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살해한 구혼자 7권26. (26/43)

나를 살해한 구혼자 7권

26.

여자는 부르짖었다. '그러니 용서하십시오. 더 이상 바칠 것이 없습니다. 허나 이대로는…'

라카인은 투이나를 끌어안은 채 급한 숨을 삼켰다.

‘어떻게 벌써 여기까지 쫓아왔단 말인가.’

거리를 많이 벌렸다고 생각했는데 추격자들은 예상보다 집요했다.

무리를 해서라도 말 두 마리를 훔쳐내어 계속 달렸어야 했나.

“일어나셔야 합니다.”

다급한 목소리에 투이나가 라카인을 짚었다.

그녀의 눈에도 달려오는 두 마리의 말이 보였다.

‘잠깐만.’

다시 현실로 관심을 돌린 투이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서운 속도로 쫓아오는 말 위에 얼핏 여자 하나와 남자 하나가 보였다.

그들을 알아본 투이나가 도망가는 대신 라카인을 붙들었다.

“어어어!”

‘말도 안 돼!’

“루가 님?”

라카인이 그녀를 불렀다.

투이나가 찰싹 찰싹 그의 허벅지를 때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라카인이 평정심에 강해도 이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돌이 되어버린 라카인에게 투이나가 되물었다.

“못 알아보겠어요?”

그제야 라카인이 가까워지는 추격자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라카인의 눈이 커졌다.

“루가 니이임!”

목청 좋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투이나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라카인도 마찬가지였다.

“호루니! 스카차!”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두 사람이 감격한 얼굴로 투이나를 바라보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장소에서 마주한 터라 감동한 건 투이나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눈물의 재회는 짧았다.

투이나를 찾아냈다는 그들의 벅참은 그녀가 젖은 채 얇은 옷 한 장만 입고 있는 걸 본 순간 박살이 났다.

심지어 라카인이 그녀를 끌어안은 모양새였다.

“감히 저 무뢰배가!”

스카차가 칼부터 뽑아들었다. 호루니도 눈이 돌아갔다.

만나자마자 반갑게 무기부터 인사하게 생겼다.

“아니, 여러분?”

“저희가 구해드리겠습니다, 루가 님!”

흥분한 호루니가 창대부터 날렸다.

아는 얼굴이 나타나 놀란 것도 잠시, 라카인은 일단 매서운 기세로 날아온 창을 쳐냈다.

어차피 자신은 미움 받는 존재였으니 상관없었다. 하지만 투이나는 달랐다.

“우선 피하셔야겠습니다.”

“네? 하지만 호루니랑 스카차잖아요.”

“그들도 신전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도로 붙잡혀갈 거란 소리에 투이나가 멈칫했다.

일부러 신전에서 아는 얼굴을 보내 쫓아오게 하다니 꽤나 머리를 굴린 모양이다.

정에 약한 투이나가 누그러져서라도 돌아오길 바란 거니까.

그들의 속셈대로 투이나는 당장 뒤돌아 달아나지 않았다.

다만 바란 것만큼 순순하지도 않았다.

“여기까지 어떻게 따라왔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투이나는 분노에 차서 달려오는 말 앞을 가로막았다.

쫓아온 호위들이 투이나를 보자 양쪽으로 갈라져 말을 세웠다.

푸르르 뿜어져 나오는 말의 입김이 거셌다.

“오랜만이네요.”

“루가 님!”

호루니가 다급하게 뛰어내렸다.

“저희가 얼마나 찾았는지 모릅니다!”

호루니와 스카차는 기뻐 보였지만, 여전히 투이나와 함께 서있는 라카인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루가 님이 가시는 길마다 소문이 파다하신 걸 모르십니까?”

“단순한 소문 정도가 아닙니다!”

“……네?”

투이나가 벙쪘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다소 흥분을 가라앉힌 스카차가 설명했다.

“저희가 신전에서 출발했을 때는 그저 루가 님이 죄인을 도피시키려는 줄로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실은 전부 신의 안배이셨던 거지요? 설마 루가 님이 가시는 길마다 기적을 보이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잠깐, 기적이요? 제가요?”

“아르세라의 강에서 보석을 샘솟게 하셨잖습니까?”

“아르케데프에서는 도착하자마자 노예상에게 불의 심판을 내리셨다 들었습니다!”

‘에에엥?’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차린 라카인의 표정이 묘해졌다. 투이나의 얼굴도 만만치 않게 변했다.

‘저게 내 얘기가 맞긴…… 하네?’

단순히 상황을 넘기려고 했던 일이 엄청나게 와전되었다.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걸 몰랐으면 이 거창한 이야기에 투이나조차 깜박 넘어갔을 것이다.

호루니와 스카차는 감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범상치 않은 분이라 여겼지만 역시 루가 님은 다르신 거죠?”

“아르힘 바깥에서도 신이 돌보시다니. 이런 일이 가능할 줄이야.”

“저기, 오해가 꽤 크네요!”

투이나는 정확한 사정을 설명했지만, 그들의 경외심은 바뀌지 않았다.

“어쨌든 루가 님이 하신 일은 맞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원래도 신의 뜻을 행하시는 분이 아닙니까. 겸손하실 필요 없습니다.”

호위들은 여전히 선망하는 눈빛이었다.

오히려 투이나를 신전에서부터 보아왔기에 그녀와 루가라는 직위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모양이다.

스카차가 말했다.

“루가 님을 따라오기가 쉬웠던 이유도 그것 때문입니다. 저희 두 사람은 이런 일을 하실 만한 분은 루가 님이라는 쪽에 걸었거든요.”

“우연히 루가 님이 도망치는 곳마다 기적이 나타나는 것보다 루가 님이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잖아요.”

“다른 추적자들은 루가 님이 어떤지 잘 모르시니 오히려 헷갈렸을 겁니다.”

두 사람은 투이나의 병을 안다는 강점도 있었다. 얼룩을 드러내면 투이나처럼 찾기 쉬운 사람도 없었다.

회색 얼룩을 가진 여자와 덩치가 크고 험악한 남자 한 쌍의 조합은 물어보기도 쉬웠다.

“저희가 늦게 출발해서 걱정했는데 이렇게 만나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늦게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저희를 찾으러 온 게 아니었어요?”

“아니요. 저희는 신전의 명령을 받고 온 게 아닙니다.”

스카차가 여기서 약간 우물거렸다.

“근신이 풀렸기에 단독으로 신전을 나온 겁니다.”

“루가 님을 찾을 수 있는 건 저희뿐이라고 생각했어요.”

호루니가 개의치 않고 호소했다.

“저희와 함께 돌아가요. 루가 님.”

투이나는 난감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이 어느새 라카인의 팔을 쥐고 있었다.

돌아가면 그는 죽는다.

‘아직 살아갈 수 있는 곳을 찾지도 못했는데.’

무언가 울컥했는지 호루니가 입술을 깨물었다.

“저자만 루가 님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에요. 빨리 가시지 않으면…!”

“호루니.”

당황한 스카차가 호루니를 살짝 뒤로 끌어당겼다.

이상하게 안절부절 못하는 호루니를 대신해 그가 말을 이었다.

“저자에게 내려진 사형 말인데, 이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더 이상 사형으로 처벌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았습니다.”

스카차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루가 님만 무사히 돌아오신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조건입니다.”

투이나의 표정이 이상야릇해졌다.

‘기뻐해야 하는데.’

“……샨도 동의한 건가요?”

“그렇습니다.”

기뻐할 줄 알았는데 묘하게 굳은 투이나의 얼굴을 본 스카차가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이럴 거면 왜.’

그 생각이 먼저 치밀었다.

과한 처벌이라 설득할 때는 절대로 들어주지 않더니, 도망친 다음에야 저절로 고집이 꺾였는가?

그녀가 라카인을 탈옥시킨 이유는 신전과 샨이 고집하는 처벌을 존중하는 의미였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그들의 생각이 변하지 않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카인을 탈옥시킨 다음, 돌아가 자신의 욕심으로 라카인을 살린 책임을 질 생각이었다.

그런데 변할 수 있었다니.

자신들이 원할 때면 고집스레 주장하던 원칙을 슬그머니 늦출 수가 있었다니.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야.’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직 바다에서 보았던 영혼의 세계의 여파가 남아있던 모양이다.

투이나의 상태를 알아차린 라카인이 살며시 그녀를 감쌌다.

“옷을 갈아입으셔야겠습니다.”

“애, 애초에 루가님이 왜 저런 꼴로 계신 겁니까?”

“바다에 들어가셨다.”

더 이상 같은 호위가 아니라 죄인과 추적자로 만났는데도 라카인은 무덤덤했다.

호루니와 스카차가 젖은 그들의 옷을 흘끔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라카인이 투이나를 부축했다.

“지금은 쉬셔야 합니다.”

“한 가지만 더요.”

투이나는 잘근 입술을 씹었다.

“베인은 무사한가요?”

아직도 귓가에 그가 구해달라는 비명이 메아리쳤다.

꿈에서만 보던 장면을 현실에서 보고 진저리친 팔에는 아직도 소름이 돋아 있었다.

딱 그 순간에 맞춰 나타난 호루니와 스카차는 어딘가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투이나의 간절한 시선에 호루니와 스카차는 영문을 모르면서도 열심히 대답했다.

“그럼요. 무사하시죠.”

“사형을 면제하도록 힘쓰신 분이 바로 크로퍼드 님입니다.”

기뻐할 줄 알고 건넨 말이건만, 투이나는 그만 해괴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베인이 어떻게요?”

샨은 베인을 끔찍이 싫어했는데.

내가 말했을 때도 사제들은 고집을 굽히지 않았는데.

“…….”

호루니와 스카차가 보기에도 투이나의 상태가 영 안 좋았는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계시다 감기 걸리시겠습니다.”

“제가 불을 피울게요!”

두 사람은 갑자기 부산스럽게 움직여댔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는데도 여전히 두 사람의 속내는 빤히 보였다.

‘왜 숨기고 싶어 하는 걸까?’

무슨 사실을 알고 있기에.

비스듬히 서 있던 투이나가 뒤를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생각해요?”

늘 같은 자리에서 라카인이 그녀를 마주보았다.

“……루가 님이 신전으로 돌아가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투이나가 탁 튀어오르는 불티를 응시했다.

바닷가에서 불이 붙은 장작은 청록색으로 타올랐다.

텅 빈 해변은 바람이 세게 불었다.

