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보라색 보석을 바쳤더니 바다는 절반이 되었다. ‘네게는 비할 수 없다.’ 신의 대답에…
투이나는 당황했다.
베인이 호위들에게 드러내는 거부감이 지나치게 컸다.
정작 그녀는 괜찮다고, 같이 가자고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충격이 많이 컸나 봐.’
아직도 베인의 팔에 서린 긴장이 선명하게 전해져 왔다.
다른 호위들은 몇 번씩 그녀가 다친 걸 보았지만 베인은 처음 봤을 테니까.
게다가 그는 혼자서 목숨이 경각에 달한 투이나가 깨어날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만 했다.
애타는 초조함과 긴장 속에서.
그러니 성소 밖으로 나온 다음에도 감정을 떨치지 못해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눈앞에서 연인이 죽을 뻔한 혹독한 일을 겪은 사람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투이나는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녀가 살짝 다리를 내렸다. 베인이 마지못해 그녀를 지상에 내려가도록 부축했다.
“사냥터에서 모두 돌아왔나요?”
“네, 루가 님.”
경직되어 있던 스카차가 자세를 바르게 고쳤다.
“루가 님이 도착하신 다음 모두 같은 장소로 내려왔습니다.”
“……마법진은 성소를 향해 열려 있었지만 저희가 빠져나오자 여기에 내려서게 되었습니다.”
호루니가 뒤이어 설명했다.
결국 아르힘의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건 투이나와 베인뿐이었다.
하나가 아니라 두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심각한 부상에서 회복된 투이나의 모습에도 순전한 기쁨대신 이상한 긴장감이 흘렀다.
‘뭐지?’
투이나는 사제들의 시선이 자신과 베인으로 갈라져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안부가 궁금한 게 아니야.’
사람을 판단하는 눈빛이다.
습기를 빼앗긴 살갗에서 소름이 돋아났다.
“설명은 나중에 듣는 게 좋겠습니다.”
베인이 투이나를 보호하듯 몸을 틀었다. 그는 성소에서 나올 때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했는지 얼굴이 굳어 있었다.
투이나는 잠깐 서 있었다고 뻐근하게 저려 오는 통증에 결국 동의했다.
‘으……. 찔렸던 자리가 제대로 숨이 안 쉬어져.’
잠깐 움직였다고 호흡이 점점 힘들어졌다.
그녀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일단 다들 돌아가 쉬는 게 좋겠어요. 놀라기도 했을 텐데…….”
“아르힘이 치료했는데도 두 발로 설 수조차 없나?”
샨이 말을 잘랐다.
그녀의 상태가 어지간히도 안 좋아 보였나 보다.
“치료하는 신이라고 명성을 떨치기엔 부족한 실력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투이나가 얼결에 샨의 의문을 따라 받았다.
아르힘이 단번에 치료하지 못했던 병은 얼룩병뿐이다. 그 외의 상처는 모두 단숨에 낫게 했다.
심지어는 죽은 투이나까지 되살렸으니까.
‘날 찔렀던 짐승이 똑같이 얼룩병에 걸렸나? 아니면 베인과 함께 성소로 떨어졌을 때 다른 일이 일어난 걸까?’
베인은 평온해 보였지만 그것만으로는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자그마한 이야기라도 꺼내려면 다시 둘만 있는 장소로 가야 할 것 같았다.
다정하지만 꽉 다물린 입술이 그걸 증명했다.
“저도 정확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요.”
투이나의 시선이 시드룬을 가로질러 라카인을 향하다 멈칫했다.
‘……왜 아직도 저런 얼굴이야.’
라카인은 빗물로 피를 닦아냈는지 축축하고 멀건 얼굴이었지만, 도무지 넋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누가 그의 뒤통수를 작은 정으로 툭툭 때려서 내용물을 훔쳐 간 것 같았다.
자신은 다 나았는데, 사냥터에서 보았던 모습과 한 치도 달라지지 않은 표정이 엄청나게 신경 쓰였다.
‘베인의 말이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하긴 말이 심하긴 했어.’
가능만 하면 자리에 앉혀 두고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됐냐고 묻고 싶을 정도였다.
누구도 저런 식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게 투이나 자신일지라도.
그때 베인의 손이 다가와 턱에 맺힌 빗방울을 닦아냈다.
“답할 수 없는 질문은 차차 알아 가면 됩니다.”
베인이 금세 그녀의 시선을 그에게 끌어왔다.
“지금은 쉬셔야지요.”
그가 다시 투이나를 안아 올렸다. 얼마나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는지 멈칫할 여유도 없었다.
뒤에서 샨이 기가 막혔는지 비웃음을 터트렸다.
투이나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왜 이래요, 베인?’
입을 벙긋거리려던 투이나가 단호한 걸음걸이에 도로 입술을 물었다.
‘우리 사이는 비밀이어야 하잖아요.’
하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섣불리 물어보기에는 이 자리에 관계를 알아선 안 될 사람이 너무 많았다.
품에 안은 투이나를 대신하듯 그가 꾸벅 허리를 굽혔다.
“필요한 이야기는 다음에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깍듯한 예의가 잠깐 그들을 붙들어 놓는 사이, 베인이 빠르게 발을 옮겼다.
베인은 그대로 투이나를 자신의 거처로 데려갔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방을 청소하고 있던 시종들이 안겨서 들어오는 투이나를 보고 놀라 흩어졌다.
베인이 조심스럽게 균형을 잡더니 발끝으로 안쪽에 난 문을 열었다.
죽기 전에도 이쪽까진 들어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투이나가 무심코 방을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물건이 별로 없네.’
그를 만났던 응접실은 언제나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는데, 침실에 놓인 가구들은 수납 기능에만 충실했다.
투이나가 구경하는 걸 알았는지 베인이 조금 멋쩍게 그녀를 침대로 내려놓았다. 그런 뒤에도 불편한 곳이 없는지 그가 자리를 살폈다.
베인의 무게가 실린 침대 한쪽이 삐걱거리며 내려앉았다.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 주셨으면 합니다, 루가 님. 원래 머물던 거처보다 불편한 점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투이나는 당황했다.
갑자기 같은 곳에 살자니.
베인이 너무 또렷한 목소리로 요구했던 것이다.
“이유를 듣고 싶은데요.”
“거처로 돌아가면 분명히 호위들이 다시 찾아오겠죠. 사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베인이 조급하게 말을 이었다.
“방금 루가 님도 보셨겠지만, 그자들은 벌써 성소에서 있었던 일을 이용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요. 저도 봤어요.”
투이나가 기력 없이 대답했다.
‘아르힘 님이 베인도 마음에 드셨던 걸까? 하긴 어떻게 베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투이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베인은 초조하기만 했다.
“저는 루가 님에게 해가 될 만한 일은 조금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벌써 그런 걱정을 하기엔 성급하지 않을까요?”
“저는 조짐조차 싫습니다.”
베인이 그녀의 손을 꽉 붙들었다.
“그들이 처음부터 루가 님을 존중하지 않았던 걸 아는데, 제가 어떻게 침착할 수 있겠습니까.”
‘아, 베인도 눈치 채고 있었구나.’
잠깐 신전에 있었던 그가 대략적인 분위기를 알 정도면 꽤 많이 티가 났나 보다.
투이나가 비에 젖어 자꾸만 엉키는 두건으로 손을 올렸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천 안으로 밀어 넣은 그녀가 물었다.
“베인은 루가가 되면 어떨 거 같아요?”
그 말에 베인의 눈빛이 일변했다.
“……제가 거절할 것입니다.”
