐데 괜찮을까요?”

“상관없습니다만 왜 한 번에 옮기지 않습니까?”

“나눠서 보관하고 있거든요. 제가 모든 물건의 위치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서요.”

시드룬이 눈을 깜박였다.

“신전의 물건을 옮기는 거라면 오가는 동안 위치가 자주 어긋날 겁니다. 다른 마법사들이 당신의 이동을 알아차릴 텐데요.”

“오히려 그러는 편이 좋아요.”

투이나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마법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게 그들을 설득할 기회를 주겠어요?”

청천벽력 같은 선언에 놀라는 건 라카인뿐이었다. 시드룬이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굴렸다.

“그들에게 줄 대가가 있습니까?”

“옮기면서 보게 될 거예요.”

투이나가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그녀의 말에 담긴 진의를 알아차린 라카인의 눈이 커졌다.

루가 님이 지금 신전의 물건을 털어 마법사에게 주겠다고 선언한 건가?

투이나는 신전에 넘치도록 쌓여있는 보물들을 기억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투이나에게 온 선물들은 루가의 직위에 바쳐진 것이지만, 투이나는 기꺼이 그것을 사용하기로 했다.

신을 구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만큼 어울리는 사용처가 어디 있으랴.

‘게다가 시드룬과 함께라면 열쇠도 필요 없는걸!’

투이나는 이왕 하게 된 거 빈집털이라도 긍정적으로 해치우기로 했다. 그녀가 짧게 기도했다.

신전에 있는 보물들은 평소 씀씀이와 달리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엄청났다.

투이나가 자신이 받았던 물건들을 찾는 동안 라카인은 그 규모에 놀라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확실히 아르힘 정도 되는 나라는 재화가 남다르군요.”

“역사가 길기도 하고, 사제님들께 치료받고 사례로 보내는 물건들이 무척 많거든요.”

돈을 부를 수밖에 없는 구조다.

라카인은 창고에서 단순한 의전용 검이 아니라 진짜 명검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치료에 대한 답례로 주기에는 너무 이질적인 물건이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자가 싸움을 포기하고 아르힘에 정착했다는 뜻일까?

혹은 이 나라를 거쳐 갔던 자들의 유산인 건지.

시드룬은 투이나가 골라주는 대로 마법진 안으로 물건을 던져 넣었다.

떨어질 때마다 쩔그렁 덜걱 챙강 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혹시 깨지지 않았나 걱정이 될 정도였다.

흘끔 돌아본 투이나가 다음부터는 깨질 만한 것들을 비단이나 옷에 둘둘 말아 건넸다.

“여긴 끝났어요. 다음 창고 위치는 성소를 기준으로….”

투이나의 설명이 끝나면 시드룬이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정확한 위치를 열었다.

그가 위치 조정에 실패할 때마다 투이나는 들킬 걱정보다 아직 신전에 가득한 신의 힘에 안심했다.

커다란 상자를 탁 닫은 투이나가 마지막 보물을 안았다.

“이게 마지막이에요.”

시드룬이 쓸어 넣은 보물을 보더니 옆에다가 다시 마법진을 열었다.

아무래도 보물 위로 걸어가긴 불편할 테니까.

새삼스럽지만 시드룬이 연구에만 관심이 있어 다행이었다.

‘작정하고 악당 노릇을 했으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투이나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마법진을 건너갔다.

마법진 건너편에는 보물을 보고 마법사들이 모여 있었다.

“히야, 엄청나네. 하나 가져가도 모르겠는데?”

“여기서 쫓겨나고 싶나 보지.”

수리시도 그들 뒤에 서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보물을 보던 수리시에게 투이나가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너였구나.”

수리시가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단순히 놀란 게 아니라 보기 싫은 걸 목격한 것처럼 고개를 휙 돌렸다.

‘어어?’

의아해하던 투이나는 곧 이해했다.

이제 그녀는 병을 감추지 않는다. 흉측한 몰골을 한 투이나에게 저절로 거부감을 드러낸 것이다.

‘하긴 다 시드룬 같진 않겠지. 그래도 수리시는 얼룩병자들을 본 적이 있으니 괜찮을 거라 짐작했는데.’

수리시의 반응을 보니 아직 마법사의 마을에 있다는 병자들이 걱정되었다.

여전히 병자를 꺼려할 정도면 좋은 대우를 받고 있진 않을 테니까.

