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이 반지는 본래 한 쌍이지 않느냐.’ ‘다른 하나는 받지 못했습니다.’ ‘너를 속였더냐.’ ‘그들이…’
베인은 악몽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상체를 튕겼다.
“……허억!”
마구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창백해진 그의 얼굴을 감쌌다. 고통이 여전히 베인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깨어난 뒤에도 여전히 정신이 아찔한 고통에 그가 신음했을 때였다.
“아이야.”
곧바로 베인의 목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위를 보려고 했으나 기묘한 압박이 그가 머리를 들지 못하도록 눌렀다.
“고개를 들지 마라. 나를 보는 순간 너는 듣지 못하리라.”
베인은 긴장했다.
지나치게 귓속을 파고들며 울려 퍼지는 음성이 예사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르힘 님이십니까?”
확실했다. 분명히 들어 본 적 있는 음성이다.
“가서 너의 연인을 데려오라.”
베인은 존귀한 신의 목소리를 듣고 무릎을 꿇으려다가 굳어 버렸다.
연인을 데려오라니?
“투이나는 죄인과 함께 서쪽 광장으로 향하고 있다. 내 손을 떠나기 전에 너를 보여라.”
신이 루가가 아니라 투이나라고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베인은 열병처럼 끓어오르는 질투에 사로잡혔다.
‘또 저를 두고 어디로 가십니까?’
이미 그녀가 신전 안 다른 거처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그의 심장은 꺼지지 않는 불길 속에서 계속 지져지고 있었다.
그래도 결국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 믿었으니까.
그런데 떠나?
베인의 뱃속에서 차가운 불꽃이 치솟았다.
청록색으로 타오르는 불길이 날름거리며 그의 갈비뼈와 목구멍을 집어삼켰다.
이제 결혼이든 뭐든 상관없었다.
당신을 묶어 둘 수만 있다면 결혼이 아니라 다른 어떤 방법이라도 상관하지 않겠다.
살아 있는 신의 전당을 만들어 영원히 당신을 숭배할 수 있도록 하리라.
아르힘은 오욕으로 들끓는 베인의 마음을 모르는 듯 아는 듯 천천히 선언했다.
“투이나를 붙잡지 못한다면 너는 하나를 잃으리라.”
그러나 베인은 이미 모든 것을 잃은 기분이었다.
아르힘이 사라지자 눈물로 젖었음에도 무시무시한 얼굴이 위를 향해 쳐들렸다.
“기다리십시오!”
튕겨나가듯 뛰쳐나온 베인은 그대로 온 신전에 불을 밝혔다.
그가 가는 자리마다 푸른 새벽의 궤적이 남는 것 같았다.
“루가 님이 도망치신다니 무슨 소리십니까?”
“샨의 거처에서 나오신 적도 없습니다!”
“크로퍼드 님!”
베인은 시답잖은 의심으로 그를 붙잡는 사제들을 모두 뿌리쳤다.
심장이 세차게 박동하고, 다리는 땅을 박찼다. 한 번 달릴 때마다 쩍쩍 벌어지는 균열 위를 뛰어넘는 것 같았다.
이 한 걸음. 이 다음 걸음.
계속 이어지지 않으면 절벽 밑으로 떨어져 죽을 것 같았다.
투이나가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누구에게 협박을 당하거나 신의 명령에 따르는 것도 아니었다.
죄인과 함께 간다는 말에 그는 모든 걸 이해했다.
그녀는 그냥…… 그런 사람이다.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 누군가를 걱정할 때만 간신히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잊을 수 있는 사람.
투이나를 온전히 알았을 때 베인은 격렬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세상은 너무도 부족한 자가 많았다.
상인으로 나라를 떠돌다 보면 탐욕을 가장 많이 보게 되었다.
상단을 습격하는 도적 떼들은 각자의 굶주림으로 제정신이 아니었고, 물건을 노리는 자들은 온갖 것들로 금화를 흉내 내었다.
레오나는 죽은 자들의 피 값을 계산하면서 몇 번이고 사람을 새로 들였다.
베인은 누이의 고통을 이해하면서도 지나치게 깊이 빠져들지 않도록 노력했다.
마음을 주는 건 괴로웠으니까.
물건을 싣는 걸 구경 나온 어린 소년의 금발을 쓰다듬어 주던 자칸은 죽었다.
수량을 계산하다가 잘생긴 청년을 보고 얼굴을 붉히던 데이나도 죽었다.
강가에서 노래를 부르던 호보이도, 죽은 부모 대신이라며 사탕을 챙겨 주던 이스바닐도 죽었다.
아르힘 바깥에서는 그토록 죽음이 쉬웠다.
베인은 그들을 잃고도 지나치게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자신에게 만족하면서도 섬뜩했다.
무언가 잘못되지 않았나?
고통을 피하려다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기분.
그런 깨달음은 얻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속에 무언가 비어 있는 부분이 있다는 걸 인정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걸.
투이나도 언젠가 죽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고통스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베인은 누구인지 모를 자에게 소리쳤다.
똑똑히 봐!
이 고통은 사랑에서 왔다.
증명은 영혼을 찢어발기는 고통으로 대신하겠다.
이토록 깊게 파고드는 마음의 반대편이 얼마나 깊은 사랑인지 이제는 알겠어?
한계에 달한 육체가 그를 배신하며 뒹굴었다.
“윽!”
콰당탕.
베인이 대지 위를 굴렀다.
세차게 쥐어짜진 허파는 공기 대신 바늘을 마시는 것처럼 타들어 갔다.
얼굴에 뭉개진 흙이 눈에서 흘러나오는 소금기를 빨아들였다.
당신만큼은 잃을 수 없다.
마음을 다해 사랑할 수 있는 건 그녀뿐이므로.
베인이 경련하는 다리로 일어섰다.
활짝 열린 문이 보였다. 서쪽 광장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저곳을 통과한다면 아르세라까지 순식간에 빠져나갈 수 있다.
투이나가 벌써 저곳을 지나쳤나?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베인이 잘 따라오지 않는 다리에 저주를 퍼부었다.
빨리, 더 빨리.
그때 멀리서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아직 그녀가 신전에 있다.
환희가 먼저 치고 올라왔다.
베인은 급히 그쪽으로 절뚝거리며 다가갔다. 다급하게 얼굴에 묻은 흙을 닦아내는 것도 잊을 수 없었다.
나를 보면 절대로 떠나실 수 없어.
베인은 확신했다.
자신은 사랑을 받았다.
그는 정신없이 말 두 마리가 달려오는 길로 나아갔다. 다리만 성했더라면 목숨을 날려 버렸을 만큼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그는 숨만 붙어 있으면 자신을 다시 살려내 투이나에게 보내 줄 아르힘을 믿었다.
살아만 있다면…….
투두두두.
점점 거세지는 소리에 귀가 아파왔다. 베인은 더 이상 숨 쉬기를 거부하는 폐를 혹사시켰다.
“루가 님!”
베인은 간신히 소리쳤다.
새벽 어스름 사이로 달려오는 말 머리가 보였다.
조금만 더 밝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베인이 안달을 냈다.
생각보다 너무 빠른 속도였다.
“멈추십시오, 루가 님!”
베인이 소리를 질렀다.
낭패다. 말이 달려오는 소리가 너무 컸다. 목소리가 묻혀 버릴 것이다.
“투이나!”
거대한 말 두 마리가 눈앞을 뛰어넘었다.
머리를 깨부수는 진동 속에서 땅을 짓밟는 소리만 온통 가득했다.
가혹한 땅의 심판을 내리듯, 말 위에 올라타 있던 여자가 그를 향해 머리를 들어 올렸다.
투이나였다.
분명 눈이 마주쳤는데……. 말은 멈추지 않고 달려갔다.
베인은 그들이 신전을 빠져나간 뒤에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저기쯤에선 멈추시겠지. 갑자기 멈출 수가 없어 가신 것이다. 조금만 더 가셨다가, 저곳까지만…….
애처롭게 계산하던 베인은 투이나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투이나가 자신을 보고 외면하다니.
지금 당장 그 사실을 온 힘으로 부정하고 싶었는데, 그의 눈앞에 나타난 소년이 생각을 사로잡았다.
소년은 허공을 밟고 있었다.
“너로도 안 되는구나.”
아르힘은 눈물에 젖은 베인의 뺨을 들어 올렸다.
아르힘의 말이 너무도 아픈 부분을 찔러 베인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신의 힘이 자신을 감싸자 고통 대신 머리가 멍해질 만큼 성스러움이 가득 차올랐다.
베인은 처음 보는 아름다운 소년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기면서도 검은 머리 빛깔에 증오를 자극받고 말았다.
저건 달아난 죄인과 같은 색이다.
미워해야 하는데.
아르힘은 격렬하게 꿈틀거리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하는 베인의 감정을 고요하게 내려다보았다.
가엽고도 가여운 나의 백성이여.
“그러니 어쩔 수가 없구나.”
울컥 치민 감정을 참지 못한 베인이 입을 연 순간, 신이 그의 정신을 휴식으로 이끌었다.
* * *
신전을 박차고 나올 때 투이나는 어떤 강력한 힘이 그녀를 붙잡는 감각에 사로잡혔다.
도저히 착각이라고 할 수 없는 강렬한 인력에 투이나는 고개를 계속 뒤로 돌렸다.
옆에서 고삐를 잡은 라카인이 불안하게 소리쳤다.
“그렇게 달리면 위험하십니다!”
“……혹시 누가 절 부르는 소리 못 들었어요?”
투이나가 소리쳐 물었다.
라카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못 들었으면 정말 아무 소리도 없었다는 뜻이다.
‘분명히 무슨 소리가 들렸던 거 같은데…….’
이상하게 귀 한쪽이 먹먹했다.
갑자기 말을 달리면 이런 증상이 있을 때도 있다지만 지금 겪는 이명은 처음 느껴 보았다.
‘누가 오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그녀는 일부러 길에 사람이 다니는 시간을 골랐다.
말을 얻었어도 천천히 움직이자는 라카인의 제안을 거절하고 빨리 도망치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린 것도 그녀였다.
일단 다른 나라로 들어가기만 하면 아르파든 아르힘이든 손을 뻗기는 힘들었다.
‘세상에……. 아르파면 몰라도 내가 아르힘 님에게서 도망치는 날이 오다니.’
저절로 말을 탄 몸에 힘이 들어갔다.
투이나는 정말 잘하고 있는 게 맞을까 하는 의심에 새삼 괴로웠다.
하지만 믿음이 살며시 의심을 감싸 안았다.
‘그래도 내가 잘못 하는 게 누가 죽는 것보다 나아.’
절대로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으리라.
투이나는 결연하게 고삐를 다잡았다.
‘어떤 질책을 들어도 좋아.’
