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해한 구혼자 6권
22.
…여자는 마지막으로 대지를 데려왔을 때 약속받았던 에메랄드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내었다.
감옥 안은 경고받은 그대로였다.
기름이 쏟아지지 않게 조심하며 투이나가 등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도 이곳 안까지 들어와 보는 건 처음이었다.
훅 끼치는 열기에 투이나가 입을 틀어막았다.
‘아직 대낮인데.’
간신히 공기만 통하게 둔 듯 천장 밑에 뚫린 공간은 거의 햇볕을 들여보내지 못했다.
그런데도 더위는 그대로였다.
어둡고 습한 내부에 당황한 투이나가 등잔을 돌렸다.
너무 열악한 환경이었다.
‘신전에도 이런 곳이 있었다니.’
게다가 규모도 꽤 컸다.
범죄자는 의회에서 맡아 관리하는 줄 알았는데.
투이나는 찌푸린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죄 없는 사람이라도 여기 오래 있다간 미치고 말 거야.’
투이나는 창살로 가려진 안쪽에 무언가 웅크리고 있는 걸 발견했다.
“라카인?”
큰 덩어리가 꿈틀거렸다.
놀란 투이나가 뜨거운 기름이 튀는데도 달려갔다.
“……루가 님?”
눈이 부신 듯 라카인이 한 손을 들어 올려 시야를 가렸다.
그의 손에 감긴 붕대가 새까만 게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제님이 치료를 거부하셨구나.’
투이나는 굳은 표정으로 그의 상태를 살폈다.
다치거나 아파 보이진 않았지만 주저하며 창살을 잡은 손가락이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말라 있었다.
라카인은 빛에 눈이 적응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바로 손을 내렸다.
꿈이라기엔 창살 너머에 서 있는 투이나가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음영이 진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식사는 제대로 하는 거예요?”
“……예.”
멍하니 그녀를 보던 라카인이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뒤늦게 척추에 힘이 들어갔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그는 흐트러짐 없이 서려고 애썼다.
갑자기 제 살처럼 익숙해진 공기에서 나는 냄새와 더러운 차림새가 무척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런 걸 신경 쓸 처지도 아닌데 말이다.
라카인이 한발 물러섰다.
“이런 곳에 혼자 오시면 아니 됩니다.”
정신이 들고 보니 신경 쓰이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렁이는 빛 속에서 투이나는 초췌해 보였고, 호위조차 없었다.
라카인을 가장 못 견디게 만드는 건 다시는 보지 못할 줄 알았던 사람이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슴부터 뱃속까지 낱낱이 까발려지는 기분에 라카인은 빛이 닿지 않는 쪽으로 숨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
하지만 복종으로 훈련된 다리는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걱정되어서 와 봤어요.”
“죄인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카인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그는 빨리 그녀를 이 공기 나쁜 곳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일차적인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투이나는 라카인이 사무적으로 대하려고 자르는 꼬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제가 무사해서 싫으신가요?”
“……!”
꽉 막혀 있던 라카인의 표정이 흔들렸다.
투이나는 잔뜩 힘이 들어간 채로 창살을 움켜쥔 라카인의 손을 붙들었다.
신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한순간 그녀가 닿은 손등이 타는 듯이 뜨거워졌다.
“아니면 임무가 끝나서 더 이상 제 호위가 되어 주지 않는 건가요?”
라카인의 폐가 납작해졌다.
그렇다.
이제 그녀에겐 숨겨지지가 않는다.
투이나는 이미 모든 게 샨의 명령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라카인이 더듬거리며 감히 물어보았다. 말해 놓고도 자신의 뻔뻔함에 손목을 자르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다행히 그가 결심을 내리기 전에 투이나의 표정이 풀렸다.
라카인이 간신히 호흡을 조이던 목구멍을 풀었다.
“상처는 감쪽같이 아물었어요.”
투이나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앉아요, 라카인.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라카인은 머뭇거렸다.
먼저 앉으면 감히 투이나의 손을 뿌리치는 결례를 저지르게 된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투이나는 바닥에 등잔을 내려놓느라 창살을 잡은 채 허리를 굽혔고, 라카인은 천천히 그녀의 손을 얹은 채로 팔을 내렸다.
곧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앉게 되었다.
생각에 잠긴 투이나가 라카인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아직도 샨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나요?”
“…….”
라카인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투이나는 지그시 가슴이 조여 왔다.
“라카인, 지금 당신을 사형하겠다는 이야기가 오가고 있어요.”
그건 베인이 감추려던 이야기였지만 소문은 나기 마련이다.
라카인은 여전히 표정 변화가 없었다.
“샨도 같은 걸 요구하고 있어요. 신전이 지금 시간을 끄는 건 당신을 살려 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전의 방식대로 재판하기 위해서예요.”
신전의 자비는 화형이 아니라 참형을 택하게 해 주겠다는 쪽이었다.
나라에 처음 있는 루가라는 신분을 향한 공격이라, 권위를 위해서라도 강력한 처벌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녀는 절대 안정을 취하라는 베인 몰래 시종들에게서 이야기를 전달받고 있었다.
그나마 샨과 사제들이 아직 싸우는 중이라 사형이 확정되진 않았다는 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투이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아르힘에게 호소해 볼 생각이었다.
신은 원래 재판에 개입하지 않지만, 라카인이 불리해진 건 결국 다른 신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어서다.
‘신보다 먼저 라카인에게 오고 말았지만.’
가슴이 갑갑해진 투이나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지난번에 내게 돌아온 건 뭐였어요? 샨이 당신의 목숨을 노린다면, 그 지경까지 간다면 명령을 거부할 수 있을 것처럼 내게 돌아왔잖아요. 왜 지금은…….”
“모하세스 님은 이미 제 목숨의 주인이십니다.”
욱신.
투이나의 뺨이 움찔했다.
빛은 희미한데 그늘은 짙은 얼굴이 모르는 사람처럼 낯설었지만, 투이나는 여전히 뿌리치지 않는 체온을 더 믿기로 했다.
“그래도 돌아오고 싶었던 건가요?”
“…….”
“라카인, 기억해 봐요.”
투이나가 간절한 목소리를 냈다.
“왜 내게 자신의 죄를 밝혔어요?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작은 떨림이 퍼져 나갔다.
“그건 샨의 명령이 아니었잖아요.”
“…….”
“사실은 용서받고 싶었던 거 아닌가요?”
투이나는 거세게 몰아붙였다.
“저지른 죄가, 저지를 죄가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었던 거 아닌가요?”
“왜 저의 죄를 물으십니까?”
드디어 라카인의 입에서 말이 터져 나왔다.
“왜 원망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죄인입니다.”
“누구나 죄를 가져요.”
투이나는 단단히 못을 박았다.
“라카인이 죄인이 아니라 말한 적 없어요. 하지만 후회했잖아요.”
“후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지금보다 더 그 말을 절절히 느낀 적이 없었다.
창살 안에서 삶을 후회로 덧칠하는 동안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도 투이나는 굳건했다.
“제가 왜 루가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모르겠습니다.”
“저도 몰라요.”
투이나가 일부러 큰 미소를 그려 보았다.
“하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제 안에서 달라지지 않은 게 있다면 사소한 것들을 사랑하는 버릇뿐이에요.”
투이나가 창살 안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후회가 아니라, 달라지고 싶어 하는 마음을 언제나 사랑해 왔어요.”
라카인이 처음으로 도망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면서도 그녀에게서 눈과 귀가 떨어지지 않았다.
억지로 찢어발겼던 마음이 물속에서 진저리치듯이 말을 빨아들었다.
“신을 믿든 왕을 믿든, 사랑하든 미워하든, 그런 건 상관없어요. 같은 걸 믿는다면 기쁘겠지만, 결국 우리에겐 보다 옳은 일이 있잖아요.”
투이나는 창살 너머로 손을 뻗었다.
“결국엔 당신도 바뀔 수 있다는 사실 말이에요.”
그녀가 눈을 가린 라카인의 머리카락을 넘겼다.
어둠 속에서도 절실한 두 눈동자는 빛이 났다.
그의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한 그녀는 목이 꽉 메었다.
그에게 간절함이 있었다.
“이건 라카인이 준 희망이에요.”
그는 몸 안쪽에서부터 터질 것처럼 뜨거운 열기가 부푸는 걸 느꼈다.
뼈가 드러난 곳부터 근육이 지나는 부분까지.
핏줄을 타고 신경을 태웠다.
그러겠노라 말하고 싶어 하는 희망이 이토록 몸을 채우며 커질 수 있는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사람은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세요.”
그럼 사랑해 주실 겁니까?
라카인은 지나치게 몸을 가득 채운 나머지 견디지 못하고 터져 나올 뻔한 감정을 억눌렀다.
감히, 그럼에도 애가 타도록,
원했다.
“마음만으로는 안 돼요, 라카인. 정말로 깨닫고, 행동을 바꾸고, 당신이 정말 달라진다면 나는…….”