‘차라리 내가 병을 감췄다는 배신감인 게 낫겠어.’

투이나는 걱정스러워졌다. 탐욕스럽게 금화를 보던 포보가 뒤늦게 그녀를 발견하곤 기겁했다.

“억, 뭐야!”

“얼룩병자잖아?”

“빠져나왔나?”

마법사들이 당장 손에 마법진을 만들어냈다. 투이나가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저예요. 투이나. 못 알아보시겠어요?”

“뭐? 누구?”

“잠깐만, 저거 루가 아냐?”

투이나는 머쓱하게 서서 웅성거림이 퍼져나가는 걸 지켜보았다.

‘설마 아르힘 사람들보다 먼저 마법사들에게 사실을 밝히게 될 줄이야.’

하긴 신전이 감추던 비밀이니 생각해보면 더 자연스러운 결과긴 하다.

투이나는 그들끼리 경악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얼룩병은 아르힘이 치료했다고 하지 않았어?”

“병이 돌아왔는데?”

“아르힘도 드디어 없어질 때가 됐나?”

‘그건 끔찍한 추측인걸.’

한숨을 쉰 투이나가 숫자를 셌다.

“음. 여기엔 몇 분 안 계시네요. 제안을 하러 왔는데 다른 마법사들도 빠짐없이 모아주시겠어요?”

“제안? 무슨?”

포보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마법진을 닫던 시드룬이 거들었다.

“부르겠습니다.”

시드룬이 가볍게 양팔을 펼치자 공중에서 우수수 마법진이 생겨났다.

보라색 마법진에서 추수철 메뚜기처럼 마법사와 보물들이 쏟아져 내렸다.

내친김에 마법사의 마을 곳곳에 옮겨놓은 보물도 같이 불러오려는 모양이다.

‘우와, 아프겠다.’

강제로 소환당한 마법사들이 추락 직전에 애처롭게 허우적거렸다.

“악!”

“억!”

“끄악! 뭐에 찔렸어!”

“시드룬, 이 자식아!”

한데 뒤엉킨 마법사들이 화산처럼 짜증을 토해내는데도 시드룬은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그나마 제일 위에 떨어진 일라이가 단단히 심통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시드룬. 얌전하게 부르는 건 기대도 안 할 테니까 제발 수리시도 우리처럼 불러내 주라. 쟤네 가족도 낙하 사고를 겪어봐야 널 말릴 거 아냐.”

“엄한 사람 붙들지 말고 일어나.”

수리시가 턱을 까딱였다. 그녀는 여전히 딱딱한 표정이었다.

“루가가 제안할 게 있다네.”

“뜬금없이 불러놓고 무슨….”

투덜거리던 일라이가 입을 딱 벌렸다. 그제야 얼룩투성이로 서 있는 투이나를 발견한 것이다.

시선이 따가울 지경이라 투이나가 먼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안녕하세요?”

“진짜 루가야? 저게?”

“전에 봤을 땐 멀쩡했잖아.”

장본인을 앞에 두고 마법사들이 수군거렸다. 심지어는 그르렁거리는 소리까지 들렸다.

흠칫한 투이나의 시선이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마법사들의 무게가 쌓인 제일 아래쪽에 양 주먹을 불끈 쥔 레이벡이 있었다.

당장 뛰쳐나가지 못해 한이 생길 지경인 그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외쳤다.

“저자가 왜 여기 있나!”

레이벡의 고함은 정확히 라카인을 향했다. 지난번에 그를 죽일 뻔한 마법사라는 걸 알아본 라카인이 머리를 숙였다.

투이나가 살짝 그의 앞으로 나섰다.

“제 동행이에요.”

“누구래?”

“아르파 인이잖아. 레이벡이 돌아버리는.”

“아아.”

“위에서 떠들지 말고 당장 내 머리에서 엉덩이 치워!”

레이벡이 부글부글 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사들은 같은 마법사에게도 가차 없었다.

“난 모른다. 다른 사람이 내려가야 움직이지.”

“우리가 비켜봤자 싸울 거잖아?”

“마법이나 제대로 다룰 줄 알게 되면 시도해, 얼간아.”

“뭐야? 이 마법사 놈들이!”

레이벡이 눈을 뒤집고 버둥거렸다.