혹시라도 붙잡혔을 때 라카인에게 탈옥한 죄를 물을까 봐 그녀는 처음부터 함께 떠날 결심이었다.
그래야 붙잡혀도 라카인에겐 명령을 따른 죄만 남는다.
‘나의 명령이야.’
투이나의 머리 위에서 세차게 두건이 펄럭였다.
그날이 오기 전에 라카인을 도주시키는 게 그녀가 그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죄가 오기 전에 자유를……. 자유를!
“아이야.”
투이나는 하마터면 고삐를 놓칠 뻔했다.
‘……아르힘 님?’
투이나는 위험한 것도 잊고 상체를 똑바로 들어 올렸다.
절대로 착각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정신없이 사방을 돌아보는 투이나의 귓가에 바람이 거칠게 부딪쳤다.
방황하는 그녀의 시선 끝에서 소년이 웃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서 턱을 괸 소년이 도망치는 두 사람에게 살짝 손을 흔들었다.
천진난만한 동작이 그녀의 눈에 아로새겨졌다.
“네가 돌아올 시간을 기다리겠다.”
불어온 바람에 두건이 그녀의 두 눈을 가렸다가 떨어졌다.
그리고 소년은 사라졌다.
* * *
아르세라까지 가는 길은 지나치게 쉬웠다.
라카인은 지키는 자도 없이 열려 있는 문이 지나치게 수상쩍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길을 이끄는 투이나가 아무런 의심도 없이 문을 통과했기에 그저 따랐다.
새벽이 걷히고 있었다.
비탈길을 내려가며 말의 속도를 늦춰야 했다.
한때 꽃이 만개했던 나무들은 뾰족한 푸른 잎으로 스스로를 알렸다.
잎맥을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두꺼운 잎이 이슬을 튕겨냈다.
라카인은 지난번처럼 과수원 곳곳에서 사람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이제 막 아침을 맞이하는 과실수들은 느긋해 보였다.
“여기서 멈출게요.”
투이나가 고삐를 당겼다.
라카인은 즉시 말을 멈추고 안장에서 내리는 그녀를 도와주었다.
라카인이 지나치게 말이 없어 보였는지 투이나가 선선히 웃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잡힐 걱정은 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투이나의 말에 놀랐다.
당장 아르힘과 아르파가 머무는 구역에서 벗어났다고는 해도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다.
“더…… 멀리 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 전에 대비를 좀 해야지요.”
투이나가 낑낑거리며 말에서 짐을 내렸다.
두 개로 나누어 실었던 짐 하나를 내린 그녀가 두건을 벗었다.
오랫동안 고여 왔던 빛이 흘러내리듯 적갈색 머리 타래가 바깥으로 떨어졌다.
라카인은 숨을 삼키곤 개운하게 머리를 터는 투이나를 지켜보았다.
신이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보았다가 저주를 받은 사냥꾼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휴우…….’
두건 밑에 눌러 놓느라 꽉꽉 묶어두었던 머리카락이 이제야 좀 시원했다.
뭉친 부분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린 투이나가 함께 챙겨 온 향유를 꺼냈다.
“잠깐만 시간 좀 주세요.”
“무엇을…….”
“탈옥을 했으니 사람들을 피해 다녀야죠.”
투이나가 싱긋 웃었다.
나무 밑에 앉은 그녀가 지금까지 몸에 칠해 뒀던 분칠을 깨끗하게 벗겨내는 동안 라카인은 망을 보았다.
이렇게 과수원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으니 옅은 그리움이 가슴을 찌르는 듯했다.
태어나서부터 살아온 고향을 그리워하기보다 겪어 보지도 못한 이 순간을 평생 그려 온 것 같았다.
햇빛을 따라 빠르게 데워지는 공기와 은은한 단내가 그의 주변을 휘감았다.
여름의 물기였다.
“다 됐어요!”
투이나가 어깨를 짚었다.
라카인이 분칠을 벗겨낸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새하얀 분으로 덮여 있을 때보다 투이나의 눈은 더 또렷하고 맑게 빛났다.
흰색보다 훨씬 어울리는 살구빛 피부색이 그 밑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군데군데 절대로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회색 얼룩이 몸 전체를 가로질러 있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녀가 가진 눈부심을 다 가릴 수가 없었다.
라카인이 좀처럼 쓰지 않는 표현이지만, 그녀는 자유로울 때 훨씬 아름다워 보였다.
“남아 있는 데 없죠? 손으로만 지우고 볼 수가 없으니까 헷갈리네요.”
“깨끗합니다.”
투이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라카인은 얼룩을 드러내고도 태평하게 즐거워하는 그녀가 좋았다.
역시 아르힘을 나설 때 어딘가 표정이 굳어 있었던 건 착각이었을 것이다.
“아르세라 수장님이 제 얼굴을 알고 있어서 미리 지워 두려구요. 그냥 방문자 몇 명 때문에 나오진 않을 테지만, 혹시 모르잖아요?”
“그렇군요.”
“흐음…….”
투이나가 갑자기 라카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실수했나 싶어 그가 금세 입을 꽉 눌렀다.
‘칭찬을 했어야 했나?’
하지만 어떤 말로든 아름답다는 감정을 표현해도 지금 자신이 겪는 감정을 제대로 전달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다행히 라카인이 고뇌에 빠지지 않도록 투이나가 그를 건져냈다.
“이제 보니 라카인도 제법 눈에 많이 띄네요.”
제법이 아니라 상당히 튀었다.
누가 봐도 과수원이 아니라 피가 튀는 전쟁터나 어디 성의 수문장이라도 하고 있어야 어울릴 키와 덩치였다.
“혹시 허리를 숙이면…….”
투이나의 말에 라카인은 최대한 덩치를 줄이려고 몸을 움츠렸다.
결과적으로 거대한 일자형 몸이 되었을 뿐이다.
“아, 아니에요. 이 방법은 취소. 그러다 허리랑 목 나가겠어요.”
라카인이 천천히 다시 몸을 폈다.
기다렸다는 듯이 굴곡진 근육이 튀어나와서 투이나가 할 말을 잃었다.
‘어쩌지? 그냥 이대로 가야 하나?’
샨이 전쟁으로 저질러 놓은 짓이 많아서 레이벡처럼 아르파인을 증오하는 사람이 또 나타날 수도 있었다.
“차라리 인상이라도 바꿔 보면…….”
무심코 중얼거린 투이나가 라카인의 앞머리를 넘겼다. 그리고 몹시 후회했다.
‘세상에.’
투이나의 턱이 저절로 내려갔다.
‘예전에도 눈 예쁜 줄은 알았지만.’
이건…… 과했다.
단순히 눈만 보았을 때는 예쁘다 하고 넘어갔던 게, 선이 굵고 단단한 얼굴 전체와 어우러지니 상상 이상의 미남이 되었다.
‘너무 잘생기면 예쁘다거나 아름답다는 말이 안 나오는구나.’
지금까지 투이나가 가진 미의 기준은 베인이었다. 그는 고금을 통틀어 두 번 다시 찾아보지 못할 미인이었으니까.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지금 라카인의 외모는 그녀의 기준을 박살 내고 새 기준을 세울 위력을 가졌다.
‘분명히 베인이나 아르힘 님만큼 아름답지는 않은데…….’
이상하게 취향에 꼭 맞는 사람을 찾아낸 것처럼 라카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불안했는지 라카인이 눈을 굴렸다.
“……어려우시겠습니까?”
핫!
뒤늦게 정신을 차린 투이나가 앞머리에서 손을 뗐다. 다시 눈을 가리자 라카인이 평소처럼 보였다.
몹시 당황한 투이나가 강력하게 그를 붙들었다.
“라카인.”
그녀는 거의 그를 흔들어 놓을 기세였다.
“……도망 다닐 동안은 절대로 앞머리 자르지 말아요.”
“알겠습니다.”
원래도 자른 적 없었던 터라 라카인은 약간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투이나가 손등으로 제 뺨을 눌렀다.
신전으로 돌아가자마자 당장 라카인이 엄청 미남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입이 근질거렸다.
모두들 라카인의 본래 모습을 보면 놀라 까무러칠 텐데.
잠깐 뿌듯한 상상을 하던 투이나가 곧 이성을 다잡았다.
‘하긴……. 당분간은 돌아갈 수가 없구나.’
게다가 어딘가 마음에 드는 곳에 라카인이 정착하면 아쉽게도 그녀의 말을 증명할 기회도 잃어버릴 것이다.
‘어쨌든 잘됐어.’
이미 능력 있는 남자가 얼굴까지 훌륭하다면 어디든 밥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다.
투이나는 그거면 족했다.
“눈에 띄는 문제는 일단 포기하죠. 누가 물어보면 용병이라고 하세요. 제가 고용할게요.”
“저는 이미 루가 님의 종입니다.”
천을 둘러쓰려던 투이나가 찡그렸다.
“우리 두 사람 다 이제 신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건 그만하기로 해요.”
투이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왕이니 종이니 하는 얘기는 모두 신이 주신 말이었잖아요.”
‘아.’
나는 아직도 베인이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구나.
새삼스럽게 가슴이 꾹 조였다.
아르힘이 그녀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서 구혼자를 데려왔다는 이야기가 여전히 머리 한구석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아르힘을 떠날 때 신은 그녀가 돌아올 것을 기다린다 하였다.
돌아간 다음에도 자신은 여전히 루가일까?
아니면 신이 그녀를 위해 다른 이름을 준비해 두었을까?
투이나는 아르힘이 베인 또한 아끼고 사랑함을 잊지 않았다.
투이나가 전달하는 아르힘의 말이 전부가 아닌 것처럼, 베인이 전한 아르힘의 왕 이야기도 그게 다가 아니겠지.
‘진실의 파편이 우리를 감싸고…….’
투이나가 전한 신의 말을 해석하기 전마다 사제들은 같은 문구를 외웠다.
‘우리에게 거짓된 추측을 걷어내 주시어, 마침내 당신에게 도달하도록 하소서.’
생각이 많아질 때마다 찾아오는 버릇이 다시 그녀의 문을 두드렸다.
잠시 먼 곳에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냥 지금은 사람을 찾아요.”
투이나가 길게 풀어헤친 두건을 목에 걸쳤다.
“주변 소식을 들어 보고 길을 결정해도 나쁘지 않잖아요?”
“알겠습니다.”
라카인은 기꺼이 동의했다.
아직 종이 아닌 상태로 그녀를 따라가는 일이 무엇인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투이나가 앞서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말을 끌고 천천히 과수원을 빠져나갔다.
* * *
사제들을 데리고 아르세라를 방문했던 공식 행사에서는 산 아래까지 내려갈 일이 없었다.
아르세라의 수도는 산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대지의 능력을 지닌 수호신이 땅에 발을 디딘 백성들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서 크게 도시에 구애되지 않았다.