몇 번이나 붙였던 불을 꺼트렸던 호위들에게 다가온 라카인이 장작을 세워 바람막이를 만들어주었다.

그제야 타오르는 장작불에 얼굴을 붉히며 네 사람이 주변에 모여 앉았다.

원래 적갈색인 투이나의 머리카락이 길게 한 쪽으로 늘어뜨려진 채 불빛을 따라 윤기가 돌았다.

라카인은 남몰래 그 모습도 마음에 간직했다.

“왕이 되라는 제의를 받았어요.”

불쑥 어색한 침묵을 끊으며 투이나가 대뜸 말했다.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허헉……. 어떻게, 누가요? 아르힘 님이 드디어 루가 님을……?”

“아뇨, 크로퍼드 상단과 사제님들의 제안이에요. 제가 수락만 하면 쓸 군대까지 준비되었대요.”

투이나가 무심히 말했다.

“아아!”

“루가 님은 그럴 자격 있으십니다!”

호루니가 탄성을 내질렀다. 스카차마저 왕이라는 얘기에 피가 들끓는 표정을 지었다.

투이나가 슬쩍 찬물을 끼얹어 보았다.

“샨이 왕이 되려는 자는 다른 사람의 목숨을 바칠 줄 알아야 된다고 하더군요.”

왕이 할법한 이야기라 라카인이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반응을 본 호루니가 다급하게 주먹을 쥐었다.

“저, 저도 루가 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왕이 못 되겠어요.”

“…….”

호위들이 조용해졌다. 투이나가 긴 머리 타래를 감았다.

“다른 사람이 삶을 포기하는 걸 도저히 못 견디겠거든요.”

그녀가 끝끝내 삶을 붙들어놓은 라카인을 바라보았다.

라카인은 말없이 불 바깥으로 튀어나온 장작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기기묘묘하게 낯빛을 바꾸던 스카차가 신중하게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빨리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가 살짝 망설이며 덧붙였다.

“루가 님이 자리를 비우신 뒤로 신전은 이미 궁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 * *

투이나가 사라진 뒤로 샨은 정말로 이상해졌다.

베인의 증언으로 사제들이 투이나의 도주를 막 전달받은 때였다.

어수선한 터라 눈이 뒤집힌 채 쫓아온 샨에게 말이 새어나가지 않을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루가는 어디에 있나?”

시퍼런 짐승 같은 눈빛이었다.

샨의 거처에 머물고 있던 투이나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혼자 있던 그녀가 그 많은 하인의 눈을 피해 도주할 수 있다는 건 말도 되지 않았다.

분명히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전에서 침입한 적도 없으니 남은 답은 하나뿐이다.

“마법사는 어디에 있지?”

샨은 신전 내에 있을 마법사를 당장 불러오라고 요구했다.

신이 걸어둔 제약에 의해 신전을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나 시드룬을 불러오는 방법은 투이나만 알고 있었다.

당연히 사제들은 그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투이나도, 마법사도 모두 찾아낼 수 없다는 대답에 진노한 샨은 신전을 직접 수색하겠노라 선언했다.

신전에 있는 자들은 모두 머리를 발가락으로 빨아먹는 머저리들이라 욕하며 쳐들어오려고까지 했다.

그런 샨을 제지한 게 베인이었다.

“아시다시피 신전의 사제들과 무사제들은 아무리 많이 뽑아도 결국 수도 밖으로 보낼 수밖에 없잖습니까.”

스카차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사제가 늘어나도 그들을 필요로 하는 인원은 계속 늘어났다. 끊임없는 전쟁과 피난민 때문이다.

치안을 위해 수도에서 길러낸 사제들과 무사제들은 최소 인원만 남겨두고 계속 수도 밖으로 파견되었다.

그 바람에 샨이 적대적으로 나오자 막아설 인력이 부족했다.

베인이 나서기 전까지는.

“상단에서 온 사람들을 받아들였다고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모하세스는 정말 죽일 기세로 밀어닥쳤으니까요.”

미쳐 날뛰는 샨이라면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아르힘 님이 계시잖아요.”

“그게……. 아르힘 님은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이 오셨다면 오히려 더 위험했을 겁니다. 아르힘 님에 대항하기 위해 모하세스가 아르파를 불렀다면 그대로 전면전이 터질 테니까요.”

“사제님들 중에서 아르힘 님의 이야기를 들으신 분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기절하기 전에, 스치듯 들은 이야기라 확신할 순 없다고 하셨지만….”

“베인에게 맡겨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꺼내며 호루니가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아, 알고 있구나.’

신전에서 베인에게 권력이 넘어갈 지도 모른다는 소문에 힘을 실어준 꼴이다.

투이나는 별 생각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 특히 호루니는 몹시 심각했다.

“저는 루가 님 말고 다른 루가 님을 섬기고 싶지 않아요.”

“아직 결정 난 것도 아니잖아. 게다가 아르힘 님의 뜻이시면 따라야지.”

당황한 스카차가 급하게 그녀를 막아섰다. 이미 둘이서 계속 논쟁했던 문제였던 모양이다.

호루니는 아까보다 더 풀이 죽었다.

“루가 님이 아르힘 바깥에서 하신 일들을 듣고 사실은 안심했습니다. 루가 님은 아르힘 님이 그렇게 쉬이 내치실 분이 아니라는 증명 같아서요.”

“아르힘 님은 자격을 갖춰야만 사랑해주시는 분이 아니잖아요.”

“……모르겠어요. 사랑을 받고 있어도 저는, 다른 게 필요한가 봐요.”

호루니가 손톱 끝을 매만졌다.

본의 아니게 라카인까지 뱃속이 꿈틀거렸다.

어째서 이 이야기에 선득 죄책감이 스쳤는지 모르겠다.

마치 그도 그런 욕심을 가진 적이 있는 것처럼.

“…….”

라카인이 괜히 손바닥만 눌러 쥐었다.

아직 투이나에게 사랑조차 받지 못한 주제에, 벌써부터 무엇을 바라는 건지.

파도 소리에 맞춰 그의 심장 고동이 자꾸만 커져갔다.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투이나를 보면 솟아나는 이 마음은 불경하다.

“샨이 이상해졌다는 이야기는 뭐예요?”

“아, 그건 말입니다.”

베인이 상단을 불러와 샨의 하인들과 대치시키자 신전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언제라도 피를 볼 거라 예상하고 있던 그들 앞에서, 샨은 갑자기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것도요?”

“예.”

“샨이 그럴 리가….”

“항의나 어떤 폭력도 없었답니다. 하인들도 도로 불러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냥 신전에 계속 대치 상태로 놔둔 채 거처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사형 문제를 물었을 때도 마음대로 하라는 대답을 할 정도였습니다.”

투이나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건 너무 얌전하잖아.’

조용하고 얌전한 샨이라니. 수식어만 붙여도 벌써 너무 어색했다.

‘무슨 생각인거지?’

“저희가 아는 건 여기까지예요. 이후에 신전을 나왔거든요.”

“하지만 크로퍼드가 신전을 장악한 모양새라, 아무리 모하세스가 잠잠해도 곧 시끄러워질 겁니다.”

“게다가 심각한 상황에도 크로퍼드 님이 계속 사치품을 사들이고 있어서 요.”

“사치품이요?”

호루니와 스카차가 난감하게 말을 골랐다.

“루가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신전을 정돈하겠다고 합니다.”

“잘은 모르겠어요. 아예 건물까지 화려하게 뜯어고칠 거란 얘기도 나온 모양이더라고요.”

“궁전이라는 말을 꺼낸 것도 그 때문입니다. 돌아갈 때쯤이면 더 이상 저희가 아는 신전이 아닐 듯하여…….”

스카차가 중얼거린 말이 그들의 주변을 떠돌았다. 투이나의 가슴에도 쿵 하고 내려앉긴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내가 아는 곳이 아닐지도 모른다니.’

이상하게 불안했다.

영혼의 세계에서 구해달라고 소리치던 베인의 환영까지 떠오르면서 불안은 커져만 갔다.

‘그래도 돌아갈 거야.’

양쪽에서 그녀를 필요로 한다면 보다 약한 쪽으로 간다. 투이나는 어쨌든 이걸 그들이 안전하다는 소식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돌아갈 때는 최대한 빨리 갈 거예요.”

“그럼 마법사를 부르실 겁니까?”

“루가님이 말씀만 하시면 바로 데리러 오겠죠?”

호루니와 스카차가 금세 눈을 빛냈다.

“으음, 기대에 찬 물을 끼얹는 것 같지만 지금 시드룬은 못 불러요.”

“네에? 왜요?”

“신전이 필요하거든요.”

시드룬이 말했던 조건을 떠올리며 투이나가 답했다.

“신전이요? 아르힘 님을 모시는 신전 말씀이십니까?”

“글쎄요. 꼭 아르힘 님이라는 이야기는 없었어요. 하지만 적어도 잠을 잘 수 있는 신전의 공간이 필요해요. 그럼 시도는 해볼 수 있겠죠?”

“허어어…….”

“어렵네요.”

스카차가 골치 아프게 되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루가 님만 찾으면 마법사를 통해 바로 복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가 흘긋 라카인을 곁눈질했다.

“설령 죄인 때문에 지체하시더라도 말입니다.”

투이나는 여전히 묵묵한 라카인을 응시했다.

말이 없어도 보이는 게 있다.

불을 지키는 그의 손이 아까보다 투박했다.

투이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문제는 맡겨 줄래요?”

“아, 알겠습니다.”

“오늘 밤은 여기서 머물러야겠군요.”

그들은 바닷가에 초라한 바람막이를 세웠다. 보초는 번갈아 서기로 했다.

투이나는 모래사장에 계속 머리를 대고 있었다.

그녀는 호루니와 스카차가 차례로 보초를 서는 동안 눈을 감았다.

그러다 라카인과 교대한 그들이 뒤척이며 잠들 때 눈을 떴다.

인기척을 낸 것도 아닌데 라카인과 곧장 눈이 마주쳤다.

“보고 있었어요?”

“……왜 주무시지 않으셨습니까.”

“잠이 안 와서요.”

투이나가 부스스 일어났다.

라카인은 잿더미 속에서 잠잠하던 불꽃을 뒤적여 다시 불을 피웠다.

“우리 이제 신전으로 돌아갈까요?”

라카인은 우리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사형이 철회되었기 때문입니까?”

“라카인이 원한다면 어디서든 살게 해주겠다는 결심은 그대로예요.”

투이나가 무릎을 그러안았다.

“하지만 이제 살아서 신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잖아요.”

