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 (23/43)

23.

‘시들지 않는 허기의 선물입니다.’ 신이 녹색 보석을 받아 들자 대지는 절반이 되었다.

“거기까지다!”

샨이 성마르게 천을 확 걷었다.

거친 몸짓에 손대기도 아까울 만큼 귀한 비단이 찌직 찢어졌다.

물론 그런 걸 신경 쓸 샨이 아니다.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꼴에 그의 미간이 힘차게 찌그러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투이나의 손에 입을 부비고 있던 베인이 일어나는 모습에 불쾌감은 더 강렬해졌다.

이미 시간을 너무 많이 줬다고 후회하고 있던 샨은 굳어 있던 투이나에게 감정을 대신 쏟아내기로 했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투이나를 덥석 안아 올렸다.

“앗……!”

“회담은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샨이 투이나의 정수리에 대고 말했다. 물론 두건에 가려진 투이나의 정수리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이대로 가려고요?”

“그래.”

샨이 심술궂게 중얼거렸다.

이상하게 투이나를 안아 들자 사방으로 날뛰던 뱃속이 기분 좋게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투이나도 평소 같았으면 멋대로 접촉해대는 샨을 밀어냈겠지만, 지금은 베인이 흔들어 놓고 간 정신을 정리하기도 바빴다.

‘차라리 잘됐어.’

샨과 한 약속도 약속이지만, 일단 베인과 떨어져서 왕이 되라는 제안을 고민해 보고 싶었다.

베인은 샨이 다시 나타났을 때부터 표정이 곱지 않았지만, 투이나의 심각한 분위기가 더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루가 님이 불편해 보이십니다.”

“내 거처에서 쉴 것이다.”

샨이 일부러 앞 단어를 강조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비스듬히 안겨 있던 투이나는 의외로 편안해서 약간 놀랐다.

‘상체가 커서 그런가, 의자 같네.’

투이나가 설레기는커녕 의자 취급을 하는 걸 그가 몰랐으니 다행이다.

투이나가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기댔다.

“오늘 있었던 얘기는…… 생각해 볼게요.”

“예, 루가 님!”

베인의 표정이 약간 밝아졌다.

샨이 산통을 깨놓았다.

“물론 나도 고려해 보겠다. 하지만 협상의 기본은 가진 것으로 한다는 걸 기억해야지.”

샨이 과시하듯 투이나를 안은 팔을 가볍게 흔들었다.

베인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어지러워요. 하지 마세요.”

“그대는 내가 뭘 하기만 하면 다 하지 말라는군.”

샨이 투덜거리면서도 투이나의 머리를 당겨 안았다.

베인은 입 안쪽을 짓씹어 부드러운 표정을 유지했다.

“필요한 이야기는 모두 전했습니다. 다음에는 부디 대답을 들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토록 투이나에게 호소한 뒤에도 베인은 담담해 보였다.

‘얼마나 자주 저렇게 행동해야 했을까?’

감정을 숨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투이나는 베인의 능숙함이 안타까웠다.

샨이 투이나의 등을 눌러대기 전까지는 그랬다.

“다시는 이런 식으로 부르지 마라.”

“그럼 다음에는 전령을 통과시켜 주시길.”

베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고는 무덤덤하게 흐트러졌던 앞섶을 비틀었다.

이대로 그들을 내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뼈가 쓰렸다.

베인은 멀어지는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정확히는 샨의 등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투이나에게 그런 막되어먹은 시선을 줄 순 없으니까.

투이나와 샨을 따라서 하인들까지 멀어지는 소리에 레오나가 천막 사이로 슬그머니 나타났다.

“가셨구나?”

“…….”

“흐으응, 루가 님께 제대로 설득이 됐을지 모르겠네.”

“……왜 끼어들었어?”

베인이 눌러 왔던 분노를 드러냈다.

“루가 님에게 설명하는 일은 내 몫이야.”

“약간 위험성을 느껴서 말이지.”

레오나가 한쪽 팔을 베인의 어깨에 걸친 채 슬슬 턱을 쓰다듬었다. 느긋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빛이 한층 냉철해졌다.

“이런 얘기 하기 정말 싫지만, 왕이 정말로 루가 님과 사랑에 빠졌을지도 몰라.”

“끔찍한 소리 하지 마.”

“내 감을 무시할 거니? 저자가 너처럼 나라를 포기하고 루가 님을 선택하면 어쩔래?”

베인은 집요하게 물어대는 누이가 귀찮다는 기색으로 쫓아냈다.

“만약에라도 그런 일은 없어.”

“어허, 아우여, 만약이나 설마가 사람 잡는 거 몰라?”

“정말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다면…….”

생각하기조차 너무 싫은 나머지 베인의 이성이 상상하려는 감성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죽여야겠지.”

베인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레오나가 빙긋 웃었다.

“네가 그토록 비밀로 감추고 싶어 하던 루가 님의 이야기를 털어놓아 주었으니, 대신 신을 죽일 무기를 찾아다 주마.”

“늦지 마.”

베인이 미동도 없이 대꾸했다.

* * *

샨은 회담장을 나온 뒤에도 계속 투이나를 안고 걸었다.

“내려서 갈래요.”

“싫다.”

생각보다 투이나의 무게나 체온이 들고 가기 적당했다.

“어차피 또 쓰러지면 내가 들고 갈 텐데, 번거롭게 굴지 마라.”

“안 쓰러져요.”

“어지간히 충격 받은 얼굴이어야 그 말을 믿어 주지.”

투이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샨이 무심코 엄지를 가져가 그녀의 입술을 헤쳐 놓았다.

“하지 마라.”

‘이젠 내 입도 마음대로 못 쓰게 하네.’

투이나가 지쳐 생각했다.

“왕이 되라는 이야기가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

“왕이 되면 나와 대등하게 만날 수 있다.”

샨이 그게 대단한 장점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잠깐 어이가 없어진 투이나가 눈을 굴렸다.

“글쎄요. 지금은 대등하지 않나요?”

“누군갈 안고 갈 때는 힘의 차이가 있는 법이니까.”

“……다음에 제가 샨을 들고 어디까지 가야 하는데요?”

샨이 피식 웃었다.

“어디든 나의 무게를 견뎌라.”

“그냥 함께 걸어갈 수도 있잖아요.”

“그러다 빼앗기라고?”

샨이 목걸이처럼 팔을 그녀의 목에 휘감았다.

두툼한 뱀을 두른 기분이었다. 뱀과 달리 뜨끈하다는 점만 달랐다.

죄인도 목은 뻣뻣하게 들고 갈 텐데.

투이나가 끙, 하고 머리를 비틀자 샨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상인의 손으로 왕이 되는 건 천박하지.”

말의 내용은 형편없었지만 언제나 매섭던 눈매가 누그러지는 장면은 나쁘지 않았다.

애초에 회담장과 샨의 거처 사이가 별로 멀지 않았기에 샨은 금방 투이나를 내려놓았다.

땅으로 내려선 투이나가 흐트러진 두건을 정리하는 동안 샨이 팔짱을 꼈다.

“그대는 아직 소원이 남아 있다.”

투이나가 의아하게 그를 돌아보았다.

‘아, 내기에서 이겼을 때…….’

그러고 보니 샨과 사냥 내기를 했을 때 투이나가 이겼었다.

그동안 일이 너무 많아서 샨에게 부탁할 일이 단 한 가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랬었죠.”

“왕의 일은 왕에게 묻는 것이 옳아.”

샨은 제법 여유롭게 채근했다.

“그대가 왕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샨이 팔을 벌렸다.

방금 전까지 앉아 있던 곳이지만 멀찍이서 보니 새삼 굉장하구나 싶었다.

