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마지막 대가를 치를 때가 되자 반지를 빼돌리고 저를 죽였습니다.’
누가 얼린 송어로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 같았다. 띵한데 뭔가 어이없고, 묵직하게 아프다.
“끄으응…….”
투이나가 머리를 붙잡으며 일어났다.
‘설마 거기서 마법이 나올 줄이야.’
뭘 할 틈도 없이 바로 기절해 버렸다.
게다가 깨어나자마자 보이는 게 철창이라니.
‘내가 잡혔다면 라카인도 분명히 무사하진 않을 거야.’
“라카인!”
철컹.
투이나가 소리치며 철창을 붙들었다. 얕게 흔들리긴 했지만 움직이기엔 역부족이었다.
“라카인! 어디 있어요?”
그녀가 갇힌 우리 안은 녹슬고 비린 냄새가 진동했다.
‘사람을 무슨 이런 우리에 가둬놨지?’
게다가 무식하게 쌓아놔서 양쪽 옆과 아래까지 사람이 든 우리로 빼곡했다.
바닥 철창 밑으로 웅크려 잠든 여자가 보였다.
‘세상에.’
어떻게든 철창을 움직여보려고 우리 아래쪽을 잡는 투이나에게 누군가 말했다.
“조용히 좀 할래?”
“누구세요?”
투이나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뒤쪽에 있는 우리에 갇힌 여자가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꽤 젊어 보였는데 머리가 일찍 세었는지 회색빛이었다.
게다가 누가 멋대로 자른 것처럼 머리카락이 길이가 맞지 않고 들쭉날쭉했다.
“잡혀 왔으면 얌전히 있어. 괜히 이목 끌었다가 다쳐.”
“여길 잘 아나요?”
투이나가 얌전히 철창에서 손을 떼었다.
당장 라카인이 반응하지 않는 걸 보면 적어도 소리 질러서 닿을 거리엔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여전히 기절 중이거나.
‘일단 상황부터 파악해보자.’
투이나의 동작에 포기한 줄 알았는지 여자가 뾰족한 턱으로 까딱했다.
“여기서 나보다 오래 있던 사람은 없을걸.”
“…여긴 사람 장사를 하는 곳이죠?”
“그래, 노예상이지.”
여자는 이미 지쳐서 체념한 것처럼 보였다.
투이나가 한 쪽 손을 들어올렸다.
“전 투이나라고 해요. 그쪽은요?”
“여기서 친목이라도 다지려고?”
“제일 오래 있는 분이니 가장 들을 게 많겠죠.”
시큰둥하던 여자는 투이나가 고집스럽게 손을 내밀고 있자 마지못해 받아주는 시늉을 했다.
“야니카야.”
“어쩌다 여기 붙잡힌 거예요, 야니카?”
“너도 방금 잡혀 온 주제에 그런 걸 물어보고 싶니?”
야니카가 살짝 성질을 부렸다.
“무슨 이유가 있겠어. 전쟁이 터졌을 때 제때 도망 못 가고 붙잡힌 거지. 게다가 도망치기 전에 내 능력을 숨길 만큼 영리하지도 못했고.”
‘쓸모가 있어서 가둔다고?’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둬놓고 착취하는 힘이라니.
상황을 조합해보던 투이나가 아 하고 입을 열었다.
“당신, 마법사군요?”
“빨리 알아보네. 아직 실마리 하나 안 줬는데.”
“그 머리카락을 보고 알았어요.”
야니카가 심통 맞은 표정을 지었다.
“당신 머리카락을 잘라서 수건에 넣었던 거였군요. 어쩐지, 그 사람이 마법사 같지는 않았는데.”
“…너도 마법사야? 제법 자세하게 알잖아.”
“아뇨. 어쩌다가 친한 마법사가 있어서요.”
“마법사랑 친하다니 네 팔자도 사납네.”
야니카가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지친 얼굴이다.
“그래도 마법사의 육체로 마법을 이용하는 방법까지 알려져 있을 줄은 몰랐어요.”
“아는 사람은 다 알아. 왜 마법사가 숨어 살겠어.”
야니카가 느리게 다리를 폈다. 좁은 우리 안에서 펼 수 있는 한계까지.
“당신 능력이라면 탈출할 수 있지 않나요?”
“이미 머리카락을 빼앗겼잖아. 내 마법에 벌써 몇 번이나 당했는걸.”
야니카가 덧붙였다.
“너도 아마 내 마법에 당했겠지. 미안하게 됐어.”
“그건 괜찮아요. 원해서 한 일도 아니니까.”
투이나가 가볍게 그녀의 사과를 받아 넘겼다.
야니카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은 아무리 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일에 연관되었다고 하면 화를 내기 마련인데.
눈앞에 있는 여자는 너무도 쉽게 일에서 사람을 분리해버렸다.
‘어찌 됐든 노예상이라니.’
투이나가 아랫입술을 자근자근 눌렀다.
‘차라리 강도였으면 좋았을 걸. 사람 잡는데 익숙하면 탈출하기 어렵겠네.’
기껏 라카인을 데리고 도망 나왔더니 배에서 내리자마자 노예상을 만날 줄은 몰랐다.
아르힘 밖에서는 인신매매가 흔하다고 들었지만, 설마 멀쩡하게 여행하는 사람까지 납치할 줄은 몰랐다.
‘이렇게까지 심할 줄이야. 여행자면 보호하는 수호신이 없다고 생각해서 더 과감해지는 건가?’
전쟁 유민들이 빠르게 개종하는 이유를 알 듯했다.
“혹시 저랑 같이 잡혀 온 남자 못 보셨나요?”
“못 봤어.”
야니카가 말했다.
“여긴 장기 거래용 노예들이야. 남자가 잡혀왔다면 바로 전쟁터에 팔 준비를 하고 있을 걸.”
투이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일단 여기서 나가 봐요.”
“뭐?”
야니카가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는 거야?”
“수는 없지만 사람은 있잖아요.”
투이나가 통통 철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진동을 타고 다른 우리까지 울리기 시작했다.
잠들어 있던 여자들이 하나 둘씩 깨어났다.
* * *
라카인도 깨어 있었다.
“용케 잡아왔네? 이런 물건을.”
“말도 마. 죽을 뻔했다니까.”
“좋아, 좋아. 비싸게 쳐 줄게.”