“루가님은 신이 아니십니다.”

“하하, 그건 그렇죠.”

어렵게 꺼낸 말이었지만 투이나는 웃기만 했다.

라카인은 잘 하지도 못하는 돌려 말하기를 관뒀다.

“아르힘이 그립진 않으십니까. 루가 님의 신 말씀입니다.”

“그러게요.”

투이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이상하게 여전히 지켜보고 계실 거란 믿음이 들어요.”

“저 또한 이곳에서도 아르파 님의 영향력을 느낍니다. 아르힘은 강한 수호신이니 더욱 그러시겠지요.”

서로 다른 신을 믿으면서도 같은 믿음을 말하는 게 낯설었다.

다른 나라였다면 원래 두 사람은 이렇게 마주볼 일도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죽기 전에는 존재조차 몰랐던 사람.’

이 넓은 세계에서 그를 알 확률은 얼마나 적었을까.

그에게 처음으로 되살아난 비밀을 털어놓을 가능성은 또 얼마나 희박했을까.

신이 없는 곳까지 달려오기 위해서 그들이 만났던가.

쏟아지는 별빛 아래서 투이나는 라카인이 떠날 준비를 하는 걸 지켜보았다.

적어도 그녀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아쉽더라도 절대로 붙잡지 않도록.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잖아.’

보이지 않는 유성이 그들의 머리 위를 스쳤다.

“루가 님은 신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라카인의 주변으로 불티가 날렸다.

“많은 이들이 루가 님을 필요로 합니다. 감히 제가 그것을 빼앗을 순 없습니다.”

문득 투이나는 불꽃이 일렁일 때만 언뜻언뜻 보이는 라카인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어졌다.

포기하겠다는 말로 그녀 곁에 있고 싶다는 욕심을 드러내는 그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그러면, 모든 게 바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라카인은 여전히 그녀 대신 불을 응시했다.

“루가 님. 당신은 인간이십니다. 가까이 가지 않으면 당신께서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

“신께서는 이미 저희를 아십니다. 하여, 제가 누군가를 찾는다면 이제 한 사람뿐일 듯합니다.”

투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라카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당신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그건 죽음을 결심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삶을 결심한 자의 말이었고, 투이나가 너무나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설령 신께서 그 자리를 앗아가더라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라카인이 항상 가슴 속에 품고 있던 것처럼 투이나의 말을 이었다.

“저는 이제 죽음이 두렵습니다. 신께서 아무리 실망하더라도, 하찮은 인생을 제 것으로 갖고 싶어졌습니다.”

“…후회하지 않을 삶을 줄게요.”

투이나는 맹세했다. 언젠가 그가 그녀에게 주었던 맹세처럼.

심장이 벌새처럼 가냘프고 빠르게 날갯짓하느라 말도 자연스레 빨라졌다.

“설령 신께서 저희를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당신을 저버리지 않을 거예요.”

그러자 라카인은 오랫동안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기지개를 편 사람처럼 느리고 확실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람의 가슴을 벅차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투이나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은 건 그때쯤이었다.

투이나와 라카인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호루니? 자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죄송해요. 엿들으려던 건 아닌데.”

호루니가 시무룩하게 몸을 꿈질거렸다.

그녀가 움직이자 똑같이 자는 척하기 힘들어진 스카차까지 슬쩍 상체를 일으켰다.

“말씀하시는 얘기를 듣고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저, 저도 그렇습니다.”

머쓱하게 일어난 스카차의 머리가 한쪽으로 눌려있었다.

호루니도 뺨에 모래가 묻은 그대로였다.

‘귀여워라.’

스카차가 우물쭈물 물었다.

“그럼 같이 돌아가는 겁니까?”

“네.”

투이나가 라카인을 돌아보았다.

사형이 취소되어서가 아니라 확실하게 그의 의지를 확인했다.

‘라카인이 이렇게까지 내 옆에 있고 싶어 할 줄이야.’

새삼 생각하니 왠지 부끄럽고 얼굴이 홧홧 달아올랐다.

‘아니야. 순수한 마음으로 곁에 남고 싶다는 사람한테 이러면 안 되지.’

그동안 쌓아온 유대감이 얼만데.

투이나는 괜히 이상한 생각이 든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라카인은 대화를 들켰는데도 겸연쩍은 기색 하나 없었다.

스카차는 그래도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지 그를 흘끔거렸다.

“혹여 돌아간 다음에도…….”

“더는 모하세스 님께 협력하지 않을 것이다.”

라카인이 확실히 선을 그었다.

“어떤 대가를 치를 지라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 말에 투이나는 다시 진지해졌다.

‘내가 지켜야 해.’

신을 상대로 어디까지 배짱을 부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녀도 신의 보호를 받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한 사람도 지키지 못해서야.’

“호루니와 스카차가 와준 덕분에 상황을 알았어요. 고마워요.”

“저어, 루가님.”

그 때 호루니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실은 제가 자는 동안, 아니, 자는 척 하는 동안 생각한 게 있어요.”

“어떤 건데요?”

“마법사를 부르려면 신전이 필요하다고 하셨죠?”

호루니가 비장하게 주먹을 쥐었다.

“저희가 신전을 만들면 어떨까요?”

“네?”

확실히 비장해질 만한 내용이었다.

어이가 없어진 스카차가 되물었다.

“그게 말이 돼?”

“지금 당장 건물을 짓자는 얘기는 아니야.”

호루니가 뺨을 붉히며 주장했다.

“신을 믿기 위한 곳이면 어디든 신전이 될 수 있잖아요. 작은 천막을 만든 다음에 신전으로 삼는다면 어떨까요?”

“하지만 신전에는 성물이 보관되어있어야 해.”

“우리에겐 루가님이 계시잖아.”

호루니가 기다렸다는 듯이 투이나를 향해 팔을 벌렸다.

“루가님을 모시고 기도하면?”

호루니의 얘기에 그들은 제법 혹하는 얼굴이 되었다.

성물은 사제들이 오랜 시간 기도하고 축성한 물건이다.

시간으로 따지면 투이나도 태어났을 때부터 열심히 기도한 데다, 루가가 된 뒤로 온갖 축복을 다 받았다.

꼭 물건이 아니더라도 신전이라는 요건을 갖추기엔 충분할지도 모른다.

“정말……! 될 지도 모르겠네요!”

투이나의 말에 호루니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렇죠?”

“네! 시드룬이 말한 신전이 특별한 건물을 지칭한 적은 없으니까요.”

실제로 역병을 치료하러 갔던 허름한 신전에서도 시드룬이 나타났었다.

투이나가 벌떡 일어났다.

“해 봐요!”

행동력이 빠른 투이나가 바람막이를 뜯어냈다.

천막을 세우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지만 얼기설기 엮으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간이 천막은 한 쪽 면에 바람이 숭숭 새고 초라한 꼴이었다.

작기는 어찌나 작은지 간신히 사람 하나가 기어 들어갈 만했다.

“정말로 되겠습니까, 이거…….”

스카차가 미심쩍게 중얼거렸다.

투이나가 낑낑거리며 천막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걸 보자 더욱 걱정스런 표정이 되었다.

“어때요?”

투이나가 태연하게 쪼그려 앉았다.

시드룬을 만나야 하니 호위들이 가져온 물건으로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지만.

한껏 올라간 어깨가 지지대 사이에 꽉 끼인 모습은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저걸로 된 걸까?”

“나한테 물어봐도…….”

“시험해보면 알겠지.”

라카인이 무릎을 꿇었다.

그는 투이나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는 것 같았다.

한쪽 무릎을 꿇고 양손을 이마에 갖다 댄 그가 눈을 감았다. 경건한 자세였다.

급조한데다 초라한 장소였지만, 그가 기도하자 풍경까지 다르게 보였다.

하늘만 간신히 가린 천 밑에 앉아있는 여자와 기도하는 남자가 아니라,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해변까지 배경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단숨에 세계를 휘어잡아 이곳으로 응축시켜놓는 듯 했다.

호루니와 스카차는 홀린 듯이 라카인의 뒤에서 무릎을 꿇었다.

‘기분이 이상하네.’

세 사람이 이토록 진지하게 기도할 줄은 몰랐다.

약간 멋쩍어진 그녀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아르힘 님도 늘 이런 기분이셨을까?’

기도를 받는 대상이 되는 건 낯설다.

투이나는 재빨리 미리 준비해두었던 등불에 불을 붙였다.

그들이 진지한 만큼 투이나도 간절해졌다.

‘제발, 이 기도가 닿기를. 성공하기를.’

투이나는 그들이 지켜보고 있는 한 얼마든지 이 천막 안에서 잠들 수 있었다.

만약 그들이 자아낸 믿음이 진짜가 된다면 약속의 마법은 이곳에서도 이뤄질지도 모른다.

“아!”

투이나가 탄성을 내뱉었다.

기대에 응답하듯 보라색 마법진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됐어! 이게 보고 싶었던 거야!’

기쁘고 놀란 투이나가 일어서자 초라한 신전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다행히 한 번 열린 마법진은 그대로였다.

천막이 박살나는 소리에 기도하던 세 사람이 눈을 떴다.

“괜찮으십니까?”

“시드룬이 왔어요!”

투이나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가리켰다.

“성공한 거예요!”

그녀의 벅찬 목소리에 호위들마저 잠시 기쁨에 도취되었다.

마법진 너머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연보라색 머리칼이 드리워져 있었다.

‘어쩐 일로 등을 보여주지?’

늘 머리부터 튀어나오던 시드룬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렸는지 반응이 늦었다.

“시드룬!”

“……아. 당신이군요.”

한결같은 맹함을 뽐내며 시드룬이 고개를 돌렸다.

무심한 그의 눈동자가 주변을 훑었다.

“왜 바다에 있습니까?”

“도망쳐 나오느라요. 그동안 신전에 한 번도 안 갔어요? 샨이 애타게 찾았는데.”

“안 갔습니다.”

시드룬이 대답했다.

“당신이 부르지 않았으니까요.”

투이나는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늘 필요할 때만 부르는 것 같네요. 더 자주 만났어야 하는데.”

“상관없습니다. 대가를 교환하기엔 그게 더 편합니다.”

시드룬이 한 발짝 물러났다. 마법진의 크기가 늘어났다.

“들어오십시오. 당신에게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신전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던 투이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드룬이 내게 볼일이?’

하긴, 그동안 시드룬은 영 상태가 이상했다.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차라리 잘 됐다.