잘 단련된 그의 몸은 누군가를 안아 올리는 것보다 으깨 버리는 데 익숙할 것이다.

‘저기 안기고도 용케 살아 나왔구나.’

투이나가 무슨 생각으로 그의 가슴팍을 보는지도 모른 채 샨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래서? 원하나?”

투이나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갑자기 자신을 왕으로 만들고 싶어서 안달이 난 구혼자들까지 보니 불안해졌다.

‘설마 시드룬까지 다시 만나면 왕이 되어 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투이나가 마법사의 왕이 된다면 그것만큼 끔찍하게 웃긴 모순이 없을 것이다.

‘아르힘 님은 뭐라고 하실까?’

가장 속 시원하게 답을 얻으려면 역시 아르힘에게 가야겠지만, 여기까지 손수 투이나를 배달한 샨이 그녀를 다시 신전으로 보내 줄 리가 없었다.

투이나는 그냥 요구 사항을 바꿨다.

“혼자 쓸 천막이 필요한데요.”

“내 천막을 써라.”

“그럼 소원으로 다른 천막을…….”

그 말을 듣자마자 샨이 얼마나 험악하게 얼굴을 찌푸렸는지 투이나가 바로 후퇴했다.

“취소, 취소할게요.”

“결혼하면 어차피 한자리를 쓸 건데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부끄러운 건 아니고 번거로워요.”

투이나가 별다른 감흥 없이 대답했다.

“베인의 제안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그리고 좀 씻고 싶어요.”

“준비해 주겠다.”

투이나는 약간 꺼림칙했다. 샨의 거처에서 얼룩을 드러내도 좋을지.

“신전 사람을 불러다 줄 건가요?”

“아니.”

샨이 잠깐 팔짱을 풀었다.

“그대가 혼자 씻어야겠군. 대신 필요한 건 뭐든 말해라.”

“옷과 분가루면 충분해요.”

투이나가 대답했다.

샨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이상했다.

“필요한 만큼 하인들을 써라. 그대가 원하지 않으면 이곳에 머무는 동안 내가 아니면 누구도 가까이 가지 않을 거다.”

“……음, 고마워요.”

투이나가 대답했다.

하인을 부르려 손을 까딱거리는 샨을 본 뒤에야 그가 자신의 병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라카인이 어디까지 말했을까?’

어차피 낫는 병이니까 자세히는 몰라도 좋을까?

투이나는 손가락을 펼쳐 숨겨져 있는 회색 얼룩을 그려 보았다.

하긴 일부러 자신의 병을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 * *

“하아…….”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통에 들어가자 저절로 소리가 나왔다.

투이나는 하인들에게 절대로 천막에 들어오지 않겠다는 다짐을 무지하게 받아낸 다음에 목욕통을 차지했다.

허물처럼 벗어 놓은 두건과 옷가지를 보니 마음까지 개운했다.

투이나가 물속에서 참방거리며 다리를 끌어안았다. 흔들리는 물결 밑으로 그림자처럼 회색 얼룩들이 나타났다.

“조금 움직였나?”

투이나가 손가락으로 얼룩을 꾹 눌렀다.

역시나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벼린 칼처럼 진한 회색이던 얼룩이 많이 옅어지긴 했다. 이제는 광택을 잃은 은화 같은 회색이다.

이대로 아르힘 님에게 남은 치료까지 받으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

문득 투이나가 생각을 정정했다.

‘원래대로가 아니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얼룩병에 걸려 있었으니 원래대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병이 나은 다음부터는 완전히 새로운 몸이 되는 것이다.

왕이 되는 일도 비슷했다.

“…….”

투이나가 어깨를 기울여 머리카락까지 깊게 물에 담갔다. 물속에서 하늘거리는 머리카락이 살갗을 간지럽혔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토록 정상인 일이 그녀에게는 아직 가 보지 못한 낯선 영역이었다.

‘병이 나아야 하는 것만큼 왕이 되는 일도 필요한 걸까.’

무릎을 꿇은 채 자신에게 온몸을 던지다시피 말하던 베인의 얼굴이 아직도 아른거렸다.

결국 끝까지 그에게 화내지 못했다.

‘왕이 필요했다면 신께서 왕을 주었을 거예요.’

투이나가 물 밑에서 부글거렸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숨이 허망하게 터졌다.

하지만 어떤 일은 자격을 갖출 때까지 기다리기도 한다.

뜨거운 물이 식을 때까지 투이나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 속에는 베인이 스쳐 가기도 했고, 샨과 라카인도 있었으며, 아르힘과 마디악이 함께 오기도 했다.

다음 날부터 투이나는 샨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베인의 거처에서는 그래도 시종을 통해서 원래 하던 일을 약간이나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샨의 거처에서 머무는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거처를 둘러싼 하인들은 투이나가 없을 때보다 훨씬 주변의 접근을 경계했다.

베인의 도발 때문에 강화된 것이다.

몸 상태는 그때랑 비슷했지만 할 일이 사라진 투이나는 생각지도 못한 심심함과 맞닥트렸다.

‘솔직히 여기에선 위험할 줄만 알았지.’

어차피 베인의 제안을 생각해 보려면 가까운 왕에게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샨도 은근히 투이나가 기웃거리는 걸 즐기는 것 같았다.

“오늘도 따라올 건가?”

“안 돼요?”

샨이 씩 웃으며 투이나의 어깨를 당겼다.

신전에만 갇혀 있다고 투덜댄 것처럼 샨은 거의 하는 일 없이 한가롭게 지내고 있었다.

주로 무예 수련과 격투 관람이었다.

하인들은 잡무를 처리하다가도 샨이 지목하면 불려나와 싸웠다.

시도 때도 없는 대련에 투이나는 몹시 당황했다.

“대체 왜 그래요?”

“몸을 쓰지 않으면 둔해진다.”

“수련장이 있잖아요.”

“내가 재미가 없잖나. 그리고 난 노래나 지껄이며 바보짓을 해대는 광대는 싫어하거든.”

샨의 거처에 지내면 지낼수록 공기가 꽉 막힌 것 같았다.

하인들은 언제나 긴장 상태로 왕의 눈치를 보았고, 샨도 들끓는 혈기를 주체할 수 없어 기물을 몇 개나 작살내 놓았다.

그나마 투이나가 옆에 있을 때는 자제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는데도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주체가 안 되는 게 보였다.

세 번째로 우지끈 넘어가는 통나무를 보며 투이나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후…….”

샨이 고개를 숙이자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빌어먹을 금욕 생활까지 이어 가서 더 죽을 맛이군.”

그래도 청혼하러 온 신전에 잠자리 상대를 끌어들이지 않을 분별력은 있는 모양이다.

그가 나무를 상대로 펼치는 살해 기술을 지켜보던 투이나가 한 손으로 턱을 받쳤다.

“많이 만났나요?”

“셀 수도 없었지.”

샨이 공손하게 수건을 바치는 하인에게서 천을 집어 갔다. 

대충 닦아낸 그가 털썩 옆에 앉았다.

“태중에 왕의 피를 얻는 것만큼 영광된 일이 없었으니까.”

“아르파에선 어떻게 왕을 정하죠?”

“선왕이 죽으면 신이 그를 부른 자에게 옮겨 탄다. 자격이 없는 자들이 아르파를 불렀다간 죽게 되지.”

샨에게서는 여전히 더운 기운이 풍겨 나왔다.

“방법까지는 가르쳐 줄 수 없겠군.”

“샨은 왕이 되고 싶었나요?”

“언제나 그랬지.”

샨이 턱을 닦아냈다. 그가 흘긋 투이나를 돌아보았다.

“본국으로 돌아가면 소개시켜 주마.”

투이나는 그저 희미하게 웃어 보이기만 했다.