‘그래도 갑자기 나타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게 돼.’
적어도 시드룬은 나타나기 전에 큼직한 보라색 마법진을 만들어서 이제 올 거라고 미리 신호를 주기라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법도 친절한 힘이지.’
분명히 그 표현을 싫어할 마법사들이 떠올라 투이나가 작게 키득거렸다.
옆에서 걷던 라카인이 웃음소리에 미약하게 움찔하더니 귀를 기울였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라카인은 질문이 아닌 말을 해도 좋을지 몰라 쩔쩔맸다.
물어보면 분명 허락할 테지만, 이걸 허락받으면 오히려 말을 꺼내기가 더 어려울 것 같았다.
자유롭게 말해도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을 수가 있나?
신을 따르는 것보다 더 어려운 문제였다.
한편 투이나는 라카인이 살 만한 주변 나라를 하나씩 골라 보고 있었다.
‘남쪽으로 내려가 볼까? 아니야. 샨이 아르힘 말고 다른 나라를 노리면 아직 이 주변이 될 확률이 커. 차라리 강을 타고 멀리까지 가면…….’
투이나가 불쑥 물었다.
“바다 좋아해요?”
“……아직 한 번도 가 보지 못했습니다.”
“저도 그래요! 바다에서 사는 건 어떨까요?”
투이나와 라카인이 동시에 바다를 상상해 보았다.
땅보다 넓고 소금기를 품은 물이라는 이야기는 좀처럼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그나마 둘 다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바다와 가까운 장소는 소금 호수뿐이었다.
막연히 상상해 본 라카인은 고요한 호수보다 강렬했던 투이나의 기억을 떠올렸다.
호수에 소금물을 보태던 당신.
그걸 생각하면 바다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좋아요. 일단 목표를 거기로 잡을까요?”
투이나가 밝게 말했다.
라카인은 목표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단순히 자신을 탈옥시키고 끝낼 생각이 아니었나?
아르힘을 빠져나왔는데도 여전히 함께 행동하는 투이나가 목에 걸린 사과처럼 신경 쓰였다.
그래도 곁에 있는 그녀의 존재가 기뻤다.
라카인의 귀가 움찔했다.
“……다시 말에 오르시는 게 좋겠습니다.”
“누가 쫓아오나요?”
투이나가 질문과 함께 즉각 말에 올랐다. 숲을 스치는 잎사귀 소리에 급박함이 섞여들었다.
“예.”
라카인은 말을 끌고 몸을 피했다.
그는 감옥으로 돌아가도 상관없었지만, 적어도 투이나가 강제로 끌려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제 의지로 그녀를 따라 나왔으니 더더욱.
‘벌써 눈치 챘나?’
슬슬 투이나가 사라진 걸 알아차릴 시 때가 되긴 했다. 특히 샨은 은근히 아침잠이 없는 편이라서.
‘생각보다 너무 빠르네. 어디로 나갔을지 벌써 안 건가?’
우연히 라카인까지 사라진 걸 바로 알았다고 쳐도 방향까지 정확한 게 마음에 걸렸다.
누가 본 게 아니고서야.
투이나는 한 손으로 고삐를 꺾었다.
“따돌릴 수 있을까요?”
“숫자가 적은 것 같습니다. 달리기 어려운 지형이니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가능합니다.”
“알겠어요.”
과수원 바닥은 뿌리를 뻗은 나무들로 인해 울룩불룩했다.
아르세라의 나무들은 튼튼했기에 말이 뛰어가도 자국이 남지 않았다.
기껏해야 먼지나 이슬만 좀 튀었을까.
라카인은 그것까지 알아볼 자들이 추적자로 나서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달리고 싶어 하는 말을 진정시키며 라카인은 더 깊은 쪽으로 말 머리를 돌렸다.
아르세라의 과실수들은 바닥에 닿을 듯이 늘어지고 풍성한 가지를 가져 여기선 나무 하나만 건너뛰어도 시야를 확보하기 쉽지 않았다.
자박자박.
라카인의 귀에 작은 소리가 잡혔다.
운이 나쁘면 발견될 수도 있는 거리였다.
“정말로 이렇게 남의 나라에 막 들어와도 되는 겁니까? 루가 님도 안 계신데요.”
“방문자가 몇 명쯤 지나간다고 아르세라의 장이 나타나진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찜찜합니다. 크로퍼드 님이 방향을 알려 주셨다지만 정말 루가 님이 이리 오셨을지…….”
당연히 샨이나 신전의 추격을 예상하고 있던 라카인은 뜻밖의 이름에 놀랐다.
크로퍼드라니.
그자가 이렇게 이른 시간에 투이나의 실종을 바로 알아차릴 수가 있단 말인가?
생각보다 신전이 그에게 긴밀하게 결탁하고 있는 모양이다.
만약 라카인이 자신이 갇혀 있는 동안 신전에 돌았던 소문까지 알았더라면 지금처럼 차분하진 못했을 거다.
사제복을 입은 자들이 반신반의하며 산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돌아서 가야겠습니다.”
“산 위쪽은 거의 다 아르힘의 땅이니 더 안쪽에서 내려가는 길을 찾아봐야겠네요.”
투이나가 흘끗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빽빽한 잎사귀 사이로 내리쬐는 빛이 벌써 열기를 띄기 시작했다.
“서둘러요. 곧 다들 일하러 나올 시간이에요.”
두 사람은 한참 시간을 들여 과수원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직 높은 곳이라 아래쪽으로 드문드문 민가가 보였다.
라카인이 그쪽을 보는 걸 알았는지 투이나가 설명했다.
“아르세라의 경계선을 유지시켜 주는 사람들이에요. 대부분 혼자 사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저렇게 외딴 곳에서 지내도 괜찮습니까? 습격에 취약할 텐데요.”
“오히려 아르힘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곳이라 저렇게 살 수 있죠.”
아르힘은 침략하지 않는다.
투이나가 잠깐 그리운 표정을 짓자 라카인은 가슴이 답답해져 묻고 싶었다.
‘……루가 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두 사람은 도망치는 중이다.
그러나 투이나에겐 그럴 이유가 없었다.
탈옥을 주도한 건 그녀였지만, 혹시나 신전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자신을 이용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모든 일을 팽개치고 왔다기엔 투이나의 표정이 너무도 평화로웠다.
추격자들만 없었다면 단순한 여행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무엇을 위해서 저와 함께하십니까.’
투이나는 그저 여행을 즐기는 것마냥 초원처럼 펼쳐진 능선을 내려다보았다.
라카인은 그녀의 감상을 깨고 싶지가 않았다.
어쩌면 조금만 더 그녀의 뒤에서 달리고 싶은 이기심일지도 몰랐다.
곧 투이나가 안장에 매어 두었던 짐 하나를 가리켰다. 그녀를 따라가던 라카인이 따라 짐을 풀었다.
와르르.
자그마한 꾸러미에서 보석이 쏟아져 나왔다.
깜짝 놀라는 라카인에게 투이나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환전부터 할까요?”
제법 큰 마을을 발견한 뒤부터 라카인과 투이나는 누가 내려갈지 옥신각신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라카인 혼자선 너무 눈에 띄어요.”
라카인이 저도 모르게 얼룩 쪽으로 눈을 굴렸다.
투이나가 능청스럽게 몸을 틀었다.
“저는 아르힘으로 치료받으려 가는 병자. 이건 부모님이 챙겨 주신 여비고, 혼자 여행하기 힘들어 라카인을 고용했죠.”
“같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혼자 가면 들려줄 틈도 없을 거예요.”
투이나는 자신의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제가 있다면 걱정 없죠.”
천연덕스러운 말투였다.
이 와중에도 가슴이 두근거려 라카인은 말보다 박동을 먼저 참아야 했다.
투이나는 침묵을 승낙으로 이해했는지 휘파람을 불었다.
말이 천천히 속도를 높였다.
“빨리 안 오면 두고 갈 거예요.”
라카인의 말은 금세 속도를 냈다.
처음엔 일이 생각처럼 흘러갈 것 같았다. 마을은 평화로웠고, 투이나와 라카인 말고도 여행객이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길로 들어서자 확연한 차이가 느껴졌다. 단번에 둘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던 것이다.
처음에 라카인은 둘 다 말을 끌고 왔기 때문인가 의심했다.
그러나 부유한 자를 보는 눈빛이 아니었고, 그들은 오히려 지나친 경계심을 띄우고 있었다.
그래서 라카인은 자신을 무서워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흘깃거리는 시선이 대부분 투이나에게 향하는 걸 깨닫자 배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긴장한 라카인이 투이나를 주시했다.
그러한 주변의 시선을 모를 수가 없는데도 그녀는 동요 한 점 나타내지 않았다.
“루가 님.”
“지금은 이름이 낫겠어요.”
라카인의 목이 꽉 막혔다. 투이나의 이름을 부른다는 기대와 불안한 상황 때문이었다.
‘모르시는 게 아니다.’
투이나라고 시선을 느끼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명백히 적개심을 담은 눈빛들을 마치 선망에 찬 군중을 대할 때와 똑같이 받아넘기고 있었다.
라카인이 가벼운 미소가 걸린 투이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이 군중 사이로 한 인간이 걸어 나왔다.
“멈추시오.”
“아, 안녕하세요?”
투이나가 살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그들을 막은 자는 냉담했다.
투이나가 말에서 내리려는 시늉을 하자 그가 곧장 손을 들어올렸다.
“내려오지 마시오.”
투이나가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도로 안장 위로 올라갔다.
라카인이 천천히 등자에서 발을 뺐다. 언제라도 튀어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투이나는 여전히 상냥한 목소리였다.
“식량을 좀 사러 왔어요.”
“나가시오!”
그는 거리를 유지한 채 소리쳤다.
단번에 라카인의 미간이 좁혀졌지만 투이나는 여전히 담담했다.
마치 그가 무슨 얘기를 할지 미리 알고 있던 것처럼.
“이건 옮는 병이 아니에요.”
“상관없소. 그 불결한 몸 당장 밖으로 치우시오!”
라카인의 어깨가 들썩였다.
분개한 그가 뛰어내리려는 순간 투이나가 말 머리를 돌렸다.
“제 동료는 괜찮죠?”
“저자도 병에 걸린 건 아니겠지?”
“아주 건강해요.”
투이나가 장담했다.
라카인은 당장이라도 그의 혀를 뽑아 주고 싶었으나 투이나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라카인에게 속삭였다.
“식량을 자주 사긴 힘들겠네요. 넉넉히 부탁해요.”
라카인은 차라리 그녀가 그들을 무릎 꿇려 사과를 받아내라는 명령이라도 하길 바랐다.
무기 하나 없더라도 지금 기분이라면 그들을 모두 때려눕힐 수 있을 것 같았다.