신전으로 돌아가는 게 조금 지체되겠지만 마법이 있는 이상 어떤 경로보다 빠를 테니 상관없었다.

“좋아요. 듣고 싶어요.”

투이나가 선뜻 대답했다. 호위들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같이 가는 거예요.”

투이나가 다짐했다.

시드룬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물러나 있었다.

그제야 투이나와 호위들은 마법진을 넘어갔다.

아르힘의 신전이 아니라서 그런지 마법진은 정확하게 시드룬의 집 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난번에 왔을 때와 달리 집 안엔 어떤 물건도 없이 깨끗했다.

지저분하게 쌓여있던 책과 양피지가 몽땅 사라지고 바닥에 먼지만 조금 남아있던 것이다.

휑한 풍경에 투이나가 당황했다.

“세상에, 그 많던 물건들이 다 어디 갔어요?”

“치웠습니다.”

시드룬은 허위허위 걸어갔다.

호루니와 스카차가 마법진 너머로 말을 데려오려고 애쓰는 동안 라카인은 미련 없이 투이나의 뒤를 따랐다.

“그동안 연구에 약간의 진전이 있었습니다.”

시드룬이 그녀를 텅 빈 방으로 이끌었다. 투이나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어떤 진전인데요?”

“시간을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네?”

투이나의 발이 우뚝 멈췄다.

“시간이요?”

시드룬은 왜 안 따라오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제자리에 섰다.

“그렇습니다.”

이런 엄청난 얘기를 저렇게 담담하게 하는 것도 범죄다.

충격이 뒤늦게 뒤통수를 때렸다.

“아니, 네? 대체 어떻게요?”

“본래 공간과 시간은 분리되지 않는 개념입니다. 그동안 미숙했던 부분을 해결했기에 시간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대체 어떤 부분을 해결해야 시간을 다룰 수 있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투이나가 되물었다.

“그럼 시드룬이 과거나 미래로 갈 수 있다는 소리에요?”

“다른 사람도 데려갈 수 있습니다.”

시드룬은 뽐내지도 않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걸 약간의 진전이라고 한단 말이야?

충격에 빠진 투이나가 하염없이 시드룬을 올려다보았다.

늘 한결같고 속을 알 수 없는 매끄러운 눈동자가 그녀를 비추었다.

돌을 보고 이야기하는 기분이 들어 투이나가 황급히 정신을 추슬렀다.

“어떻게 그렇게 된 거죠?”

“……당신에게서 받은 도움입니다.”

웬일로 시드룬이 말을 하기 전에 뜸을 들였다.

누군가 이 얘긴 하지 말라고 미리 당부해둔 것처럼 비어있는 부분이 신경 쓰였다.

투이나가 눈썹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도 알고 있나요?”

“수리시가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내 연구를 돕는 중입니다.”

“정확히 제가 뭘 했기에 시드룬의 마법이 극적인 변화를 이뤘는지 전혀 모르겠는걸요.”

투이나가 인상을 썼다.

“게다가 시드룬의 마법이 발전하는 동안 우린 만나지도 않았잖아요. 연구엔 제가 필요하다면서요?”

“…….”

“혹시 제가 모르는 사이에 뭘 했어요?”

시드룬이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아래를 보는 모습이 딱 봐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수상해!’

투이나가 대답을 재촉하는 눈빛으로 노려보자 시드룬이 불쑥 말했다.

“시간 마법을 보여주겠습니다.”

‘저 봐! 이건 딱 봐도 말 돌리려는 수작이잖아!’

하지만 수작부리지 말라고 넘어가기엔 시간 마법이 너무너무 궁금했다.

애써 표정관리를 하려던 투이나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으으, 정말!’

하필이면 그녀가 단순히 되살아난 게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온 바람에.

투이나는 시드룬이 얻었다는 시간 마법이 뭔지 반드시 보고 싶었다.

‘물론 아르힘 님이 쓰신 힘과는 다르겠지만. 여태까지 아르힘 님이 시간을 돌리셨단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는걸.’

어쩌면 그 때 구혼자로 와 있던 시드룬이 관련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적어도 어떤 마법인지 알아두면 좋잖아.’

고뇌하던 투이나가 결국 이성의 손을 들어주고 말았다.

“……어떻게 보여줄 건데요?”

시드룬의 양손에서 보랏빛이 번쩍였다.

“지금부터 겪을 일에 앞서 주의 사항을 말해주겠습니다.”

시드룬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저 모습을 보고 시간 여행을 준비하는 마법사라고 생각하겠어.

긴장감이 없어도 너무 없다.

“시간 마법은 아직 불안정한 점이 많습니다. 마법진 너머에서 무엇을 보더라도 되도록 간섭하지 마십시오.”

“간섭하면 역사가 바뀌나요?”

“모릅니다. 아직까지 간섭한 이후의 미래까지 확인해 본 적 없습니다. 이 주의 사항은 사용자를 위해서입니다.”

시드룬이 무심한 목소리로 무시무시한 내용을 말했다.

“당신이 시간 마법에서 세계에 많이 간섭하면 간섭할수록 그 곳을 벗어나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과거나 미래에 갇히고 싶지 않다면 행동을 주의하십시오.”

“명심할게요.”

투이나가 살짝 눈동자를 올렸다.

“그런데 그런 규칙을 어떻게 알았죠?”

“직접 시험해보았습니다.”

“잠깐, 그럼 본인이 갇힐 뻔 했다는 소리예요?”

“대기하고 있던 수리시가 꺼내주었습니다.”

시드룬이 지나가던 감나무에서 감을 땄다는 것보다 더 평화롭게 대답했다.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미리 머리카락을 준비해두었습니다.”

그제야 시드룬의 머리 한 쪽이 뭉텅 잘려나간 게 보였다.

‘으아. 자른 그대로 둔 거야?’

어차피 긴 머리라 자른 티도 안 났지만 막상 길이가 다른 걸 보자 은근히 신경 쓰였다.

나중에 다듬어 주리라 결심한 투이나가 물었다.

“왜 비늘을 안 쓰고요?”

“비늘만으로는 안정적인 마법을 쓰기 힘듭니다. 전에 말했던 것처럼 무언가를 부르는 게 고작입니다.”

“그렇군요.”

“처음 마법 속으로 들어가면 세계는 당신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의식하고 간섭하면 그 때부터 세계는 당신을 자신의 일부로 삼을 겁니다.”

투이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직접 보는 게 빠르겠군요.”

시드룬이 팔을 벌렸다.

공간 마법을 쓸 때와 달리 파동이 퍼지듯이 천천히 마법진이 그려졌다.

투이나가 경계하듯 주춤거리자 그가 덧붙였다.

“지금은 보기만 해도 됩니다.”

커다란 마법진이 거울처럼 펼쳐졌다.

마법진 너머를 본 투이나의 눈이 커졌다.

“저건…….”

작은 꼬마아이였다.

아직 젖살도 빠지지 않아 볼이 통통한 아이는 무언가 열중해서 쓰고 있었다.

앳된 얼굴과 달리 눈은 어른만큼이나 침착하고 지쳐보였다.

마치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렇게 집중만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돌봐주는 사람이 없는지, 빗질 한 번 하지 않은 연한 갈색머리는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다.

게다가 손과 팔은 온통 잉크가 묻어 얼룩덜룩했다.

‘얼굴이 눈에 익어.’

멍하니 꼬마를 지켜보던 투이나가 중얼거렸다.

“설마……. 시드룬이에요?”

“그렇습니다.”

시드룬은 평온하게 대답했다. 투이나는 정신없이 아이를 지켜보았다.

‘세상에. 시드룬이 원래 저렇게 생겼구나.’

연한 갈색머리에 또렷한 황갈색 눈동자가 제법 맑았다.

철이 좀 일찍 든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과 달리 제대로 생기가 넘쳤다.

한참을 열중하던 꼬마는 곧 종이를 펼쳐보더니 쪼르르 달려가 벽에 붙은 나머지 종이 옆에다가 붙였다.

“으우웃. 어릴 때 정말 귀여웠네요.”

투이나가 노골적으로 귀여워하는데도 시드룬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뭘 하고 있는 거예요?”

“아마도 마법을 연구하고 있는 중일 겁니다.”

투이나가 꼬마 시드룬에게서 시선을 떼고 어른 시드룬을 바라보았다.

‘아마도라니. 자기 어린 시절이잖아.’

그제야 시드룬이 기억을 일부 잃었다는 게 떠올랐다.

“시간 마법이라도 자기가 기억하고 있는 장면만 볼 수 있는 건가요?”

“아니요. 내게 이런 기억은 없습니다.”

시드룬이 천천히 걸어와 투이나 옆에 섰다.

자신의 어린 시절인데도 마치 다른 사람을 보듯이 냉담했다.

“아직 마법을 완벽하게 다루지 못해서 원하는 과거로 가지 못합니다.”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 시드룬이지만 그 말에선 왠지 아쉬움이 느껴졌다.

‘아. 영혼의 세계를 열었던 순간으로 가고 싶은 거구나.’

시드룬이 투이나에게 연구를 도와달라고 했던 이유도 다시 영혼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였다.

시드룬은 스스로의 힘으로 영혼의 세계로 간 기억을 잃어버렸다.

시간 마법만 제대로 쓸 수 있게 된다면 기억은 물론,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게 틀림없었다.

‘그럼 내가 필요 없어질지도 몰라!’

투이나는 아까보다 응원하는 마음이 되었다.

저렇게 어린 아이가 마법에 열중한 모습을 보니 어쩐지 마음이 짠했다.

“시드룬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마법사였나 봐요.”

“그렇습니다.”

“지금 말을 걸면 들리나요?”

“당신이 원한다면. 지금 대화는 들리지 않습니다만, 소년에게 들려주겠다고 생각하며 말하면 들릴 겁니다.”

“소년이 아니라 시드룬이죠.”

시드룬은 그저 턱을 끄덕였다. 여전히 남 일이라는 태도다.

투이나는 마른 어깨를 가진 어린 시드룬을 응시했다.

‘왜 집에 아무도 없는 걸까.’

원래 시드룬의 집을 보는 것처럼 어린 시드룬의 집도 잔뜩 휘갈긴 낙서들과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그것 말고는 사람이 사는 흔적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투이나는 할 수만 있다면 저 꼬마의 뺨에 묻은 잉크를 닦아주고 모든 것이 괜찮은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간섭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조금 무섭기도 했다.