베인은 상처받은 것 같았다.
“그 자리를 경멸해서가 아니라, 루가 님의 것이기에 거절할 것입니다. 제가 권력 때문에 루가 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아니, 아니에요. 그런 생각으로 물어본 게 아니었어요.”
단단히 오해한 말투였다.
놀란 그녀가 한 손으로 아픈 갈비뼈를 누르며 말했다.
“만약 베인이 루가가 된다면 같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에요.”
“……!”
“제가 먼저 해 봤으니까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투이나가 능청맞게 어깨를 으쓱였다.
멍하니 투이나를 보던 그가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아르힘 님은 두 사람에게 루가의 자리를 줄 수도 있으시겠지요.”
“그럼요.”
투이나가 활짝 웃었다.
그래서 베인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권력은 나눌수록 힘이 사라진다. 애정과 다르게.
그는 상단에서 누이에게 모든 권력을 몰아 주었던 경험을 떠올렸다. 철저히 자신이 가진 능력을 낮출수록 좋았다.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그의 존재는 방심하도록 만들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투이나는 누이와 달리 기꺼이 자기가 있는 자리로 와 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나 낯설었다.
“어떤 자리라도 루가 님 옆에 있을 수만 있다면 충분합니다.”
베인의 마음은 빠르게 움직였다.
“루가 님과 성소에 갔을 때 아르힘 님은 곧장 사라지셨습니다. 아주 잠깐 신이 베푸신 자비가 모략의 씨앗이 되지 않도록 보호하고 싶습니다.”
투이나가 갈비뼈가 욱신거리는 통증을 무시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제 호위들까지 막을 필요는 없었어요.”
“더 훌륭한 사람을 고용하겠습니다.”
베인이 차분히 거부했다.
“루가 님의 신변을 지키기엔 더 나은 자들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순간에 아무것도 못한다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어, 아니에요. 라카인은 그때 절 구하려고 했는걸요.”
투이나가 정정했다.
약간 슬프게.
“피하라는 소리가 들렸어요. 시도했지만 실패한 일로 책망하고 싶지 않아요.”
“……책망은 않더라도 교체는 해야 합니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던 상황에서 난 사고잖아요. 오히려 이번 일로 더 경계할 수 있길 바라고 있어요.”
한순간 베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호위가 투이나의 눈에 들고 말았다.
베인도 그자가 기이할 정도로 필사적이었던 걸 보았다.
그래서 떼어 놓고 싶었건만.
여기서 더 나가면 투이나와 같은 말을 타고 있던 자신만 불리해진다. 결국 그도 투이나를 지키지 못한 사람이었으니까.
베인의 입으로 쓴맛이 퍼져 나갔다.
“그럼 때를 보아 호위들을 불러오겠습니다. 그때까지는 저와 함께 계셔 주십시오.”
베인은 조심스럽게 화제를 다뤘다.
“성소 사건 이후 저와 루가 님의 사이가 벌어진다면 틀림없이 제가 루가 자리를 노린다는 식으로 소문이 날 겁니다. 그걸 이용하려는 자들도 있겠죠.”
살짝 눈매를 찌푸린 베인이 곧 보기 좋은 호선을 그렸다.
“루가가 둘이 된다는 생각은 분명 루가 님만 하실 테니까요.”
“하하……. 설마요.”
“며칠이라도 좋습니다. 바깥에는 여전히 루가 님이 원래 거처에 머물고 계신 거라고 알릴 테니까요.”
베인의 얼굴이 애원하듯 가깝게 다가왔다.
코앞으로 다가온 길고 풍성한 속눈썹에 투이나의 마음이 약해졌다.
“그럼…… 괜찮겠네요.”
“다행입니다. 그럼 쉬십시오, 루가 님. 입단속은 제가 맡겠습니다.”
“아아, 네.”
황홀하리만큼 아름다운 눈웃음을 그린 베인이 방을 나갔다.
심란해진 투이나가 입을 감쌌다.
베인의 저런 얼굴을 봐 버렸으니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난 투이나가 침대 맡을 붙잡았다.
‘일단 상처부터 해결하고 보자.’
투이나가 다쳤던 부위를 문질렀다.
곧장 속에서 욱신거리는 느낌이 치밀었다.
‘상태가 좀 나아지면 시드룬을 부르면 되겠지.’
아르힘이 치료했는데도 여전히 쑤시는 상처가 수상했다.
마법진 아래로 짐승의 이빨이 떨어졌을 때 뭐가 섞여든 걸까?
살해되었을 때보다 더 깊은 고통이 그녀의 내면을 괴롭혔다.
다만 투이나가 예상하지 못했던 건 생각보다 베인과 함께 지내는 일상이 좋았다는 사실이다.
“으음…….”
투이나가 이불 속에서 뒤척였다.
황금빛으로 부풀린 침상에서 진한 햇볕과 향초 냄새가 올라왔다.
자박자박 걷는 소리가 가깝게 다가왔다.
“루가 님, 일어나셔야지요.”
아침부터 듣기엔 지나치게 호사스러운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으응?”
비몽사몽인 상태에서도 저절로 몸이 반응했다.
“드, 들어오면 안 돼요!”
“예, 루가 님. 저 바깥에 있습니다.”
다급한 투이나의 목소리에 작은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허둥지둥 이불을 끌어올린 투이나가 잠을 쫓아냈다.
‘몇 번씩이나……. 적응이 안 돼.’
베인의 거처에 머물게 되면서 방은 따로 썼지만, 베인은 꼭 아침마다 그녀를 깨우러 왔다.
원래 투이나를 맡던 시종들이 이쪽으로 함께 옮겨 왔기에 잠은 편하게 잘 수 있었지만,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베인에게 얼룩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그러니 아침마다 방문을 꼭 닫고 부랴부랴 준비하는 게 새로운 일상이 되었다.
‘다행히 베인은 잠에서 깬 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서 그런 줄 알고 있지만…….’
투이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
“좋은 아침이에요, 베인. 이따가 나가서 볼까요?”
“오늘 아침 식사는 따듯한 음식으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베인이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접실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곧 다시 그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시종들이 문을 두드렸다.
“저희 들어갑니다, 루가 님.”
“네!”
빠끔히 문이 열리고 세면도구를 든 시종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심한 투이나가 이불을 내렸다.
“얼른 준비해 드릴게요, 루가 님.”
“아휴, 정말. 크로퍼드 님도 아침마다 지극정성이세요.”
“매번 어쩜 그렇게 완벽하게 준비하시고 루가 님까지 깨우러 오시는지 모르겠다니까요.”
빠르게 분통을 열며 시종들이 꺄르륵 웃었다.
투이나는 괜히 낯이 달아올랐다.
입단속은 확실히 되어 두 사람이 거처를 함께 쓴다는 건 소수만 아는 비밀이었다.
잠만 이곳에서 잤지 바깥 활동은 그대로 유지했기에 대부분의 사제들도 상황을 잘 몰랐다.
덕분에 원래 연인인 걸 알면서도 루가를 놀려먹기 좋아하는 시종들만 신이 났다.
“루가 님은 정말 좋으시겠어요. 아무렴 저만한 청년이 없죠.”
“구혼 기간이 아니라 완전히 약혼 기간이라고 불러도 되겠어요.”
시종들의 호들갑을 투이나가 익숙하게 받아넘겼다.
“그런데 호위분들은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요? 베인 말로는 이미 소식을 전했다고 하던데.”
“어머, 아직 모르셨구나.”
“그분들은 지금 근신 중이에요. 루가 님을 보호하지 못한 죄가 있으니.”