나를 살해한 구혼자까지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투이나가 차오르는 슬픔을 억눌렀다.
한때 겪어 보았던 죽음처럼 친숙한 통증이 몸을 채웠다.
인간은 믿음으로만 사랑할 수가 없었다.
라카인은 투이나가 같은 눈을 하고 같은 고통을 담고 자신을 바라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때서야 비로소 라카인은 루가가 아닌 투이나를 본 것 같았다.
“그리하겠습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리하겠습니다.”
라카인이 창살 너머로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믿고 싶어서 마주 움켜쥐는 동작이 어떤 절실한 기도보다도 질박하게 영혼을 전달했다.
“그리할 것입니다.”
세 번의 다짐이 울려 퍼졌다.
투이나에게서 비로소 망설임이 씻겨나갔다. 의심과 함께 떨어져나간 소금기가 그녀의 눈에 고였다.
“믿어요.”
그러나 신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라카인?”
투이나는 갑자기 크게 몸을 떠는 라카인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힘껏 악 다문 턱에 핏대가 서 있었다.
“왜 그래요!”
부서져라 창틀을 움켜쥔 라카인이 흐트러진 호흡을 내보냈다.
투이나가 보고 있다.
그는 서둘러 진정하려고 애를 썼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긴요!”
놀란 투이나가 창살 안으로 팔을 뻗었지만 그가 움직이는 게 더 빨랐다.
그녀의 손을 뿌리친 라카인은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물러났다.
“……공기가 탁합니다, 루가 님.”
침착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완연한 거절에 투이나는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저 놀랐을 뿐입니다.”
라카인은 완강했다.
“돌아가십시오, 루가 님.”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 된 투이나가 머뭇거렸다.
“……등잔은 놓고 갈게요. 여긴 많이 어두우니까.”
“…….”
“또 올게요.”
조심스럽게 천이 끌리는 소리가 났다.
라카인은 멀어지는 그녀의 발소리를 절박하게 마음에 담았다.
삐걱이며 문이 열렸다 닫히고도 한참을 기다린 뒤에야 라카인은 다시 빛이 있는 쪽으로 걸어 나왔다.
작은 불꽃이 일렁이는 등잔은 간신히 그를 비춰 주었다.
라카인은 흔들리는 빛에 의지해 천천히 양쪽 손바닥에 감겨 있던 붕대를 풀었다.
새까만 천이 하나씩 풀려 나가고, 그에게 극심한 통증을 선사했던 정체가 드러났다.
커다란 회색 얼룩 한 쌍이 손바닥 위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 * *
어두운 곳에서는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바깥으로 나오면서 투이나는 별로 오래 머물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셋이었던 사람이 넷으로 늘어날 만큼은 충분히 되었으니까.
놀란 나머지 투이나는 잘못이라도 한 사람처럼 급히 문을 닫았다.
“어떻게 여길……?”
“성소에 가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베인이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투이나는 난감해졌다.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꼭 그를 속이고 밖으로 나온 것 같지 않나.
라카인을 가둬 둔 문 앞에서 딱 마주치다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베인은 언제나 유하던 눈동자에 짙은 배신감을 드리우고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왜 하필 이곳으로 오신 겁니까.”
그가 입술을 깨물더니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는 그녀를 잡아끌었다.
“몸이 상하실 겁니다. 돌아가지요.”
무작정 돌아가려는 베인에게 손목을 붙잡혔다.
눈이 동그래진 투이나의 입에서 무심코 질문이 튀어나갔다.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베인의 유려한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루가 님이 계신 곳이면 제가 어디든 따라갈 것임을 모르셨습니까?”
투이나는 질문을 하기 전보다 훨씬 당황하고 말았다. 그의 목소리에 진하게 밴 집착이 당황스러웠다.
‘베인이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상단에서 온 제이드마저 눈이 휘둥그레진 걸 보니 절대로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베인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지만 투이나는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베인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설명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베인.”
투이나가 계속 감옥 앞을 지키듯 서 있자 더는 참지 못한 베인이 그녀를 와락 품으로 끌어당겼다.
물씬 풍겨오는 그의 체취에 머리가 아찔했다.
“기어이 저를 못난 사람으로 만드시는군요.”
베인이 갈급하게 투이나를 당겼다.
그녀의 시선을 품 안에 가둬 놓고서야 벅차게 약동하던 감정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투이나는 왜 이렇게까지 그가 초조해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상황은 그녀에게 이해할 겨를도 주지 않았다.
“좋아. 현장 급습이군.”
베인과 투이나의 신경이 동시에 곤두섰다. 베인이 홱 투이나를 가린 채 몸을 돌렸다.
샨이 한껏 치켜든 입매를 하고 그들을 응시했다.
“놀랄 것 없다. 이제 와 새삼.”
샨은 관대히 입을 놀렸다.
하지만 새파랗게 타오른 눈빛이 그의 내면을 짐작케 했다.
“연인의 밀회인가? 참 신파를 좋아하는군, 그대도.”
샨이 목덜미를 눌렀다. 그는 여전히 얼어붙은 것처럼 서 있는 두 사람에게 냉소했다.
“자아, 절대로 회피할 수 없는 영적인 문제로 거처를 나올 수 없다는 루가가 바깥에서 발견되었군.”
“…….”
“이제 내게 시간을 내줄 테지.”
빙글거리는 목소리로 샨이 투이나를 지목했다.
투이나는 힘주어 누르는 베인의 어깨 너머로 간신히 머리를 내밀었다.
“어떻게 지금 따라온 거예요?”
“뻔한 거 아닌가?”
샨이 입꼬리를 쭉 내렸다.
“감시를 붙였지. 내가 확언하건대 수족들의 주의력이 너무 부족해. 사람이 다닐 길만 살펴보잖나.”
“그게 정상인데…….”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웅얼거리는 투이나가 어지간히 신경 쓰였는지 베인이 지긋이 그녀의 뒤통수를 감쌌다.
“루가 님 앞에서 스스로 죄를 실토하다니 어리석군요.”
“결정권도 없는 자가 벌써 죄를 말하나?”
시선은 채찍처럼 휘두르면서도 샨은 끝까지 여유로운 말투를 잃지 않았다.
“이제야 만났는데 그렇게 얼굴을 감추고 있으면 섭하지. 안 그런가, 루가?”
샨이 낮은 성조로 목울대를 울렸다.
“이리 와.”
등골이 오싹해졌다.
베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보낼 수 없습니다.”
샨은 귓가에 파리가 날린다는 시늉이었다.
베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움직이는 투이나를 보았기에 한층 더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베인은 샨의 등장보다 투이나가 빠져나가려고 했다는 사실에 더 충격을 받은 듯했다.
“어째서 이러십니까?”
“계속 이러고 대화할 순 없잖아요! 샨이 이대로 오해하면…….”
“우리 사이는 오해가 아니잖습니까.”
멈칫.
투이나가 둥글게 뜬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해여야만 하잖아요.”
“이제 비밀로 하기 싫습니다.”
“샨 성격에 가만있을 리 없어요.”
“그자를 잘 안다는 듯이 말씀하지 말아 주십시오.”
베인이 턱으로 그녀의 정수리를 꽉 눌렀다.
“싫습니다.”
“베인!”
“어차피 저자도 이미 확신하고 있지 않습니까?”
샨은 두 사람의 실랑이가 길어질수록 눈이 차가워졌다.
“루가.”
샨과 투이나의 시선이 부딪쳤다.
“내가 기다리고 있다.”
말끝이 으르렁거리며 튀어 올랐다. 당장 튀어 오지 않으면 주변에 있는 목들을 죄다 꺾어 버릴 기세였다.
죽기 전에나 경험했던 샨의 협박에 투이나의 숨이 턱 막혔다.
아무리 베인이 그녀를 막고 있다지만 신전 한복판에서 샨이 난리치는 꼴을 또 볼 순 없었다.
‘하필 아르힘 님도 안 계시는 때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투이나는 그나마 대화가 됐던 베인에게 집중했다.
“이미 라카인을 가둬 둔 문제를 집요하게 들먹이고 있잖아요. 베인까지 얽혔다간 아르힘 전체로 문제를 확대시킬 거예요. 나라 대 나라 싸움이 되면 힘들어져요.”
“또 다른 자에게 가시려고요?”
베인이 슬프게 눈을 접었다.
억지로 붙잡고 있는 사람은 그인데도 그녀보다 비참하고 처연해 보였다.
“저는 언제나 기다리기만 하는군요.”
투이나의 표정이 일변했다. 역시 그녀는 빠르게 이해했다.
언제나 구혼자들 중에서 덜 위험한 쪽은 그였다.
선한 기다림은 가장 마지막에야 보상받는가?
베인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투이나는 그걸 알아차리지 못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투이나의 손가락이 아프게 그의 등을 긁었다.
베인은 뒤늦은 그러쥠에도 투이나를 천천히 떼어 놓았다.