투이나가 망설이고 있는 사이 뒤쪽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루가님! 괜찮으시다면 말은 어디다가 묶을지 물어봐주시면….”

“히익!”

아무 생각 없이 들어오던 호루니와 스카차가 질겁했다.

때마침 마법진 너머로 꼬마 시드룬의 얼굴이 보이던 찰나였다.

시드룬이 돌아보는 모습과 꼬마 시드룬이 돌아보는 모습이 동시에 겹쳐지는 광경이 제법 섬뜩했던 것이다.

“마, 마법사가 둘?”

스카차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내 착각인가?’

어린 시드룬이 잠깐 이 쪽을 올려다보는 것 같았다.

시드룬이 곧장 마법진을 닫는 바람에 그 뒤는 보이지 않았지만.

“무슨 일입니까.”

“아……. 저어.”

호루니와 스카차의 눈동자가 바쁘게 굴러갔다.

당황한 그들을 구출해준 건 라카인이었다.

“루가 님을 혼자 둘 수 없어 온 자들입니다. 함께 있게 해주십시오.”

‘아, 참! 라카인도 여기 있었지!’

시드룬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린 바람에 라카인을 잠시 잊었다.

은신이 특기라더니 정말 인기척을 죽이는 일에 능숙했다.

시드룬마저 이제야 라카인을 발견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고, 고맙습니다.”

호루니와 스카차가 숨김없이 경계심을 드러내며 인사했다.

라카인이 가만히 그들을 데려와 옆에 서게 했다.

시드룬이 마법진이 있던 자리를 아쉬운 듯 바라보았다. 평소보다 동작이 느렸다.

지친 기색을 알아차린 투이나가 살짝 그를 건드렸다.

“낯선 마법이라 힘들면 오늘은 여기까지 해도 괜찮아요.”

“아니오. 지난번에 부탁을 들어준 대가를 지금 받고 싶습니다.”

시드룬이 투이나를 향해 몸을 틀었다.

“당신의 과거를 봐야겠습니다.”

투이나가 눈을 크게 떴다.

“제 과거요?”

시드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투이나가 난감하게 입술을 매만졌다.

“연구에 그런 것도 필요한가요? 제가 기억하는 일이면 그냥 설명할 수도 있는데.”

“필요합니다.”

고민해보던 투이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으음. 좋아요. 딱히 감출 이야기도 없고 재밌을 것 같은걸요.”

그 때 듣고 있던 라카인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저희도 같이 갈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는 시드룬이 바로 상관없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라카인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루가 님을 혼자 보낼 수 없습니다.”

“혼자가 아닙니다.”

“아까 듣기로는 마법에 갇혀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들었습니다. 반드시 따라가야 하는 게 아니라면 마법사님은 위험한 순간 끌어낼 수 있도록 바깥에서 대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시드룬이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럼 당신이 루가를 따라갈 이유도 없잖습니까.”

“저희는 루가 님의 호위입니다. 위험하든 안전하든 그 분을 따르는 것이 의무입니다.”

호루니와 스카차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라카인을 힐끔거렸다.

그가 이렇게 자기주장을 많이 하는 건 처음 보았다는 표정들이다.

투이나도 비슷했다.

‘그 때 이후로 조금 변했나?’

자신의 옆에 있고 싶다고 말한 뒤부터 라카인이 표현하는 일에 자연스러워진 것 같았다.

그 전에는 투이나에게 말하거나 물어보는 일도 허락을 받았었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시드룬은 잠자코 라카인의 제안을 고민해보더니 대답했다.

“당신들이 정말 따라가야 한다면 마법을 제어하긴 더 까다롭겠군요. 확실하게 통제하려면 수리시를 불러야 하지만 당신들이 온 걸 알면 수리시가 좋아하지 않겠지요.”

다른 마법사를 들먹이자 호루니와 스카차가 오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새삼스럽게 여기가 마법사 소굴이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정작 투이나는 수리시를 알고 있어서 그런가, 크게 위협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무서운 사람이긴 하지만.’

“우리도 신전에 빨리 돌아가야 하니까요. 그러는 편이 좋겠네요.”

투이나가 라카인의 제안에 힘을 실어주었다.

시드룬이 미묘한 얼굴로 투이나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알겠습니다.”

시드룬이 다시 양손에 보랏빛을 불러왔다.

“이쪽으로 와서 손을 잡으십시오.”

“손이면 충분해요? 또 피 가져가고 그런 거 아니죠?”

투이나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 차갑고 크기가 큰 손이 그녀의 손을 쥐었다.

“아닐 겁니다.”

애매하게 말하기는.

곧 따끔거리는 감각과 함께 마법진이 열렸다.

살짝 내려앉은 천장.

지푸라기 색 벽.

투이나가 저도 모르게 목을 길게 뺐다. 마법진 너머로 익숙한 풍경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집이야.’

투이나가 멍하니 바라보았다.

너무 오래 전이라 기억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보자마자 당장 향수가 몰려왔다.

“당신이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시드룬이 투이나에게 말했다. 지켜보고 있던 호위들이 그제야 반응했다.

“그,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거죠?”

“주의 사항은 저 사람이 알려줄 겁니다. 아까 들었을 테니.”

시드룬에게 지목당한 라카인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루가 님.”

“그으래요.”

인사하려던 투이나가 잡혀있는 손대신 어깨를 흔들었다.

라카인을 마지막으로 세 사람이 마법진을 넘자 마법진이 투이나와 시드룬에게 다가왔다.

양손을 붙잡고 있던 시드룬이 당부했다.

“명심하십시오. 지나친 간섭은 당신을 구출할 수 없게 만듭니다.”

“네, 명심할게요.”

시드룬이 잡아당기고 있던 투이나의 양손을 놓았다.

생각보다 세게 당기고 있었던 건지 순간 뒤로 몸이 쏠렸다.

‘으아?’

투이나가 넘어지는 감각에 입을 벌렸다.

그녀의 뒤에 마법진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순간 섬찟했다.

“잘 다녀오십시오.”

시드룬이 떨어지는 투이나를 향해 인사했다.

풀썩. 쓰러지는 투이나를 라카인이 받아 안았다.

“괜찮으십니까?”

“아, 네.”

투이나가 급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라카인이 안전하게 투이나를 내려놓았다.

그녀가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마법진 너머로 시드룬의 질문이 들려왔다.

“이곳이 몇 살 때의 기억인지 가늠할 수 있습니까?”

“글쎄요.”

투이나가 얼결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아주 작았다. 자질구레한 살림살이로 꽉 찬 벽과 발 디딜 틈 없는 바닥까지.

‘냄새까지 그대로야.’

투이나가 흐읍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비리고 습한 공기 사이로 연하게 말린 풀냄새가 났다.

말라비틀어진 장작 사이로 바스라진 갈색 꽃과 풀 부스러기가 보였다.

집안에서 좋은 냄새가 났으면 해서 먹을 게 아닌데도 뜯어오곤 했었다.

‘다 기억나.’

투이나가 추억에 잠긴 표정으로 부스러기를 쓸었다.

“아기 때는 아닌 것 같아요.”

“정말 여기가 루가 님의 과거인가요?”

호루니가 설렘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여기가 루가 님이 살던 곳……!”

라카인도 집안을 살펴보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시선의 중심에는 언제나 투이나가 있었다.

투이나가 짚은 손 아래로 말린 잎사귀까지 선명히 보였다.

스카차가 불안하게 두리번거렸다.

“누가 들어오면 어떡합니까?”

“들어와도 보이지 않습니다. 간섭만 하지 않는다면.”

시드룬이 불길한 단서를 달아놓고는 고개를 돌렸다.

“오는군요.”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네 사람이 화들짝 놀랐다.

곧 삐걱거리며 문이 열렸다.

“다녀왔습니다!”

투이나가 숨을 들이켰다.

‘우와!’

어린 모습이더라고 하더라도 자신을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작은 투이나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일곱 살? 여덟 살? 그쯤 되었을까.

아직 몸이 다 크지 않은 시절이라 몸에 난 얼룩이 유독 크게 보였다.

“어, 어떡해. 어린 루가 님이야!”

“안 보인대잖아. 안 보이는 척해!”

호루니와 스카차가 속닥거렸다.

투이나는 자기도 모르게 벽 쪽으로 물러섰다. 어린 자신이 가는 길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시드룬, 지금 말해도 돼요?”

“됩니다.”

“혹시 이 상태로 부딪치면 어떻게 되죠?”

“그대로 통과하게 됩니다.”

시드룬이 마법진 너머로 여전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마법진을 보고 불안해졌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든든했다.

“그곳에 있어도 당신의 존재는 여전히 세계와 유리되어 있습니다. 의지를 드러내어 그 세계에 들키지 않도록 하십시오.”

“의지를 드러내지 말라고 해도….”

투이나가 힐끔거렸다.

꼬마 투이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잔뜩 뜯어온 푸성귀들을 늘어놓았다.

“오늘은 야채국, 점심에는 고구마를 먹었어요. 내일은 무엇을 먹을까요?”

노래를 흥얼거리는 꼬마 투이나를 보자 피가 얼굴로 몰렸다.

몽실몽실한 표정을 지은 호위들과 시드룬까지 그녀를 쳐다보았기 때문이다.

“벼, 변명하자면 어렸을 때는 원래 다 그렇지 않나요? 먹을 게 제일 중요하고 좋잖아요.”

“네에, 네. 그럼요.”

호위들이 무척이나 흐뭇한 미소를 지어서 투이나는 더욱 부끄러워했다.

시드룬은 아무렇지도 않게 끼어들었다.

“어린 모습을 보고 몸에 무언가 이상이나 특별한 게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음……. 없는 것 같은데요.”

투이나가 자신의 몸을 돌아보았다.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다만 옅은 회색인 자신의 얼룩보다 훨씬 짙은 꼬마 투이나의 얼룩이 신경 쓰였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저 때는 아직 아르힘님을 만나기 전이구나.’

자신의 집은 수도에서도 한참 외곽에 떨어져 있는 곳이다.

동쪽 관문 바로 옆이라 늘 시끄럽고 먼지가 날리는 구역이었다.

그 대신 여행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아직 어리신데 집에 사람이 없네요. 루가 님은 형제자매가 많다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아, 이때는 아직 동생들이 태어나기 전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일 나갔구요.”

투이나가 그리운 눈으로 바라본 것도 잠시, 또 벌컥 문이 열렸다.

“아니, 얘가 왜 아직도 여기서 이러고 있어!”

“다녀오셨어요!”