“네?”
투이나가 깜짝 놀라다 갈비뼈를 움켜쥐었다.
‘윽……. 다친 상태로는 제대로 놀라지도 못하겠어.’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도 바깥이 아니라 속에서 찌르는 느낌이 두고두고 그녀를 괴롭혔다.
“루가 님!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나저나 근신이라니……. 지금 처음 듣는데요.”
투이나가 빠르게 손을 내저었다.
어물쩍하던 시종이 설명했다.
“아무리 마법사가 불러낸 세계였다고는 해도 루가 님이 보통 크게 다치셨어야죠.”
“아르힘 님이 치료하셨는데도 아직도 이렇게 아프신 걸 보면 마법사가 무슨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습니다.”
“근신 처분은 사제님들이 결정하신 거랍니다. 그냥 각자 거처에서 자숙하는 것이니 너무 염려마세요.”
“그렇군요…….”
투이나의 마음이 짠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처벌을 받았는데 그들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그때 역시 고집을 부려서라도 데려왔어야 했나.’
잘 지내고 있을지 걱정되었다.
‘활기찬 사람들이 갇혀 지내는 것도 힘들 텐데.’
호위들 걱정에 투이나의 표정이 흐려지자 시종들이 눈치껏 말을 돌렸다.
“자아, 그러지 말고 새 예복 좀 입어 보세요. 루가 님께서 오셨다고 크로퍼드 님이 상단에 새로 주문하셨는걸요.”
번쩍번쩍한 비단 광택이 줄을 이었다. 화려한 색채가 투이나의 정신을 단번에 잡아끌었다.
“네? 새로요? 지난번에도 새로 주문한 옷이었잖아요.”
“그만큼 정성을 들이시는 게지요.”
투이나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정갈하게 놓인 두건과 옷엔 손목에 한 번 감기만 하는 길이에도 금괴를 내야 한다는 정교한 아르데리아 산 레이스가 아낌없이 들어가 있었다.
“신전 예산으로는 어림도 없는 옷인데 기쁘지 않으세요?”
“기쁘지만 너무 과하니까요. 특별한 날도 아닌데 이렇게 매번…….”
“아아, 모릅니다. 저희는 오늘 이거밖에 안 가져왔어요. 입으셔야 해요.”
시종이 능청을 떨었다.
그들 입장으로선 투이나와 베인의 관계가 돈독해질수록 내기에서 이길 확률이 올라가니 얼마든지 몰아갈 수 있었다.
물론 첫 번째 시험이 끝난 다음에 베인의 배당률이 좀 내려가기는 했지만 그것도 초창기에 베인에게 건 시종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대강 그들의 심리를 짐작한 투이나가 푹 숨을 내쉬며 옷을 꿰어 입었다.
‘그래. 시종분들이라도 싱글벙글 웃으시면 좋지, 뭐.’
체념한 투이나가 머리를 올렸다.
어차피 신전에서 주는 옷도 그녀의 돈이 아니었으니까.
꼼꼼하게 분칠을 한 투이나가 비로소 방 바깥으로 나왔다.
가벼운 서류를 보고 있던 베인이 인기척을 느끼고 일어났다.
“루가 님!”
어제도 보았는데도 마치 일 년 만에 만난 사람처럼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성큼 다가온 베인이 싱긋 웃었다.
“이번에도 잘 어울리시는군요.”
머리를 감싼 푸른 베일이 정교하게 땋아 내린 끈으로 옷과 연결되어 있었다.
두건이 잘 벗겨지지 않는 장식이라는 점에서 입는 사람을 제대로 신경 쓴 옷이다.
투이나가 드러난 팔뚝 너머로 나풀거리는 소매를 걷었다.
“시원해서 좋아요. 매번 이렇게 선물하다가 상단 재정이 바닥나면 어쩌려고요?”
“그럼 곤란하겠군요. 루가 님을 남겨둔 채 다시 창고를 채우러 나가면 얼마나 아쉽겠습니까.”
베인이 살짝 손을 내밀었다.
투이나도 속절없이 같이 웃고 말았다.
투이나가 온 뒤로 비어 있는 시간이 사라진 탁자에 풍성한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원래 먹어 왔던 식사보다 월등히 좋은 걸 보니 베인이 또 사비를 쓰고 있는 모양이다.
“정말이지 베인이 걱정이에요.”
“왜 그 말마저 기분 좋게 들리는지 모르겠습니다.”
베인이 그녀가 앉기 편하도록 의자를 끌었다.
같이 지내는 동안 그런 배려에 익숙해진 투이나가 자연스럽게 앉았다.
“호위분들이 근신 처분을 받았대요.”
“예. 저도 오늘 아침에 전해 들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부드러운 표정으로 투이나에게 음식을 덜었다.
“사제님들이 결정하신 일이니 어쩔 수 없지요.”
“제가 있을 때 결정할 수도 있던 문제를 빨리 처리해 버린 게 마음에 걸려요. 역시 휴식 시간을 줄여야 해요.”
“그건 아니 되십니다.”
베인이 뜻밖에도 강하게 부정하더니 들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았다.
“지금도 조금만 일하셔도 상태가 안 좋아지는데 더 하시겠다니요.”
“정말 많이 좋아졌어요. 원래 제가 해야 할 일도 자꾸 놓치면 휴식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루가 님에게 의미가 있는 겁니다.”
베인이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제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루가 님의 안위는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되니까요. 루가 님도 그렇지 않으십니까?”
“저도…… 신경 써요.”
투이나가 머뭇거렸다.
“제 삶인걸요. 그래서 최선을 다하려는 거예요.”
“어떤 이유에서든 루가 님이 무리하는 걸 보고 싶지 않습니다.”
베인이 무릎을 굽혀 투이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저 행복해하시기에도 부족한 시간을 왜 어려운 일에 쓰시는 겁니까.”
“지금도 행복해요. 원하지 않는 일을 감당할 만큼.”
“그렇다면 다른 걸 더 많이 원해 주십시오. 루가 님만을 위해.”
베인이 서글픈 목소리로 투이나를 끌어당겼다.
결국 식사는 다 식은 다음에야 먹을 수 있었다.
* * *
‘확실히 머리가 어지럽긴 해.’
투이나는 밖으로 나온 다음에야 베인의 충고를 들을 걸 그랬나 약간 후회했다.
‘아냐. 그래도 이 자리는 꼭 나와야 했어.’
사냥이 끝난 뒤 구혼자들이 처음 다시 모이는 자리다.
접견실로 들어가면서 그녀는 시선을 고정하려고 애썼지만 베인을 힐긋 쳐다보고 말았다.
같은 거처에서 나온 두 사람은 시치미를 떼고 따로 이동했다.
아직까지는 둘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 비밀로 지켜졌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투이나는 따로 모여 앉은 사제들을 주의 깊게 살폈다.
지금까지 그들은 성소에서 있었던 일을 공식적으로 다시 언급하진 않았다.
그 뒤로 아르힘이 무언가 행동을 취한 것도 아니니 일단 보류하려는 셈이다.
베인이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머무르셔도 됩니다. 머무르시는 편이 더 기쁩니다. 루가 님이 결정만 하시면 무엇이든 지킬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서야 그녀에게서 떨어지던 베인이 속삭인 내용이었다.
‘아쉬운 마음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베인과 함께 있는 시간은 다른 사건들을 모두 잊을 만큼 강렬했고, 빨리 사라졌다.
구혼 기간이 끝나면 계속 이런 시간이 이어질 거라고 생각하니 황홀할 정도였다.