마법사들은 그냥 그를 계속 깔아뭉개고 있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무슨 제안을 하러 온 거지?”

마탄타가 피곤한 얼굴로 물었다.

“보물까지 가져온 걸 보면 보통 일은 아닌가 봐.”

“저게 우리 거였어?”

“맞아요. 여러분에게 주려고 가져왔어요.”

투이나가 선뜻 긍정했다.

“대신 어려운 부탁이 하나 있어요.”

“듣고 있어. 계속 말해봐.”

게누아가 눈을 빛냈다. 투이나는 적극적으로 나오는 그녀의 모습에 작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일단 제 모습에 많이 놀랐을 거예요. 원래 이렇게까지 심하지 않은데 상황이 어려워졌거든요.”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한테 도움을 요청한다고? 루가가?”

피식하는 웃음과 함께 야유가 쏟아졌다. 평생을 다른 수호신에게 쫓겨 다닌 사람들이다.

‘원래라면 당장 공격해도 할 말이 없어.’

시드룬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겠지.

그들에게 부탁할 일이 얼마나 어려울지 가늠해보던 투이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네. 분명 신께서 아셨다면 반대하셨겠죠. 그러나 저는 지금 그분께 꾸지람을 들을 처지도 되지 못합니다.”

라카인이 투이나를 곁눈질했다.

그를 살리기 위해 죄를 저질렀던 것처럼, 그녀는 또 한 번 책망받기 위해 죄를 저지르려는 것인가.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이 하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악행을 저지르며 쾌감을 얻는 부류가 아니라면 자기가 나쁜 짓을 한다는 생각을 아예 버리곤 했다.

그런데 투이나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도 언제나 다른 사람의 기준을 생각했다.

그녀에게 잘못되었다 비난할 다른 자들을 말이다.

무수히 많은 타인을 끌어안고 기어이 한 발짝 내딛으려는 사람.

버거운 일에 자신을 앞세우고 보상 대신 죗값을 생각하는 사람.

라카인은 그런 그녀가 너무 많은 것을 구하고 싶어질까 봐 두려웠다.

그녀도 사람인 이상 상처받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자신은 구원받았으니.

투이나가 그대로 남아주길 바라면서도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모순적인 감정이 부딪쳤다.

처음은 자신, 그다음은 수호신이다.

그럼 마지막에는 무엇을 구하려고 들겠나.

라카인은 비록 다른 나라의 수호신이지만 아르힘이 돌아오기를 바랐다.

신이 돌아와 그녀에게 지워진 저 무거운 짐을 빨리 덜어주어야 한다.

그가 서툴게 기도하는 사이 투이나는 마법사들에게 상황 설명을 끝냈다.

흥미롭게 듣던 마법사들도 표정이 점점 묘해졌다.

“신이 갇혀 있다고 다른 신이 분명히 말했다는 거지?”

“그게 정말 마법이라고?”

“잠깐만. 신을 어떻게 가둔다는 거야. 실체도 없는 믿음인 주제에.”

“아르힘이잖아. 하지만 신이 현신한 몸이 본체일 리가 없는데. 애초에 육체라는 게 없으니까.”

“마법의 반발력을 이용해서 고정시켜 놓은 건 아닐까? 계속 한 자리에서 튕겨 나가도록.”

마법사들끼리도 의견이 분분했다. 투이나는 그들의 토론을 주의 깊게 들었다.

“역시 여러분이 아니면 안 돼요.”

때로는 가장 멀리 있는 자가 가장 정확하게 볼 줄 알았다.

지금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마법사들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활발하게 떠들던 그들이 잊지 않고 적개심을 드러냈다.

“그래서, 우리보고 도와달라고?”

“왜 하필 우리야?”

“신전에 다른 도와줄 자들도 많잖아. 사제들이야말로 신 전문가면서.”

“누군가를 구하려면 구할 대상이 아니라 가둔 것이 무언인지가 더 중요하겠죠.”

투이나가 차분히 일렀다. 마법사들이 심술궂게 반박했다.

“왜 그게 꼭 마법이라고 생각하지? 신전에는 아르힘 말고 다른 신도 있는 걸로 아는데.”

“맞아, 맞아.”

투이나도 고려해본 문제였다. 아르파가 마음껏 나타날 수 있도록 샨이 손을 썼다면.