망연히 서 있는 그녀의 시선이 처음으로 제게 못 박혔는데도 기쁘지 않았다.
베인은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투이나의 관심을 붙들어 놓았다는 질척한 포만감은 뱃속에 감추어 둔 채로.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투이나는 여전히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는 루가 님의 종입니다.”
베인은 지금까지 억지로 투이나를 옥죄었던 일이 거짓말처럼 정중하게 그녀의 손등에 입 맞췄다.
그리고 완전히 선택을 맡긴 채 물러났다.
샨은 드디어 투이나가 베인에게서 떨어져 나왔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상황이 아까보다 악화되었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저 악랄한 혓바닥 같으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상황을 전부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저 상인 놈이 투이나에게 분명 무슨 짓을 했다. 그녀는 누가 귀로 독이라도 쏟아 부은 표정이었다.
크게 뜬 채로 굳어 버린 눈동자가 천천히 돌아갔다.
“……미안해요, 샨.”
“하!”
사과부터 들은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보다시피 전 베인을 연인으로 여기고 있어요.”
“웃기는군.”
샨은 또 한번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아까보다 훨씬 웃음기가 사라진 소리였다.
“가능하면 구혼 기간이 끝날 때 밝히고 싶었지만…….”
“그때까지 멍청하게 속고 있으란 소린가?”
“정말 미안해요.”
샨은 그녀의 사과보다 더 이상 마음이 바뀌지 않을 거란 태도가 더 거슬렸다.
바득 이를 간 샨이 일부러 소리를 높였다.
“사과할 필요 없다.”
“……?”
“결혼 전에 남자 한둘 쯤 만나는 게 무슨 흠이라고.”
샨이 오만하게 베인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다분히 의도적인 시선이었다.
“꽤 즐긴 모양이지만 결혼은 신중해야지.”
“전 그럴 생각이…….”
“그렇지 않으면 지금부터 세 번째 구혼자가 구혼 대상을 납치한 채 농성을 벌이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샨!”
투이나가 기겁했다.
샨은 그제야 좀 만족스러웠다.
저렇게 소리칠 기력이 있으니 확실히 부상은 다 나았다는 확신도 들고, 주제도 모르고 노려보는 눈알을 나중에 으깰 계획에 꽤 만족스러웠다.
아르파인들이 연인 관계에 관대한 건 맞았지만, 왕에게는 관대해지지 않을 권리가 있다.
투이나가 죽어 가던 순간보다 지금처럼 생동하는 표정이 훨씬 자극적이었다.
쫓을 맛이 났다.
“루가의 구혼자로서 그대가 갇혀 있는 꼴을 묵과할 수가 없군.”
그가 이죽거렸다.
투이나는 그가 꽤 민감한 부분을 파고든다고 생각했다.
베인을 사랑하기에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말은 얼마나 웃긴 변명이 될 것인가.
아무리 기절을 하고 고통에 시달리더라도 바뀌지 않는 그녀의 선택이었다.
샨도 그걸 알았다.
“그대는 이미 루가가 아니라 인질이 되었으니 구출을 원하겠지?”
“인질이라니 표현이 과하군요.”
투이나마저 울컥하자 베인은 오랫동안 공들여 왔던 일을 단숨에 깨고 들어오는 샨을 더 이상 놔둘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습니다.”
“또 시작이군. 아르힘에서는 대표로 나설 인간조차 제대로 정해 놓지를 않나?”
샨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더는 참아 줄 수가 없군.”
언뜻 스쳐 지나간 눈빛이 불길했다.
‘그런데 지금 샨의 하인들이 좀…… 지나치게 많이 오지 않았나?’
판단은 빨랐다.
“베인, 이리 와요!”
“예?”
투이나가 조금 전에 닫았던 감옥 문을 다시 비틀어 열었다.
어리벙벙하게 서 있던 무사제들부터 안쪽으로 집어넣은 투이나가 베인도 그들에게 떠밀었다.
“무슨……!”
“아, 좋은 판단이다, 루가.”
샨이 짧게 손아귀를 부딪쳤다.
“그런데 얼마나 버티려고?”
샨의 뒤로 도열해 있던 하인들이 순식간에 앞으로 뛰쳐나왔다.
놀란 베인이 한발 늦게 투이나를 붙잡으려고 했다.
당장 문을 닫으려던 그녀는 다급하게 저항하는 베인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걸 보았다.
‘닫으려다 다치겠어.’
이미 건물 규모를 확인했던 샨은 비릿한 미소까지 걸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가 농성을 벌여 봤자 어차피 금방 끝날 걸 확신한 표정이었다.
베인도 상황을 이해했는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상대하지 마십시오, 루가 님!”
“굳이 피를 보겠다면 말리진 않겠다만.”
샨이 여유만만하게 말했다.
“인질은 많을수록 좋거든.”
“내가 갈게요.”
투이나가 이를 악물었다.
또다시 통증이 시작되고 있었다.
“안 됩니다! 무사제들이 곧 도착할 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
베인은 애타게 말렸다.
그러나 샨의 하인들은 이미 투이나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우리 조금만 나중에 만나요, 베인.”
“루가 님!”
“데려와라.”
투이나가 문에서 떨어졌다.
옅은 서글픔은 결연한 눈동자에 거의 가려져 있었다.
“제가 할 일을 해야죠.”
기다렸다는 듯이 하인들의 팔이 그녀를 휘감았다.
“제 발로 갈 수 있어요.”
하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 도망가요. 놔도 돼요.”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거짓말이었지만 정말 아프다고는 들었다.”
샨의 눈썹이 까딱였다.
투이나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아찔해지는 시야를 숨겼다.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지?’
배려해 줄 거면 협박을 하지 말든지.
어쨌든 샨이 직접 언급했으니 투이나는 더 이상 통증을 감추지 않았다.
빠르게 차오른 고통이 욱신거리는 갈비뼈를 눌렀다.
“풀어 주면 통증에 더 좋을걸요.”
“안 돼.”
샨이 직접 걸어와 투이나의 팔을 받쳤다. 부축인지 연행인지 모를 몸짓이었다.
“이제 내게도 시간을 내놓아야지.”
“충분하지 않았나요?”
“말을 바꾸지. 공평하게.”
샨의 눈동자가 하강하는 매처럼 날았다.
“우리가 연인으로 지낸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지 않나?”
기절하려는 정신을 간절히 붙든 투이나 앞으로 번들거리는 샨의 눈이 내려왔다.
투이나는 그의 표정보다 하얗게 변하는 시야에 더 정신이 팔렸다.
‘우와, 이래선…… 정말 차라리 기절하는 게 덜 아프겠어.’
왜 아프지도 않았는데 몸이 먼저 기절을 택했는지 체감이 됐다.
샨은 비틀거리는 투이나를 다르게 오해했는지 툭 내뱉었다.
“그렇게 좋나?”
“놀릴 정신 없어요.”
투이나는 어질어질한 몸을 애써 옮겼다. 원치 않게도 샨의 팔에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 너무도 정확하게 보였다.
“베인에게 보일 걸 알고 이러는 거잖아요.”
“그래.”
샨이 씩 웃었다.
“이젠 그대가 뭘 더 괴로워하는지 알게 됐거든.”
샨이 짐짓 자상하게 웃으며 팔을 벌렸다.
“그러지 않으면 그대는 절대 내게 안 올 테니까.”
“정말, 가기 싫어지는 말을…….”
“그러게 왜 버티나.”
투이나는 진절머리를 내며 기절했다.
샨은 풀썩 쓰러지는 그녀를 가뿐하게 잡았다.
그가 입 속으로 혀를 찼다.
“그래도 이번 한 번만큼은 그대를 봐서 넘어가 주지.”
그가 눈짓했다.
아까부터 감옥에서 뛰쳐나오려는 베인 앞에서 대치하던 하인들이 물러났다.
정신을 잃은 투이나는 미동도 없었다.
샨이 미심쩍게 그녀를 한 손으로 들어 보았다.
“듣고 있나?”
“…….”
“일어나면 다시 물어봐야겠군.”
샨은 늘어진 투이나를 들쳐 안았다.
그리고 잠깐 고민하다가 맥없이 기우는 투이나의 뒤통수를 특별히 받쳐 주었다.
* * *
“잘 참으신 겁니다.”
무사제 하나가 문설주를 움켜쥔 베인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다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싸움의 빌미 자체가 없어야 하니까요.”
“요새 분위기가 어떤지 잘 아시잖습니까.”
굳은 등으로 서 있던 베인이 그 말에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루가 님이라도 바쳐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건 좀 과한 표현이군요. 모하세스가 험악하긴 해도 나름대로 루가 님을 신경 쓰고 있지 않습니까.”
“어쨌든 결혼하려면 신부가 살아 있어야 하고요.”
“……저자라면 시체와도 결혼할 겁니다.”
무사제들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베인은 이제 잘 보이지도 않는 투이나를 다시 눈으로 찾았다.