샨은 자신의 관대함을 과시하듯 투이나의 질문을 제법 쉽게 받아 주었다.

하지만 대답하기 싫은 질문을 가리지도 않았다.

“아르힘을 가지면 그다음에는 어디로 갈 건가요?”

“…….”

샨은 대꾸 없이 하인에게 물을 받아 마셨다.

이러면 대답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번에는 혹시나 하고 기다린 그녀에겐 실망스럽게도 그가 화제를 돌렸다.

“몸은 아직도 거지같은가?”

“아프냐고 묻는 거라면, 그래요.”

“오래 가는군.”

그가 장창 같은 시선을 던졌다.

“마법사를 불러올 텐가?”

투이나가 움찔했다. 과하게 제 발 저린 셈이다.

‘상처 얘기겠지?’

라카인이 아무리 샨에게 보고를 올렸다 해도, 어디서든 나타나 목과 몸을 분리할 수 있는 마법사를 상대로 비밀을 유출할 만큼 겁을 상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야. 라카인이라면 하고도 남아.’

다행스럽게도 샨은 그것까진 모르는 눈치였다.

“왜, 내가 알아서 놀랐나? 신의 힘으로도 안 낫는 상처면 뻔하지.”

“그, 그렇죠.”

살짝 안도한 투이나가 고개를 돌렸다. 샨이 금세 의심스러운 눈길을 던져왔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투이나는 샨의 방법을 모방했다.

“샨, 당신은 지금까지 어떻게 수호신이 있는 다른 나라들을 정복해 온 거예요?”

그녀가 필사적으로 말을 돌리는 게 뻔히 보이면서도 샨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수호신을 죽이면 보호하던 힘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 땅을 차지했지.”

“하지만 신은 죽일 수 없는 존재잖아요.”

“왜? 죽이고 싶은 신이라도 생겼나?”

샨이 슬쩍 떠보았다.

투이나가 질겁하자 그가 순순히 다음 말을 털어놓았다.

“신은 육체가 없기에 다른 것에 자신의 힘을 위탁한다. 백성들은 그걸 중심으로 자신의 신앙을 조형하고 뭉치게 되지.”

“예를 들면…….”

“대개는 인간이다. 나라마다 방법은 달랐지만 보통은 같은 인간을 믿는 편이 쉬운 것 같더군.”

기억을 더듬어 보던 샨이 말을 이었다.

“물론 사물이나 짐승일 때도 있다. 온 나라의 흰 사슴을 다 잡아야 했던 전쟁도 있었지. 그렇게 오래 걸리지만 않았어도 즐거운 기억으로 쳐 주었을 거다.”

“…….”

“그대에게 선물했던 홍옥도 원래는 수호신의 것이었다. 마지막 전쟁에서 가져왔지.”

‘마지막 전쟁이라면…… 세르뭄?’

퍼뜩 투이나의 머릿속에 레이벡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르파인을 그토록 증오하던 것이며 발현한 지 얼마 안 돼 서툴던 마법까지 정확하게 겹쳐졌다.

‘세르뭄이라면…… 신의 이름은 아르뭄이야.’

처음으로 열심히 신학을 공부해 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요, 아르뭄 신이시여. 당신의 옥체가 저에게 돌아왔군요.’

투이나는 사라진 신에게 짧게 기도를 올렸다.

‘신을 섬기는 자의 예의로서, 습득물을 당신을 섬겼던 자에게 돌려드리겠습니다. 조금이나마 잃어버린 믿음을 되찾을 수 있도록.’

투이나가 가만히 두 손을 맞잡았다.

기도하는 동안 뜨거운 손바닥이 그녀의 이마에 맞닿았다.

“또 기절할 것 같은가?”

“……아니요.”

투이나는 까칠하게 맞닿은 살갗에서 천천히 머리를 떼었다. 그녀의 눈은 차분했다.

“신이 힘을 위탁한 게 무엇인지 찾아내어 그걸 부수면 되는 거군요.”

투이나의 이마를 짚어 보던 샨의 손등이 천천히 안쪽으로 구부러졌다.

“꼭 죽이지 않아도 된다.”

그가 의미심장하게 손가락 하나를 미끄러트렸다.

“믿음이 부서질 수 있는 방법이면 뭐든 먹히지.”

그게 어떤 방법이든 달갑지 않을 것 같았다. 투이나는 묘한 열기를 품은 샨의 눈을 의아하게 응시했다.

“하긴 샨이 죽어도 아르파 신은 사라지지 않는군요.”

“내 신은 영리하거든.”

별다른 반응이 없자 샨은 지분거리던 손을 떼었다.

“하지만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단 하나의 신만이 그런 제약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루가.”

“……아르힘 님.”

“그래, 아르힘. 하지만 그 신이 갑자기 그대를 루가로 만들고 대신 믿음을 모을 대상을 내세웠지.”

샨은 이제 더 이상 형형한 눈빛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건 아르힘이 약해졌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

투이나는 입 안이 마르는 듯했다.

‘확실히…… 일리는 있어.’

루가가 된 시간이 너무 짧았기에 사제들과 깊은 신학까지 배울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아직 뭐라도 샨에게 반박할 논리를 갖추지 않은 게 분하긴 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자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아르힘 님은 언제나 소년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어.’

아주 가끔 성인이 되기도 했지만, 그건 특별히 신의 힘을 사용할 때만이었다.

‘정말로 예전보다 약해지신 걸까?’

마음이 먼저 아파 왔다. 어쩌면 얼룩병을 단번에 낫지 못하게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를 흔드는 데 성공한 샨이 탐욕스럽게 결과를 확인했다. 이대로 투이나가 넘어와 준다면 상인의 제안은 무시해도 좋았다.

무슨 짓을 하든 당연히 아르힘은 자신이 차지하게 되겠지만, 투이나까지 차지할 수 있다면 어쩐지 훨씬 더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뚫어져라 투이나를 보던 샨이 갑자기 손을 들었다.

“그대의 뺨에 뭐가 묻었군.”

“……!”

투이나가 철썩 소리가 날 만큼 급하게 뺨을 가렸다.

‘아, 땀!’

그냥 문질렀다면 괜찮았을 분칠이 샨의 땀에 섞여 지워진 것이다.

차라리 본인이 땀을 흘렸다면 괜찮았겠지만, 분가루는 겉에서 문지르는 기름과 소금기에 약했다.

얼룩을 들킬까 봐 소스라친 투이나가 벌떡 일어났다.

“그만 씻으러 가는 게 좋겠네요!”

“뭐라?”

샨이 눈썹을 모았지만 투이나는 재빨리 하인에게로 달려갔다.

며칠 사이에 투이나에게 적응한 하인이 고분고분 움직였다.

하인은 정신이 빠져 가지고 투이나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다.

뻔히 도망가는 수작이었지만, 자연스럽게 하인을 다루는 모습은 마음에 들었다.

투이나를 내버려둔 샨이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하인에게 주의를 돌렸다.

짧게 보고한 그가 왕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넘어오기 위해서라면…….

샨은 목숨과 죽음을 오래 생각하지도 않고 저울질했다.

“가둬 둔 놈은 일단 죽이지 말라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샨의 명령을 받은 하인이 신전 쪽으로 물러났다.

이것으로 라카인의 목숨이 하루 연장되었다.

* * *

투이나는 그 집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똑같이 꿈에서 보았던 장소라는 게 이제야 기억이 났다.

그녀는 여전히 입 안 가득 버석거리는 알갱이를 물고 있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다리를 움직였다.

이번에는 의자 밑에 검은 호수가 없었다.

그녀는 집 안을 둘러보았다.

네 면으로 된 내부에는 각 벽마다 하나씩 문이 달려 있었다.

꿈의 내용은 달라졌지만 여전히, 자신은 여전히 이 집의 주인이 돌아오면 죽을 것이다.