라카인이 팔에 힘을 주었다. 몸에 감긴 밧줄이 억세게 조였다.
한두 번 힘을 주는 걸로는 풀리지 않을 성 싶었다.
라카인은 뒤통수에 뜨끈한 느낌도 확인했다.
투이나가 기절할 때 그는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그나마 흐르던 피는 멈춘 것 같았다.
‘네 명은 유인책이었군.’
누군가를 잡기 전에 들으란 듯이 떠드는 걸 더 의심했어야 했다.
대화를 못 들은 자는 네 명에게 잡혀 들어가고, 대화를 눈치챌 만큼 예민한 자는 그들을 신경 쓰다가 매복에 당하는 수법이었다.
보통 철저한 솜씨가 아니었다.
라카인은 여전히 기절한 척 고개를 숙이고는 실눈을 떴다.
다행히 아직 부두였다. 강에 반사된 물빛이 보였다.
‘투이나 님은 어디 계시지.’
그는 걱정으로 타들어가는 속을 눌렀다.
일단 그가 살아 있는 걸 보니 투이나도 살아 있을 것이다.
라카인은 손끝으로 밧줄을 더듬었다.
끊을 만한 걸 찾아내도 꽤 시간을 들여야 할 것 같았다.
다행히 그의 주변엔 인간이 둘밖에 없었다.
아르파인이 들어왔다는 소식에 따로 구매자가 나타난 모양이다.
“그래서, 얼마 쳐 줄 건데?”
“흐음. 아르파인은 막상 쓰려면 수호신 때문에 까다롭단 말이지.”
“어허, 비싸게 준다는 사람이 흥정질이야.”
아까 보았던 남자가 목에 수건을 두른 채 떠드는 게 보였다.
고심하는 척 턱을 잡은 자가 구매자일 테니, 납치한 패거리는 지금 혼자였다.
‘방심했나?’
그건 아닐 것이다.
라카인은 그가 저 더러운 수건을 끌어올리자마자 기절 마법이 터져 나오던 걸 기억했다.
게다가 근처에서 들리는 발소리로 보아 경계를 도는 인간들까지 있었다.
어떻게 구했는지는 몰라도, 적을 만나면 마법을 쓸 줄 안다고 가정해야 옳다.
‘시선을 끄는 게 우선이겠군.’
라카인이 방법을 생각하려 했을 때였다.
“어라.”
갑자기 두 사람이 같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희 기지 불났는데?”
“뭐야?”
당황한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그들이 고개를 돌린 틈을 타 라카인도 빠르게 눈을 올려 확인했다.
정말로 멀리서 구름처럼 회색빛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니, 씨. 갑자기 어디서 불이!”
목에 수건을 두른 남자가 힐끗 라카인과 구매자를 돌아보았다.
물론 라카인은 몸 하나 꿈쩍하지 않고 기절한 척을 하고 있었다.
“일단 물건은 다음에 보여줄 테니까 나와.”
“야, 잘 탄다. 온 김에 불구경이나 하고 가면 안 되냐?”
“빨리 안 꺼져!”
남의 일이라고 부채질을 해대는 인간을 쫓아낸 남자가 라카인을 힐긋 돌아보았다.
푹 숙인 그는 기절했는데도 위험해보였다.
밖에선 이미 불을 끄러 우르르 달려가는 소리가 났다.
목수건 남자는 갈팡질팡했다.
어렵게 잡은 상품인데 내버려뒀다가 괜히 탈이라도 나면 곤란했다.
그렇다고 혼자 끌고 가기엔 너무 크고, 제 발로 걸어가게 깨우면 감당이 안 됐다.
물론 그는 고민하느라 지나치게 시간을 끌었다는 걸 알 턱이 없었다.
‘저자를 제외한 모두가 갔군.’
라카인이 일어났다.
“억!”
갑자기 산그늘 같은 그림자가 드리우기에 돌아본 남자가 경기했다.
시커멓게 그림자를 드리운 라카인의 모습이 묶여 있다는 사실도 잊게 할 만큼 무서웠다.
“기절, 기절해라!”
그가 황급히 수건을 끌어올렸다. 손때가 탄 수건이 또 한 번 마법진을 번쩍였다.
“…….”
그러나 라카인은 멀쩡히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눈이 휘둥그레진 남자가 ‘이럴 리가 없는데’ 하고 중얼거릴 틈도 없이 라카인은 묶여 있던 팔을 휘둘렀다.
빡!
맑고 고운 소리와 함께 남자가 쓰러졌다.
라카인은 침착하게 뒷짐 진 손으로 내려가 남자가 갖고 있던 단검을 꺼냈다.
몇 번 쓱삭거리자 밧줄이 풀렸다.
다시 피가 통하는 손목을 몇 번 주무른 그가 기절한 남자의 목에서 수건을 풀었다.
‘마법사가 얘기했던 대로군.’
정말 얼룩병에 걸린 자는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
또한 이로써 그가 걸린 병이 얼룩병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라카인이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움직임을 따라 회색 얼룩이 접혔다가 펴졌다.
말로 들었을 때와 달리 실제로 겪어본 얼룩병은 남달랐다. 깊은 고통을 동반하는 병은 아니었다.
고통 대신 알 수 없는 존재감이 느껴졌다.
얼룩 밑으로 계속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느낌이 났다.
금방이라도 그곳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강한 이질감.
왜 상처를 긁어내고 떼어버리고 싶어 하는지 절절히 이해하고 말았다.
얼룩이 있는 자리는 자신의 몸이지만 자신이 아니었다.
마법이 통하지 않는 건 뜻밖의 유용한 장점이지만, 그래도 투이나에겐 사실을 밝히기 꺼려졌다.
그녀와 손을 잡은 다음 생겨난 병인 까닭에 혹시라도 옮았다고 생각할까 봐.
‘그러지 않아도 슬퍼하실 분이다.’
라카인은 투이나가 기절한 순간 매복에 당했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하지만 투이나가 쓰러지는 모습에 너무 놀란 데다 당연히 자신도 기절할 거라 믿고 주춤한 탓이다.
실수를 반성한 라카인이 수건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는 완전히 자유로워진 몸으로 주변을 살폈다.
갑자기 난 불에 보이는 자들이 전부 강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큰 물줄기가 흐르고 있으니 불길은 금방 잡힐 것이다.