하지만 신이 사라짐으로써 이익을 얻은 사람은 베인이었다. 자신이 한 일을 은근히 드러내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샨은 아니야.’

어떤 일의 원인을 알려면 결과를 되짚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살해당한 일은 결과를 몰라 여전히 미궁 속에 빠져 있었지만.

그마저도 두 번째 시험과 함께 갈피가 점점 잡혀가는 듯했다. 원치 않는 방향으로.

투이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르파 신의 짓은 아니에요. 확신할 수 있어요.”

“자신만만하네.”

“정말 우리한테 저 보물을 다 준다면 도와줄 생각도 있어.”

마지막은 희희낙락한 포보의 말이었다. 수리시가 한심한 표정으로 그의 뒤통수를 때리더니 다가왔다.

“미안하지만 난 보물엔 관심 없어. 도와주고 싶지도 않고.”

“그럼 제가 뭘 하면 될까요?”

“아무것도.”

수리시가 명백하게 불편한 얼굴로 그녀를 흘끗거렸다.

“지금까지 사람들을 속인 주제에 도와달라고 하면 뻔뻔하잖아?”

예상했던 말임에도 꽤 아팠다.

“변명하지 않겠어요.”

투이나는 똑바로 수리시를 응시했다.

“무슨 대가를 치르든 도와주지 않을 생각이라도 괜찮아요.”

투이나는 불가능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말 한마디로 전쟁을 멈추고 혓바닥으로 세상을 구하는 책사의 능력은 그녀의 것이 아니다.

그저 주는 수밖에.

“다만, 제가 신을 구하려 애쓰듯 여러분이 위기에 처했을 때도 똑같이 구하겠다고 맹세하고 싶어요.”

“…….”

“처음부터 제가 드릴 건 이것밖에 없었어요. 가져온 보물들은 제가 아니라 신을 도와준다면 얻을 보상에 불과하거든요.”

그래서 양심에 찔리지 않고 보물들을 털어올 수 있던 거였다.

신의 물건을 신의 구출에 쓰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나.

“굳이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꼭 한번 얘기하고 싶었어요. 여러분들은 모두 신에게 쫓겨본 적이 있으니까요.”

마법사들이 조용해졌다. 대부분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원인이 아픈 기억과 맞물려 있는 자들이었다.

투이나는 아무리 신의 보호 밖에 있는 자들일지언정 그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저는 신을 믿습니다. 그러니 사과도 제가 함께 해야겠습니다. 여러분이 잃어버렸던 시간을 돌려드리고 싶어요.”

투이나는 진심을 다해 말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비웃음이었다.

“웃기는 소리.”

안 그래도 이를 갈고 있던 레이벡이 바닥을 내리쳤다.

“이미 다 끝났는데 무슨 수로 되돌려? 네가 감히! 아직도 죄인을 끌고 다니는 주제에!”

통렬히 비난하는 레이벡을 마법사들까지 묘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래요. 이미 사라진 건 돌아올 수 없어요.”

투이나가 라카인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리고는 그때까지 안고 있던 보물을 라카인에게 넘겼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는 게 남아 있잖아요.”

투이나는 손을 맞잡았다.

“그에게 돌려주세요.”

라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안에 든 게 무엇인지 몰랐다. 묵직하게 가슴에 안긴 물건을 들고 가면서도 라카인은 생각에 잠겼다.

왜 투이나는 자신에게 물건을 대신 전달하게 한 걸까?

그러다 원망에 찬 레이벡의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제야 라카인은 알 것 같았다.

“…….”

그는 증오로 가득 찬 얼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머뭇거리던 라카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투이나가 그에게 말을 시킨 적은 없지만, 그는 말하고 싶었다.

“루가 님을 대신해, 아르파 님을 대신해 당신에게서 빼앗아간 것을 돌려드리겠습니다.”

라카인의 멱살을 잡기 위해 허우적거리던 레이벡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오냐. 대체 뭘 가져왔는지 몰라도 네 놈 면전에다가 던져줄 테니.”

덜컥.

마법사들에게 깔린 채로 상자를 열었던 레이벡이 다음 순간 벌떡 일어났다.

무의식중에 마법을 썼는지 그의 등으로 울룩불룩한 가시가 튀어나왔다.

당연히 마법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후다닥 그에게서 떨어졌다.

“아악! 또!”

“마법을 쓸 거면 제발 말을 하라고!”