‘제가 가장 싫은 게 뭔지 아십니까?’
베인은 들려 나가는 투이나를 끝끝내 외면할 수가 없었다.
‘당신이 저를 걱정하여 하는 일도 과한데, 제가 아닌 다른 자들까지 신경 쓰다가 그대로 영영 돌아오지 않으실까 두렵습니다.’
그때 뒤쪽에서 기침 소리가 났다.
“……루가 님?”
“우왓!”
“누, 누구냐!”
놀란 무사제들이 주의를 끌어당겼다.
베인은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안쪽 철창에서 기어 나온 인영이 보였다.
다시 느껴지는 인기척에 라카인이 앞쪽으로 나와 본 것이다.
“루가 님께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죄인에게 놀랐다는 사실이 창피해진 무사제들이 얼버무렸다.
베인은 어둡고 습한 공기도 불쾌했지만, 퀴퀴하고 더러운 라카인의 발치에 작은 등불이 놓여 있는 게 몹시 탐탁지 않았다.
분명 투이나가 놓고 간 물건일 테니까.
‘당신을 섬기는 자들은 받을 자격조차 없습니다.’
베인이 그에게 다가갔다.
“모하세스가 루가 님을 끌고 갔습니다.”
감옥에 갇힌 짐승은 동요하지 않았다.
어떤 감정 한 터럭이라도 보였더라면 베인은 자신의 결정을 재고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태연한 라카인의 얼굴에 베인조차도 화가 치밀고 말았다.
‘당신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투이나가 모든 죄업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그를 믿었는지 아는데.
‘고작 이런 자들을 아끼고자 사랑하는 분이시라면 제가 그 짐을 덜어 드리고야 말 것입니다.’
베인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진정 루가 님을 생각한다면 그분께 누가 되지 않도록 자결하십시오.”
“…….”
“미친 왕에게 바치는 충성을 배신하지도 못하는 신자가 루가 님을 따르는 척해 봤자 역겹기만 합니다.”
라카인은 끝끝내 말이 없었다.
베인은 차가워진 얼굴로 그에게서 등불을 빼앗아 갔다.
“나가서 사제님들을 불러 주십시오.”
“예? 그러지요.”
그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베인은 감옥 밖으로 나가자마자 곧장 쓸모가 없어질 등잔불을 바로 꺼버렸다.
애초부터 그에겐 필요 없던 물건이다.
라카인은 베인이 가져간 등잔은 곧 잊어버렸다.
투이나가 준 것이긴 하지만 어차피 빛으로 오늘 보고 싶은 것은 다 보았다.
투이나도, 그 얼룩도.
라카인은 떠나간 사람들을 놓아 둔 채 홀로 생각에 잠겨들었다.
* * *
투이나가 자발적으로 샨의 거처로 갔다는 소문이 수도로 퍼질 때까지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어머, 어머, 그 아르파 왕한테?”
“하지만 첫 번째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크로퍼드라고 하지 않았어?”
“분명 둘 사이가 심상치 않다고 신전에서 일하는 내 사촌이 그랬는데.”
“왕의 다른 매력에 넘어가신 건가?”
“그럼 내기가 어떻게 되어 가는 거야?”
소문 한 번에 내기에 걸린 판돈이 크게 출렁였다.
수수료와 매번 갱신되는 배당률을 계산하느라 즐거운 비명을 질러야 할 크로퍼드 상단은 의외로 조용했다.
사람들은 그걸 두고 루가의 관심이 떠나간 좌절감으로 해석했다.
베인이 루가와 결혼할 가능성이 낮아졌으니 좋아할 수가 없을 거라고 말이다.
의회에서는 이제야 숨통이 좀 트인다는 시늉을 했다.
물론 샨 또한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기에, 이참에 군대를 양성하자는 주전론자들이 눈을 빛냈다.
신전에서는 밤새 토론이 이어졌다.
자발적으로 간 투이나 덕분에 외교 문제로 번질 뻔한 걸 간신히 치정 문제로 붙잡아 두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구혼 기간을 더 짧게 줄였어야 했습니다!”
“아르힘 님이 공표하신 기간을 어떻게 바꾼단 말입니까.”
“모하세스의 하인을 그렇게 많이 들여놓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번 일로 여차하면 그들의 쓰임새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아르힘 님이 왜 제지하지 않으신 걸까요? 그분만 믿고 아르파의 수작을 다 들어줬는데…….”
“어쩌면 더 심각한 상황이 되어야만 나서실지도 모르지요.”
“그게 사제가 할 말입니까? 신께서 나설 일 없도록 하는 게 우리 일이거늘!”
“하지만 루가 님은 이미 모하세스의 거처로 가셨습니다. 이제 와서 우리가 무슨 빌미를 잡아 그 많은 하인들을 다 쫓아낸답니까?”
“파견 보낸 사제와 무사제들을 전부 불러들이면…….”
“남은 지역들은 다 엉망진창이 되겠지요.”
“신도들이 떨어져나가면 결국 아르힘 님이 약해지시니, 지붕을 뜯어다가 벽에 새는 물을 막는 꼴에 불과합니다.”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사제가 푸념했다.
“아르힘 님은 대체 무엇을 바라시고 루가 님에게 구혼자를 주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나날이 혼란만 커지고 있잖습니까.”
“우리가 어찌 아르힘 님의 뜻을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사제의 얼굴이 침통해졌다.
“대화의 자유를 루가 님에게만 허락하신 것을.”
잠시 토론이 중단되었다.
조용해진 그들은 각자 아르힘에게 가진 생각을 키워 보았다.
그러다 한 사제가 중얼거렸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보다 높은 곳으로 가는 발판일지도 모르지요.”
* * *
사람들의 추측과 탁상공론들은 투이나의 꿈조차 되지 못할 자리에서 흩어져 갔다.
웅크려 있던 투이나가 낯선 감촉에 이마를 찡그렸다.
‘보드라운 털이네…….’
투이나는 비단으로 감싼 베인의 거처에 익숙해져 있었다. 낯선 감촉에 정신이 돌아올 만큼.
‘털……? 뭐야?’
“흡!”
“일어났나?”
투이나가 주춤 바닥에 팔을 짚었다.
샨이 침상 위에서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깨어날 때까지 지켜본 건가?’
얼이 빠진 투이나에게 샨이 확신을 주었다.
“한참을 자더군.”
투이나는 깨어나자마자 샨을 상대해야 하는 부담감을 의문으로 해소시켰다.
“……다른 사람은 무사한가요?”
“아르힘이 낫게 만들지 못하는 병이라니, 정체가 뭐지?”
“왜 절 억지로 데려오려던 거예요?”
“식사라도 하겠나?”
서로 자기 할 말만 하는 기묘한 대화가 이어졌다.
투이나는 두고 온 베인 걱정이 산더미였지만, 샨은 끝까지 대답해 주지 않을 속셈이었다.
“대답 하나에 질문 하나씩 교환하도록 할까.”
이런 식으로 말하며 웃었으니까.
투이나는 껄끄럽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화가 났군요.”
“흠…….”
샨이 고민하듯 허벅지를 벌려 넓게 앉았다.
투이나는 그제야 자신이 누워 있던 침상이 샨이 쓰던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가 일어나려고 하자 샨이 그대로 누워 있으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더니 짐짓 한가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더 화가 날 이유가 없다.”
샨이 턱을 괴었다.
“그대를 데려왔으니.”
그러나 턱을 괸 손가락 너머로 드러난 눈동자가 서늘했다.
‘……여전히 화가 났잖아.’
투이나는 일단 예전처럼 돌아온 몸 상태에 감사했다. 또 기절하기 직전에 샨이랑 대화하긴 힘들 테니까.
“내가 뭘 하길 바라죠?”
“사과하겠단 소리는 않는군.”
샨은 차라리 그게 낫다는 표정이었다.
어려운 매듭을 풀어야 하는 시험에 든 것처럼 투이나가 마른 입술을 살짝 핥았다.
“속인 건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구혼자들을 고르게 만나려던 건 기회의 공평을 말한 거였어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잖아요.”
“…….”
“샨, 결국 당신이 아닌 사람과 결혼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잖아요.”
“어쩔 수 없는 일은 없다, 루가. 하지 않는 일이 있을 뿐이지.”
투이나의 말이 끝날 때까지 듣는 시늉을 하던 샨이 한가롭게 말했다.
“내가 상인 놈을 죽인 다음에도 마음을 어쩔 수가 없겠는가?”
투이나가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기어이…….’
그토록 우려했던 일이 샨의 입에서 나오고야 말았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막상 들으니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바닥에 흥건히 번져 가던 피를 떠올렸다.
그건 한때 자신의 피였기에 위에 누운 사람이 누구인지는 보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상상 속에서 베인이 피 웅덩이 위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자신처럼 힘없이 쓰러진 채 생명을 흘려보낸다면…….