하지만 멀쩡하던 장소에 불이 날 리가 없으니.
라카인은 틀림없이 투이나가 원인일 거라 짐작했다.
그녀도 탈출을 목적으로 무슨 일을 벌였는데 운 좋게도 자신에게 도움이 된 것이리라.
라카인이 빠르게 불이 난 쪽으로 향했다.
“아아악!”
“살려주세요!”
화재가 난 건물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보다 상품이 다 타게 생겼다는 위기감에 인신매매꾼들이 달려들었다.
“제길, 어떻게 긁어모은 건데!”
“빨리 꺼!”
뭐가 탔는지 불보다 매캐한 연기가 더 많이 피어올랐다.
축축하게 수건을 적신 자 한 명이 용케 안으로 뛰어들었다.
“콜록콜록!”
“뜨거워!”
“이 나쁜 자식들! 사람을 잡아다가 이렇게 죽이려고 납치했냐!”
“기다려 봐!”
사방에서 쏟아지는 욕설과 비명에 두드려 맞은 그가 기침했다.
우리마다 한 명씩 가둬 둔 탓에 꺼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살고 싶으면 얌전히 있어!”
그가 절그럭거리며 열쇠를 구멍에 끼워 넣었다.
웅크리고 있던 여자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기어 나왔다.
열기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어서 그는 당연히 여자가 문으로 도망갈 줄 알았다.
그러나 그가 지나치자마자 울며불며 소리치던 여자의 얼굴이 돌변했다.
그녀는 다른 인신매매꾼들이 기다리는 바깥으로 나가는 대신 몸을 낮춰 바닥에 엎드렸다.
열쇠가 하나 풀릴 때마다 갇혀 있던 사람들이 똑같이 행동했다.
바닥에 엎드린 인원이 다섯이 되었을 쯤에는 남자도 뭔가 뒤쪽이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인기척을 느꼈을 땐 이미 늦었지만.
“이야아!”
“악!”
눈에 불을 켠 여자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것들이 미쳤, 악! 다 죽고 싶어?”
“너 죽으면 죽을게!”
“야이잇! 개자식아!”
마법을 쓰려고 남자가 다급하게 목을 더듬었다. 그런데 허전했다.
“이거 찾아?”
위쪽에 있던 여자가 슬그머니 웃었다.
그녀가 약 올리는 표정으로 수건을 품 안으로 챙겨 넣었다.
“잘 쓸게.”
“내, 수건, 커흑!”
얻어맞고 연기를 들이마시느라 그가 정신없이 기침했다.
그동안 그가 기절할 때까지 흠씬 두들겨놓은 여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빨리 열어!”
“금방 또 들이닥칠 거야.”
열쇠를 나눠가진 여자들이 우리를 열었다. 투이나도 그들과 함께 우리에서 빠져나왔다.
투이나가 내려오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를 향했다.
그들을 깨우고 탈출 계획을 세운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어떡하죠?”
“시선을 끌어봐야죠.”
투이나가 몸에 두르고 있던 천을 벗었다.
‘여기까진 됐어.’
우리에 갇힌 사람들은 다양했다.
투이나가 그들을 깨웠을 때도 이만큼 다양한 인간들일 줄은 몰랐다.
노예상이 여러 나라에서 사람들을 긁어모은 덕분에 그들은 각기 생각지도 못한 도움을 제공했다.
손과 발을 이용해 짚을 꼬아 불을 피울 줄 아는 맨발의 여자가 있었다.
또 어떤 여자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 바람의 방향을 읽을 줄 알았다.
축축한 지푸라기는 연기가 많이 난다는 걸 알려준 여자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도와 불을 내고 연기가 많이 나도록 물동이에 적신 지푸라기를 던졌다.
벽에서 옮겨 붙은 불이 지붕을 향해 번지고 있었다.
하지만 환기구도 없는 안쪽에 처박혀 있던 그들은 아직 안전했다.
어디까지나 잠깐의 요행이었지만.
사람들이 초조하게 서성였다.
“정말 할 수 있겠어?”
“해야죠.”
투이나가 머리 위로 높게 천을 들어올렸다.
“그러려고 여러분께 부탁한 걸요.”
그녀를 미친 사람처럼 보고 있던 야니카가 천 끝에 불을 붙였다.
곧장 뒤통수가 뜨거워진 투이나가 달려 나갔다.
“꺄아아악!”
“으악!”
불이 난 곳에 물을 끼얹고 있던 인신매매꾼들이 기함했다.
머리부터 타들어가는 것처럼 불꽃을 뒤집어쓰고 온몸이 회색빛으로 얼룩덜룩한 여자가 나타났던 것이다.
“무, 물 뿌려!”
“아아아!”
투이나가 소름끼칠 정도로 높은 비명을 내질렀다.
등골에 쭈뼛 소름이 돋은 그들이 반사적으로 그녀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그 순간 투이나가 불이 붙은 천을 뒤집어 던졌다.
“기절해라!”
그 때까지 그녀가 손 안에 꽉 쥐고 있던 머리카락이 산산이 흩어졌다. 마법이 그들을 엄습했다.
투이나가 얼른 눈을 꽉 감았는데도 요란한 빛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성공했나?’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투이나가 불붙은 천을 내팽개쳤다.
“흐아, 뜨거!”
투이나가 화드득 손을 털었다.
아무리 물을 듬뿍 적신 부분을 쥐고 있었어도 점점 가까워지는 불꽃은 공포 그 자체였다.
‘두 번은 절대 못 하겠어.’
펄떡펄떡 뛰는 심장을 누른 투이나가 서둘러 불이 붙은 천을 발로 밟아 껐다.
불타는 집에 비하면 귀여운 연기가 새어 나왔다.
“성공했구나!”
곧 뒤쪽에서 다른 사람들이 후다닥
“정말 통할 줄이야.”
이번 일로 야니카는 거의 대머리가 될 만큼 머리를 잘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로 기뻐 보였다.
야니카의 마법은 눈에 마법진의 빛이 들어온 사람에게만 통했다.
야니카는 크고 빛이 강한 마법진을 만들 만큼 마법에 능숙하지 못한 편이라 번번이 탈출에 실패했던 것이다.
투이나는 시드룬의 비늘과 마법에 익숙했기에 작은 마법진을 더 작게 쪼개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보다 확실하게 눈에 모래를 뿌리는 방법이지.’