투이나가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 투이나의 어머니가 온 것이다.

그녀는 동동거리며 뛰어오는 투이나를 본체만체 했다.

“귀찮게 달라붙지 말고 저리 가. 저녁 받으러 가는 건 어떻게 하고 여기 있어?”

“그거는 이따가 할래요. 오늘 친구 만나기로 했어요!”

“친구? 네가 무슨 친구가 있어?”

“나랑 똑같은 친구요! 엄청 엄청 잘해줘요. 아는 것도 많아요!”

꼬마 투이나가 뿌듯하게 자랑했지만 피곤한 그녀의 어머니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랑 똑같으면 걔도 일찍 죽겠네. 걔랑 놀지 마라.”

“히잉.”

투이나가 조르는 소리를 냈다.

“일찍 죽어도 괜찮은데. 그건 나도 똑같은데. 친구 하고 싶어요.”

“먼저 죽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그래도 친구 했다는 사실은 내가 기억하는데. 지금도 좋은데 더 많이 같이 있고 싶어요.”

“…마음대로 해. 나중에 질질 짜는 건 네 선택이지.”

어머니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뒤적거리며 호미 같은 자질구레한 도구를 챙긴 그녀가 다시 바깥으로 나갔다.

어머니에게 허락받아 기분이 좋아진 꼬마 투이나가 뜯어온 푸성귀 중에 제일 예쁜 잎사귀를 골랐다.

친구에게 주려는 모양이다.

또 한 번 정적이 흘렀다. 아까보다 훨씬 굳은 정적이었다.

투이나가 쑥스럽게 입을 열었다.

“으음. 변명 하나 더 하자면, 저 때는 저도 정말로 일찍 죽을 줄 알았거든요.”

투이나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하지만 조금 전에 감돌았던 훈훈한 분위기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어떻게 저런…….”

호루니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계속 저런 말을 들으며 크셨습니까?”

“그랬죠.”

스카차의 얼굴이 참담하게 구겨졌다. 투이나가 오히려 그를 위로했다.

“너무 심각하게 듣지 않아도 돼요. 얼룩병에 걸린 사람들은 모두 단명하는 건 알려진 사실이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린 애한테 너무 거리낌 없이 말하는 거잖습니까.”

“전 오히려 좋다고 생각하는 걸요?”

투이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감추거나 숨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론 아쉬운 마음은 있었지만, 받아들이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걸요.”

워낙 어렸을 때부터 듣고 자란 이야기라 오히려 죽음이 친근했다.

실제로 살해당한 뒤에야 죽음을 친구처럼 여길 수는 없다고 깨달았지만.

“루가 님은 죽음이 두렵지 않으세요?”

그 때 투이나는 라카인과 눈이 마주쳤다.

여기서 그녀가 되살아난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그다.

라카인의 표정을 본 투이나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두렵죠. 저도 무서워요.”

투이나는 얼른 웃어보였다.

호위들에게도 자신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기엔 때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나 영원히 살 순 없잖아요.”

영원토록, 이라는 말을 들으면 기쁘지만.

떠나는 걸 그렇게까지 무서워하고 있구나 싶어서 오히려 안타까워졌다.

신이 아니고서야 이별은 언제든지 찾아온다.

투이나가 가벼운 태도를 보였기에 호위들은 더 뭐라고 하지 못했다.

그래도 내심 투이나의 가족을 향한 호감도가 뚝 떨어진 모양이다.

“지금도 똑같으십니까?”

“아니요. 제가 루가가 된 다음에는 더 오래 살 거고, 굶는 일도 없을 테니까.”

모두가 행복해졌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투이나가 방긋거리는 미소를 지었는데도 호위들은 마음에 끼인 안개를 걷어버리지 못했다.

대신 마음에 안개는커녕 이슬조차 맺히지 않은 시드룬이 끼어들었다.

“이제 이동하겠습니다.”

“아직 우리가 여기 있는데 그냥 그렇게 바꿔도 안전한 거예요?”

“간섭되지 않았으니 괜찮습니다.”

곧장 주변 풍경이 일그러졌다. 시드룬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마법을 쓴 것이다.

당황한 투이나를 라카인이 꽉 붙들었다. 호위들도 긴장한 채 달라붙었다.

세상이 흔들리더니 갑자기 풍경이 휙 변했다.

계단에 앉아 잠든 투이나가 보였다.

아까보다는 어려 보였다. 기껏해야 여섯 살 정도 되었을까.

그러나 자세히 보기도 전에 또 풍경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우물을 들여다보고 있는 꼬마였고, 그 다음에는 바구니 안에 든 아기였다.

모두 몸에 얼룩이 가득한 투이나였다.

“잠깐, 시드룬! 천천히 해요!”

바뀌는 속도가 빨라 멀미가 날 정도였다.

그러나 시드룬은 조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시드룬 안색이 왜 저렇지?’

덜컥 걱정이 밀려왔다.

“시드룬! 괜찮아요?”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법에 집중하느라 무리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제 그만 해요! 우리 이제 나갈게요!”

“안 됩니다.”

“네에? 어디까지 가려고요!”

“당신이 태어난 순간을 봐야 합니다.”

“그걸 왜…….”

투이나의 눈이 크게 떠졌다.

보다 못한 라카인이 시드룬을 떼어내려던 순간 마법진이 뒤집혔다.

“어어!”

“루가 님! 조심하세요!”

어지럽게 흔들리던 세계 바깥으로 투이나와 호위들이 튕겨나갔다.

더는 힘을 조절하지 못한 시드룬이 그들을 끌어낸 것이다.

“……하.”

시드룬이 짧게 숨을 토해냈다. 그는 심지어 땀을 흘리고 있었다.

분명히 마법진 안에선 서 있었는데.

마법진 바깥으로 나오니 자신은 여전히 시드룬의 손을 잡고 있는 그대로였다.

마치 마법진에 들어가기 전부터 손을 놓은 적이 없던 것 같았다.

“시드룬! 정신이 들어요?”

그는 대꾸 없이 서서히 닫히는 마법진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맹렬한 관찰에 투이나까지 시선이 옮겨갔다.

마법진이 닫히기 직전, 투이나는 어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투이나의 몸이 굳었다.

‘맙소사. 저건 미래의 나야.’

투이나는 경악했다.

아이가 있다면,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랑?’

분명히 가족처럼 보이는 사람이 옆에 있었다.

허나 이미 닫혀가는 마법진으로는 무릎까지밖에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베인이어야 하는데.

머릿속으로는 납득하면서도, 확인해보고 싶은 충동이 그녀를 흔들어놓았다.

저도 모르게 투이나가 소리쳤다.

“거기 누구예요?”

마법진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무릎을 굽혔다. 마치 그녀를 들여다보려는 듯이.

투이나의 뒷머리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가 미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파삭 마법진이 깨졌다.

시드룬의 힘이 다한 것이다.

그때까지 투이나의 손을 놓지 않던 시드룬이 푹 고개를 숙였다. 몹시 기력을 소모한 모양이다.

놀란 심장이 쿵쾅거렸다.

“정신 차려요, 시드룬! 방금 그거 도대체 뭐예요?”

“…….”

시드룬은 길게 호흡하기만 했다.

‘회복할 시간을 줘야 하나.’

투이나가 망설이는 찰나, 그의 손가락이 투이나의 깍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건.”

시드룬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처음으로 시간 역행에 성공했다는 뜻입니다.”

시드룬은 몸을 회복하자마자 투이나를 향해 강한 지식욕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예언은 수호신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그는 바닥에 나동그라진 호위들을 무시한 채 투이나에게 말을 쏟아놓았다.

“마법으로 미래를 보는 데 성공했으니, 신의 힘이 마법과 다르지 않다는 가설에도 신빙성을 얻겠군요.”

“저기…!”

“이번에도 당신이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하나의 영역을 뛰어넘을 때마다 당신이 있군요.”

시드룬의 숨이 서늘하게 얼굴에 닿아왔다.

평소에는 호흡이나 제대로 하는 사람인가 싶더니.

정신없이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투이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정신부터 차려요. 제가 아니라 시드룬의 힘이잖아요.”

“아닙니다. 이건.”

그 때 라카인이 다가와 두 사람의 손을 떼어냈다. 단호한 몸짓이었다.

“정신이 들었다면 루가 님께 제대로 설명하십시오.”

라카인이 팔에 가하는 힘과 달리 목소리는 몹시 정중했다.

시드룬은 시선을 투이나에게 고정된 채로 슬슬 밀려났다.

‘라카인, 진짜 세구나.’

예전에 호루니와 스카차가 시드룬한테 달라붙었을 때는 둘이서도 그를 떼어내기 힘들어했는데.

스르륵 풀려난 투이나가 한결 편해진 얼굴이 되었다.

그녀가 살짝 속삭였다.

“고마워요.”

라카인이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다시 뒷자리로 돌아갔다.

시드룬은 허전해진 손을 그대로 바닥에 짚었다.

“내가 갑자기 시간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건 당신의 힘을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역시 나 모르는 사이에 뭘 했구나.

투이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자신한테 무슨 힘이 있다는 건지 이젠 그녀가 다 궁금했다.

왜 항상 필요해지는지 말이다.

“구체적으로 뭘 했죠?”

“말할 수 없습니다.”

시드룬이 드물게 대답을 거절했다.

찝찝하지만 저건 캐물어봤자 소용없을 얼굴이다.

“…내가 태어난 시간은 왜 보려고 했어요?”

“원인을 파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시드룬이 말을 이었다.

“얼룩병이 태어날 때 당신의 영혼에 무슨 영향을 주었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투이나는 갑자기 바다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네 영혼에는 죽음이 필요하다.’

투이나의 표정이 이상야릇해졌다.

그게 정말로 영혼의 세계에서 들은 목소리들이었을까?

“지금 제 영혼이 어떤데요?”

“…….”

시드룬은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뭐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말로 설명하기엔 너무 길어서 정리가 되지 않는다는 건지.

‘멀쩡하다는 뜻은 아닌 것 같네.’

투이나가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평생을 따라다닌 병인데, 이제와 더 무시무시한 피해를 준다고 해서 겁나지도 않았다.

시드룬이 그나마 위안이 되는 말을 던졌다.

“어차피 모든 마법사와 수호신을 가진 자는 영혼이 변화합니다.”

“얼룩병이 영혼까지 다치게 할 줄은 몰랐어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영혼을 다치게 할 수 있습니다.”