첫 번째 시험에서 썼던 검을 드리운 채 베인을 밟은 샨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선명한 상상에 투이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첫 번째 시험은 베인이 이겼잖아?’
하지만 뇌리에 남은 잔상은 쉽게 지워지지가 않았다.
샨이 갑자기 구미가 당긴다는 표정을 지었다.
투이나는 황급히 감정을 거둬들였다.
여기서 샨에게 하지 말라거나 되도 않는 협박을 하는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이유를 줘야 해. 그런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지?’
투이나가 아는 샨은 결혼으로 동맹을 맺기를 원했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사절을 보내도 되었을 텐데.
모르면 물어보는 버릇이 들었던 투이나가 입을 떼었다.
“샨, 당신은 아르힘 님의 힘이 필요했던 건가요, 아니면 이 나라가 필요했던 건가요?”
뜻밖의 말에 샨이 피식 웃었다.
화제를 돌리려는 시도치고는 투이나가 진지했다.
“그냥 그자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쉬울 것을.”
“하지만 그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니잖아요.”
투이나가 의아하게 되묻자 기어이 샨이 성질을 냈다.
“내가 원하니 결혼해 주겠다는 건가? 그다음에는? 나와 결혼한 후에 그자와 정만 통하겠다고?”
“네에? 그런 말이 아니……!”
“절대 안 되지.”
샨이 양손으로 투이나의 뺨을 붙잡아 올렸다.
억지로 턱이 닫혔다. 반사적으로 투이나가 그의 손목을 꽉 쥐었다.
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잊게 해 줄 수 있다.”
“대체 뭘…….”
“방해되는 모든 것들을.”
샨의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투이나는 그가 지난번에 편지로 썼던 협박을 반복할까 봐 잔뜩 긴장했다.
하지만 샨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대는 죽은 자도 사랑하나?”
그의 손이 목으로 내려갔다.
투이나는 누군가를 죽일 땐 굳이 무기가 필요 없다는 게 무슨 뜻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목에 닿은 그의 손바닥에서 맥박이 팔딱였다.
이 와중에도 정신머리 없는 의아함이 고개를 들었다.
‘어딜 보는 거예요?’
샨은 투이나의 눈 속에 담긴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었다.
누군가를 찾는 듯이.
목에서 전혀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는데도 잠깐 호흡이 떨렸다.
투이나가 샨에게 막 질문하려던 찰나, 바깥에서 인기척이 났다.
“주군.”
손이 확 풀렸다.
“누구냐.”
샨이 강하게 불쾌감을 드러냈다.
천막 바깥에 서 있던 하인이 깊이 허리를 숙였다.
“감히 주군을 방해한 죄는 달게 받겠습니다. 바깥에 아르힘의 사제들이 몰려와 있습니다.”
“들으나마나 루가를 돌려달라는 소리겠지.”
샨이 역정을 냈다.
“돌아가 꺼지라고 전해라.”
“사제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인이 조심스럽게 일의 심각성을 전해 보려고 했으나 샨의 분노를 자극하는 꼴만 되었다.
“나가라!”
두 번 대담해질 수는 없었던 하인이 빠르게 사라졌다.
“빌어먹을. 일일이 명령해 줘야 하는 것도 귀찮군.”
성마르게 말하던 샨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투이나가 여전히 그의 손목을 붙들고 있었다.
“약속할게요.”
“뭐냐, 이건.”
“베인과 있었던 시간만큼은 여기 머무를게요.”
투이나는 한 손으로 잡기 버거운 샨의 손목을 세게 그러쥐었다.
그녀의 약속에도 샨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대가 여기 머무른다고 뭐가 달라지지?”
억지로 데려온 주제에 이젠 그 이유까지 내놓으란다. 완전히 날강도가 따로 없다.
어이가 없는 나머지 투이나가 되물었다.
“데려온 이유가 있었던 거 아니에요?”
“분명히 있었는데 잊어버렸군.”
샨이 손깍지를 꼈다.
깍지 낀 손으로 뒤통수를 받친 그가 뒤로 누웠다.
“아, 하나는 기억나는군. 그대가 거기 있는 모습이 꼴 보기가 싫었어.”
“겨우 싫다는 이유로 남을 죽이겠다고 해요?”
“싫지 않으면?”
샨이 빙글 옆으로 몸을 뉘였다.
“호오에 상관없이 그냥 죽여 버리는 편이 그대가 이해하기 편한가?”
투이나가 샨을 내려다보았다.
언제나 올려다보아야 했던 사람이라 시선의 전환이 묘했다.
“아뇨.”
투이나가 무릎을 굽혔다.
“이해가 안 돼요.”
그녀는 샨을 이해해 보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말이 되는 방식으로 말이다.
샨은 거부했다.
“나는 오히려 그대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럼 물어봐요.”
“죽어도 왕은 아니라면서 정작 고집은 나만큼이나 세질 않나.”
샨이 투덜거렸다.
“끔찍하게 유약한데도 본인은 절대 그 자리를 빼앗기지 않을 것처럼 군단 말이야. 아르힘의 말이라면 금세 넘겨 줄 것처럼 미련이 없는 주제에.”
“그런 식으로 생각 안 해요!”
“거짓말 마라, 루가. 내가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물러가는 대신 루가 자리를 내려놓으라고 하면 좋아할 거면서?”
투이나는 약간 당황했다. 정곡을 찔렸던 것이다.
샨이 삐죽 냉소를 보였다.
“그래. 그 정도 애정이겠지. 희생할 만큼만 아끼는.”
골이 난 말투도 왕쯤 되면 위압감이 서리나 보다.
샨이 비죽거렸다.
“그러니까 나를 선택하라는 거다, 루가. 절대로 희생하고 싶지 않아질 만큼 애착을 가져 보고 싶지 않나?”
처음으로 샨이 제안 비슷한 구혼을 했다.
그때까지 그가 투이나에게 한 구혼은 협박이나 공갈, 농담, 뭐 그런 종류였다.
“……집착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럼 내가 상인 놈을 죽여도 신경 쓰지 말아야지.”
“왜 그렇게 일부러 미움을 사는 방식을 고집하는 거예요?”
“그게 내 신의 방식이다.”
샨이 건들거렸다. 불량하게 쭉 뻗은 다리가 느른하게 흔들렸다.
‘이대론 끝이 없겠어.’
샨에게는 진지한 설득도 금세 농담이 되어 버린다.
농담이라고 안심이 되는 것도 아니다. 농담처럼 사람을 해치울 인간이었으니.
‘차라리 시드룬 때처럼 해 보자.’
투이나의 눈빛이 살짝 달라졌다.
“결혼하지 않아도 내가 당신을 도와줄 수 있다면요?”
샨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언제 저런 제안을 꺼낼까 어금니를 잘근거리며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대가 왕이 된다면 고려해 보지.”
샨이 심술궂은 표정으로 거절하는 쾌감을 만끽했다.
“아무 인간이나 천 명쯤 죽이고 돌아와서 그를 살리겠다고 나와 싸워 보라.”
“왕이 되고 싶지 않아요.”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대신 죽일 권리는 포기해야지.”
샨이 비정하게 말했다.
“왕이 아닌 자는 자기가 원하는 자를 살리기 위해 다른 자를 대신 죽일 수 없다.”
“당신이 죽이지 않기로 결정하면 되잖아요! 어째서 항상 다른 사람을 죽여야 하는 거예요?”
“죽이지 않는 건 불가능해.”
샨은 무덤덤해 보였다.
“내게도 거부할 수 없는 규율이 있다.”
그때 멀리서 쾅! 하고 울리는 소리가 났다.
투이나가 흠칫 고개를 돌렷다.
“방금 무슨 소리죠?”
“신경 쓸 거 없다.”
샨은 성가신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투이나는 얇은 천 너머로 스며드는 소음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멀어도 날카로운 게 부딪치고 고함이 섞인 소리는 구분할 수 있었다.
투이나가 벌떡 일어났다.
“싸우는 소리잖아요!”
기세 좋게 일어난 반동으로 갈비뼈가 쑤셨다.
“으윽…….”
“누워 있으라니까.”
샨이 짜증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밀쳤다. 너무도 쉽게 침상 위로 엎어진 투이나가 신음했다.
“다른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건 못 봐요.”
“여기선 아무것도 안 보인다.”
“알면 보이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샨은 말리는 것도 귀찮아졌는지 팔짱을 꼈다.
“그렇게 모든 일에 나서면 기분이 좋은가?”
“좋을 리가 없죠.”
투이나가 무심히 대답했다.
샨은 더 말해 보라는 듯이 그녀를 깔고 보았다.
그녀는 삐걱거리지도 않는 침상을 눌렀다. 푹신하게 들어가는 아래쪽으로 겹겹이 깔린 모피가 느껴졌다.
둘 다 죽음을 깔고 누워 있었다.
투이나는 비스듬히 상체를 기울인 샨을 향해 중얼거렸다.