투이나도 그걸 눈치 챘는지 일부러 순순히 돌아나갔다.
“…….”
라카인은 말 등에서 짐을 낚아채 내렸다.
투이나를 쫓아낸 노인은 라카인의 몰골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지만, 그래도 사람을 쫓아낸 게 찔리는지 군말 없이 돌아섰다.
명백히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다.
라카인은 보석을 환전하면서도 흥정할 생각도 안 했다.
다행히 무시무시한 기세를 풍기는 그를 본 상인들은 속임수를 쓸 엄두도 못 냈다.
“여기서 전부 매입하긴 어렵고……. 이 정도면 어떻소?”
“…….”
라카인은 말없이 제시한 돈을 주머니에 쓸어 담았다.
식량을 살 때도 그는 불쑥불쑥 치미는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이런 대접을 받을 분이 아니신데.
고작 병을 가지고 그녀를 판단하는 게 싫었다. 그들은 투이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하지만 쫓기는 입장이기에 소란을 참아야 한다는 사실이 족쇄가 되었다.
물건을 사는 내내 발목에서 사슬이 질질 끌리는 느낌이 들어 라카인은 서둘러 볼일을 끝냈다.
마을 밖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을 투이나를 생각하니 저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걱정과 달리 투이나는 언덕 위에 다리를 뻗고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가슴이 또 울렁거렸다.
라카인을 발견한 투이나가 폴짝 일어났다.
“빨리 왔네요? 자, 나눠 실어요.”
투이나는 태연스레 그에게서 짐을 가져갔다.
그게 이상했다.
지금 상황에선 보다 어울리는 말이 존재하지 않을까.
가령…… ‘정말 그 마을 사람들 못됐네요.’라든가 ‘이렇게 쫓겨나다니 화나요, 저라고 원해서 이런 삶을 사는 게 아닌데.’라든가.
차례로 상상해 본 라카인은 이윽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말투만 같았을 뿐 도저히 투이나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참는 게 버거워진 나머지 라카인은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왜 화를 내지 않으셨던 겁니까.”
풀썩.
투이나가 안장 위에 짐을 올려놓았다. 그녀가 일부러 과장되게 손을 털었다.
“아까요?”
“예.”
“일부러 그런 건데요, 뭐.”
투이나의 눈이 곱게 휘었다.
“아까 라카인은 순순히 받아 줬죠? 한 명을 쫓아내면 미안해서라도 다른 쪽을 받아 주게 되어 있잖아요.”
라카인은 멍해졌다.
“절 쫓아낼지 라카인을 쫓아낼지는 몰랐지만요. 하긴 이런 외딴 곳에서는 건장한 남자보다는 질병이 더 무섭겠죠.”
“그래서 같이 가시겠다고 하셨습니까? 이미 쫓겨날 걸 알고서…….”
“운이 좋으면 둘 다 받아들여 줄 거라고 생각했죠. 운이 나쁘다면 그 반대구요.”
투이나가 부드럽게 말의 갈기를 쓸어내렸다.
“라카인, 저는 제 병에 익숙해요. 익숙하지 않은 건 다른 사람들이죠.”
말을 쓰다듬던 투이나가 편하게 등을 기댔다.
“그리고 전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익숙하거든요. 그 사람들에게 화를 내면 만날 수 있는 기회까지 사라져요.”
“만나서 오히려 고통스러우시더라도 말입니까?”
“누굴 만나도 언제나 고통스러운 일들은 있잖아요.”
더 없이 사랑하기에 깃드는 고통도 있다.
하물며 사랑하지 않을 때는 얼마나 사소한 것들이 사람을 쉽게 미워하도록 만드는지.
“그래도 고통 때문에 사람을 만나는 걸 겁내고 싶지 않아요.”
투이나의 말에 라카인은 감춰 뒀던 손바닥의 회색빛 얼룩이 저려 오는 걸 느꼈다.
왜 신이 당신을 택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자신이 그녀를 데리고 와 버렸다.
탈옥을 거부하지 않고, 사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투이나의 명령이라는 족쇄에 기꺼이 발을 채웠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면 옳은 명령을 따르고 있다는 낯선 기분이 몸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그건 어떤 수호신의 보호보다도 달콤했다.
투이나는 라카인의 속내를 짐작해 보았다.
이 남자는 평생 동안 제 의견을 말하는 걸 억압당했기에 쉽게 낯빛이나 목소리를 바꾸지 않았다.
다만 몸을 통제하려는 의지가 워낙 크다 보니 조금만 어긋나도 쉽게 눈에 띄었다.
지금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걸까?’
작게 손톱 끝을 움찔거린 라카인이 갑자기 앞으로 팔을 뻗기에 설마 화라도 났나 싶었다.
그러나 목표는 대화가 아니었다.
쐐액!
파공음이 귓가를 스쳤다.
놀란 투이나가 홱 움직였다.
반강제였다.
“엎드리십시오!”
라카인이 던지다시피 투이나를 말 위로 올렸다. 그녀가 허둥거리며 안장을 껴안았다.
‘뭐, 뭐야?’
곧장 말이 뛰쳐나가는 바람에 주변 상황을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아까 추적자를 다 따돌린 줄 알았는데?’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와 땅을 박차는 말발굽 소리가 어지럽게 뒤엉켰다.
자리를 잡을 틈도 없이 말이 달리기 시작해서 자세가 몹시 위태로웠다.
잠깐이라도 힘이 풀렸다간 다진 고기가 될 판이라 투이나는 일단 말을 붙잡는 데 집중했다.
‘그런데 라카인은……?’
머리가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어서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단 혼자 달리는 소리는 아니었다.
‘’꼭 붙잡으셔야 합니다!”
라카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도 위험한 투이나의 자세를 알았기에 안달이 났다.
투이나가 걱정돼서 미칠 것 같았지만 속도를 늦출 수는 없었다. 이번에 쫓아오는 자들은 준비성이 달랐다.
퍽!
날아오는 화살을 간신히 피한 라카인이 박차를 가했다.
신전에서 온 추적자가 어떻게 감히 루가가 있는 곳으로 공격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붙잡기만 하면 된다는 건가? 돌아가면 치유할 수 있으니?
라카인이 이를 악물었다.
아르힘도 결국 그들만의 방식으로 과격했다.
쫓아오는 자들이 사제복을 입지 않은 걸 보니 여차하면 꼬리를 자를 준비까지 한 모양이다.
이대로 도망가긴 어려울 거라 판단한 라카인이 말을 바짝 붙였다.
위험천만한 행위였지만 투이나를 저대로 달리게 둘 순 없었다.
라카인이 최대한 몸을 낮춘 채 헝겊인형처럼 흔들리는 투이나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저 고삐 잡았어요……!”
혀를 깨물까 봐 그와 똑같이 이를 악문 투이나가 소리쳤다.
그녀는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며 고삐를 움켜쥐고 있었다.
욱하고 치민 라카인이 그녀의 허리를 당겼다.
“잘하셨습니다.”
“흐아!”
단번에 앞쪽으로 상체가 쏠린 투이나는 간신히 다시 안장에 제대로 앉았다.
라카인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투이나의 등을 지그시 눌렀다. 등에 닿은 손바닥이 뜨거웠다.
“계속 상체를 숙이고 계셔야 합니다.”
“아직 무사하죠?”
“예.”
급박한 상황에서도 담담한 말투가 안심이 됐다. 투이나가 거의 말의 목을 껴안듯이 몸을 낮췄다.
‘이제 시작이구나.’
투이나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상하듯 마음을 다잡았다.
추격을 따돌린 건 그로부터 몇 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라카인은 쉽게 방심하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좀처럼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추격자들도 끈질겨 그들을 따돌린 다음에도 한참 거리를 벌리고서야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정확히는 지친 말들이 더 이상 달리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타고 있던 투이나도 멀쩡하진 못했다.
‘허리가 부서질 것 같아…….’
투이나가 몸을 후들거리자 급히 라카인이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괘, 괜찮아요.”
달리는 내내 악물고 있던 어금니까지 얼얼했다.
그런 질주를 겪고도 몸이 성하다니 거의 기적 같았다.
라카인이 그녀를 말에서 들어 내렸다. 움직이지 않고 얌전한 땅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라카인은 숨을 몰아쉬는 투이나의 안색을 주의 깊게 살폈다.
“쉴 곳을 찾겠습니다.”
“그래요.”
투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이라도 확실하게 주고 싶었다.
라카인이 불안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를 안심시키고자 탈옥했건만 역시 생각대로는 되지 않는 걸까.
투이나가 끙끙거리며 저린 몸뚱이를 움직였다. 그녀만큼이나 지친 말이 터벅터벅 따라왔다.
산을 단번에 내려가려던 계획이 틀어져 생각보다 오래 아르세라에 머물러야 했다.
‘풍경이 낯설어.’
아르힘은 바위산이었지만 이곳의 능선은 아르세라의 힘으로 만든 과수원으로 가득했다.
사람만 피할 수 있다면 거대한 숲은 숨기에 나쁘지 않았다.
다만 버려진 민가나 동굴 같은 은신처는 하나도 없었다.
숨을 곳을 찾아보던 라카인도 어쩔 수 없었는지 그녀를 과수원 안으로 이끌었다.
말이 과수원이지 규모로 따지면 숲과 맞먹었다.
‘사람만 안 마주치면 괜찮겠는걸.’
과수원으로 들어서자 유자 냄새가 코를 찔렀다. 특유의 쏘는 향기가 어지럽게 바닥에 널러져 있었다.
나무에 매달린 열매는 채 익기도 전에 무게에 못 이겨 떨어졌다.
바쁘게 달려온 두 사람의 지친 몸으로 취기처럼 향이 스며들었다.
‘꿈을 꾸는 것 같아.’
계속 이어지는 낯선 풍경도, 다른 누구도 아닌 라카인과 함께 있다는 사실도 평소와는 지나치게 달라서 현실 같지가 않았다.
천진난만하게 떨어진 열매를 밟는 말들에게서 땀과 짐승의 냄새 대신 상큼한 유자 향이 풍겨서 더 이상했다.
꼭 오래된 노래 가사 속으로 들어온 것 같다.
달 속으로 도망쳐 마차를 끄는 요정과 괴물의 이야기들로 가득한…….
“저기 봐요.”
투이나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라카인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자 나뭇가지에 길게 걸린 색색의 끈이 보였다.
“너무 큰 과수원에선 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표시해 둔다고 했어요. 저것만 피하면 되겠네요.”
“알겠습니다.”
기준을 얻자 라카인은 쉽게 길을 찾아냈다.
그동안 투이나는 라카인이 사 온 식량에서 옥수수 한 줌을 꺼내 말들에게 나눠 먹였다.