상념에 잠긴 투이나를 샨이 책상을 쿵, 치며 깨웠다.
“요즘 제대로 나타나지도 않더니 집중력도 잃었나?”
“아, 미안해요. 무슨 얘기 중이었죠?”
“두 번째 시험은 대체 언제 치러질 건지 묻고 있었다.”
‘맞다. 시험이 있었지.’
가끔은 가차 없이 몰아붙이는 샨도 도움이 되었다.
요즘 들어 투이나를 멀쩡한 사람으로 취급해 주는 이가 그밖에 남지 않은 기분이다.
‘얼른 살인자를 찾아야지 안 되겠어. 더 사고가 났다간 베인한테 완전히 병자로 낙인찍힐 거야.’
멀뚱히 앉아 있는 시드룬도 별다른 질문이 없었다.
이미 사람들은 사냥터에서 있었던 일을 완전히 잊은 것 같았다.
겉으로는.
투이나가 살며시 입술을 눌렀다.
“아직 적당한 시험을 찾는 중이에요.”
“그대를 다치게 한 마법사에게서 구혼자의 자격을 박탈할 생각은 없나?”
숨 한번 쉬기 무섭게 샨이 말을 쏘아댔다. 꼿꼿하게 굳은 입매와 달리 눈은 웃는 것처럼 휘어져 있었다.
“그대를 지키지 못한 상인을 추방하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저는 그런 식으로 남편을 결정하지 않아요.”
“그대를 죽이더라도 마음에 들기만 하면 결혼하겠다는 이야기인가?”
묘하게 뾰족한 질문이다.
‘어라, 찔렸나 봐.’
샨이 이상하게 방어적으로 나왔다.
‘역시 샨이 범인인가?’
고개를 갸웃거린 투이나는 그에게 되살아난 생에서 달라질 기회를 제공해 보았다.
“적어도 저를 왜 죽이려는지 이유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결혼할 수도 있겠죠.”
이유를 바치면 결과를 줄 수 있다.
샨이 자세를 바꾸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썩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대담하게 나오는군.”
‘그 반대랍니다.’
투이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불만족스러운 표정이긴 했지만 샨은 더 이상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드룬은 사냥터에서 있었던 사고도 짧게 설명했다.
“다른 물질계를 찾아보겠지만, 다시 사냥을 한다면 짐승을 불러냈던 방법을 쓰지 않는 게 안전합니다.”
“알았다.”
샨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어차피 이번 일로 다시 사냥이 열릴 기회는 물 건너갔다.
‘꼼짝없이 신전에만 머물러야 할 처지가 되었으니 시험에 더 집착하게 될 지도 모르겠어.’
정작 투이나는 아직 두 번째 시험을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고민할 시간도 없었지.’
마침 몸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니 같이 두 번째 시험도 준비해 보면 될 것 같았다.
‘살인한 동기를 알아내려면 뭘 시험해 보면 좋을까?’
생각에 잠긴 투이나가 슬슬 저려 오는 갈비뼈를 문지르다 얼른 손을 뗐다.
베인을 또 걱정시킬 순 없었다.
찰나였지만 따분하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샨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 가뜩이나 힘이 들어간 미간에 짜증이 섞였다.
“필요한 얘기가 끝났다면 그만 파하지. 쓸데없이 모여 있을 셈인가?”
샨이 마치 자기가 연 모임처럼 사람들을 쫓아냈다.
성질을 부리는 그에게 다들 익숙해졌는지 아니꼬운 마음을 침묵으로 잘 둔갑시켰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네.”
예의를 차리느라 사제들도 고생이다.
투이나가 손을 흔들었다.
베인도 곧 일어나 짧게 목례했다.
그와 같은 거처에서 사는 건 일단 비밀이었으니 나란히 돌아갈 수 없었다.
그녀도 짐짓 모른 체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곧장 마법으로 사라질 줄 알았던 시드룬은 자리에 남아 있었다.
‘웬일이지?’
시드룬이 원래 기력 넘치는 사람은 아니지만 어쩐지 평소보다 영 활동량이 떨어져 보였다.
묵묵히 앉아 있는 자세가 좀 멍했다.
‘나한테 볼일이 있는 것 같진 않지만.’
투이나가 시드룬의 자리를 흘긋 거렸다.
‘안 그래도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상태가 저러면 걱정되잖아.’
그대로 방을 나가려던 베인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연인의 직감이었는지.
또 시드룬을 향한 투이나의 모습이 보였다.
분명히 마법사가 투이나와 만난 횟수는 가장 적을 터인데.
“…….”
베인의 눈초리가 가라앉았다.
저걸 단순히 마법사를 향한 호기심으로만 판단할 수 있을까?
그러기엔 과하다.
오만하게 접견실을 나오던 샨이 복도에서 떠나지 못하는 베인을 발견했다.
그에게 서린 감정을 알아차린 샨은 비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질투만큼 추한 감정이 없다.
제법 루가에게 예쁨을 받는 것 같아도 저렇게 질시가 많아서야 남편감으로는 역시 한참 부족하다.
샨이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루가도 고생이 많아.”
“…….”
베인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격하게 바뀌었던 것만큼 그는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어떤 것으로도 그의 미모를 망쳐 놓을 수는 없는 듯했다.
그 장면을 본 샨이 끔찍하게 징그러운 것을 목격한 사람처럼 얼굴을 구겼다.
투이나를 의식한 게 분명한 태도였으니까.
“아주 구역질이 나는군.”
샨이 치를 떨며 멀어져 갔다.
베인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막 투이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시드룬에게 다가갔던 것이다.
“아, 크로퍼드 님!”
그때 접견실 쪽으로 오던 시종 하나가 베인을 알아보았다.
쾌활하게 인사를 건네려던 그녀가 움찔했다. 베인의 얼굴이 평소와 달리 차가웠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움츠러들었다.
“저어, 그, 회의가 끝났습니까?”
“……그렇습니다.”
베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평소 같은 자상함에 시종은 한순간 착각했나 싶었다.
베인은 마음을 가라앉힌 채 물었다.
“루가 님께 무슨 볼일이라도 있습니까?”
“아, 예. 별건 아니고 호위 문제 때문에요.”
“자세하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베인이 자주 쓰는 상냥함을 꺼내 들었다.
그가 소문이 자자한 첫 번째 시험의 주인공, 투이나의 연인이었기에 시종은 아무런 의심 없이 대답했다.
“지금 루가 님 호위들이 근신 중 인건 아시죠? 그런데 호위 하나가 반성을 하겠다는 건지 뭔지 계속 굶고 있다지 뭡니까. 쓰러지면 어차피 사제님들이 치료해야 될 건데 말이죠.”
“……혹시 그자가 아르파인입니까?”
“맞습니다. 잘 알고 계시네요?”
“아르힘에서 그런 행동을 할 만한 사람은 없으니까요.”
베인이 빙긋 말을 넘겼다.
“그 정도 일이라면 굳이 루가 님에게까지 보고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만.”
“흠……. 그런데 그 밥 굶는 호위가 계속 루가 님을 뵈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려서요. 사제님이 일단 얘기나 올려 보라고 하십니다.”
“알 만하군요.”
베인이 중얼거렸다.
시종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가 곧 화사하게 낯빛을 바꾸었다.
“이 문제는 제가 들었으니 루가 님께 직접 전해 드리겠습니다. 두 명 다 기다리면 번거롭기만 할 테니까요.”
“그러시겠습니까?”
자기 일을 대신 해 주겠다는 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시종이 희희낙락하며 꾸벅거렸다.