투덜거리는 항의에도 휘둥그레진 레이벡의 눈은 상자 안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 떨리던 그의 손이 열린 상자의 끄트머리를 붙잡았다.

그마저도 몹시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레이벡이 무너져 내리듯 이를 짓씹었다.

“……아르뭄 님.”

그에게서 짐승이 우는 소리 같은 것이 새어 나왔다.

비통한 울음과 반대로 금빛 무늬가 흐르는 홍옥은 더더욱 화려하게 빛났다.

마치 어렵게 재회한 신도를 다시 환영하는 신처럼.

보기 드문 귀물에 놀라던 마법사들도 이내 샨이 멸망시킨 세르뭄의 수호신이 아르뭄이라는 이야기를 속삭여댔다.

한참을 옛 신을 붙잡고 울던 레이벡은 아무도 손댈 수 없게 홍옥이 담긴 상자를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거기에 그의 마법까지 더해지니 말 그대로 가시를 세운 채 주변의 접근을 막아대는 꼴이 되었다.

투이나는 레이벡이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계속 울컥하는지 한참 동안 말을 못 하다가 겨우 입을 뗐다.

“……이걸 어디서 얻었지?”

“샨에게서 받았습니다.”

“망할 새끼. 역시 그놈이 가져간 거였어.”

레이벡이 라카인을 흘긋 노려보았다. 면전에서 모시는 왕을 욕했는데도 그는 공격하지 않았다.

기이한 상황이었다. 서로를 공격해야 마땅한데도 비애가 그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레이벡의 등에 튀어나왔던 가시가 조금씩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의 눈이 시뻘겠다.

“처음부터 빼앗지 않았으면 돌려줄 일도 없었던 물건이다. 알아들어?”

“네.”

“빌어먹을. 사라지지 않는 걸 돌려준다더니. 이게 돌아오면 뭘 해. 너무 늦었다고. 너무 늦었어.”

“당신이 있잖아요.”

투이나는 넋두리처럼 흩어진 그의 말을 한데 모았다. 레이벡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그건 제가 잠깐 맡았던 물건일 뿐이죠. 레이벡이 없었다면 다시 아르뭄 신을 믿는 분께 돌아가지도 못했을 거예요.”

수호신을 잃은 피난민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사라져 갔다. 자발적으로든 강제적으로든.

하지만 레이벡은 살아남았다. 마법사가 되면서까지.

“사라지지 않은 건 당신이에요, 레이벡. 그래서 보물은 의미를 갖고 사람들은 다시 아르뭄 신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

“신께선 사라지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이 단 하나라도 있는 한, 언젠가 돌아오실 거예요.”

이것이 투이나가 바라는 가장 희망적인 결말이었다.

불타버린 초원에서 새싹이 하나 다시 피는 것. 신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다시 위로가 돌아오는 것.

무엇보다 레이벡이 가장 바라는 일일 터다.

부서져라 상자를 쥐고 있던 레이벡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몇 번이고 삼켰다.

“……고맙다.”

“……!”

설마 그에게서 인사를 들을 줄은 몰랐다. 반사적으로 투이나가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별 말씀을…….”

상자를 들고 일어나던 레이벡이 계속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라카인을 흘끔 내려다보았다.

“사과는 안 한다.”

레이벡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의 고통을 지켜본 라카인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르뭄이 아르파에게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일순, 본인도 알 수 없는 힘이 치고 올라와 라카인의 입을 벌렸다.

“죄송합니다.”

“…….”

“당신에게 있었던 모든 일들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책임을 느낍니다.”

“됐어, 집어쳐. 전쟁에도 못 나간 얼뜨기 부하였던 주제에. 사과 받아 줄 생각 없다.”

라카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서 죄책감이 흐르자 레이벡이 다시 투이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고 이런 걸 받아놓고 모른척할 만큼 뻔뻔한 인간도 아니야. 그러니까 도와주겠다.”

“레이벡…!”

투이나는 그만 감격하고 말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처음으로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여 준 것이다.

“고마워요, 정말! 필요한 건 뭐든 가져가요!”

“이거 하나면 돼.”

레이벡은 홍옥이 담긴 상자를 쓰다듬었다.

“충분하다.”

투이나가 그건 원래 아르뭄의 것이니 준 게 아니라고 말하려는 순간 수리시가 끼어들었다.