다만 이 방법은 마법이라 확실한 기절을 보장해 준다는 점만 달랐다.
여자들은 일단 안전해지자 각자 살 길을 찾아 달렸다.
“빨리 돈 될 만한 거 들고 튀자.”
“고맙다! 처음엔 못 믿었는데 덕분에 살았어!”
“어디로 가야 하지?”
그들이 빠르게 흩어졌다. 야니카는 여전히 경탄한 눈이었다.
“네가 없었으면 우린 여전히 우리 안에 있었을 거야.”
“제가 없었어도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었을 거예요.”
투이나가 탄내가 나는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저는 그냥 계기만 만들어 드린 걸요.”
글쎄. 그런 계기가 흔할까.
야니카가 미처 말을 잇기 전에 멀리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노예들이 탈출했다!”
‘윽. 소리가 가까워.’
역시 모든 인간이 다 불을 끄러 달려오진 않은 모양이다.
지붕에서 지붕으로 번지는 불을 본 야니카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우리도 다른 놈들이 몰려오기 전에 도망가자.”
“먼저 가요, 야니카.”
투이나가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전 찾을 사람이 아직 남아 있거든요.”
“그 남자? 괜히 챙기다가 너까지 도로 붙잡히면 무슨 소용이야.”
“제가 데려온 사람이라 끝까지 함께 가야 해요.”
투이나의 눈은 단호했다. 머뭇거리던 야니카가 엄지 끝을 깨물어 피를 냈다.
“선물로 줄게. 별로 강하진 않겠지만 혹시 모를 때 써.”
“아.”
피 몇 방울이 그녀의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투이나는 눈송이를 잡듯이 핏방울을 반대쪽 손으로 덮었다.
“고마워요, 야니카.”
“행운을 빈다.”
야니카가 재빨리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보다 늦은 출발이라도 그녀에겐 마법이 있으니 괜찮을 거다.
‘그럼 나는 어쩐다?’
쓰러진 자들을 제압할 때 썼던 야리니의 머리카락은 먼지처럼 잘게 자른 탓에 다시 줍기란 불가능했다.
투이나는 그대로 기도하듯 두 손을 모은 채 돌아섰다.
격노한 채 달려오는 노예상들이 보였다.
“이게 미쳤나!”
“네가 감히!”
그들이 수건을 끌어올리는 걸 보고 눈을 감았지만, 다음 동작이 걱정이었다.
‘방심한 틈을 타 피를 뿌릴까?’
야니카를 만나기 전에 시드룬에게 마법을 쓰는 법을 더 배워 둘 걸 그랬다.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괜찮도록.
퍼억!
투이나가 막 피를 뿌리려는 순간 경쾌한 터지는 소리가 났다.
투이나가 눈을 도로 떴다.
“괜찮으십니까?”
정말 눈 깜짝할 사이였는데 라카인이 그들을 때려눕히고 있었다.
투이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무사했군요!”
“어억!”
“예.”
“끄악, 이 괴물 같은 게!”
“잘됐어요! 얼마나 걱정했다구요.”
“기, 기절해, 푸억!”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적들이 차례차례 쓰러지는 동안 투이나와 라카인은 그저 반가움에 겨운 인사를 나눴다.
몇 번인가 마법을 써 보려는 자도 있었지만 주먹으로 입부터 치고 들어오는 라카인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쫓아온 자들은 죄다 땅바닥에 드러눕는 신세가 되었다.
빠르게 일을 끝낸 라카인이 얼른 다가왔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전 무사해요.”
라카인은 말하는 동안에도 떨어지지 않는 그녀의 두 손을 잠깐 보았다.
“…계속 기도하고 계셨습니까?”
“네? 아, 이건.”
“멈춰라!”
또 다른 자가 달려오는 소리에 라카인이 투이나의 앞을 막아 섰다.
그러나 이번에는 복장이 달랐다. 창을 들고 제법 무장을 갖춘 자가 달려왔다.
아르케데프의 치안병인 모양이다.
“부두에서 이렇게 소란을 피우다니! 아무리 허가 받았다지만 케데프님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면 좀 조용히……. 으응?”
그가 쓰러진 인간들과 어정쩡하게 서 있는 투이나와 라카인을 번갈아 보았다.
투이나는 노예상을 소탕한 두 사람에게 놀라거나 고마워할 줄 알았다.
그러나 치안병은 오히려 창끝을 그들을 향해 들이댔다.
“움직이지 마!”
그가 휙휙 창끝을 돌리며 을러댔다.
“이 자식들, 무슨 짓을 한 거냐!”
“저희가 아니라 이 사람들이 무슨 짓을 했죠. 이자들은 인신매매범들이에요. 저희는 겸사겸사 사람들도 풀어준 거고요.”
“노예를 풀어줘?”
치안병의 뺨이 실룩거렸다.
“쓸데없는 짓을…….”
“네?”
그가 불만스럽게 창을 내렸다.
“어차피 풀어줘 봤자 다른 노예상에게 또 끌려갈 거 뭐하러 그랬냐는 소리다.”
투이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애초에 신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들이야. 제에길, 이놈들은 그래도 꼬박꼬박 세금은 잘 냈는데.”
궁시렁거리던 그가 곧 돌변했다.
인신매매꾼들을 쓰러뜨린 바람에 투이나가 붙였던 불이 점점 크게 번져나가고 있던 것이다.
“이런 미친! 어떻게 탈출했나 했더니, 너희들이 불을 지른 거냐!”
라카인이 슬며시 단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러나 투이나의 표정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만큼 담담했다.
“네, 제가 질렀어요.”
“손 들어! 이 방화범들아!”
소리치면서도 치안병의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건수를 잡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흉흉한 기세가 피어오르는 라카인은 좀 무서웠지만, 설마 자신을 건드리겠나 싶었던 것이다.
밉보였다간 당장 다른 나라로 쫓겨날 텐데, 갈 곳도 없는 자들은 설설 기어야 마땅했다.
투이나는 창을 들이댄 치안병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노예는 괜찮고 화재는 무섭구나.‘
그의 행동에 위화감이란 없었다. 다른 신을 믿으면 원래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는 거였다.
투이나는 항복하려는 것처럼 얌전히 모은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곤 확 비틀어 쥐고 있던 피를 치안병에게 뿌려버렸다.