이제 투이나를 기다릴 명분이 생긴 베인이 복도 기둥에 등을 기대었다. 아치형으로 이어진 창문으로 더위가 쏟아져 들어왔다.
이토록 숨이 턱턱 막히는 건 오로지 날씨 때문이겠지.
베인이 단정하게 목을 조인 단추를 하나 풀었다.
답답했다. 고작 벽 하나를 사이에 뒀을 뿐인데…….
“아직 안 갔네요?”
낭랑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베인은 머리로 치밀던 열기를 그대로 가슴으로 내려 보냈다.
투이나가 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를 본 베인의 목소리가 저절로 부드러워졌다.
“부탁받은 일이 생겨서요.”
“으음? 베인한테 부탁할 일이 있다니 신기하네요.”
“사실 루가 님의 일인데 제가 살짝 가로챘습니다.”
베인이 웃음기를 섞어 말했다. 투이나가 즐거워 보여서 기뻤다.
그녀가 기쁜 상태로 있지 않으면 안에서 마법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기어코 물어보고야 말 것 같았다.
“아침에 루가 님이 호위들을 걱정하던 게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근신 중이지만 루가 님이 직접 찾아가 보시는 게 좋을 듯하여…….”
“네, 그래요!”
투이나가 냉큼 눈을 번쩍였다.
“안 그래도 가 보려고 했어요! 일단 호위분들부터 만난 다음에 근신을 풀어 달라고 해야겠죠?”
“……사제님들이 정해 준 기간이니 지키는 게 좋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는 동의한 적 없는걸요.”
투이나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래도 베인 말대로 그냥 무시해 버리면 안 되겠죠. 다음 면담 때 정식으로 요청해 볼게요.”
“그리하십시오.”
베인이 순순히 답했다.
그는 이제 팔랑팔랑 걸어가는 투이나의 뒷모습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끌어안고만 싶었다.
“…….”
그녀의 뒤에서 베인이 마른세수를 했다.
정말 묻고 싶지 않았는데 호위 얘기에 기어이 빗장이 내려갔다.
“마법사는 돌아갔습니까?”
“아아, 네.”
“둘이서 무슨 얘기를 하셨습니까?”
멈칫.
투이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베인은 이제 더 속내를 감추고 싶지 않았다.
“예. 저 질투했습니다.”
“네? 아니, 음, 그게……. 네에?”
살면서 이보다 더 당황해 본 적 없던 투이나가 허둥거렸다.
베인은 얌전히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도대체 왜…… 질투를……. 그것도 하필 시드룬한테요?”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으로는 잘 와닿지가 않습니다.”
베인이 짐짓 슬프게 말했지만 이미 그의 기분은 좋아지고 있었다.
시드룬에게 질투할 줄은 정말 상상치도 못했다는 반응이 연인으로 고려한 적도 없다는 걸 증명했기 때문이다.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물론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테지만…… 저는 아직도 의심이 두렵습니다.”
“절대 없죠.”
투이나가 무심코 강력하게 동의해 버렸다.
그는 만족했다.
다만 한 가지 부작용이라면 그녀가 혹시 베인이 어디 아픈 게 아닌지 걱정스레 그를 올려다보았다는 것뿐이다.
“베인,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밥은 잘 챙겨 먹었죠?”
“오늘 아침에 저와 같이 드셨잖습니까.”
베인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투이나도 덩달아 조곤조곤 말했다.
“하긴 그랬죠……. 갑자기 그런 소릴 하니까 놀랐잖아요. 어디 아픈 줄 알았어요.”
“아파야만 질투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프면 외로움을 타니까요.”
투이나의 눈에 담긴 걱정이 베인이 누리던 은밀한 기쁨을 살짝 깎아냈다.
“……제가 외로워하면 곁에 계셔 주실 겁니까?”
“물론이에요.”
투이나가 가던 걸음까지 멈추고 베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제가 없어도 베인이 외로울 일이 없는 게 더 좋아요. 왜 일부러 베인이 힘들 상상을 하겠어요.”
그리고 살짝 주위를 살피더니 발돋움을 해 그를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감기는 체온에 그는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녀가 귓가에 속삭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베인은 언제까지나 사랑받을 거예요.”
아아, 나의 루가여…….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지는 느낌에 베인이 투이나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믿습니다.”
목이 잠겼다.
들킬 걸 걱정한 투이나는 포옹을 짧게 끝냈는데, 그게 오히려 베인의 욕심에 불을 당겼다.
이만한 애정을 받고도 부족했다.
한참 부족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기조차 아까운 그녀가 너무도 쉽게 마음을 나눠 주는 루가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투이나는 이번에도 너무도 태연하게 말했으니까.
“자, 그럼 호위분들한테 갈까요?”
그 말에 베인은 거세게 조여 오는 뱃속을 외면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 * *
“루가 니임!”
투이나가 노크를 하자마자 호루니가 뛰쳐나왔다.
그녀가 거의 허리에 매달리듯이 달려들었기에 투이나가 헉하고 격한 신음을 토해냈다.
‘갈비뼈가……!’
투이나를 따라온 베인이 더 놀라 그녀를 밀쳐냈다.
“떨어지십시오! 루가 님의 부상이 아직 낫지 않은 걸 모르십니까?”
“허, 헉! 잊, 잊었습니다. 죄송해요!”
그제야 호루니의 손이 팍 떨어졌다.
정신적으로 아르힘을 만나고 올 뻔한 투이나가 가까스로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요. 얼마나 반가웠으면 그랬겠어요.”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루가 님.”
호루니가 울먹울먹한 목소리를 내놓았다.
“무사하신 걸 보니 마음이 놓여요. 스카차도 같이 이만저만 걱정한 게 아니에요.”
“근신 중인데 서로 만날 수 있었어요?”
“옆방이라 소리가 들렸습니다, 루가 님. 호위들은 같은 거처를 쓰니까요.”
“아! 그럼…….”
투이나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녀가 누구의 이야기를 하려는지 금세 알아차린 호루니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라카인은 계속 조용했습니다.”
호루니가 심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대화가 다 들리는지 옆방에서 쿵쿵 소리가 났다.
“루가 님? 루가 님 오셨습니까?”
“네, 저예요!”
“다행입니다, 루가 님! 이젠 다 나으셨습니까?”
스카차의 목소리가 벽 너머로 웅웅거렸다.
“거의요!”
대답하다가 뭔가 이상해서 투이나가 물었다.
“밖에서 문을 잠가 놨어요?”
“아니요. 나갈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호루니가 입술을 꼬물거렸다.
“저도 그렇고요. 어쨌든 벌은 벌이니까요. 괜히 멋대로 나갔다가 근신을 연장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랬군요. 근신은 최대한 빨리 풀어 줄게요. 갇혀 있느라 갑갑하지는 않아요?”
“그럼요.”
“저, 루가 님?”
스카차가 벽에 바짝 붙었는지 아까보다 선명한 소리가 났다.
“괜찮으시면 라카인을 한번 살펴봐 주시겠습니까? 옆에서 들리기로 계속 식사를 안 한다고…….”
“네에?”
투이나의 목소리가 올라가자 당황한 호루니가 고개를 돌렸다.
“일부러 말씀 안 드리고 있었는데 저 바보가…….”
“얘기를 안 하려고 했어요?”
“루가 님이 아직 다 낫지도 않으셨는데 걱정하실까 봐요……!”
대화를 듣던 베인이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비스듬히 팔짱을 꼈다.
“상황이 그렇다면 빨리 확인해 보는 게 좋겠군요.”