그녀는 어쩔 줄 모르고 주변을 서성였다.

그 때 바깥에서 문을 두드렸다.

쿵쿵쿵.

“문을 열어라! 나다, 루가!”

“문을 여십시오.”

“루가 님! 제발 문을 열어 주십시오!”

그녀는 얼어붙었다.

세 사람이 서로 다른 문에서 외치고 있었다. 문 밑으로 그림자가 서성이는 게 느껴졌다.

그들의 목소리가 어딘지 익숙했다.

주인이 돌아오기 전에 목소리를 따라 바깥으로 나가면 살 수 있을 것이다.

긴장한 그녀가 침을 삼켰다.

그제야 비로소 입 안에서 짠맛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소금을 입에 물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멈춰 있던 투이나는 네 개의 문 중에서 유일하게 새까만 색인 문을 발견했다.

이상하게 그쪽으로 마음이 끌렸다.

그러나 한 발짝 다가가자마자 급격하게 마음이 술렁이며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머리카락 한 올씩 붙잡고 뒤쪽으로 당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입에 든 소금을 흘릴까 봐 소리를 지르지도 못했다.

“…….”

까만 문 반대편은 그녀를 부르지도 않고 조용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홀린 것처럼 그쪽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았다.

끼이익.

천천히 문이 열렸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서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바깥은 너무도 어두운 나머지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멍하니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천천히 고개가 들렸다. 그의 입에서 하얀 가루가 떨어졌다.

“일어나셔야 합니다.”

투이나가 번쩍 눈을 떴다.

“헉!”

누군가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식은땀에 젖어 요동치는 그녀의 몸을 커다란 손바닥이 눌렀다.

“정신 차려라, 루가.”

투이나는 그러지 못했다.

부릅뜬 눈이 샨의 얼굴을 잡아내기까지 한참 걸렸다.

‘꿈이었나?’

기억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꿈은 벌써 까맣다는 인상만 남겨 놓고 빠르게 흩어져 갔다.

게다가 샨은 여유롭게 꿈을 기억할 여유를 주지도 않았다. 그가 다그치듯 투이나의 등을 세웠다.

“그대는 또 기절했다.”

“……지금 밤이 아니에요?”

투이나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슴푸레한 청회색 공기가 주변을 떠돌고 있었다.

해가 저물려면 아직 한참 남은 시각이다.

너무 밝아서 낯설었다.

“식사를 하러 가던 도중에 갑자기 고꾸라졌다.”

샨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내내 멀쩡하던 투이나가 갑자기 쓰러지는 상황이 지나치게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맞다. 샨이 씻고 나온 다음에…….”

투이나가 흠칫 샨에게서 몸을 떨어트렸다.

식은땀을 흘렸으니 또 분칠이 지워질까 걱정한 거였는데, 샨은 그 동작을 오해하고 말았다.

그의 손이 탁 떨어져 나갔다.

“……픽픽 쓰러지는 꼴이 아주 가관이군.”

샨의 말투가 자연스레 험악해졌다.

“이제 돌아가겠다고 내게 시위하는 건가?”

“…….”

투이나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 넘겼다. 어지러운 정신을 바로잡는 데만도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아직도 심장이 뛰어.’

무언가 일이 잘못 되어 간다는 예감이 들었다.

꿈은 끝났는데 불길한 고동은 자꾸 커져만 갔다.

가슴과 찔렸던 자리 사이를 누른 투이나가 침상에서 내려왔다.

“가야 해요.”

“어디를!”

샨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하마터면 부러질 뻔한 감촉에 그가 움찔한 것과 달리 투이나는 바람이라도 스쳤나 싶게 담담했다.

“라카인을 봐야겠어요.”

크게 뜬 투이나의 눈에 저물어 가던 태양빛 한줄기가 번뜩이며 반사되었다.

* * *

샨은 감옥으로 가는 길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따라오려는 하인도 뿌리쳤다.

“조용히 다녀올 것이다.”

투이나는 샨의 행동을 묵인했다.

샨은 몸을 숨기는 재주는 없었지만 다가오는 인기척은 기가 막히게 알아차렸다.

그녀에겐 다행스러운 일이다.

투이나는 지금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드디어 샨의 거처에서 나오신 거냐고 기뻐하는 질문들에 파묻히고 싶지 않았다.

그럴 시간이 아까웠다.

‘왜지? 왜 이렇게 불안하지?’

침착하려 해도 투이나의 걸음이 자꾸만 빨라졌다. 거의 뛰다시피 하는 투이나에게 샨이 보폭을 맞췄다.

마침내 감옥을 눈앞에 뒀을 때 투이나는 안도했다.

그러나 오래가진 못했다.

문 앞을 지키는 무사제들이 아니라 사제들이 감옥 문을 열고 나왔던 것이다.

‘사제님들이 왜 저기에……?’

엄숙한 얼굴로 나오던 사제들도 그때서야 투이나와 샨을 발견했다.

“……루가 님?”

“어, 어떻게 여길…….”

사제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투이나의 얼굴이 굳었다.

“왜 거기서 나오시죠?”

“저어, 그게…….”

“잠깐 죄인을 신문하려다가…….”

어영부영 튀어나오는 말에 오히려 의지가 굳건해졌다.

투이나가 그들을 지나쳐 감옥 문을 열었다.

사제들이 다급하게 본색을 드러냈다.

“가시면 안 됩니다!”

“돌아가시지요! 모하세스의 거처에서 나오셨으니 이제 신전으로 돌아오시면 되잖습니까!”

사제들의 말을 무시한 그녀는 있는 힘껏 문을 잡아당겼다.

“라카인?”

감옥 안은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분명히 라카인에게 등불을 남겨두고 갔었는데.

투이나가 빠르게 달려갔다.

퉁, 퉁퉁, 하고 돌바닥을 울리는 소리가 퍼져 나갔다.

라카인이 있던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던 투이나가 불빛 없이도 멈춰 섰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웅크리고 있는 게 보였다.

투이나가 창살을 붙들었다.

“라카인? 제발, 듣고 있다면 대답 좀 해 주세요!”

라카인은 끝끝내 존재를 숨기려고 했지만 눈앞에서 투이나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목소리가 더듬더듬 끊어져 나왔다.

“루가…… 님…….”

투이나가 다급하게 목소리를 따라 손을 내렸다. 곧 허공 너머로 라카인의 등이 만져졌다.

그런데 흠뻑 젖어 있었다.

모두 식은땀이었다.

“왜 이래요?”

투이나가 다급하게 그를 찾았다.

‘몸이 너무 차가워.’

갑자기 시야가 밝아졌다.

뒤따라온 샨이 그들의 머리 위로 등불을 내밀었던 것이다.

라카인은 바닥에 엎드린 채 양팔로 단단히 배를 감싸고 있었다.

누군가가 보았다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은 채 절을 하는 것이라 착각할 듯했다.

그러나 경련하듯 잔뜩 힘이 들어간 다리와 억누르는 신음이 몇 번이고 그의 턱에 아로새겨지는 걸 보면 더는 오해할 수가 없었다.

“독을 먹었군.”

투이나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사제님!”

비명처럼 그녀가 소리쳤다.

“빨리 치료해 주세요!”

“모르겠나, 루가.”

날카롭게 외치는 투이나와 대비될 만큼 샨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저들이 독을 먹인 거다. 그런데도 정말 치료를 부탁하려고?”

투이나의 부릅뜬 눈이 사제들에게 돌아갔다.

그들은 통탄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일을 이렇게 정통으로 들킬 줄 몰랐다는 후회로 가득했다.

둔기로 강하게 머리를 후려 맞은 느낌이었지만 지금 죽어 가는 사람이 더 급했다.