곧 더 이상 나무에 묶인 끈이 눈에 띄지 않는 장소가 나타났다.
잠깐 투이나를 세운 라카인이 마지막까지 위험을 확인한 뒤에야 앉아도 좋다는 표시를 했다.
“오늘 밤은 여기서 지내겠습니다.”
라카인이 고삐를 넘겨받았다.
그는 곧 주변에서 실개천도 찾아내 말들에게 물을 먹이고 식사 준비도 하기 시작했다.
라카인은 유능했지만, 투이나가 뭐라도 하려고 들면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이 일을 가져가려 드는 게 유일한 흠이었다.
“제가 할게요! 그렇게까지 혼자 다 할 필요 없다니까요.”
“루가 님께 당연히 해 드려야 하는 일입니다.”
“투이나.”
여전히 호칭을 고집하는 그에게 투이나가 똑같이 단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름을 다시 불러 보라는 듯 그녀가 콕콕 스스로를 가리켰다.
정지해있던 라카인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 중에 이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듯 머뭇거렸다.
“투……이나…… 님.”
“그럼 저도 라카인 님이네요.”
라카인의 어깨가 파드득 떨렸다.
이 정도면 거의 자연재해급 반응이다. 독을 먹었을 때도 저렇게 떨지는 않았으니까.
라카인이 표정을 감추려는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름은 정말 필요할 때 제대로 부르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 호칭은 참아 달라는 부탁이다.
“으음, 좋아요.”
“……예.”
라카인은 십년감수한 것처럼 요리에 집중했다.
그 모습을 보니 투이나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르파에는 왕만 있나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단순히 왕과 백성으로 나뉘는 것 같지가 않아서요.”
라카인이 천천히 대답했다.
“왕을 모시는 방법에 따라 주군을 섬기는 자와 따르는 자로 나뉩니다. 따르는 자들은 폐하라는 호칭을 쓰며 섬기는 자는 주군이라는 호칭을 씁니다.”
라카인이 샨을 부를 때 쓰는 표현이 주군이었다.
“제게도 주군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나요?”
“그렇습니다.”
“왕에게만 쓰는 표현이라면서요.”
“루가 님 또한 제게 주군이십니다.”
“라카인도 같은 말을 하네요.”
투이나는 약간 염증이 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왕이라고.”
내색하지 않았지만 라카인은 크게 당혹했다.
지금까지 그녀를 왕처럼 섬기는 게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작 투이나는 한쪽 볼을 푸욱 눌러가면서까지 생각에 잠겨 버렸다. 마치 이제 막 도서관에 들어간 학생 같은 자세였다.
“다들 그래서 도망 나온 거예요.”
“……예?”
“듣다 보면 이미 결정된 일 같아서요. 왕이 되라는 사람들 말고 다른 쪽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무심결에 중얼거린 투이나가 서둘러 강조했다.
“아, 물론 제 고민보다 라카인을 구하는 게 먼저죠! 당연히.”
투이나가 잊어 달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그러지 않아도 라카인은 서운하지 않았다.
자신이 우선이 아니어도 좋다. 잊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찰 만큼 좋았다.
“저는 루가 님의 뜻이 어떠하든 언제나 따를 것입니다.”
투이나는 빤히 라카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혹시나 잘못된 말을 했나 싶어 초조해졌다.
다행히 투이나는 그냥 입꼬리를 슥 올렸다.
라카인은 안도했다.
투이나의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만.
“벌써 루가라는 말을 두 번이나 썼네요. 벌칙으로 자기 전에 제 이름만 부르는 걸 꼭 들어야겠어요.”
그날 밤, 다행히 피곤했던 투이나가 식사를 하자마자 정신없이 잠들어 버렸기에 라카인은 그 곤혹스러운 일을 감당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라카인이 잠들지 못한 건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깐 그를 스쳐갔던 향수가 이제는 성큼 발치까지 다가와 있었다.
라카인은 조심스럽게 웅크려 잠든 투이나의 옆에 앉았다.
“…….”
차마 손을 댈 엄두조차 나지 않아 라카인은 그녀를 볼 수 있는 자리에 만족했다.
사실 여기도 지나치게 가까운 것 같았다.
‘그래도 여기라면 바람이 들 때 제가 막아 드릴 수 있습니다.’
여름이라도 바람은 부니까.
무릎 한쪽을 세워 앉은 라카인이 찌르르 우는 벌레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처음으로 누군가가 다가올 때 소리가 끊기는 걸 확인하려는 목적 때문이 아니라 그 소리 자체가 마음에 닿은 것 같았다.
그녀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어떤 감각으로든 기억에 남겨 두고 싶었다.
예민한 청각에 잡히는 작은 숨소리가 이렇게나 소중할 줄 누가 알았을까.
“안녕히 주무십시오.”
잠들어있던 투이나가 으음, 하고 잠결에 작은 소리를 냈다.
처음으로 라카인의 입가에서 경직이 풀리고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옅게 스민 어색함마저 여운처럼 느껴질 만큼.
라카인도 나무에 등을 기댔다.
긴장을 늦추지 않았는데도 평생 이렇게 편안한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추격자는 아침까지 따라왔다.
“벌써요?”
아직 잠이 덜 깬 투이나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으으, 추워라…….’
새벽에 깬 데다 이슬로 몸까지 축축해서 한기가 돌았다.
라카인이 어깨에 천을 둘러 주었다.
“체온이 돌아오실 때까진 천천히 움직이겠습니다.”
아직 그녀의 눈으로는 추격자가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는데 라카인은 꽤 서둘렀다.
투이나를 말에 올려놓자마자 그가 출발했다.
걷는 건 아주 잠깐이었다.
과수원을 나서자마자 그들은 다시 전속력으로 달려야 했다.
추격자들이 잠도 안 자고 그들을 쫓아왔는지 벌써 보일 정도로 거리가 좁혀져 있었다.
몇 번 활을 쏘아 보던 추격자들은 이 거리에선 맞힐 수 없다고 확신했는지 다시 무기를 집어넣었다.
불행하게도 속도는 높아졌지만.
“누굴까요? 저 사람들.”
어제보다 안정적인 자세로 투이나가 물었다.
“신전에서 온 사람들 같지 않아요.”
라카인의 입 속에서 크로퍼드라는 말이 간질거렸으나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마치 투이나의 연인을 음해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는 확실해질 때까지 말을 아끼기로 했다.
“……그들이 따라잡으면 신전으로 돌아가게 되실 겁니다.”
투이나는 긍엄한 라카인의 옆모습을 넘겨다보았다.
‘라카인은 가끔 무슨 생각인지 들여다보고 싶어져.’
시드룬처럼 표정이 없었다면 궁금하지도 않았을 텐데.
참고 가리는 속에는 무엇이 숨겨져 있을지 궁금했다.
특별한 순간에만 아주 약간씩만 내비쳐서 더욱 그랬다.
여러 번 따돌리는 과정을 거친 후에야 두 사람은 산을 내려왔다.
투이나는 익숙한 세피룬 강의 모습에 환성을 지를 뻔했다.
“얼른 배편을 알아봐요!”
“주변에 다른 마을이 없습니다. 추격자들도 이곳을 알아차릴 겁니다.”
“오늘 당장 출발하는 배가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요? 우린 어디로 갈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떠나기만 한다면 괜찮다.
“알겠습니다.”
여러 배가 정박한 강가엔 짐을 싣느라 모두가 정신이 없어 섞여들기 편했다.
“이쪽으로 옮겨!”
“이거 수량 센 놈 누구야!”
한창 수확 철인지 과일이 그득 담긴 상자가 이쪽저쪽으로 날라졌다.
투이나와 라카인이 눈에 띄는 건 같이 따라온 말이 길로 불쑥 올라왔을 때뿐이었다.
“아이씨, 누가 이렇게 길을 막아?”
“거 복잡한데 말 좀 맡기고 돌아다니쇼!”
수레와 사람이 한데 엉킨 길은 그냥 걷기도 어려웠다. 심지어 라카인은 망고가 쌓인 상자에 머리를 부딪칠 뻔했다.
“어이쿠, 미안합니다.”
“…….”
라카인이 말없이 몸을 비켰다.
때마침 상인이 걸린 김에 투이나가 배에 대해 물었다.
“오늘 출발하는 배가 있나요?”
어디 다쳤나 살피던 망고 상인이 그녀를 보고 흠칫했다.
“……있지요. 가서 아무 선장이나 잡고 물어보세요.”
“선장은 어떻게 알아보죠?”
“모자를 쓴 사람들을 잘 보세요. 눈살을 찌푸리고 시력이 나빠 보이면 정확할 겁니다.”
“고맙습니다.”
“저기, 아가씨, 역병에 걸렸으면 배에 안 태워 줄 텐데. 먼저 아르힘에 들려보는 건 어때요? 멀지 않은데.”
“괜찮아요. 역병이 아닌걸요.”
“그럼 피부병?”
“그만 가시지요.”
라카인이 과하게 호기심을 드러내는 상인을 차단했다.
망고 상인이 멋쩍게 물러났다.
“라카인이 볼 때는 누가 선장 같아요?”
“저자 같습니다.”
“저 사람은 대머리잖아요.”
“……모자가 옆에 걸려 있습니다.”
“아아! 그럼 확인해 볼까요?”
속닥거린 투이나와 라카인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코를 크게 씰룩거렸다.
“어디서 이렇게 유자 냄새가 나?”
“안녕하세요?”
퉁명스러운 말투에도 투이나가 살갑게 말을 걸었다.
“배를 좀 타고 싶은데, 혹시 오늘 출발하는 선장님 되시나요?”
그가 심술궂게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그 꼴로는 배에 못 타.”
“이건 옮는 병이 아니에요. 정 보기에 불편하면 가리고 다닐게요.”
“그럼 저놈은 어쩌게?”
대머리 선장이 까맣게 썩은 이빨을 드러냈다.
“너 아르파인이지?”
지적받은 라카인이 투이나의 눈짓을 받고 대답했다.
“……그렇다.”
“빌어먹을 자식. 아르파 놈들 전쟁 때문에 대금 못 받은 게 한두 푼 인줄 알아? 다른 놈은 다 태워도 넌 안 돼.”
“돈이라면 드릴게요!”
“딴 데 가서 알아보쇼.”
대머리 선장이 바닥에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오늘 당장 출발하는 건 내 배밖에 없겠지만.”
이 말을 기다렸는지 그가 낄낄거렸다.
라카인은 그를 언제 협박할지 계산해 보았다. 저 으슥한 뒷골목으로 데려가면 삼 분 안에 끝낼 수 있었다.
투이나는 그것보다 더 짧고 깔끔하게 처리했다.
“손해가 얼마나 클까요?”
투이나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하는 얼굴로 보던 선장의 눈이 커졌다.