“호루니, 걱정해 줘서 고맙지만 정말이지 저는 여러분도 안전해야 돼요!”
호루니의 양손을 세차게 흔든 투이나가 서둘러 방을 나왔다.
‘아직도 벽에 붙어 있을 스카차에겐 좀 미안하지만, 세상에, 굶는다니!’
절대 그건 두고 볼 수 없었다.
급한 마음에 투이나는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열었다.
“들어갈게요, 라카인!”
문을 열며 투이나가 예상했던 건 자발적인 굶주림으로 쓰러져 가는 라카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단단한 몸과 마주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수문장처럼 서 있었다. 누구도 지나갈 수 없도록 막아 선 그에게서 꽉 메인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전혀 굶주리지도, 초췌해 보이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오롯이 기다리던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려는 단 한 가지 목적만이 존재했다.
‘정말 이 사람이 내가 아는 라카인이라고?’
투이나는 그가 그대로 쏟아지는 착각이 들었다.
그림자로 형상을 빚어 놓은 존재가 그늘에서 걸어 나온 것처럼, 뚜렷한 존재감에도 불구하고 금방 허물어질 듯했다.
그리고 투이나를 확인한 라카인은 정말로 무너져 내렸다. 천천히 바닥에 이마를 누르는 방식으로.
“오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갈라진 숨소리가 목을 긁는 소리에 뒤늦게 정신이 돌아왔다.
‘맙소사, 물도 안 마신 거야?’
“정말 굶고 있었어요? 이러지 말고 일어나요!”
“루가 님이 오실 때까지 그것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라카인은 바닥에 댄 이마를 들지 않았다.
그나마 옛날처럼 마구 찧어대진 않아서 다행이다, 하고 안심하기 무섭게 라카인은 더 끔찍한 말을 내놓았다.
“저는 루가 님을 죽이려 한 죄인입니다.”
“제발 그러지 말아요. 그날 제가 다친 건 라카인 잘못이 아니라…….”
“아닙니다.”
라카인은 감히 투이나의 말을 끊어가면서까지 부정했다.
“그날 지키지 못한 죄를 말씀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투이나가 멈칫했다.
라카인은 이제 곧 쏟아질 분노의 홍수를 기다리며 진흙탕으로 머리를 뭉갰다.
“저는 루가 님을 암살할 계획이었습니다.”
그의 말이 가슴을 파고들 때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네?”
소리를 내 보려고 했지만 말이 되지 못한 짧은 마디만 흘러나왔다.
‘라카인이 나를…… 뭘 한다고?’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그의 뒷덜미가 파문을 더욱 커지게 했다.
머리를 조아린 자세는 지금 당장이라도 목을 베어 달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라카인은 주먹을 쥔 손아귀로 비명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의 손톱이 무자비하게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루가 님을 해친 짐승을 불러낸 것도 의도된 행동이었습니다. 혼란을 틈타 화살로 루가 님을 쏠 예정이었습니다.”
투이나는 여전히 굳은 채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라카인은 처참한 심정으로 마지막 말까지 토해놓았다.
“그리고 저는 그날 루가 님을 쏘았습니다.”
그의 자백에 가장 먼저 분노를 인지한건 투이나가 아니라 베인이었다.
“감히, 감히 그런 짓을 하고도 루가 님을 불러내다니……!”
“베인.”
투이나가 저도 모르게 베인의 팔을 붙잡았지만 그녀조차도 왜 붙잡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해가 안 가.’
그는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왜 화가 안 나지?’
분명히 커다란 충격이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믿던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지 않은가. 심지어 계획뿐만 아니라 이미 실행에 옮기기까지 했다.
살아남은 건 단지 운이 좋아서였을 뿐.
‘그게 정말 운일까?’
전신의 감각이 둔하게 느껴졌다.
투이나의 손이 닿자 베인은 황급히 그녀를 끌어당겼다.
라카인이 당장이라도 일어나 그녀를 또 습격할 것처럼 느낀 모양이었다.
“물러나십시오, 루가 님. 자기 입으로 자백한 자가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을지 모릅니다.”
베인은 멍하니 있는 투이나가 대단한 충격에 빠진 줄 알고 부둥켜안았다.
어떻게든 라카인에게서 떨어트리려는 움직임에 따라오는 그녀가 미친 듯이 안쓰러웠다.
그러나 투이나는 단지 생각이 좀 필요할 뿐이었다.
많은 감정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씻어 내리자 딱 한 가지 의문만 오롯이 남았다.
언제나, 최후에 남아 있는 의문이.
“왜 내게 그 사실을 말했죠?”
처음으로 라카인의 몸이 떨렸다.
기대하지도 않았고 존재하지도 않을 줄 알았던 희망이 이토록 거세게 자신을 흔들 줄은 몰랐다.
투이나는 아직 그를 놓지 않았다.
세차게 뛰는 심장 박동이 턱뼈를 후려치고 머리까지 울렸다.
그는 제발 해야 할 말이 틀리지 않길 온몸으로 빌었다.
“……루가 님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
투이나는 작게 입을 벌렸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베인은 암살 시도를 들었을 때보다 더 큰 불안을 느꼈다.
불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압도적인 감정이…….
베인은 투이나를 끌어안고 소리쳤다.
“밖에 아무도 없습니까? 루가 님을 암살하려 한 자입니다! 당장 이자를 끌어내십시오!”
그의 고함 소리에 바깥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베인은 그들이 더 빨리 들어오지 못해서 화가 났다.
투이나를 잃을 뻔했다는 사실에도 화가 났고, 뻔뻔하게 그녀를 불러낼 생각을 한 아르파인에게도 화가 났다.
그러나 가장 그의 가슴을 불태우는 건 저 가증스러운 놈이 앞으로 영원한 루가의 분노와 저주를 받지 않으리라는 사실이었다.
‘왜 당신은 이런 순간마저도 루가이신 겁니까?’
그대로 투이나를 놓치면 죽을 것만 같았기에, 베인은 그녀의 가장 인간다운 부분에 집착했다.
베인이 투이나의 육체를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제가 곁에 있습니다, 루가 님. 제가 있겠습니다.”
쉴 새 없이 속삭이는 목소리에 투이나가 처음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라카인을 붙잡으러 온 무사제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그녀의 시선이 다시 옮겨 가고 말았다.
“무슨 소란입니까!”
“암살자라니요!”
“저자가 방금 루가 님을 죽이려 했다 실토했습니다.”
베인의 짙푸른 눈동자가 증오심으로 불타올랐다. 적을 지목하는 쾌감이 상상 이상으로 그의 관자놀이를 짜릿하게 했다.
들어온 무사제들은 당황했다.
“저건 루가 님의 호위가 아닙니까?”
“저자가 어찌…….”
“본인의 입으로 털어놓은 이야기까지 의심하실 겁니까?”
베인의 목소리에 한기가 서렸다.
당황하던 무사제들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라카인에 이어 충격을 받은 투이나까지 돌아보고서야 확신했다.
“끌고 가겠습니다.”
“일어나!”
무사제들은 라카인이 반항할까 봐 몹시 긴장하며 다가갔다. 하지만 그는 끄는 대로 움직였다.
라카인은 감히 투이나가 있는 쪽을 쳐다보지도 못했지만, 그의 내면은 간절하게 희망을 찾고 있었다.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고 외치는 머리에게 마음이 부질없이 되뇌었다.
하지만 아직 루가 님이 자신을 잡고 있다고.
아직은…….
‘이대로 보낼 수 없어.’