“그런 걸 따질 순간에 살려내세요!”

샨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가장 가까이 있던 사제의 목을 틀어쥐었다.

“커헉……!”

“루가의 명이다. 따라라.”

샨의 손아귀가 억세게 그의 목을 졸랐다.

얼굴이 보랏빛으로 변한 그가 버둥거렸다.

“커윽! 하……겠……습니다!”

“지금 기도해라. 할 수 있잖아.”

완전히 겁에 질린 사제가 목이 막힌 채로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흰 빛이 깃들기 시작한 걸 본 투이나가 얼른 라카인의 팔을 붙잡았다.

“한 손만 얼른 주세요, 라카인. 치료하려면 몸에 닿아야 해요!”

“왜…… 오셨습니까…….”

“말하지 말구요!”

투이나가 억지로 팔을 빼내었다.

미약하게 저항하던 힘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혹시 그게 죽음의 징표일까 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다행히 그저 탈진한 것일 뿐이었다.

사제가 숨을 쉬려고 애쓰며 라카인을 붙잡고 기도했다.

그동안 투이나는 다른 손으로 라카인의 목에서 맥박을 확인했다. 둔중하고 느리게 뛰는 심장 박동은 금방이라도 흐려질 것처럼 약했다.

‘안 돼……. 안 돼…….’

투이나가 애간장을 잘근잘근 삼켜 버리고도 한참 만에야 라카인의 체온이 다시 따듯해지기 시작했다.

말없이 목을 조르고 있던 샨이 안색을 확인하더니 손아귀 힘을 풀었다.

“허억……! 콜록, 컥…….”

사제가 거세게 기침을 하며 주저앉았다. 투이나는 처음으로 사제의 고통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더 치료해야 해요.”

“그 정도면 충분하다.”

샨이 입을 떼었다.

“그만하면 살아날 녀석이니까.”

무기력하게 창살 너머로 뻗은 팔이 꿈틀거렸다. 라카인은 왕의 목소리에 반응한 것처럼 호흡을 골랐다.

독은 치유되었지만, 여전히 팔에 닿아 있는 투이나의 존재가 너무도 거대했다.

간신히 살아난 사람답지 않게 라카인은 몸 둘 바를 몰랐다.

샨과 투이나가 동시에 관심을 보이는 상황 자체가 부담이었던 것이다.

“괜찮아요?”

“……예.”

“어쩌다 독을 먹은 거예요!”

저도 모르게 격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라카인 때문에 자꾸만 가슴이 울렁거렸다. 어울리지 않게도 눈물이 차올랐다.

“제가 먹을 음식에서 독을 찾을 땐 먼저 맛보기까지 했으면서, 왜 본인은……!”

“…….”

라카인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투이나가 자신을 위해 격해졌다는 사실이 지나치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어딘가 현실 같지가 않았다.

라카인이 조심스럽게 침묵을 지키는 동안 투이나의 울렁임은 거세지기만 했다.

‘알면서 먹은 거야.’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샨의 성질머리가 답을 재촉했다.

“네가 대신 대답해 봐라.”

여전히 숨을 쉬려고 애쓰는 사제 옆에서 질려 있던 다른 사제에게 샨의 손이 날아갔다.

그처럼 목이 졸릴까 겁을 먹은 사제가 샨의 손가락이 닿기도 전에 소리쳤다.

“루가 님! 저자는 어차피 죽을 자입니다!”

“분명 사형을 미루라고 했을 텐데?”

샨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지금 신전이 내 면전에서 명령을 무시하겠다는 뜻인가?”

“그게 아닙니다! 어차피 처형이 결정된 자라, 날짜와 방법에 대해서만 논의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사제가 다닥다닥 말을 붙였다. 그의 눈이 도와달라는 듯 연신 투이나를 향했다.

“하지만 루가 님이 모하세스의 거처로 가셨으니 저희들이 자의적으로 대신 판단을 내린 겁니다! 루가 님만큼은 저희를 이해하셔야지요!”

격렬하게 소리치는 사제가 거슬린 샨이 그를 처리하려 했을 때였다.

갑자기 사제가 어깨를 붙들며 뒹굴었다.

“으, 으아아악!”

끔찍한 비명에 투이나마저 고개를 돌렸다.

“아아악! 타…… 타들어 갑니다! 루가 님! 끄아아악!”

투이나가 숨을 들이켰다.

아르힘이 그 사제에게 벌을 내린 것이다.

혼자서 살이 타는 고통에 괴로워하며 쓰러지는 사제를 보는 샨의 표정도 괴이해졌다.

“사제라는 자가…….”

투이나는 입술을 깨문 채 라카인만 응시했다. 라카인이 저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장면을 어디선가 본 것만 같다.

그녀가 자꾸만 울컥울컥 치미는 감정으로 속삭였다.

“……멈춰 주세요, 아르힘 님.”

사제의 비명이 잦아들었다.

간헐적인 신음을 흘리던 그가 훌쩍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신이 만든 상처였기에 그는 감히 기도문을 외울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감옥 바닥에 각기 다른 신이 처벌을 내린 사제들이 뒹굴었다.

그러나 이미 투이나는 다른 것에 찔린 뒤였다.

“입에 대는 순간, 아니, 그 전에 이미 독이라는 걸 알고 있었죠?”

“……예.”

“라카인은 단 한 번도 죽음을 거부한 적이 없군요.”

“…….”

투이나가 허탈한 숨이 울음으로 바뀌지 않도록 억눌렀다.

“당신의 모든 것이 샨의 명령이었어요.”

아닙니다.

독약보다 더 뜨거운 것이 라카인의 뱃속으로 퍼져나갔다.

라카인은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에게 내려왔던 독약은 루가의 이름이었다고.

자신은 아르파가 아니라 투이나를 위해서 죽음을 택한 것이라고.

그게 무슨 차이인지 제대로 설명할 수만 있다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투이나의 뒤로 자리한 붉은 신이 끝까지 라카인의 입을 붙여 놓았다.

도저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기어이 투이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가슴에 톱니처럼 홈이 팬 쐐기가 박혔다.

자신이 명령을 따랐기에 투이나가 울고 있었다.

거부할 것을.

혀끝까지 아린 통증이 올라왔다.

반드시 따르는 대신에,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했는데. 그녀가 그걸 바라고 있는데.

눈물로 젖은 투이나의 눈동자가 라카인을 쏘아보았다.

“당신을 살려낼 거예요.”

투이나가 이를 갈았다.

비로소 그녀의 소원이 명확해졌다.

삶.

“싫어도 어쩔 수 없어요.”

투이나가 주먹을 꽉 쥐었다.

라카인은 곧장 감옥에서 방으로 옮겨졌다. 그의 죄는 여전했으나 독살될 뻔한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투이나는 다른 사제를 불러와 라카인을 말끔히 치료했지만, 감옥에서 다친 두 사제는 상처가 얕다 판단하고 내버려 두었다.

그들 또한 감옥이 아닌 다른 곳에 감금되었다.

잠자리에서 끌려 나와 투이나를 본 사제들은 하나같이 그들의 범행에 경악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요!”

어떤 사제는 진심으로 분개했다.

“어떻게 루가 님의 허락도 없이 그런 짓을 벌일 수 있단 말입니까!”

“이번 일에 대해선 전혀 모른단 말씀이세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잔뜩 위축된 사제들이 결백을 주장했다.

굳은 얼굴로 앉아 있는 투이나에게서 감히 거역할 수 없는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긴장한 사제들이 저절로 몸가짐을 삼갔다.

샨이 가져온 옷을 입고 있던 까닭에 투이나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도 한몫 하였다.

같은 성녀의 모습이더라도 순진한 것과 잔혹하고 고고한 것엔 분명한 차이가 있었으니까.