시드룬이 대수롭지 않게 말한 말에 괜히 그녀의 가슴이 아파왔다.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영혼을 되찾으려고 하는 거예요?”

“모르겠습니다.”

시드룬이 멍하니 턱을 들어올렸다.

“내가 찾는 게 정말 영혼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확실하지가 않군요.”

“…….”

마법에서 나가떨어진 호루니와 스카차가 조심스럽게 몸을 추스렸다.

“저기… 정말 미래를 보았단 말씀이십니까?”

“그런 것 같아요.”

“아무리 마법사라지만 시간까지 다루다니……. 정말 뭐든지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뭐든지?’

갑자기 투이나의 표정이 변했다.

“시드룬. 제가 있다면 일어나지 않은 일도 볼 수 있나요?”

“미래를 말하는 겁니까?”

“아뇨, 과거긴 한데. 미래…라고 봐야 하나?”

투이나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하나였다.

‘내가 죽었던 순간을 보고 싶어.’

투이나의 눈이 묘한 열기를 띄고 이글거렸다.

“시드룬은 공간을 다뤘을 때도 다른 차원을 열었잖아요. 시간에도 다른 차원이 있지 않을까요? 일어나지 않았던 미래가 과거가 된 차원, 같은 거요.”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투이나의 이야기를 알고 있던 라카인은 심경이 복잡해졌다.

투이나를 죽인 사람이 누구든 알게 된 순간 그녀가 큰 상처를 받을 게 분명했다.

이미 그녀를 죽이려 한 사람들 속에서, 살인자를 하나 더 늘리는 게 좋은 것일까.

한 때 살인자였던 자신의 존재조차 이미 투이나에겐 부담일 텐데.

라카인에게 진한 부채감이 밀려왔다.

받은 용서는 돌려드려야 한다. 어떤 형태로든.

다행히 시드룬과 투이나는 그런 마음을 모른 채 대화를 이어나갔다.

“확실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입니다. 연구해보겠습니다.”

“좋아요!”

“대신 두 번째 시험에서는 내가 승리하도록 해주십시오.”

“네?”

투이나의 눈썹이 찌그러졌다.

갑자기 튀어나온 시험 얘기에 어안이 벙벙해진 것이다.

“그걸 신경 쓰고 있었어요?”

“나도 구혼자입니다.”

시드룬에게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의아해하던 투이나에게 그의 말이 이어졌다.

“게다가 연구가 끝나도 당신의 존재는 유용할 것 같으니.”

아, 이런. 역시 다른 데 관심이 있는 거였다.

허탈해하는 투이나에게 시드룬이 되물었다.

“어렵습니까?”

“시험은 공평해야죠.”

“당신이 원하는 걸 갖고 싶지 않습니까?”

투이나가 움찔했다.

말끔한 시드룬의 얼굴이 어쩐지 약 올리며 유혹하는 것처럼 보였다.

‘언제부터 저렇게 사람다워졌다고.’

투이나가 얄미운 표정을 짓더니 양보했다.

“시험을 도와주긴 할게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더 잘해낸다면 승리를 보장해줄 수 없다는 건 명심해줘요.”

“충분합니다.”

시드룬은 만족했다.

어어하는 얼굴로 대화에 끼어들 순간을 노리고 있던 스카차가 얼른 물어보았다.

“그럼 두 번째 시험을 어떻게 치를지 결정하신 겁니까?”

“네.”

투이나가 길게 기지개를 켰다.

“아르힘 바깥에 나온 다음에 결정했어요.”

그러니 이제는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 * *

시드룬은 흔쾌히 신전으로 가는 마법진을 열어주었다.

“가능하면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불러주십시오.”

“두 번째 시험 때 봐요.”

투이나가 마법진을 건너갔다.

너무도 쉽게 그녀는 다시 아르힘의 땅을 밟고 서 있었다.

그러나 호위들이 얘기했던 대로 신전은 전과 달라진 뒤였다.

“어어?”

투이나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분명히 그녀가 알던 신전이었다.

다만 돌로 지어진 건물이라 희고 회색인 무채색이었던 벽에 푸른빛이 빼곡하게 박혀있었다.

색 모래와 수정을 섞어 정교하게 만든 무늬가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작은 돌 하나하나가 이루는 규칙성이 거대한 벽과 합쳐지자 압도적인 건축미를 이뤄냈다.

표면이 어찌나 매끈하고 거울처럼 빛나는지 단순한 돌이 아니라 보석처럼 보였다.

“우와, 이런!”

뒤따라온 호위들까지 입을 딱 벌리고 감탄했다.

“여기가 정말 아르힘 님의 신전이에요? 몰라보겠어요.”

“대체 사람을 얼마나 썼기에 이런 대공사를 벌써 끝낸 거지……?”

라카인도 달라진 신전의 모습에 놀랐으나, 멍하니 신전 외벽을 올려다보는 투이나가 위태로워보였다.

차라리 시드룬의 마법 속에서 과거의 집으로 돌아갔을 때가 더 즐거워 보일 지경이었다.

적어도 그 때는 편안해 보였으니까.

“루가 님?”

자갈이 밟히는 소리에 투이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너무도 완벽한 순간에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베인.”

목이 꽉 막히는 기분이다.

그는 이때까지 보았던 모습과 전혀 다른 복장을 하고 있었다.

신전에서 추구하는 정결한 흰 천에 붉은 실로 수놓아진 예복을 입고 있었다.

수려한 금발을 감추듯 살짝 늘어뜨린 터번까지 성스러움을 더해주는 듯했다.

‘……눈이 부셔.’

이름이 먼저 튀어나온 것과 달리 투이나는 베인의 낯선 모습에 적응하지 못했다.

환하게 웃으며 달려오는 베인이 어딘가 낯설어보였다.

그러나 베인은 하나도 개의치 않았다.

이날만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달려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잘 돌아오셨습니다.”

폭 끌어안긴 옷깃이 부드러웠다.

투이나는 주저 없이 반겨주는 베인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다.

“저 왔어요.”

투이나가 그의 등을 끌어안으려고 하는 찰나, 베인이 몸을 떼었다.

‘베인?’

어리둥절한 투이나에게 베인이 황금마저 녹여버릴 만큼 황홀한 미소를 지었다.

가벼운 깃털처럼 그녀의 뺨을 감싸 쥔 베인이 깊게 입을 맞췄다.

“!”

“헉!”

호루니가 확 얼굴을 가렸다.

놀라기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이런 바깥에서 만나자마자 진한 애정표현을 보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투이나조차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길어!’

당황한 투이나가 몸을 비트는데도 베인은 가는 신음을 흘리며 집요하게 입술을 붙여왔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가볍고 부드러운 접촉이라 머리가 이상해질 정도였다.

“그, 그만…….”

투이나가 다급히 손을 들어 올려 그 사이를 막았다.

그녀가 떨리는 눈동자로 베인을 올려다보았지만 베인은 여전히 한없는 기쁨과 애정을 보여주기만 했다.

‘이, 이상해.’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에 귀까지 저릿했다.

누군가와 애정 행각을 한다고 이렇게 부끄러워진 적이 없었는데.

투이나는 저도 모르게 뒤에 서있는 호위들에게 자꾸만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그녀를 지금 무슨 생각으로 보고 있을지 갑자기 너무나 신경 쓰였다.

라카인도 보았을까?

베인은 한눈을 파는 투이나를 보고도 가볍게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투이나가 입술을 가린 손 바로 위였다.

“전에는 입맞춤이 이렇게 좋은 줄 미처 몰랐습니다.”

그의 눈꼬리가 야릇하게 휘었다. 정신없이 뛰는 소리에 머리가 쿵쿵 울렸다. 혼란스러웠다.

“정말……. 베인이에요?”

“그럼 제가 누구겠습니까.”

베인이 싱긋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투이나가 더듬거렸다.

“무슨, 무슨 일이 있었어요? 왜 이렇게 사람이…….”

베인이 웃기만 하고 대답을 안 했다.

다만 그가 허리를 감싼 팔이 점점 더 안쪽으로 조여들었다.

“알고 계시잖습니까.”

일렁이는 해류처럼 두 눈동자가 점점 깊은 바다 속으로 그녀를 끌고 들어갔다.

“루가 님이 저를 두고 떠나셨지요.”

푸른 심해어처럼 어두운 동공이 얼어붙은 투이나를 응시했다.

그가 불어넣은 죄책감을 음미하듯 투이나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핥듯이 맛본 베인이 만족한 듯 속삭였다.

“이제 다시는 그러시지 못할 겁니다.”

그가 덫처럼 꽉 틀어쥔 팔로 투이나를 잡아당겼다.

솜털이 곤두선 그녀의 귀로 나지막한 베인의 명령이 들렸다.

“저자들을 잡아라.”

“루가 님!”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늘에 숨어있던 자들이 호위들을 공격한 것이다.

저항이나마 가능했던 건 라카인뿐이었다. 호루니는 비명 한 번에 쓰러졌고 스카차는 바로 뒤통수가 깨졌다.

피를 본 투이나가 베인의 옷깃을 붙잡았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들이 루가 님을 데려갔습니다.”

베인이 너무도 태연하게 대꾸했다.

“누가 누굴요? 제가 데려간 거예요!”

“상관없습니다.”

베인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그녀의 뺨을 손끝으로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걱정 마세요. 저들을 해치진 않을 겁니다.”

“저걸 보고도 어떻게……!”

“더 치명적으로는 아니란 말씀입니다. 보세요, 벌써 사제가 붙었잖습니까.”

베인이 살살 눈웃음을 쳤다. 질질 끌려 나가는 스카차의 팔을 붙잡은 사람 중에는 분명 사제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사제복도 입지 않은 자들이었다.

‘크로퍼드 상단에서 온 사람들이야.’

그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끼어 있었다. 투이나는 베인을 붙든 채 바깥으로 밀어냈다.

라카인이 두 명을 뿌리치자 네 명이 달려들었다.

“그만 하세요!”

루가의 명령에 모든 사람들이 동작을 멈췄다.

‘이건 말도 안 돼.’

코피를 흘리는 호루니가 스카차를 다시 붙잡으려고 버둥거렸다.

투이나가 축 늘어진 스카차를 가리켰다.

“치료하세요.”

사제는 군말 없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것마저 이상했다.

원래 그녀가 명령하면 아무리 사제라도 한두 마디씩 덧붙이곤 했는데.

“으으윽…….”

스카차가 간신히 눈을 떴다. 베인은 느릿하게 그녀를 쓰다듬기만 했다.