투이나가 가까스로 라카인을 붙잡기 위해서 손을 들었다.
쳐다보지도 못하는 라카인과 반대로 그녀는 라카인만 응시하고 있었기에 그의 손바닥에 흐르는 피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를 부르기 전에 베인이 먼저 사로잡았다.
“루가 님.”
베인이 투이나를 돌려세웠다.
결코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절박한 목소리가 무엇보다도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투이나는 아름다운 연인의 얼굴과 마주했다. 그가 드러낸 감정이 어찌나 강렬한지 순간 목이 꽉 막혔다.
“가지 마십시오.”
“…….”
“그는 내버려두어야 할 자입니다.”
베인은 힘을 주어 투이나를 끌어안았다.
이대로 그녀가 포옹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죽을 생각이었다.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 죽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투이나는 절박함으로 요동치는 등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토록 자신을 필요로 하는데…….
‘……외면할 수가 없어.’
가슴이 욱신거렸다.
‘아주 잠깐만, 지금만이라도…….’
투이나가 머뭇거리던 팔을 그의 등에 둘렀다. 다정하게 끌어안아 주는 몸짓에 베인은 전신이 저릿거렸다.
그녀는 아직 제 연인이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암살이라니, 무슨 소리입니까! 아무나 말 좀 해 주십시오!”
“루가 님! 루가 님!”
쿵, 쿵, 쿵.
호위들이 갇힌 방에서 다급하게 문을 두드려댔다. 어렴풋이 들려온 대화가 그들을 초조하게 했던 것이다.
투이나는 베인을 안고 있는데도 처음으로 불안해졌다.
끌려 나간 라카인이 당장 어떻게 되지 않을 거라곤 알았지만 일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느낌이 너무도 선명했다.
더 이상 위로가 필요해지지 않는 순간이 모퉁이 너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 * *
회색빛으로 물든 천막을 끌어내리는 걸 보고 있던 샨이 인기척을 감지해냈다.
드물게 감정을 드러낸 채 달려온 하인이 그 앞에서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
그가 가져온 소식을 들은 샨은 어떤 감정 변화도 나타내지 않았다.
다만 만족스럽게 턱을 두드린 손가락이 유일하게 그의 속내를 짐작하게 했다.
“다음 수가 왔군.”
* * *
라카인이 투이나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소식은 신전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라카인은 당장 죄인이 되어 신전에 얼마 없는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일은 이때부터 심각해졌다.
사제들은 당연히 암살의 배후로 샨을 지목했지만, 그는 이것이 라카인의 단독 범행이라 주장했다.
심지어 샨은 라카인이 저지른 죄를 아르파 식으로 처벌해야 하니 죄인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당연히 신전은 동의할 수 없었다.
라카인은 모든 암살 계획을 순순히 털어놓았지만 샨이 암살을 지시했냐는 물음에는 입을 다물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샨의 요구는 점점 기세등등해졌고, 신전은 간신히 문제가 터지지 않도록 붙들어 놓는 데 급급했다.
그들을 중재할 투이나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투이나는 이번에도 문 앞을 가로막은 베인을 보면서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나가야 해요.”
“아직 더 쉬셔야 합니다.”
베인의 눈가가 붉었다.
그는 요즘 들어 계속 밤늦은 시간까지 일에 매달렸다. 낮 시간은 온전히 투이나에게 쓰고 있었으니까.
라카인이 끌려가고 난 직후 투이나는 기력을 잃어버리고 또다시 쓰러졌다.
정말이지 그녀는 원래 자주 기절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몸이 어쩌다가 이렇게 약해졌지?’
움직일 때마다 강해지는 통증은 별거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통증이 최고점을 찍을 때 자꾸 기절한다는 점이다.
기절할 만큼 아파서가 아니라, 멀쩡한 정신이 강제로 끊겼다.
‘생각에 집중하려고 하면 자꾸 무언가가 가로막는 것 같아.’
투이나가 지금도 스멀스멀 올라오려는 통증을 손으로 억눌렀다.
정말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의 몸 어딘가에 다른 사람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설마 얼룩병이 악화됐나?’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면 얼룩이 머리 쪽으로 이동했을 수도 있었다.
끊임없이 상처를 긁어대던 사람들을 떠올린 투이나가 팔을 꾹 움켜쥐었다.
‘여기까지 와서 이러지 마.’
요 며칠간 반복적으로 투이나의 상태를 지켜본 베인은 거의 미치기 직전이었다.
투이나의 발이 침대 바깥으로 조금만 벗어나도 다시 밀어넣을 정도였으니.
“누워 계십시오.”
베인은 두꺼운 황금빛 커튼을 다시 닫았다.
안전 때문에 한여름에도 창문을 닫아 둔 방은 숨 막히게 더웠지만, 베인은 상단에서 끌어 모은 온갖 물건으로 열기를 식혔다.
끼니마다 귀한 얼음을 가져오는 건 물론, 부채며 수정 물 항아리며 냉기 마법이 걸려 있는 물건까지 어렵게 들여왔던 것이다.
덕분에 투이나가 있는 방은 하루 종일 시원했지만, 그녀는 시드룬에게 마법의 원리를 대충 배운 터라 다른 의미로 한기가 돌았다.
‘제발 저기 들어 있는 게 마법사의 머리카락이나 손톱 같은 안전한 부위여야 할 텐데.’
마법사의 육체로 마법을 쓸 수 있다는 말을 들은 뒤 험악한 상상이 너무 쉬워졌다.
상상 때문에 다시 통증이 올라왔다.
투이나가 정말 살짝 찌푸렸는데도 베인이 곧장 다가왔다.
“역시 나가시기엔 한참 이르십니다.”
“일을 하나도 못 하고 있는데 이르다니요. 게다가 바깥의 소식은 계속 들어선 안 된다고…….”
말이 격해지던 투이나가 얼굴을 찡그렸다. 또 한 번 제 의지와 상관없이 기절할 뻔한 것이다.
베인이 당장 달려와 투이나를 눕혔다.
“조금만 마음이 격해져도 이리 되시는데 제가 어찌 안심할 수 있겠습니까!”
“저 정말 괜찮아요.”
“제발 쉬어 주십시오.”
베인이 그녀를 껴안다시피 같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투이나는 순간 긴장했으나 베인은 그녀를 침대에 고정시켜 두는 일 말고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초췌해진 그의 눈 밑이 마냥 부드럽던 뺨에 까칠하게 드리웠다.
묘하게 자극적인 광경이었다.
그가 투이나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는 지친 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쓰러지실까 무섭습니다.”
“다시 일어날 거예요.”
그 말에 베인이 울컥 원망스러운 표정을 지어서 심각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작은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진지한 대답이었어요.”
“루가 님이 이렇게 몸을 함부로 쓰는 분인 줄 진작 알았더라면 사람을 보냈을 것입니다.”
“도와줄 사람을요?”
“예. 루가 님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많이 보낼 것입니다.”
“전 도와주는 사람 많은걸요. 베인이 더 걱정이에요.”
그와 함께 지내면서 알게 된 건 막대한 업무량뿐이었다.
“저도 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습니다.”
베인이 울적하게 말했다.
“어차피 진짜 중요한 일은 신전으로 가져올 수도 없는데 누이가 그냥 절 괴롭히는 것 같거든요.”
그가 옆으로 몸을 돌렸다.
“정작 괴로운 사람은 따로 있는데도 말입니다.”
짙은 청록색 눈동자에 그녀가 담겼다.
“아무 데도 가지 말아 주십시오.”