지금 투이나는 너무도 후자의 모습에 가까워 보였다.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샨까지 어우러져 흡사 전쟁터의 신 한 쌍이 서 있는 듯했다.

심판대에 올라온 것처럼 사제들이 침을 삼켰다.

“라카인에게 무슨 독을 먹였는지 알아내셨겠죠.”

“흰독말풀입니다. 잎사귀를 뜯어낸 가지를 그들의 방에서 찾아냈습니다.”

“흔한 독이군.”

샨이 투이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위압감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하긴 면전에서 내 말을 거역하려면 급했겠지.”

“사형을 늦춰 달라는 이야기는 저희도 동의했습니다!”

한 사제가 억울하다는 듯이 입을 떼었다.

“좋다. 그럼 뻔뻔하게 동의하는 척해 놓고 살인을 계획했다니 죄질이 더욱 사악하군.”

“그, 그런……!”

“아르파의 목숨은 나의 것이다. 남의 물건을 속여서 훔치려 했으니 같은 값으로는 보상이 안 되겠군?”

“말을 삼가 주세요, 샨.”

투이나가 한마디 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눈은 평소와 달리 가라앉아 있었다.

“여기에서까지 장난을 치고 싶어요?”

샨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내가 말하는 게 그리 싫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는데, 루가.”

“뭐죠?”

샨이 턱을 긁듯이 손바닥으로 투이나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이것.”

샨이 진하게 입을 맞춰 왔다.

‘이 사람이 또…….’

투이나는 차게 식은 눈으로 질척거리는 샨을 응시했다.

당황하지는 않았지만 실망스러웠다.

샨은 떨어져 있을 때 훨씬 나은 사람이었다.

그가 접촉할 때마다 약간이나마 남아 있던 호의마저 돌처럼 굳어 버렸다.

문득 투이나는 그의 입에서 옅은 피 맛이 느껴지는 걸 깨달았다. 입 안을 다친 것 같진 않았는데.

무심코 그녀가 피 맛이 나는 진원지를 핥았다.

“……!”

갑자기 샨이 먼저 몸을 확 떼었다. 그가 부릅뜬 눈으로 입을 가렸다.

누가 보면 그가 아니라 투이나가 억지로 입을 맞춘 줄 알 만큼 격한 반응이었다.

“뭐냐!”

“……뭐가요?”

투이나가 되물었다.

샨은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방금 내게 뭔가 했나?”

“뭐든 하고 싶지 않은데요.”

투이나가 찌푸린 표정으로 입을 우물거렸다. 피 맛이 입 안에 찝찔하게 남았다.

‘침 뱉고 싶어.’

그러나 샨은 진정한 얼굴이 아니었다.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샨은 혀로 입 안쪽을 굴려 보더니 투이나에게서 떨어졌다.

뭘 물어봐도 대답해 줄 상태가 아니라 투이나는 시선을 돌렸다.

사제들의 얼굴이 벌겋게 익어 있었다. 샨의 행동에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다.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역시 엄격하게는 못 하겠네.’

투이나가 긴장감을 누그러트렸다.

“라카인을 살려야겠어요.”

그나마 연륜이 있는 사제가 제일 빨리 정신을 차렸다.

“루가 님! 어찌 정으로 일을 그르치려 하십니까!”

“그자가 지은 죄가 명명백백합니다.”

“그럼 라카인을 죽이려고 했던 두 사람도 모두 죽일 건가요?”

“…….”

사제들은 금세 곤란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자들의 죄는 명백하오나 감히 루가 님을 살해하려 한 죄와 죄인을 죽이려 한 죄는 같지 않습니다.”

“똑같은 처벌을 내릴 수는 없지요.”

금세 마음대로 떠드는 소리에 투이나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언제부터 그런 차이가 생긴 거죠?”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직 왕이 되라는 제안을 수락하기도 전인데, 여러분들은 이미 저를 다른 사람처럼 여기고 있잖아요.”

사제들의 표정이 일변했다.

투이나가 생각한 방향은 아니었다.

“……아직 승낙하지 않으셨습니까?”

오히려 놀랐다는 시늉들이다.

‘정말 레오나가 사제님들을 거의 다 설득했구나.’

“설마 저 몰래 왕관까지 만드신 건 아니죠?”

“쓸 만한 성물 몇 개가 있긴 합니다만…….”

황당하다는 투이나의 시선에 사제가 말끝을 흐렸다.

샨은 그새 회복했는지 끼어들었다.

“루가가 쓸 왕관은 내가 만들어 주지.”

목소리는 태평했지만 어딘가 태연을 가장하는 듯했다.

“결혼식 때는 이 망할 두건을 벗겨 버려야지.”

그는 자꾸만 투이나의 얼굴을 가리는 두건을 보통 성가셔하는 게 아니었다.

저러다가 나중에는 얼굴이 잘 안 보인다고 머리카락까지 자르게 할지도 모른다.

그대는 짧은 머리카락이 어울려, 어쩌고 하면서 말이다.

샨의 목소리가 듣지 않아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투이나는 체념한 말투로 물었다.

“왕이 된다고 라카인을 살릴 순 없겠죠?”

“반역자를 사형시키는 건 기본이다.”

“좋아요. 그럼 왕이 되는 건 보류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사제들이 황당해할 차례였다.

“아니, 고작 그런 이유로 보류하시다니요.”

“차라리 왕이 되신 다음에 특별 사면을 내리시는 건 어떠십니까.”

“여러분, 집중하세요. 지금 제가 왕위에 관심이 있어 보이시나요?”

“…….”

“라카인의 죄는 인정하지만 고려할 부분은 분명히 있잖아요.”

투이나는 신중하게, 샨이 모욕이라고 느끼지 않도록 단어를 골랐다.

“지금까지 라카인은 다른 사람의 명령에 지나칠 정도로 충실했습니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예요.”

“그자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충성을 다하더라도 생각이 있다면 남을 해치겠습니까?”

“그래서 두 사제님이 어쩌셨지요?”

사제들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독살이 성공했다면 라카인의 죽음과 함께 샨에게 가진 부채가 사라졌을 거다.

자백 말고는 증거를 얻을 수 없는 일이라 오래 끌었더니 일이 이 지경까지 와 버렸다.

사제들도 나름대로 억울한 것이, 지금까지 계속 그들을 괴롭혀 왔던 샨이 이제 와서 투이나의 편인 척 굴었던 것이다.

“정 안 되면 셋 다 내게 넘겨라, 루가.”

샨이 성마르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내게 넘어온 자들이잖나.”

죽음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건 아르힘이 아니라 아르파의 방식에 가깝긴 했다.

투이나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라카인은 이미 한번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어요. 두 사제님이 저지른 죄 때문이었지만, 그들이 되살려냈으니 그것으로 처벌을 대신해 세 사람의 죄를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을까요?”

“죄송합니다, 루가 님.”

사제들은 부정적인 뜻을 보였다.

“죄인은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죽음보다 더 큰 대가가 있을까.

투이나는 라카인이 독을 받아 마신 것으로 이미 처벌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는 살아나리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을 테니까.

투이나가 눈을 감았다.

“결국 라카인이 결백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그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을 내릴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군요.”

그게 아르힘에게서 풀려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사제들이 경멸하듯이 인정했다.

“정말로 그런 자라면, 더 이상 사람 취급을 해 줄 수는 없겠지요.”

투이나는 참담했다.

‘이렇게라도 당신을 살려서 이런 모멸을 감당하게 해야 할까요?’

살기 위해서 모욕을 받고 침을 뱉고 인간도 아닌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 삶을 감히 누군가에게 강요할 수 있을까?

삶이 정말 그 정도로 좋은 걸까?

투이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나로는 부족해.’