언제 꺼냈는지 보석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산마을에서 다 환전하지 못했던 물건이다.
투이나가 가볍게 보석을 굴렸다.
“……그것보단 많지.”
대머리 선장의 얼굴이 탐욕으로 물들었다.
“그래도 배 삯으로는 충분하겠죠.”
“네 개는 줘야겠는걸. 괘씸죄랑 위험 수당까지 계산해서 말이야.”
“안 됩니다, 루……. 투이나 님, 뱃삯으로는 너무 과합니다.”
“뭐가 과해? 머리당 하나씩이야.”
욕심이 나는지 선장은 말까지 포함시켜서 손가락질을 했다.
투이나는 그의 제안을 깊이 고려하는 척 보석을 쥐었다.
“그럼 확실히 배에 태워 주는 건가요? 어느 배에?”
“주기만 하면 물론이지. 바로 저거다.”
선장이 그럭저럭 커 보이는 배를 가리켰다.
“어디까지 가는 배죠?”
“아르케데프까지 간다.”
“좋아요.”
투이나가 선뜻 말했다.
“계산은 탈 때 할게요.”
“그래도 선수금은 줘야지!”
투이나가 보석을 가져가고 대신 동전 몇 개를 선장에게 내밀었다.
선장이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받아 챙겼다.
“두 시간 있다가 떠날 거야. 지금 타지?”
“그때까진 따로 볼일이 있어서요. 이따가 봐요.”
선장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라카인은 투이나의 행동이니 군말 없이 따라 나왔지만 꽤 선장을 조지고 싶은 모양이다.
“비싼 값이죠?”
“……예.”
“협박을 해서 탈 수는 없었어요.”
선장을 땅에서 꺾어 봤자 군대와 함께 타지 않는 이상 배에 타면 다시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선장을 따르는 다른 선원들이 있었으니까.
‘혹시라도 라카인이 무력으로 해결할까 봐 선수를 쳤는데, 표정을 보니까 그러길 잘한 것 같네.’
라카인은 여전히 주먹 쪽에 미련이 남아 보였다.
“보석이 더 있다는 걸 알면 배에서도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아, 안 그래도 그 부분은 따로 생각해 둔 게 있어요.”
투이나가 그를 안심시켰다.
“그때가 되면 알려 줄게요.”
“투이나 님이 안전하신 방법입니까?”
“라카인까지 안전할 방법이에요.”
투이나가 강조했다.
그러자 라카인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우린 이제 말을 처리하러 가요. 데려가고 싶지만, 말들에게 배 위가 편하진 않겠죠?”
말의 귀가 말귀를 알아들은 것처럼 푸르르 떨렸다.
* * *
투이나와 라카인을 쫓던 추격자들은 예상대로 금방 강가로 내려왔다.
마을을 발견한 그들은 곧장 수색에 나섰다.
드나드는 인원이 많긴 했지만 목표가 어려운 만큼 탐문이 쉬웠다.
“아르파 남자랑 머리를 가리고 다니는 여자 하나?”
“글쎄. 긴가민가한데.”
“아르파 사람은 본 것 같기도 해.”
추격자들은 라카인을 중심으로 찾기로 했다.
일단 그가 더 눈에 띄기도 했고, 설마 투이나가 마을로 들어왔는데도 병을 숨기지 않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추격꾼들은 더러운 몰골로 돈을 구걸하는 자들을 무시했다.
그러느라 거지들과 함께 있는 투이나의 얼룩을 보고도 그저 먼지라고만 생각해 버렸다.
“이따가 강가에 나와 줄래?”
투이나가 눈만 댕그라니 큰 아이의 손을 붙잡고 속삭였다.
“약속하자.”
두 사람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추격자들은 그들을 지나쳐 아르파인을 보았다는 장소로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아르파인이 작은 창고를 빌렸다는 이야기를 확인한 그들은 아르파인처럼 보이는 남자가 말 두 마리를 끌고 들어가는 걸 보았다.
이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다.
추격자들이 소리 없이 신호해 창고를 에워쌌다.
“셋에 들어간다.”
하나, 둘…….
쾅!
문짝이 박살 나며 그들이 안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안에는 말 두 마리만 있을 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뭐야?”
“루가 님은 어디 계셔?”
“제대로 찾아봐!”
두리번거리던 추격자들이 곧 말 안장위에 놓인 쪽지를 발견했다.
[때가 되어 반납합니다. 이 말은 신전의 재산이니 돌려놓아 주세요. 곧 돌아갈게요.]
“젠장!”
그들이 욕설을 뇌까렸다.
지붕으로 올라가 있던 라카인은 그들이 실패에 좌절할 동안 소리 없이 땅으로 내려왔다.
* * *
“잘 해결됐어요?”
“예.”
“좋아요!”
투이나가 활짝 웃었다.
그녀와 놀고 있던 아이가 라카인을 보고 후다닥 도망갔다.
“무슨 얘기를 하고 계시던 중이셨습니까?”
“배웅을 부탁했어요. 그러면 좋을 것 같아서.”
투이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 타러 갈까요.”
대머리 선장은 혹시 그들이 나타나지 않을까 봐 아예 입구에 진을 치고 있었다.
‘저렇게까지 보석이 좋을까.’
약속대로 두 사람이 나타나자 선장이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인사 대신 그가 양 손을 내밀었다.
“뱃삯.”
“자요.”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왜 두 개뿐이야?”
“헉, 저희 머리가 늘어났나요?”
투이나가 과장스럽게 놀란 척했다.
그제야 그들에게 머리당 한 개씩 어쩌고 한 소리가 기억난 선장의 표정이 불퉁해졌다.
“제에기, 말은 왜 안 데려왔어.”
“필요 없어져서요.”
네 개를 생각하고 있다가 반으로 줄어들자 그는 노골적으로 투덜거렸다.
그래도 두 사람이 배에 타는 걸 말리지는 않았다.
라카인은 긴장했다.
처음 짐작대로 일단 배에 태운 다음 방심했을 때 죽이지 않을까.
투이나가 사람을 믿었기에 자신도 받아들여진 셈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라카인은 다른 사람까지 쉽게 믿을 수는 없었다.
그때 배 위에 올라간 투이나가 갑자기 난간으로 바짝 다가갔다.
“선장님?”
“왜.”
“제 전 재산이에요.”
투이나가 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선장이 ‘설마 나 주려고?’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투이나가 주머니를 열어 보석을 확인시켜 주자 그 눈은 더욱 반짝였다.
‘이 정도면 됐겠지.’
선장이 다가오는 걸 본 투이나가 주머니를 힘껏 배 밖으로 집어던졌다.
“어!”
“뭐 하는 짓이야!”
퐁당!
가볍게 빠지는 소리에 선장이 기함했다. 그가 당장이라도 뛰어들 듯이 달려갔지만 한 발 늦었다.
투이나가 미리 부탁했던 대로 강가에 나와 있던 아이들이 우와아! 하고 먼저 입수했기 때문이다.
자맥질을 하던 아이들의 머리가 강에서 사금을 찾듯이 저마다 빛나는 금속 하나씩을 들고 쑥 올라왔다.
해맑게 빛나는 아이들의 얼굴을 본 선장의 얼굴이 들쭉날쭉해졌다.
투이나가 유쾌하게 말을 건넸다.
“선장님 돈도 아닌데, 아까운 건 아니시죠?”
“아니, 주기 싫으면 말지 저걸 왜 그냥 내버려!”
“저러면 줍는 사람이 임자잖아요.”
선장이 해괴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선장님도 이 일을 도와준 셈이니 그냥 착한 일 했다 생각하고 잊어버리세요.”
투이나는 기꺼이 그럴 준비가 되었다는 듯 살짝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선장이 그녀를 왠지 억울하게 이상한 사람 취급하기 시작했지만 배는 순조롭게 출발했다.
라카인은 비로소 투이나의 의도를 이해했다.
“목표가 없으면 위험도 없군요.”
“편하죠?”
난간에 팔을 괸 투이나가 활짝 웃었다.
강바람은 시원했다.
어쨌든 뱃삯을 과하게 받아 챙겼으므로 선장도 더 욕심을 부리진 못했다.
미묘하게 잘해 줘서 문제였지만.
“방이 하나입니까?”
“뭐야. 신경 써 줬더니.”
기껏 선심을 썼던 선장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여기가 여관인 줄 알아? 방이 넘쳐나게. 거길 쓰기 싫으면 다른 놈들이랑 같이 갑판에서 자든가. 자리 많아.”
라카인은 퀴퀴한 냄새를 풍기며 한데 뒤엉켜 자는 이들을 보고는 이마를 쓸어내리며 포기했다.
처음에 라카인은 투이나와 한방을 써야 한다는 사실에 무척 안절부절못했다.
다행히 그 문제는 금방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다.
알고 보니 라카인은 뱃멀미를 몹시 심하게 했던 것이다.
“……욱.”
라카인이 입을 틀어막았다.
얼굴이 완전히 사색이 되어 있었다.
“괜찮아요?”
투이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땀에 젖은 라카인의 뺨을 쓸어 주었다. 창백하게 질린 게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물이라도 가져다줄까요?”
“괜……찮습니다…….”
라카인은 쥐구멍에라도 기어 들어가고 싶었다.
보호해도 모자랄 투이나에게 이런 사소한 일로 간병을 받고 있으니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호수에서 탈 때는 괜찮았는데. 그건 작은 배라서 그랬나.”
“모르겠……습니다.”
“쉬어요. 대답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라카인이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술을 떼었지만 배가 크게 흔들리자 포기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누우면 멀미가 더 심하다고 고집을 부려 웅크려 앉아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방이 좁아서 사양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설득할 수도 없고.’
투이나는 걱정스레 라카인을 바라보았다.
다른 원인으로 다쳤을 때도 그가 이렇게 긴장이 풀린 적이 없었는데, 겪어 본 적 없는 일이라 유독 취약한 것 같았다.
평소처럼 엄격한 자세가 아닌 라카인에게서 느슨하게 풀린 숨결이 색색 새어나왔다.
혼자 두어야 할 것 같아 투이나가 살그머니 뒷걸음질을 하자 어떻게 알았는지 라카인이 금세 눈을 떴다.
“가십니까?”
“멀미에 좋은 약초가 있나 물어볼게요.”
“…….”
라카인은 이 울렁거리는 속이 마음 때문인지 배 때문인지 헷갈렸다.
그냥 옆에 있어 달라고 하고 싶은데.
말을 꺼내면 그녀에게 보이는 꼴이 지금보다 더 부끄러워질 것 같아서 참았다.
“……다녀오십시오.”
삐걱.
투이나가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라카인은 한숨을 삼키며 몸을 장악한 멀미를 쫓아 보내려고 애썼다.
투이나는 선장을 찾아가 보았다.