이러니까 매번 나가려다가도 그의 목소리와 애절함에 붙잡혀 버린다.
라카인 사건 이후로 그는 극도로 불안해했다. 그가 간절히 말하면 투이나의 마음은 언제나 약해졌다.
게다가 요 며칠 베인은 투이나를 대신해 샨과 싸우는 역할을 자처했다.
왕을 버거워하던 사제들은 두 팔 벌려 베인을 환영했다.
샨은 물론 그를 무시하고 투이나만 찾아댔다.
베인이 유난히 투이나의 외출에 민감해진 건 샨이 유들유들하게 그녀를 불러내는 꼴을 계속 보아 왔기 때문이었다.
「루가가 이제 내 얼굴을 보는 것도 무서워하나 보지?」
베인은 말을 삼켰다.
도발에 넘어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이를 내보일 만큼 멍청한 인간이 아니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도 투이나는 계속 자신이 멀쩡한 것처럼 행동하려고 했다.
정말 건강하던 투이나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기절했는지. 그때마다 베인의 수명이 몇 년씩 깎여 나갔다.
투이나도 그걸 알고 있었지만…….
“영원히 이 방에 머무를 순 없어요.”
“왜 아니 되겠습니까?”
베인이 속삭였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사람을 붙들어 놓는 눈동자에 투이나는 거의 넘어갈 뻔했다.
“……고통은 아르힘 님께 가면 사라질 거예요.”
“그분께선 이미 한 차례 루가 님을 치료하셨습니다.”
베인은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그런데도 남아 있는 문제라면…….”
“분명 마법이겠죠.”
“……루가 님이 안 계시니 마법사는 계속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베인이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알렸다.
아직도 죽어 가던 순간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만 떠올리면 팔에 힘이 들어갔다.
“지난번에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는데 다시 그자에게 가는 건 왕보다 몇 배는 더 위험한 일입니다.”
“사실은 아르힘 님께 갈 생각이었어요.”
베인의 얼굴에 금세 파문이 일었다.
아무리 그녀를 보호한다지만 루가가 신에게 가겠다는 일까지 막을 순 없었다.
베인이 쓰게 웃었다.
“제가 따라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하신 말씀이군요.”
베인이 성소에 들어간 뒤로 사제들은 그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라카인 사건까지 터진 뒤로 투이나의 의지를 베인이 대행하고 있었으니.
감이 빠르고 눈치가 없는 자들이 벌써 루가의 직위가 승계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소문을 돌릴 정도였다.
투이나는 그런 헛소문은 개의치 않았지만, 베인은 작은 틈이라도 용납할 수 없어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저를 의심하는 건 아니시지요?”
“전혀요.”
“그거면 됐습니다.”
베인이 투이나의 눈썹과 눈 사이에 입 맞췄다.
요즘 그는 남들이 보통 입술을 가져다 대지 않을 자리에 흔적을 남기는 일에 열중했다.
“정말 보내 드리고 싶지 않지만……. 꼭 아르힘 님만 만나고 돌아오셔야 합니다.”
“금방 돌아올게요.”
투이나는 베인을 안심시켰다.
그래도 불안했는지 베인은 몇 번 더 같은 자리를 입술로 누른 뒤에야 몸을 비켜 주었다.
“제이드를 데려가십시오. 어차피 성소까지 가진 못하겠지만, 그때까지 루가 님을 호위할 것입니다.”
바깥에서 대기하던 여자가 허리를 숙였다.
그녀는 과묵한 인상이었는데, 보자마자 라카인이 떠올랐다.
‘괜찮을까.’
투이나가 라카인을 생각하자마자 거품이 차오르듯 순식간에 고통이 갈비뼈로 때렸다.
‘으윽……. 이젠 걱정도 하지 말라는 거야?’
아직 베인이 지켜보고 있었기에 투이나는 간신히 표정을 관리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네. 왜 생각만으로도 고통이 밀려오는 거야? 아르힘 님이 이유를 알려 주시면 좋겠는데…….’
통증을 무시한 투이나는 제이드에게 부축을 받아 가며 성소로 향했다.
‘세상에, 벌써 한여름이잖아.’
계속 서늘한 방에서만 지내다 보니 바깥이 이토록 덥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내가 베인의 방에서 그렇게 오래 지냈나?’
계절이 새삼 낯설었다.
투이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복도를 돌아 나가자 곧 성소가 있는 언덕이 보였다.
‘어?’
시력이 좋은 투이나가 살짝 눈을 찌푸렸다. 하얀 종탑 위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아르힘 님?’
종탑 위쪽으로 자그마한 인영이 부드럽게 흰 벽을 통과해서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투이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르힘을 많이 보아 왔지만 실제로 성소에 드나드는 모습은 처음 보았던 것이다.
징검다리를 건너듯 가볍게 통통 튀어간 소년이 허공을 밟았다.
기분 탓일까.
떠나기 전에 잠깐 이쪽을 보고 웃었던 것 같다.
장난스럽게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소년의 모습은 곧 사라졌다.
‘아르힘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신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찾아간다.
투이나는 잠깐 혹시 모를 사고를 걱정했다.
“루가 님?”
그녀가 제자리에 멈춰 서 있자 제이드가 주의를 끌었다.
“괜찮으십니까? 돌아갈까요?”
“아, 괜찮아요.”
베인이 붙인 사람답게 제이드는 여차하면 투이나를 도로 데려갈 것처럼 굴었다.
‘어쩌지? 아르힘 님은 나가셨는데.’
신이 없는데 성소에 들어가서 기다릴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어렵게 나왔는데 아무것도 못하고 돌아가긴 싫었다.
제이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투이나가 살짝 방향을 틀었다.
“길을 잘못 들었네요. 따라오세요.”
제이드는 아무 의심 없이 따라갔다.
투이나는 성소의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감옥 앞을 지키던 무사제 둘은 투이나를 보고 지나치게 깜짝 놀랐다.
“여길 어떻게 오셨습니까?”
“계속 칩거 중이시라 들었는데요.”
“짬을 냈어요.”
최대한 멀쩡해 보이려고 그녀가 가볍게 대답했다.
이쯤 되자 제이드도 슬슬 상황을 눈치 챘다.
“성소로 오신 게 아닙니까?”
“네. 볼일이 바뀌어서요.”
제이드는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지만 여기까지 온 뒤라 말리기엔 너무 늦었다.
벌써 무사제들이 상단 사람인 제이드를 미심쩍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쪽은 누구십니까?”
“제이드라고 합니다.”
“베인이 붙여 준 호위예요. 잠깐 안으로 들어가 봐도 될까요?”
투이나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무사제들은 난색을 표했다.
“글쎄요. 사제님들이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뭐, 루가 님은 사제님들보다 위시니까…….”
“괜찮겠지요?”
무사제가 철그렁 열쇠를 꺼냈다.
썩 좋은 방식은 아니지만 어쨌든 문은 열렸다.
“안은 어둡습니다. 발밑을 조심하세요.”
“고마워요. 그리고 되도록이면 저 혼자 들어가고 싶네요.”
따라 들어오려던 호위와 무사제가 멈칫했다.
“혼자 가시게요?”
“위험합니다, 루가 님.”
투이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위험하다뇨? 갇혀 있지 않나요?”
“아니, 뭐, 갇혀 있긴 합니다만…….”
“그럼 걱정할 게 없네요.”
투이나가 납작한 등잔을 들어 올렸다. 타들어간 심지를 다시 꼰 투이나가 불을 붙였다.
“그와 단둘이 나눌 얘기가 있습니다.”
화륵.
불이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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