“윽! 뭐야!”
당황한 그가 끈적거리는 액체를 만진 순간 투이나가 속삭였다.
“기절해라.”
번쩍! 털썩.
치안병이 마법진과 함께 축 늘어졌다.
투이나는 찝찝하게 남아있던 피를 그의 옷에 문질러 닦았다.
“휴우.”
눈이 동그래진 라카인이 그녀가 하는 행동을 하나하나 보고 있었다.
투이나는 그저 해실 웃어보였다.
“아무래도 아르케데프에선 못 살겠네요.”
그녀가 손을 털었다.
불길이 번지는 건물 사이로 투이나와 라카인은 짐을 챙겨 나왔다.
처음부터 갖고 있던 물건을 전부 찾지는 못했다.
비싼 건 이미 노예상이 처분하기도 했고, 도망치는 사람들이 집어가기도 해서 찾기가 어려웠다.
그럭저럭 여행할 만큼 짐을 끌어 모은 두 사람은 불을 끄러 몰려든 사람들 틈에 섞여 빠져나갔다.
한적한 골목에서 지켜보니 불길은 금방 잡힐 것 같았다.
투이나가 급하게 꾸린 짐을 살필 동안, 라카인은 대체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말 한 마리까지 끌고 나타났다.
“좋은 말은 아닙니다만…….”
대담한 행동과 다르게 겸손한 말투라 투이나는 입을 딱 벌리기만 했다.
‘정말 맨몸으로 던져놔도 살 사람이라니까.’
투이나는 굳이 말의 출처를 묻지 않고 안장을 올렸다.
“잘했어요. 우리도 빨리 도망가죠.”
라카인의 귀가 미미하게 붉어졌다.
칭찬에 기뻐한 것도 잠시, 투이나와 함께 말을 타야한다는 사실이 갑자기 크게 다가왔다.
투이나는 별 생각 없이 먼저 올라탔다.
“제가 고삐를 잡을까요?”
그녀가 묻는 순간 오백 가지 상념이 스쳐지나간 라카인은 부정한 감정을 모조리 쫓아냈다.
“제가 잡겠습니다.”
그가 조심스럽게 뒤에 올라탔다.
갑자기 목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사냥터에서 투이나와 베인이 한 말을 타고 달려가는 걸 지켜볼 때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괜히 초조하고 몸이 들뜨는 기분이라니.
품안에 들어온 투이나의 상체는 원래 이 자리에 있어야 된다고 말하듯 꼭 맞았다.
저도 모르게 그녀의 허리를 덮을 듯이 손을 올렸던 라카인이 빠르게 자세를 되돌렸다.
거리를 둔다고 말에서 떨어질 실력도 아니니 잡을 필요 없다. 위험하지만 않으면 되었다.
라카인은 혹시라도 말을 다루다 투이나에게 몸이 스칠까 두려워 긴장한 채 고삐를 쥐었다.
라카인이 낮게 혀를 차자, 말이 느릿하게 걸어 나갔다.
‘큰일이네.’
투이나는 천천히 움직이는 말 위에서 생각에 잠겼다. 보다 앞날이 걱정 되었다.
‘다른 나라도 이러면 어떡하지?’
환영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여행객의 안전은 보장할 줄 알았다.
아르힘은 다른 수호신을 믿더라도 공격할 의사만 없으면 크게 배척하지 않았다.
굳이 남의 나라 인간을 잡아다 쓰지 않아도 풍족했기 때문이다.
‘그거야말로 축복이었구나.’
아르힘이 가진 치유의 힘보다 그 사실이 더 절절히 와 닿았다.
아르케데프만 노예에 관대한 게 아니라면 남은 나라들도 안심할 수 없었다.
가장 확실하게 안전해지는 방법은 그 나라 수호신을 따라 개종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라카인은 개종할 수 없다.
아르파가 멀쩡히 살아있으니까.
샨이 전쟁에서 패배해 수호신을 잃지 않는 이상 라카인은 영원히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살아서는 갈 곳이 없고, 죽어서는 안 되는 사람.’
투이나는 뒤에서 은은히 느껴지는 체온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이 사무쳤다.
라카인은 지금 당장 떠나라고 해도 잘 살 것이다.
설령 누군가에게 붙잡히더라도 탈출할 능력도 있다.
투이나가 명령만 하면 행복하게 살 것이다.
‘그건 내가 싫어.’
명령이 아니라 라카인이 직접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 정착하는 걸 꼭 확인하고 싶었다.
유독 라카인에겐 마음이 쓰였다.
그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선택을 따르는 일만 보아서 그럴까.
투이나가 라카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두근, 두근 하고 뛰는 소리가 마음을 진정시켜주었다.
“라카인은 하고 싶은 일 있어요? 취미나 그런 거요.”
“보다 명령에 잘 따르고 싶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어떤 명령이든 더 기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라카인의 속내까지 알지 못한 투이나는 그의 대답에 난색을 표했다.
“으음, 하면서 즐거웠던 일이나 잘하는 일은요? 라카인 검 잘 쓰잖아요.”
“잘 씁니다.”
“아, 전에 몸을 숨기는 일이 특기라고 했었죠? 도둑질을 해도 잘할 거예요. 아까처럼 노예상을 털어버리는 거죠!”
투이나가 장난스럽게 얘기했다.
“예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만큼 대단한 도둑이 있었는데, 못 훔쳐내는 게 없어서 심지어 수호신까지 훔칠 수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어요.”
“수호신을…….”
라카인은 도무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 모양이다.
라카인이 이야기에 집중한 걸 확인하자 투이나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어디 있는지 소식이 끊겼지만, 그 자를 잡기만 하면 온 세상을 다 얻을 수 있대요. 기왕 도둑이 된다면 그런 사람을 좇아보는 것도 좋겠죠?”
“알겠습니다.”
“…방금 심각하게 대답한 건 아니죠? 농담이에요.”
약간 불안해진 투이나가 그를 돌아보았다.
라카인이 그제야 자신도 농담이었다는 듯이 희미하게 웃었다.
“예.”
‘우와아!’
투이나의 속이 간질거렸다. 라카인이 자발적으로 농담을 하다니 장족의 발전이다.
감격한 투이나가 아무 말이나 했다.