“바다도 아닌데 무슨 멀미를 한다고 그래? 지금처럼 잔잔하게 가는 배가 어디 있다고.”
“원래 땅에서만 살던 사람이라서요. 말은 잘 타는데, 이상하죠?”
“뭐, 가끔 그런 인간이 있다고는 들었지.”
대머리 선장이 질겅질겅 잎담배를 씹었다.
“멀미에는 생강이 좋다고들 하는데, 그렇게 비싼 건 내 배에 없고. 무라도 좀 살래?”
“저 돈 없잖아요.”
“진짜로 숨겨 놓은 것도 없어?”
투이나는 주머니까지 뒤집어 가며 고개를 도리질했다.
선장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쳇, 인심 썼다. 내려가서 남는 무 꽁다리나 좀 달라고 해서 입에 물려 봐. 통째로 다 받을 생각은 말고.”
“감사해요.”
선장은 됐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투이나가 부엌으로 내려가자 그녀를 처음 본 선원들이 깜짝 놀랐다.
다행히 심각한 병이었으면 배에 오르지도 못했을 거란 말에 쉽게 넘어갔다.
“피부는 어쩌다 그리된 거요?”
“마법사라도 만났소?”
“태어날 때부터 이랬어요. 멀미에 좋은 것 좀 없나요?”
“글쎄. 그건 약이 없는 거라.”
“그냥 최대한 다른 데 집중하도록 도와주는 게 좋소. 노래라도 불러 주시오.”
“놀리는 거 같지 않을까요?”
“왜? 예쁜 애인이 아프다고 노래해 주면 좋아서 날아갈걸.”
선원들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이젠 온갖 오해에 달관한 투이나가 그저 어깨만 으쓱였다.
“어쨌든 조언은 생각해 볼게요.”
“아, 잠깐. 그래도 챙겨 줄 수 있는 건 좀 챙겨 주자고.”
선원 하나가 선반을 뒤졌다.
“조금만 더 가면 아르세라를 벗어나게 될 거라 날씨가 금방 험악해질 거야. 전쟁 때문에 수호신이 없는 구역이 더 늘어났거든.”
“선장님 말로는 폭풍우가 칠 수도 있다던데. 가서 불쌍한 아가씨 애인한테 미리 기절해 놓는 게 좋을 거라고 해 둬.”
“그건 큰일이네요.”
투이나는 걱정과 함께 돌아왔다.
‘지금도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라카인은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힘겨워 보여서 투이나는 챙겨 온 물건들을 한쪽에 치워 놓고 옆에 앉았다.
‘걱정이야. 벌써 이렇게 체력을 빼 놓으면 내린 다음에 힘들 텐데.’
아직 라카인이 정착할 나라를 정하거나 둘러보지도 못했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물어보지도 못했다.
‘적어도 바다까지만 갈 수 있다면 목적 하나는 달성한 기분이 들 텐데.’
투이나는 바닥에 얌전히 늘어진 라카인의 양 손바닥에 감긴 붕대를 보았다.
‘저 상처, 꽤 오래가네.’
일어나면 확인해 보자고 다짐한 투이나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식은 몸이 차가웠다.
조금이나마 온기가 전해지면 좋겠는데.
그러다 깜박 잠들고 말았다.
쿠루릉!
“으아?”
잠에 취한 투이나가 옆으로 데굴 굴렀다.
‘뭐, 뭐야?’
뭔가 무거운 게 그녀를 누르고 있었다.
벽이라도 무너졌나 싶어 확인하는데 그 단단한 벽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라카인! 깼어요?”
라카인이 거의 다 죽어 가는 얼굴로 한쪽 벽을 짚고 있었다.
그가 힘겹게 투이나의 위를 보호하듯 몸을 덮었다.
“배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뭐가 떨어질지도 모르니 거기 계십시오.”
“아, 아까 폭풍우가 칠지도 모른다고…….”
투이나가 중얼거리기 무섭게 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거세게 흔들렸다.
라카인은 차라리 기절하고 싶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투이나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했다.
‘아니, 저 정도면 그냥 쓰러져도 괜찮은데…….’
투이나가 그를 도와주려고 애썼다.
“괜찮아요, 라카인! 여기 위험할 게 뭐가 있겠어요?”
“주군을 보호해야 합니다.”
위급한 순간이 되자 다시 그 호칭이 튀어나왔다.
투이나는 완강하게 입을 다문 라카인을 보고는 방법을 바꿨다.
“다른 생각을 하면 멀미가 괜찮아진대요.”
투이나가 필사적으로 이야기를 지속했다.
‘정말 노래라도 해야 하나? 노래 생각은 하나도 안 나는데!’
여유롭게 가사를 떠올릴 상황이 아니었다.
배가 어찌나 심하게 흔들렸는지 바닥과 천장이 수평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우와, 이건 정말……. 나까지 멀미가 나겠어.’
세상이 부서지기라도 할 것처럼 우지직, 꽈득, 하는 소리가 온 배에 울려 퍼졌다.
상황을 수습하려고 갑판을 달리는 뱃소리마저 쿵쿵거리며 그들의 머리 위를 두드려댔다.
그 모든 소리를 그녀보다 예민하게 흡수하면서도 라카인은 굳건한 지지대가 되려고 애썼다.
근육이 필사적으로 도드라지는 모습이 보기 안타까울 정도였다.
‘아니야. 안 돼.’
누구도 저렇게까지 자신을 포기하면 안 된다.
정신없이 생각하던 투이나가 또 한번 라카인과 함께 왼쪽으로 흔들렸다.
‘그냥 아무 말이라도 해! 라카인이 집중할 수 있는 말이면 뭐든 좋으니까!’
“라카인, 있잖아요.”
투이나가 차가운 라카인의 뺨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혼란과 고통 속에서 방황하던 그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
갈구하듯이.
“저 사실 죽은 적이 있어요.”
쾅!
그리고 세상이 뒤집혔다.
“와악!”
투이나가 또 한번 균형을 잃었다.
이번에는 반대쪽이었다.
라카인마저 버티지 못하고 바닥으로 쓰러지고 투이나는 문 쪽으로 튕겨나갔다.
아니, 하마터면 그럴 뻔했다는 뜻이다.
간신히 투이나가 벽에 머리를 박기 전에 붙잡은 라카인이 꽉 그녀를 끌어당겼다.
‘휴우, 살았다.’
간헐적으로 떨리던 배의 진동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투이나는 격하게 쿵쾅거리는 라카인의 가슴에 상체를 꽉 붙이고 진동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세상을 심판하듯 쩌렁쩌렁하게 울리던 소음이 차차 가라앉았는데도 그녀 밑에서 느껴지는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라카인?”
걱정이 된 투이나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지금 배 말고 당신이 떨고 있는 거 맞…….”
말을 이어 나가려던 투이나는 입술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표정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라카인은 지금까지 지켜오던 절제를 무너트려 버렸다.
스스로가 얼마나 간절히 투이나의 생명을 바라고 있었는지 이때까지는 그 자신조차 알지 못했다.
이때까지는.
‘아, 큰일이다.’
머릿속에 어느 때보다도 위험하다는 경보가 울렸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소리였다.
이건 혼란 속에서 실수로 내뱉은 말이 진실이라서가 아니었다.
흐트러진 채로 쓰러진 라카인의 모습이 이상하게 찌르르 마음을 울렸던 것이다.
‘어떡해.’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진 투이나가 얼굴을 붉혔다. 하필 지금은 표정을 가려 줄 분칠도 없는데.
‘왜 부끄럽지?’
베인을 만났을 때도 이렇게까지 이상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허둥지둥하는 투이나를 본 라카인은 한 점의 의심도 없이 불안해했다.
“제발 설명해 주십시오!”
“아, 알겠어요. 잠시만…….”
투이나가 얼굴을 감추려고 애쓰면서 평정심을 되찾았다.
하지만 하필이면 넘어지면서 땀에 젖은 라카인의 머리카락이 뒤로 넘어가는 바람에 그토록 잘생긴 얼굴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런 얼굴로 바라보지 말아요!’
라카인은 영문도 모르고 주춤했다.
생각해 보니 지금 그녀는 그를 깔고 앉아 있기도 했다.
투이나는 잠시 생각을 잊어버리기로 했다.
“어쨌든 지금은 살아 있잖아요?”
“루가 님.”
차마 큰 소리를 낼 수 없었던 라카인이 나지막하게 그녀를 불렀다.
그게 더 찔렸다.
“허언을 하실 분이 아니시잖습니까.”
“으으음……. 이렇게 얘기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가능하다면 호위들과 둘러앉아 별일 아니라는 듯이 얘기하고 싶었다. 구혼도 결혼도 다 끝난 다음에.
‘하긴 그때엔 라카인이 없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아쉬워졌다.
미리 얘기한다는 느낌으로 투이나가 살짝 운을 떼었다.
“제가 미래에서 왔다면 믿으시겠어요?”
라카인의 눈이 조금 커졌다.
“믿습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목소리였다.
투이나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저는 살해당한 다음에 되살아났어요. 시간을 거슬러 다시 이곳으로요.”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라카인은 침착한 얼굴로 투이나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중간에 물어보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바깥에서 폭풍우가 치는 동안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도록 가끔씩 몸을 붙잡아 줄 때를 빼고는 얌전했다.
그럴 때마다 투이나는 약간 숨을 고르고 다음 이야기를 정리했다.
이상하게도 일단 얘기를 시작하자 중심을 잡기가 훨씬 쉬웠다.
“……그래서 지금은 여기에 있답니다.”
투이나가 말을 맺었다.
라카인은 한참 동안 조용하더니 딱 한 가지를 물었다.
“누가 죽였는지는 아직도 모르십니까.”
“네. 아르힘 님은 이제 알아도 별 소용은 없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궁금은 하네요.”
투이나가 삐걱거리는 뱃소리를 들으며 답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무수한 감정이 피어올랐다가 저물었지만 라카인은 결국 한 문장으로 정리해 버렸다.
“……살아 오셔서 기쁩니다.”
투이나가 빙긋 웃었다.
“살아나서 하는 얘기지만, 죽는 것도 나쁘진 않았어요. 신께서 거둬 주셨잖아요.”
내내 잠잠하던 라카인의 속에서 무언가 울컥했다.
말간 투이나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번쩍였다가 가라앉았다.
흔들리는 등불 탓이다.
그 때문에 라카인은 투이나가 금방이라도 자신을 두고 가 버릴 것 같은 거리감을 느끼고 말았다.
어둠 저편으로.
허나 사람은 죽음을 기꺼워해서는 안 된다.
불쑥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불현듯 라카인은 소스라쳤다.
쉽게 죽는 것이야 말로 그들의 신이 가르친 말이 아니던가.
신의 곁을 얼마나 멀리 떠나왔지?