“좋지도 않지만…….”
모피는 부드러웠다.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며 유혹하듯이.
“…….”
그녀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 동안 심경이 변화했는지 그가 긴 숨을 내뱉었다.
“마음대로 해.”
샨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잡고 일어나라는 시늉이었다.
투이나는 물끄러미 넓게 벌린 손바닥을 바라보다가 짚었다.
투이나와 샨은 찌르는 듯한 햇살 사이로 나갔다.
샨의 천막은 해를 가려 주던 천장과 무언지 모를 방법으로 시원했는데.
뙤약볕으로 나온 두 사람은 하인들을 찾았다. 언제나 주변에서 대기하던 그들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들어 있었다.
‘소란을 막으러 간 건가?’
사제들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투이나는 걱정이 되었다. 아직까지 대치중이라면 폭력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았다.
“입구 쪽이다.”
샨이 이끌었다.
투이나는 땀이 배어나는 얼굴로 끄덕였다.
“물러나라!”
“무엄한 놈들!”
얼마 지나지 않아 쩌렁쩌렁한 고함이 들려왔다.
투이나의 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으아, 역시나 상황이 안 좋잖아.’
투이나가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분명히 사제님들에게 내 발로 왔다고 전해졌을 텐데?’
무사제들이 상황을 전달했다면 계속 잠잠할 거라 여겼다. 실제로 투이나의 예상은 원래라면 빗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나란히 선 하인들은 처음 보는 복장을 한 사람들에게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실은 무기라고 부르기엔 다소 가냘픈 나무 봉이었는데, 그럼에도 그들의 실력과 숫자로 사람들을 찍어 누르기엔 충분했다.
번뜩이는 쇠붙이로 들이댄 사람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투이나는 아연실색했다.
“이게…… 뭐예요?”
처음 보는 복장을 한 사람들이 여전히 무기를 쥔 손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구세요?”
“루가 님이십니까?”
“네.”
투이나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누구신데 지금 신전에서 무기를 든 거죠?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온 거예요?”
“저희는 루가 님을 구하러 온 사람들입니다.”
“부탁한 적 없습니다. 대체 누구의 명령을 따르고 있는 거예요?”
투이나가 다그쳤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시선을 교환하더니 길을 내주었다.
투이나는 여전히 샨의 하인들 옆에서 기다렸다.
샨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대라면 짐작했어야지. 아르힘이 귀띔해 주지 않았나?”
곧 갈라진 사람들의 틈으로 어디서나 알아볼 수 있을 법한 화려한 금빛머리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루가 님?”
투이나의 눈이 크게 떠졌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레오나?”
그녀가 싱긋 웃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꼭 빼닮은 얼굴로.
“우리는 베인의 명령으로 루가 님을 구하러 왔답니다.”
레오나는 격식을 차리지 않은 옷으로도 마치 장군처럼 보였다.
부대 단위를 지휘하는 게 익숙했기 때문이다.
능숙하게 사람들 사이로 건너뛰는 모습은 경쾌하기까지 했다.
레오나를 보자 그제야 몇 명은 상단 소속으로 신전에 드나드는 걸 본 기억이 났다.
‘하지만 여기까지 들어올 권한은 없었을 텐데.’
레오나는 다 이해한다는 미소를 지었다.
“놀라셨죠?”
“어떻게 여기까지…….”
“자세한 건 이쪽으로 오셔서 들으시면 된답니다. 설명해 드릴게요.”
레오나가 친절하게 허리를 굽혔다.
이 모든 상황이 하나도 놀랍지 않다는 태도라 오히려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구출이라니…….’
투이나는 자신이 베인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한 마디라도 했나 돌이켜보았다.
그런 적 없었다.
‘이제 기다리지 않기로 한 거예요, 베인?’
들을 수 없는 목소리 대신 눈앞에 도열한 상단이 투이나에게 답이 되어 주었다.
샨도 그들을 훑어보았다. 투이나가 얼굴을 확인했다면 그는 준비성을 확인했다.
“이게 그자가 보낸 군대인가?”
“어머, 군대라니. 험한 말씀 마시죠, 폐하. 누가 듣고 오해할까 무섭습니다.”
레오나가 능청맞게 대답했다.
“이들은 폐하처럼 베인을 시중드는 일을 할 뿐입니다. 제게 고용된 사람들이기도 하지요.”
상단에 고용된 자들의 면면은 결코 샨의 하인들에 뒤지지 않았다.
게다가 단순히 힘쓰는 자들을 모아 놓은 게 아니라 기강까지 잡혀 있었다. 나란히 선 간격이 일정했다.
‘오랫동안 함께 훈련받지 않고서야 저렇게 움직일 순 없어.’
투이나는 대치 상황이 결코 반갑지 않았다.
“지금은 돌아가지 않아요.”
불쑥, 투이나가 말로 내뱉었다.
‘샨에게 약속했어.’
“하지만 설명은 들어야겠어요.”
레오나는 절대 놀라지 않았다. 그녀가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꾸벅 인사했다.
“그럼요, 루가 님. 안으로 드실까요?”
“루가는 못 데려간다.”
“폐하께서도 함께하시지요. 영광된 자리가 더욱 빛나겠군요.”
레오나는 베인과 달리 샨에게도 망설임 없이 공치사를 퍼부었다.
상단을 끌고 온 걸 보면 분명 베인의 거처에서 있었던 일을 아는 눈치지만, 모른 척하는 사람을 상대로 구구절절 시비를 따지기도 우습다.
“예의만 알지 건방지기는 똑같구나.”
“그럼에도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레오나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샨이 못마땅하게 투이나를 잡아끌었다.
“가자, 루가.”
“전 얘기를 들어야겠어요!”
“알겠다, 알았어.”
샨이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그가 자꾸 도망가듯 빠져나가려는 투이나의 손을 움켜쥐어 눌렀다.
“나도 간다는 소리니 진정해라.”
레오나의 눈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샨이 투이나를 대하는 태도가 이상했다. 전쟁터의 광인이 사람 흉내를 내며 투이나를 챙기다니.
소문과 다른 왕의 모습을 머리 한 구석에 기억해 둔 레오나가 상업적인 미소를 그렸다.
“이쪽으로 오시죠.”
샨과 투이나가 움직이자 자연스럽게 하인들이 따라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레오나는 가볍게 손짓해 자기 사람들을 물렸다.
탐탁지 않은 얼굴로 보고 있던 투이나가 물었다.
“어떻게 사제님들이 이걸 허락하셨죠? 무기는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루가 님. 저희 상단은 오늘 판매할 상품을 운반하는 중이거든요. 그러다 잠깐 가외 임무를 수행 중이랍니다.”
“하, 웃기는군.”
샨이 기가 찬지 헛웃음을 터트렸다.
상단이 무기를 든 채 신전 안으로 들어오도록 사제들이 눈감아 준 게 틀림없었다.
‘이건 완전히 편법이잖아.’
투이나는 샨을 보기가 민망해졌다.
샨에게선 그렇게 난리를 치면서 무기를 압수했는데.
베인을 향한 신전의 편애가 너무 노골적이었다.
“베인의 부탁이 너무 간곡한 나머지 짐을 두고 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부디 이번 일로 그 애를 책망하진 말아 주세요. 다 이 누이의 조급함 때문입니다.”
“…….”
이번만큼은 베인을 두둔하는 레오나의 시도가 먹히지 않았다.
‘사제님들이 분명 이유 없이 허락하진 않았을 거야. 대체 무슨 말이 오간 거지?’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거란 추측이 가능했다. 하지만 크로퍼드 상단이 무슨 대가를 주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대체 어떤 대가를 받아야 신전을 짓밟는 행위를 허락한단 말이야?’
도저히 사제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번 일의 배후가 베인이라는 사실도 믿기 어려웠다.
“베인도 같이 왔나요?”
“회담장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레오나가 말한 회담장은 작고 높은 천막이었다.
간이로 설치했는데도 그 호화스러움을 다 감출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초조하게 안팎을 드나들던 베인이 천을 걷었을 때, 마치 남의 고급 정원을 훔쳐보는 느낌까지 들었던 것이다.
빼어나게 차려입은 베인은 어느 나라의 귀공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자세엔 기품이 있었고, 투이나를 발견한 그가 남몰래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놓는 동작마저 우아했다.
투이나는 베인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여러 감정이 치솟았다.
기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왜인지 모를 서글픔까지.
“어서 오십시오.”
베인이 그녀를 알은체하지 않고 정중하게 말하자 감정은 서글픔 쪽으로 더 기울었다.
베인이 겉으로는 거리를 유지한 덕분에 일단 균형이 생겨났다.
그들은 한때 서로를 협박했다는 사실을 모른 체하며 회담장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다만 투이나가 예상치 못했던 건 향수였다.
투이나는 회담장에 들어서자마자 훅 끼쳐오는 히아신스 향과 기분 좋게 서늘한 냉기를 느낄 수 있었다.