“아르힘 님이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제가 오는 걸 알고 있었잖아요.”

투이나의 말에 베인이 귓가를 간질이던 걸 멈췄다. 그녀가 가라앉은 눈으로 베인을 올려다보았다.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을 보고도 모를까요.”

“그게 제가 걱정하지 않았다는 말이 될 수는 없겠지요.”

베인이 금세 능란하게 말을 돌렸다.

너무도 익숙한 말투였는데도 투이나는 도저히 이 사람이 자기가 알던 베인이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면 내가 변한 거야?’

베인은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말의 내용만 빼면 그는 여전히 다정했다.

“피부가 차갑습니다. 너무 오래 바깥 공기를 쐬셨습니다.”

코와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호위들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투였다.

상단에서 가장 작은 역할을 하는 자까지 챙겨 주기로 이름 높았던 베인이.

그를 쥐고 있던 손가락에서 힘이 풀렸다.

“아르힘 님을 뵈러 가겠어요.”

“그분은 만나실 수 없습니다.”

베인이 상냥하게 거절했다.

“루가 님을 편안하게 하는 일이라면 뭐든 해도 좋다고 이미 허락받았습니다.”

“제 허락은 듣지 않는군요.”

“허락해 주지 않으실 겁니까?”

베인이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피를 보지만 않았더라도 투이나는 기꺼이 그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했을 것이다.

그만큼 오늘 베인의 미모는 물이 올라 있었다. 처참한 기분이 들 만큼.

“가야겠어요.”

투이나가 그를 밀어냈다. 꽃처럼 접어 웃던 눈매가 낙화하듯 내려앉았다.

베인은 투이나를 꼭 끌어안았다. 배웅을 하려는 것 같았다.

“지금 아르힘 님을 만나러 가시기엔 루가 님께 휴식이 필요하십니다.”

“그건, 읏?”

따끔. 목에 가시가 찔린 느낌이 났다. 투이나가 눈을 부릅떴다. 몸이 뻣뻣해지고 있었다.

굳어가는 투이나의 입술이 벙긋거렸다.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은 투이나에게 그가 속삭였다.

“조금만 주무시는 겁니다.”

수마가 그녀를 덮쳤다.

* * *

“…네. 저는 한 점의 후회도 하지 않습니다.”

투이나의 상체가 들썩였다. 꼭 되살아난 날의 아침처럼.

‘내가 또 죽었나?’

움찔한 투이나가 목을 눌렀다.

아릿한 아픔과 함께 농익은 밀알처럼 떨어지는 황금빛 장막이 보였다.

‘베인의 거처야.’

그녀가 머물렀던 그대로였다. 죽지도, 되살아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랬다면 몸이 이렇게 무겁진 않을 테니까.

투이나가 침대를 짚으며 일어났다. 섬세한 비단이 긴장한 손 밑에서 자꾸만 미끄러졌다.

‘일어나야 하는데.’

장막 너머로 어른거리던 그림자가 비단결이 스치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

천을 걷은 베인과 투이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무심코 비단을 움켜쥐었다.

베인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투이나의 뺨으로 얼굴을 가져다 댔다.

“일어나시길 기다렸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뺨에 닿았다 떨어진 입술을 느끼고서야 현실을 실감했다.

투이나는 그대로 베인의 아래턱을 감쌌다.

그녀가 입 맞춰 주려는 줄 알았는지 베인이 흔쾌히 머리를 기대어왔다.

그러나 투이나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다.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다그쳤다.

“내가 없는 사이에 뭘 했죠?”

“…….”

더 다가가려던 베인이 한숨을 쉬듯 눈을 내리깔았다.

“방금 한 짓에 대해선 묻지 않으시는 겁니까?”

“독이 아니라서 고맙다고 할까요?”

“벨라도나였습니다. 많이 쓰면 조금 위험하지만, 루가 님에게 쓰기 위해 제대로 조절했지요.”

“충분히 불쾌했어요.”

“지금도 몸이 편치 않으십니까? 사제를 불러드릴까요?”

태연자약하게 이어나가는 대화에 투이나는 더 참지 못했다.

“도대체 왜 이래요, 베인?”

투이나가 그의 턱을 붙잡아 돌렸다. 대리석처럼 고운 얼굴이 바스라지듯 눌렸다.

“정말 루가라도 되고 싶었던 거예요?”

“그런 적 없습니다.”

“갑자기 사람이 이렇게까지 바뀔 수는 없잖아요!”

“…루가 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베인이 순진하게 눈을 감았다.

“마음이 풀리실 때까지 저를 어떻게 하셔도 좋습니다.”

투이나는 기가 막혔다.

‘내가 샨처럼 보이나?’

오히려 순순하게 구는 베인을 보자 더 속이 들끓었다. 투이나가 탁 그를 밀어냈다.

“신전을 장식하고 사람들을 풀어놓은 게 어떻게 저를 위한 건지 모르겠네요.”

“루가 님에 비해 지나치게 초라한 것들입니다.”

베인이 한쪽으로 돌아간 고개로 대답했다.

긴 속눈썹에 드리운 그림자가 그의 표정을 읽기 어렵게 만들었다.

“루가 님을 무시하던 자들은 그런 초라한 것들에 휘둘리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베인.”

“그들은 금화, 직위, 명예, 아름다움, 그런 것들에 당신을 연결시켜 보지요.”

베인이 사락 손을 뻗었다.

“당신은 그 이상인데도.”

그가 애틋하게 만져왔다.

그녀를 바라보는 저 얼굴은 분명 자신이 사랑하던 베인이다.

하지만 애정으로 한 꺼풀 덮인 외모 아래로 전과는 다른 그의 모습이 느껴졌다.

보다 냉정하고 차가운 것.

투이나가 굳은 채 반응하지 않자 베인은 싱긋 웃었다.

“믿지 않으시는군요.”

“…….”

“루가 님이 아끼시는 건 저 또한 아낍니다. 루가 님이 사랑하는 방식대로.”

베인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누군가 여러 명이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직접 나와서 보시지요.”

옆으로 물러난 베인이 천을 걷었다. 입술을 깨물던 투이나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라카인!”

다급하게 돌아보던 투이나는 점점 어리둥절해졌다.

“호루니, 스카차?”

“루가 님!”

방으로 들어온 호위들은 지금까지 봤던 모습 중에서 가장 말끔하고 호화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세 사람 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끗하게 씻긴 다음 비단옷에 가죽신까지 입혀 두었다.

처음 입어보는 화려한 복장에 호루니와 스카차는 꽤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다친 곳은 없어 보여.’

오직 라카인만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다시 본 투이나의 모습에 아주 약간 긴장한 어깨가 내려갔을 뿐이다.

그들이 얼마나 혹독한 일을 겪었든 어차피 사제의 손만 닿으면 알아차릴 수 없다.

투이나는 울렁거리는 속을 눌렀다.

“다들 괜찮아요? 무슨 일을 겪은 거예요?”

“아……. 저흰 괜찮습니다. 루가 님.”

“정말로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호루니와 스카차가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크로퍼드 상단 분들이 정말로 잘 대해 주셨어요.”

“맞습니다.”

호루니와 스카차가 입을 모아 말했다. 투이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잘해 주다뇨? 스카차의 뒤통수를 때렸는데? 피가 쏟아졌잖아요!”

“그, 그랬죠. 하지만 다 나았습니다.”

스카차가 머쓱하게 뒷머리를 문질렀다. 호루니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다들 라카인이 멋대로 탈출해 루가 님을 데리고 간 줄 알았대요.”

“예. 그래서 저희들까지 라카인과 한패인 줄 알고 그렇게 험하게 나왔던 모양입니다.”

“지금은 제대로 설명해서 오해도 다 풀렸습니다.”

“그들의 말대로입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베인이 거들었다.

“저 또한 같은 오해를 했기에 거친 방법을 썼을 뿐, 과격한 장면으로 루가 님을 놀라게 해드려 죄송할 따름입니다.”

‘정말? 그게 다라고?’

스며드는 의심을 피할 수가 없었다. 너무도 쉽게 해명하고 납득하는 사람들이 낯설었다.

그녀는 남의 말을 기꺼이 들었다.

그렇기에 누구 편할 대로 딱 맞아떨어지는 완벽한 상황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각자가 자신의 입장에 따라 얼마나 변명하고 싶어 하는지, 머리로는 알아도 결국엔 화를 내게 되는지 너무도 많이 보았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아무도 화내지 않고 원만하게 해결되는 건 정말로 드문 일이었다.

‘머리에서 피를 그렇게 많이 흘렸는데도 저렇게까지 변호할 수가 있을까?’

그녀가 아는 스카차는 착하지만 발끈하는 면이 있었다.

의심이 많고, 누군가에게 창피하게 보이는 상황도 싫어했다.

호루니와 함께 다니면서 좀 어른스러워졌다지만, 이런 일까지 겪었을 때는 분명 어딘가 참고 넘어간다는 티를 냈을 거다.

그러나 여기 모인 사람들은 서로에게 어떤 앙금도 없어 보였다.

단 한 사람, 라카인을 제외하면.

라카인은 계속 다른 방향에 시선을 고정함으로써 그들의 대화에서 벗어나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일부러 저러는 거야. 정말로 안심했다면 저럴 리가 없어. 따로 대화가 필요하다는 뜻이겠지?’

투이나가 아는 한 라카인은 절대로 자신에게서 눈을 뗀 적이 없었다. 적이라도 나타나지 않는 한.

‘……어?’

괜히 맥박이 빨라졌다. 내심 당황한 투이나에게 호위들이 말했다.

“루가 님이 다시 신전으로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이제 안전해지신 겁니다.”

“…….”

짜 맞추듯 다정한 말들이 쏟아졌다.

라카인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그게 수상해 보일까 봐, 주변에서 라카인에게 은근한 압박을 쏟아냈다.

그들을 무시하던 라카인은 문득 투이나의 표정에서 걱정을 읽었는지 짧게 말했다.

“안전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자아, 그럼.”

베인이 대화를 잘랐다.

“루가 님이 안정을 취하실 때까지 저들을 거처로 돌려보내겠습니다. 그들도 긴 여행이었을 테니까요.”

“맞, 맞아요. 루가 님도 쉬셔야지요.”

“빨리 회복한 다음 호위로 복귀하겠습니다!”

“…….”

“곧 찾아갈게요.”

투이나는 일단 주변을 안심시켰다.

그녀가 안도했다는 기색을 내비치자 라카인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다른 호위들과 함께 방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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