“라카인은 농사를 지어도 잘할 거예요. 어떤 가게에서도 환영할 걸요? 잘생겼으니까 음유시인을 해도 좋겠네요. 노래 잘해요?”
“못… 합니다.”
쏟아지는 칭찬에 라카인이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그것도 귀중한 광경이라 투이나의 가슴이 더 뿌듯해졌다.
아르케데프를 벗어나는 동안 그들이 만날 수 있던 사람은 서로 뿐이라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가 더 귀중했다.
나흘이 지나던 날, 투이나는 텅 빈 평원에 홀로 서 있는 솟대에 돌을 집어던졌다.
솟대에 퉁 맞고 떨어진 돌이 부르르 떨더니 솟대 위의 접시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잠잠했다.
“이렇게까지 길에 사람이 없는 건 처음 봐요.”
“노예상을 경계한 탓일 겁니다.”
투이나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부두에서 내리자마자 작정을 하고 달려든 노예상만 보아도 치안이 엉망이었다.
피난민들이 쉽게 이동할 수 없을 터였다.
신의 힘이 미치는 정도는 나라마다 달랐고, 신이 용서하지 않는 일도 저마다 달랐다.
사람을 죽였다고 벼락을 맞는 나라와 눈물을 흘렸다고 동상에 걸리는 나라도 있었다.
결국 신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한에서 인간들끼리 죄의 경중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무도 마주치지 않는 여행길이 점점 음산하게 느껴졌다.
투이나와 라카인, 그리고 저 솟대처럼 알 수 없는 수호신인 케데프만 남았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건 계속 지루하게 똑같던 풍경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린 냄새가 나요.”
투이나가 코를 킁킁거렸다. 공기가 묘하게 뻑뻑했다.
“바다가 가까워지고 있나 봐요.”
이끼를 걷어내던 라카인이 그녀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은 암묵적으로 목적지를 바다로 정했지만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갈지 전혀 생각해두지 않았다.
라카인이 빨리 선택하지 않으면 투이나는 그의 마지막을 책임지지 못한 채 돌아가야 했다.
라카인도 그걸 알았지만 막상 제 발로 투이나를 떠날 결심이 서지 않았다.
죽음은 두렵지 않으니 당신 곁에 있고 싶다고 말하는 건 가장 그녀를 실망시키는 일이 되겠지.
죽지 않고 그녀 곁에 남을 또 하나의 방법이 있었지만, 그것도 투이나를 화나게 할 것이다.
라카인은 단념하고 단념해도 자꾸만 생겨나는 마음을 바다에서 완전히 떨쳐버리리라 결심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곳을 투이나와 함께 가볼 수 있다면.
생애 마지막 소망으로 품고 살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 끓었습니다.”
말린 식량을 다 때려 넣고 끓인 죽탕은 투이나에게 먹이기 부끄러웠으나 그녀는 맛있게 먹었다.
투이나의 입맛을 살피느라 라카인은 조금 늦게 투이나의 질문을 들었다.
“그 상처는 계속 안 낫네요?”
반사적으로 라카인이 손바닥을 가렸다.
하지만 천을 칭칭 감아 가려둔 상처가 손바닥만 가린다고 숨겨질 리가 없었다.
곤혹스러워하며 라카인이 대답했다.
“……예.”
“여행하는 내내 푸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요.”
“낫는 동안 물기가 닿으면 안 되어서 막아두었습니다.”
라카인이 서툴게 거짓말을 했다. 투이나는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빨리 나았으면 좋겠네요.”
라카인은 애꿎은 그릇만 휘저었다.
바다에 도착하면 소금이 넘쳐날 거란 얘기에 음식에 소금을 너무 많이 넣은 것 같았다.
괜히 입맛이 썼다.
한편, 투이나도 일부러 왕성하게 먹는 척하긴 마찬가지였다.
요 며칠 꿈자리가 계속 사나웠던 것이다.
‘자꾸 베인이 꿈에 나와.’
그녀는 원래 꿈을 잘 기억하지 못했지만,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다 보니 저절로 뇌리에 남았다.
꿈은 단순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베인을 지켜보고 있는 꿈이었다.
꿈이지만 그립고 반가워서 그녀가 달려가면 베인이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그런데 그렇게 제자리에서 빙글 돌고나면 베인의 얼굴이 사라져있었다.
그때마다 투이나는 심장이 떨어질 만큼 놀라서 잠에서 깼다.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얼굴이 지독하게 무서웠다.
이 꿈은 날이 갈수록 생생해졌다.
꿈인 걸 알아도 눈앞에 있는 베인을 보면 너무도 진짜 같았기에 외면할 수가 없었다.
보고 싶었으니까.
매번 그녀는 심장이 저릿저릿한 채 눈을 떴다.
계속 이 꿈을 꿨다간 조만간 심장병에 걸리지 싶었다.
라카인은 아직 눈치 못 챈 것 같지만.
‘언제 들켜도 이상할 게 없어.’
그가 알았다간 당장 아르힘으로 돌아가라고 보내버릴 것이다. 투이나가 우물거렸다.
‘내 착각일까? 바다가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지는 것 같아.’
투이나도 알게 모르게 라카인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바다에 가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드는 이 꿈이 떨쳐지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경고하듯이 꿈을 꿀 리가 없으니까.
“곧 바다가 보이겠네요.”
무릎에 그릇을 올려둔 투이나가 중얼거렸다.
라카인은 여행의 끝을 이야기하는 대신 침묵을 택했다.
쏴아아.
멀리서 비와 비슷한 소리가 귀를 건드렸다.
라카인이 고개를 틀었다. 투이나도 호기심에 차 눈동자를 반짝였다.
“들었어요?”
“들었습니다.”
바다가 땅을 밀어 올리는 소리였다.
두 사람이 말을 달렸다. 곧 지평선이 끊기고 수평선이 나타났다.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
한없이 너른 물빛이 눈이 닿는 모든 곳을 감쌌다.
투이나가 달리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은 채 한껏 몸을 들어올렸다.
엉겁결에 라카인이 투이나의 허리를 붙잡았다.
투이나는 완전히 바다에 정신을 빼앗겨 있었다.
“빨리 내려가 봐요!”
찬란한 바다를 그대로 흡수해버릴 듯이 투이나가 즐거워했다.
파도에 깎인 바위들은 까만색이었다.