* * *

샨은 계속 마지막 입맞춤을 되새기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감상적인 인간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투이나에게 입 맞췄을 때 몸속에서 무언가가 일어났다.

‘피가 움직였다.’

그때 샨은 입 안에 생채기조차 없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투이나의 입에 혀를 밀어 넣었을 때 비릿함과 함께 피가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억지로 피를 빼앗기는 건 아르파가 강림할 때 나타나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아르파를 불러내는 자가 스스로 피를 빼앗기는 건 모하세스의 역사를 통틀어서 전례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신을 부르는 의식도 치르지 않았다.’

투이나에 반응해 신이 움직였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투이나의 몸에 아르힘이 깃들었을 거란 막연한 의심을 해 왔을 뿐이다.

하지만 이건…….

신이 아니라 투이나 그 자체에 반응하는 것 같았다.

‘루가란 뭐지?’

처음 추측대로 아르힘이 약해졌기 때문에 루가를 만든 게 아니라 투이나가 정말로 특별한 존재라는 말인가.

“…….”

샨은 피곤한 표정으로 걸어 나오는 투이나를 뜯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지극히 평범한 자였다.

다른 나라에서 굴복시켜 왔던 지도자들의 위엄이나 후광도 없었고, 나라 하나를 뒤흔들 만큼 빼어난 미모를 가지지도 않았다.

적당히 곁에 두기 좋은, 그냥 편안한 인간.

자꾸 빠져나가려는 걸 보면 평소보다 과하게 부아가 치밀긴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아니라 신이 그토록 분노한 것인가?’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면 당장 혀를 자를 말이지만, 솔직히 아르파는 성질이 더러운 신이었다.

아르파가 강림하면 샨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고, 판단조차 불가능했다.

고대부터 내려온 분노에 온몸을 사르는 수밖에 없었다.

증오를 긁어모으며 살아가는 왕.

샨은 필사적으로 라카인을 변호하려는 투이나에게 약간 마음이 쓰이고 말았다.

비록 자존심이 스스로 그 이유를 아는 것까지는 허락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샨은 투이나가 계속 침울해 있는 동안 이유 모를 충동에 시달려야 했다.

‘슬슬 돌아갈 때가 되어서 저러나.’

아무리 길게 잡아 줘도 투이나가 샨의 거처에서 머문 시간은 거의 끝나 갔다.

투이나가 약속한 건 그 기간뿐이니 초조해질 만도 했다.

그런데…… 누가 초조한 걸까?

“식사 좀 들지.”

우두커니 앉아 있던 투이나가 꼬물꼬물 움직였다.

그녀는 사제들을 만나고 온 뒤로 계속 저 상태였다.

그나마 밥 먹자는 얘기엔 꼬박꼬박 움직여서 샨은 그걸 자주 불러낼 구실로 삼았다.

샨은 일부러 갖은 산해진미를 명령했지만 투이나가 먹는 양은 항상 균일했다.

괜히 샨까지 입맛을 잃었다.

하인들은 왕의 심기가 불편하다고 먼저 비위를 맞추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에 샨은 해결책을 스스로 찾는 수밖에 없었다.

“가서 루가의 호위를 불러와라.”

원래 투이나가 호위들을 끼고 살았으니 다시 보면 좀 나아질까 싶어서였다.

하인이 곧장 움직였다.

그러나 드물게 발휘한 샨의 호의를 투이나는 무참히 깨트려버렸다.

상상치도 못한 방법으로.

* * *

투이나는 며칠간 신중하게 고민한 끝에 설득하는 방법을 포기했다.

‘평생 공부한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말로 이기겠어?’

사제들도 샨도 모두 자기만의 논리가 굳건했다.

배운다고 대화가 먹히는 게 아니라 힘으로 눌러 버려야만 끝나는 상태였다.

홧김에 정말 왕이 되어 버릴까 싶은 지경까지 와 버려서, 그녀는 그냥 익숙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투이나는 샨이 산더미처럼 쌓아 둔 옷가지 중에서 튼튼한 걸 골랐다.

몇 번 손에 휘감아 당겨 본 투이나는 옷에서 적당히 귀해 보이는 장식품을 떼어냈다.

‘어차피 나한테 준 물건이니까.’

귀중품을 삭삭 긁어모은 투이나가 보따리를 만들었다.

야반도주하러 가는 사람처럼 짐을 챙긴 투이나가 등불을 들어올렸다.

시드룬이 걸어 둔 약속의 마법은 신전에서, 주변에 사제가 없을 때, 그녀가 침대 옆에 불을 켜면 이루어졌다.

신전 안에 있는 샨의 거처만큼 완벽하게 조건에 들어맞는 곳이 따로 없었다.

투이나는 바깥으로 조금의 빛도 새어나가지 않도록 천막을 꼼꼼하게 닫아 두었다.

라카인은 귀가 좋았으니, 다른 사람들도 충분히 귀가 밝을 가능성이 있었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부드러운 천 신발로 갈아 신은 투이나가 살금살금 침상 옆으로 걸어갔다.

바보 같지만, 지금 그녀가 걱정하는 건 모피도 침대로 취급해 주냐는 문제였다.

등불을 올리자마자 환하게 터져 나오는 보라색 빛이 그런 걱정을 없애 주었다.

“루가.”

“반가워요, 시드룬! 오늘은 목소리를 많이 낮춰 주세요.”

투이나가 속닥거리며 시드룬의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멀뚱히 나타난 시드룬은 마구 눌리는 입술에도 여전히 멍해 보였다.

“그렇군요. 당신이 부른 거군요.”

어째 반응이 이상했다.

투이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아니라는 사람의 대답이 신경 쓰이게 느렸다.

투이나가 눈가를 찡그렸지만 시드룬은 천천히 머리를 움직였다.

“다른 일을 하는 중이라 오늘은 당신이 연구를 돕기 어렵습니다.”

“아, 잘됐네요. 저도 잠깐 옮겨만 달라고 부탁하려던 거였어요.”

투이나가 마법진 너머로 건너가려고 다리 한쪽을 들어올렸다.

물끄러미 그녀를 보던 시드룬이 물었다.

“어디로 가기를 원합니까?”

“신전 내부면 어디든 상관 없어요. 샨의 거처만 아니면 돼요.”

그러자 시드룬이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갑자기 뒤쪽에서 느껴지는 바람에 투이나가 고개를 돌렸다. 또 하나의 마법진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쪽으로 올 필요 없이 건너가면 됩니다.”

시드룬이 담담하게 말했다.

투이나는 뭔가 꺼림칙했다. 얘기하는 내내 시드룬이 마법진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웬일이지?’

그동안 웃자란 버섯처럼 쑥쑥 머리를 내밀던 시드룬이 아닌가.

꼭 무언가 숨기고 있는 사람 같았다.

마법진을 열어 줬는데도 투이나가 얼른 가지 않자 시드룬이 한 마디 덧붙였다.

“이번에 당신을 도와주었으니 대가를 받아도 되겠습니까?”

“그래요.”

투이나가 흔쾌히 대답했다.

‘역시 이래야 시드룬이지.’

차라리 안심이 된 투이나가 싱긋 웃었다.

“고마워요.”

시드룬이 미약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투이나가 마법진을 뛰어넘었다.

두 발이 안전하게 착지하는 동시에 마법진이 사라졌다.

바깥은 고요한 신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좋아.’

투이나는 라카인이 갇힌 방의 위치를 떠올렸다.

남들처럼 몸을 숨기는 재주는 없었지만, 그래도 신전에서 삼 년 넘게 살았다.

불빛 없이도 어둠 속에서 움직일 자신이 있었다.

투이나는 미끄러지듯이 움직였다.

무사제들의 순찰 표를 외우고 있었는데도 하마터면 몇 번이나 그들과 마주칠 뻔했다.