“대체 이게 다 뭐 하자는 노릇인지.”

그녀가 눈을 데룩데룩 굴려댔다. 이 모든 상황이 그저 견딜 수 없이 불편한 모양이다.

“알겠으니까, 도와줄 사람이 있으면 우리 쪽에서 정리해서 보내줄게. 그러니까 뭐가 필요한지만 빨리 말해.”

그제야 마법사들이 헛기침을 하며 존재를 드러냈다.

아닌 척해도 레이벡의 일에 은근히 마음이 흔들린 모양이다.

투이나를 보는 눈빛이 훨씬 호의적으로 변해 있었다.

“부탁드리는 건 딱 한 번이에요. 제가 원할 때 신전으로 들어와 함께 싸워주세요.”

투이나가 생각할 때 신을 가둔 방법은 시드룬과 자신만으로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다른 마법사들이 알고 있는 지식은 모두 시드룬의 연구를 도우면서 알아낸 것들이니까.

투이나는 마법사들도 한때 평범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라는 걸 잊지 않았다.

‘부탁을 하지 않고 넘어가는 게 제일 좋겠지만, 혼자서 신전에 가득한 사람들을 상대할 순 없어.’

샨은 하인을, 베인은 상단을 부리고 있다.

아무리 시드룬이 대단한 마법사라지만 그도 적을 상대할 부대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법사들이 웅성거렸다.

“우리가 신전에 들어가도 되는 거야?”

“루가가 방금 초대했잖아.”

“싸워달라면서? 그럼 이게 초대야 고용이야?”

“부탁이에요.”

투이나가 가볍게 정정했다. 다행히 마법사들은 꺼림칙함보다도 왕성한 흥미를 드러냈다.

“내 손으로 신전을 엎어버릴 날이 올 거라곤 생각했지만 그게 아르힘이 될 줄은 몰랐는걸?”

“그냥 가서 다 때려 부수는 거잖아? 난 찬성! 난 갈래!”

“넌 마법사의 자존심도 없어? 신을 구한다잖아?”

“하지만 신전이랑 싸운다잖아. 내가 마법사가 되기 전부터 신이라면 그냥……!”

수리시는 왁왁거리는 마법사들의 모습에 이마를 짚었다.

마법사의 마을을 만든 건 시드룬이라지만 실질적으로 관리하는 건 그녀였다.

마법사들의 철없는 모습에 수리시만 지끈거리는 이마를 몇 번이고 짓눌렀다.

“난 도저히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루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잖아. 어차피 시드룬이 네 편인데 저런 얼치기들까지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해?”

“어이, 레이벡! 아까 받은 홍옥 좀 다시 구경해보자.”

“꺼져!”

“그래! 저기 나비 무늬 있는 비단은 내 거야!”

“너 아까 안 싸울 거라면서?”

“그거야 저걸 보기 전에 한 소리지!”

투닥거리는 소리에 투이나는 그만 키득키득 웃고 말았다.

“그럼요. 필요하죠.”

“후회할걸.”

“저 보물들은 미리 지불했다고 칠게요.”

“안 그래도 돌려줄 생각 없었어.”

수리시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투이나를 훑었다.

“네가 우리를 생각해준 건 고마워. 솔직히 기대 안 했거든. 그… 병 얘기도 굳이 밝힐 필요 없었는데.”

“뭘요.”

“하지만 너만 그렇다는 걸 기억해.”

수리시가 경고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너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미안해하지도 않을 사람들에게 정말 신을 돌려주고 싶어?”

“그래야 하잖아요.”

투이나는 그냥 웃었다.

“제가 그러고 싶기도 하고요.”

투이나가 가볍게 손을 털었다. 라카인이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그녀를 돌아보았다.

레이벡은 이미 라카인을 잊고 떠드는 데도 라카인은 좀처럼 그가 내비친 슬픔의 무게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의 나라가 만들어낸 전쟁의 결과였다.

일어나지 못하는 라카인을 본 투이나가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라카인이 무거운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저 얼굴. 그에게 가득 담긴 감정을 본 순간 허파에 깃털이 들어간 것 같았다.

“괜찮아요.”

투이나가 얼른 그의 어깨를 짚었다.

“혼자 받게 두지 않을 거예요.”

분노든 죗값이든. 누군가 같은 방향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면 끝까지 함께 할 것이다.

그들을 사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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