회색빛 땅 너머로 찬연히 빛나는 푸른 바다가 보였다.
바다가 저렇게 푸르고 저렇게 넓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들어가도 될까?’
투이나는 신발부터 벗어던졌다. 말을 매고 있던 라카인이 놀라 뛰어왔다.
“발 다치십니다.”
“모래가 곱잖아요.”
투이나가 슬며시 발을 내밀었다.
재잘거림처럼 가벼운 모래가 발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까마득한 옛날엔 원래 아르힘이 사막이었다고 하거든요.”
모래바람이 부는 땅에 내려온 수호신이 물을 샘솟게 했다.
말만 들어도 근사한 이야기라 아르힘 신화는 아이들의 잠자리 단골 소재였다.
“그래서 오히려 좋아요.”
좋다니 어쩌겠는가.
같이 하고 싶어졌다.
라카인도 어색하게 따라 신발을 벗었다.
굳은살이 박인 거친 맨발이 모래 위로 내려앉았다.
사박.
차갑게 감싸오는 감촉이 사뭇 낯설었다.
“후아.”
바닷바람에 몸을 내맡긴 투이나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머리카락 사이로 깊이 스며드는 소금기가 마음에 들었다.
‘꼭 이야기 속의 아르힘으로 온 것 같아.’
소금호수 대신 바다가, 사막 대신 모래사장이 끝도 없이 펼쳐진 땅.
여긴 아직 신을 모르는 곳이다.
솟대에 마지막으로 돌을 던진 게 어제였다.
하루마다 두 번씩 던지는 속도였으니 아르케데프를 벗어난 게 확실했다.
‘신의 가호가 없는데 이렇게 고요한 곳은 처음 봐.’
여기라면 괜찮지 않을까.
투이나는 라카인도 마음에 들어 하길 바라며 새로운 장소를 만끽했다.
그녀가 천천히 따라오는 라카인의 앞으로 달려 나갔다.
투이나는 파도도 처음 보았다.
“세상에.”
투이나가 설레어하며 살짝 발을 바다 쪽으로 내밀었다.
거품처럼 밀려온 파도가 발을 적시는 감촉이 짜릿했다.
눈이 번쩍인 투이나가 겉옷을 훌훌 벗어던졌다.
“루가 님!”
“투이나라니까요!”
가벼운 홑옷만 남긴 투이나가 준비운동을 했다.
어차피 신전에 있을 때도 라카인이 씻는 동안 호위를 섰기에 별 거리낌이 없었다.
신전에서는 씻을 때도 시종이 거들었기에 옷을 입은 채 씻었던 것이다.
라카인은 혼자 쩔쩔맸다.
같은 복장이더라도 엄중한 경계 속에서 보는 것과 훤히 트인 바다에서 보는 것은 인상이 전혀 달랐다.
“저 먼저 들어가요!”
“…예?”
길게 몸을 뻗은 투이나가 바다로 뛰어들었다.
차가운 물이 그녀를 받아주었다.
오는 내내 스며 있던 땀이 단숨에 씻겨나갔다.
‘상쾌해!’
투이나가 단숨에 발장구를 쳤다.
소금 호수와 달리 바다는 힘이 느껴졌다.
호수가 그저 물의 무게로 가득 찼다면, 바다엔 움직임이 있었다.
‘게다가 정말 짠 맛이 나잖아.’
소금 호수보다 훨씬 연하긴 했지만.
그것도 재밌어서 투이나가 빵빵하게 숨을 머금은 볼로 웃었다.
처음에 라카인은 걱정했으나 곧 자유롭게 수영하는 투이나를 보고 마음을 놓았다.
둘 중에 굳이 수영을 못하는 쪽을 고르자면 라카인이었으니까.
군에서 생존수영만 배웠던 라카인은 같이 바다에 들어가는 대신 호위만 섰다.
그래서 바다에서 시작된 목소리를 들은 건 투이나 혼자뿐이었다.
“왔구나.”
부그르르.
투이나의 입에서 거품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뭐지?’
방금 전까지 능란하게 움직이던 몸이 굳어갔다.
당황한 투이나가 헤엄쳐보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그녀에게 목소리들이 다가왔다.
“기다리고 있었다.”
“먼. 오래전. 지금. 어제.”
“이미 내게 왔었는데.”
동시다발적으로 들리는 목소리라면 익숙했다. 당황한 투이나가 눈을 부릅떴다.
‘영혼의 세계가 왜 지금 열린 거지?’
투이나가 눈을 굴렸다. 이번에는 시드룬의 신체라곤 손톱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유유히 흘러가는 바닷물에선 마법진도 보이지 않았다. 공허조차도.
혼란에 가득 찬 그녀를 도와주듯 목소리들이 속삭였다.
“문을 여는 건 그가 아니라 너야.”
“마법사는 우리를 대신해보려고 하고 있지.”
“계속, 계속. 말을 걸었는데.”
순간 몸에 누군가 닿은 느낌에 투이나가 소스라쳤다.
물속에서도 소름이 쭈뼛 섰으나 닿았던 부위를 눈으로 확인하자 한기는 더 심해졌다.
회색 얼룩이 누군가 누른 자국처럼 보였다.
작은 얼룩은 손가락처럼, 큰 얼룩은 손바닥처럼.
기어이 얼룩병이 머리까지 올라왔나?
겁먹은 머릿속이 바짝 졸아들었지만 이상하게 얼룩이 있는 자리는 간질거리며 따듯했다.
거부하지 말라는 것처럼.
“……왜 내게 온 거죠?”
입이 움직이지 않았는데 목소리가 나왔다.
처음으로 시도한 대화였다.
“네가 온 거야. 우리는 그냥 있었어.”
“계속. 계속. 계속.”
“아니. 우리는 쫓겨났다.”
“도망친 거야.”
“정착한 거야.”
“받아진 거야.”
정신없이 떠드는 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당신들은 누구죠? 지금까지는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만 했으면서….”
“네가 바깥으로 나왔으니까.”
몸이 점점 차가워졌다.
“우리는 네가 새로운 땅을 찾는 거라고 생각했어.”
“필요하잖아.”
“여기엔 소금이 많아.”
‘소금?’
투이나는 어리둥절해졌다.
시드룬과 갔던 영혼의 세계에서도 그들은 소금을 외쳤다.