회담장에 있는 모든 감각이 베인과 함께 있던 시간을 상기시켰다.
그 때문에 투이나는 잠깐 있었던 베인의 거처를 향수병에 걸린 사람처럼 떠올릴 수 있었다.
스스로도 신기할 만큼 감각에 기억이 달려 있었다.
투이나가 잠시 발길을 멈추자 베인은 기뻐 보였다. 그녀에게도 단단히 자신이 묶여 있다는 증거라 안심이 됐다.
샨은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큰 동작으로 손을 휘둘렀다.
“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아무려면 그가 좋아하는 피비린내보다는 히아신스가 향긋할 텐데.
샨은 코가 예민한지 아예 틀어쥐기까지 했다.
베인은 차분히 의자를 끌었다.
“오늘은 세 사람만 모일 것입니다.”
명색이 회담이라지만 그들이 다루고자 하는 목표가 명확했다.
투이나의 거취.
베인은 깨지기 쉬운 물건을 대하듯 투이나를 의자에 앉혔다.
‘시드룬은 없어도 괜찮겠지.’
어차피 그는 투이나와 만나는 시간이 달랐다.
공식적으로 낮에 불렀을 때도 전혀 집중하지 못한 걸 보면 지금 논의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을 성싶다.
‘하지만 여기에서 어떤 결론이 나든 당분간은 시드룬을 부르기 어려울 거야.’
구혼자가 옆에 있는데 시드룬을 부를 순 없었다.
투이나는 이 회담이 얼마나 길어질지 벌써 걱정이 되었다. 베인과 샨은 벌써 싸울 의지로 충만해 있었기 때문이다.
“자, 그래서 언제부터 전쟁을 치를 예정이지?”
샨이 탁자에 걸터앉았다.
정교한 장식이 된 격자무늬가 순식간에 가려졌다.
“예정은 아직 없습니다.”
“아직이 아니라 앞으로도 없을 거예요.”
놀란 투이나가 말을 잘랐다.
“왜 이러는 거예요, 베인?”
“……루가 님은 아직 휴식이 필요하십니다. 걱정이 되어 호위를 조금 붙였을 뿐이지요. 어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베인이 상냥하게 안부를 물었다. 지나치게 다정해서 위화감이 들 정도였다.
“전…… 무사해요. 그때도 무사할 걸 알았잖아요.”
“아니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베인이 서글프게 미소 지었다.
“아는 것만으로는 안전하시리라 믿을 수가 없더군요.”
“그런 자가 병사를 끌고 왔나?”
샨이 비아냥거렸다.
베인은 여전히 투이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렇게 해야만 당신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차분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원치 않게도 폐하에게 제안할 게 있기 때문입니다.”
단번에 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베인이 제대로 된 호칭을 부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무슨 꿍꿍이냐.”
“이번 기회에 서로 원하는 걸 명시하자는 겁니다.”
투이나는 깨달았다.
‘베인이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한 거야.’
그런데도 그녀는 그의 다음 행동을 예상할 수가 없었다.
장갑을 낀 베인의 손이 탁자를 짚었다.
“당신에게 아르힘을 바치겠습니다.”
‘뭐?!’
쿠당탕!
너무 놀란 나머지 투이나가 의자를 넘어트리며 일어났다.
“베인! 지금 진심이에요?”
“대신 루가 님은 절대로 넘보지 않겠다는 약조를 하십시오.”
“……호오?”
샨이 결국 흥미를 드러냈다.
“이건 또 무슨 새로운 반역이지?”
“반역이 아닙니다.”
베인의 목소리는 여전히 힘을 잃지 않았다. 투이나가 아연실색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저는 루가 님을 왕으로 만들 겁니다.”
뚝.
투이나의 행동이 멎었다.
베인은 미친 사람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투이나의 시선에 가슴이 따끔거리면서도 은근한 만족감을 느끼고야 말았다.
“동맹국이 되어 드리지요.”
“벌써 말을 바꾸는군. 아르힘을 바치겠다더니?”
“핵심적인 지원을 말하는 겁니다. 이 나라가 가진 어떤 자원보다 귀하고 값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베인이 살포시 웃었다.
“당신이 어떤 방법으로 아르힘을 차지하든 사제들의 힘을 원한다면 이 방법뿐입니다.”
투이나는 경악했다.
‘방금 내가 제대로 들은 거야?’
사제라는 말로 돌려서 표현하긴 했지만, 그 힘의 출처를 따지면 베인의 제안은 신을 뜻하게 된다.
신을 자원으로 따지자면 아르힘은 아까운 게 맞았다. 아르힘이 죽으면 이 전례 없는 치유 능력도 사라질 테지.
“과연 상인 놈이라 이건가.”
샨이 아르힘을 제거하면 가장 아까운 게 사제들이긴 했다. 그가 전쟁이 아니라 결혼을 고려한 원인이기도 했다.
투이나는 점점 더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문득 투이나가 쓰러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샨이 몸을 뒤로 물렸다.
“가치 판단은 정확하지만 계산이 틀렸다. 루가와 결혼할 내가 굳이 번거로운 절차를 감수할 필요가 있나?”
“두 신이 만났을 때 어느 쪽이 사라질 것인지 확신할 수 있습니까?”
“상관없다, 나의 신은 언제나 승리할 테니. 그리고 아르힘이 사라지더라도 땅은 남는다.”
“목표를 혼동하지 마십시오. 결국 폐하가 원하는 것은 루가 님이 아니라 힘이지 않습니까?”
청록색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당신이 이 결혼에서 바라는 건 오직 그것뿐이니 드리겠다는 겁니다.”
감히 부정할 테면 부정해 보라는 베인의 말투가 샨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본인의 입으로 감정처럼 하찮은 이야기를 꺼내게 둘 것 같은가.
이때를 위해서 베인은 자신에게 가해졌던 모욕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저는 루가 님을 사랑합니다.”
쿵.
그때 가쁘게 뛰고 있던 그녀의 심장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몸을 움츠렸다.
‘……누구지?’
아름다운 목소리와 아름다운 입으로 사랑을 말하는 눈앞의 저 사람이 낯설었다.
베인에겐 확신이 있었고, 투이나의 시선 속에서 믿음은 성스러울 만큼 찬란하게 변모해 갔다.
너무도 눈이 부셔서 낯설어질 만큼.
그가 한발 앞으로 나섰다.
“폐하와 달리 제가 원하는 것은 루가 님뿐입니다. 그걸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바칠 겁니다.”
베인이 극적으로 말을 맺었다.
그를 사랑하고 있는데도…….
마음을 쥐고 있던 손가락이 무언가를 부수었다.
의외로 샨이 가장 먼저 투이나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그가 인상을 썼다.
“루가 좀 다시 앉혀라. 저러다 또 쓰러지겠군.”
그제야 베인이 놀라 투이나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루가 님?”
“다친 데는 없어요?”
“예?”
투이나의 질문에 베인이 어리둥절해 했다.
“저는 멀쩡합니다.”
베인은 이제 투이나의 정신건강을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투이나는 미친 게 아니었다.
‘화상을 입지 않았어…….’
베인이 아르힘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았는데도 신은 그를 징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잖아……?’
투이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신은 정말로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그조차 희생하도록 허락한단 말인가?
아르힘에는 모독죄가 없었다.
혹시 베인이 아르힘을 위해서 속임수를 쓰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베인은 신이 아니라 투이나를 위해서 이 모든 일을 벌였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불타지 않는 베인의 모습은 신의 허락을 뜻했다.
투이나가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베인과 잠깐 단둘이서만 얘기해야겠어요.”
“내가 왜 그걸 허락해야 하지?”
“무슨 이야기를 나누든 반드시 샨의 거처로 돌아갈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투이나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샨은 그게 아니라 다른 점이 불만이었지만, 무엇인지 정확히 스스로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단호한 투이나의 눈빛을 보니 베인과 별로 살가운 얘기를 할 것 같진 않았다.
“시간은 내가 결정하겠다.”
샨이 경고했다.
그가 언제 들이닥칠지는 몰라도, 부탁을 들어줬다는 게 고마워 투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샨이 나가자마자 베인이 곧장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저자에게 협박당하셨습니까?”
“네?”
“어찌 그리 쉽게 돌아가겠다 말씀하십니까.”
베인의 목소리가 무너졌다.
그는 애걸하듯이 말했다.
“루가 님이 그곳에 계시는 동안 잠시도 쉴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을 당하실까 하여…….”
“베인.”
투이나가 말을 끊었다.
“방금 한 얘기,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죠?”
베인의 얼굴에서 흠뻑 넘쳐나던 감정이 한순간에 멈췄다.
초조함에 몸부림치던 연인의 모습은 사라지고, 생존 본능처럼 그녀를 설득하려는 처세술이 나타났다.
“분명히 놀라실 거라 예상했습니다.”
“놀란 정도가 아니에요!”
투이나의 말투가 격해졌다.