‘위험하네. 정말 신전에 도둑 한 명 못 들어오겠어.’

보안은 뿌듯하긴 한데 지금 상황에는 별로 도움은 안 되었다.

투이나는 간신히 라카인이 갇힌 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복도 끝에서 살짝 머리를 내밀어 보니 문을 지키는 무사제는 한 명으로 줄어 있었다.

설마 독살 소동 뒤에도 그를 건드리려는 대담한 자가 없으리라는 판단이었다.

샨이 알았다면 안이하다고 혀를 찼겠지만, 정확하게 독을 먹인 순간 나타난 투이나 때문에 신전에서는 어떤 소문이 돌고 있었다.

아르힘이 라카인을 살려 두길 원한다는 것.

그리고 그 소문은 미묘하게 베인이 성소에 출입한 시기와 맞물리고 말았다.

아르힘이 라카인을 이용해 투이나를 죽이고 베인을 루가로 올릴 것이라는 악소문이 조금씩 돌고 있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흘린 소문이었지만 정작 투이나는 샨의 거처에 있느라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을 본 무사제가 퍼드득 놀라 경기하는 이유도 알지 못했다.

“쉬잇……. 저예요.”

투이나가 양 손을 들어 올렸다.

두건을 쓴 여자가 한밤중에 나타난 걸 보면 저렇게 놀랄 만도 했다.

무사제는 쪼그라든 간 때문에 말도 제대로 못 했다.

“루, 루가 님? 여, 여, 여긴 왜 오신 겁니까?”

“라카인을 보러 왔어요.”

무사제의 표정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차마 제 발로 죽으러 왔냐고 물을 수는 없지만, 제발 제가 당번일 때는 죽지 말아 주십시오, 하는 부탁이 섞여 있는 듯했다.

아무튼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라 투이나가 그를 안심시켰다.

“무사제님이 들여보내 줬다는 건 비밀로 할게요.”

“안 된다는 선택지는 없……으시군요.”

한참을 고민하던 무사제가 결국 열쇠를 꺼냈다.

정말 소문대로라면 여기서 투이나를 막는 건 신의 뜻에 반대하는 일이 되니까.

절그럭 문을 연 무사제가 왜 비장한 표정으로 돌아서는지 그녀가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

“들어갈게요.”

바깥의 소란을 들었는지 라카인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투이나는 들어온 다음 문을 닫았다.

‘여기도 불빛이 없네.’

투이나가 어두운 방 안을 더듬거렸다.

라카인은 어둠 속에서도 그녀가 선명히 보이는 듯했다.

그가 주저하며 입을 떼었다.

“……안에는 등불이 없습니다.”

“아.”

투이나가 멈칫했다.

“괜찮아요. 제가 하나 챙겨왔어요.”

잠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따닥, 튕기는 소리가 났다.

타는 냄새와 함께 투이나의 얼굴이 드러났다.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라카인은 투이나와 시선을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잘 지냈어요?”

“……예.”

루가 님은…… 평안하셨습니까.

그 말이 입 안에 맴돌았다.

그러나 자신이 안부를 묻는 게 뻔뻔하게 들릴 것 같아 망설여졌다.

불빛 너머로 그가 건강해 보였는지 투이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요.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답답하죠. 계속 사형을 취소하려고 해 봤는데 잘 안됐어요.”

“저는 괜찮습니다.”

투이나의 표정이 바뀌어서 라카인은 또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왜 자신은 좀처럼 변하지 못하는가.

그가 억지로 말을 짜내어 보았다.

“루가 님이 노력해 주신 것만으로도 저는 행복합니다.”

무심코 튀어나온 어휘가 진심을 담고 있었다.

뜻밖의 말에 놀란 투이나가 눈을 깜박였다.

이상하게 귀가 달아올랐다.

라카인은 괜히 쿵쿵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전까진 괜찮았는데 요란하게 날뛰는 동작이 심상치가 않았다.

“라카인.”

“예.”

“저랑 탈옥할래요?”

잘만 뛰던 심장이 불시의 공격에 호되게 얻어맞았다.

* * *

끼이익.

바깥에서 경계를 서던 무사제는 언제 사제들에게 알리러 가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 음산하게 문이 열리자 저도 모르게 무사제는 겁에 질리고 말았다.

“루가 님이십니까?”

열린 문 안은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뚫어져라 그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무사제는 천천히 바깥으로 나오는 흰 손에 소스라쳤다.

“헉!”

공포가 앞선 탓에 손의 주인이 투이나일 거란 생각은 뒤늦게 찾아왔다.

하얀 손보다 위쪽에서 날아온 공격은 더 늦게 알아차렸고 말이다.

빡!

미간을 세게 얻어맞은 무사제가 뒤로 벌렁 넘어졌다.

그의 몸이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죽은 건 아니죠?”

“기절만 하도록 조절했습니다.”

라카인이 천천히 투이나의 뒤에서 걸어 나왔다.

일부러 섬뜩하게 주의를 끌었던 투이나가 찜찜하게 손을 거둬들였다.

소리 없이 무사제를 처리해 놓고도 라카인은 여전히 망설이는 것 같았다.

그가 아는 탈옥치고는 너무 쉽고 조용했던 것이다.

사실 가장 현실감이 없는 건 그의 탈옥을 돕고 있는 투이나였다.

“안에다 들여놓을까요? 여름이라도 바깥에서 누워 있다간 감기 걸리겠어요.”

“예.”

라카인이 무사제의 상체를 들어 올리자 투이나가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신속하게 증거를 인멸한 두 사람이 건물 안을 빠져나왔다.

투이나를 데리고 몸을 숨기면서도 라카인은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조금만 기다렸다가 순찰만 지나가면 바로 이동해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예.”

본능적으로만 대답하던 라카인이 힘겹게 정신을 다잡았다.

“그런데 어디로 가실 겁니까?”

“마구간이요.”

라카인은 마구간지기를 무사제와 똑같은 방법으로 처리했다.

‘으음……. 정말 죄가 쌓여 가는걸.’

투이나가 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정신을 잃고 짚단 위로 질질 끌려가는 마구간지기가 정말 볼썽사나웠던 것이다.

그녀는 라카인이 말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들어가는 모습을 응시했다.

‘명령이라서 저렇게 따르는 거겠지.’

그 사실이 기쁘면서도 씁쓸했다.

투이나는 사제들에게 라카인이 스스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 탈옥을 제안했다.

예상대로 라카인은 곧바로 명령에 따랐다. 혹시나 거부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게 무색해질 정도로 빨랐다.

‘이걸로 사제님들도 믿으시겠지.’

아르파는 라카인에게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투이나는 차라리 이번 기회에 라카인이 새로 정착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주고 싶었다.

‘모하세스로 돌아가 봤자 또 이런 일을 반복할 뿐이야.’

샨이 돌아갈 때까지 아르힘에 숨겨 줘도 그는 결국 자신에게 휘둘릴 것이다.

라카인은 가능하면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아도 될 만큼 먼 곳에서, 안전하게 살아 줬으면 한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인걸.’

말을 끌고 오는 라카인을 보니 마음이 아프도록 욱신거렸다.

“안장을 올리겠습니다.”

“좋아요. 그리고 말이 한 필 더 필요해요.”

투이나가 무릎을 짚으며 일어났다.

라카인은 조심스럽게 사양했다.

“갈아탈 말까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두 마리나 훔쳐 가기엔 말은 너무 비쌉니다.”

“아뇨. 저도 따라갈 거라서요.”

“……예?”

마구간으로 들어간 투이나가 콧김을 내뿜는 말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장 순했던 아이를 껴안으며 투이나가 그를 돌아보았다.

“혼자 보낼 생각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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