잠깐 사이에 이제 그의 뜻을 거부할 수도 있게 되었나?
라카인의 얼굴이 심각해 보이자 투이나가 가까이 다가왔다.
“왜 그래요?”
“언제나 죽음은 당연한 것이라 배웠습니다.”
라카인이 한 마디씩 신중하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루가 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처음으로 두려워졌습니다.”
그녀의 죽음은 무섭다.
라카인은 절박한 심정으로 솔직해졌다.
누군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단순한 사실이 이토록 컸던가.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아르파인들이 쉽게 목숨으로 대가를 갚으려 하는 것은 그것이 그들이 아는 가장 큰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목숨을 잃는 걸 누구보다도 두려워하기에 신이 대가로 원한 것이다.
아르파는 복수의 신이다.
“두렵지 않으십니까?”
또 누군가가 당신을 죽이고 살해할 지도 모르는데.
심지어 눈앞에 있는 자신조차 그렇게 하였는데.
투이나는 새삼스레 묻는 그를 탓하지 않았다.
“무섭죠.”
그러나 아르파와 아르힘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여러분을 잃어버리는 게 무서워요.”
그에 비하면 죽음은 다정한 동반자였다.
라카인은 쿠웅,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더 이상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게 되면 세상을 떠난다.
투이나를 살리고 싶다면 그녀의 사랑은 지켜져야만 한다.
죽음이 이미 그녀의 곁에 와 버렸으므로, 미련을 놓으면 신의 곁으로 가버릴 것이다.
그러니 그녀를 지키려면 그는 영원히 연인으로서 사랑받을 각오는 포기해야만 했다.
그 자리는 끝났다.
‘아.’
깨달음과 함께 찾아온 고통이 비로소 정신을 맑게 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군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듯, 사제가 신을 사랑하듯 사랑하면서도…… 사실은 그 무엇보다 개인적인 욕망을 그득 채우고 싶어 하면서.’
어떻게 지금까지 투이나의 앞에서 떳떳이 고개를 들 수 있었을까.
이렇게 사랑하는데.
라카인은 너무도 흉측한 마음에 부끄러워졌다.
감히, 감히…….
투이나가 그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제 멀미 안 하네요?”
다정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라카인은 세 번째로 감히, 하고 되뇌면서도 그녀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이제 다시는 어지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 제 얘기가 효과 있었어요?”
투이나가 마냥 즐거워했다.
“좋은 얘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멀미가 가라앉았다면 다음부터 배에 탈 때마다 해 줘야겠네요.”
라카인은 그 말에 그저 뱃속이 아리기만 했다.
다행히 죽었다 살아난 뒤에도 투이나는 여전히 사람들을 사랑했다.
그거면…… 충분했다.
“이봐!”
벌컥.
갑자기 문이 열렸다.
깜짝 놀란 두 사람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깨어 있었으면 진작 나와서 물 좀 퍼내! 젠장, 다 떠내려가겠네!”
불쑥 나타나 분통을 터트리는 건 대머리 선장이었다.
쫄딱 젖은 그의 모습에 투이나가 푸흡 웃음을 터트렸다.
“도와드릴게요!”
잠자코 그녀를 따라 나오는 라카인의 분위기가 이상했는지 선장이 그를 흘긋거렸다.
표정에서 오지랖과 귀찮음이 번갈아 나타나던 선장은 결국 폭풍우가 더 급하다고 판단했다.
“빨리 나와!”
배 위에서 시키는 대로 투이나와 라카인은 열심히 지시에 따랐다.
다행히 배는 폭풍우에 침몰하는 일 없이 지나갔다.
“휴우…….”
완전히 지친 선원들이 하나둘 늘어졌다. 투이나도 녹초가 되어 물을 퍼내던 양동이에 머리를 기댔다.
“수호신이 없는 땅은 다 이런가요?”
투이나가 깍지를 끼고 물었다.
“계절마다 지랄 맞지.”
여전히 두툼하고 큰 비구름이 짙은 회색으로 떠다니고 있었다.
그녀가 팔뚝에 난 얼룩을 문지르면서 다시 물었다.
“아르케데프까지는 며칠이나 걸릴까요?”
“보름만 더 기다려.”
* * *
그래서 두 사람은 보름 뒤에 아르케데프에서 내렸다.
주변에 산이 하나도 없이 평원만 가득한 게 신기했다.
“여기선 바다가 정말 가깝대요.”
두 사람은 화물을 내리는 걸 도와주고 선장에게 몇 가지 정보를 얻어 들었다.
아르케데프를 지날 때는 길에 위쪽이 접시처럼 생긴 솟대가 있는데,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돌을 하나씩 꼭 던져야 한다.
그 규칙만 지킨다면 수호신 케데프를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어떤 것 같아요?”
시끌시끌한 사람들 속에서 투이나가 물었다.
라카인은 바위 위에 선 사람처럼 어색해 보였다.
“무엇을 물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사는 거요.”
라카인이 무심코 가슴팍을 매만졌다.
사실 투이나가 배에서 전 재산을 던져 버렸을 때, 엄밀히 말하자면 모든 보석을 내던진 건 아니었다.
그녀는 배에 타기 전에 남은 보석을 반으로 갈라 라카인과 각각 나누어 가졌다.
“이건 이제 더 이상 제 물건이 아니라 라카인 정착금이 될 거예요.”
사양하는 라카인에게 그녀는 강권했다.
보석들은 모두 샨에게서 받은 물건이니, 그가 주는 보상금이라고 생각하라면서.
‘보상금이라…….’
원치도 않는 일을 겪었을 때 주는 돈.
그건 역시 투이나가 자신이 왕의 명령에 따라 그녀를 죽이려 한 걸 안다는 뜻이다.
“…….”
라카인이 주변을 구경하는 투이나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녀를 떠나지 않고 함께 있다고 싶다고 해도, 언젠가 샨의 존재가 자신을 다시 지배할 것이다.
그러니 떠나는 게 옳겠지.
가슴에 든 주머니가 묵직해졌다.
라카인은 고민을 잊으려 일부러 바깥쪽에 집중했다. 덕분에 그의 귀에 우연찮게 목소리가 잡혔다.
“여자 쪽은 안 돼?”
거의 본능적인 감각으로 라카인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랬다면 대화를 듣고 있다는 걸 들켰을 것이다.
낮게 속닥거리는 목소리였지만 이렇게 시끄러운 곳에서는 오히려 귀에 잘 들어왔다.
“그냥 보내기엔 아까운데.”
“피부병이 심하잖아.”
“아냐. 그래도 얼굴을 봐. 취향이 독특한 인간한테 팔면 꽤 받을걸.”
“그럴 여유 없어. 여기까지 전선이 확대된다는 소문이 있다고.”
“그럼 남자 쪽만?”
“그래.”
라카인은 천천히 감각을 끌어올렸다. 어딜 가나 있는 인간 사냥꾼이었다.
‘숫자가 몇이지?’
무기가 없는 이상 방심할 수 없었다. 여기서 공격당하면 위험해지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등 뒤로 인기척이 따라붙었다.
그의 예상으로는 둘, 수상한 기미가 보이는 자까지 포함하면 넷이다.
라카인은 아무것도 모르고 걸어가는 투이나를 평소와 똑같은 어조로 불렀다.
“저쪽 골목으로 돌아가면 여관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래요?”
투이나가 흔쾌히 대답했다.
먼저 말을 거는 라카인의 태도에 무언가 눈치 챘는지 질문을 던지지도 않았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골목으로 들어가려는 시늉을 하자마자 곧바로 서늘한 기운이 뒤통수를 덮쳐 왔다.
“엇!”
라카인이 가볍게 그를 비껴나가 내뻗은 팔을 붙잡았다.
누가 대체 라카인 같은 체구에게 싸움을 거나 싶었는데, 제법 건장한 자였다.
게다가 골목 입구를 슬금슬금 감싸며 들어오는 자가 넷이었다.
라카인은 일단 붙잡은 자를 바닥에 내리꽂았다.
“끄윽!”
“이게……!”
“아르파인이야. 방심하지 마!”
그들이 짐승을 몰아넣듯이 막대를 휘둘렀다.
지나가던 이들이 곤경에 처한 두 사람을 알아차렸지만 괜히 휘말려들까 봐 멀리 돌아가기 바빴다.
처음부터 도움을 구할 생각이 없던 라카인이 먼저 공격해 들어갔다.
바닥에서 뒹굴던 남자도 다시 일어날 기세였다.
딱 봐도 인질을 노리고 있는 자세였다.
‘하는 수 없지.’
투이나가 살짝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고는 어깨를 걷어찼다.
“끄악!”
‘큰일이네. 난 싸움은 잘 못하는데.’
투이나가 무작정 일어나려는 남자의 등을 깔고 앉았다.
아무리 힘이 좋아도 아무런 예비 동작도 없이 등으로 사람을 들어 올릴 순 없었다.
투이나가 있는 힘껏 뒤통수를 누르자 바닥에 얼굴이 눌린 남자가 버둥거렸다.
“야! 안 내려와?”
“많이 힘들죠? 조금만 참아요.”
투이나는 그가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고 할 때마다 세차게 손등을 꼬집었다.
그 정도 고통만 있으면 참겠는데, 자꾸 몸만 들썩여도 위에서 앉은 자세로 엉덩이에 발길질을 하거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등 자꾸 신경을 거슬리게 해서 문제였다.
“윽! 남의 엉덩이 좀 그만 때려! 악! 일어나기만 하면 넌……!”
“어쩔 셈이지?”
그새 다른 괴한들을 제압한 라카인이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동거리던 남자가 놀라 몸을 굳혔다.
“아, 끝났어요?”
“이제 내려가셔도 됩니다.”
투이나가 슬금슬금 다리를 치웠다.
개구리처럼 눌려 있던 남자가 그제야 고개를 들고 동료를 확인했다. 그들은 사이좋게 기절해 있었다.
“제길, 이렇게 강할 줄이야……!”
“딱 봐도 그래 보이지 않나요?”
투이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져서 물었다.
“왜 우리를 공격한 거죠?”
불리한 상황을 인지했는지 그제야 남자가 말을 아꼈다.
라카인은 굳이 저 입을 열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 했다. 어차피 대화를 다 엿들었으니.
그들이 자신들을 붙잡아 팔아넘기려던 거야 뻔하지 않은가.
그런데 누워 있던 남자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입을 움직였다.
“그거야 이길 자신이 있어서지.”
“네?”
남자가 목에 걸고 있던 수건을 잽싸게 코 위로 끌어올렸다. 목수건 위로 어딘가 익숙한 문양이 떠올랐다.
‘앗, 저건……!’
그가 꽥 소리쳤다.
“기절해라!”
번쩍!
골목 안에 커다란 마법진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