“왕이라니, 샨을 속이려고 해도 너무 과합니다!”
“왜 속일 거라 생각하십니까?”
베인이 물끄러미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저는 언제나 루가 님께 진심입니다.”
“무기는 어떻게 들여온 거예요?”
머리가 지끈거린 투이나가 질문을 바꿨다.
“사제님들에게 뭘 제안하셨죠?”
“그 어리석은 자들은 유일한 믿음을 따랐을 뿐입니다.”
베인이 눈을 내리깔았다. 풍성한 속눈썹이 일렁이는 그의 눈동자에 그늘을 드리웠다.
“사제들만으로는 루가 님을 섬기기에 부족합니다. 그들도 동의했고, 저는 루가 님의 위엄에 걸맞은 사람들을 준비했을 뿐입니다.”
베인이 그녀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신에게 자비를 구하듯 다급한 움직임이었다.
“제가 군대를 드리겠습니다. 루가 님은 저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
크게 떠진 눈이 간절하게 그녀를 담았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을 만큼.
그때 펄럭이며 입구를 가린 천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투이나는 영영 후회했을 대답을 할 뻔했다.
벌써 샨이 들어온 줄 알고 흠칫했던 투이나가 어깨를 내렸다.
“설명은 다 들으셨나요, 루가 님?”
레오나가 양손으로 천을 당겨 입구를 가렸다.
“아니면 이제 성하라고 불러야 할까요?”
투이나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있던 베인이 차가워진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이가 어떻게 들어온 거지?”
“왕은 모르는 통로가 있지.”
레오나가 싱글거렸다.
“실은 루가 님과 왕이 들어가실 때 따라 들어왔다가 천 사이 통로에 숨어 있던 거야. 왕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면 신호를 주기로 했으니 잽싸게 도망칠 예정이지.”
“다 듣고 있었던 거예요?”
“여기서 나온 이야기는 전부 저도 아는 이야기랍니다, 루가 님.”
레오나가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제들이 하루아침에 저희를 들이지 않았겠지요.”
투이나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베인은 차근차근 얘기하려던 계획을 망쳐 버린 그녀에게 소리 없이 화를 냈다.
“……이번 일 때문에 사제들에게 너무 배신감을 느끼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는 그들을 오랫동안 설득해 왔고, 루가 님과 아르힘 님을 향한 신앙은 결코 변하지 않았습니다.”
베인의 말은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왔다.
투이나는 그 순간 배신감을 느꼈던 것이다.
“오랫동안이라뇨?”
“사제들이 왕을 만드는 일에 동의하도록 설득하는 시간 말입니다.”
레오나가 짓궂게 덧붙였다.
“루가 님께 드리기엔 폐하라는 호칭도 부족한 것 같아 적당한 호칭을 만들어 봤는데, 성하라는 이름이 마음에 드시나요, 성하?”
투이나의 표정이 몹시도 이상해졌는지 베인이 서둘러 덧붙였다.
“누이의 말을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루가 님. 성하라는 말은 인간과 신 모두가 택한 왕이라는 뜻을 담고 싶었을 뿐입니다.”
“……샨도 인간과 신이 선택한 왕이잖아요.”
“아닙니다.”
레오나는 여전히 느긋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자는 인간이 택한 도살자일 뿐이지요.”
“아르파 신은 인간의 몸을 필요로 할 뿐, 샨 모하세스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베인이 말을 이었다.
“그자의 피가 대대로 신을 담을 수 있기에 많은 자들이 착각하고 있습니다만. 죽자마자 다른 핏줄로 대신할 수 있는 자가 어떻게 선택받았다 하겠습니까?”
베인의 목소리에 힘이 깃들었다.
“진정으로 신의 부름을 받고 오신 분은 오직 루가 님뿐이십니다.”
투이나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이 어마어마한 말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자꾸만 아찔해졌다.
“사제님들이 토론하고 싶어 할 주제를 말하는 건 그만둬 주세요. 그 얘기가 어떻게 제가 왕이 되는 이야기로 연결된단 말이에요?”
“아르힘 님의 크나큰 영광과 은혜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여전히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베인의 말에 투이나의 눈이 부릅떠졌다.
처음으로 베인의 얼굴에 드러난 실망감이 너무도 선명히 보였다. 비록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게 아니라 하더라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사제들이 타락했기에 그들을 설득하는 일이 가능했습니다.”
“어떤 사제가 신앙이 아닌 돈에 넘어왔는지 이름을 대지는 않겠습니다, 성하. 하지만 꽤 많았다고는 해 두지요.”
레오나는 상단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라며 신전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리고 기부금은 지나치게 막대한 액수로 퍼부어졌다.
“사제들이 받은 능력이 과하게 훌륭한 탓에 그들은 본분을 잊었습니다.”
“이번 내기만 봐도 신전의 위엄을 진흙탕에 처박은 꼴이지요.”
레오나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의회도 타락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백성들을 위해 써야 할 지능을 죄다 돈 놀음에 퍼붓고 있거든요. 그래 놓고 내기 돈은 또 얼마나 많이 걸었는지.”
“그들도 이제는 루가 님을 위해 일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베인이 아연한 투이나의 집중력을 다시 끌어왔다.
“루가 님을 알게 된 그 순간부터 저는 당신만을 꿈꿔 왔습니다.”
이런 순간에도 베인의 웃음은 눈이 부셨다.
“그리고 루가 님을 진정으로 안 순간, 저는 누이와 함께 루가 님을 왕으로 만들 것이라 다짐했습니다.”
베인은 확신했다.
“아르힘에 그보다 나은 행복은 없습니다.”
투이나는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베인은 투이나 자신보다도 투이나를 더 믿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까지……. 내게서 뭘 보았기에……?’
“제가 왕이 되면 당신은 뭘 얻죠?”
순간 베인은 서운한 기색을 보였으나 응당 받아야 될 대가라는 듯 고개를 숙였다.
“저는 루가 님만 곁에 있어 주시면 됩니다.”
수줍음을 가득 담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드럽게 흩어지는 머리카락 밑으로 붉게 물든 귀가 보였다.
그제야 옷자락을 붙든 베인의 손이 잔뜩 긴장한 채 떨리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투이나가 거절하면 그대로 부서지기라도 할 것 같았다.
“모든 힘들고 더러운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저희는 병력 삼천 명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사제들이 합류하면 절대로 다치지 않고 순환할 테니 실제로는 더 유용할 테지요.”
레오나가 빙글거리며 끼어들었다.
“물론 사제들은 안 넘어온 자가 거의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왕을 대적하는 건 그 시작일 뿐입니다.”
베인이 웅크린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루가 님은 그저 원해 주십시오.”
그러나 투이나가 원하는 건 왕이 아니었다.
“…….”
투이나의 입에서 쉽게 허락의 말이 떨어지지 않자 베인은 안타까워했고, 레오나는 슬쩍 눈치를 살폈다.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루가 님. 저희는 루가 님이 원치도 않는데 진행할 머저리들은 아니거든요.”
그때 호르륵 새 피리 소리가 들렸다.
레오나가 재빨리 천 사이로 겅중겅중 뛰어갔다.
“그러니 성하라는 이름은 즉위식까지 아껴 두겠습니다, 루가 님!”
그녀가 눈을 찡긋하고는 도망쳤다.
샨이 온다는 신호에 베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제가 다치지 않았나 물어보셨지요.”
베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이제는 그 뜻을 알겠습니다. 아르힘 님의 분노를 걱정하셨군요.”
투이나가 놀라고 당황한 순간에도 자신의 안위를 걱정했다는 사실에 베인의 기분은 이미 날아갈 것 같았다.
“오래 전부터 루가 님께 이 사실을 고백하고 싶었습니다.”
베인이 허락을 구하듯 아주 천천히 투이나의 손에 다가가더니 거부가 없자 손등으로 고개를 내렸다.
“그러니 부디 상심하지 말아 주세요. 어쩌면, 제가 불타지 않는 이유는 이번 일을 아르힘 님 또한 바라시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베인이 살며시 그녀의 살갗을 누른 채 입술을 움직였다.
“루가 님을 왕으로 만들고 싶었기에 아르힘 님이 그런 구혼자들을 불러들이신 거지요.”
“……!”
마지막 말에 투이나가 정통으로 반응했다.
왕과 마법사와 상인.
사랑에 빠지기엔 이상한 조합이더라도 왕이 되기엔 그럴듯하다. 구혼자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해 줄 테니까.
‘그토록…… 아르힘 님이 내게 결혼을 권한 이유가 정말 이것 때문이라면…….’
크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베인은 가슴이 요동쳤다.
성에 찰 때까지 그녀를 마음껏 사랑하고 싶었다.
사랑스럽고 또 사랑스러운 당신.
그는 반드시 자신이 투이나를 왕으로 만들 것이라 다짐했다. 어떤 자에게도 그 권리를 넘겨주기 싫었다.
‘이 마음은 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