그게 그저 의미 없는 말이 아니었던 건가.
“부르는 방법도 쫓아내는 방법도 같아.”
“길이 그것이니까.”
“영혼이 짠 맛이라는 걸 모르니?”
번뜩.
시드룬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영혼의 세계에서 그는 점차 소금 기둥으로 변했다.
‘영혼이 다니는 길이 소금이란 뜻이야?’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았다.
투이나가 이성을 다잡았다.
지금 그녀에게 말을 거는 목소리들이 정말로 영혼의 세계에서 왔다면 이것도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이 시드룬이 잃어버린 걸 갖고 있나요?”
대답은 곧장 튀어나왔다.
“우리한텐 없어.”
“하지만 찾는 방법은 알아.”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네가 죽으면 돼.”
심해에서 끌어올린 바닷물도 지금보다 차가워질 수 없을 것이다.
잠시 멍하니 있던 투이나의 눈매가 단호해졌다.
“싫어요.”
“그래서는 안 돼.”
물속에 비친 빛들이 일렁였다.
마치 그들의 목소리가 빛에서 온 것처럼.
“너는 죽어야만 해.”
“…….”
투이나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이제 대화를 무시하고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기로 결심했다.
‘고개를 돌리면 나갈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두 사람이 들어온 게 아니라서 운신이 자유롭지 않은 모양이다.
“너도 느끼고 있을 걸.”
한 목소리가 종용했다.
“죽음이 네 주변을 떠돌고 있다.”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 말에 무언가 걸렸다.
투이나는 되살아난 뒤로 지나치게 죽을 위기를 많이 겪었다. 사고도 너무 많았다.
단순히 원한을 품은 살인자가 한 짓이라기엔, 계획성은 부족하고 치명적이었다.
‘그게 다 우연이 아니라고?’
투이나는 어디 있는지 모를 목소리들을 노려보았다.
물속을 부유하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사나운 신의 분노처럼 일렁였다.
“살아있는 한 계속 그럴 거야.”
더는 참을 수가 없다.
투이나는 무시하기로 했던 결심마저 잊고 소리쳤다.
“죽어야만 한다니 말도 안 돼요!”
“네 영혼은 죽음이 필요하거든.”
투이나의 몸이 굳었다.
“……되살아났기 때문인가요? 제가 원래는 죽었어야 할 사람이라서?”
“그렇지 않아.”
“네가 가고 싶어 하는 거야.”
“전 죽고 싶지 않아요.”
“머리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너도 조금씩 느끼고 있을 걸.”
“너는 곧 죽음을 사랑하게 될 거야.”
투이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갑자기 물살이 일렁였다. 빛이 뒤틀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목소리들이 일렁였다.
“아, 그가 온다.”
“또…….”
“도망쳐라.”
갑자기 목소리들이 물러나는 느낌이 들었다.
투이나는 여전히 혼란에 빠진 그대로였다.
산란하는 목소리들은 사라진 뒤에도 잔물결처럼 계속 정신을 때렸다.
‘죽음을 사랑하게 된다니.’
그녀는 베인을 사랑하는데……?
그 때 투이나는 시선을 빼앗겼다.
바다 속에서 진주가 맺히듯 하얀 빛이 하나로 모아졌다.
목소리들은 보이지 않았음에도 그녀를 겁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지금 나타난 새하얀 얼굴은 그녀를 완전한 공포로 몰아넣었다.
꿈에서 보았던 얼굴이다.
얼굴만큼이나 새하얀 손이 애타게 그녀를 향해 뻗어왔다.
‘이건.’
투이나는 숨을 쉬는 법조차 잊어버렸다.
‘당신은.’
굽이치는 빛살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움찔거렸다.
투이나는 미칠 것 같은 기분으로 손가락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닿자 꽃이 열리듯 그의 얼굴에 이목구비가 피어났다.
비로소 원래대로 돌아온 베인의 얼굴이 눈물에 젖은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루가 님.”
베인의 눈동자가 단 하나밖에 없는 구원을 갈구하듯 애원했다.
“저를 구해주십시오!”
“……허억!”
강제로 물에서 끌려나온 투이나가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괜찮으십니까!”
“콜록, 컥, 흐어…!”
투이나가 미친 듯이 기침했다.
바다에 들어간 투이나의 움직임이 멈추자 놀란 라카인이 그녀를 끌어낸 것이다.
‘두 사람이 들어와서 나온 거야.’
소금물이 들어간 폐부가 타들어가듯이 아파왔다.
방금 전까지 바다에서 겪은 일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그런가? 그게 영혼의 세계야?’
아직도 손에 닿았던 베인의 차가운 피부가 생생했다. 투이나가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당장 불을 피우겠습니다.”
라카인이 옷이 젖는 줄도 모르고 투이나를 끌어안았다.
투이나는 입안에 남아있던 소금물을 죄다 뱉어내며 호흡하려고 애썼다.
“제가, 헉, 얼마나 들어가 있었죠?”
“아주 잠깐이셨습니다. 갑자기 움직이지 않으시기에 바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렇게 짧다니.’
그녀의 느낌으로는 거의 반나절이나 붙잡혀있던 것 같았다. 어쩌면 영원 같기도 했다.
라카인은 투이나의 상태가 이상한 걸 바로 알아차렸다.
정신이 다른 데 팔린 사람처럼 두 다리로 섰다가도 자꾸만 미끄러졌다.
꼭 넋을 잃고 홀린 사람 같았다.
라카인은 뼛속 깊은 곳부터 차오르는 무서움증에 전신이 떨릴 것만 같았다.
이대로라면 투이나를 잃어버리고 만다.
강렬한 예감에 라카인은 무례함도 잊어버리고 연신 그녀의 팔과 다리를 주물렀다.
빨리 체온을 돌려놓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이다.
여름인데도 이렇게 사람의 몸이 차가워서는 안 됐다.
누군가 그녀의 생기를 다 빨아간 것 같았다.
‘저를 봐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려던 라카인은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말을 삼켰다.
자신이 투이나의 연인도 아닌데 무슨 소용인가.
“제가 여기 있습니다.”
그는 간신히 그 말만 했다.
받는 것보다 주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 최선을 다한 말투가 그러하였다.
그러나 투이나의 정신이 돌아오기도 전에 빠르게 달려오는 말발굽소리가 들렸다.
추격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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